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37화 (932/1,132)

< -- 937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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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님, 괜찮으십니까?”

비엔의 델루지 종가에서 연락을 받자마자 도피자금을 챙겨 출발했던 2명의 델루지 가 가디언들은 다음날 아침 무렵에야 서부 테나토 터미널 인근 한 여인숙에 숨어있던 자신들의 제후 세데스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무명포가 젖을 만큼 피를 흘리고 신음하던 세데스는 그들의 도착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너희를 보니 다행이다.”

비로소 안도한 세데스가 그들 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황실의 수배 직전, 어렵사리 호출한 이 둘은 그가 종가에서 보아 온 믿을만한 상등급 가디언들이었다. 이들이 손목에 찬 금색 가디언 팔찌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최고의 가디언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황실 수련장 출신의 상징이었다.

황실 수련장 출신들은 이전 근위대, 지금의 황실군과 친위군에만 배속되어 있지만 하임달의 결전에 대군을 보내 준 대가로 세나우스 3세 오넬론 황제가 테번에게 특별히 하사했던 2명의 10등급 가디언이 유일한 예외였다. 그 둘이 이젠 2, 3등급이 되어 이곳에 와 있으니 가문 최고의 가디언들을 잃은 본가에서도 난리가 났을 터였다.

“맙소사, 대체 어찌되신 겁니까.”

가디언들은 준비해 온 구급낭을 급히 풀고 간단한 응급처치 약물과 도구들을 꺼냈다.

“아라무트로 가. 빨리.”

세데스는 다짜고짜 재촉부터 했지만 제후의 부상에 놀란 가디언들은 당혹스런 얼굴로 고개부터 저었다.

“이 몸으로 말씀입니까? 먼저 치료부터 받으시고요. 지혈부터 하고 병원에 모시겠습니다.”

“지금 수배중인데 어떻게 병원을 가라는 거냐.”

세데스는 상처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씩씩거렸다. 사실 그가 황실의 추격을 피해 서부-남부 경계인 이곳 테나토까지 도망친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내 그 빌어먹을 피다이 놈을.”

세데스가 굴욕감에 파르르 떨었다. 남극성당 앞에서 도망치던 데이를 코앞에서 놓친 그는 학창시절 알고 지내던 만년생도 친구를 불러내 개인셔틀을 얻어 타고 2번 도시 사오시안트의 여객 터미널까지 쫓을 수 있었다.

그는 암표상에게서 표를 사고 있던 데이를 그곳에서 찾아냈지만 그 피다이는 황태후를 내놓으라며 협박하려던 그를 티도 나지 않게 간단히 제압해 구석진 청소용품 창고에 처박아 놓고 도망쳐 버렸다. 비록 부상 때문이었지만 저항은 고사하고 도와달라는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어처구니없이 당한 건 나름 싸움이라면 자신 있던 그에게 이만저만 굴욕이 아니었다.

10분이 넘게 버둥거린 끝에 그가 문을 부수고 빠져나왔을 때는 피다이도, 그를 따라간 세네피스 황태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데이에게 표를 팔던 암표상을 찾아가 어떤 표를 팔았는지 따졌지만 그는 ‘제국 대제후구로 가는 4등석 표는 2장씩 다 사던데요?’라는 말로 그의 기운을 쏙 빼놓았다.

자초지종을 대충 설명하던 세데스는 상처를 접착제로 붙이는 아픔에 끄응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그 썩을 피다이 놈. 잡기만 해 봐.”

세데스는 여기까지 타고 온 여객선 4등석 티켓에 딸린 작은 지도를 펼쳐보았다. 황제령에서 아라무트까지 가는 길은 아켐을 통과하거나, 이곳 테나토를 통과하거나 둘뿐이었다. 둘 중 그가 테나토를 찍은 건 남부와의 경계다보니 비엔에서 달려오는 이 가디언들과 빨리 만날 수 있어서였지만 추적 장치가 먹통인 걸 보니 절반의 확률이 그에게 유리하게 떨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대충 하고 일단 출발부터 해.”

세데스는 드레싱만 붙여놓은 상처를 손으로 꾹 누르고 억지로 일어서서 피 묻은 무명포를 휙 벗어 내던졌다. 거울 속에는 흑인종과 백인종의 피가 적당히 섞인 구릿빛 피부의 다부진 근육질 여전사가 서 있지만 최소한 오늘은 저 근사한 근육들이 이름값도 못한 한심한 날이었다.

“여기서 아라무트까지 몇 시간 걸리냐?”

“우리 셔틀로 5시간쯤이면 됩니다.”

“그럼 당장 출발해, 우리가 먼저 가서 길목을 지켜야 해.”

유학자의 색깔을 내버린 그는 가디언이 본가에서 가져온 정글용 얼룩무늬 용병 군복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지난밤엔 어처구니없이 당했지만, 이번엔 믿음직한 가디언 둘까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두 번 굴욕만으로도 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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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성당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야푸르는 무언가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고픈 말을 속에서 곱씹고 있는 것인지 내내 말이 없었다. 야푸르의 말대로, 바다 쪽에서 몰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덮으면서 제법 거센 폭풍우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차는 눈앞도 잘 분간되지 않는 험악한 날씨 속을 뚫고 조용히 달렸다.

같은 시간, 옆자리의 오르마즈도 이 맘씨 착한 노총각 아저씨를 자신이 너무 변죽만 울려 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내내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이 아저씨는 그동안 찝쩍거렸던 다른 어른들과는 달리 그를 무시하거나 돈으로 구워삶으려 하지도 않았고, 노골적으로 그의 몸과 순결을 탐내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 했지만, 그 집에 한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하마터면 ‘내 첫 남자가 되어줘요.’라는 말을 할 뻔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첫 남자만은 최대한 재고 재서 온전히 자신의 뜻으로 선택하겠다는 것이 이전부터 그의 다짐이었고, 이 남자는 그 모든 기준에 맞아보였지만 막상 그런 순간이 오니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차는 다시 남극성당 영내로 들어와 속도를 잔뜩 낮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친 비가 쏟아지는 바깥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던 오르마즈가 야푸르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느낀 야푸르도 약속이나 한 듯 오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르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줘요.”

야푸르도 손을 내밀어 오르의 거친 손등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야푸르도 한참 묵히고 있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실은……너랑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따라와 주겠니.”

남극성당 동쪽 해안가에 있는 ‘아프라시아 관’은 다하카르 교단 성직자와 고위 신관들이 거주하는 8층의 거대한 공동주택이었고 동시에 경전과 철학을 논하는 폐쇄적인 사교 공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종교색 짙은 곳이다 보니 야푸르가 그를 여기로 인도했을 때 ‘이름만 신도’인 오르마즈가 당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야푸르는 마치 자기 집처럼 아주 익숙한 걸음으로 들어섰고, 여러 번 다녀 본 듯 자연스럽게 중정(中庭)을 지나 안쪽 깊이 계속 들어갔다. 고급스런 로브 차림새의 성직자들이나 각지고 근사한 제복 차림의 종교재판관, 헤네티나 직원들 사이에서 빗물에 젖은 투박한 외투에 큼직한 가죽신을 신은 ‘촌뜨기’ 오르의 모습은 꽤나 튈 수밖에 없었다.

“저어, 어디 가는지 알려주면 안돼요?”

“너 놀래켜 주려고.”

야푸르가 처음으로 ‘여자 꼬실 때 할 만한’ 말을 내놓자 오르도 픽 하는 웃음과 함께 일단 입을 다물었다. 아프라시아 관 제일 안쪽까지 들어온 야푸르는 살벌하게 눈을 부릅뜬 두 명의 중무장 헤네티들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휙 지나 웬 돌문에 들어섰다.

“어.”

생각 없이 따라가던 오르가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문 위엔 ‘출입엄금-경고 없이 사살함’이라는 붉은 표시가 선명했다. 게다가 그 앞을 지키는 전갈 문장 헤네티들도 흔히 보이는 보통의 교단 헤네티들과는 눈빛도, 자세도 달랐다.

“뭐 하니. 따라오지 않고.”

야푸르가 경비병들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오르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저도 들어가도 돼요?”

“응, 네 이름이 아프라시아라서 괜찮아.”

야푸르의 장난스런 대답에 긴장했던 오르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두 경비병들의 눈치를 잔뜩 보며 살금살금 그 사이를 지났지만 그들은 주변 다른 사람들의 동태만 무섭게 노려보고 있을 뿐 그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는 듯했다.

어쨌든 오르는 들어가면 예고 없이 사살한다는 살벌한 돌문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조심조심 밟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는 듯, 발소리 하나하나가 웅웅거리며 사방을 울렸다. 딱히 주의를 들은 게 아닌데도 오르의 걸음은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러 들어가는 양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한참을 내려가니 희미한 불빛 아래 또다시 돌문을 지키고 있는 헤네티 경비병 셋이 보였다. 오르는 그들 중 지난번 병원에서 얼굴을 쳤던 그 경비병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경무장이었던 그제와는 달리 오늘 그 경비병은 깃털 장식이 달린 전갈 문장 투구에 육중한 조립식 갑옷, 붉은 벨벳 망토까지 두른 화려한 차림새였다. 군대에 관해 별반 아는 게 없는 오르였지만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장교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오르에게 잠시 기다리라 손짓한 야푸르는 그의 귀에 대고 무어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르의 차림새를 유심히 살피던 그 장교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일찍 오셨군요. 정식 절차를 준비시킬까요?”

“아니, ……둘만 있고 싶다.”

야푸르는 입에 손을 대며 고개를 저었다.

“증인이 될 대전 내관 하나면 충분하다.”

오르의 행색을 다시 구석구석 살피고 난 장교는 작은 소리로 그의 귀에 대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소개하고 아무도 접근 못 하게 하겠습니다.”

그 군인이 돌문을 열어주자 야푸르는 그제야 오르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오렴.”

계단을 내려간 오르는 바로 어제 자신을 때렸던 남자 옆을 지나며 슬쩍 눈을 흘겨 감정을 내보였지만 정작 그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둘이 들어서자, 돌문은 육중한 마찰음을 내며 등 뒤에서 다시 잠겨버렸다. 동시에 주변이 온통 깜깜해지자 깜짝 놀란 오르가 남자의 손을 꼭 붙들었다. 다행히 희미한 조명이 그들의 눈앞을 밝혔다.

“동굴이네요? 건물 지하에 이런 게 다 있어요?”

광산 풍경에 익숙한 오르는 이곳이 바위를 파내어 만든 인공 동굴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야푸르는 그의 손을 잡고 이 정체불명의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은 가파른 내리막을 이루며 계속 땅 밑으로 이어졌다.

“아까 그 군인 누구에요? 여기 정말 들어와도 되는 곳이에요?”

내심 걱정이 든 오르가 계속 물었다.

“그 친구 ‘경호대장’이야. 내가 아는 친구니까 괜찮아. 오늘 밤엔 여기 아무도 안 올 거라고 하니까 걱정 말고.”

“여기가 어딘데요?”

야푸르는 대답을 생략한 채 몇 발짝을 더 나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둘의 눈앞에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돌연 모습을 나타냈다.

“우와.”

오르가 입을 쩍 벌렸다. 거대한 원형의 지하 신전이 그의 눈앞을 압도하듯 펼쳐져 있었다. 반대편까지 지름은 거의 0.5스타디아(75m)는 되어보였고 높이도 웬만한 3층 건물 정도니 지하 공간으로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멋지지 않니.”

야푸르가 오르의 어깨를 한 팔로 살며시 안아주고는 신전 중앙으로 앞장서 걸음을 내디뎠다. 벽과 천장은 바위를 깬 거친 면 그대로지만 바닥은 얼굴이 비칠 만큼 매끄러운 검은 대리석이 깔려 극한의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군데군데 횃불만 켜 있을 뿐 혼자 들어왔다면 겁이 났을 만큼 어두침침했다.

“여기도 예배 올리는 신전이에요?”

야푸르를 뒤따라 몇 발짝 걸어간 오르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들어온 입구는 3마리 용이 서로 몸을 비틀며 꼬고 있는 듯한 형상의 자연석 사이로 난 작은 구멍이었다. 그 위엔 마치 신전을 내려다보기 위해 만든 듯한 꽤 큰 발코니가 세워져 있고, 거친 바위면의 벽 군데군데에도 마치 벽감처럼 움푹 들어간 자그만 자리가 여러 개 만들어져 있었다.

오르는 다시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언덕처럼 불쑥 솟아오른 신전 중앙에는 4개의 기둥 사이로 웬만한 침대 크기의 대리석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단 주변으로는 12개의 횃불이 빙 둘러 켜 있어 다른 곳에 비해서는 환했다.

“어때?”

제단 앞에 선 야푸르가 오르를 향해 돌아서서 두 팔을 벌렸다.

“그러고 서 있으니 아저씨가 꼭 대신관님이라도 되는 것 같네요.”

오르의 농담에 멈칫했던 야푸르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럼 밑에 있는 젊은 넌 승은을 받을 후계자 후보고?”

“푸핫, 농담 그만 해요.”

“그러게 늙어보이는 아저씨 소리 좀 하지 말라니까.”

제단까지 따라온 오르의 귀에 야푸르가 살짝 입술을 가져갔다.

“농담이 아니고……여긴 정말로 대신관 후계에 관련된 비밀스런 집회에 쓰이는 곳이거든. ……대신관의 아이들도 이 제단에서 태어났고.”

야푸르가 제단에 훌쩍 올라앉으며 상판을 주먹으로 쿵쿵 두드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그의 행동이 오르의 눈에 ‘엄청 불경스럽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우리 이래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 우리 둘뿐인데 뭘. 아무도 안 올 테니 신경 안 써도 돼.”

야푸르는 오르마즈를 억지로 잡아당겨 자기 옆에 앉혔다. 오르마즈는 오후까지만 해도 신중하다 못해 소심해 보였던 이 남자가 어딘지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저 자신감을 얻어서 그런 것이려니 믿기로 했다.

“옛날엔 대신관의 아이가 태어나면 그 자리에서 9명의 신관들이 결함을 심사해서 조금이라도 유전적 문제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목 졸라 숨을 끊어서 저기에 던졌다지.”

야푸르는 방금 둘이 들어온 입구 옆에 놓여 있는 불 꺼진 큰 화로를 가리켰다.

“갓난아이를요?”

“근친혼이 누적되면서 어쩔 수 없는 결과였지. 자하크 대신관님 때도 누나나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 절반 이상이 태어나자마자 화로로 직행했다고 하더구나.”

“……그럼 지금 대신관님은요?”

야푸르는 슬쩍 웃기만 했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바로 그 근친혼이 있는 곳도 여기고.”

깜짝 놀란 오르가 제단에서 얼른 엉덩이를 떼고 내려와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서요? 사방에서 다 보이는데?”

오르가 혀를 찼다. 탁 트인 제단 주변엔 벽은 고사하고 이 위에서 있을 ‘특별한 교합’을 주변 시선에서 가려 줄 어떤 장벽도 없었다.

“이 분위기에서 그게……되기는 한대요?”

어린 나이답지 않은 오르의 능글한 대꾸에 야푸르가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첩들 같은 보통 인간을 안으실 때는 상관없지만……대신관께서 신성한 목적으로 근친을 품을 때는 이 제단에서 내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계를 가지시는 게 전통이었지. 나중에 후계자 후보가 될 2세는 여기서 동정이나 순결을 바쳐야 하고, 자녀를 둘 때도 순혈이라는 게 증명되어야 하니까.”

“아이고, 하는 게 하는 게 아니었겠네요.”

“글쎄, 그 속을 누가 알겠니.”

야푸르가 이번에도 다시 입가를 가리고 웃음을 꾹 눌러참았다.

“뭐, 그분들 능력이 출중하시다고 치고.”

야푸르 덕택에 점점 대담해진 오르가 이번엔 아예 제단 위에 큰 대자로 벌렁 드러누웠다. 정말로 편안히 눕기에 딱 맞는 길이에 양 팔을 벌린 폭도 대충 맞아떨어졌다.

“이 딱딱한 돌덩이 위에서 하고 나서 허리나 무릎은 무사하시대요?”

“푸하하하.”

참고 있던 야푸르도 결국 껄껄대며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텅 빈 신전 안에 그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렸다.

“당연히 무사하시지.”

“에에이, 말도 안 돼.”

제단 모서리에 앉아 있던 야푸르가 누워 있던 오르의 가슴 위로 조심스레 상체를 기울였다. 그의 눈빛이 어딘지 다르다는 것을 느낀 오르의 입가에서 그때까지의 장난스런 웃음이 싹 사라졌다.

“정말 믿어지지 않니?”

“솔직히……못 믿겠는데요.”

오르가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의 손에서 어깨를 빼냈다.

“지금도 어깨 아파요. ……전 대신관님 딸도 아니니 이런 데는 사양할래요.”

야푸르가 엷게 웃으며 제단 아래쪽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눌렀다.

“어엇.”

누워있던 오르는 온몸이 제단 속으로 갑자기 푹 꺼져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며 남자의 허리를 붙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단단한 제단이 아니고 물렁거리는 젤리 같은 막 위에 떠 있었다.

“이건……돌덩이 아니고 상변이(相變移)하는 액체거든.”

야푸르가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오르의 손을 풀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직도 사양하고 싶니?”

오르는 남자를 멍하니 쳐다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망설이던 그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이렇게 환한 데선…….”

오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에 켜져 있던 횃불이 몇 개만 빼고 일제히 사그라졌다. 제단을 비추던 12개 횃불도 머리 위 한 개만 빼고 모두 꺼져버렸다.

“그리고…….”

오르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4개의 기둥 사이로 두꺼운 커튼이 내려와 제단을 주변에서 완전히 가려버렸다. 커튼에 비치는 둘의 겹쳐진 그림자가 하나 남은 횃불의 불꽃을 따라 이리저리 춤을 추고 있었다.

“이쯤이면……대신관의 잠자리도 할 만하겠지?”

제단 위에 뒤따라 올라앉은 야푸르가 먼저 외투를 벗고 오르의 뺨과 목덜미에 차례대로 입을 맞추었다.  오르는 이 신성한 곳에서 이런 ‘불경스러운’ 짓을 저질러도 되는 것일지 덜컥 겁이 났지만 지금 이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가 난 굉장히 아플 거랬어요.”

“그래, 알아. 그렇게 태어났다는 거.”

야푸르가 오르의 외투를 마저 벗겨주며 짧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어떡해서든 이 아이의 처녀를 차지하기 위한 성의없는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 마샤나그와 세네피스가 아버지 자하크와의 첫날밤 겪었다던 끔찍한 경험도 잘 알고 있었다.

야푸르는 긴장감에 어쩔 줄 몰라 떨고 있는 오르의 손을 자신의 튜닉 버클에 가져갔다. 무언가 호기심거리를 주어 불안감을 덜어주고 싶었다.

“네게 보여주고 싶은 신기한 게 있어. 풀어봐.”

오르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의 버클을 끄르고 다부진 그의 상체를 조심스레 드러냈다. 양쪽 어깨와 가슴에서 부릅뜨고 있는 용의 눈동자를 시작으로, 온몸을 휘감은 역동적인 문신이 벗겨진 튜닉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디테일이 거의 생략된 단순한 도안이지만 누군가 정말 솜씨 좋은 전문가가 새겼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세상에, 아프지 않았어요?”

생전 처음 보는 큰 문신에 오르가 깜짝 놀랐다. 불안감과 수치심을 조금이라도 잊게 해 주려는 야푸르의 의도대로, 오르가 호기심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의 가슴을 휘감은 용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충분히 견딜만했지.”

야푸르가 가슴을 더듬고 있는 오르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너도 오늘밤 그렇게 아프진 않을 거다.”

야푸르가 아직 불안해하고 있는 이 소녀를 품에 꼭 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흥분과 짜릿함이 강렬한 교감을 타고 서로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먼저 몸을 보여준 야푸르가 이번엔 오르의 셔츠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에 자신의 셔츠가 벗겨지고 맨 어깨가 조금씩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던 오르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한 꺼풀 벗겨진 허름한 셔츠 안에서 드러난 오르의 마른 몸은 말 그대로 거죽 아래 근육과 힘줄만 드러나 있었고 여기저기 트고 갈라진 살에 꿰맨 상처와 멍 자리가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니, 전 아니에요.”

불빛 아래 몸이 드러난 순간, 정신이 퍼뜩 든 오르가 대뜸 그를 밀어냈다. 이 곱고 아름다운 남자 앞에서 거칠고 힘겨운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몸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제발, 내 몸 보지 말아요.”

30관이 넘는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닌 그의 어깨와 등은 숱하게 허물이 벗겨진 흉터와 상처로 가득했다. 굳은살로 가득한 손도 절벽을 타다가 입은 상처로 생손톱까지 부러지고 빠져 흉한 몰골이었다.

“난 당신하곤 다른 세상에 산다고요.”

갑자기 거칠어진 오르가 반쯤 벗겨진 셔츠자락을 황급히 여미며 이를 드러냈다. 그는 셔츠를 다시 입으려 했지만 이미 야푸르가 겨드랑이를 꽉 안고 있어 그를 밀어내지 않는 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가 더 간절해.”

야푸르가 그의 거친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고작 16살짜리 소녀의 야윈 몸을 덮은 수많은 상처가, 거칠고 뭉개진 손끝이 야푸르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신께서 너를 영원히 지켜주시길.”

그는 뜨거워진 오르의 몸을 껴안고는 젤리처럼 푹신한 제단 위에 조심스레 눕혀주었다.

그렇게, 미래 후계자의 통과 의례는 이번에도 전통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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