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41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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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밤이 지나고 날이 조금씩 밝아왔지만 길 사정은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길은 비비 꼬여 짜증이 나게 했고, 그런 길목 중간중간마다 무너진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산사태와 돌더미들이 계속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그래도 빠른 트라이크와 ‘힘에서든 운에서든’ 제국 최고의 가디언들로 이루어진 3명의 팀워크 덕분에 북쪽의 산악에서 ‘경주’를 벌이고 있는 다른 두 무리와의 격차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카렐이 그 사실을 알 도리는 없었다. 부슬비 속에서 조금씩 밝아오는 하늘을 보고 마음이 더 급해진 카렐은 한 손으로 마른 육포를 뜯으며 계속 트라이크를 전진시켰다. 7시간짜리 짧은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서 다행히 비는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이크!”
선두의 카렐이 갑자기 트라이크를 옆으로 휙 돌린 통에 뒤따라오던 자이납이 하마터면 그 꽁무니를 받을 뻔했다. 가까스로 브레이크를 잡은 자이납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야, 이게 뭐야.”
자이납이 트라이크에서 내려 절벽에 다가가 보았다. 아라무트 궁전으로 가는 길은 500척(150m)도 훨씬 넘어 보이는 깎아지른 폭포 골짜기 위에서 딱 끊겨 있었고, 그 밑에는 북쪽 호수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가 훨씬 더 깊은 어딘가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뿌연 물안개 때문에 밑바닥이 어딘지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이곳에서 떨어지면 천하의 카렐이라 해도 뼈도 못 추릴 높이였다.
“다리가 끊긴 거예요?”
자이납이 당혹스런 얼굴로 골짜기 너머 반대편을 가리켰다. 150척(45m) 정도 떨어진 반대편 낭떠러지엔 절벽 사이를 잇는 구름다리 지지 기둥 두 개만 멀뚱하니 서 있었다.
“끊긴 게 아니고 끊은 거다.”
카렐이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저 반대편에서 로프를 잘랐어. 그러니 이쪽에 매달려 있지.”
카렐 일행이 선 낭떠러지 밑으로 잘린 다리가 축 늘어진 채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카렐이 이를 빠득 갈며 북동쪽을 올려보았다. 비가 그치고 날씨가 개면서, 해발고도 200스타디아(3,000m)가 넘는 아라무트 바위산의 웅대한 형상이 짙은 새벽안개 너머로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다리를 못 건너면 다 소용없었다.
“암살단 짓일까요?”
이번에도 베흔이 최악의 시나리오부터 내놓았다.
“이 길목엔 항상 세작들이 깔려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우리가 오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을 겁니다.”
“글쎄.”
날이 환해지면서, 어젯밤 비를 흠뻑 맞은 도로의 모습도 점점 분명해졌다. 도로 위엔 이 일행보다 먼저 지나간 차량 여러 대의 바퀴자국이 보였다. 자국이 선명한 것을 보아 지나간지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온다 해서 겁먹고 자기네 유일한 도로를 냉큼 자를 만큼 소심한 영감은 아닐 것 같거든?”
카렐은 절벽에 매달려 있는 다리를 힘껏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자이납도 별 생각 없이 달려들어 함께 당겨 올렸다. 눈치만 보던 베흔도 하는 수 없이 함께 달려들어 다리를 당겼다.
“복구라도 하시게요?”
“누가 잘랐는지 보게.”
늘어진 다리 구조물의 무게가 상당했지만 오기로 끌어올리는 세 가디언들의 괴력 앞에서는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지상으로 죽 끌려 올라왔다.
“이런, 썩을.”
잘려있는 다리의 굵은 로프 끝을 본 순간, 카렐의 입에서 바로 욕이 튀어나왔다.
“왜요?”
카렐은 로프 단면을 일행에게 내보였다. 너덜너덜한 로프 끝에는 살짝 그슬린 자국까지 남아있었다. 자신의 예측이 빗나갔음을 직감한 베흔이 낯을 찡그렸다.
“도끼나 칼로 자른 게 아니군요.”
“마우저 탄 냄새야.”
단면에 코끝을 댔던 카렐이 잔뜩 경계서린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단 헤네티 놈들이 먼저 지나가면서 길을 끊은 게 분명하다.”
자이납이 빗물로 진구렁이 된 바닥의 바퀴자국을 가리켰다.
“그럼 이 바퀴자국도요?”
“2대쯤 되어 보입니다.”
베흔이 대충 걸음으로 바퀴 폭을 재어보았다.
“폭을 보니 이 길 초입 마을의 중형 화물차 같습니다. 어쩐지, 제가 지난번 왔을 때는 빌릴 수 있는 화물차가 2대 있다고 했었는데 아까 지날 땐 한 대도 안 보였거든요.”
카렐이 잘린 로프 끝을 쥔 채 굳은 얼굴로 물었다.
“없어진 화물차들이 몇 명쯤 태울 크기던가?”
“군장까지 포함하면 10명 정도 가능한 크기였습니다.”
“그럼 여길 지나간 헤네티가 20명까지도 될 수 있다는 뜻이군?”
카렐이 입술을 깨물며 베흔과 자이납을 힐끔 돌아보았다.
“우리에게 좋은 시간은 끝난 것 같다.”
카렐은 이곳까지 타고 온 트라이크를 길 옆 정글로 끌고 들어갔다. 베흔이 그를 따라하며 물었다.
“이제 어쩌시려고요? 헤네티 20명이 지나갔다면 우리 셋만으로는 힘듭니다. 돌아나가서 대병력을 투입할까요.”
“여길 하루이틀만에 점령할 수 있다면 이미 10개 군단은 투입했지.”
잘 안 보이는 덤불 속에 트라이크를 숨긴 카렐은 그곳에 실어놓았던 짐들을 꾸역꾸역 꺼내어 배낭에 싸기 시작했다.
“으아아, 내 팔자야. 역시 따라나서는 게 아니었어.”
암담한 표정으로 하늘을 한 번 올려본 자이납도 결국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카렐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왜, 출발할 때는 좋아서 죽더니.”
“영감의 궁전 하렘에 미남미녀 득시글거린다고 꼬시지만 않았어도 안 나섰다고요.”
“네 팔자만 꼬였지 미남미녀들은 여전히 궁에 잘 있어.”
카렐은 큰 배낭을 불끈 짊어지며 농담처럼 말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140스타디아(21km)쯤 올라가면 호수가 있다. 호수 서쪽에 선착장 표시가 있는 거 보니까 배를 탈 수도 있을 것 같다. 지면이 이리 개떡 같으니 그편이 더 빠를지도 몰라. 서둘러라.”
“배가 없으면요?”
“지난번 남부에서처럼 헤엄쳐서 건너든지.”
“그땐 옆에 학장님이나 계셨었죠.”
“학장이 몸 좀 키우고 콧수염 길렀다고 생각해.”
“세상에, 어디 그런 말도 안 되는……!”
베흔을 힐금 본 자이납이 비명과 함께 경기를 하며 배낭을 지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베흔도 뚱한 얼굴로 제일 늦게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카렐이 그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아까 마을에서 출발할 때 내가 받은 쪽지가 뭐였는지 아나?”
“예?”
“수사 중인 경호실 요원들이 북쪽에 있는 다른 도시에서 세데스 경 비슷한 사람을 본 목격자를 찾았다더군.”
짜증으로 가득했던 베흔의 눈동자가 손녀 이야기에 확 커졌다.
“우리 가디언을 찌르고 달아날 때 어머니를 자기가 찾아오겠다고 했다지. 어쩌면 교단에서 더 이상 효용이 없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함정을 파 궁지에 빠뜨린 것일 수도 있지. 그냥 가정이지만 말이야.”
시큰둥하던 베흔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한때는 그가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예뻐해 주던 손녀였지만 기쁜 맘에 안아줄 때마다 악을 쓰고 울어대기만 해서 그를 실망시키곤 했었다.
물론 크고 나서도 그는 제위전쟁 막판 아버지 제롬을 버리고 황제에게 돌아선 베흔에게 줄곧 냉담하기만 했었다. 그리고 베흔도 델루지 가 제후로 살아갈 손녀를 위해 모든 것을 감춘 채 30년간 조용히 숨죽이고 있어 주었다.
“그 애가 누명을 쓴 거라면…….”
“아직 몰라. 누명을 벗기 위해 여기까지 쫓아온 거라면 헤네티들 손에 그 애도 안전치 못할 게야.”
카렐은 호수가 있는 북쪽을 향해 정글 오르막을 성큼성큼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이 댓발은 나온 자이납도 쉴 새 없이 툴툴대며 그 뒤를 따랐다. 카렐은 혼자 뒤에 처진 채 멍하니 서 있는 베흔을 한 번 돌아보았다.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오고, 날 따라오는 게 그리 내키지 않으면 안 말릴 테니 트라이크 타고 마을로 돌아가게. 어차피 여기부터는 자네 길 안내도 소용없을 것 같으니.”
죽죽 미끄러지는 진창을 밟고 오르막을 기어오르는 카렐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쳐다보던 베흔이 마지 못하는 척 뒤를 따라나섰다.
“손녀라고 달랑 둘 있는 게……빌어먹을.”
부슬비가 멈추면서, 새벽 햇살이 정글 숲을 뚫고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나무 위 움막에서 아침까지 모두 먹고 난 데이는 세네피스를 등에 업고 나무에서 느릿느릿 내려왔다. 데이는 어젯밤 빗물을 받기 위해 큰 나뭇잎 밑에 달아놓았던 물통들을 주섬주섬 모아 배낭에 가득 채우고 일어섰다.
“오늘은 내려가는 길이니 어제보다는 덜 힘들 겁니다.”
데이가 품에서 잘 말린 세네피스의 정글 장화를 바닥에 내놓았다.
“네댓 시간 내려가면 호수 선착장에서 배를 탈 수 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호수를 건너 정글에서 잠시 눈 붙이고 내일 저녁엔 궁이 있는 아라무트 산에 오를 예정입니다.”
“알았다.”
사실상 밤을 거의 샌 세네피스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아무 불평도 없이 장화를 신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산행에 이미 그의 발은 허물이 벗겨지고 물집이 잡혀 엉망이었다.
“따라오십시오.”
큰 배낭을 혼자 짊어진 데이는 무뚝뚝하게 말만 툭 던지고는 앞장서기 시작했다. 세네피스는 무거운 다리를 끌고 그를 따라나섰다.
밤새 비가 내린 길은 엉망이었다. 발은 푹푹 빠졌고, 진흙탕 때문에 몇 번이나 미끄러져 자리에 주저앉곤 했다. 아침에 억지로나마 먹은 죽 덕분에 힘이 조금은 났지만 내리막이길 망정이지 어제 같은 오르막이었다면 정말로 주저앉고플 것 같았다.
이 둘의 뒤에는 밤새 빗속 강행군으로 파김치가 된 채 이 시간에도 진창길 오르막을 낑낑대며 오르고 있을 운 없는 여럿이 있지만 세네피스는 아직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데이는 두 팀, 아니 세 팀이 뒤를 쫓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친 세네피스의 페이스에 맞춰 느릿느릿 내려가 주었다. 그는 손목에 찬 시계 같은 것을 가끔 확인할 뿐, 내내 태평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맘 좋고 친절한 가이드는 아니었다. 그는 힘들게 걷는 세네피스를 앞에서 우두커니 기다려 주기만 할 뿐 부축해 준다거나 업어주지도 않았고, 그가 진창에 미끄러져 넘어져도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그때마다 데이가 하는 말은 딱 한가지였다.
“당신이 원해서 가는 길입니다. 빨리 일어나십시오.”
세네피스는 힘들다는 투정도, 기다려 달라는 소리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몇 시간동안 묵묵히 데이의 뒤를 계속 따라갔다. 우비는 진흙으로 어제부터 엉망이 되어 있었고, 속에 입은 저고리와 바지도 빗물과 땀으로 축축해져 몸에 쩍쩍 달라붙는 것이 당장이라도 벗어버리고 싶은 맘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겨우겨우 걷던 세네피스가 결국 주저앉고 싶어질 무렵, 아래쪽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후우.”
지긋지긋한 정글을 나와 탁 트인 호수를 본 세네피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원 정글 중간에 호젓하게 자리한 호수 주변엔 색색의 꽃이 보였고, 뭍과 맞닿은 주변엔 얕은 습지에 자라는 사람 키 만한 높이의 푸른 맹그로브 숲이 띠 모양으로 둘러쳐져 평화로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서 낮 시간의 절반이 지나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세네피스는 진흙으로 더러워진 얼굴과 손을 씻으려 호수에 다가갔다.
“잠깐.”
데이가 물에 손을 넣으려던 세네피스의 뒷덜미를 덥석 붙들어 거칠게 잡아당겼다. 거의 동시에, 맹그로브 덤불 사이에서 집채만한 나무토막 같은 것이 확 튀어나왔다. 벼락에 맞은 듯 깜짝 놀란 세네피스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세네피스를 놀라게 한 큰 악어는 눈 깜짝할 새 덤불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봐 줄 사람도 없으니 닦을 필요 없습니다. 짠물이라 피부가 더 상할 겁니다.”
데이는 파랗게 질려 바닥에 주저앉은 세네피스를 그대로 놔둔 채 휙 돌아섰다.
“도착하면 씻을 물과 향유와 몸단장할 옷과 보석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그 냉담한 사내는 호숫가에 만들어져 있는 허름한 선착장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놀라 다리가 굳어 있던 세네피스는 엉금엉금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나무로 만들어진 선착장은 맹그로브가 빽빽하게 자란 얕은 늪지대를 가로질러 물이 깊은 염수호 중앙으로 이어져 있었다.
호수는 상당히 큰지 동쪽 건너편이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도 않았고, 중간에 작은 섬도 군데군데 보였다.
“빨리 안 오고 뭐 하십니까. 여긴 밤낮이 모두 짧아 서둘러야 합니다.”
선착장 위를 걷던 데이가 뒤를 돌아보며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악어에 크게 놀랐던 세네피스로서는 덤불을 가로지르는 선착장 위를 디디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널빤지를 엮어 만든 허름한 선착장 위에 어렵사리 발을 들여놓았다.
“맙소사.”
선착장 위를 걷던 세네피스는 그제야 얕은 맹그로브 늪 사이 곳곳에 숨은 수많은 ‘나무토막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만한 정도는 작은 크기였고, 큰 악어는 꼬리까지 합치면 사람 키 세 배는 넘어보였다. 이마 위로 툭 튀어나온 괴이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그 거대한 파충류들은 맘만 먹으면 삐거덕거리는 선착장 위로 언제든 튀어오를 것 같았다.
“이런.”
공포에 질린 세네피스는 허겁지겁 맹그로브 덤불을 가로질러 데이를 따라갔다. 하지만 절반 패닉에 빠져 맹그로브 덤불을 지나온 세네피스는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육지 쪽을 휙 돌아보았다. 덤불 너머, 그들이 지나온 정글은 여전히 조용했고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남쪽을 바라본 세네피스의 무지개빛 눈동자의 검은 동공이 갑자기 커졌다.
“맙소사……벌써 따라온 거야?”
세네피스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넋을 놓은 사람처럼 달려온 선착장을 다시 되돌아 달려가려 했다.
“안 돼.”
“뭐 하십니까.”
데이가 번개같이 쫓아와서는 난데없이 뒤로 돌아가려 하는 세네피스를 덥석 붙들었다. 평소 그를 기다려주기만 하던 데이가 이번엔 이상하리만큼 서두르며 그를 억지로 잡아끌었다.
“빨리 오십시오.”
“안 돼, 잠깐, 10분만, 10분만.”
“왜요, [악어조심] 팻말이라도 세우고 오시렵니까.”
데이는 버둥대는 세네피스를 어깨에 불끈 짊어지고는 선착장에 미리 매어져 있던 보트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선착장 끝엔 검은색 고속 보트 한 척과 원시적인 노가 달린 허름한 조각배 3척이 보였다. 데이는 버둥거리는 세네피스를 데리고 고속 보트에 훌쩍 뛰어내렸다.
“날 따라오다 다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혼자 그냥 가라고!”
세네피스가 울부짖었지만 데이는 못 들은 척 그의 몸에 벨트를 매고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둘이 탄 배는 악어로 우글거리는 맹그로브 숲을 뒤로하고 물살을 가르며 호수를 건너기 시작했다.
“지나간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세데스와 동행한 가디언이 바닥에 난 깊은 발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발자국은 선명하게 팬 것이 아니고 내리막을 따라 길게 늘어져 있었다.
“스텝이 불안정했습니다. 다리가 풀려 미끄러진 것 같습니다.”
“그럼 황태후겠군. 이제 거의 따라잡았나.”
세데스가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구르고 미끄러진 흔적도 있습니다. 황태후께서 많이 지치신 게 분명합니다.”
가디언이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세네피스를 거의 따라잡았다고 여긴 세데스는 빠른 걸음으로 비탈을 내려갔다. 다리는 지쳤고, 길은 미끄럽고 푹푹 빠졌지만 코앞에 표적이 있다는 사실에 없던 힘도 마구 솟는 것 같았다.
그때, 멀리에서 보트 엔진소리를 제일 먼저 들은 가디언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일행들에게 ‘전방 3스타디아’라고 수화를 하며 후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보트의 큰 엔진소리는 가디언의 예리한 청각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호수?”
세데스는 몇 번이나 미끄러지고 진흙탕에 굴러가며 정글을 헐레벌떡 뛰어 내려갔다. 입에서 단내가 날 만큼 필사적으로 달리던 그는 조금씩 물냄새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엔진 소리는 도리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런, 놓친 거 아냐?”
마음이 급해진 세데스는 주변 확인도 안 한 채 정글 밖으로 뛰쳐나갔다. 맹그로브 숲 너머, 호수로 멀어지고 있는 검은 보트가 희미하게 보였다.
“이런, 씨발!”
선착장으로 뛰어들려 하는 세데스의 뒷덜미를 가디언이 덥석 붙들었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것을 직감한 세데스가 주춤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무슨 느낌이지.”
막 고개를 돌렸던 세데스는 정글에서 자신을 향해 마우저를 겨누고 있던 헤네티의 얼굴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세데스가 석궁을 빼 반격하려 했지만 정글에 매복하고 있던 헤네티들의 사격이 훨씬 더 빨랐다.
“우앗!”
끝장이라 생각했던 그는 가디언에게 목이 채이며 맹그로브 덤불 사이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동시에 마우저가 날아들어 그의 위를 스쳤다. 세데스의 배낭에 정통으로 맞은 마우저는 위력이 어찌나 센지 내용물을 너덜너덜 걸레로 만들어놓고 관통해 날아갔다. 그 충격에 물로 밀려난 세데스는 하마터면 맹그로브 늪에 얼굴부터 처박을 뻔했다.
“이런 빌어먹을!”
온몸이 흠뻑 젖고 흙투성이가 된 세데스가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도 교단 헤네티들의 무기인 ‘마우저’는 말로만 들은 일이 있었다. 헤네티 셋 정도면 맞서 싸워볼만하지만 적의 신무기가 문제였다. 이젠 지난밤과 처지가 완전히 뒤바뀐 셈이었다.
“저놈들 못 도망가게 해!”
사카가 부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지난밤 세데스의 기습에 타격을 입었던 그는 부상을 입은 셋은 세데스의 바로 뒤를 쫓게 했고, 경상자 한 명과 성한 한 명만 데리고 정글을 빙 돌아 막 이곳에 도착해 있던 터였다. 간발의 차로 데이와 세네피스를 놓친 건 아까웠지만 생각 외의 먹이가 바로 그 뒤에서 튀어나왔으니 그에겐 공짜 점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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