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32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
.
.
아트위야가 아직 경험 짧은 대신관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데이’는 ‘지도자’라는 뜻의 아라무트 방언입니다. 정해진 회수의 암살 임무를 탈 없이 성공하고 최고지휘관에까지 오른 피다이에게만 주는 가장 명예로운 호칭이랍니다. 500년 동안 데이 칭호를 받은 피다이가 2명인가 밖에 안 되었다는데 저런 놈을 보낼 정도면 영감도 이번 일을 엄청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이디나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저깟 놈 이름이야 우리가 알 바 아니고, 저자에게 황태후를 넘겨달라고요? 영감이 12번 잔딕을 놓고 우리와 황실을 저울질하겠다는 건가요?”
“어차피 황제 쪽에서 1차로 패를 쥐었으니 저울질이라기는 뭣하지요. 황제 쪽에도 이 내용을 전했다는 걸 보니 황태후를 놓고 양쪽 싸움을 붙인 거지요. 하여간, 그 영감 못된 버릇은 여전하다니까.”
“황태후라…….”
이디나가 눈가를 찡그렸다. 사실 그는 세네피스를 실제로 만난 일도 없었고, 그저 아는 건 정보 보고서에 나온 동향분석과 옛 일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아버지 아스탈이 광적으로 집착했던 미모의 황태후이고, 그에게는 절반 고모뻘이 되는 그레이오팔이라는 정도였다.
“황제가 자기 살자고 어미를 내놓을지, 어미의 인격을 지켜주고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할지 흥미진진해지는데요.”
아트위야가 음산하게 웃었다. 혼자서 열심히 떠들던 아트위야는 이디나가 멍해진 얼굴로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힐끗 응시했다.
“대신관님?”
잠시 말이 없던 이디나가 테이블 위의 편지를 응시하며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황제는 응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이디나는 지난번 보았던 황제의 눈빛과 당당한 자태를 떠올리며 혼자서 기이한 웃음을 지었다.
“혹시라도 응한다면 정말로 실망이지요.”
“예에?”
“하지만 응하게 만들겠습니다. 원치 않아도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가 어미를 갖다 바치고 12번 잔딕을 차지하게 하신다고요?”
“물론 그건 아니지요.”
이디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세네피스는 딸의 품으로 영영 못 돌아갈 테고, 황제는 소중한 여자 하나를 잃겠죠. 어차피 우리도 아버지 장례식에 그 여자가 필요해요.”
이디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아트위야가 정말 중요한 내용을 덧붙였다.
“황제 자신의 목숨도 끝장이어야 한다는 걸 빼먹으셨군요.”
“그건 당연하고요.”
이디나가 고개를 숙이며 계속 웃는 척했다.
아트위야가 그와 피다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황제 쪽에서도 그 사실을 알았다면 황태후에 대한 경비를 강화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잡아오시려고요.”
“미련하게 꼭 잡아와야 합니까?”
이디나가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단하의 피다이를 불렀다.
“네 교주의 특명 사자라고 하니 묻겠다. 황태후의 경비가 강화되었을 테지만 내 손을 써서 네가 세네피스 황태후에게 접근할 수 있게 해 주마. 황태후에게 접근만 하면 말 몇 마디로 데려갈 수 있을 거다. 그럼 시그마 오르마즈의 시체를 우리에게 주겠느냐?”
‘데이’는 안쪽에서 들려온 낯선 여자 목소리에 짧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 무언가 생각한 후 곧 눈빛을 바꾸었다.
“알겠습니다.”
데이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마약중독자라는 오명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굵은 목소리였다.
“대신, 제가 뮤-세네피스를 데리고 아라무트의 우리 궁전에 도착해 하룻밤을 보내게 한 후에 시체를 넘겨드리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뮤-세네피스’라고 쓰인 이상한 통을 든 여의사가 안으로 들어가고 거의 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철문에는 여전히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오르는 또다시 찬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계속 그 앞을 묵묵히 지켰다.
기다리다 지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꾸벅꾸벅 졸던 오르는 철문이 열리는 부저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엄마?”
철문이 열리더니 이번엔 흰 실험복 차림의 사람들 무리가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무장한 두 명의 군인들을 선두로 마스크를 쓴 서너 명의 의사들이 성큼성큼 복도로 나섰다. 이번엔 진짜 의료진들이 분명했다.
“저기요, 잠깐만요.”
급히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오르마즈는 그들 중 제일 앞서서 나온 큰 키의 남자 의사에게 말을 걸려 겁도 없이 행렬 앞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대답이나 관심이 아니고 웬 무지막지한 주먹이었다.
“웁!”
놀란 오르마즈는 반사적으로 몸을 뺐지만 아직 싸움도 할 줄 모르는 그가 피하긴 주먹이 너무 빨랐다. 쇠 징이 박힌 호위 군인의 주먹 모서리가 그의 뺨을 무자비하게 찢고 지나갔다.
“아야.”
주먹을 비껴맞고 턱이 휙 돌아간 오르마즈가 찢어진 뺨을 쥐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먹을 휘두른 군인이 바닥에 넘어진 오르의 목을 번개같이 밟으며 칼을 겨누었다.
“너 뭐야.”
모두가 어어하는 새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한 오르마즈, 함께 있던 의료진도 어안이 벙벙했다. 오르마즈의 목을 더 세게 밟으려던 군인은 그의 이마에 박힌 사파이어 문장과 무지개빛 눈동자에 멈칫했다. 차림새를 보아 일반 병사가 아니고 사관이나 장교 같았다.
그때, 조금 전 오르가 말을 걸려 했던 큰 키의 남자의사가 칼을 쥔 장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린애한테 뭐 하는 짓이냐.”
장교를 저지하고 오르마즈를 막 돌아본 의사의 어깨가 놀라움에 들썩 했다. 보안경 안쪽으로 오르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을 뿜었다. 목에 칼이 들어온 오르가 얼굴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죄송해요, 아까 우리 엄마 들어갔는데……상태가 어떠신가 궁금해서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의사가 방금 오르마즈를 때린 병사를 험악해진 눈빛으로 휙 노려보았다.
“물러나라,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느냐.”
그 의사의 명령에 호위병들과 의사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얼른 한 발 물러났다.
“좀 괜찮니?”
의사가 오르마즈에게 바싹 다가와 장갑과 마스크를 벗었다. 30대 초 정도의 수명개조 당대 같았고 품위와 원숙한 느낌을 주는 정말 잘생긴 미남자였다. 부리부리한 암갈색 눈동자에 남성호르몬이 묻어나는 선 굵고 강인한 인상이었다. 오르는 이 남자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을 퍼뜩 받았다.
“네가 아지드 레즐린 부인의 딸이구나.”
그 정체불명의 의사가 넘어진 오르마즈에게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오르는 그의 이름표부터 보려 했지만 뒤에 있는 다른 수행 의사들과는 달리 그의 가슴엔 명찰도 없었다. 이마에 보석이 없는 걸 보니 간택자나 성직자는 아닌 듯 싶었지만 어쨌든 꽤 높은 의사는 분명해 보였다.
“미안하다, 병사들이 긴장해서 실수했나 보다. 상처가 났구나.”
눈치를 보던 오르마즈가 조심조심 이 남자 의사의 손을 잡았다. 남자의 손은 힘든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일 없는 듯 솜털처럼 보드라웠다. 도리어 힘든 포터 일로 거칠 대로 거칠어진 오르의 손이 남자의 고운 손에 상처를 내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오르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는 피투성이가 된 뺨을 더러운 면 손수건으로 꾹 눌렀다.
“괜찮아요, 엄마가 꿰매주실 거예요.”
오르의 대답에 남자 의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여긴 사방천지에 의사들이야. 상처가 심상치 않으니 좀 보자.”
그는 오르의 뺨에 댄 더럽고 거친 손수건을 조심조심 들어냈다. 입고 버리는 옷을 기운 것이다 보니 손수건이라기보다는 사실 그냥 누더기 천이었다.
“이런, 너무 올이 거칠구나. 내 것이 낫겠다.”
의사는 오르의 피로 범벅이 된 거칠거칠한 천을 주머니에 넣고는 대신 자신의 고운 실크 손수건을 상처에 다시 대 주었다. 이상하게도, 남자의 손이 닿은 순간 상처의 아픔이 확 줄어드는 것 같았다.
“상처가 크구나. 아무래도 꿰매던지 접착해야겠다. 내 아랫사람이 잘못했으니 내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니.”
오르마즈가 남자의 표정부터 살폈다. 그의 얼굴엔 정말로 미안해하고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위층에 내 진료실이 있으니 같이 가자꾸나. 내 직접 손 봐 주마.”
“엄마가 언제 나오실지 몰라요. 여기서 기다려야 돼요.”
“네 엄마는 처치가 끝나서 지금 자게 해 봤다. 한두 시간 더 잘 거야. 그 전에 치료해줄 테니 걱정 말고 따라오렴.”
남자는 수행 의사들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손짓하고는 머뭇거리는 오르마즈의 팔을 붙들고 걷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그와 함께 걷기 시작한 오르마즈는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거듭 쳐다보았다. 그가 이렇게 계속 시선을 주는 건 그저 이 남자 의사가 보기 드문 미남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저어, 혹시요.”
오르가 남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응?”
“전에 저 만난 적 있지 않으세요? 낯이 익은데요?”
남자가 잠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곧 웃음으로 그 어색함을 덮어버렸다.
“글쎄다, 잘 모르겠는걸.”
“정말 본 기억 있는데.”
오르가 계속 기억을 되짚는 모습에 남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의 옆얼굴을 빤히 올려보던 오르가 그제야 이마를 탁 쳤다.
“맞다, 어제 저녁에 신전 예배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바닷가 등진 자리요, 앞에서 열 번째쯤 되려나? 양옆에 덩치 큰 남자 둘 앉아있었죠?”
살인이라도 저지른 죄인마냥 바싹 긴장했던 남자가 안도한 듯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랬던 것 같다. 어떻게 알았니.”
“제가 선생님 뒷줄에 있었거든요.”
오르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어제 예배당에서의 그 남자를 찾았다는 생각에, 그리고 엄마를 쓸데없이 오해했다는 생각에 킬킬거리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앞자리 남자가 누군지 엄마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이런저런 갖은 유치한 상상을 했던 그로서는 일단 의문이 풀린 셈이었다. 예배당에서 담당 의사를 만났으니 엄마가 알아본 것도 당연했다.
“네 이름은 뭐니?”
의사가 다정하게 물었다.
“아프라시아 오르마즈 카파키요.”
“그렇구나, 아프라시아야 흔한 이름이고……오르마즈가 무슨 뜻인지는 아니?”
“그럼요. 바람어로 ‘지혜로운 자’라는 뜻이죠.”
“오호, 네가 바람어를 알아? 어지간한 신학생들도 더듬더듬거리는 그걸?”
“엄마가 아주 어릴 때부터 가르쳐 주셨어요. 평상시엔 공용어 써도 엄마하고 단둘이 대화할 때나 공부할 때는 꼭 바람어만 쓰게 하셨거든요. 학교는 한 번도 안 갔어도 엄마가 제 선생님이에요.”
“그래……엄마가 철저히 가르쳤구나.”
남자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오르마즈에겐 이 남자의사와 노닥거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었다.
“우리 엄마 괜찮으신 거죠?”
“네 엄마가 왜?”
“엄마 요즘 이상한 약 계속 드셨어요. 갑자기 음식도 가리기 시작하셨고요. 자식들 앞에서 워낙 강한 척 하시려는 분이라 병이 있어도 말할 분이 아니거든요.”
오르마즈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꼬깃꼬깃한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그 위엔 복잡한 전문 용어 몇 개가 줄줄이 쓰여 있었다. 기억에 의지해 써서 철자는 엉망이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이거 엄마가 드시던 약이에요. 무슨 약인지 알려줄 수 있으세요?”
오르마즈가 진지한 얼굴로 계속 물었다. 복도 중간에 멈춰 선 의사는 잔뜩 걱정이 어린 이 소녀의 얼굴과 쪽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곧이어 허탈하게 웃음을 지었다.
“딸 정말 잘 키웠구나. 너도 정말 좋은 엄마를 뒀고.”
의사의 대답을 엉뚱하게 해석한 오르의 표정이 일순간 창백해졌다.
“그럼 큰병이 있으신 거예요?”
의사가 계단실 문을 열며 별 것 아니라는 듯 빙긋 웃어보였다.
“네 엄마 병 있어서 들어온 거 아냐. 그냥 임신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뿐이야. 이건 평범한 영양제하고 호르몬 보충제란다.”
의사가 웃으며 쪽지를 돌려주었다.
“정말이요? 정말 고마워요.”
오르마즈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쪽지를 옆의 쓰레기통에 휙 던져버렸다.
이 남자 의사를 따라 위층 병동에 올라온 오르는 ‘알파 진료실’이라는 곳에 들어섰다. 안에는 특별한 건 없었다. ‘내과의/유전학 석좌교수 나즈라 라카드’라는 명패가 놓인 사무용 책상과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들, 의료용구를 두는 수납장과 간이 진료대 하나가 전부였다.
진료대에 걸터앉아있는 오르에게 남자가 문을 잠그고 다시 다가왔다.
“이런 예쁜 얼굴에 흉터라도 남으면 어쩌려고.”
의사가 오르마즈의 뺨에 댄 손수건을 아프지 않게 조심조심 들어냈다.
“이런, 멍청한 경호대장 놈이 속까지 완전히 찢어놨구나. 안쪽은 한 번 꿰매고 나서 접착해야겠다.”
남자의 따뜻한 숨결이 얼굴에 와 닿자 오르가 살짝 눈동자를 움직여 그를 쳐다보았다. 약속이나 한 듯, 남자도 그의 무지개빛 눈빛을 마주보았다. 오르마즈는 남자의 눈길이 무얼 뜻하는지 직감했지만 지금까지 치근덕거리던 많은 남자들과는 달리 그의 이런 시선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저게 의사선생님 이름인가요?”
오르가 책상 위 명패를 가리켰다.
“널 이리 해 놓고 의사선생님 소리를 들으니 편치 않구나. 그냥 나즈라라고 부르렴.”
“근데 내과의나 유전학자도 상처를 꿰매요?”
오르의 당연한 물음에 의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과의도 봉합 정도는 해.”
찢어진 오르마즈의 뺨에 국소마취제를 바르려 했던 그는 생각을 접고 도로 약통을 내려놓았다. 그는 대신 왼손의 진료용 장갑을 벗고 오르마즈의 귀 밑을 맨손으로 살며시 붙잡아 주었다. 남자의 보드라운 손끝이 뺨을 짚자 이번에도 상처의 아픔이 마술처럼 싹 사라졌다.
“마취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오르마즈는 이유도 모른 채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늘이 살을 뚫을 때 짧게 따끔한 느낌이 있었지만 이 이상의 아픔은 없었다. 의사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안 아프지?”
오르마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즈라, 아니 야푸르 대신관의 입가에도 짧게 웃음이 번졌다.
“남극성당엔 처음이지? 네 엄마가 그러더구나.”
“예. 아케메니아까지 올 돈이 없어요.”
무언가 망설이는 듯 잠시 말이 없던 야푸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모레 비번인데……너도 괜찮으면 이번 일도 사과할 겸 이 주변 구경시켜주고 싶은데 어떠니.”
“예에?”
난데없는 제안에 오르마즈가 눈동자를 살짝 움직여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이렇게 서툴고 갑작스런 접근은 변변한 데이트 경험 없는 소녀에게도 기가 막힐 정도였다.
‘이 남자 허우대만 멀쩡하지 바람둥이는 죽어도 못 되겠네.’
오르가 짐짓 야무진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모레는 이번 성년자 행사 온 사람들 하루 종일 교리 강연회 들어야 돼요. 성년자들은 특별교육까지 들어가야 하거든요.”
“괜찮아, 성년자 강연회 담당자가 아는 사람이니까. 넌 빼 달라고 하마.”
야푸르가 오르마즈의 눈을 간절히 쳐다보며 다시 물었지만 그는 무지개빛 큰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을 뿐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 16살 소녀는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서둘렀나 보다.”
야푸르가 그제야 실수를 깨달았는지 머쓱하게 웃었다. 오르가 쉽게 넘어오지 않자 도리어 입장이 뒤바뀌어 이젠 그 쪽에서 애가 타는 표정이었다.
“내 요즘 부쩍 외로워서 갑자기 말이 튀어나왔단다. 그냥 하루 말벗만 해 주렴.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으니.”
“전 겨우 16살이에요. 나이만 성년이지 아직 세상물정도 모르고요. 라카드 선생님 말벗해 드리긴 제가 너무 어린 것 같아요.”
오르마즈가 야푸르의 간절한 눈빛을 살며시 외면하며 다시 냉랭하게 답했다.
“엄마가 결혼한 남자하고는 10분 이상 단둘이 있지 말랬어요. 괜한 오해 살 짓은 안 해요. 가벼운 애로 손가락질당하는 건 자존심 상하거든요.”
“내가 어딜 봐서 결혼한 남자 같니.”
야푸르가 왼손을 내보였다. 그곳엔 결혼반지도, 결혼반지가 끼어 있던 자국도 없었다. 이번에 놀란 건 오르마즈 쪽이었다. 수명개조 당대에, 이렇게 잘생긴 외모에 이 정도 지위에 있는 남자라면 당연히 가정을 꾸리고 있으리라 넘겨짚었던 터였다.
야푸르는 할 말이 막혀 멍하니 있는 오르마즈의 뺨에서 매듭을 마무리하고는 접착제를 조심조심 발랐다.
“왜 외로워요? 선생님처럼 높고 주변에 사람도 많은 분이요.”
“……위만 보며 오르다보면 어느 순간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되지.”
야푸르가 오르마즈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막상 정상에 서 보니 세상에 아무도 기댈 사람이 없더구나.”
오르마즈는 이 말이 무얼 뜻하는 건지 아직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남자의 눈에 잠시 스친 묘한 슬픔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곧 표정을 추스르며 접착제 뚜껑을 닫고 반창고로 마무리를 해 주었다.
“덧나지만 않으면 며칠 내로 나을 것 같다. 이제 괜찮니?”
야푸르의 손바닥이 오르마즈의 상처 난 뺨 위를 부드럽게 덮었다. 오르마즈는 그의 체온을 느끼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모레는…….”
야푸르는 승낙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그의 눈을 애타게 쳐다보았지만 그의 손이 닿아있는 동안 소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거절당했다고 생각한 야푸르는 한숨을 내쉬며 치료가 끝난 도구들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중에라도 맘이 바뀌면…….”
“이거 무슨 향기에요?”
“응? 소독약 말이냐?”
“선생님 쓴 향수요.”
야푸르의 얼굴이 마치 소년처럼 발그스레해졌다.
“베르가못 향이란다.”
“선생님한테는 이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오르마즈는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리더니 가죽주머니로 잘 싸 놓은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주머니를 펼쳐 본 야푸르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이 소녀를 쳐다보았다.
“네가 이런 걸 어디서 났니.”
“사냥 나갔다가 구한 거예요. 마구스님들하고 명문가 하렘에 진상품으로 올라가는 거래요. 향기가 희한해서 약간만 떼어서 갖고 있었어요. 이런 진짜는 도시에선 돈 있어도 구하기 힘들다니까 가지세요. 가게에 맡기면 향수로 만들어줄 거예요.”
야푸르는 주머니에 소중히 싸인 작은 천연 사향조각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냥 받긴 너무 귀한 것 같구나. 너도 넉넉하지 않잖니.”
“어차피 엄마 위해 쓰려고 모은 거예요. 엄마가 좋은 사람한테는 아끼지 말고 베풀랬어요. 우리 엄마 꼭 잘 치료해 주세요.”
순간 목이 멘 야푸르는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8년 전, 간택 심사장에서 꼬마 오르가 주었던 사과절임도 상자에 넣어놓고 썩을 때까지 거의 몇 달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던 기억이 났다. 작은 손으로 그것을 건네주던 어린 소녀의 해맑은 웃음과, 잔딕 수술을 앞두고 의식을 잃어가던 절망어린 표정이 그 위에 동시에 겹치면서 그는 한동안 제대로 먹을 수도, 편히 잘 수도 없었다.
“내가 너한테 빚을 너무 많이 졌구나.”
야푸르가 메이는 목소리를 억지로 감추었다. 소녀는 자신의 머리에 시한폭탄을 심어놓은 원수 같은 남자를 못 알아본 채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다. 조금 전 이곳에 올라올 때, 그가 낯에 익는다며 기억을 되짚던 이 소녀의 모습에서 느꼈던 공포감과 죄책감은 법정에서 취조를 당하는 살인범이 이럴까 싶은 정도였다.
“모레엔 엄마하고 동생들은 정오부터 밤늦게까지 가족 강좌 들어가야 할 거에요.”
오르마즈가 능청맞게 대답하며 옷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의 말뜻을 읽어낸 야푸르의 상기된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럼 ……내 점심때 맞춰서 숙소 앞에서 기다리마. 꼭 나와 주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현재 설문은 세네피스와 네페티가 치열하게 1위를 다투고 있고, 솔이 생각외로 선전중이네요. ㅎㅎㅎ
밀리타와 이디나는 안습입니다. 이디나는 외모 때문이라 쳐도 밀리타는 미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박덩어리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