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39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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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사람 키 반 정도 높이의 좁은 바위틈으로 기어든 세데스가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바위 안쪽으로도 빗물이 계속 들이쳤지만 진창을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장화를 벗어 뒤집자 더러운 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덩치들 셋이 아주 볼만하네.”
세데스가 모처럼 웃으며 이 충성스런 가디언들의 얼굴에서 직접 물을 닦아주었다. 좁은 바위틈에 덩치 셋이 몸을 우겨넣은 모양새도 다시 보니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그래도 산악 수색대 시절에 배워놓은 게 있어 다행이야.”
세데스는 야전삽 3개와 벗어놓은 판초 우의로 바위 입구에 능숙하게 비막이를 치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덕분에 안쪽으로 더 이상 비가 들이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 오르테는 앞으로 제후가 될 외동딸이 곱게만 자라게 하지는 않았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명문가 자녀들은 어릴 때는 집안에서 무술과 승마 정도나 가르치고, 다 큰 뒤 잘 나가는 장군의 참모진이나 부관으로 바로 들어가 인맥이나 쌓고 어깨 너머 병법을 배워가며 주먹구구로 무장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였다.
사실 오르테는 군대와 별 인연이 없는 중앙귀족 출신 법률가였지만 덕분에 기존 관습에 덜 매여 있었다. 그는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7살의 외동딸을 군기가 가장 세기로 유명한 산악 특수부대인 경보병 수색대에 말단 사병으로 넣어 가문 원로들을 경악하게 했다.
평민으로 신분까지 세탁된 채 등 떠밀려 입대한 세데스는 서부 접경 칼릴의 춥고 혹독한 일선 부대에 배속되어 청소와 선임병 무기 광내는 일, 눈 치우기 같은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혹독한 산악행군과 암벽, 빙벽타기, 생존술까지 모두 익혀야 했다.
이후 남극성당을 졸업한 후에는 기병대 사관으로, 그 뒤에는 초급 장교와 참모까지, 어머니 오르테는 딸이 남부 최강의 델루지 가 군대의 통수권자가 될 준비를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거치게 만들었다.
새 황제의 즉위 이후로 서부와의 충돌이 없어 몇 번의 비상출동을 빼면 딱히 실전은 겪어보지 못했지만 당시 경험, 그리고 ‘한때 일선 사병이었던’ 제후에 대한 병사들의 감성적인 지지는 지금까지도 그에게 큰 재산이었다.
“엄마…….”
비막이를 보며 뜬금없이 든 엄마 생각에 세데스의 눈이 갑자기 축축해졌다. 어머니의 시체를 멍청이같이 쿠베의 손아귀에 넘겨줬으니 이젠 온전히 장례를 치러 줄 수도 없는 한심한 처지였다.
세데스는 자꾸 흐르려는 눈물을 빗물로 대충 감추고는 혼자 넉살을 부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글 부대에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많은 부대 중에 드럽게 추운 데 산악 수색병으로 있었더니 이 찜통 정글에선 도무지 도움이 안 되네.”
“그런데 우리 가문에 정글 부대가 있었던가요?”
가디언의 대답에 다른 둘이 모처럼 웃음을 지었다.
“사방으로 위치도 좋으니 교대로 사주경계하고 둘은 눈 좀 붙여야겠다.”
“제가 가겠습니다.”
가디언 한 명이 위장포로 몸을 가리고 후다닥 바위 위로 기어올랐다. 나머지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참,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가디언의 물음에 세데스는 쑤시는 옆구리를 들쳐보았다. 드레싱을 걷어내고 보니 상처는 군데군데 색이 변하고 고름까지 맺혀 있었다.
“아무래도 덧나는 것 같습니다. 습한 날씨 때문에 더 그런가봅니다.”
걱정스런 표정의 가디언이 상처를 소독하고 미리 준비해 온 항생제도 놓아주었다. 그제야 고통을 제대로 느낀 세데스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몸에서 열이 심하게 났지만 아랫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감추고 있는 참이었다. 체온을 읽어내는 가디언이 오기와 분노만으로 버티고 있는 제후의 몸 상태를 모를 리가 없었다.
“여기서 열이 더 오르면…….”
“괜찮아, 한숨 자면 돼.”
세데스는 축축한 바위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온몸이 흠뻑 젖고, 컨디션도 최악이지만 갑자기 잠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지친 가디언도 맞은편에서 바위에 기대어 꾸벅거리고 졸기 시작했다.
짧지만 꿀 같은 잠에 빠져있던 세데스는 기대고 있는 바위가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맞은편의 가디언도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이 위에 올라가 있는 가디언이 보내는 ‘적 접근’ 신호였다.
둘은 소리 없이 짐과 무기를 챙겨 바위 위로 기어올랐다. 비는 여전했고, 경계를 맡은 가디언은 바위 위에 납작 엎드린 채 망원경으로 밑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세데스와 동료 가디언에게 자신들이 올라온 반대편 능선 아래를 손으로 가리켰다.
“X들입니다. 거리는 3스타디아(450m) 정도입니다.”
“하나, 둘, 셋……여섯.”
망원경을 눈에 댄 세데스의 입가에 먹이를 발견한 매 같은 광채가 번득였다.
“황실 가디언은 아닙니다. 팔찌가 없습니다.”
망원경으로 그들을 줄곧 살피던 가디언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여섯 명의 헤네티들은 딱 2시간 전의 세데스 일행 꼴이었다. 온몸이 흠뻑 젖은 그들도 흙탕물과 진창을 피해가며 가파른 비탈을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오는 중이었다. 날씨만 화창하다면 바위 위의 세데스 일행을 발견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폭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저들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새끼들 잘 걸렸다.”
세데스가 입맛을 다셨다. 자신을 이 구렁텅이에 빠뜨린 바로 그 세력이었다.
“숫자는 적지만 우리 위치가 훨씬 좋습니다.”
가디언도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얼른 주변을 둘러보던 세데스의 눈에 조금 전 자신을 거의 쓸어내릴 뻔했던 거센 흙탕물 줄기가 들어왔다. 원래는 지금 헤네티들이 올라오는 방향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나무에 걸려 멈춘 바위 때문에 방향을 돌려 세데스 쪽으로 쏟아졌던 모양이었다.
“저 돌덩이 때문에 우리가 휩쓸려 자빠질 뻔했었군.”
세데스는 배낭에서 야전삽을 꺼내들고 가디언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저 새끼들 흙탕물 마사지 좀 시켜줘야지.”
빗속에서 몸을 잔뜩 낮추고 바위에 다가간 세데스는 야전삽으로 나무 밑둥치 주변을 파기 시작했다. 빗물로 물러진 땅은 힘 좋은 세 장정의 삽질에 한 무더기씩 썩썩 잘려나갔다. 그들이 땅을 파내면서 능선 꼭대기에서 내려온 물길이 조금씩 헤네티들이 오고 있는 방향으로 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데스가 원한 건 이 정도가 아니었다.
“이거나 먹어라, 씨발.”
세데스는 뿌리 주변이 온통 드러난 나무를 헤네티들 오고 있는 쪽으로 힘껏 걷어찼다. 큰 바위를 버티고 있던 나무는 결국 뿌리째 쓰러져 흙더미와 바위를 떠안은 채 비탈 아래로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큰 뿌리와 토사, 나무가 휩쓸리면서 주변 흙까지 한데 휩쓸려 헤네티들의 머리 위를 덮쳐 내려가기 시작했다.
“파티 시간이다, 얘들아.”
세데스는 준비해 온 석궁을 장전하며 나무 뒤에 몸을 감추었다. 사실 그에겐 태어나 첫 실전이지만 분노와 적개심 때문인지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한쪽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는 세데스 특유의 웃음을 보며 황실 출신인 휘하 가디언이 농담처럼 말했다.
“지금 보니 옛날 베흔 대장 표정하고 꼭 닮으셨네요.”
다섯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빗속에서 미끄럽고 가파른 진창길을 올라가던 사카는 머리 위에서 울리는 굉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무언가 시커먼 형상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그들의 눈앞에 뿌리째 뽑힌 나무의 형태로 불쑥 나타났다.
“으앗!”
놀란 여섯 헤네티들이 빠르게 움직이려 했지만 진창에 박혀 둔해진 발이 문제였다. 제일 늦었던 마지막 한 명은 가지에 발목이 얽히며 벌렁 넘어져 나무와 함께 주르르 미끄러져 멀어져갔다.
“사태다!”
나무에 뒤이어 쏟아져 내려온 흙탕물은 더 심각했다. 나무를 가까스로 피한 헤네티들도 갑작스런 흙탕물 세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휩쓸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진 채 무기로 땅을 찍어 위치를 버텨보려 했다.
“엇.”
언덕 위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제일 먼저 느낀 헤네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의 동시에, 그의 어깨를 짤막한 무언가가 단번에 꿰뚫었다.
“걸렸다!”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헤네티들을 향해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데스와 가디언들의 볼트 사격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어깨에 볼트를 맞은 동료를 구하려 기어가던 다른 헤네티도 등에 한 발을 맞고는 중심을 잃은 채 흙탕물에 쓸려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다행히 석궁 자체의 위력은 마우저에 비해 형편없다보니 급소에 맞지 않는 한 약간 찢기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갑옷이라도 입었다면 겁을 낼 필요가 없는 무기지만 이번엔 무게를 줄이느라 그나마도 안 걸친 게 화근이었다.
“방패수가 사수를 지켜!”
사카가 등에 진 방패로 위기에 처한 부하들의 앞을 막아보려 했지만 제대로 몸도 못 가누는 상태에서 도리어 밑으로 몇 발짝을 더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악!”
몸을 일으켜 응사하려던 또 한 명의 헤네티가 뺨을 찢긴 채 비명을 질렀다. 언덕 위의 세 명은 얄미울 만큼 침착하게 모습을 감춘 채 이들이 중심을 잃고 버둥거리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조준사격을 하고 있었다. 사카는 상대가 평범한 군인이 아니라는 것을, 이대로는 제대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안되겠다, 위치가 너무 불리해! 흙탕물 타고 일단 내려가!”
사카는 부하들에게 온 길을 도로 내려가라고 손짓했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부상을 입고 만신창이가 된 그의 팀원들은 미리 자리를 잡고 기습한 세데스와 가디언 둘을 당해내지 못하고 모두 흙탕물에 몸을 실어 언덕 아래로 멀어져갔다.
“엿 먹어라! 이 잡신 똘마니 새끼들아!”
헤네티 6명 중 4명에게 부상을 입혀놓은 세데스는 도망치는 그들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번쩍 들어 보이며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폭우가 쏟아지는 산악 정글에서 이 셋의 첫 번째 작은 승리를 자축하는 함성이 떠나가라 능선을 울렸다.
“이제 어쩌죠?”
잠깐의 승리에 취해 있던 가디언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다니?”
“이제 우리 위치를 알았으니 재정비해서 쫓아오지 않을까요? 패거리가 또 있을지 모릅니다.”
“올 테면 오라지.”
세데스가 억지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석궁과 야전삽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움직여서 데이 그 새끼를 쫓아가야지.”
배낭을 다시 짊어진 세데스는 쏟아지는 비를 올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젠 세네피스를 잡는 일과 헤네티들에게도 숨는 두 가지를 다 해야 할 판이었다.
“느려도 일단 움직여, 최소한 저놈들보다는 앞서서 가야 하니까.”
세데스는 푹푹 빠지는 진창을 밟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리는 잠깐이고, 이젠 처음보다 더한 고생만 남아있었다.
세데스 일행과 사카의 헤네티들이 비가 내리는 산악 정글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며 서로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 그날 새벽녘, 한참 남쪽의 도로에는 또 다른 한 무리가 그 두 팀보다 한참 뒤처진 곳에서 비가 내리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좁은 강변을 따라 이어진 이 길은 아라무트 성으로 접근하는 유일한 ‘공식 접근로’이지만 워낙 구불구불 도는데다가 온통 진흙탕이 진 건 다른 곳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낮부터 내린 비 때문에 군데군데 산사태로 무너진 곳들이 길을 막고 있어 차로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기도 똑같았다.
그렇지만 세 명의 이 거구들은 원시적인 내연엔진이 달린 바퀴 세 개짜리 트라이크를 타고 질척거리는 험악한 도로를 가로질러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중이었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속도를 내어 달릴 수 있는 길목은 많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몇 분 못 가 좋은 길목은 다시 끝나버렸다.
“제기랄, 또.”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선두에서 달리던 사람이 트라이크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판초우의를 푹 뒤집어썼지만 큰 키와 쭉 빠진 긴 다리,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분간이 되었다.
“또 산사태에요?”
두 번째 트라이크를 몰던 사람이 짜증스레 물었다. 값싸게 들릴 만큼 가벼운 음색의 여자 목소리지만 역시 보통의 여자들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몸매였다.
“워매야, 계속 이래서야 어떻게 쫓아가라는겨.”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개떡 같은 날씨 하곤.”
제일 마지막에 트라이크를 세운 덩치가 굵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첫 트라이크를 탄 사람과 거의 비슷한 키이지만 훨씬 우람하고 큰 골격이었다.
첫 번째 트라이크 주인이 보안경을 벗고 그레이오팔 눈동자로 마지막 트라이크의 사내를 쏘아보았다.
“아까도 그랬지만 무너진지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아. 자네가 올 땐 이 정도는 아니었나.”
“그땐 내내 너무 더워서 죽을 맛이었죠.”
베흔은 절벽에서 쏟아진 어마어마한 토사 앞에 서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러라고 가져온 건데.”
카렐은 트라이크를 힘으로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무너진 토사더미 위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엄마야, 그냥 삽으로 길 뚫지…….”
당황한 자이납이 자기의 트라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이 트라이크는 속도광이기도 한 ‘흠모하는 리쿠 학장님’이 시라즈 여단을 위해 설계해 준 멋진 물건이지만 웬만한 장정 대여섯 명 체중에 육박할 엄청난 무게는 여단의 덩치 X병사들이 얼차려를 받을 때 등에 지고 뛰게 하는 용도로 딱 맞을 정도였다.
베흔은 내심 자존심이 상한 듯 뒤따라 트라이크를 힘껏 들고 따라갔다. 평지나 단단한 바위 위에선 지고 달리는 것도 나름 익숙했지만 물컹한 토사더미 위에서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시라즈에 훈련과목 하나 추가해.”
카렐이 비틀거리는 베흔의 트라이크를 냉큼 넘겨받아 건너편에 내려놓았다.
“자이납 네 것도.”
마지막으로 자이납 것까지 건너편에 내려놓은 카렐은 보안경을 쓰고 다시 트라이크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크고 육중한 뒷바퀴가 부릉거리며 떨리더니 앞쪽에 달린 두 개의 작은 바퀴를 힘차게 밀며 질척거리는 길을 헤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제가 이거 가져와서 시간 많이 절약하지 않았습니까.”
카렐은 뒤따라 달려오는 베흔의 자화자찬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개의 앞바퀴 양쪽으로 엄청난 양의 물과 토사가 분수처럼 양옆으로 튀었다.
“이런 고약스런 곳에선 말보다 이놈이 제격이죠. 안 좋으면 메고 뛰면 되고.”
“그래, 잘했다.”
듣기 귀찮아진 카렐이 마지못해 긍정을 해 주었다. 아주 터무니없는 말은 물론 아니었다. 이미 이곳을 와 보았던 베흔의 경험 덕분에 이런 푹푹 빠지는 길을 말을 타고 쩔쩔 매며 지나가는 시행착오는 피한 셈이었다.
다행히 이번엔 좋은 길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덕분에 베흔의 수다도 계속 들어주어야 했다.
“이대로 계속 아라무트 궁전으로 가실 겁니까?”
“그래.”
“교단 놈들이 황태후를 속여서 그리로 가시도록 유인한 것일 텐데……순순히 받아들여 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아니지.”
카렐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니 우리가 앞서가서 산을 올라가는 길을 막아야지.”
카렐이 트라이크에 더 속도를 붙였다. 사실 카렐은 세네피스를 추격하는 일행들 중 가장 불리했다. 사카 일행처럼 데이의 예상 경로를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데스처럼 추적 장치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반드시 지나야 할 길목’을 최대한 빨리 먼저 가 막는 것 하나뿐이었다. 원한다면 수만, 수십만도 동원할 수 있는 그가 ‘실력과 임기응변’에는 각각 고수인 이 둘만 데리고 이곳에 달려온 것 역시 단 1초라도 빨리 도착하려는 의도였다.
“아라무트 바위산을 올라가는 길은 셋입니다. 방향도 다르고 겹치는 곳도 없는데 그 중 어느 길을 택할지는…….”
“몰라, 가서 알아보는 거지.”
“그렇긴 합니다만……출발도 늦었고 날씨도 이래서야……제대로 갈 수 있을지 솔직히…….”
베흔의 계속된 불평에 카렐이 다시 눈을 흘겼다. 대놓고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저 능글능글한 전직 근위대장의 머릿속엔 ‘기왕 이렇게 된 바엔 황태후가 몸을 내주고 오르마즈의 시체를 얻는 게 낫지 않을까요?’라는 말로 꽉 차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는 중간 중간 계속 이렇게 딴청과 게으름을 피울 생각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네가 여기 와 본 유일한 경험자가 아니라면 절대 안 데려왔어. 무슨 뜻인지 알지?”
황제의 엄포에 베흔이 그제야 입을 꾹 다물었다.
깜깜한 밤이 지나고 날이 조금씩 밝아왔지만 길 사정은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길은 비비 꼬여 짜증이 나게 했고, 그런 길목 중간중간마다 무너진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산사태와 돌더미들이 계속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그래도 빠른 트라이크와 ‘힘에서든 운에서든’ 제국 최고의 가디언들로 이루어진 3명의 팀워크 덕분에 북쪽의 산악에서 ‘경주’를 벌이고 있는 다른 두 무리와의 격차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카렐이 그 사실을 알 도리는 없었다. 부슬비 속에서 조금씩 밝아오는 하늘을 보고 마음이 더 급해진 카렐은 한 손으로 마른 육포를 뜯으며 계속 트라이크를 전진시켰다. 7시간짜리 짧은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서 다행히 비는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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