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45화 (940/1,132)

< -- 945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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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헤네티들은 다 어디 갔지?”

카렐 일행은 세네피스가 거의 정상 가까이 오른 정오 무렵이 넘어서야 아라무트 산의 남쪽 절벽 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렐은 베흔이 죽여 쓰러뜨린 헤네티의 시체를 옆으로 걷어 차내며 산 위를 올려보았다. 뒤처진 동료가 오는 줄로 알고 암구호부터 물었던 이자의 운명은 카렐, 베흔 두 괴물가디언의 칼끝에서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끝나버렸다.

“저 위로 헤네티 11명 정도가 보입니다. 부상자도 하나 업고 있는 것 같고요. 벌써 절반 가까이 올라간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다른 길로 간 모양입니다.”

베흔이 망원경으로 산 위를 확인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흰 화강암 절벽에 다닥다닥 붙어 올라가고 있는 헤네티들의 모습이 점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제 걸음으로도 3시간은 걸렸는데……지금 따라 올라가도 저녁때나 되어야 도착할 겁니다. 게다가 저놈들도 우리가 따라 올라오게 가만히 있지는 않겠죠. 우리가 아래쪽이라 위치가 나쁩니다. 보나마나 마우저에 볼트까지 위에서 죽어라 쏴댈 겁니다. 그걸 다 뒤집어쓰고 올라가긴 너무…….”

“자네가 올라간 길도 이 길이지?”

“예, 나머지 두 길은 빠르지만 워낙 험해서……쓸데없는 데 목숨 걸 일 있습니까.”

베흔이 앞니를 드러내고 능글하게 웃었다. 카렐이 그의 얼굴을 못 본 척 절벽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퉁명스레 물었다.

“제일 빠른 길이 어디냐.”

그 한 마디로 카렐의 다음 말을 예상한 베흔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내 팔자야.”

“자네 점점 아리아노 경 말투를 닮아간다는 걸 아나?”

이번엔 카렐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외할머니 아리아노 이야기가 나오자 구석에 말없이 있던 세데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시 베흔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초리에 당황한 베흔이 얼른 본론으로 돌아갔다.

“제일 빠른 건 북쪽 길입니다. 잘 하면 한 시간이면 올라간다고 하니까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시간 따지면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쯤…….”

“됐다, 그럼 한시가 급하니 나 혼자 북쪽 길로 가겠다. 너희는 여기서 눈에 보이게 따라 올라가면서 저놈들 주의를 끌어.”

카렐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무기벨트와 물통, 절벽을 오를 때 쓰는 리프트 케이블을 주섬주섬 챙기자 베흔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혼자 영감의 궁에 가신다고요?”

“못 갈 이유라도 있나.”

“아니, 여기서 놈들 속도를 늦추는 데 성공한다 해도 결국 꼭대기에선 저들과 만나실 겁니다. 상대는 20명이 넘는 X 헤네티들입니다. 가디언으로 치면 모두 상등급 수준 이상입니다.”

카렐이 눈가를 찡그렸다.

“너희를 다 데리고 가면 너무 늦어져.”

카렐이 성큼성큼 북쪽으로 가려는 것을 베흔이 급히 따라잡았다.

“다는 몰라도 두세 놈은 잡아드리죠. 아무리 폐하라도 혼자는 무리십니다.”

카렐이 이번엔 뒤에 남을 세데스와 자이납, 2명의 가디언들을 돌아보았다.

일행들을 힐끔 돌아본 세데스가 배낭에 든 로프와 하네스, 무기들을 챙기며 난데없이 불쑥 나섰다.

“산악부대에서 암벽은 많이 타봤으니 방해는 되지 않을 겁니다.”

카렐도, 베흔도 모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황제의 의심어린 시선을 외면하며 북쪽으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조연은 싫습니다.”

“뒤처져도 안 기다려줄 걸세.”

카렐은 가디언 둘과 뚱한 얼굴로 남은 자이납에게 방금 전 죽인 헤네티에게서 노획한 마우저를 내밀었다. 그동안 모조품으로 교육만 받고 눈독만 들여왔던 진짜 마우저를 비로소 손에 넣은 자이납의 입이 헤벌레해졌다.

“이 가디언 둘과 가라. 명색이 황실 중랑장이니 네가 선임이다.”

“헤헤, 그럼 그렇죠.”

“네 리프트 케이블은 세데스 경 줘. 절벽을 타야 할 것 같으니.”

“뭐, 이거야 보급품이니까 주든 말든요.”

기분이 좋아진 자이납은 허리에 매고 있던 리프트 케이블을 기꺼이 풀어 세데스에게 내놓았다.

카렐이 들뜬 자이납에게 말했다.

“적들이 세데스 경이 온 건 알고 있으니 네가 세데스 경 행세를 하고 따라 올라가면서 저들의 주의를 끌고 있어, 알겠나.”

“근데 저 양반이 쫌전에 제 역할을 조연이라고 한 거예요?”

분기탱천한 자이납은 세데스를 힐끔 째려보고는 신발 끈을 꽉 조였다.

“저 위에서 절 생각보다 빨리 다시 보게 될 거라고 해 주세요.”

새 ‘장난감’을 손에 넣고 기분이 좋아진 자이납은 세데스가 데려온 2명의 황실 가디언들을 데리고 남쪽 길을 후다닥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렐과 베흔, 세데스는 아라무트 산에서 가장 험하다는 북쪽 절벽을 향해 서둘러 움직였다.

아라무트 산 옆을 빙 돌아 북쪽 절벽에 도착한 카렐은 ‘길’이라고 표시된 팻말을 본 순간, 내심 기가 막혔다.

그곳은 길이 아니고 까마득한 수직의 절벽 옆으로 팔뚝만한 굵기의 나무막대들이 점점이 박혀있는 곳이었다. 한 뼘 길이의 막대들이 딱 한 걸음 폭만큼의 간격으로 거의 8스타디아(1,200m) 위의 수직 절벽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사람 잡네.”

뒤따라 도착한 세데스가 힘들게 들고 온 자일과 고리들을 내던지며 씩씩거렸다. 베흔도 기가 막힌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건 산 타는 실력이 아니고 얼마나 미친놈인지 보자는 거 아닌가요.”

베흔이 꼭대기 부근을 올려보며 겁을 먹었는지 이마를 싸쥐었다. 낭떠러지는 마치 갈아놓은 것처럼 맨들거렸고, 로프를 걸 곳도, 손으로 짚을 곳도 전혀 없었다. 결국 이 옹색한 나무토막 외에는 디딜 곳도, 기댈 곳도 전혀 없었다.

“차라리 그냥 절벽이면 타고 올라갈 텐데.”

줄줄이 박혀 있는 나무토막을 노려보던 카렐은 이 광경이 어딘지 익숙하다는, 마치 데자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1부4권 354p, 2부5권 93p)

“리프트 케이블로 중간까지는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베흔은 허리띠에 달린 가는 리프트 케이블의 고리를 석궁 끝에 끼우고는 절벽 높은 곳에 대고 쏘았다. 하지만 화강암 표면이 워낙 매끄럽고 단단해서 박히지도 못한 채 바닥에 툭 떨어져버렸다.

“빌어먹을.”

베흔이 욕을 내지르며 도로 케이블을 감았다. 오기가 난 그는 몇 번이나 다시 쏘았지만 제위전쟁 때까지만 해도 종횡무진 사막 절벽과 고층건물을 누비던 이 장치도 아라무트의 화강암 절벽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젠장, 괜히 고리만 고장났는데요.”

베흔은 찌그러져 되돌아온 케이블 끝 앵커 고리를 보며 투덜거렸다.

“시간 낭비다.”

카렐은 몸을 엉거주춤 낮추고 맨몸으로 나무토막을 하나씩 디디기 시작했다.

“나만큼 미치지 않았으면 지금이라도 남쪽으로 돌아가서 자이납 따라가. 누구 하나 떨어져도 신경 안 써 줄 테니.”

처음 디딘 몇 개의 나무토막은 여러 사람들이 도전했다가 바로 포기해서인지, 구멍에서 흔들거리고 끼익 하는 불안한 소리까지 났지만 조금 더 올라가니 이젠 누군가 디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왜 자꾸 옛날 생각이 날까 몰라.”

베흔도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카렐의 뒤를 마지못해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미친’ 세데스도 순전히 오기로 그 뒤를 따라 절벽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금이야 버틸만하지만 저 위에는 쎈 바람이 불 텐데 어쩌죠?”

베흔이 한참 앞에서 가는 카렐에게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귀와 입을 모두 막은 사람마냥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셋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조심조심 한 발씩을 내밀었다. 나무토막의 폭은 정확히 발 하나 디딜 정도였고, 바람에 밀리건, 헛발을 짚건 일단 중심을 잃으면 끝이었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지면이 조금씩 멀어져갔다.

“젠장, 수색대 때도 이렇게 황당하게 올라 본 일은 없는데.”

앞에서 묵묵히 올라가는 카렐과 베흔과는 달리, 제일 뒤에서 따라오는 세데스는 조금씩 공포를 느끼는지 말이 점점 많아졌다. 이젠 땅 밑의 나무들도 손톱만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때, 갑자기 강한 바람이 등 뒤쪽에서 확 몰아쳐왔다. 순간 중심을 잃은 세데스는 휙 밀려나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때 그의 허리춤에 걸린 석궁이 나무 발판에 턱 걸리면서 그는 공중에서 한 바퀴를 핑그르르 돌았다.

“으악!”

세데스의 짧은 비명이 소름끼치는 절벽을 울렸지만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바로 허리가 부러지며 땅바닥에 내리꽂혔겠지만 그는 짧게 추락이 멈춘 틈을 타 한 손으로 나무 발판 하나를 덥석 붙잡을 수 있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세데스는 밑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세데스 못지않게 놀란 베흔이 빨리 올라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그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은 누가 누굴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팔에 힘을 주어 다시 발판 위로 기어올랐다.

“젠장, 이거 언제까지 올라야 돼.”

어렵사리 나무 조각을 디디고 섰지만 조금 전의 충격에 놀란 세데스는 자리에서 굳어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절벽도 많이 타 보았고, 누구보다 대담한 그였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베흔이 계속 그를 재촉했다.

“빨리 오십시오. 뭐 하십니까.”

계속 채찍질하려던 베흔은 말을 멈추었다. 세데스는 움직이기 싫어 저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얼굴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오기로라도 움직이려 하고 있지만 몸이 문제였다.

“심호흡 하시고요, 하늘 한 번 보시고…….”

“알아, 안다고!”

자존심이 상한 세데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마비된 그의 다리는 움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보다 못한 베흔이 조심조심 뒷걸음쳐 그에게 다가가서는 손을 내밀었다.

“한 발만 내밀면 됩니다.”

“그냥 놔둬! 내가 간다니까!”

신경이 곤두선 세데스는 베흔이 내민 손도 무시한 채 바락바락 악만 썼다.

화가 난 베흔이 갑자기 그의 손을 거칠게 덥석 붙들었다.

“네 발로 나섰으면 닥치고 따라와, 이년아!”

베흔의 호통이 쩌렁 하고 절벽을 울렸다.

“징징대는 꼴 보느니 나하고 같이 떨어져 죽을래?”

순간 압도당한 세데스는 자신의 오른손목을 꽉 움켜쥔 베흔의 큰 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선두에 멈춰 서서 말없이 이곳을 쳐다보고 있는 황제의 유별나게 큰 손도 보았다. 마지막으로 이 둘보다는 조금 작지만 역시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자신의 왼손도 펼쳐보았다. 왜 이렇게 셋이 비슷한지 알 수가 없었다.

“갈 수 있다, 걱정 마라.”

제일 앞에 있던 카렐이 차분하게 말했다.

세데스는 뒤에 있던 한 발을 천천히 앞으로 옮겨 다음 나무 조각을 디뎠다. 그리고는 다시 한 발을 아주 천천히 내밀었다. 땅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를 잡아주고 있는 이 사나운 남자의 손이 그보다 훨씬 그의 맘을 놓이게 했다.

서쪽 절벽 길에서 데이를 쫓아가느라 한참을 헤맨 사카 일행이 비로소 산 정상에 도착한 건 세네피스가 도착하고 2시간 정도나 지난 후였다. 절벽을 다 올라 정상의 평지에 선 순간, 헤네티들은 이제야 힘든 코스는 다 끝났다며 일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앞서간 세네피스와 데이를 따라잡는다며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이젠 무사히 오른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절벽 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사카는 남쪽 절벽 길로 올려 보냈던 부하가 남쪽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사히 올랐구나. 그런데 무슨 일 있냐.”

“밑에서 또 올라옵니다!”

“또 누가?”

“멀리 봐선 호수변에서 죽었다던 세데스 델루지 일행 같습니다. 숫자나 체형, 생김새가 모두 비슷합니다.”

“멍청한 놈들, 당했군.”

아찔해진 사카는 부하를 따라 세데스가 올라온다는 남쪽 절벽길 꼭대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의 말대로, 어제 호수변 선착장에서 거의 잡았다가 놓쳤던 ‘세데스’와 두 가디언들이 한참 밑에서 헤네티들의 뒤를 쫓아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저들을 본 순간, 사카는 호수 너머에 남겨두고 온 헤네티들의 운명을 직감했다.

“저 셋을 못 당했다니, 한심하긴.”

사카는 전과가 불만스러운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카렐 일행의 존재를 아직 전혀 모르는 사카는 아직은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대신 다섯 명을 절벽 밑의 자이납 일행을 가리켰다.

“너희가 못 올라오게 막아.”

“나무 한 그루 없으니 여기서 느긋하게 쏴 주면 되겠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5명의 헤네티들은 마우저를 빼들고는 밑에서 올라오는 자이납 일행을 향해 침착하게 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거리가 워낙에 멀어 빠른 가디언들을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그때, 아래쪽에서 날아온 응사에 헤네티들이 일제히 몸을 움츠렸다. 바윗덩이 한쪽이 쩍 갈라져 날아가는 것이 분명 마우저였다.

“씨이, 뭐야, 우리 무기 빼앗긴 거야? 저놈들 누구 걸 빼앗은 거야!”

바로 자신들의 무기로 응사를 당하자 그들이 크게 당황했다.

“몰라, 밑에 있던 놈들 거 빼앗았나봐!”

“그런데 남부제후가 이 까다로운 걸 어떻게 쓸 줄 아는 거야?”

“알 게 뭐야!”

일단 자리를 옮긴 그들은 다시 엉금엉금 올라오는 3명의 일행을 향해 저격을 시작했다. 밑에서 올라오는 3명과, 위에서 그들을 견제하는 5명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5명에게 자이납 일행―그들 스스로는 세데스 일행이라고 알고 있는―을 맡겨놓은 사카는 나머지 16명을 데리고 아라무트의 궁전으로 향했다. 태어나 처음 이곳에 와 본 그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잔뜩 긴장하며 다가갔지만 바로 문 앞에 갈 때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올라오셨군요.”

사카는 눈앞에 불쑥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지금껏 ‘데이’라 불렀던 사내가 담 색깔과 똑같은 코발트빛 로브에 흰 머플러를 늘어뜨린 단정한 차림새로 혼자 서 있었다. 사카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 그자의 머플러가 옛 교단 후계자들이 걸치던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눈치 챘다.

“남쪽 길로 오기로 하지 않았었나?”

사카가 일부러 성난 투로 물었다.

“왜 우릴 따돌렸지?”

“동행자가 그쪽을 원치 않아서요.”

데이가 크테시폰 궁에 있던 때와는 사뭇 다른 나긋나긋한 말투로 대답했다.

“뮤는?”

“이미 안에 있습니다. 오늘밤을 위해 단장중입니다.”

데이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의 대답에 사카는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짧은 낮도 이제 거의 지나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오늘밤만 지내면 되겠지?”

“그렇습니다. 시그마 오르마즈의 시체가 있는 곳은 내일 아침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뮤도 우리가 데려간다.”

“원하시는 대로.”

“여기서 정글을 빠져나가는 데만 며칠인데, 내일아침 안내해 준다는 건 시체가 이곳에 있다는 뜻인가?”

데이가 기분나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궁전 안 주기장에 셔틀이 대기 중입니다. 출발하실 때만 잠시 에너지장벽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다시 정글을 가로질러 돌아가시는 건 지긋지긋하실 테니까요.”

사카가 여전히 의심어린 표정으로 데이를 노려보았다. 뮤 세네피스는 이제 건진 셈이지만 오르마즈의 시체는 어딘가 다른 곳에 숨겨놓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친절해진 데이가 이 사나운 무사들에게 궁전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오시죠, 손님들을 밖에 두는 건 예의가 아니니.”

사카는 문 안에 한 발을 들여놓고는 재빨리 안쪽을 확인했지만 문지기인 듯 보이는 2명의 청년들을 빼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신중한 사카가 여전히 한쪽 발만 들여놓은 채 물었다. 화려한 담의 바로 안쪽은 무척이나 썰렁했다. 고운 모래가 깔린 넓은 공터가 있고 100여개의 훈련용 더미와 무기 보관대, 철봉이나 장애물 같은 기초적인 훈련장구들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훈련하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담은 요란했지만 궁전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내부엔 변변한 건물도 없었다.

“보시다시피, 피다이들의 훈련장입니다.”

사카와 그를 따라온 헤네티들은 잔뜩 의심어린 시선을 하고는 하나 둘 궁전 안 훈련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데이는 그들을 인도하며 느릿느릿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것도 훈련장을 가로질러가는 대신, 외곽을 둘러 난 보행로를 따라 빙 돌아서 걸었다.

“좀 빨리 가면 안 되나.”

한 헤네티가 짜증을 내자 데이가 멈춰 서서는 살짝 눈을 흘겼다.

“1시간 전 훈련이 끝나서 모래를 다듬어 놨습니다. 지금 밟으면 훈련생들이 다시 삽을 들고 작업해야 합니다.”

데이는 조금 전처럼 다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의 걸음이 어찌나 느린지 따라가던 헤네티들이 중간중간 걸음이 꼬여 앞으로 넘어질 뻔한 웃지 못 할 광경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헤네티들이 한 마디씩 불평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대장 사카만은 한 손에 무기를 쥔 채 주변에 도리어 바싹 경계를 세우고 부하들에게 일렀다.

“잘 봐 둬라. 나중에 쓰게 될 일이 있을지 모르니.”

헤네티 일행은 데이의 굼벵이 같은 걸음을 따라가느라 훈련장을 지나는 데만 뙤약볕 밑에서 10분이 훨씬 넘게 걸려야 했다. 훈련장 옆으로는 훈련생들의 숙소나 창고 같아 보이는 변변찮은 건물들만 담 너머로 슬쩍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번 문이 열렸다.

“휴우.”

문 너머를 본 순간, 뙤약볕이 지친 헤네티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건너편은 잘 가꾸어진 식물원이었다. 이 절벽 꼭대기까지 어떻게 물을 끌어 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많은 화사한 꽃들과 향기로운 열대 과일이 매달린 나무들이 가득 자라 작은 정글을 이루고 있었다. 데이는 지금까지처럼 천천히 걸었다.

더위와 목마름에 지쳐 녹초가 된 헤네티 하나가 빨갛게 잘 익은 망고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이거 독은 없겠죠? 따 먹어도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저희도 먹는 거니까요.”

데이는 기이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드실 수 있을 때 맘껏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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