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27화 (922/1,132)

< -- 927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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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내가 대신 온다고 했잖아요.”

딸의 목소리에 아지드는 혼자서 엷게 웃음만 지었다. 무거운 광산 장비들을 짊어지고 앞서가던 딸은 맘이 불편한지 계속 혼자 말했다.

“다리도 불편하면서 집에 그냥 좀 계시라니까.”

“너한테는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했잖아.”

딸아이가 내쉬는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험하니까 꼭 쥐고 따라오세요. 지난번처럼 다리 풀려 넘어지면 다쳐요. 발목도 안 좋잖아요.”

“그 무거운 걸 메고 있으니 네가 더 조심해야지.”

딸의 허리에 맨 밧줄을 쥐고 절룩거리며 바윗길을 오르던 아지드는 앞서가는 딸의 당당한 뒷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만 16살이 맞나 싶은 6척(180cm) 가까운 큰 키에 말랐지만 단단하고 군살 없는 등판 위에서 10관(37.5kg)이나 되는 무거운 광부 장비들도 장난감만큼 작아보였다.

“이거요? 별거 아니에요.”

딸아이는 자리에서 풀쩍 뛰어 보였다.

계곡 상류의 금광 시설이 개량되어 더 이상 사금이 흘러내려오지 않으면서 그동안 대형 금광의 ‘빵 부스러기’ 사금에 기대어 살던 주르반 마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사금 채취를 접고 아예 마을을 떠나거나, 나머지는 광산에 일자리를 구해 광부나 잡역부로 새 삶을 시작했지만 이 가난한 카파키 가족의 생계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광산 관리인들은 주인인 카파키 가문 사람을 광부로 썼다가 괜한 뒤탈이라도 생길까 아연실색하며 이런저런 핑계로 손을 저었고, 설상가상 이마에 ‘다하카르의 간택자’ 문장까지 지닌 오르마즈는 그들의 기피 1순위였다. 바깥 세상에선 ‘급행 출세표’가 될 수도 있었을 것들이 가문에서도, 세상에서도 버림받은 가족에겐 장벽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결국 자식들 중 유일하게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맏이 오르마즈는 일감도 일정치 않은 포터로 나설 수밖에 없었고, 엄마 아지드는 위험천만한 불법 채굴 광산에서 광부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갖은 범죄자, 전과자, 도망자들이 섞인 동료들과 함께 좁고 어두운 막장에 들어가 하루 12시간씩 돌가루를 먹고 바윗덩이를 나르며 6명으로 늘어난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힘드세요?”

줄이 자꾸 팽팽해지는 것을 느낀 딸이 그제야 자리에 멈춰 고개를 조금 돌렸다. 옆모습에 비치는 오똑한 콧날과 날렵한 턱선 위로 아름다운 오팔빛 눈동자가 오후 석양에 반짝거렸다. 투박한 모직외투와 그을리고 거친 피부만 아니라면 기품있는 명문가 귀공자라고 해도 손색없을 외모였다.

“좀 쉬어갈까요?”

“아냐, 동생들이 기다리잖니.”

“일라드하고 샤르나즈도 있는데요.”

“그냥 좀 불안하구나.”

“아버지는 이제 한동안 못 오실 거예요.”

“그래도 네 아버지야.”

불편한 걸음을 억지로 옮기던 결국 아지드가 가쁜 숨을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오르가 그런 어머니를 딱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지금 그 이야기가 나오세요?”

아버지와 가족들과 갈등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그제 밤의 상황은 심각했다. 자정 가까운 시각에 술에 취해 집에 들이닥친 투르케스크는 낮의 고된 노동에 지쳐 비몽사몽간 맞아주는 아내와, 아버지 같지도 않은 아버지를 뭣 보듯 할 만큼 머리통 굵어진 자식들의 냉담한 반응에 결국 폭발을 하고 말았다.

야간 포터 일을 나간 오르가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는 ‘자식 잘못 키워 놨다.’는 트집으로 아지드부터 폭행하기 시작했다. 아지드의 발목을 짓밟아 못 일어나게 만들어놓은 그는 겁에 질린 자식들까지 ‘어미한테 잘못 배워먹어 아버지까지 무시한다’며 ‘개 패듯’ 두들겨 패 집안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날 밤도 그대로 지나갔다면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룻밤 폭행사건으로 끝나고 말았을 테지만, 하필 그날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오르는 이제 더 이상 옛날의 꼬마가 아니었다. 쓰러진 어머니와 맞고 있는 동생들의 모습에 격분한 오르는 술 취해 날뛰는 아버지를 무자비하게 힘으로 제압해 집 밖으로 질질 끌어냈다.

훌쩍 커버린 자식을 상대할 수 없어진 투르케스크는 마을 사람들에게 ‘패륜’을 말려달라며 소리를 지르고 버둥거렸지만 그동안의 지긋지긋한 집안싸움에 질려 있던 이웃들도 ‘결국 올 날이 왔군.’이라며 눈치껏 외면해 버렸다.

결국 한쪽 팔을 꺾인 채 변변한 저항도 못 하고 마을 밖까지 끌려 나간 투르케스크는 광산의 폐석 수송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마을에서 무참히 쫓겨나고 말았다. 다행히 그 뒤로 투르케스크는 한동안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다친 발목의 통증에 과로로 걷지도 못하는 엄마 아지드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오르는 등에 메고 있던 장비를 가슴 쪽으로 휙 돌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아지드를 불끈 등에 업고 일어섰다. 얼떨결에 딸의 등에 업힌 아지드가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탁탁 쳤다.

“맙소사, 무겁잖아. 빨리 내려, 빨리.”

“엄마 광산 일 하고 너무 가벼워졌어요. 허벅지가 이게 뭐에요.”

무거운 장비에 이젠 엄마 아지드까지 짊어진 오르는 가파른 산길을 씩씩대며 오르기 시작했다.

“그만 해, 힘들다니까. 장비만 해도 무게가 얼만데.”

엄마가 계속 등을 쳤지만 오르마즈는 들은 척 만 척 계속 걸음을 옮기며 넉살을 부였다.

“이 힘으로 광산에서 일하면 웬만한 사람 일당 두세 배는 너끈히 받을 텐데 말이에요.”

오르가 큰 바위 하나를 훌쩍 뛰어넘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타고난 핏줄에 더해 어릴 때부터 산소가 희박한 고산을 뛰어다니며 다져진 체력 덕분에 사람 하나 반이 넘는 무게를 짊어지고도 그의 걸음은 여전히 가벼웠다.

“내가 많이 벌면 엄마 고생도 덜할 텐데.”

“두 배가 아니고 스무 배여도 너 광부 일은 절대 안 시킬 거다.”

결국 포기한 아지드가 딸의 든든한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익숙지도 않은 광산 일을 끝낸 후, 가파른 오르막만 30분 넘게 타야 하는 퇴근길은 지옥만큼이나 힘들었다. 광산이 워낙 은밀한 곳에 있다 보니 제대로 뚫린 길도 없었고, 혹시라도 단속반이 들이닥칠 때를 대비해 개인 장비는 항상 본인이 알아서 챙겨가야만 했다. 그렇다보니 지친 몸으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고, 무거운 짐을 길거리에 내려놓은 채 주저앉아 울어버린 일도 많았다.

보다 못한 오르가 일이 없는 날엔 엄마의 퇴근시간에 맞춰 광산에 찾아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지드는 겉으로는 그 시간에 공부나 하라며 꾸짖곤 했지만 이렇게 든든하게 자란 딸이 함께 해 주는 퇴근길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사람들이 저 엄마 딸 맞냐고 그러던데요.”

“무슨 소리야? 누가 그런 소릴 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아지드가 무심결에 언성을 높였다. 엄마의 반응에 화들짝 놀란 오르가 서둘러 둘러댔다.

“에이, 뭐 그리 놀래요? 솔직히 동생들은 엄마 얼굴 많이 닮았는데 저하곤 별로 안 닮은 건 맞잖아요.”

“키 큰 것도 닮고, 눈썹 짙은 것도 닮았어. 손가락 발가락도 비슷하고 걷는 모양도 똑같잖아. 안 닮긴 어딜 안 닮아.”

엄마가 흥분해서 큰 소리로 우겨대자 오르가 낄낄거리며 돌가루로 더러워진 그의 뺨에 쪽 하고 뽀뽀를 해 주었다.

“알아요, 목소리 걸걸하니 흥분하면 화통 삶아먹은 소리 내는 것도 똑같죠.”

혼자 흥분해서 우기던 아지드도 결국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됐다, 엄마 충분히 쉬었으니 내려주렴.”

딸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자 아지드가 다시 어깨를 툭툭 쳤다.

“괜찮아요. 이대로 계속 갈 수 있어요.”

오르는 가쁜 숨을 꿀꺽 삼켜버리고는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어제 지고 오른 뚱땡이 할머니에 비하면 약과인데요 뭐.”

“뭐, 어제 그거 가이드 일이었어? 내가 가이드는 하지 말랬잖아?”

아지드가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미 수십 번째 반복된 꾸중도 머리통 굵어진 딸에겐 이제 별반 소용이 없었다.

짐만 나르는 포터에서 등산객을 상대하는 산악 가이드까지 ‘살짝 겸업을 시작한’ 오르마즈에게 유독 단골이 많은 건 평범한 포터보다 체력이 월등해서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어린 포터 겸 가이드의 수려한 외모와 다하카르 문장에 첫 번째로 놀랐고, 바람 어와 공용어, 심지어 유학자들이 쓰는 고대어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면서 해박한 역사와 인문 지식으로 등산객들의 귀와 머리를 즐겁게 해 주는 데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밝은 성격에 사교성 좋고 언변까지 유창하다보니 한 번 그를 만난 등산객들은 약간의 웃돈을 더 주고서라고 꼭 그와 산을 오르겠다며 예약을 하곤 했다.

그러니 돈에 쪼들리는 가족의 처지를 잘 아는 오르로서는 눈앞에 보이는 일당과 두둑한 팁을 쉽사리 거절하지 못하고 엄마 몰래 가이드 일을 나가곤 했다.

“지난번에 너 꼬시던 그놈 아니지? 그렇지?”

“걱정 마세요. 새로 소개받고 온 점잖은 노부부였어요. 이상한 짓 하는 사람들은 이제 예약 안 받아요.”

오르가 애써 웃으며 엄마를 다시 추슬러 올렸다.

사실 아지드가 딸의 가이드 일에 예민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외모부터 워낙 눈에 띄다보니 손님들이 은밀히 데이트를 청하는 정도는 예사였고, 큰돈을 내밀며 대놓고 하룻밤 함께 하자고 요구하는 남자 손님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에게 ‘매번 업고 올라 달라던’ 쿠트라스의 한 부유한 여자 사업가는 ‘애인이 되어 주면 도시의 고급주택과 가족 모두 넉넉하게 살 만큼 돈을 주겠다’며 솔깃한 제안을 한 일까지도 있었다.

아직 어린 오르의 주변에 이런 손쉬운 돈벌이의 유혹이 맴돌고 있으니 아지드로서는 그가 가이드 일을 나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좌불안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르에게 가이드 일은 단순히 돈이라는 의미 이상이었다. 이곳을 찾아주는 도회지 상류층 사람들의 대화는 구석진 촌구석 젊은이가 바깥세상의 새로운 소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별일 없었으니 걱정 마세요.”

“다시 말하지만……넌 아무 남자나 만나면 안 돼.”

아지드가 오르의 목을 안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정말 못 견디겠으면……차라리 여자를 만나렴.”

오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엄마 아지드는 입만 열었다 하면 ‘남자와 함부로 잠자리하지 마라.’고 겁을 주곤 했다. 워낙 깡촌이고 조혼이 일반적이다 보니 오르의 또래 중에도 벌써 결혼해 아이를 둔 친구까지 여럿이지만 아지드는 딸의 결혼은 고사하고 남자 친구를 만나는 것도 기겁을 하고 있었다.

“넌 다른 사람하곤 달라서……보통 남자 처음 받아들이는 게 많이 고통스러울 거야. 네 남자는 따로 있거든.”

“네, 네, 알았어요.”

오르는 이미 숱하게 들었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너도 힘들 텐데 여기서 제발 내려 주렴. 이 바위는…….”

“어제 손님들이 도시락 든든히 싸와서 밥 많이 먹었어요. 힘 불끈불끈 나요.”

오르는 귀가길 가장 힘든 코스인 가파른 바위에 걸린 밧줄을 붙들고 원숭이처럼 재빨리 기어올랐다.

“어제? 그럼 오늘은?”

“동생들하고 빵 나눠먹었어요. 걱정 마세요.”

“네 빵 나눠준 거 아니지? 넌 보통 사람보다 많이 먹어야 한다니까.”

대답 없이 걸음을 옮기는 오르마즈의 관자놀이를 타고 땀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지드가 소매로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

“에휴, 이 예쁜 얼굴에 칼귀가 뭐니, 칼귀는 낭비벽에 바람둥이라던데.”

“아이고, 낭비에 바람둥이도 돈에 능력이 있어야 하죠.”

오르마즈가 낄낄거리며 등에 업은 엄마를 훌쩍 추켜올렸다. 그의 넓은 어깨에 얼굴을 기댄 아지드가 딸의 조각 같은 옆모습을 보며 혼자 싱글벙글했다.

“이렇게 멋있는 내 딸, 대체 어떤 운 좋은 놈이 데리고 살게 될까.”

“누구긴 누구겠어요. 겁나게 운 좋은 우리 엄마 곁에 아주 영~원히 붙어 있어야지.”

딸의 능청스런 대답에 아지드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라고 평생 여기서 광부만 하고 살 것 같니?”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오르가 엄마를 문득 뒤돌아보았다.

“지금 제가 기뻐해야 하는 거 맞죠?”

아지드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너희만 다 키우고 나면……엄마도 엄마 갈 길로 갈 거야. 정말이다.”

“거기에 아버지 얼굴은 제발 없기를 바랄게요.”

‘엄마 갈 길’이라는 말의 의미를 꿈에도 모르는 오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아지드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 독립하기 전에 아주 큰 선물 하나 줄 생각이란다.”

“그게 뭔데요?”

“곧 알게 돼.”

아지드가 딸의 목을 꼭 안고는 혼자 계속 웃었다.

“너도 정말 좋아할 거다.”

“혹시 지난번 받으신 초대장하고 관계된 거예요?”

딸의 물음에 아지드가 화들짝 놀랐다.

“아냐, 그건 그냥 네 16살 성년 축하기간 초대장이야. 너도 알잖니. 네 덕택에 가족들 며칠 호사 누리게 되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아지드는 쓸데없는 말을 주절주절 떠들며 딸의 관심을 돌리려 했다. 간택자가 만 16살이 되는 해, 간택자와 가족 모두가 각 교단의 최고신전이나 휴양지에서 지낼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이다 보니 이 깡촌에서 지지리 궁상으로 살고 있는 동생들도 모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엄마 그 초대장에 든 편지 받고 엄청 좋아하셨잖아요. 그전 같았다면 아버지한테 들키면 어쩌냐고 발만 동동 구르셨을 텐데. 이번엔 뭐 특별한 거라도 있는 거예요?”

딸의 귀신같은 눈치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아지드가 딸의 목을 꼭 안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고…… 실은…… 너한테 예쁜 여동생이 생길 거란다.”

“또요?”

발끈한 오르가 기겁을 하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는 기뻐하기는 고사하고 버럭 화부터 냈다.

“맙소사, 지금도 입이 몇 개인데 또 낳아요? 엄마 몸도 생각해야죠.”

딸의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했던 아지드가 침착하게 그의 입을 가렸다.

“이번엔 달라.”

“다르긴 뭐가 달라요. 걔는 뭐 뱃속에서 지 밥통 이고 나온대요? 지금 대체 몇 개월이길래요? 설마 지난번 아빠 다녀간 게 그 때문이에요?”

“아직 갖지도 않았어.”

“예에?”

오르가 멍한 얼굴로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낳은 다섯 동생 모두가 아버지의 쓸데없는 자식 욕심 때문에 반강제로 임신했던 것이다 보니 지금껏 어머니가 임신했다며 기뻐한 모습은 한 번도 보인 일이 없었다. 그런 엄마가 뜬금없이 임신을 할 거라며 행복해 하고 있으니 희한한 일이었다.

“너랑 꼭 닮은 막내딸을 낳을 거다. 정말 마지막이야. 너처럼 무지개빛 눈에 아주 예쁠 거야. 네가 꼭 필요한 아이니까 보물처럼 예뻐해 줘야 해.”

엄마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오르가 혀를 차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니, 미래에 갔다 오기라도 하셨어요? 제 눈은 돌연변이라고요. 낳고 싶다고 씀풍씀풍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동생들 중에도 하나 없는데 이번에 나오리라는 법이 어딨어요.”

“엄마 말 믿어. 그리고 이번에 남극성당 다녀오면 사는 게 많이 달라질 거다.”

아지드가 딸의 목을 꼭 안으며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어머니의 이런 목소리를 처음 들어 본 오르가 엄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슬슬 여기 주르반 마을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아빠는요?”

“아빠 없이도 너희 모두 잘들 자랐잖니.”

딸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다시 닦아주던 아지드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품을 뒤적거려 종이에 잘 싼 꾸러미를 내밀었다.

“뭐에요?”

한 손과 이로 꾸러미를 풀어 본 오르는 자리에 우뚝 멈춰서는 엄마를 돌아보았다. 기름종이 안에는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삶은 돼지고기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십장이 집에 좋은 일 있다고 늙은 돼지 잡았는데 혼자 먹긴 너무 많더구나. 집에 가면 식어서 맛없으니 지금 빨리 먹어.”

오르는 고깃덩이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고기는 칼로 잘라낸 모양 그대로였고, 베어 먹은 흔적은 없었다. 모처럼 배급 나온 귀한 돼지고기를 손도 안 댄 채로 가져온 것이 분명했다.

고깃덩이와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오르는 한 입 베어 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기름진 비계와 속에서 배어나오는 육즙이 정말로 맛있었지만 그는 두세 입만 먹고는 입을 떼었다.

“엄마, 속은 덜 익었어요.”

오르는 마르지 않은 안쪽 부드러운 살을 이로 크게 찢어 엄마에게 주었다.

“먹어봐요, 비린맛 나잖아요.”

아지드는 딸의 손에 있는 고깃조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딸의 속내가 빤하지만 차마 마다할 수가 없었다.

“괜찮은데…….”

아지드가 고기를 씹으며 목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여기도 먹어봐요. 괜찮으면 저도 먹을게요.”

오르는 업힌 엄마에게 계속 이로 고기를 찢어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떼어주고 난 질긴 껍질 부분만 입에 넣었다.

“다 잘 익었어, 얘야. 그냥 먹어.”

아지드는 어느새 훌쩍 커져버린 든든한 딸의 어깨를 꼭 안으며 고기를 씹었다. 양념도 없고, 근사하게 요리된 것도 아니지만 태어나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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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부터는 드디어 오르의 시신을 놓고 한판 대결이 펼쳐지는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이 시작됩니다. 이번 파트의 마지막엔 많은 분들이 그간 고대하시던 씬(?)이 있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그리고 연재회수가 5일 간격인 건 편수가 너무 많아져서(?) 가능한 편수를 줄이고 편수당 용량을 늘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래도 탈고할 수 있는 용량이 한계가 있어서 자주 올리게 되면 용량을 짧게 끊을 수밖에 없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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