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38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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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브 교단 본거지인 아라무트의 산악정글 외곽에 밤늦게 도착한 세데스는 얼른 주변 분위기부터 확인했다.
“유명세에 비하면 조용하네.”
그가 가진 델루지 가문 정보지도에 따르면 20여채의 흙집이 모인 이 정글 마을이 암살교단 근거지에서 가장 가까운 ‘문명 지역’이었다. 주변에도 몇 개의 오지마을이 띄엄띄엄 있기는 하지만 그가 가진 추적 장치에는 데이가 이곳을 지나간 것으로 나와 있었다.
“분위기가 으스스한데요.”
가디언이 잔뜩 경계 섞인 시선으로 심야의 오지마을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한밤중의 방문객에 더 놀란 건 원주민들이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원주민들은 이곳까지 차를 몰고 온 화물차 운전기사의 괜찮다는 손짓에 비로소 안심하며 다시 사라졌다. 운전기사가 화물칸을 열어주며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여긴 바깥세상 할룩스는 작동이 안 됩니다. 도로 나가실 때는…….”
“알아. 마을 이장이 갖고 있는 무전기 써서 부르라고?”
“그러고도 또 하루를 기다리셔야 하죠. 여기까지 꼬박 하루 걸리니까요. 요금은 왕복이라 100골드입니다.”
기사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빌어먹을, 요즘 세상에 이런 곳도 다 있다니.”
세데스는 흙투성이가 된 차 짐칸에서 큰 가방들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정글에서 필요한 식량, 물과 무기가 그 안에 가득 들어있었다.
일행이 몰고 온 근사한 셔틀은 암살교단이 설치한 비행제한 구역까지가 한계였다. 그곳부터는 제국에서 ‘비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암살교단의 영역이었고 외부와의 통신은 물론 바깥세상의 운송기계는 거의 쓸 수가 없었다. 그곳 경계의 소도시부터 이곳까지 1,000스타디아(150km)의 거리는 시커먼 연기를 풀풀 내뿜는 이 원시적인 내연기관 화물차를 타고 올 수밖에 없었다.
바깥세상에서는 차로 몇십 분이면 주파할 ‘1,000스타디아’는 이곳에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다. 정글을 가로지르는 비포장도로는 워낙 좁고 빙빙 도는데다가 하필 우기(雨期)라 사방이 웅덩이였고, 날씨에 따라 생겼다가 없어지곤 하는 물줄기로 여기저기 쓸려나가고 끊긴 길 같지도 않은 길이었다.
덕분에 차는 제대로 속도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구덩이에 빠지고 빼내고를 반복하며 하루 종일 물, 흙, 비와 씨름해야 했다. 세데스와 가디언들도 빠진 차를 빼내느라 차 안에 제대로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던 시간은 별로 없었다. 그렇게 이곳까지 꼬박 만 하루가 넘게 걸렸다.
“빨라도 사흘은 걸린다고 하더니, 이제야 알겠네.”
벌써부터 녹초가 된 세데스가 큼직한 배낭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작은 마을을 둘러싼 어둡고 시커먼 정글을 보니 한나절 내내 자신의 입에 욕을 붙여놓았던 그 형편없는 도로가 이젠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여긴 하루가 15시간이라니까 시간이 더 짧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디언 하나가 웃었다.
“자료에 따르면 이맘때 여긴 낮 8시간, 밤 7시간입니다.”
“혹시 이전에 여기 와 봤나?”
세데스의 물음에 가디언 둘이 다 고개를 저었다. 낙담한 세데스는 추적 장치에 나타난 데이의 행로와 지도를 비교하며 일단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밖에 없었다. 가문 군대가 쓰는 나름 정밀한 지도이지만 직경 3000스타디아(450km)는 되는 거대한 산악 정글이[상세정보 없음.]이라는 표시와 함께 대충의 지형 정도만 표시되어 있었다. 그들이 진흙탕을 지나며 차를 달려 온 도로도 그 중 일부였지만 중간에서 끊겨 있었다.
외지인들 모두가 꺼리는 금단의 구역 중앙엔 이 행성의 이름이 되기도 한 해발 200스타디아(3,000m)의 깎아지른 바위산 ‘아라무트 산’이 위치해 있고, 그 주변을 도넛처럼 정글과 강, 산맥, 여러 개의 호수가 에워싸고 있었다. 세데스가 이곳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가장 빠른 길목을 펜으로 그려보며 중얼거렸다.
“까짓 거, 동쪽으로 쭉 가면 되겠네. 어쨌든 아라무트 산까지는 대충 500스타디아(75km)밖에 안 남았군. 별것 아니네.”
훈련 때를 빼면 진짜 정글이라고는 밟아 본 일 없던 세데스가 지도만 보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나름 산전수전 겪은 가디언들이 걱정스레 조언했다.
“이런 산악 정글에서 그 거리는 평지와는 아주 많이 다를 겁니다. 오다가 보셨지 않습니까.”
“됐어, 닥치면 다 해.”
아직까지 세데스는 그리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다.
독도법에 능한 가디언이 지도에 선을 그으며 앞서가는 피다이의 행로를 나름 분석했다.
“남쪽에 있는 길이 하나 있긴 하지만 성을 찾아오는 의뢰인들이나 물자 이동을 위해 낸 공식적인 접근로이고 피다이들이 이용하는 루트 몇 개는 따로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자도 비로 물이 불어 위험한 골짜기 대신 능선을 타고 산을 넘고 있는 듯합니다.”
“산맥만 넘으면 아라무트 산 밑자락까지 이어진 호수가 있네?”
세데스가 피다이 데이의 예상경로를 따라 손가락을 죽 움직였다.
“설마 이 호수를 빙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지?”
“바보가 아니라면 여기 어딘가에 배를 대 놨겠죠.”
“그럼 그 전에 잡아야 하는군. 배가 없으니.”
가디언이 추적 장치와 연결된 스캐너를 켜고 데이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대충 보니 산맥 정상 부근 같습니다. 일반인 걸음으로 치면 우리보다 8시간쯤 앞서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두르면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다.”
“지금도 움직이고 있나?”
“아뇨, 지금 2시간째 안 움직입니다. 비박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됐어, 우리 걸음이면 잘하면 새벽쯤 따라잡을 수 있겠다. 아니, 여긴 하루가 15시간이랬지? 그럼 아침쯤 되려나.”
“어두운데 지금 가시려고요? 아직 부상도 다 낫지 않았습니다.”
가디언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의욕에 가득 찬 세데스는 배낭을 등에 불끈 짊어지고 앞장서서 어두운 정글에 뛰어들었다.
“물에 닿기 전에 잡아야지.”
“잠깐만요.”
뒤따르던 가디언 하나가 스캐너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비행금지구역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암살교단 놈들이 정글에 설치한 비행 방해 장치 때문에 반경 1,500스타디아 이내엔 셔틀이 못 들어간다고 들었다. 왜?”
“방금 비행체가 하나 휙 스치는 것 같았는데……어, 그새 없어졌네.”
가디언은 자신의 눈이 믿어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 여기보다 조금 북쪽에서 기이하리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비행체 표시는 단 몇 초만에 화면에서 유령처럼 사라져 버렸다.
“죄송합니다, 잘못 본 모양입니다.”
가디언은 스캐너를 급히 접어 허리에 차고 일행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지리도 전혀 모르는 낯선 정글에서의 추격이었다.
가디언이 보았던 ‘유령같은 비행체’는 세데스가 지나 온 마을 북쪽 정글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은색의 날렵한 몸체를 번득이는 ‘불릿’은 비로 잔뜩 진창이 진 땅 위에 불안정하게 떠서 좌우로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이상은 도저히 안 되겠네.”
조종사의 욕지거리 섞인 불평과 함께 셔틀 문이 열렸다.
“엔진 깨지려고 난리치고 있으니 빨리 내려요. 이 이상은 불릿도 못 뚫어요.”
조종사의 재촉에 단단한 체구의 여섯 남자들이 배낭 하나씩을 짊어지고 질척한 땅 위에 차례대로 뛰어내렸다. 잔뜩 굳어있는 그들의 표정엔 비장함까지 흐르고 있었다.
“총원 6명, 이상 없나.”
마지막으로 내린 남자는 셔틀 문을 탕탕 치며 가라고 손짓했다. 제대로 중심도 못 잡고 휘청거리던 셔틀은 허겁지겁 공중으로 떠올라 서쪽으로 멀어져갔다. 불릿의 빠른 속도 덕분에 암살교단이 설치한 대공 장해 장치도 몇 단계나 통과해 이 안쪽까지 단번에 깊숙이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 정도가 한계였다.
“현신께서 내주신 불릿 덕분에 반나절은 벌었습니다.”
제일 먼저 내린 병사의 두 눈 흰자위가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늦으면 다 소용없어.”
마지막에 내린 지휘관 사카가 허리춤의 마우저를 확인하고는 지도를 펼쳐들었다. 그곳엔 데이가 미리 알려준 아라무트 궁전으로의 접근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길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죽 이어져 있었다. 세네피스를 동반한 데이가 그 길을 따라 가기로 약속했으니 이대로만 간다면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 터였다.
“후발대 20명은 우리보다 4시간 정도 늦을 것 같다. 그네들은 차를 타고 ‘공식 도로’로 해서 먼저 영감의 궁전에 가 있을 거다.”
“후발대는 별 필요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정글에 훈련도 안 받은 약골 서생을 데리고 왔으니 가 봤자 얼마나 갔겠습니까.”
“힘들다고 질질 짜는 여자한테는 천하의 피다이도 두손두발 다 들었을걸요.”
“우리가 번갈아 업고 올라가면 잠깐이야.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고 짐꾼이야, 짐꾼.”
잔뜩 긴장되었던 분위기는 병사들의 농담에 한결 풀어질 수 있었다.
“일단 정글에 들어왔다면 세데스 그년이 데이를 따라잡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어디로 갔는지 알고요.”
“가디언들과 같이 있을 거야.”
이번에도 부하 헤네티들이 말수 적은 대장의 말을 상황에 맞게 해석해야 했다.
“하긴, 사람이 없는 정글이니 체열과 발자국으로 도리어 추격이 용이할지도 모르겠군요.”
“사수(射手) 셋은 중간에 서고 네가 앞장서.”
사카가 방패를 진 헤네티에게 앞장서라고 손짓했다. 속도에 목숨을 걸고 달려온 헤네티들은 무게를 줄이느라 갑옷도 입지 않았고, 절반은 작은 석궁에 방패와 근접전 무기를, 나머지 절반은 마우저와 짧은 검만으로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다. 마우저는 성능은 좋지만 너무 정밀해 고장이 잦고 보조부품과 탄이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황실군의 개량 석궁에 대응해 개량한 방패는 너무 무거워져서 양쪽을 모두 함께 지고 빠르게 산악정글을 주파하는 건 무리였다.
“1열 종대로.”
6명은 심야의 낯설고 울창한 정글을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빽빽한 나무 때문에 시야도 불량하고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땅에서는 덥고 습한 기운이 계속 올라왔지만 잘 훈련된 6명의 최정예 전사들은 앞만을 보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런 데서 작전을 하게 될 줄이야.”
병사 한 명이 투덜거렸다. 코런덤의 X들 모두가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제일의 베테랑들이지만 제국에 정글이라 할 만한 곳은 이곳 아라무트와 황제령의 ㅤㅋㅞㄹ크 정도다보니 따로 적응훈련을 받지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일단 데이 그자를 따라잡으면…….”
“교주의 궁전까지 우리가 호위한다.”
“즐거운 임무는 아니군요. 짐꾼 맞나봐요.”
믿음에 충실한 헤네티들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들 입장에서 ‘영감’ 하산의 사바브 교단은 정통 교단에서 파문된 이단이고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거기 도착하면 하룻밤 기다렸다가 뮤를 데려오면 되는 겁니까?”
“선대의 묘에 함께 묻어야 하니.”
사카가 이번에도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올 때도 산 채로 데려와야 한다.”
“그런데…….”
후미에서 따라오던 헤네티 하나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신성한 선대의 묘에 함께 묻을 뮤의 몸이 그렇게 더럽혀져도 되는 걸까요.”
자리에서 멈춰선 사카가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그 헤네티를 노려보았다. 지휘관의 시선에 당황한 헤네티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죽은 가짜 대신관 오르마즈에게 이미 몸을 더럽힌 여자다.”
사카가 단호하게 말하며 앞장서 걸었다.
“더러운 새끼까지 낳았으니 동정 따위 필요 없다.”
사카는 지도에 나온 데이의 루트에 조금씩 가까워졌다. 자신처럼 그를 쫓고 있는 또 다른 팀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만이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때,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담요로 몸을 돌돌 만 채 웅크리고 누워 있던 세네피스는 바나나잎 지붕 위로 빗방울 듣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큰 나무 위에 덩굴을 대충 엮어 바닥과 벽을 만들고 바나나 잎으로 덮은 이 공중 움막은 바로 밑을 지나가도 모를 만큼 완벽히 은폐되어 있었다. 한두 명이면 꽉 찰 크기의 이 공간 안에 안에 담요와 비상식량까지 미리 준비되어 있던 것을 보아 피다이들이 오가며 이용하는 임시 대피처인 모양이었다.
“으윽.”
세네피스는 알이 배어 쑤시고 찌를 듯 아픈 허벅지와 무릎을 만지작거려 보았다. 엉망이 된 발은 만지거나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진통제 필요하십니까.”
움막 입구, 아니 정확히는 그의 바로 발치에 웅크리고 있던 데이가 기계처럼 톤 없는 목소리로 불쑥 물었다.
“됐다.”
세네피스는 고개를 돌린 채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최소한 지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실은 다리가 화끈거려 움직이기도 힘들었고, 눅눅한 담요와 젖은 옷을 뚫고 뼈골까지 냉기가 파고들어왔다. 데이는 구석에 켜 놓은 화로를 한 번 쑤셔 불을 키워놓고는 다시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초입의 마을까지는 거의 한나절을 진흙탕과 사투를 벌였고, 그 뒤로는 익숙지도 않은 거친 정글 산을 하루 종일 올라야 했다. 저녁 무렵 신발을 벗었을 때 그는 물집과 상처로 너덜너덜해지고 퉁퉁 부은 발을 보며 하마터면 울 뻔했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한참 남아있었다.
“새벽에 움직일 겁니다. 더 주무십시오.”
“잠이 와야 자지.”
“이틀 이내로 우리 궁전에 못 가면 약속은 무효입니다.”
“안다."
세네피스는 솟구치는 눈물을 참아내며 억지로 잠을 청해보려 애썼지만 익숙한 시녀들과 충성스런 가디언들이 지켜주는 황궁의 편안한 침대에서도 잠과는 인연이 멀었던 그가 이 컴컴한 정글 오지의 움막에서, 그것도 언제 자신을 덮쳐 유린할지 모르는 짐승 같은 피다이의 곁에서 잠이 들 리가 없었다. 이틀, 혹은 사흘 후 당해야 할 끔찍한 상황이 계속 눈앞을 맴돌아 마음만 같아선 차라리 이대로 죽고만 싶었다.
“황상…….”
세네피스는 움켜쥐며 밉고 야속한 이름을 마지막으로 속삭여 보았다. 감옥에 갇힌 이후, 그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고 160년이나 지켜 온 몸이 이번엔 정체도 모르는 미치광이 약물중독자들에게 유린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끔찍하고 서러웠다.
세네피스는 허리춤의 작은 독약 병을 몇 번째 만지작거렸다. 이것으로 누군가를 죽이려는 건 아니었다. 카렐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그 무언가를 구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가져온 것이었다. 또다시 지난번 같은 끔찍한 일을 겪는다면, 또다시 영혼이 무참히 유린당한다면, 이젠 더 이상 살아 숨을 쉴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막상 황제의 얼굴을 다시 본다면, 아니, 그가 자신의 멍청한 선택을 나무라지 않고 다정하게 안아준다면 그땐 이 독약을 마실 용기를 잃을 것만 같았다.
그는 다시 잠을 청해 보았다.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남은 이틀만이라도 이 지지리 질긴 삶을 버티려면 어떡해서든 자야 했다.
세네피스가 잠과 씨름하는 동안, 그를 쫓는 자들은 비와 씨름하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남부에서 태어난 게 다행이야.”
키보다도 높은 풀과 빽빽한 나무를 헤치며 힘겹게 비탈을 기어오르던 세데스는 종아리까지 푹푹 빠지는 진창에 욕부터 내뱉었다. 능선을 타고 두세 시간만에 데이를 따라잡으려던 그의 거창한 계획은 능선에 오르기도 전부터 쏟아진 폭우 때문에 엉망이 되고 있었다. 빽빽한 풀을 헤치고 가자니 체력이 바닥나겠고, 풀이 적어 언뜻 오솔길처럼 보이는 곳은 알고 보니 물길이라 완전 진창이었다.
푹푹 빠지는 비탈을 힘겹게 기어올라 능선 꼭대기에 거의 올랐다고 생각했던 그는 갑자기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에 위를 휙 올려보았다.
“익!”
능선 위쪽에서 갑자기 쏟아져 내려오는 흙탕물에 놀란 세데스가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자꾸 빠지는 발에 옆구리 부상까지 겹쳐 몸이 재빨리 말을 듣지 않았다.
“가만히 계십시오!”
먼저 위에 기어오른 가디언이 손을 뻗어 그의 배낭을 덥석 붙들었다. 흙탕물 무더기에 휩쓸려갈 뻔했던 그는 가디언의 도움을 받아 풀과 나무가 울창한 사면으로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십년감수한 세데스가 바닥에 엉덩이를 댄 채 일단 한숨 돌렸다.
“저 위에서 사태가 생겨 물길이 바뀐 모양입니다.”
정글에 익숙한 가디언이 지금까지 그들이 진로로 잡았던 길을 따라 격렬하게 흘러내리는 흙탕물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데스도 낯선 산악 정글에 벌써부터 진절머리를 치며 씩씩거렸다.
“제기랄, 날씨가 이래서야 체력이고 힘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겠어.”
세데스는 시계와 추적 스캐너를 다시 보았다. 출발하고 2시간이 지났지만 데이에게 달아놓은 추적 장치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문제는 그들 일행 역시 채 3분의 1도 가까워지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셋 모두 일반인을 어마어마하게 능가하는 체력과 힘을 갖고 있지만, 정글의 비와 비탈을 타고 쏟아지는 진흙탕 앞에서는 별반 소용이 없었다.
“아무래도……오늘밤 따라잡는 건 포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몸도 허약한 서생을 데리고 있으니 날만 좋으면 금세 따라잡을 겁니다.”
세데스도 이번엔 자신 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상 허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저기가 비를 피하기 좋겠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가디언이 진창을 엉금엉금 기어 높은 비탈 위의 갈라진 바위로 올랐다. 세데스도 그를 따라 바닥을 기어 위로 올랐다.
“후우.”
사람 키 반 정도 높이의 좁은 바위틈으로 기어든 세데스가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바위 안쪽으로도 빗물이 계속 들이쳤지만 진창을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장화를 벗어 뒤집자 더러운 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덩치들 셋이 아주 볼만하네.”
세데스가 모처럼 웃으며 이 충성스런 가디언들의 얼굴에서 직접 물을 닦아주었다. 좁은 바위틈에 덩치 셋이 몸을 우겨넣은 모양새도 다시 보니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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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부터 한 달 동안 3부 3, 4권 예약을 받을 예정입니다. 출판본은 연재본보다 약간 앞서갈 것 같습니다. 이곳에도 공지를 올릴 테지만 자세한 정식 출판 내용은 그때 팬카페와 주문게시판을 통해 올리겠습니다.
이전에 주문한 일이 있는 분들께는 메일로도 알려드립니다.
혹시 메일주소가 바뀐 분들께선 주문게시판에 올려놓은 제 메일이나 조아라 쪽지를 통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교정작업은 여러 분들이 연락주셔서 맡아 주실 분들을 다 찾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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