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35화 (930/1,132)

< -- 935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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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들 봉급이 꽤 많은가 봐요.”

“응?”

차 옆자리에 오른 오르마즈의 첫 말에 지레 놀란 야푸르가 괜히 차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수만 다리크짜리 이 최고급 승용차는 고급 천연목 인테리어에 좌석엔 진짜 양털이 깔려 있고 자리 한쪽엔 마실 것과 간식을 넣어두는 냉온장고까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거 우리 큰집 종가의 사촌 언니 오빠들 타는 차인데…… 등산객 손님 중에도 이렇게 크고 근사한 차 모는 사람은 하나도 못 봤거든요.”

차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리던 오르마즈는 천장을 덮은 반투명 유리를 통해 보이는 근사한 바깥 풍경까지 두리번거리며 신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동쪽 끝에 근사한 해안가 소나무숲이 있단다. 솜씨 좋은 식당도 있으니 점심 같이 먹고 산책이라도 좀 하려고.”

야푸르가 대단히 잘 아는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사실 그도 아랫사람들을 들들 볶아 알아낸 것일 뿐 정말로 가 본 일은 없었다. 그가 집처럼 오가는 남극성당이지만 막상 ‘데이트 코스’를 짜 보려 하니 대신관이 된 후로는 제대로 가 본 곳도, 잘 아는 곳도 거의 없었다. 이젠 그저 아프라시아 관 옥상의 처소와 회의실, 대신전, 병원 정도나 오가는 것이 전부였다.

“혹시 뭐 정장 입고 가야 하는 그런 데에요?”

“글쎄다…….”

바로 막다른 길에 막혀버린 야푸르가 어물거렸다. 그의 태도를 ‘그렇다’고 해석한 오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좋은 옷 입으면 좋았을 텐데 괜찮은 옷이라고는 이게 다에요. 따지는 데는 저도 싫으니까 그냥 편한 데 가요.”

오르가 투박한 모직 외투와 셔츠를 만지작거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셔츠 옷깃 사이로 그의 목선이 살짝 드러났다. 야푸르의 입이 헤벌레해졌다.

“뭘, 예쁘기만 한걸.”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이지만 야푸르의 대답은 정말 빈말이 아니었다. 별반 꾸미지도, 근사한 옷을 입지도 않았지만 그의 눈에는 하렘의 그 많은 미녀들과도 비교조차 안 될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나와 줘서 고맙다. 일단 가 보고 네 맘에 안 들면 다른데 가지 뭐.”

야푸르가 차에 좌표를 넣고 출발시켰다. 미동도 없이 출발한 차는 남극성당 영내 해안길을 타고 천천히 움직여 교단 신학교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이 사람들이 다 신학생들이에요?”

오르는 또래 젊은 신학도들의 활기에 찬 모습을 구경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바깥의 젊은 신학도들도 평소 보기 어려운 최고급 승용차의 행차에 무슨 일이라도 난 것인지 놀란 표정으로 쑥덕대고 있었다.

‘멍청한 시종 놈.’

야푸르는 하필 이런 최고급 차를 구해다 준 눈치 없는 시종을 속으로 탓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분명 ‘전문직 남자가 탈 눈에 안 띄고 평범한 차’를 구해오라고 했었지만 아무리 봐도 이게 그네들이 타는 차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고급차에 저 같은 애가 탄 거 알면 사람들이 뭔일인가 하겠어요.”

“……이거 내 차 아니란다.”

어쩔 줄 몰라하고 있던 야푸르가 결국 실토를 하고 말았다.

“너 편하게 태우고 다니려고 빌린 거야.”

“알고 있었어요.”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 든 오르가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아저씨 솔직해서 맘에 들어요. 이건 먹어도 되죠?”

오르가 음료 뚜껑을 뜯어 불쑥 내밀었다. 당황한 야푸르가 멍해진 얼굴로 이 능글능글한 소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르가 텅 비어있는 운전석 옆 서랍을 가리키며 냉큼 답했다.

“평소에 타는 차면 이렇게 다 텅텅 비워놨겠어요? 갖은 잡동사니로 난리법석이어야 정상이지. 구석구석 얼마나 열심히 닦았는지 서랍 안에선 소독약 냄새까지 나던걸요. 그런데도 자기 차라고 우겼으면 편집증 환자 아니면 거짓말쟁이죠.”

야푸르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소녀의 모습에 내심 주눅까지 들고 말았다. 이 또래 아이들 다루듯 했다가는 아무래도 제대로 당할 것 같았다. 야푸르는 ‘내 것 아닌 티’ 줄줄 나는 차를 가져온 한심한 시종장을 다시 탓할 수밖에 없었다. 오르가 좌석 밑창까지 고개를 쑤셔넣고는 입을 열었다.

“근데 구리구리해도 아저씨 차 그냥 몰고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 차 없거든.”

야푸르는 솔직하게 나간 김에 아예 끝까지 가 보기로 했다. 어쨌든 그에겐 ‘개인 소유의’ 차 같은 건 분명 없었다.

“필요하면 공용 차 쓰면 되니까.”

“하긴, 남극성당 안에 혼자 사시면 별 필요는 없겠네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오르는 그가 차가 있든 없든 별 관심 없는 듯 다른 음료를 뜯어 마시며 아름다운 창밖 해안 풍경을 싱글벙글 지켜보았다.

“학교 밖에 살아. 남극성당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오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야푸르를 돌아보았다.

“우와, 집 예쁘겠다.”

오르에게서 소녀다운 해맑은 웃음을 본 그는 뒤따라 함께 웃었다. 이렇게 웃어 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내 집 한 번 구경 가 보겠니?”

말을 뱉어놓은 야푸르가 아차 싶었다. 오르가 약간은 의심어린 눈길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리 자꾸 생각 없이 말을 하는지 속이 터져 미칠 지경이었다.

“아저씨 여자 한 번도 안 꼬셔 봤죠?”

“응?”

오르의 공격적인 물음에 야푸르는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그의 주변을 맴도는, 혹은 맴돌았던 수많은 여자들 중 정작 자신이 적극적으로 유혹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프사이 세네피스나 마샤나그처럼 ‘본능으로 통해’ 서로에게 다가갔거나, 아니면 죽은 이디나처럼 ‘정치적인’ 목적으로 잠자리만 함께 한 누나, 여동생들, 혹은 타바리스처럼 대신관에게 자진해 ‘몸을 바친’ 여자들 셋 중 하나였다.

“그냥저냥 어떻게 살아지던데.”

야푸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궁색하지만 나름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아저씨 집에 가면 점심은 어쩌고요? 저 일부러 굶고 나왔다고요.”

“시켜 먹지.”

“배달도 해요?”

“까짓 거 내가 시키면 안 오고 배기겠니.”

야푸르가 이번만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차에 입력한 좌표를 얼른 바꿔 넣었다.

“네가 내 집에 처음 오는 여자란다.”

야푸르의 입가에 주체할 수 없이 웃음이 번졌다. 아랫사람들에게 ‘남극성당을 안 벗어날 테니 염려 마라.’고 약속하고 나왔지만 정말로 둘만의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약속 따위는 머릿속에서 이미 깡그리 지워진 후였다.

“그리고 자꾸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아. 내가 괜히 늙어 보이잖아.”

낮잠에서 막 깬 오르는 2층 온실 겸 베란다에서 남극성당 풍경과 멋진 바닷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낯선 집이지만 이상하리만큼 맘도 편했고 집안에서 풍기는 냄새도 싫지 않았다.

배달시킨 점심을 먹고 난 후, 나즈라가 그릇들을 치우는 동안 식곤증이 몰려온 것도 긴장이 너무 풀어진 때문인 듯했다. 힘든 포터 일을 하며 생긴 그놈의 ‘점심 후 낮잠’ 습관도 문제지만 말만한 처녀가 처음 와 본 남의 집 소파에 널브러져 고개를 뒤로 까딱거리며 존 것도 어쨌든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을 게 뻔했다.

그래도 ‘잘 바엔 제대로 자자.’며 남자 침대에 퍼질러져 낮잠을 잔 것만큼 미친 짓은 아니었겠지만.

오르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유리창 너머 침실에서 흐트러진 침대를 정리하던 나즈라는 오르가 잠들었던 시트에 코를 댄 채 그의 뒷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번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자신을 보는 저 남자의 시선이 싫지만은 않았다.

“미안해요, 빨랫감 만들어서.”

“빨고 싶지 않은데.”

말을 뱉어놓은 나즈라, 아니 야푸르는 자기도 민망한지 얼른 시트에서 코를 떼고 다시 침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르는 머쓱해하는 그 남자에게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아직 어린 그가 보기에도 이 남자는 ‘여자 꼬시는 데 젬병인 것을 빼면’ 퍽이나 매력적이었다. 사람을 재밌게 해 주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지만 진지하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었고, 출신을 대놓고 자랑하지 않아도 구사하는 어휘나 절제된 행동으로 보아선 훌륭한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다만 오르마즈 눈에도 이렇게 괜찮은 남자가 ―아무리 여자 꼬시는 데 서툴다 해도― 수십 년 연인도 없이 혼자 사는 건 어딘지 이상해 보였다. 사실 그가 기꺼이 이 집에 온 것도 ‘이 남자가 정말 혼자가 맞을까’ 싶은 생각에서였지만 집안 어디에도 여자의 흔적은 없었다. 그와 여자를 연관지을 수 있는 건 점심을 먹으며 살짝 흘리듯 말했던 ‘50여년 전 세상을 떠난 처음이자 마지막 연인’ 이야기가 전부였다.

“먼 바다에 먹구름이 보이는구나.”

야푸르가 온실 유리 위에 보호망을 치기 시작했다.

“곧 날이 험악해지겠다.”

오르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혼자 중얼거렸다.

“집이 정말 예뻐요.”

“네 맘에 드니 정말 다행이다.”

야푸르가 흐뭇한 얼굴로 집을 새삼 돌아보았다. 남극성당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절벽 위에 자리한 이 풍광 좋고 아담한 2층 목조주택은 그가 복잡한 정사나 수하들의 간섭을 떠나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가끔 찾는 그만의 아지트였다. 특히나 그가 직접 심고 기른 콜로니 각지의 꽃들로 가득한 2층 베란다의 온실은 지금껏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작은 비밀의 공간이었다.

“근데 꽃 같은 거 좋아하실 줄은 몰랐는데.”

오르는 손이 제일 잘 닿는 곳에 놓여있는 붉은 장미 봉오리에 코끝을 가져갔다.

“내 부전공이 원예학이었다는 걸 얘기 안했구나.”

구석에 있는 포트에서 더운 물 두 잔을 담아 온 야푸르는 핏빛 장미 봉오리 몇 개를 따서 물 위에 띄워주었다.

“정원 꾸미기를 좋아하는 게 가문 전통이거든.”

야푸르는 장미의 향이 적당히 우러난 따뜻한 찻잔을 오르의 두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리고, 믿든 말든, 우리 가문 사람들이 대대로 좀 잘생겼어.”

전혀 안 웃길 것 같았던 이 남자의 뜬금없는 허풍에 오르가 폭소를 터뜨렸다. 오르는 그 옆의 화분에 심어져 있는 하얀 자스민 몇 개를 따 이번엔 야푸르의 물에 띄워주었다.

“전 이 향기가 좋은데요.”

야푸르도 찻물에 뜬 자스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둘은 그렇게 잔을 든 채 가슴이 닿을 만큼 바싹 마주서서 가끔 자신의 찻물만 들이킬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푸르의 가슴이 쿵쾅거리고 떨려 미칠 것 같았지만 차마 이 이상 다가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향이 달라지셨네요.”

한참만에 먼저 입을 연 건 오르 쪽이었다. 그는 코끝을 야푸르의 목덜미에 대고 살며시 향을 들이켰다.

“나무 향에……무스크하고…….”

오르가 말을 멈추고 야푸르의 눈을 슬쩍 올려보았다. 망설이던 야푸르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네가 준 거 아니니.”

야푸르가 고개를 조금 숙이고는 오르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듯 답했다.

“실은 전문가한테 제일 섹시하게 배합해 달라고 했지.”

“누군지 솜씨 좋은데요?”

오르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기 시작했다. 반응이 어떨지 내심 가슴을 잔뜩 졸였던 야푸르도 갑자기 용기가 솟구쳤다.

“이것도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

야푸르는 오르의 입술 끝에 살짝 입을 맞춰 보았다. 다행히, 이 소녀는 살며시 입술을 벌려 그를 기꺼이 받아들여 주었다. 그가 자신을 받아들여주자 가슴이 북받쳐 오른 야푸르는 더 이상 자제하지 못하고 이번엔 그를 품에 꼭 끌어안고 거칠게 혀끝을 밀어넣었다.

“우읍.”

그의 깊은 키스에 오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이상하게 그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부는 고사하고 그의 팔은 도리어 남자를 더 꼭 끌어당기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진하게 안겨 본 남자의 품은 솜털 속에 파묻힌 듯 편안하고 따스했다. 너무 놀라서인지, 다리 힘이 풀린 오르를 남자의 팔이 꼭 붙들어 주었다.

“네가 오기만 기다렸단다.”

입술을 뗀 남자가 이런 말을 속삭였지만 오르마즈는 아직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정말 고맙다.”

야푸르는 그를 연신 쓰다듬어주며 가쁜 흥분을 달랬다. 세네피스와 마샤나그를 어처구니없이 잃고 난 후, 수십 년간 수많은 여자들에게서 그런 느낌을 찾아보려 미친 듯 가까이하고 품에 안았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같은 R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이런 만족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품에 있는 이 아이는 달랐다.

“내게 와 줘서 정말 고맙다.”

품 안의 오르는 고개만 끄덕거릴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의 태도에 덜컥 불안감이 든 야푸르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내가 네 또래 남자애들보다 너무 거칠었다면 용서…….”

“어차피 처음인걸요.”

“응?”

오르의 대답에 당황한 야푸르의 손이 딱 멎었다. 이 정도 빼어난 외모에 능글능글한 태도에서 당연히 남자를 여럿 사귀어 보았을 것이라 넘겨짚었던 그에게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전에 남자친구도 없었다는 말이니…….”

“이렇게 입술을 허락해 준 건요.”

오르가 무지개빛 초롱초롱한 눈을 크게 뜨고 야푸르를 빤히 올려보았다. 품 안의 아이가 아직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순결한 아이라는 사실에 그는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남자로서의 이기적인 욕구를 동시에 느꼈다.

“미리 알았다면 좀 더 조심하는 거였는데…….”

야푸르는 입맞춤하는 동안 헝클어져버린 오르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주며 살짝 웃었다.

“내 그런 줄 모르고…….”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요.”

오르의 도발적인 태도가 또다시 야푸르를 난처하게 했다.

“지금껏 그런 사람들 많았으니까요.”

“오해란다. 내 정말 나쁜 맘을 먹었다면…….”

야푸르가 말을 더듬거렸다. 오르가 자는 동안, 혹은 일어나 샤워를 하고 있는 동안 맘만 먹었다면 ‘몹쓸 짓’도 충분히 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충동 정도로 함부로 손대기엔 너무 소중한 보석이었다. 그가 한 ‘의심받을’ 짓이라고는 뒤척거리는 그의 베개를 다시 베어주며 몰래 맡아 본 그의 체취에 취해 한참을 멍하니 있던 것뿐이었다.

“그런 뜻 아니에요. 아저씨 좋은 사람인 거 같아요.”

“나……그럼 네 곁에 계속 있어도 되겠니?”

야푸르가 다시 오르마즈를 품에 안았다. 오르는 그를 함께 안으며 사뭇 단호하게 대답했다.

“앞으로도 내가 믿게 해 준다면요.”

오르가 눈을 야무지게 부릅뜨고 야푸르를 올려보았다.

“난 못 믿을 사람이라면 가차없이 떠날 거예요. 엄마처럼은 안 살아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다.”

야푸르는 오르에게 다시 입을 맞추었다. 오르마즈도 이번엔 힘을 주어 이 남자의 넓고 포근한 품을 꼭 안았다. 하지만 곧 자신이 너무 앞서가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자, 잠깐만요.”

오르는 서둘러 팔을 풀고 물러났다. 더 이상 자신을 통제 못 하기 전에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세상에, 어두워진 거 봐요. 낮잠 자느라 시간 다 허비했네요.”

“왜, 늦게까지 함께 있기로 했잖니. 아직 시간 많아.”

당혹스러워진 야푸르가 다시 그를 안으려 했지만 오르는 다시 뒷걸음쳐 그의 팔에서 빠져나갔다.

“비 온다면서요. 날 험해지기 전에 슬슬 돌아가야겠어요.”

“……내가 뭐 잘못한 거니?”

“아뇨, 아니에요.”

오르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그냥 오늘은 이만하게요. 다음에 꼭 다시 만나요.”

오르가 웃으며 이번엔 그를 먼저 가볍게 안아주었다. 야푸르는 아쉬운 얼굴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르는 방금 전의 침실로 돌아가 벗어놓은 외투와 짐을 챙겨들었다. 그가 외투 입는 것을 도와주려던 야푸르는 문득 방 구석의 큰 고정 금고를 쳐다보았다.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예?”

그는 오르를 데리고 금고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꽤 긴 자리의 비밀번호를 입으로 읊어가면서 하나하나 누르고는 손바닥을 그 위에 댔다.

“너도 잊지 말고 알아두렴.”

“……아저씨 금고잖아요.”

“넌 열어봐도 돼. 언젠간 그렇게 될 테고.”

야푸르는 오르를 보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의 말에 숨은 의미를 읽은 오르마즈가 얼굴을 붉혔다.

“떠나기 전에 네 손바닥도 등록해 놓아야겠다.”

철크덩 소리를 내며 육중한 금고문이 입을 벌렸다.

“우리 가문 보물이란다.”

야푸르가 열어보인 금고 안을 본 오르는 놀라 헉 소리를 낼 뻔했다. 그 안에는 화려한 보석들과 마구(馬具), 칼 같은 무기들이 가득했다.

“돈 자랑하려는 건 아냐. 팔 수 있는 물건들도 아니고. 네게 보여줄 게 있어서.”

그는 제일 중앙에 있던 금제 서클렛을 집었다. 황금과 백금이 어우러진 번쩍이는 머리띠 아래로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 사슬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보석에 관해 아직 잘 모르는 오르가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가치가 나가 보이는 장신구였다.

“이건 ‘비나’란다.”

야푸르가 오르의 머리 위에 그 서클렛을 살짝 얹어보았다.

“푸웁.”

오르가 금고 문에 달린 거울에 비친 자기 옆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마는 대충 들어갔지만 뒤쪽은 뒤통수 위에 어설프게 걸쳐 있었다.

“제가 뒤통수 짱구라는 걸 이런 식으로 상기시켜야 하겠어요?”

오르가 눈을 흘기자 야푸르도 멋쩍게 웃으며 비나를 도로 벗겼다.

“얼굴 폭은 대충 맞는데……너보다 뒤통수는 약간 짧아야겠다.”

“누군지 몰라도 그거 딱 맞으려면 머리하고 얼굴이 어지간히 작아야 하겠는데요.”

“안 맞을지는 알고 있었어.”

야푸르가 비나를 잘 닦아 원래 있던 자리에 조심조심 걸었다.

“이건 나중에 태어날 딸에게 줄 거거든. 딸애한테는 분명 맞을 거야. 나중엔 네가 내 딸을 지켜주게 될 거다.”

조금, 아니 많이 엉뚱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진지해서 오르마즈는 차마 뭐라고 쏘아붙일 수가 없었다. 야푸르는 이번엔 문에 달려 있던 카타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황금 사슬로 세밀하게 장식된 집도 놀랄 만큼 아름다웠지만 더 놀라운 건 안쪽에 숨어있었다. 야푸르는 칼을 약간 뽑아 안쪽의 날을 보여주었다.

“이게 칼날이에요?”

오르가 화들짝 놀랐다. 루비처럼 붉고 투명한 재질의 날에는 12교단 상징물이 차례대로 새겨져 있었다.

“우리 가문의 가보란다. 대대로 후계자한테만 전해지는 상징물이야.”

“이거……그냥 색유리로 만든 장식품이죠?”

“아니, 진짜 칼이야. 웬만한 칼보다도 훨씬 강해.”

“거짓말.”

날에 손끝을 댔던 오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손을 떼었다. 이 붉은 칼날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야푸르가 오르의 귀에 대고 아주 진지하게 속삭였다.

“시조께서 돌아가실 때 만들어진 건데, 이 칼날 전체가 파란빛으로 변할 때 가문에 큰 풍파가 온다는 말이 있단다.”

“멀쩡한 유리색깔이 변한다고요? 푸핫, 왜 풍파가 영영 안 올 거라는 뜻으로 들리죠?”

깔깔대며 웃고 있는 오르 앞에서 야푸르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정말 그럴까?”

야푸르는 그제야 칼날을 끝까지 죽 뽑아보였다. 칼끝을 본 순간, 오르의 웃음이 싹 사라졌다. 정말로 날 끝에서 2/3정도가 이미 사파이어 같은 투명한 파란빛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도 조금씩 변하고 있거든.”

야푸르는 처음 보는 굳은 얼굴로 칼날을 만지작거렸다. 오르의 표정까지 굳은 것을 본 야푸르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뭐 아직은 멀었을 거야.”

금고문을 다시 닫은 야푸르는 오르의 손을 잡아 센서 위에 올렸다.

“나중에 너하고, 내 딸하고 셋이 함께 여길 다시 열어봤으면 좋겠다. 혹시 나나 딸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너 혼자라도 나중에 여기 꼭 와 보렴.”

오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금고에 자신의 손바닥 장문(掌紋)을 입력하고 있는 야푸르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내 지난번에 신탁을 받았는데, 내 딸은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 오래오래……나보다도 훨씬 오래 살아서 가문을 이을 거라는 답을 받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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