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26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
.
.
아스탈의 발밑에서 울고 있던 나키아는 끌려가며 발버둥치는 딸의 모습을 보다 못해 남편의 바짓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다.
“제발, 위대한 현신이시여. 차라리 이 어미를 여기서 던지시고 딸만은…….”
아스탈은 나키아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맘 먹었다니 다행이다. 너도 딸이 죽은 걸 보고 뒤따라 투신자살하게 될 테니까.”
“엄마, 엄마는 살려주시겠다고 했잖아요!”
아무도 듣지 않는 이디나의 절규가 허공을 울렸다. 난간 앞까지 끌려간 그의 머릿속에 전기가 쫙 뻗치는 것 같았다. 연회장에서 그가 행사에 협조했던 것도, 이곳까지 순순히 따라 준 것도 ‘어머니를 산 채로 태워 죽이겠다.’는 협박 때문이었다.
“한나절이나 살려뒀잖냐.”
아스탈의 무정한 대답과 함께 이디나의 마지막 희망마저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제 그와 어머니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다. 모든 것을 초탈한 순간, 신기하게도 그의 머릿속이 확 맑아졌다.
“아버지……그럼…….”
난간 앞에서 벌벌 떨던 이디나가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아버지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안아주세요.”
이디나는 눈물이 방울방울 맺힌 채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딸의 애원에 잠시 맘이 약해진 그의 붉은 눈동자에 검은 빛이 짧게 스쳤다. 그는 모퉁이에 선 채 벌벌 떨고 있는 딸에게 다가오라 손짓을 했다.
“현신님……하지만.”
“됐다, 구석에 가 있어.”
헤네티들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멀찍이 떨어졌다. 타고난 괴력의 소유자인데다가 어지간한 상처로는 죽지도 않는 그를 비무장에 싸움도 못 하는 이디나가 해친다는 건 어차피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제가 정말 안기고 싶었던 건 아버지였어요……황제가 아니고요.”
이디나가 아스탈의 가슴에 기대며 바들바들 떨었다.
“그런데 절 이제까지 방치해 두시고……이제 와서.”
“이제와 이따위 수작 부려도 소용없다.”
아스탈이 딸의 얼굴을 노려보며 짐짓 매정하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디나는 그런 아버지의 손을 천천히 잡아당겨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저도 R인 아버지 손길만 기다렸는데……못생겼다고, 잡종이라고 관심도 한 번 주지 않으셨잖아요. 왜 그러셨어요.”
아스탈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딸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지금껏 R을 가졌던 사람들 중 그에게 이런 말을 해 준 사람은 이디나가 처음이었다. 이제와 맘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딸의 이 말이 진심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짧게나마 한 것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황제보다 먼저 절 거둬주시지.”
이디나는 아버지의 어깨에 턱을 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버지와 몸을 더 바싹 붙이며 가슴에 와 있는 그의 손목을 꼭 붙잡았다.
“실은 죽기 전에……꼭 여쭙고 싶던 게 있었어요.”
이디나가 아스탈의 어깨에 기댄 채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버지의 등 너머에서 엎드려 흐느끼고 있던 어머니 나키아가 문득 딸의 눈을 올려보았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일어나 남편의 등 뒤로 다가왔다.
이디나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버지가 그분을 죽이셨죠?”
“누굴?”
아스탈이 별 생각 없이 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찌 하든 죽을 텐데…… 지금 제 도박도 성공할까요?”
이디나가 갑자기 아스탈에게 진하게 입을 맞추며 그를 온몸으로 힘껏 밀어붙였다.
“우웁.”
주춤거리며 한 발 물러나려던 아스탈을 이번엔 뒤에 있던 나키아가 와락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두 여자 사이에 갇혀버린 아스탈이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손목을 관통하는 찌릿한 고통과 동시에 힘이 확 빠지면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입술을 물고 있는 이디나 때문에 그의 고통스런 신음소리도 입 안에 갇혀버린 채 맴돌았다.
“으, 으으읍…….”
이디나가 유리조각을 움켜쥔 손에 체중을 실어 가슴으로 다시 힘껏 밀었다.
“대신관님?”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사카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직감하고는 마우저를 번쩍 빼들었지만 세 사람이 딱 붙어 있어 쏠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이해 못한 채 머뭇거리던 야투 박사도 한 박자 늦게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빨리 떼어내!”
이디나의 가슴을 짚은 아스탈의 팔뚝을 타고 붉은 피가 바닥에 주르르 흘러내렸다. 같은 순간, 유리조각을 움켜쥔 이디나의 손바닥으로도 선혈이 조금씩 배어나고 있었다.
꿈틀대던 아스탈이 딸의 얼굴을 거칠게 밀어내고 비로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 악!!!”
이디나는 악을 쓰며 휘청거리는 아버지를 여전히 꽉 끌어안은 채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전 그런 아버지 딸이거든요.”
“안 돼!”
비명을 지르며 달려온 사카가 이디나의 목을 확 낚아채 바닥에 쓰러뜨렸지만 그는 쓰러진 후에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런.”
이디나를 쓰러뜨린 사카가 바들바들 떨었다. 이디나의 가슴은 아스탈의 손목에서 터진 피와 이디나 자신의 베인 손에서 흐른 피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디나가 피로 물든 큰 유리조각을 사카에게 보란 듯 내밀며 이를 드러내고 히죽거렸다.
“미안하네, 이런 실수가 있나.”
“현신님! 현신님!”
야투 박사가 옷과 머플러를 벗어던지며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비틀거리는 아스탈을 황급히 붙들었다. 손목의 관통상에서 유리조각이 빠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그의 주름진 얼굴을 붉게 뒤덮었다.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출혈에 당황한 야투 박사가 사카와 이디나에게 악을 썼다.
“맙소사! 유리를 빼면 어떡해!”
“나, 나 어떻게……되는 거지?”
자신의 피에 지레 놀란 아스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 늙은 의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먼 옛날, 오르마즈에게 반대편 손목이 잘리면서 이미 간뇌 일부를 잃었던 그에게 이 정도는 치명상이었다.
아스탈이 갑자기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며 야투 박사의 가슴 위로 무너져 내렸다. 박사가 주저앉으려는 아스탈을 기를 쓰고 받치려 했지만 그의 노구로는 무리였다. 다리가 풀린 아스탈이 바닥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헉, 헉.”
아스탈의 몸이 거칠게 경련을 일으켰다. 시상하부가 손상되고 자율신경계가 무너지면서 숨소리와 심장박동도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괜찮다고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그는 자신의 생각과는 반대의 말을 거듭 늘어놓으며 얼른 상처를 막고 팔을 들어 지혈을 했지만 아스탈의 몸에서는 점점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빨리 셔틀 불러, 빨리! 여기선 처치가 안 돼!”
출혈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자 절망한 야투 박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빌어먹을 년!”
죽어가는 대신관의 모습에 격분한 사카가 칼을 빼들고 이디나의 목을 찌르려 했지만 그런 그의 칼끝을 야투 박사의 침착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막았다.
“아직 기다리게, 사카.”
“예?”
반대편에서 나키아를 붙들고 막 죽이려던 슈라도 멈칫거리며 칼을 거두었다. 눈치 빠른 슈라는 이미 네 명이나 되는 대신관을 모셨던 저 늙은 신관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야투 박사의 품 안에서 기운을 잃어가던 아스탈이 이를 빠드득 갈며 손끝으로 이디나를 가리켰다.
“뭐 하냐, 저, 저걸 그냥…….”
“기운 빠지십니다. 할 말이 있으면 제게 하십시오.”
야투 박사가 아스탈의 다음 말을 재빨리 가로막고는 그의 입가에 귀를 댔다. 아스탈이 그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지만 이미 힘이 거의 빠져 야투 박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아스탈의 말을 정말 알아들은 것인지, 야투 박사는 몸을 일으키고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아랫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 몇이 헐레벌떡 뛰어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 제일 먼저 모습을 나타낸 건 다름 아닌 아트위야였다.
“뭐야, 이게 대체 뭐야.”
옥상의 광경에 놀란 그는 뒤따라 올라오던 자신의 헤네티들에게 오지 말라며 급히 손짓했다.
“이런.”
아트위야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은 것인지, 그리고 아스탈의 운명을 바로 직감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스탈이 억지로 고개를 가누며 그를 돌아보았지만 그의 눈 색은 붉은 색에서 검은 색으로, 다시 회색빛으로 산만하게 돌변하고 있었다.
조금씩 가늘어지는 아스탈의 눈가에 반짝이며 눈물이 고였다.
“세네피스…….”
아스탈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쳤던 회색빛도 어느 순간 점점 흐려져갔다.
“아, 아버지……아버지.”
억지로 가누고 있던 아스탈의 고개도 천천히 뒤로 기울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스탈의 귀 밑에서 줄곧 맥박을 재고 있던 야투 박사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응급 셔틀은 돌려보내라.”
야투 박사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를 떠나, 4백년 동안 사실상 다하카르 교단을 이끌어 온 자칭 31대 아르잔 아스탈 빈 다하카르 대신관의 최후는 먼저 간 그 아버지의 죽음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순간에 다가왔다.
“세상에.”
사카를 시작으로, 옥상에 있던 다하카르의 헤네티들이 일제히 자리에 꿇어앉았다. 그들 중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관의 죽음은 그저 신이 낡은 육신을 떠나는 것일 뿐, 슬퍼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번엔 ‘다음 육신’이 없었다. ‘다음 현신’을 향해 충성을 맹세해야 할 그들 모두는 이제 망연자실해진 얼굴로 서로를 보며 자리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갑작스런 참사 앞에서 옥상 전체에 무거운 침묵과 공포가 흘렀다.
“위대한 현신께 이디나에 관해 말씀드리러 왔는데.”
짧은 침묵과 치밀한 계산 끝에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아트위야였다. 죽은 대신관은 대신관이고, 현실에서 그의 용무는 이디나였다. 그는 함께 데려온 네코를 옥상에 떠밀었다. 아트위야에게 심한 추궁을 당한 네코는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분께서……네코 현신의 말을 오해하셔서 배신자로 잘못 아셨다고 말씀드리려던 참이었는데……이걸 어쩌라고.”
이디나가 죄가 없다며 슬쩍 운을 띄운 아트위야는 사카에게 깔린 채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는 이디나를 쳐다보았다. 이디나가 고개를 저으며 뻔뻔스레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께서 사고로 돌아가셨으니 이제 어떡해야 하죠?”
“그래, 이제 어쩔 텐가, 야투 박사.”
아트위야가 다하카르 교단 제2신관인 야투 박사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짧게 한 마디 덧붙였다.
“우리가 하마타처럼 될 순 없지 않나.”
아트위야가 이 늙은 신관에게 슬쩍 속내를 내비쳤다. 마구스와 후계자가 몰살당하고 사실상 붕괴된 하마타 교단들과 같은 운명을 피하려면 이제 어떤 식으로든 새 후계자를 찾아내야, 아니 없다면 만들어 내기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최악을 피할 수 있다면 차악(次惡)이라도 잡아야 했다.
“그럴 일 없습니다.”
비록 대화는 하지 않았지만, 야투 박사도 이미 아트위야와 통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과 손에 묻은 아스탈의 피를 닦아내며 짐짓 태연하게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이번 참사의 목격자는 자신을 빼면 살인자인 이디나와 그 어미 나키아, 그리고 몇 안 되는 헤네티들뿐이었다.
“아르잔 아스탈 대신관께선……따님과 축하주를 드시던 중 깨진 잔에 공교롭게도 급소인 손목을 다쳐 돌아가셨습니다. 신께서 이 육신을 떠나셨습니다. 그뿐입니다.”
야투 박사는 찬 바닥에 아스탈의 시체를 놓아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순한 사고였고, 누구도 책임질 일이 없었음을 다하카르 교단 수석 신관으로서 증명합니다.”
야투 박사는 턱에 힘을 꽉 주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는 아스탈의 딸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순혈은 아니지만, 아스탈의 피를 이은 유일한 성년자였고, 교단 2인자인 그가 손에 쥐고 흔들 만큼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다면 몇 년쯤 써먹고 버릴 허수아비로는 더더욱 환영이었다. 그에겐 이디나가 배신을 했건 안 했건 이젠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야투 박사가 목멘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 육신을 떠나시기 직전 다음 육신에 관해 말씀을 남기셨고, 제가 유언을 수령했습니다.”
야투 신관의 눈짓을 받은 여단장 사카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디나에게서 물러났다. 박사는 늙고 힘이 없는 다리로 자리에 힘겹게 꿇어앉아 바닥에 이마를 붙였다. 그의 표정에는 어색하고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교단의 몰락을 피하려면 이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새로운 육신에 깃드심을 축하드립니다. 아스탈 이디나 빈트 다하카르, 32번째 위대한 현신께 복종을 맹세하나이다.”
옥상에 다시금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절을 올리던 야투 박사의 어깨를 부드러운 손이 살며시 짚어주었다.
“고맙소, 야투 신관. 아버지에게처럼 내게도 충성을 바칠 줄로 믿겠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소름끼치게 침착한 대답에 야투 박사의 몸에도 전율이 흘렀다. 이 한 마디에 야투 박사는 바로 ‘아차’ 싶었다.
‘설마 호랑이 새끼를 들인 건가.’
원죄를 지닌 이 죄인이 기가 죽어 수하들 눈치만 보리라는 그의 예상은 처음부터 보기 좋게 빗나갔고, 도리어 시작부터 자신의 역할을 ‘지나치게 잘’ 수행하고 있었다.
“내게 든 신이 느껴지네.”
교단 전체의 운명을 걸고 벌인 벼랑 끝 도박에 성공한 이디나의 입가에 늑대 같은 미소가 번졌다.
“무, 물론……당연히 그러셔야죠.”
슈라와 헤네티들도 신관을 따라 마지못해 자리에 엎드렸다. 다만 단 한 명, 우직한 사카 여단장만은 한 손에 단검을 꽉 쥔 채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위대한 현신을 해친 대역죄인입니다. 당장 죽여야지 뭣들 하시는 겁니까. 이게 무슨 우스꽝스런 상황입니까!”
사카가 칼날을 쳐들고 이디나에게 성큼 다가서는 것을 눈치 빠른 동기 슈라와 다른 헤네티들이 급히 막아섰다.
“살인자라니, 그냥 사고였어.”
“뭐?”
사카가 대뜸 이를 드러내며 그를 밀어붙였다.
“제정신이냐. 여단장으로서 너도 용서 못해.”
“제발, 좀 참아.”
슈라와 헤네티들이 칼을 쥔 여단장의 손목을 꽉 붙들고 중간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 대쪽 같은 무장은 이디나의 도박만으로는 쉽사리 뒤집을 수 있는 패가 아니었다.
옷과 손에 묻은 피와 흙을 털어내고 일어난 이디나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을 빙 둘러보았다. 신관과 헤네티들, 심지어 어머니 나키아까지도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이디나는 당장이라도 싸움을 벌일 듯 슈라와 대치하고 있는 사카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이디나가 다가오자 사카가 다시 칼을 휘두르려 발버둥을 쳤다.
“자네의 이런 우직함이 맘에 들어.”
이디나의 속삭임은 위협보다도 사카를 더 놀라게 했다. 이디나가 그의 귀에 입술을 대고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버지를 찌른 못된 이디나는 이제 세상에서 사라졌고, 그 자리에 신이 들었네. 헤네티니 당연히 그걸 알겠지?”
이디나는 자신을 찔러 죽이려 했던 이 사나운 무장의 손목을 살며시 붙잡았다.
“물러나게, 슈라.”
이디나는 이 사나운 무장을 저지하고 있던 슈라에게 뒤쪽을 눈짓했다.
“예? 지금은…….”
“빨리.”
슈라를 물러나게 한 이디나는 혼자서 사카와 가슴이 맞닿을 만큼 바싹 다가섰다.
“아버지께 깃들었던 신이, 아니 이 몸에 깃든 내가 가짜라고 믿는다면.”
그는 사카가 쥔 칼날 끝을 조심스레 자신의 목에 가져갔다.
“지금 망설이지 말게.”
기세에서 압도당한 사카가 멈칫거리며 물러나려 했지만 이디나가 그를 쫓아 더 바싹 다가섰다. 이디나는 사카의 넓고 다부진 어깨 위에 두 손을 얹고는 입술과 코끝이 닿을 만큼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지금 못 한다면……앞으로는 영원히 못 하게 될 거야.”
이디나와 눈이 딱 마주친 사카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칼끝에 살짝 찔린 목덜미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지만 이디나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 무서운 헤네티 무장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자네가 분노한 건 이해하지만……지금의 난 그대가 받들던 공포의 화신이라네. 보이지 않는가. 충성스런 나의 헤네티 사카.”
사카의 씩씩대는 숨소리와 이디나의 기다림 속에서, 긴장된 몇 초가 흘렀다.
“왜 하필 그 몸에…….”
단검을 쥔 채 한참을 머뭇거리던 사카도 결국 어깨에 얹힌 이디나의 여린 두 손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두 눈에서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이디나는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이디나는 피 묻은 옷소매로 그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후회하지 않을 걸세, 사카 여단장.”
사카는 이디나의 신발 위에 이마를 대고 낮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카마저도 무릎 꿇게 한 이디나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웃음이 번졌다.
“네코 마구스.”
이디나가 벌벌 떨며 서 있는 네코에게 예상을 깨고 친근한 표정을 지으며 손끝을 향했다.
“내 오랜만에 새 옷을 입었소. 이젠 그댈 공석에서도 이렇게 불러도 되겠지요?”
힘이 들어간 이디나의 목소리에서 네코는 둘의 처지가 순식간에 뒤바뀌어버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틀 전, 저녁 5시 24분에 내가, 아니 이 몸에 깃들었던 이디나의 영혼이 그대에게 보냈던 메시지를 한 번 읽어주겠소?”
이디나의 말투는 분명 명령이었다. 네코가 할룩스만 든 채 머뭇거리자 옆에 있는 아트위야와 살름의 시선이 대뜸 험악해졌다. 이디나가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팔을 벌려 보이며 말했다.
“그게 그대들 모두에게 보내는 32대 대신관의 첫 메시지라네.”
마지못해 할룩스를 켠 네코가 차마 읽지 못하고 머뭇거렸지만 주변의 압박은 그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자, 내 새 몸의 명예에도 관계된 것이니 빨리 읽어주시오. 네코 현신.”
이디나의 압박이 계속되자 결국 포기한 네코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나 혼자서는……황제를 죽일 수 없으니…… 너희의 손을 빌려다오.”
이디나가 최소한 배신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면서, 한 짐을 던 야투 신관과 슈라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젠 아스탈의 죽음만 모두 입 다물어 주면 되는 일이었다.
“아드함, 크사야시야, 바즈라카.”
사카에게서 돌아선 이디나는 아버지의 시체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용광로의 불이 켜졌음을 알리는 세 개의 거대한 폭죽이 화입식 행사장 쪽에서 검은 하늘로 긴 꼬리를 남기며 용처럼 솟구쳐 올랐다.
“하가 마나 파투브.”
상처가 난 그의 손바닥에서 흐른 붉은 피가 아버지의 시체 위로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잡종이라는, 창녀의 딸이라는 멸시 속에서 커야 했던 어린 시절부터 몇 번이나 하늘을 보며 몰래 연습했던 금단의 말을 오늘밤 비로소 큰 소리로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다.
“위대한 제왕의 피를 이었으니, 신이여, 이제 나를 지켜 주소서.”
++++++++++++++++++++++++++++++++++++++++
[파트8. 어머니와 딸들]은 이번 회의 막판 쎈~ 반전(?)을 끝으로 대단원을 맞습니다. ^^
다음 회부터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적을 상대하게 되는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조만간 3부 3, 4권의 출판공지가 있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