< -- 925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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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위야의 머릿속에 그동안 이디나가 저지른 것으로 짐작되는 일들이 차례대로 스쳤다. 내세울 증거는 없지만 저 아이는 장남인 오빠 나딘을 죽인 듯했고, 얼마 전 있었던 동생 킴메리의 죽음에도 관련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마구스의 자녀들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 서로끼리 벌이는 살인극은 사람들 눈앞에서 칼부림을 벌이는 식의 한심한 방법이 아닌 한 지금껏 도태의 한 방법으로 묵인해온 것이 전통이었다. 이디나가 저지른 살인극을 설사 대신관이 알았다 해도 ‘멍청하게’ 들통 난 것이 망신거리가 될지언정 어머니까지 함께 처벌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가문 내 일은 아닌 듯하군요. 이거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큰일인 것 같은데요.”
아트위야가 계속 턱을 만지작거렸다. 살름이 정색을 하며 이디나 편을 들었다.
“저 애가요? 이번 제련소도 공기(工期) 맞춰 잘 열었고, 저애가 운영하던 시설들도 경영 실적이 조합에서도 제일 괜찮다고 들었는데? 아버지 신임까지 얻었으니 뭐 하나 사고 칠 이유가 없잖아요.”
아트위야와 살름 모두가 궁금해 하고 있는 가운데, 네코의 지루하고 빤한 내용의 연설이 끝나고, 이번엔 이디나가 창백한 얼굴로 연단에 나섰다.
“그동안 이곳의 완공을 추진했던 사람으로서…… 오늘 와 주신 내빈 분들께……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
첫 마디를 끝낸 이디나는 구석 안 보이는 곳에 서 있는 아버지 아스탈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차갑게 굳은 표정의 아스탈은 딸의 애타는 시선을 외면하며 옆에 앉은 다른 사람과 뭐라 귀엣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디나는 하는 수 없이 연설을 이었다.
“이곳의 마무리 작업에 참여했던 것을 좋은 추억으로 남기고……전 이제 여기서 손을 떼고 이제 다른 곳에서 다시 제 역할을 찾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제게 주셨던 믿음을 제 후임자가 될 사람에게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디나가 다시 네코를 손으로 가리키며 억지로 웃었다.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 새파랗게 젊은 경영인이 아직 연설에 서툴러서 그러려니 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마지막 연설로 역할을 다한 이디나는 뒤따라온 헤네티들의 매서운 눈초리 속에서 연단을 비워줘야 했다. 지루한 연설을 듣고 난 사람들은 다시 만찬과 사교에 열중하며 관심을 끊어버렸다.
“여기서 손을 뗀다고? 허, 말도 안 돼.”
아트위야가 고개를 저었다. 사업상 이디나와 유독 협상할 일이 많았던 그는 교단 내의 다른 누구보다 이디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좋아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지만― 아스탈이 젊은 이디나를 그를 과감하게 제련소장으로 삼았을 때도 사람 제대로 본 것 같다며 내심 탄복했던 터였다.
“솔직히 저애만한 적임자가 없는데 누구한테 맡기시겠다는 거지?”
“아까 보니 네코 그 녀석 같던데요, 아트.”
“맙소사, 저 뺀질이 놈 아는 건 셔틀하고 자동차뿐이요. 아마 제련소하고 제철소 차이가 뭔지도 모를걸요.”
아트위야가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거 뭔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니까.”
아트위야가 망원경을 꺼내어 이디나가 사라진 곳을 계속 응시했다. 연단에서 끌어내려진 이디나는 헤네티들에게 두 팔이 붙들린 채 2단계 건설공사가 아직 진행 중인 옆 현장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거 뭔가 사단이 나는 것 같은데.”
아트위야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살름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그리고는 이디나가 사라진 곳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니 가려면 혼자나 가지 나는 또 왜…….”
“그 큰 덩치 무서운 길 갈 때 아니면 뭐에 쓰려고요? 닥치고 좀 따라와 봐요.”
얼떨결에 손이 잡힌 살름은 이번에도 아트위야에게 질질 끌려 어두컴컴한 공장 뒷골목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헤네티들에게 끌려가던 이디나가 멀리 어디선가 들려온 어머니 나키아의 비명소리에 놀라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정상 가동도 시작하지 않은 공장의 뒷길은 다니는 사람들도 아무도 없어 을씨년스러웠다.
“빌어먹을! 시키는 거 다 했잖아! 시키는 대로 연설도 했고 사고도 안 쳤는데 왜 엄마를 안 풀어주냐고!”
이디나가 악을 썼다. 그는 이미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었지만 죄 없는 엄마까지 이 구렁텅이에 끌어들이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곧 풀어드릴 겁니다. 지금 따님 소식에 놀라 저러고 계실 뿐입니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온 쿠마르가 이디나에게 까딱하니 고개를 숙였다.
“언제!”
“곧이요.”
쿠마르가 씨익 웃으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대체 날 어디로…….”
언성을 높이려는 이디나의 입을 헤네티가 갑자기 확 틀어막았다.
“잠깐, 누가 따라온다.”
헤네티들이 무기에 손을 대며 뒤로 휙 돌아섰다.
“이봐, 이디나. 어딜 그리 바쁘게 가나.”
하늘거리는 하얀 원피스 자락과 푸른빛과 황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에는 거구의 살름까지 성큼성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현신들의 출현에 당황한 쿠마르가 이디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머님께서 먼저 가 계시니 쓸데없는 생각은 접으십시오.”
이디나를 끌고가던 두 헤네티들이 일단 팔을 놓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지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새 아트위야가 양 손에 펀치 잔을 들고 건들거리며 다가와 이디나에게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이봐, 나한테는 일언반구도 없이 멋대로 자리를 떠나다니, 해도 너무하잖나. 지금 자네 컴플렉스하고 내 공장들이 추진 중인 계약이 몇 건인지 알기나 해?”
잔을 받아든 이디나가 헤네티들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전근이 결정되어서요. 내일부터 모두 찾아뵙고 인사드릴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전근가는데? 제련소만 그만두는 건가? 설마 광산도?”
“다 그만뒀습니다. 그런데……웬일이시죠.”
“웬일은 웬일이야. 지금 내 코가 석자가 되게 생겼는데.”
눈치 빠른 아트위야는 대답을 하는 이디나의 얼굴에서 흐르고 있는 식은땀과 거친 숨소리, 공포를 이미 읽어내고 있었다.
“그저께 우리 제철소하고 그쪽 광산하고 체결한 계약 있잖아. 그쪽 견적을 다시 보니까 내역이 하나도 안 맞아. 우리가 준 발주서를 제대로 보긴 한 거야?”
“예?”
이디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기억에 아트위야의 제철소와는 근 며칠 계약이 한 건도 없었다.
“자네 후임자랑 얘기할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잘못 작성한 사람이 직접 확인하고 고치는 게 순리 아니겠어. 그러니까…….”
가방을 뒤적거려 서류와 필기구를 꺼내든 아트위야가 쿠마르와 헤네티들에게 좀 떨어지라며 눈짓을 보냈다.
“이봐, 우리 조용히 사업 얘기 좀 하자고. 언제까지 알짱거릴 거야.”
아트위야의 짜증에 쿠마르가 얼른 헤네티들에게도 물러서라고 눈짓했다.
“죄송합니다. 말씀 나누십시오.”
그들은 이디나에게서 적당히 떨어진 골목으로 얼른 모습을 감추었지만 어차피 이디나가 달아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아트위야가 내용도 없는 텅 빈 계약서 서식을 내밀며 버럭 짜증을 냈다.
“이 발주 내역 좀 봐봐, 이 따위로 해놓고 가면 우리도 곤란하다고.”
아트위야는 그새 서류에 펜으로 재빨리 글을 썼다.
- 대체 무슨 일이냐. -
“죄송합니다. 이 내역은 바빠서 제가 직접 확인을 못 했습니다.”
이디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서류에 답글을 썼다.
- 제발 도와주십시오. 죽게 될 것 같습니다. -
이디나는 서류 위에 몸을 기울이는 척 하다가 손에 들고 있던 펀치잔을 바닥에 뚝 떨어뜨렸다. 쏟아진 과일 펀치가 아트위야의 치맛자락에까지 얼룩을 남겼다.
“이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디나가 젖은 바닥에 급히 무릎을 꿇고 아트위야의 신발을 닦고 부서진 유리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단 10초, 1분이라도 이곳에서 시간을 끌며 아트위야와 대화를 이을 수 있다면 무릎을 꿇는 정도를 떠나 그의 신발에 입이라도 맞출 참이었다. 그런 눈치를 챈 아트위야도 얼른 쪼그려 앉아 그와 함께 신발을 털며 아주 작은 소리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황제와 내통했다는 누명을 썼습니다. 도와주시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뭐?”
창백해진 아트위야가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쿠마르와 다하카르 헤네티들이 여전히 어둠 속에서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둘 사이를 살피고 있었다.
“황제를 만나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다가 작전을 함께 계획했던 네코 마구스 손에 누명을 썼습니다.”
아트위야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빌어먹을, 괜히 따라왔네.’
그는 네코가 무슨 심산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디나가 억울하게 물려들었을 수 있다는 것까지 직감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쓸데없이 나서서 이디나를 보호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됐어, 이게 어떤 신발인지 알기나 하냐. 빌어먹을.”
아트위야는 더러워진 신발에 화가 난 척 이디나를 거칠게 밀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은 얘기는 나중에 해.”
거절 의사를 분명히 전달한 아트위야는 이 위험천만한 필담을 서둘러 접으려 했다. 그는 호기심에 코를 들이밀 만한 일과, 아예 냄새도 맡아서는 안 되는 일을 확실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이디나도 필사적이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빨리 봐 드리겠습니다.”
뒤따라 일어난 이디나는 아트위야가 가져가려던 서류와 펜을 덥석 붙들었다.
- 지금 당장만 빠져나가게 해 주세요. 잠깐이면 됩니다. 네코 마구스가 저와 나눈 메시지가 할룩스에 남아있을 겁니다. 증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
- 됐다니까. -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머릿속을 뒤지던 이디나는 이틀 전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를 문득 떠올렸다. 아버지에게 죽게 된 마당에 부녀간의 정과 의리 따위는 이제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서류를 잡아당기며 허겁지겁 글씨를 썼다.
- 절 도와주시면 두 분 자녀들을 찾을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
서류를 놓고 이디나와 몸싸움을 벌이려던 아트위야가 비로소 멈칫했다.
- 네가 어떻게? -
- 황제가 살름 현신께 보낸 편지와 할룩스를 아버지가 빼돌렸습니다. 아트위야 현신의 할룩스는 쿠마르가 고장냈고요. -
뒤에서 필담 내용을 함께 보고 있던 살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뒤이어진 글은 더 충격이었다.
- 자녀분들이 아직 적진에 살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
놀란 살름이 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하자 아트위야가 얼른 그를 진정시켰다.
- 그걸 어떻게 알았냐? -
이디나는 지난번 황제와 함께 있을 때 그들이 하페즈를 포로로 데리고 있다는 내용의 대화를 들었던 것을 떠올리며 어떡해서든 이 둘을 붙들려 했다. 하페즈가 살아있다면 아트위야의 아들도 살아있거나 최소한 시체라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 그제 들었습니다. 제가 아버지 몰래 협상을 성사시키겠습니다. -
이디나는 지난번 카렐과 나눈 할룩스 코드를 떠올리며 되는 대로 적어 내려갔다. 그 코드로 아직 연락이 가능할지 자신은 없지만 일단은 무작정 큰소리부터 치기로 했다.
- 제가 황제와 개인적으로 연락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
“이봐요, 아트.”
딸이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살름이 대화의 주도권을 쥔 아트위야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이렇게 길거리에서 해결될 일이 아닌데 이 친구 잠깐 우리 사무실로 데려가자고요. 나도 상의할 게 있으니.”
“좀 빠져 있어요, 살름.”
아트위야는 살름의 설득은 못 들은 척 그의 팔을 떨쳐냈다. 분명 혹하는 제안이지만 아트위야는 죽음의 위기에 처한 이디나가 횡설수설 늘어놓는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을 만큼 어수룩하지는 않았다.
“밤이 늦었으니 나중에 보세, 이디나.”
아트위야는 절망에 빠진 이디나를 놔둔 채 머뭇거리는 살름의 손을 잡고 매정하게 멀어져갔다. 이디나만큼이나 당황한 살름이 두 여자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이봐요, 아트, 애들을 살릴 수 있다잖아요, 제정신이요.”
초조해진 살름이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아트위야에게 버림받은 이디나가 쿠마르와 헤네티들에게 다시 붙들려가고 있었다.
“까짓 거 인심 한 번 써 주는 게 무슨 대수라고.”
계속 떼를 쓰는 살름에게 아트위야가 화를 버럭 내며 돌아섰다.
“대신관이 통지를 빼돌린 걸 이제 알았으니 다른 방법도 많아요. 반역죄에 걸려든 년한테 베팅하는 모험을 우리가 뭣 하러 합니까.”
아트위야가 입술에 야물게 힘을 주며 도로 연회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저애는 황제와 직접 연락할 수…….”
“지금 상황에서 저년 말을 다 믿어요?”
아트위야는 자신의 단호함을 보이듯 씩씩대며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지만 그런 그의 자신에 찬 걸음도 시간이 지나며 점점 느리고 무거워져갔다. 아들의 모습이 자꾸 발밑에 밟혔다.
“후우.”
결국 힘이 빠진 아트위야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멈췄다.
“미치겠네.”
그는 방금 이디나와 필담을 나눈 서류를 재차 확인하고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헤네티들에 붙들린 이디나는 마무리 공사가 아직 진행 중인 화학처리공장이 있는 모퉁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살름이 반쯤 애원을 하듯 아트위야에게 매달렸다.
“이봐요, 아트위야, 제발. 안 가면 나 혼자라도 쫓아가겠소.”
자리에 서서 한참을 고심하던 아트위야가 결국 할룩스를 들었다. 그리고는 연회장 주변에 흩어놓은 자신의 사복 헤네티들에게 알렸다.
“이봐, 잠깐 이리로 좀 모여라. 네코 마구스도 좀 불러왔으면 좋겠어.”
그는 할룩스를 끄고 이디나가 사라진 곳을 돌아보았다.
“하긴, 대신관이 우릴 물 먹였으면 따질 건 따져야지.”
아트위야에게서도 거절당하고 마지막 희망까지 잃은 이디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공사장 계단을 올랐다. 삐거덕거리는 이 공사장 임시계단은 그가 여러 현장 간부들을 당당히 거느리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가뿐히 올랐던 곳이지만 지금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발목에 돌덩이라도 매단 것 같았다.
‘이럴 바엔…….’
이디나는 손아귀에 감춘 유리조각을 의식하며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 아트위야 앞에서 떨어뜨려 부서진 펀치잔에서 나온 나름 길고 예리한 조각이었다. 아트위야에게 거절당하면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감춘 것이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작은 조각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7층 높이쯤 올랐을 때, 위쪽에서 어머니 나키아가 ‘올라오지 말라’며 울부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공장 옥상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허억.”
다리가 풀린 이디나가 계단 중간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앞서가던 쿠마르의 눈짓에 헤네티들이 주저앉은 그를 다시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분 혈통으로서 마지막 품위는 지키셔야죠.”
쿠마르가 비웃듯 쏘아붙이고는 성큼성큼 앞장서 나아갔다. 이디나는 두 다리를 벌벌 떨며 아직 남은 3층의 계단을 억지로 올라가야 했다.
“왜 이렇게 늦었냐.”
조명도 없는 공장 옥상에는 대여섯 명의 검은 실루엣만 희미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누군지 알기는 충분했다.
“왜 바쁜 내가 널 기다리고 있어야 하지?”
아스탈은 신축 제련소의 휘황한 불빛을 내려다보며 선 채 싸늘하게 말했다. 그의 뒤에는 양손이 노끈에 묶인 어머니 나키아가 난간 바로 앞에 꿇어앉혀진 채 울고 있었고, 아프라스 야투 신관이 어딘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옥상 구석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아스탈이 퉁명스레 물었다.
“그놈 품이 그리 좋더냐?”
“아니라니까요, 아버지.”
이디나가 끝까지 부인하며 바닥에 엎드렸지만 여전히 소용이 없었다.
“전 그자인지 확인하고 나서 죽이려고…….”
“그놈이 네 정체를 알았다며? 그런데도 목을 비틀지 않은 게 신통하구나?”
“그자는 절 납치하려…….”
“잔딕을 박고 죽을 때가 다 되어 가면 때때로 굉장히 난폭해지거든. 오르마즈 그놈도 죽기 몇 달 전엔 저 좋다던 밀리타도 그 정체를 알고는 목을 비틀어 부숴놨지. 너한테는 왜 안 그랬을까.”
“아버지, 제발요.”
“시끄러워, 차라리 거기서 그놈 손에 깨끗하게 죽지 그랬냐.”
아스탈이 옥상 모퉁이 난간으로 한 걸음 움직이자 대신관을 지키는 두 헤네티들도 마치 그림자처럼 나란히 움직였다. 코런덤 여단의 두 핵심인 여단장 사카와 부여단장 슈라가 오늘은 한 자리에서 동시에 대신관을 모시고 있었다. 호드르 산에서 중년의 몸으로 장태자 카이의 손에 전사했던 사카는 젊고 매서운 인상의 청년으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아버지, 정말입니다. 왜 다른 마구스의 거짓말은 믿고 피가 섞인 친딸인 제 말은 안 믿으세요!”
“피가 섞인 친딸? 훗. 옛날 같았으면 태어나자마자 어미하고 같이 도태되었을 잡종 주제에, 내 자비롭게 거두어 살려뒀더니 머리통 컸다고 아버지 뒤통수를 쳐?”
매일같이 들어온 ‘잡종’이라는 말이었지만 오늘은 이디나에게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쓰라렸다. 아버지 아스탈은 ‘언젠가 세네피스와의 사이에서 낳게 될’, 지금은 있지도 않은 후계자에만 몰두할 뿐 진짜 자식들은 항상 관심 밖이었다.
이디나가 부여단장 슈라에게 소리를 질렀다.
“슈라, 그놈이 날 강제로 잡아가는 걸 봤잖아! 말 좀 해 봐!”
이디나가 이번엔 슈라에게 호소했지만 그를 돕겠다고 했던 슈라 역시 지금은 눈치를 보며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이디나는 이제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직감했다.
아스탈이 이디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딸의 손목을 그의 우악스런 기계손으로 덥석 붙들었다. 아버지의 괴력에 단단히 붙들린 이디나는 이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헤네티들에게 멀찍이 떨어져 있으라며 눈짓한 아스탈은 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렇게 억울하냐?”
“정말입니다, 전 황제와 내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숨결을 느낀 이디나가 벌벌 떨며 마지막으로 호소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애원에 아버지가 보인 반응은 뜻밖이었다.
“알아. 내통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예?”
이디나가 당혹스런 얼굴로 아버지의 붉어진 눈동자를 돌아보았다. 아스탈이 그의 턱을 붙들며 속삭였다.
“네가 죽어야 하는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르겠냐?”
“…….”
“다른 R도 아니고 황제와 눈이 맞아버린 R을 내가 어떡할까? R들이 교감했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아나?”
아스탈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이디나의 다리에서는 점점 힘이 풀려갔다.
“그 저주스런 집착을 끊는 게 원한다고 의지로 되는 줄 알아? 상대가 내 목을 부숴 놔도, 이미 죽어 저승에 있어도 못 지운다는 걸 말이다. 나도 네가 불쌍하지만, 별수 없다.”
아스탈이 이디나를 거칠게 바닥에 동댕이쳤다.
“일으켜 세워.”
독한 리커를 병째 마시고 난 아스탈이 빈병을 휙 던졌다. 공중에 내던져진 병은 10층 높이를 추락해 얼마 전 인조석을 깔아놓은 단단한 지면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이쯤이면 고통은 없겠지?”
아스탈은 헤네티들이 이디나를 일으켜 세우고 쿠마르가 임시 난간을 걷어내는 광경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널 죄인으로 기록에 남기지는 않으마. 네 어미와 술 먹다가 취해 실족사한 걸로 해 주지. 도태된 것들은 장례나 무덤도 없는 게 원칙이지만 장례도 치르고 유골함 정도는 남겨주지. 그럼 되겠나.”
아스탈의 발밑에서 울고 있던 나키아는 끌려가며 발버둥치는 딸의 모습을 보다 못해 남편의 바짓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다.
“제발, 위대한 현신이시여. 차라리 이 어미를 여기서 던지시고 딸만은…….”
아스탈은 나키아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맘 먹었다니 다행이다. 너도 딸이 죽은 걸 보고 뒤따라 투신자살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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