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36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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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의 행방불명 소식을 전해 듣고 황실 경호실만큼이나 놀란 건 같은 시간 남극성당 기숙사에 머물고 있던 황빈 솔이었다. 기숙사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던 솔은 한밤중에 들이닥친 경호실 요원들에 붙들려 태학전 꼭대기의 대제학실에 얼떨결에 끌려와서도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납치당하셨다더니?”
대제학실을 둘러본 솔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집무실 책상 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 모서리까지 정확하게 맞춰진 채 정돈되어 있었고 집기들도 뭐 하나 흐트러진 것이 없었다. 학내에서 입는 흰 무명포와 금색 대제학 머플러도 옷걸이에 단정히 걸려 있었다.
“그냥……학교 밖으로 외출하신 게 아니고? 옷도 갈아입고 나가신 것 같은데?”
“퇴근하다가 납치당하셨을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자초지종을 대충 설명한 경호대장 카토가 너무도 깔끔한 집무실을 둘러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황빈 마마의 기숙사 짐은 저희가 옮겨드릴 테니 한시바삐 환궁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옥상에 셔틀이 대기 중이니 빨리 돌아가십시오.”
“아니 내가 돌아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그분을 찾는 게 우선 아닌가!”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옹주와 함께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황상께서 지금 격노해 계시니 조용히 따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 자다 말고 잠에서 깨 엄마를 따라온 옹주 마리안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겁먹은 얼굴로 엄마의 다리를 껴안았다.
“갈 때 가더라도 제대로 설명은 해 줘야 할 것 아니냐.”
솔이 놀란 딸의 등을 토닥여 주며 물었다. 카토는 한숨을 내쉬며 품에 갖고 있던 편지를 불쑥 내밀었다.
- 내 꼭 필요한 것이 있어 가지러 떠나네. 자진해 가는 것이니 행여 오해는 하지 말게나. 별일 없다면 엿새 정도 후엔 돌아올 것이니 그때까지는 찾지 말게.
혹 황상께서 아시면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고만 전해드리게. -
“납치……는 아니지 않은가.”
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걸 그대로 믿으십니까.”
카토가 발끈하며 편지를 냉큼 받아들었다.
“이 편지도 세데스 그자가 억지로 쓰게 한 게 분명하단 말입니다!”
“그분이 어디 강제로 시킨다고 이런 편지를 쓰실 분이신가.”
솔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특별히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자신과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웃던 세데스의 모습에서 그가 황태후를 납치했을 것 같은 느낌은 전혀 없었다. 도리어 그는 뒤따르던 남자를 의식하며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았었다.
“세데스는 혼자 있지 않았어. 같이 있던 남자가 누군지는 파악했고?”
“그자의 수하였겠지요. 혐의를 벗으려고 수작을 부린 게 아니겠습니까.”
“대제학실에 데려가 소개까지 시켜주고 혼자 나왔다며? 그래놓고 혐의를 벗으려는 속셈이었다니, 세데스가 그렇게 바보인 줄 아나?”
“엄마, 엄마.”
마리안이 다시 엄마의 옷자락을 툭툭 잡아당겼다. 신경이 곤두서 있던 솔은 딸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고는 다시 카토에게 돌아섰다.
“내 말은 한쪽으로 결론을 정해놓고 밀어붙이지 말라는…….”
“엄마, 여기서 아까 낮에 그 아저씨 냄새…….”
“옹주!”
솔이 신경질을 버럭 내며 딸을 돌아보았다. 세네피스의 무명포를 쥐고 킁킁거리던 마리안이 평소답지 않은 엄마의 호통에 깜짝 놀라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솔이 얼른 딸을 안아들었다.
“미안하다, 얘야. 방금 뭐라고 그랬지?”
사실 딸의 생각이 딱히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해 줘야 놀란 딸이 빨리 안정을 찾을 것 같아서였다. 잠시 굳어 있던 마리안이 더듬거리며 답했다.
“여기서……아까 그 여자 따라다니던 남자 냄새 난다고.”
“얘, 얘야, 아무 것도 아냐.”
시어머니인 황태후의 옷에서 외간남자 냄새가 난다는 말에 순간 당혹스러워진 솔이 헛기침을 하며 얼른 딸의 다음 말을 막았다. 하지만 이번엔 카토가 마리안에게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잠깐만요, 옹주 마마,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냄새죠?”
“약간 쓰고 매운 냄새에요. 썩은 풀냄새 같기도 한데 맡았더니 머리가 멍해요.”
“향수나 화장품 냄새, 아니면 물담배 냄새는 아니고요?”
“누가 이런 고약한 냄새를 화장품으로 써요. 나보고 계속 맡으라면 아마 머리아파 울 거예요. 정말로 머리가 띵해요. 뭐더라…… 아, 맞다, 대마 꽃술 냄새에요.”
꽃이라면 황제 못지않게 좋아하던 마리안이 그제야 정답을 찾아내고는 혼자 손뼉을 짝짝 쳤다.
“맙소사.”
카토가 놀란 얼굴로 솔을 올려보았다.
“피다이……어쩌면 아라무트로 끌려가셨을지 모릅니다. 황상께 알려드려야겠습니다.”
남극성당에서 황태후 세네피스가 데이와 함께 사라진 같은 시각, 세데스를 남극성당에 보내놓고 혼자 비엔에 머물던 쿠베는 내심 속이 편치 않았다. 새 대신관의 뜻에 따라 이번 일에 어쩔 수 없이 한몫 담당하기는 했지만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던 아기 때부터 그를 친오빠처럼 따랐던 세데스를 자신의 손으로 함정에 빠뜨렸다는 사실이 계속 맘을 무겁게 했다.
“별 수 없지.”
시원한 야외 찻집에 앉아 풍광 좋은 비엔의 호수를 멍하니 쳐다보던 그는 앞에 놓인 붉은 홍차 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잔잔하던 홍차에 작은 너울이 일더니 낯익은 한 남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누엘 델루지 경.”
쿠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제위전쟁 당시 함께 연합군에 소속되어 싸웠던 건장한 사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6척 반(195cm)나 되는 당당한 체구의 그 귀족 남자는 매력적인 은발을 쓸어내리며 찻집 안에 이상한 시선이 없는지부터 재빨리 살폈다. 남자들이 매력 없기로 소문난 델루지 가에서는 꽤나 준수한 용모였다.
“걱정 마십시오. 제 사람들 뿐이니.”
쿠베가 그에게 앞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후에도 마누엘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단순하고 쉽게 흥분하는 흠이 있지만 교단 시대 코메트 장교로 시작해 제국의 역사를 가로질러 수많은 정치적 위기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만큼 생존력 하나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찌 보면 별반 튀는 능력이 없다는 점과 강한 자에겐 무조건 복종한다는 단순함이 지금까지 그를 지켜 온 힘이기도 했다.
지난 제위전쟁 당시에도 그는 일기투에 패하고 동맹군에 사로잡혀 한동안 포로 생활을 했지만 그 단순함 덕분에 ‘위험인물’이라는 딱지를 벗고 가문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젠 다시 델루지 가 원로회 수장이 되어 제후인 세데스의 지위를 가장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널 만났다는 게 밝혀지는 것만으로도 처형당할 수 있어.”
마누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쿠베가 피식 웃으며 그의 앞에 차를 부어주었다.
“그럼 17살 때부터 저와 연인이었던 세데스는 거열형 감이게요.”
놀란 마누엘의 눈이 확 커졌다.
“뭐?”
세데스의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한 마누엘의 손이 이미 허리춤의 칼에 가 있었지만 함부로 뽑지는 않았다. 그 역시 제국에서는 나름 손꼽히는 무장이지만 어차피 눈앞의 이 건장한 특등급 가디언에 맞설 수는 없었다.
“그년이 날 죽이라더냐.”
“아뇨, 그 반대입니다.”
쿠베가 시계를 보았다. 황제령 남극성당에 맞춰놓은 시계는 자정이 조금 넘은 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곧 황실에서 세데스의 행방을 묻는 연락이 폭주할 겁니다. 수배령이 떨어질지도 모르고요. 바닥 생활을 안 해봤으니 오래 도망을 다니지는 못할 겁니다.”
쿠베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마치 그의 말을 들은 듯, 마누엘이 갖고 있는 할룩스가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
마누엘이 가문에서 연락을 받는 동안, 쿠베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마누엘은 ‘응’ 혹은 ‘알았다.’는 말만 연발할 뿐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그의 복잡해진 심경은 핏기가 사라진 표정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할룩스를 끈 후, 쿠베를 노려보며 머릿속을 가다듬은 마누엘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게 할 말이 뭐냐.”
“세데스의 정치생명은 어차피 끝났습니다. 가문에서 보호할 명분도 없고요. 축하드립니다. 새 제후님.”
마누엘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가 펴졌다. 단순하기는 해도, 이 상황에 마냥 좋아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자네에게서 그 말을 듣는 게 편치 않은 건 왜일까?”
쿠베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시간이 지나면 곧 편해지실 겁니다.”
“내 자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황실에 입 다물어줘야 할 이유도 궁금하고 말이야.”
“세데스가 밀려나면 다음 계승순위가 누구죠?”
마누엘이 낯빛을 살짝 찡그렸다.
“항상 약점을 지닌 사람을 찾아 지지하는 게 자네 특기로군?”
마누엘의 말끝에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쿠베는 못 들은 척 뻔뻔하게 웃었다.
“수우는 마누라 따라 개종하면서 가문에서 파문당하고 평민으로 강등당해 계승권이 없지만 아들은 다르죠. 파문당할 때 이미 수태 중이었으니 판례에 따라 계승권이 유효합니다. 경께선 그 녀석에 이어 2순위십니다.”
마누엘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쿠베가 그에게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녀석 황실 군사학교를 나와 지금은 황실군 초급장교로 있다죠? 황빈 베아트릭스의 부관이라는데 황제가 과연 누굴 새 종장으로 밀까요?”
“그러면서 방금 내게 제후라고 불렀나?”
마누엘이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저흰 경께서 새 제후가 되셨으면 합니다.”
“저희? 꼭 배후에 어마어마한 세력을 등지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솔직히 털어놓죠. 세데스 경……아니, 그 여자는 우리의 요구에 너무 소극적이어서 저희가 제거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고요.”
제후를 제거했다는 말에 마누엘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쿠베의 속셈은 대충 읽었지만 그도 ‘지지해 줘서 감사합니다.’라고 냉큼 받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어째 내게 굉장히 불쾌한 상황을 강요할 것 같은 느낌인걸.”
그때, 마누엘의 할룩스로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왔다. 무심코 화면을 확인한 마누엘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 세데스 경이 수배령 직전 종가에 연락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연락을 받은 종가 가디언 둘이 종가의 비자금 5만 5천 골드를 인출해 보고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2등급과 3등급의 최상등급 가디언들입니다. 격납고의 신형 고속셔틀 한 대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
“허.”
마누엘이 할룩스를 닫으며 쿠베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지금 오래 도망다니지는 못할 거라 했나?”
마누엘의 비웃는 듯한 표정에서 쿠베는 덜컥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데 하필 그때, 그의 할룩스도 함께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마주앉은 마누엘에게 얼른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쿠베는 할룩스를 쥐고 얼른 마누엘에게서 멀어졌다.
“축하하네, 성공했다지? 이제 오르마즈 그놈 시체를 빨리 우리에게…….”
쿠베의 명랑한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피다이 데이의 차갑고 감정 없는 음성이 전해졌다.
“우리의 조건은 황태후를 우리 성의 궁전까지 데려가 밤을 보내게 해야 유효해.”
“데려가라고 우리가 다리까지 놔 줬잖아.”
“세데스 경이 방금 날 공격하려 했다. 가까스로 여객선은 탔지만 계속 뒤를 쫓고 있어. 다리는 무슨 빌어먹을 다리냐.”
“세데스가 아직 무사하다고? 황실에 안 잡혀가고?”
“네 생각보다 똘똘한가보지.”
“명색이 피다이가 죽이지 않고 뭐 했어!”
버럭 화를 냈던 쿠베는 내심 양심의 가책을 느껴 마지막엔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네가 죽이지는 말라며?”
데이의 퉁명스런 대꾸에 쿠베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거야 어차피 황실에 잡혀갈 테니까…….”
“어쨌든, 내가 무사히 성에 못 돌아가면 그 책임은 너희들에게 있다.”
데이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탁 끊어버렸다. 멍하니 서 있던 쿠베는 몇 발짝 떨어진 테이블에서 ‘이제 어쩔래?’라는 시선으로 자신을 능글맞게 쳐다보고 있는 마누엘 경을 휙 돌아보았다. 저 사내도 일이 잘 안 풀리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게 분명했다.
“자아, 그럼 난 가네. 자네 말대로 세데스가 제거되고 나면 그때 다시 연락하게니.”
마누엘은 벗어놓았던 망토를 집어들고는 홀홀히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빌어먹을, 세데스 그걸 그냥…….”
쿠베는 허겁지겁 쿠마르의 코드를 눌렀다. 무언가 불안했다. 황태후를 데리고 가는 데이가 세데스에게 꼬리를 잡힌다면, 아니, 눈에 불을 켜고 황태후를 찾고 있을 황제에게 걸린다면 이번 일은 끝장이었다. 상등급 가디언 둘이 주인인 세데스와 합류한다면 자칫 다 잡은 세네피스를 도로 빼앗아가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자다 일어난 듯 피곤한 얼굴의 대신관 비서 쿠마르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난 순간, 쿠베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누가 좀 아라무트에 따라가서 데이 그놈을 지켜야겠어.”
연락, 아니 협박을 끝낸 데이는 할룩스를 끄고 여객선 선창으로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흔히 [4등석]으로 불리는 화물용 선창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3등석에도 탈 형편이 못 되는 빈민들, 혹은 탑승자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않기를 원하는 자들이었다.
이런 곳에 승객을 태우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돈에 눈먼 선사들, 혹은 선장들의 푼돈벌이에 이런 ‘있어도 있지 않은’ 승객들은 쉽사리 없어지지를 않았다.
황제령 2번 도시에서 서부 아켐으로 가는 이 여객선은 워낙 이용자가 많은 노선이다 보니 4등석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승객들은 각자 짐을 끌어안은 채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닥에 벌떼처럼 웅크리고 앉아 열사의 사막 세상인 아켐에는 언제나 도착할까 시계만 보는 중이었다.
매점에서 주운 박스를 겨드랑이에 낀 데이는 버글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피해 그가 미리 확보해 놓았던 구석의 나름 명당자리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곳엔 웬 불청객 하나가 그의 소중한 ‘화물’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꺼져.”
데이는 구석에 웅크린 회색 망토 옆에서 시시덕거리며 계속 말을 걸고 있는 웬 덩치 큰 사내의 발을 꾹 밟았다.
“내 여자다.”
“뭐야.”
발을 밟힌 사내가 발끈하며 벌떡 일어나 셔츠를 확 벌리며 우람한 가슴을 드러내 보였다.
“지정석도 아닌데 무슨 지랄을…….”
발끈하며 데이에게 시비를 걸려던 남자가 말을 멈추며 자리에 딱 굳었다. 눈 깜짝할 새 허리띠가 잘려진 바지가 슬금슬금 내려가고 있었지만 올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데이가 단검 끝을 그자의 갈비뼈 아래에 댄 채 코끝이 닿을 듯 얼굴을 들이댔다.
“지랄?”
흉터투성이의 야윈 얼굴 위로 흐릿하고 광기어린 눈빛이 번들거렸다. 일순간 겁을 집어먹은 사내는 골반 아래까지 내려간 바지를 추스르며 허겁지겁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말 한 마디로 남자를 쫓아낸 데이는 벽에 웅크리고 기대 있는 세네피스 옆에 털썩 앉으며 선내 매점에서 사온 뜨거운 물통을 불쑥 내밀었다.
“4등석은 추우니 안고 계십시오.”
이를 따닥거리며 떨고 있던 세네피스는 말없이 통을 받아 품에 안았다.
“20분 전에 황제령을 출발해서 지금 스페이스니 워프루트에 접어들 때까지는 계속 추워질 겁니다.”
세네피스는 끄떡없다는 듯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를 따라온 이후, 세네피스는 내내 한 마디도 없었다.
“얼굴 윤곽이 조금 보입니다. 미녀라는 걸 알아보기는 충분하니 저런 똥파리를 피하려면 좀 더 가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세네피스는 이번에도 아무 대답 없이 망토 속에 얼굴을 더 깊이 감추었다. 데이는 매점에서 사 온 도시락을 내놓았지만 세네피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며칠간 힘들 테니 든든히…….”
“앞으로 ‘내 여자’라는 말 다시 썼다가는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세네피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까칠한 미녀를 힐끔 쳐다보았던 데이는 불쾌해 하기는커녕 뻔뻔하게 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데이는 주워 온 박스를 벽과 바닥에 깔고 세네피스에게 그 위에 앉으라며 손짓했지만 그는 인형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신 몸이 조금이라도 상하면 교주님께서 절 용서치 않을 겁니다.”
데이는 세네피스를 번쩍 들어 그 위에 억지로 앉혔다. 세네피스는 그의 팔을 거칠게 떨쳐내며 벽에 다시 기대앉았다. 데이는 그의 눈꼬리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는 것을 보았지만 짐짓 모른 척 그와 붙어 앉아 몸을 잔뜩 웅크렸다.
“7시간 후 아켐에서 아라무트행 셔틀로 갈아탈 겁니다. 셔틀 터미널에서 차로 하루를 가고 그 뒤론 걸어야 합니다. 저희 걸음으론 하루 반이면 되지만 3일은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세네피스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길은 일사천리였다. 데이는 준비되어 있던 배를 타고 바로 남극성당을 떠났고, 2시간 후엔 남극성당의 반대편인 북극권 사오시안트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유일한 훼방꾼은 세데스 하나뿐이었다.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세데스는 사오시안트의 터미널까지 귀신같이 쫓아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물론 데이는 다친 몸으로 혼자 쫓아온 그를 어렵지 않게 창고에 처박아버리고 세네피스와 함께 이 여객선에 오를 수 있었다.
옷자락을 여미던 데이는 옷깃 안쪽을 살며시 찝어 보았다. 세데스가 자신의 외투 안쪽에 몰래 설치한 손톱만한 추적 장치가 여전히 붙어있었다. 데이는 추적 장치를 그대로 옷에 놔둔 채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놈의 시체 하나 구하러 여기저기 똥줄타서 쫓아오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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