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49화 (944/1,132)

< -- 949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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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은 주머니를 목에 걸고 물었다.

“……어머니는 어디 계신가.”

“탑 위에서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을 겁니다.”

영감은 하얀 대리석 궁전 중앙에 솟아 있는 높은 탑을 가리켰다. 땅바닥에 뿌리라도 박은 듯 우뚝 서 있던 카렐이 비로소 걸음을 떼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부상을 입은 팔과 다리에서 피가 뚝뚝 흘러 고운 대리석 바닥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내일 셔틀을 출발시킬 테니 상처 치료할 겸 하룻밤 묵고 가십시오. 폐하를 무사히 돌려보내 드려야 이 지긋지긋한 계약도 끝나니까요.”

카렐은 묵묵히 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횃불이 훤히 켜진 홀을 가로질러 느릿느릿 걸어간 그는 반대편 끝에 있는 계단을 하나씩 힘겹게 올랐다. 긴장이 풀리며 다리도 함께 풀어지고 있었다.

5층 정도 높이를 쉼 없이 오른 카렐은 밖에서 잠겨 있는 자그만 철문을 마주했다.

그는 숨을 한 번 가다듬고는 문을 잠근 고리를 풀어내고 안으로 밀었다. 화려한 카펫과 태피스트리, 고급스런 가구들로 장식된 서부 풍의 호사스런 침실이 그 안에 꾸며져 있었다. 문 맞은편의 큰 베란다 창문으로는 조금 전 카렐이 건너 온 낭떠러지가 훤히 내다보였다.

“피 냄새가 여기까지 풍겼습니다.”

등받이도 없는 작은 의자에 등을 보이고 앉아있던 세네피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뒤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새신부처럼 아름다웠다. 헝클어졌던 머리는 단정히 정돈해 곱게 틀어 올렸고, 어깨가 훤히 드러난 흰 원피스드레스 위로 보이는 고운 목선과 몸매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의 살내음과 섞인 부드러운 향수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피다이도, 그들이 다녀간 흔적도 없었다.

카렐은 자꾸 거칠어지려는 숨을 억지로 꿀꺽 삼키고는 이마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쓰윽 닦아냈다. 거의 같은 순간, 세네피스도 자신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느끼고 있는 이 고통이 지금 황상의 것이지요?”

절룩거리며 세네피스에게 다가간 카렐은 여전히 등을 보인 채 떨고 있는 그의 등 뒤에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무 쉽게 얻으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법이죠.”

카렐은 세네피스의 어깨를 뒤에서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손에 꼭 쥐여 있던 독약 병을 살며시 빼앗아 옆에 내던져버렸다. 카렐은 세네피스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그의 향기를 몇 번이나 가슴 깊숙이 들이켰다. 세네피스의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에, 달콤한 살내음에 상처의 고통까지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될 줄도 알고 오셨죠?”

세네피스는 비로소 카렐을 향해 천천히 돌아앉았다. 이마부터 뺨까지 가로질러 찢긴 얼굴은 피로 범벅이었고, 얼굴에서 흐른 피가 옷이 찢겨 훤히 드러난 오른쪽 어깨와 가슴까지 붉게 덮고 있었다. 마우저에 스친 팔의 상처는 쩍 벌어져 속살이 그대로 들여다보였고, 그의 왼발 밑은 허벅지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로 질벅했다.

“이런…….”

충격을 받은 세네피스는 사람을 부르려 옆에 놓인 종으로 손을 뻗었지만 카렐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얼굴의 상처 위에 얹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놀란 세네피스가 그의 가슴을 꽉 끌어안았다.

“황상?”

세네피스가 기를 쓰고 황제의 가슴을 받쳐보려 했지만 그의 힘으로는 조금씩 무너지는 카렐을 계속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세네피스의 목과 가슴을 타고 조금씩 미끄러져 내린 카렐의 몸은 그의 무릎 위에 힘없이 축 늘어졌다. 곱게 차려입은 그의 흰 드레스가 피로 온통 범벅이 되었다.

“이렇게 있어 줘요.”

기진맥진해 주저앉은 카렐이 세네피스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세상에 이렇게 편한 곳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따뜻했다.

“당신의 자궁 안은 얼마나 따뜻했을까요…….”

카렐은 세네피스의 허벅지를 더듬으며 조금씩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감았다. 의사를 찾는 세네피스의 다급한 외침이, 그가 흔드는 종소리가 아득해지는 귓가를 메아리처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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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성당에서 돌아오는 내내 오르마즈의 동생들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며칠간의 풍요는 끝났지만 엄마 아지드는 아이들에게 이제 무서운 아버지가 없는 곳으로 갈 것이라 말했고, 아이들도 엄마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눈치를 채고 있었다.

여섯 남매들 중 갈 길이 정해진 건 맏이 오르마즈 하나뿐이었다. 그의 짐 속엔 남극성당 신학교의 예비과정 입학증이 들어있었다. 별 문제만 없다면, 그는 여섯 달간의 예비과정을 거쳐 다하카르 교단 신학교의 늦깎이 생도가 될 터였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난 ‘나즈라 라카드 박사’가 그렇게까지 힘이 있는 사람이었는지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숙소로 불쑥 찾아온 그는 난데없는 청혼으로 그를 황당하게 했고, 어머니 아지드와 한참 이야기를 하고 나온 후 그에게 입학증을 불쑥 내밀었다.

사실 그는 신앙은 고사하고 가끔씩 억지로 끌려 나간 마을 예배에서도 하품이나 늘어놓고 꾸벅꾸벅 조는 눈칫밥 단골이었다. 게다가 교단에 관한 것이라면 경을 치는 아버지 투르케스크 때문에 교단이 운영하는 학교는 물론이고 정규교육도 받은 일이 없었다. 그런 그가 순전히 ‘빽으로’ 콜로니의 최고학부인 다하카르 신학교에 덜컥 들어간다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제대로 적응이나 할지 자신도 없었다.

“우리 딸 참 복도 많아. 동화 속 이야기처럼 멋진 남자를 그렇게 턱하니 잡고.”

트럭 짐칸 옆자리에 앉은 아지드가 흐뭇한 얼굴로 딸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가족이 얻어 탄 낡은 화물트럭은 코윈의 비포장도로를 타고 집이 있는 주르반 마을로 꾸역꾸역 오르는 중이었다.

“근데 진짜 세상은 동화 속처럼 공짜가 아니니까 이젠 네가 노력해야 돼. 남자가 의학박사님이니 너 스스로가 노력해서 거기 어울리는 짝이 되어 줘야지.”

“알아요, 무슨 말씀 하시는지.”

오르마즈는 어머니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입만 열면 어머니와 동생들을 평생 지켜주겠다고 해 놓고는 이렇게 난데없이 다른 길을 가게 되었으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저 그 남자 때문에 신학교 들어가기로 한 거 아니에요.”

“네 남편 될 사람한테 ‘그 남자’는 좀 심했다.”

엄마가 나즈라 편을 들었지만 오르마즈는 짐짓 더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극빈생도 가족한테 재학 중에 임대주택하고 생계 지원금 나온다고 해서 가기로 했을 뿐이에요. 정말이에요, 그 남자 때문이 아니에요.”

딸의 속 보이는 오리발에 아지드가 키득거리고 웃었다.

“아무렴 어떠니, 네가 출세길이 트이게 되었는데. 깡촌에서 짐 나르고 사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 않겠니.”

아지드가 만족스런 얼굴로 딸의 거친 손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오르마즈가 민망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 성직자 같은 건 자신 없어요. 제가 뭐 신앙이 깊은 것도 아니고요. 졸업하면 돈 잘 버는 직업 가질 거예요. 어차피 엄마하고 동생들 책임져야 하잖아요.”

“그런 건 학교 다니면서 차근차근 생각해도 돼. 아직 공부도 해 보지 않았잖니.”

“전 잘 나가는 술집 주인 할 거라니까요.”

오르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전 사람들 왁자지껄하는 데가 제일 좋아요.”

“얘가 참.”

딸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대답에 아지드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이,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타고 올라간 화물차는 지난 며칠 떠나 있던 고향 주르반 마을에 가까워졌다. 해도 저물고, 마을 집들엔 몇 군데 불이 켜져 있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어두워 보였다. 아지드가 16년을 지내 온 마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넌 네 짐만 대충 챙겨서 이 차 타고 바로 남극성당에 돌아가. 혹시라도 아버지하고 마주칠지 모르니까. 엄마는 동생들하고 마저 정리하고 뒤따라가마. 알았지?”

아지드는 돌아올 때 야푸르에게서 받은 여비를 딸의 주머니에 단단히 넣어 주었다.

“오래 있지 말고 빨리 오세요.”

오르마즈는 그런 엄마의 어깨를 안으며 거칠어진 뺨에 한 번 입을 맞춰주었다. 며칠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엄마와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오늘따라 엄마의 여윈 어깨가 평소보다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다.

“당연하지,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겠니.”

아지드도 딸의 든든한 어깨에 기대어 억지로 웃었다. 이 딸이 며칠이나 곁을 떠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먹먹했다.

트럭이 멈추자 오르가 제일 큰 짐을 짊어지고 먼저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동생 샤르나즈부터 하나하나 안아 내려주었다.

“언니, 저 차 뭐야?”

셋째 샤르나즈가 오르마즈의 다리를 와락 껴안고 숨으며 동네 입구에 세워져 있는 웬 유개 트럭을 가리켰다. 워낙 드나드는 차들도 빤한 깡촌이다 보니 낯선 차 한 대도 어린아이 눈엔 무섭게 보인 모양이었다.

“글쎄다, 광산 차겠지. 걱정 마, 언니가 있잖아.”

오르는 한쪽 어깨는 짐을, 나머지 팔에는 막내 남동생 하르파구스를 안아들고 며칠 비워두었던 짐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겁먹은 샤르나즈가 언니의 꽁무니에서 행여 떨어질까 졸졸 따라붙었다.

“어?”

익숙한 판잣집 몇 발짝 앞에서 오르가 멈칫거리며 엄마를 돌아보았다. 집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지드가 그에게 멈추라고 얼른 손짓했다.

“그만, 가지 마, 얘야.”

아지드는 남극성당을 떠날 때 야푸르에게서 ‘급한 일이 있으면 연락해라’고 받은 할룩스를 얼른 꺼내 보았다. 하지만 그곳엔 ‘불통’이라는 표시가 나오고 있었다. 원래 통신이 되다말다 안 좋은 곳이지만 무언가 불길했다. 그의 머리에 여전히 오르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 대신관의 자녀들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안되겠다, 넌 차로 돌아가. 빨리.”

아지드는 이곳까지 타고 온 화물차를 가리켰지만 오르도 엄마를 놔둔 채 쉽사리 돌아서지 못했다.

“무슨 소리에요, 아빠면 엄마 그냥 놔두지 않을 거예요. 남극성당 다녀온 거 알면 집안 다 뒤집어놓을 거예요. 제가 없으면 보나마나…….”

오르가 엄마 걱정에 계속 머뭇거렸지만 다급해진 아지드는 그가 안고 있던 막내 하르파구스를 거의 빼앗듯 일라드에게 안기고는 오르를 거칠게 떠밀었다.

“됐어, 패든 윽박지르든 엄만 딱 하룻밤만 참으면 되니까 넌 빨리 돌아가. 동생들 신경 쓰지 말고 너라도 돌아가.”

“엄마, 무슨 소리에요?”

“당장 가지 못해, 엄마한테 맞고 싶어?”

아지드가 생전 처음 보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딸을 거칠게 밖으로 내몰았다. 엄마의 낯선 표정에 놀라고 당황한 오르가 주춤거리며 골목을 뒷걸음쳐 빠져나갔다.

그때, 골목 사이에서 웬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어엇.”

소스라치게 놀란 오르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 괴한의 굵고 큰 손이 그의 목과 어깨를 사정없이 얽어 꼼짝도 못 하게 만들어버렸다.

“우, 우으윽!”

오르가 목을 조이는 팔을 떨쳐내려 버둥거렸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자의 통나무처럼 굵은 팔은 나름 힘이 세다는 그가 발버둥을 쳐도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오르?”

뒤늦게야 딸의 신음소리를 들은 아지드가 뒤로 휙 돌아섰다. 그리고는 7척(210cm) 가까운 거한의 손에 붙들려 소리도 못 지르고 버둥대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았다.

“도와줘요! 제발 도와줘요!”

아지드가 경악을 하며 목이 찢어져라 이웃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평소 같았다면 이 정도 고함이면 이웃의 광부들이 모두 몰려나와 이 낯선 외지인을 쫓아내야 정상이었다.

“아무도 없어요! 이봐요1”

아지드의 외침에도 마을은 조용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아지드가 자리에서 파르르 떨었다. 마을은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어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으로 도리다운 도리를 배우고 있겠지.”

판잣집 문을 열고 나온 투르케스크가 골목 모퉁이에서 벌벌 떨고 있는 아내 아지드에게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무언가 심상찮은 분위기에서 나타난 남편의 모습에 아지드가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민병대 친구들이 주민들을 저 사교 예배당에 모아놨거든.”

아지드는 온몸에 흐르는 전율에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투르케스크는 최대한 에둘러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민병대 게릴라들이 마을을 습격해 주민들을 억류했다는 뜻이었다. 제니안의 유학자들이 민병대 게릴라들과 손을 잡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투르케스크가 민병대를 들먹인 건 그에게도 처음이었다.

“설마……당신이 민병대를 마을에…….”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아지드가 고개를 저었다. 이들이 잔혹하기로 유명한 강경파 민병대들이라면, 다른 시골 마을들에서처럼 주변의 통신을 모조리 끊고 예배당의 성물을 파괴하고, 쓸 만한 젊은이들을 꾀어, 혹은 납치해 병사로 만들려 들 터였다. 마을 사람 누군가 저항이라도 했다면 심한 린치를 당했거나 살해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막강한 카파키 가의 영역이다보니 지금껏 강경파 민병대들이 마을을 습격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믿었는데…….”

아지드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투르케스크는 지난번 오르에게 뒤틀려 보호대를 한 왼팔을 신경질적으로 휘두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되물었다.

“믿어? 믿긴 뭘 믿어? 내가 뭐 도둑질이라도 하러 왔나?”

투르케스크는 민병대를 끌어들여 처자식이 사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서도 전혀 부끄럼이 없는 듯 짐짓 당당해 보였다. 격분한 아지드가 고함을 질렀다.

“술에 취해 처자식 두들겨 패다가 자식한테 쫓겨나는 거 이웃들이 못 본 척 해서 복수하러 온 게 아니고요? 그랬다고 저 불한당들 끌고 들어와서 이웃들하고 당신 아버지 땅에 사는 사람들을 공격해요? 지금 미쳤어요!”

“복수? 허, 닥쳐, 난 저 무지렁이들한테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러 왔거든?”

정곡을 찔린 투르케스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는 거구의 X전사 손에 붙들려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있는 장녀 오르마즈와 다친 왼팔을 번갈아 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아비한테까지 덤빈 저 멍청한 년 정신만 차리게 하면 돼. 마을 사람들은 어차피 민병대 지원자들만 몇 받고 풀어줄 거니까.”

“지원은 무슨 지원이에요! 납치지!”

아지드가 오르를 붙들고 있는 거한에게 달려들어 마구 팔을 때렸지만 그자는 바윗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지드는 그제야 상대가 X라는 것을 깨달았다.

“납치? 제 딸 납치당하게 하는 아비도 다 있나? 이봐, 데려가, 그 애가 내 맏딸 맞으니까.”

투르케스크가 오르를 붙들고 있는 X에게 데려가라고 눈짓했다. 소리도 못 지른 채 버둥거리며 끌려가는 딸의 모습에 경악한 아지드가 X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며 악을 썼다.

“내 딸 어디 데려가! 이 미친 불한당놈아!”

눈이 돌아간 아지드는 오르를 붙든 X의 팔을 꽉 깨물었다.

“이 아줌마가 진짜.”

그때까지 말없이 있던 X가 결국 짜증을 내며 팔을 문 아지드를 거칠게 떠밀었다. X가 팔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는 투르케스크에게 버럭 화를 냈다.

“카파키 지부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저희 지대장께는 따님이 기쁘게 민병대에 합류할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부장님 가족들의 충성을 믿었는데 정말 실망입니다.”

“미리 얘기해 놓지 않았어서 약간 오해가 있을 뿐이야.”

X의 핀잔에 투르케스크가 당황한 듯 둘러댔다.

“상관없으니까 끌고 가서 제일 힘들고 제일 위험한 부대에 넣어. 단합대회에서 지도자님한테 딸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보통 부대 말고 절대 탈영 못 할 제일 지독한 부대에 넣어. 명예롭게 전사하면 더 좋고.”

“미쳤어!”

X에 밀려 넘어져 머리를 다친 아지드는 들은 척 만 척 다시 X를 깨물려 했지만 그의 뒷덜미를 이번엔 투르케스크가 덥석 붙들었다.

“가만히 있어! 어디 아랫사람들 앞에서 남편 망신을 시키고 있어!”

“미친놈은 너야! 제 체면 세우려고 딸 목숨 팔아넘기는 인간 말종이 어디 있어!”

아지드가 남편을 거칠게 떠밀고 다시 오르를 따라가려 했지만 무장한 민병대 병사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입에 재갈이 채워진 오르는 X에게 팔이 붙들린 채 조금 전의 유개차 짐칸으로 질질 끌려갔다.

“오르! 오르!”

아지드가 병사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16년, 아니 17년간의 모든 정성이 모여 키워진 소중한 딸은 그의 눈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제발, 제발 신이시여, 제발 저 애를 지켜주세요!”

몸부림치던 아지드가 팔꿈치로 병사 하나를 때려눕히고는 유개차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X 장교는 버둥거리는 오르를 짐승처럼 화물칸 철창에 밀어 넣었다. 철창 안에는 먼저 끌려 온 마을 청년 네 명이 오르처럼 재갈이 채워진 채 꽁꽁 묶여 있었다.

“됐다, 여기서도 5명 할당치 채웠으니까 내려가. 아랫마을에 우리 셔틀 와 있을 테니까.”

오르를 끌고 온 X가 철창 문을 쾅 잠그고는 차를 주먹으로 쾅쾅 두들겼다. 오르는 눈물범벅이 된 채 필사적으로 쫓아오는 엄마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 몸부림을 쳤지만 재갈 때문에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다섯 젊은이들을 실은 차는 시동을 걸고 천천히 마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내 딸 못 데려가! 쟤가 어떤 아이인데 누구 멋대로 데려가! 이 미친놈들아!”

아지드가 몇 번이나 넘어져가며 마을을 떠나는 차를 필사적으로 쫓았다. 철창 안에서 고개를 내민 오르도 쫓아오는 엄마를 보며 계속 버둥거렸고 아지드도 큰길까지 달려 나와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오르! 오르! 내 딸, 내 딸 데려가지 말라고!”

아지드는 숨이 넘어갈 듯 울부짖으며 몇 번이나 넘어져가며 계속 차를 쫓아 달렸다. 하지만 결국 차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타고 야속하게 그의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그리고 결국 해가 저문 어두운 골짜기 너머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오르……말도 안 돼.”

다리가 풀린 채 흙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주저앉은 아지드가 바들바들 떨었다. 딸이 없다는 것을 절감한 순간, 그가 영영 못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았다. 대신관의 자녀들을 죽이고 도망쳤을 때도, 혼자서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아야 했을 때도 오르가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든든했었다. 하지만 세상 전부였던 딸이 없어진 이 순간, 그는 이제 진짜 혼자였다.

“이제 어떻게 살라고.”

아지드는 야속한 길 위에 엎드린 채 계속 울고만 있었다. 세상에 무너진 것 같은 느낌에 몸을 일으킬 용기도 나지 않았다.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귀엔 들어오지도 않았다.

“난 아주 정상이요, 부인 말처럼 미치지는 않았소. 이깟 일 복수하자고 친딸을 팔아넘길 팔푼이도 아니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투르케스크의 목소리는 막말을 쏟아내던 조금 전과는 달리 소름끼칠 만큼 침착했다. 오르를 쫓아낸 지금, 그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이제야 정상적인 가족으로 돌아왔군.”

아지드가 울음을 뚝 멈추고 증오에 찬 눈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한 팔에 막내 하르파구스를 안은 투르케스크가 흐뭇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나머지 아이들도 아버지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누군가 편지로 그걸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영영 그년을 내 친딸로 알 뻔했지. 하긴, 유학자의 피를 받은 딸이 아비한테 그런 막되어먹은 짓을 할 리가 없지.”

투르케스크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어떤 놈 씨를 받은 자식인지 몰라도 꼭 닮은 날 귀신같이 찾아내 잠자리까지 한 게 신통할 지경이었소. 어쨌거나, 이젠 16년이나 지난 일이고 그간 내 진짜 아이들을 키우느라 고생했으니 날 속였던 것도 너그럽게 용서하겠소, 부인.”

투르케스크가 어린 막내아들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오르마즈가 사라진 어두운 길 너머를 응시했다.

“피도 안 섞인 군더더기가 없어졌으니 이제라도 오붓하게 살아봅시다.”

투르케스크는 얼떨결에 누나를 잃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둘째 일라드를 돌아보았다.

“네가 우리 집안 장자다. 누나는 원래 없었던 거야.”

민병대의 힘을 빌려 결국 오르마즈를 가족에서 쫓아낸 투르케스크는 퍽이나 흐뭇한 얼굴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순교자 아버지라는 간판을 줄 테니 키워 준 밥값은 한 셈인가.”

“네가 한 게 뭐 있어서.”

남편이 돌아가고, 길바닥에 혼자 남겨진 아지드는 바닥의 흙을 움켜쥐고 이를 빠득 갈았다. 절망감에 잠시 넋을 놓은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길 옆 절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몰아치는 찬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내가 뭣 때문에 지금까지 버티고 살았는데……너 같은 놈하고 살아.”

아지드는 낭떠러지 아래를 멍하니 응시했다. 멀리 절벽 밑을 흐르는 좁은 강물이 그에게 빨리 뛰어내리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낭떠러지에 조금 더 다가갔다. 여기서 떨어지면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이 절망감도 끝날 것 같았다.

“미안하다, 이 엄마가 못나서.”

낭떠러지에 조금 더 다가가려던 그는 또다시 얼굴을 때리는 찬바람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배를 만지작거렸다.

“세네피스…….”

그는 한참을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몸 속에 이제 갓 둥지를 튼 또 다른 그레이오팔이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살하려는 그의 뒷덜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목에 걸려 흔들거리는 로켓 안에서는 어린 시절 환하게 웃던 오르의 얼굴이 여전히 아른거리고 있었다.

아지드는 오르마즈가 사라진 먼 골짜기 너머를 다시 돌아보았다. 핏빛 붉은 놀이 져 가는 하늘로 민병대 셔틀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가 맴돌고 있었다.

“저애는 아직 살아 있는데……멍청한 년, 무슨 생각을 했니.”

낭떠러지 앞에서 한참을 망설인 아지드는 결국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엄마를 찾아 돌아올 텐데.”

아지드는 눈물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훔쳐냈다. 눈물도 말라 이젠 더 흐르지도 않았다.

“돌아와서 세네피스하고 엄마를 지켜줄 텐데…… 죽긴 왜 죽어.”

딸이 실려 간 차의 바퀴자국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아지드는 힘없이 돌아서서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슬픔에 찬 흐느낌은 여전히 이 어두운 코윈의 산골을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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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마지막 연재이고 이번 파트의 마지막회입니다.

연말맞이로 왕창~~ 길게 올립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맘먹고 길게 올린 글들은 스크롤 압박하지 말라는 의미인지 도리어 코멘트와 추천수가 확 줄어드는 징크스가....오늘도 그럴는지요....=_=;;;)

다음 회부터는 황제의 복귀를 앞둔 황실 내명부의 소동(?)과 주페 이야기가 등장하는 새로운 파트가 시작됩니다.

그럼 새해에 뵙겠습니다.

다가오는 한해도 복 많이들 받으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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