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34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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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행사는 세데스가 지난해 치른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부제학, 직제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제학 세네피스 황태후가 그들에게 치하의 말을 해 주고 우수생도들과 가벼운 입맞춤과 포옹을 나누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제국에서 가장 품위 있는 여인’으로 꼽히는 황태후와의 포옹은 과거 비슷한 경험을 했던 페로조차 ‘짜릿하고 황홀했다’고 털어놓았을 만큼 졸업생들의 로망이었다.
올해도 연단에 오른 졸업생도들의 갖은 기행(奇行)은 지루한 졸업식의 명물이고 양념이었다. 고거지학과 수석 생도는 등에 접착제를 묻히고 나타나 생각 없이 그를 껴안았던 세네피스에게 곤욕을 치르게 했고, 경세학과 수석 생도는 무릎을 꿇고 두 손 안에서 꽃다발을 피게 만드는 마술을 부려 세네피스의 박수와 두 번째 포옹을 받기도 했다.
엄격한 파예드라면 기절초풍할 행동들이겠지만, 자유로운 학풍의 이곳에서는 ‘졸업식에서만 허용되는 젊은이들의 호기’ 정도로 간주되어 나름 이벤트로 뿌리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환한 웃음으로 치장하고 그 모든 인기를 한 몸에 모은 후 행사장에서 돌아서는 세네피스 본인의 차갑게 얼어붙는 표정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네피스는 그들에겐 어차피 손이 닿을 수 없는 다른 세상에 사는 선망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가까이할 수 없는 건 세네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현을 미리 청해놓았던 세데스가 태학당 꼭대기에 올랐을 때, 그는 실내가 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원래 책과 장식품, 폐쇄적인 작은 방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지만 장식품이 있던 자리는 경비병들로 채워졌고, 문짝은 모두 뜯겨나가 훤히 트여 있었다. 어디 하나 사각지대가 없도록 트여 있으니 누군가 몰래 침입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대제학실의 달라진 풍경에서 세데스는 이 방의 주인이 무언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이 피다이가 굳이 자신을 통해 황태후를 만나려 하는 이유도 대충 알 것 같았다.
대제학실 출입문도 평소 달려있던 고풍스런 나무문 대신 이젠 금속 프레임이 달린 단단한 강화유리 문이 달려 있었다. 대나무 발을 걸어놓기는 했지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어차피 바로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세데스를 침착하고 고운 목소리가 맞아주었다.
“자네 표정을 보니 분위기가 달라진 걸 의식하고 있군. 세데스 델루지 경.”
세데스는 얼른 자리에 꿇어앉아 절을 올렸다. 그가 생도였을 때처럼, 세네피스 황태후는 여전히 품위와 권위를 겸비한 대제학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되는 긴 졸업식 행사를 막 끝내고 돌아온 그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전혀 흐트러진 기색이 없었다.
“어서 오시게, 내 솔직히 그대가 날 찾는다 해서 깜짝 놀랐다네.”
세네피스가 이 불편한 제자에게 자연스런 웃음을 보였다. 황제와 델루지 가의 애매한 적대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데스 앞에서 사리 분명한 훌륭한 스승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데스는 대제학실 내부부터 얼른 확인했다. 예상대로 중무장한 가디언 3명이 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치안대를 제외하면 무장을 금지하고 있는 남극성당 규칙에 분명 어긋난 행동이었다.
방을 둘러보는 세데스에게 세네피스가 웃으며 말했다.
“어디 다녀오고 보니 경호실 친구들이 내 이름을 팔아서 하룻밤만에 대제학실을 이 꼴을 해 놨다더군. 황상께서 이 어미의 안전에 부쩍 예민해지신 모양이야. 그분 명으로 규정을 ‘살짝’ 좀 어겼다네. 규율위원회에 신고하면 할 말 없네만.”
세네피스는 세데스를 따라 들어온 피다이 쪽에 그제야 시선을 주었다. 그의 눈가에 살짝 경계감이 스쳤다.
“저자는 누군가?”
세데스는 대답 대신 가디언들을 돌아보며 작게 말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
“긴히 용건이 있으니 가디언들을 내보내 주십시오.”
세네피스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표정에 도도함을 덧씌우며 태연히 대답했다.
“자네가 이 자리에서 대놓고 날 해칠 만큼 멍청한 친구가 아니라는 건 알아.”
세네피스는 가디언들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당황한 가디언 리더가 입을 열었다.
“폐하, 황상께서 어떤 경우에도…….”
“유학자가 한 번 뱉어놓은 말을 어찌 유야무야 넘긴단 말인가. 너희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가마.”
세네피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당황한 가디언들이 잔뜩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물러났다.
“그럼 밖에서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가디언은 세데스와 그 동행자를 노려보며 무기를 쥔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무언의 협박이었지만 세데스는 본 척 만 척했다.
세네피스에 쫓겨 자리를 비운 가디언들은 방음유리 밖에서 눈을 크게 부릅뜬 채 계속 안을 살피고 있었다. 세데스는 그들이 입을 읽지 못하도록 문을 등지고 세네피스를 향해 섰다.
“사실 제 용무로 온 건 아니옵니다.”
세데스는 머리를 조아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 자가 황상의 병에 관해 아무도 모르게 드릴 말씀이 있다 하여 데려왔습니다.”
“뭐?”
‘황상의 병’이라는 말에 세네피스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의 무지개빛 눈가가 가늘게 떨렸지만 그는 정적 앞에서 값싸게 놀라지도, 대놓고 화내지도 않은 채 잠시 시간을 끌었다.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키던 세네피스가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일단 시작을 끊었다.
“혹시라도 허튼 소리를 한다면……이 자리에서 내 저자의 목을 끊어낼 테니 각오해라.”
세데스가 기 싸움을 벌이려는 세네피스에게 조용히 반격을 했다.
“송구하오나……저자는 피다이입니다.”
순간 세네피스의 입가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망토를 쓴 사내와 세데스를 번갈아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날 속였다고 인정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아라무트 암살교단의 ‘영감’이 황상의 병을 낫게 할 수단을 갖고 있다며 독대를 위해 제게 다리 역할을 부탁한 겁니다. 전 내용조차 모릅니다.”
세데스는 상황을 설명하며 중간에 낀 교단을 슬쩍 빼버렸다.
“이자가 가져온 문서입니다.”
그는 아라무트의 영감 직인이 찍힌 위임장을 세네피스에게 내보였다. 그곳엔 이 남자가 암살교단 피다이들의 지휘관인 ‘데이’라는 사실과, 이 남자에게 협상의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원래 영감의 사자는 황금단검을 가져오는 게 전통이지만 입구의 검문 때문에 이것밖에 못 가져왔습니다.”
내심 맘이 불편해진 세데스가 세네피스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솔직히……저도 이자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독대를 원치 않으시면 물러나 계십시오.”
세데스는 허리띠 속에 감춘 칼자루를 슬쩍 내보였다.
“일단 독대하시면 그 뒤는 저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던 세네피스는 세데스를 살며시 밀어내고는 피다이에게 다가갔다.
“망토 벗어라.”
피다이는 순순히 망토를 벗고 얼굴을 내보였다. 세네피스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오금이 저려 주저앉을 이 무서운 남자에게 바싹 다가서서 구석구석 살폈다. 남자는 중키에 체격도 크지 않았고, 두 뺨이 움푹 들어간 마른 얼굴에는 훈련이나 전투 중 생긴 듯한 수많은 흉터와 잔주름이 보였다.
약물 때문인지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와 목과 손발의 뱀처럼 우둘두둘 돌출된 핏줄이 특이하긴 하지만 피다이라는 것을 모르고 마주했다면 그리 위압감을 줄 외모는 아니었다.
“피다이 맞군. 전에도 봤어.”
세네피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황상의 병을 고칠 방법 때문에 날 독대하러 왔다고?”
피다이 ‘데이’가 미동도 않은 채 기계처럼 대답했다.
“저 여자를 내보내 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이가 세데스를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세네피스는 비밀을 알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지, 아니면 이 광적인 살인마에게서 일단 자신부터 지켜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겐 갈등할 이유조차 없었다.
“나가 있게, 세데스 경.”
세네피스가 데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세데스에게 문 밖을 가리켰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군.’
세데스는 내심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데이만 놓아둔 채 혼자 대제학실을 나섰다.
그가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세네피스가 다시 그자에게 물었다.
“이제 말해 봐라. 너희 교주가 어떻게 황상을 살릴 수 있다는 건지.”
세네피스의 숨소리를 느낀 데이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그의 얼굴 구석구석과 목덜미, 목깃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당황해 급히 옷깃을 여미는 세네피스를 향해 기이한 웃음을 보였다.
“당신을 데려가면 됩니다.”
대제학실을 나온 세데스는 문 밖에서 동향을 살피던 세 가디언들의 곱지 않은 눈총을 받았지만 못 본 척 이젠 그들과 함께 방음 유리문 밖에서 안쪽을 노려보았다. 혹시라도, 정말로 혹시라도 안에서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이 가디언들보다 앞장서 뛰어들 참이었다.
‘빌어먹을, 먹통이네.’
세데스는 추적 장치부터 확인했지만 데이의 옷에 달아놓은 도청장치에서 아무 신호도 들어오지 않자 내심 낙담했다. 경호실에서 대제학실을 뜯어고치면서 도청 신호를 차단하는 장치까지 한 모양이었다. 이젠 밖에서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저놈 대체…….”
세데스와 3명의 가디언들이 언제든 칼을 빼들 태세로 밖에서 기다렸지만, 안에서는 그들이 상상했던 끔찍한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그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정반대 상황이 터졌다.
“엇!”
데이와 바싹 마주서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던 세네피스가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듯 고함을 지르며 뺨을 사정없이 때리는 모습이 보였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가디언들이 급히 유리문을 열고 안에 뛰쳐들었다.
“……누가 멋대로 들어오라 했냐!”
데이의 멱살을 붙들고 씩씩대던 세네피스가 무섭게 눈을 부릅뜨며 그들에게 다시 나가라며 손짓했다. 데이는 뺨을 맞고도 마치 석상처럼 서서 꿈쩍도 않고 있었다. 가디언들이 당혹스런 얼굴로 물었다.
“아, 아니……괜찮으십니까?”
“당장 나가!”
세네피스의 날카로운 고함에 압도된 가디언들은 반쯤 의식을 놓은 듯한 황태후를 놔둔 채 주춤주춤 뒷걸음쳐 나와야 했다.
“대체 무슨 말을 들으신 거야!”
가디언 리더가 당혹스런 얼굴로 엄한 세데스를 흘겨보았지만 그도 아는 것이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데이는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의 뺨을 몇 번이나 후려친 세네피스는 결국 움켜쥐고 있던 멱살을 풀며 그 앞에 주저앉아 온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언뜻 보아서는 피다이가 제정신이고 세네피스가 반쯤 미친 것처럼 보였다.
알 수 없는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아 있던 세네피스가 데이에게 가라며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데이는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아무 일도 없던 양 대제학실을 나섰다.
“끝났습니다.”
데이는 발만 동동 구르던 세데스에게 사무적으로 말하고는 혼자서 태연하게 밖으로 향했다. 가디언들은 그제야 대제학실로 뛰어들어 절반 실신해 쓰러진 세네피스를 일으켜 주었고,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세데스는 헐레벌떡 데이를 쫓아 달려갔다.
“끝나다니? 이제 가면 되는 거냐?”
“여기서 볼일은 끝났으니 당신은 가도 됩니다.”
데이는 이제 그와는 용무 없다는 듯 혼자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데이는 들은 척 만 척 대답이 없었다. 무시당한 것 같은 느낌에 세데스의 속이 확 끓어올랐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혼자 남겨진 세데스는 어떡해야 할지 몰라 중간에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무언가 아주 나쁜 일이, 어쩌면 피다이가 황태후를 공격한 것보다도 더 나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쩐지, 하기 싫다 했어.’
세데스가 허리춤의 칼을 꽉 쥐었다. 그리고 이젠 소리 없이 저 피다이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데이의 추적 신호가 다시 잡히고 있었다.
남극성당을 나온 데이는 세데스가 뒤를 밟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반인과 전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오후를 보냈다. 그는 남극성당 통과를 위해 맡겨놓았던 소지품들을 되찾은 후, 볕 좋은 해안가 그늘을 찾아가 몇 시간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그리고 저녁이 다 되어서야 일어나 인근 가게에서 잡다한 신변용품 몇 개를 사고 싸구려 식당에서 혼자 저녁을 먹었다.
용무를 다 끝냈다는 데이가 남극성당을 떠나지 않고 계속 인근을 어슬렁거리는 것이 눈에 거슬린 세데스도 계속 그를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저자가 무언가 일을 저지를 것 같았다.
저녁은 먹은 후, 데이는 남극성당 뒤편 언덕 위 한 고급 술집에서 몇 시간을 할일 없이 앉아있었다. 그는 아무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고, 그저 술 주문을 하며 바텐더와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문한 술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그렇게 할일 없이 시간을 때우고 난 후, 그는 늦은 저녁 무렵 남극성당 앞 광장으로 돌아갔고, 세데스도 계속 그 뒤를 쫓았다.
마침 학교 앞 광장에는 졸업식 기념 생도 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데이가 그 내용을 알아듣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한 시간 가까이를 청중 사이에 섞여 있었고, 절반쯤 구경하다가 지루한지 하품을 몇 번 하고는 구석진 벤치를 찾아가 벽보를 깔고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세데스도 질세라 광장 건너편의 벤치를 차지하고 앉아 그를 계속 지켜보았다. 날도 어둡고, 거리도 멀어 일반인이라면 제대로 감시하지 못할 테지만, X의 피를 받은 세데스의 눈에는 대낮만큼은 아니어도 행동을 계속 지켜볼 만큼은 충분했다.
그는 피곤을 쫓으며 계속 데이를 살폈지만 정신 나간 소매치기 하나가 잠든 데이의 짐을 몰래 훔치려다가 손목이 비틀려 쫓겨난 것을 빼고는 별 일은 생기지 않았다.
태평한 데이와는 달리 오후 내내 긴장하며 쫓다가 녹초가 되어버린 세데스는 광장 반대편에서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크.”
등받이에 기대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던 세데스는 서늘한 금속성의 무언가가 등 뒤로 다가오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토론회도 끝난 심야의 광장은 조용했고 보이는 건 군데군데 취객들뿐이었다. 정문의 시계탑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 안 하셨습니까, 제후님.”
소름끼치게 침착한 목소리에 세데스는 바로 위험을 직감했다. 정체모르는 적이 마치 잘 아는 친구처럼 의자 뒤에서 몸을 기울인 채 그에게 묻고 있었다. 세데스가 고개를 앞으로 고정시킨 채 물었다.
“누구냐.”
지금껏 그가 열심히 쫓았던 데이는 멀리 광장 건너편에서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등 뒤의 사람은 최소한 데이는 아니었다.
“누구냐고?”
대답 대신, 그의 등을 무언가가 다시 툭 건드렸다. 아마도 등 뒤의 적이 벤치 등받이 틈새로 무언가를 겨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실 필요 없고요,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뒤쪽의 괴한은 자신이 칼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려는 듯 살짝 힘을 주어 그의 옆구리 뒤를 찔렀다. 옷을 뚫고 들어온 따끔한 느낌이 분명 칼이었다. 세데스는 이자가 데이를 보호하려는 다른 동료 피다이라고 생각했다.
“졸업생인 내가 학교 앞에 있는 게 그리 이상하냐.”
“경호원이나 측근들은 다 어쩌시고요.”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런 보고까지 올려야 하나.”
“아까 대제학께는 무슨 말씀을 전하신 겁니까.”
“뭐?”
순간, 세데스는 아차 싶었다. 대화내용을 모르고 있다면 이자는 데이의 동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황태후를 경호하는 황실 사람이 분명했다.
그때, 광장 건너편의 데이가 태평하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서는 세데스가 있는 곳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세데스는 데이가 세네피스를 데려가는 동안 황실의 감시를 따돌리는 미끼로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속았다.’
놀란 세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등 뒤의 괴한이 그를 거칠게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어딜 가십니까.”
세데스가 괴한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동안, 광장 건너편 데이에게 다가가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회색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들킬세라 조심스레 걷는 모습이 어딘지 익숙했다. 하지만 등 뒤의 괴한은 이 다급한 순간에 쓸데없이 세데스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남자 통해서 황태후께 무슨 이야기를 전하셨냐고요.”
“비켜! 지금 저 앞에서 대제…….”
다급해진 세데스가 큰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그의 입을 우악스런 손이 막아버렸다. 손목에서 팔찌가 느껴지는 것을 보아 경호실 소속 가디언이 분명했다.
“황태후께서 연락을 받지 않으십니다. 비상상황이니 비록 제후이시라도 모셔갈 수밖에 없습니다.”
“멍청아, 입을 막고 어떻게 말하라는 거야!”
세데스의 뭉개진 고함이 입 안에서만 빙빙 맴돌았다. 그의 저항을 도망치려는 잔재주로 생각한 가디언은 도리어 더 세게 그를 붙들고 벤치 뒤로 끌어내려 했다.
“우, 우읍.”
그가 쓸데없는 몸싸움을 벌이는 동안, 광장 건너편 벤치에선 데이가 어둠 속에서 조심스레 다가온 그 사람의 망토 후드를 살짝 열고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차갑게 굳은 세네피스 카파키 황태후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만족스런 표정의 데이가 그를 데리고 반대편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맙소사, 당했어.’
세데스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상황이 이대로 끝난다면, 세데스는 황태후를 적에게 넘겨준 주역으로 황실에 낙인찍혀 정치생명과 진짜 생명까지 모두 끝장이었다. 그는 교단의 함정에 제대로 걸려든 꼴이었다.
“이 병신새끼!”
세데스가 악을 쓰며 온 힘을 다해 그 가디언의 손목을 비틀고 손을 때어냈다. 그는 세네피스를 데리고 멀어지는 데이를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려 했다.
“저기 황태후께서 그놈에게…….”
세데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격을 당한 가디언이 반사적으로 내지른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세데스의 다급한 외침은 거칠게 덮쳐오는 가디언의 몸뚱이에 눌려 바닥에 나뒹굴며 짧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씨!”
급해진 세데스는 허리춤에 숨겨놓았던 칼을 휙 뽑아 이 답답한 가디언의 옆구리를 번개같이 찔렀다.
“으웁!”
상대의 전투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무작정 덤볐던 그 황실 가디언은 옆구리에 칼이 박힌 채 자리에서 파르르 떨었다. 세데스는 바로 이자의 목을 찔러 끝장을 내려 했지만 곧 맘을 바꾸고 칼을 거두었다.
“저기 황태후께서 납치당해가고 있으니 당장 알려! 난 속아서 이용당했을 뿐이야.”
가디언을 옆으로 힘껏 밀어낸 그는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쥐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내 실수니 황태후는 내가 다시 구해온다.”
세데스는 신음하는 가디언을 바닥에 놓아둔 채 방금 데이가 사라진 곳으로 허겁지겁 쫓기 시작했다. 베인 옆구리로 찢어지는 고통이 엄습했지만 X의 강인한 생명력이 그를 버텨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쿠베 새끼, 엄마를 죽이더니 이젠 내 차례냐? 이판사판이야, 씨발.”
세데스는 피가 묻은 뼈칼을 무명포 속에 감추고 데이와 세네피스 황태후를 쫓아 필사적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자신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 오르테의 얼굴이 계속 눈앞을 맴돌았다.
“내 죽어도 혼자 죽나 어디 봐라. 이 십새끼.”
그동안 쌓여 온 분노가 일순간 폭발하면서 이젠 상처의 고통도, 제후에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추적 장치를 켜든 그는 격한 욕지거리와 함께 썰렁한 심야의 남극성당 앞 광장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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