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30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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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에 들어 막 짐을 풀던 오르마즈는 엄마의 가방 안에서 무언가 심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깨졌나?”
별 생각 없이 짐을 연 그는 옷가지들 한쪽에 쟁여 있는 여러 개의 약통들을 발견했다. 그는 통 하나하나를 들어 약 이름을 확인했지만 알 수 없는 복잡한 전문 용어들 뿐이었다.
“뭐 하는 거니.”
그때, 뒤늦게 숙소에 들어온 아지드가 당황한 얼굴로 딸의 손에서 급히 통을 빼앗아들었다.
“왜 허락도 없이 막 열어보고 그래.”
아지드가 평소답지 않게 버럭 화를 내며 얼른 약통을 가방 안에 감추었다. 당황한 오르마즈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무슨 약이에요?”
“내가 아프긴 어디가 아파.”
아지드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까도 도착하자마자 여기 병원에 잠깐 다녀온다고 하셨잖아요?”
“피곤해서 영양제 받아온 거야. 별 것 아냐.”
아지드가 계속 둘러댔지만 이번엔 오르마즈도 끝까지 엄마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일 10시에 병원에 무슨 진단 받으러 가신다고 말씀하시는 거 들었어요. 저 바보 아니니까 자꾸 속이지 마세요.”
“체력이 떨어져서 여기 온 김에 부설 병원에서 공짜 종합검진 좀 받으려는 것뿐이야.”
“정말 그뿐이에요?”
오르마즈는 엄마의 움푹한 뺨과 고생의 흔적이 선명히 남은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애를 갖겠다고 하셨어요? 그 몸으로요?”
“괜찮아. 곧 나아질 테니까.”
아지드가 힘이 있다는 걸 보이려는 듯 오르가 들고 온 큰 가방을 번쩍 들려 했지만 힘이 달려 앞으로 중심을 잃고 말았다. 오르가 비틀거리는 엄마를 얼른 껴안고는 손에 들린 짐을 빼앗아들었다.
“엄마, 제발, 아이 하나만 더 낳겠다는 건 안 말려요. 대신 몇 년만 기다렸다가 낳으세요, 예? 그땐 저도 가이드 일로 돈 많이 벌 테고 엄마하고 동생들 혼자서 먹여 살릴 수 있어요. 제발 그때까지만 기다려 줘요.”
“그럴 시간이 없어.”
아지드가 내뱉은 한숨 같은 대답에 오르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엄마를 조용히 품에 꼭 안아주었다.
“엄마가 뭐 쫓길 게 있어서요?”
딸의 품 안에서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쉰 아지드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꼭 낳고 싶었던 아이였어. 제발, 이번만 엄마 뜻대로 놔둬 다오.”
할 말이 없어진 오르는 이번엔 엄마를 더 뭐라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그를 꼭 안고만 있었다.
남극성당 부설 병원은 트라카 교단이 운영하는 쿠트라스의 병원과 함께 콜로니 최고의 권위를 지닌 의료기관으로 유명했다. 다만 이곳은 임상 위주인 쿠트라스와는 달리 기초의학 연구 목적으로만 운영되는 폐쇄적인 조직으로 유명했다.
그렇다보니 이곳에는 주변에서 응급으로 실려 온 경우를 빼면 일반인 환자를 보기는 어려웠고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난생 처음 병원이라는 곳에 와 본 오르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고, 창문 하나 없는 이 갑갑한 연구소는 그저 ‘환자보다 의사가 몇 배는 많아 보이는’ 괴상한 병원 정도로만 보였다.
“따라오지 말라니까.”
아지드는 이곳까지 쫓아온 딸이 신경 쓰이는지 계속 주변을 의식하며 눈치를 주었지만 ‘엄마 진단받으러 들어가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가겠다.’는 이 고집쟁이 딸을 쉽사리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거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오르마즈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연구원이나 의사들만 드나드는 곳이다 보니 복도에 이정표라고 붙어있는 것들도 웬만한 보통 사람은 읽지도 못할 전문용어로만 쓰여 있었다. 오르는 길 한 번 안 묻고 이 미로를 지나 어디론가 향하는 엄마에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엄마 여기 와 보셨어요?”
“응.”
“제 기억엔 엄마 내내 코윈에만 계셨는데 대체 언제요?”
“옛날에, 결혼 전에.”
아지드가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근데 여기 원래 이렇게 군인들이 많아요?”
“응?”
딸의 예리한 질문에 아지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명색이 병원이라는 곳인데도 의사들 못지않게 많은 숫자의 군인들이 구석구석 무장을 하고 서서 주변을 엄중히 감시하고 있었다.
“글쎄다. 오래 전이라 잘 기억 안 나는데.”
아지드는 딸의 질문을 슬그머니 넘겨버리고는 또 방향을 돌렸다. 물론 오늘은 특별한 방문자 때문일 뿐, 평소 이렇지는 않았다.
“어라, 웬 창이래요.”
오르마즈는 사방이 꽉꽉 막힌 건물에서 처음 나타난 큰 창문에 급히 달려갔다. 남극성당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이 건물에선 해안가 주변 풍경이 훤히 한눈에 들어왔다. 북쪽의 짙푸른 해안선과 황금빛 모래사장, 그리고 그곳에서 햇볕을 쬐며 놀고 있는 ‘성년행사 참석 가족’의 모습도 보였다.
“오늘 날씨 좋네요. 동생들 공놀이 시켜놨는데 신났겠어요.”
오르가 화창한 하늘을 올려보며 싱글벙글했다. 하지만 해안을 내려다보며 잔뜩 굳어 있는 엄마의 표정을 의식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엄마?”
아지드는 어딘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별 대답이 없었다. 오르는 그제야 엄마의 시선이 멎어 있는 해안가 서쪽을 응시했다. 가족들이 놀고 있는 백사장 바로 옆, 높은 담장과 철조망이 둘러쳐진 그곳엔 정체 모를 말뚝 수십, 아니 수백 개가 줄을 맞춰 세워져 있고, 그 한쪽에는 높은 굴뚝이 있는 썰렁한 모양의 블록 건물이 보였다. 오늘은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오르가 엄마의 어깨를 짚었다.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린 아지드가 딸을 돌아보았다.
“응?”
“어딜 그리 봐요?”
아지드는 대답 없이 해안의 종교재판소 처형장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번 ‘임무’만 끝나면 그는 자신의 쓰임이 다한다는 것을, 언제든 저 형장에서 목이 잘려, 혹은 그보다 훨씬 끔찍한 방법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식들을 죽인 살인자를 주변의 압박을 무릅쓰고 살려두고 있는 대신관이 짐을 더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뱃속에 오르를 품고 도망쳤던 그 날부터 심판의 날을 하루 이틀 억지로 미뤄왔지만 어차피 그에겐 영원히 따라다닐 무거운 짐이었다.
“혹시라도 엄마한테 안 좋은 일 생기면 말이다…….”
아지드의 낮은 혼잣말에 오르의 표정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동생들은 빌루이 할아버지한테 맡기려무나. 너는 몰라도 동생들은 잘 챙겨주실 테니까. 대신 곧 생길 막내만은 꼭 네가 직접 지켜줘야 해. 알았지?”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낯빛이 창백해진 오르가 엄마의 팔뚝을 덥석 붙잡았다. 아지드가 파랗게 질린 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언제 무슨 일 생길지 모르는데 맏이한테 유언 정도는 남겨놔야 하지 않겠니.”
“…….”
“엄만 어릴 때부터 춥고 어두운 걸 굉장히 무서워했거든. 그래서 잘 때도 항상 머리맡에 불을 켜 놓곤 했단다.”
아지드는 잔뜩 굳어있는 딸에게 다시 웃음을 보였다.
“엄만 죽는 것보다 춥고 어두운 땅 속에 묻히는 게 더 무서워. 재로 뿌려져도 좋고, 짐승 밥이 되어서 황야에 흩어져도 상관없으니 죽은 후에도 환한 햇빛 아래에 있고 싶구나. 알았지?”
“그만 해요. 재수 없는 소리 말아요.”
“다른 건 몰라도 막내는 평생 지켜주겠다고 약속해.”
“아, 정말.”
오르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엄마에게 눈을 흘겼다.
“알았어요. 알았어. 제가 책임지고 평생 지켜 줄 거예요. 혹시 제가 먼저 죽게 되어도 누군가 저 대신 꼭 지켜주게 철저히 해 놓을게요.”
“네가 죽기는 무슨!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오르의 역공에 이번엔 아지드가 붉으락푸르락하며 버럭 성을 냈다. 그런 엄마에게 오르가 이번에도 능글능글하게 웃어보였다.
“거 봐요, 엄마도 듣기 싫죠? 그럼 됐어요, 저도 듣기 싫거든요. 그러니까 그만하시고 빨랑 들어가서 검진인지 검사인지나 좀 받으시라고요.”
오르마즈는 흥분해서 얼굴이 시뻘개진 엄마의 어깨를 뒤에서 살짝 껴안으며 조금 전 걷던 병원 안쪽 복도로 억지로 밀어붙였다.
딸의 굳고 어색해진 표정을 의식했는지, 아지드가 어깨에 걸쳐진 그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이번엔 사뭇 밝게 입을 열었다.
“아참, 어젯저녁 예배당에서 어딜 그리 열심히 쳐다봤니.”
“쳐다보다뇨?”
오르가 죄라도 지은 사람마냥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어제 합동 예배에서 보니까 예배엔 관심도 없어 보이더구나.”
엄마의 어깨를 안고 있던 오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저 기도문도 못 외는 엉터리 신도인 거 아시잖아요. 코 안 골았으면 됐죠.”
“오른쪽 앞자리 남자한테 정신이 홀랑 가 있는데 코 골 정신이 어디 있었겠니.”
결국 엄마를 못 당해낸 오르가 낄낄거리며 엄마의 목을 놓아주었다.
“아휴, 우리 엄마 못 당한다니까. 그건 또 언제 보셨대?”
아지드가 갑자기 딸을 휙 돌아보았다.
“너 보기에도 잘생겼든?”
“에에?”
엄마의 갑작스런 물음에 오르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곳에 온 첫날인 지난 저녁, 중앙 신전에서 있던 합동 예배는 ‘이름만 신도’인 오르에게도 퍽이나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중앙의 거대한 다하카르 신상 주변으로 수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 근사한 로브를 차려입은 신관이 그 위의 화로에 불을 올리는 광경은 촌뜨기 오르 남매들에겐 말 그대로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하지만 장관은 딱 거기까지였다.
신관의 지루한 설교와 토론이 이어지는 가운데 모처럼 ‘배부르고 등 따셔진’ 동생들은 따뜻한 방석 위에서 서로 기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오르도 엉덩이가 아파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한편으로는 고개를 앞뒤로 흔들어대는 지독한 졸음과 한판 씨름을 펼쳐야 했다.
우연인지, 아니면 잠을 깨려는 마지막 발악이었는지는 몰라도, 오른쪽 대각선 방향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한 남자에 예배 내내 그의 시선이 끌렸다. 사실 얼굴도 정면에서 제대로 보지 못했고, 목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었지만 멀리서 보이는 또렷한 얼굴선과 곧고 진지한 자세, 짧고 단정한 머리칼에서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요? 엄마 맘에 드셨어요?”
이번엔 오르가 엄마의 귀에 대고 능글능글하게 웃었다.
“우리 엄마 남자 보는 눈 빵점인줄 알았더니. 웬일이셔.”
“농담 말고, 너 보긴 그 남자 어떻든?”
아지드가 이번엔 진짜 진지한 얼굴로 묻자 오르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고 말고가 어딨어요? 얼굴도 못 보고 목소리도 못 들었는데. 허우대만 멀쩡하지 입 열면 깡통소리 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오르는 평소 남자라면 펄쩍 뛰던 엄마가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하며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하여간, 우리 엄마 너무 미남 좋아해서 탈이야. 보나마나 아빠도 얼굴만 보고 골랐을 거야. 제가 남극성당 다 뒤져서 그 남자 찾아드려요? 데이트 알선해 드려요?”
“무슨 소리니, 그분을 감히 어떻게…….”
순간 아지드는 말 실수에 당황한 듯 얼른 입을 다물었다.
“예? 그분이요? 누군지 아세요?”
난처해진 아지드는 대답을 못한 채 잠시 우물쭈물거렸다. 당황하고 있는 그에게는 퍽이나 다행히도, 모녀는 막다른 복도 끝, 큰 철문이 있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다.”
나갈 구멍을 찾은 아지드가 얼른 말을 돌렸다. 사람들 출입이 거의 없는 이 복도 끝 철문 앞에도 헤네티 경비병 2명이 서 있었다. 문에는 [알파-4]라는 뜬금없는 내용의 팻말만 붙어 있을 뿐 대체 뭘 하는 곳인지도 전혀 쓰여 있지 않았다. 철문 앞에 서 있던 병사들이 아지드의 얼굴을 보자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철문의 잠금장치를 끌렀다.
“넌 여기 있어.”
아지드가 딸에게 자리에 있으라며 손짓하고는 혼자서 다가갔다.
“늦으셨군요. 빨리 들어가십시오.”
병사들이 아지드에게 바로 철문을 열어주었다. 오르마즈도 별 생각없이 그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병사들이 번개같이 칼을 빼 그의 목젖을 겨누었다.
“넌 안 돼.”
“예에?”
자란 이후로 처음 누군가에게서 이런 위협을 받은 오르가 칼끝에 놀라 파랗게 질려 주춤거렸다. 기겁을 한 아지드가 딸을 겨눈 칼을 거칠게 밀어내며 버럭 화를 냈다.
“뭐 하는 거예요! 얘는 나 바래다주러 온 거라고요.”
병사들의 칼을 치워낸 아지드가 놀라 얼어붙은 딸을 황급히 밖으로 밀어냈다.
“난 혼자 가야 하니까 숙소에 돌아가 있어. 몇 시간은 걸릴 거야. 날씨도 좋은데 해안가에서 동생들하고 놀고 있어. 여기 너희들 즐겁게 놀라고 온 거지 약냄새 맡으려고 온 건 아니잖니.”
호전적인 경비병들에게서 딸을 멀찍이 밀어놓은 아지드는 총총걸음으로 철문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문 밖에 혼자 남겨진 오르마즈는 철문이 닫히는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조금 전 자신에게 칼을 겨누었던 경비병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오르마즈가 어색하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했지만 그들은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 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저, 여기 건강 검진하는 곳 맞나요? 검사 끝날 때까지 얼마나 걸려요?”
오르마즈의 물음에 병사가 낯을 찡그렸다. 오르는 엄마가 들어간 곳이 대체 어딘지 꼭 알고 싶었지만 병사들 인상을 보아하니 대답을 얻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원래 그렇게 말 안 하세요?”
오르가 병사의 눈앞에서 손가락까지 흔들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순간, 오르마즈는 그들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미세하지만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특이한 자극이 전해지는 것도 같았다.
‘이 남자들 대체 뭐지?’
인형처럼 선 병사들의 차림새를 혼자서 요모조모 관찰하던 그는 그들이 입은 검은 전포 밖으로 드러난 손등 가리개에서 크바르나 경호대를 뜻하는 전갈 문장을 보았다. 물론 지금의 오르는 이 문장이 대체 무얼 뜻하는지, 이들이 어떤 존재들인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가라고 했잖나.”
코앞에 선 아이가 자신들을 요리조리 관찰하고 있는 것에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병사가 이번엔 손으로 그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냈다. 하지만 이번엔 오르도 물러나지 않고 힘으로 버티어 보았다. 상대가 일반인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버티자 병사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당장 꺼지지 못해.”
이번 병사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다. 눈빛을 보아 다시 칼을 빼들기라도 할 것 같았다.
“알았어요. 누가 들어간댔나요. 그냥 여기 있는 건 괜찮죠?”
맥이 빠진 오르마즈는 그냥 문 앞에 버티고 있기로 했다. 이 차가운 느낌의 병원에 엄마를 혼자 놔두고 갈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엄마의 태도도 어딘지 이상했고, 정체모를 약을 계속 먹고 있는 것도, 사람 고치는 병원이라기는 왠지 살벌한 분위기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경비병들이 경계 섞인 눈길로 계속 곁눈질했지만 그는 못 본 척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계속 시간을 끌었다. 누구라도 지나가면 여기가 대체 무슨 병을 치료하는 곳인지 물어볼 참이었다.
30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이 외진 복도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다. 병원에 관해 잘 모르는 오르였지만 ‘건강검진’을 한다는 곳에 이렇게 아무도 안 드나드는 건 뭔가 미심쩍었다. 그냥 검진을 받으러 온 것이라는 엄마의 거짓말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내내 복도 맨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초조하게 손톱만 물어뜯고 있던 오르마즈는 처음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지.”
복도로 다가오고 있는 건 어른 허벅지만한 큼직한 은색 깡통을 한 손에 든 실험복 차림새의 사람이었다. 그 깡통 위엔 공용어도, 바람어도, 하다못해 고대어도 아닌 ‘μ’라는, 일반에는 전혀 안 알려진 표시가 쓰여 있었다. 고향행성 문자를 전혀 못 읽는 오르로서는 그 의미가 ‘뮤-세네피스’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저어, 저기요.”
오르가 먼저 말을 걸었지만 그 사람은 짧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성큼성큼 그의 앞을 휙 지나쳤다.
“뭐 좀 물어봐도…….”
역시나 이번에도 그의 물음은 소용이 없었다. 이곳 사람들의 경직되고 답답한 태도에 오르도 신경질이 버럭 솟았다.
“여긴 보온 도시락 배달도 제복입고 하나 봐요.”
짜증이 난 오르는 말도 통하지 않는 경비병에게 혼자 농담을 하며 도로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 그의 말을 들은 ‘도시락 배달원’이 그제야 힐끔 시선을 주었다.
“야, 너 이게 지금 도시락이라고 했냐?”
잔뜩 신경질 섞인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였다. 오르는 아차 싶은 생각에 이를 드러내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헤헤, 이제야 봐 주시네요, 저 궁금한 게…….”
오르가 능청을 떨며 웃었지만 이번엔 그의 능글능글한 재치도 역효과만 내고 말았다.
“내참, 기분도 뭣 같은데 아침부터 별 그지 같은 넝마주이 새끼가 다 시비네.”
모욕에 가까운 언사에 오르도 울컥 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아마 저 여자는 여기 오기 전 이미 다른 일로 기분이 잔뜩 상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여자도 나름 화가 날 이유가 있겠지만 오르에게도 이 성깔 사나운 여자 연구원의 첫인상이 썩 좋게 각인되지는 않았다.
“제가 촌구석 출신이라 그런 거 처음 봤어요. 관심 좀 끌어보려고 제딴엔 재밌게 말했는데 실례였다면 죄송해요.”
당황한 오르는 순진한 척 눈웃음으로 그 연구원을 녹여보려 했지만 두툼한 실험용 보안경 때문에 안이 제대로 보이지를 않아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뭐, 관심? 참, 나, 어린 게 입만 살아서…… 말하는 것도 재수네.”
관심을 끌려 했다는 오르의 말을 오해한 여자는 조금 전보다 더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 막 언성을 높이려던 여자의 시선이 오르의 그레이오팔과 딱 마주쳤다.
“자, 잠깐, 너…….”
그 여자는 조금 전까지 뱉으려 했던 막말을 입 안으로 꿀꺽 삼켰다.
“그게 원래 눈 색깔이냐?”
“이런 개성 넘치는 칼라렌즈는 어디서도 안 팔아요.”
일단 주제를 돌리는 데 성공한 오르가 마지막 한 번만 더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놀란 표정의 여자는 바닥에 쭈그려 앉은 오르마즈를 한참이나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또 뭐 잘못됐나요.”
여자의 시선을 피하며 웅크리고 있던 오르마즈가 참다못해 그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오르가 고개를 들자, 여자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너……좀 일어나 봐봐.”
“왜요? 사과했잖아요.”
“빨리, 어른이 시키잖아!”
연구원의 강요에 오르가 주변 눈치를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긴 다리와 팔, 쭉 뻗은 단단한 몸매와 골격이 조금씩 펴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른 행세를 하던 그 연구원은 자신보다도 더 큰 이 아이의 키에 순간 당황했다.
“맙소사. 시그마가 이랬어?”
“예?”
오르에게 바싹 다가선 여자는 호리호리하고 균형 잡힌 몸매, 수려한 이목구비를 위아래로 쳐다보며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는 장갑과 마스크를 휙 벗고는 갑자기 그의 가슴과 목, 얼굴을 더듬으며 옷깃 안에서 느껴지는 체취를 가슴 깊숙이 들이켰다.
“오호, 괜찮은데?”
“아, 이봐요.”
여자의 난데없는 접근에 온몸 가득 소름이 돋은 오르가 멈칫멈칫 뒤로 물러섰다. 뺨 아래 보이는 얼굴만 봐서는 꽤 미녀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다짜고짜 살을 맞대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난 말이다, 나중에 네…….”
여자는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다 보이려는 듯 보안경을 벗으려 했다. 그때, 철문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머리를 휙 내밀었다.
“밀리타 박사님? 빨리 안 들어오고 뭐 하십니까. 지금 기다리고 계신다고요.”
“응? 아, 알았다.”
당황한 여자는 벗었던 마스크를 얼른 다시 눌러쓰고 ‘보온도시락’도 왼손에 단단히 움켜쥐었다. ‘박사’라는 말에 오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신경질적인 여자도 의사였던 모양이었다. 병원이니 당연할 수도 있지만.
그 여의사는 문 안쪽과 오르마즈를 몇 번 번갈아 쳐다보고는 인사말도, 조금 전의 험담에 대한 사과도 없이 휙 돌아 문에 들어섰다.
‘별 싱거운 여자 다 봤네.’
희롱당했다는 생각에 적잖이 기분이 상한 오르는 여자가 떠나자 도로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그는 무심결에 여자가 사라진 곳을 돌아보았다.
‘어.’
같은 순간, 문 건너편의 그 여의사도 통을 든 채 복도 중간에 또 멈춰 서서 그를 다시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무언가 할 말이 절실히 있는 듯 보였지만 처음부터 어긋나버린 인상 때문인지, 저 여자와는 더 이상 만나고 싶지도, 대화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보다는 그 손에 들린 ‘이상한 도시락통’에 더 눈길이 갔다. 어쩌면 저 통이 엄마에게 쓰일 무언가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찬 바닥에 도로 웅크려 앉은 오르마즈는 엄마가 나오기만을 또 속절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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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 다녀오느라 연재가 하루 늦었습니다.
(대신 연재분량이 좀 많습니다.^^;;)
하루 늦었지만 메리 추석 기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