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52 회: 파트10. 그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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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페티는 내심 ‘웬일이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후 아메스는 심한 난산 끝에 어렵게 첫아들 카이를 얻은 뒤로 아이를 더 낳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황실에서는 자연적인 자궁이 아닌 캡슐로 태자를 낳는 것을 꺼리는 전통이 아직도 여전했지만 주페와 크낙스를 가질 때는 종친들의 만류에도 ‘내가 애 낳는 기계냐’고 도리어 화를 내며 자신의 자궁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끝끝내 거부했었다.
거기에 딸 크낙스의 죽음은 그의 이런 공포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는 딸의 시체를 눈앞에서 보고 충격을 받아 졸도해 한참을 깨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깨어나자마자 ‘너 같은 괴물의 자식을 갖는 게 아니었는데’라며 황제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은 사실까지 외부에 새어나가 황실 전체를 곤혹스럽게 만들기까지 했었다.
덕분에 코리온을 비롯한 원리주의 유학자들이 사방에서 들끓고 들어나 황후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봇물처럼 퍼부어 가뜩이나 딸을 잃고 괴로움에 빠져 있던 황제를 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오죽했으면 내각에서 아메스의 가장 든든한 지지세력인 제네르까지도 술자리 사석에서 ‘세네피스 황후 수준은 기대도 안 하지만 무능한 변태 황제에 정신병 공주들까지 군말없이 잘 키우고 할 일 다 한 실리페 황후가 이젠 존경스러우니 어떡해야 하지?’라고 푸념을 했을 정도였다.
결국 그 일은 황제가 직접 나서서 ‘황후의 폭언은 절대 사실이 아니며 조만간 공주를 임신해 황실에 대한 책임감을 보일 것이다.’ 라며 유학자들을 진정시키는 모양새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황후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회임을 허락하는 교지까지 그 자리에서 써서 내렸다.
하지만 궁지에 몰렸을 때만 해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발뺌하며 황제 뒤에 숨었던 황후는 일단 비난이 잦아들자 다시 10달째 이런저런 핑계로 임신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니 황후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 점점 험악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연히 요즘 또다시 ‘언제 공주를 임신할 거냐’라는 압박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물론 평소의 아메스 황후는 그렇게 생각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황자들의 급사가 황제 때문이냐는 사람들의 물음에도 전혀 관계없다며 정색을 했었고, 비빈들이나 내명부, 내시부에도 이번 일로 자칫 황가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며 스스로 앞장서서 내명부 수장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엔 이렇게 의젓한 황후의 모습이다가도 한 번 폭발하면 앞뒤 안 가리는 골칫덩이로 돌변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니 흥분한 황후가 그보다 더한 폭언을 했다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분위기였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는 황자들의 선천적인 문제를 부인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자식의 죽음을 더는 못 본다며 출산파업을 하고 있으니 그의 말이 아랫사람들에게 씨알이 먹힐 리가 없었다. 설상가상 그 일 이후로 잔뜩 틀어져버린 세네피스 황태후와의 관계도 쉽게 아물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메스와 황제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는 정도였다. 황제는 그가 잘못된 언동으로 곤경에 처할 때마다 앞장서서 감싸주었고, 황후로서 그의 지위와 위엄을 최대한 존중해 주었다.
“정말이십니까? 몸소 임신을 하신다고요? 정말로 황상의 2세를요?”
살짝 가시가 돋은 황비의 물음에 아메스가 사납게 눈을 흘겼다.
“그럼 황후가 황제의 아이를 가지지 누구의 아이를 가집니까?”
“그냥 상례로 여쭌 것입니다만, 왜 그리 예민하신지요.”
네페티는 화를 내는 황후의 모습에 놀라기는커녕 도리어 능글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딘지 험악해지려는 분위기에 카이가 얼른 끼어들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어머니.”
카이가 둘 사이에 슬쩍 들어와 아메스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준 아메스는 다시 죽은 딸의 묘로 시선을 돌렸다. 카이가 그런 엄마의 슬픈 시선 앞을 막아서며 억지로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제일 기뻐하실 분은 황상이실 거예요. 지금도 저희 구하려고 어딘가에서 분투하고 계실 텐데, 이걸 아시면 힘이 나실 거예요.”
아메스는 아들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이번엔 딸의 묘 옆 오렌이 묻힐 구덩이를 돌아보았다. 두 황자들의 죽음의 흔적을 지켜보는 황후의 가슴 속에서 꺼질 듯 한숨이 다시 새어나왔다. 카이가 그런 엄마를 한 번 꼭 안아주었다.
“폐하께서 곧 방법을 찾아오실 거니까 믿고 기다리세요.”
“캡슐을 꺼낼 때는 황상이나 황태후의 동행이 필요하니 장태자께서도 함께 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요, 당연히 가야죠.”
카이가 어느새 키가 비슷해진 엄마 아메스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도 황후가 ‘자식을 또 잃으면 그땐 이 엄마도 죽어버릴 거다.’라는 섬뜩한 말을 매번 중얼거리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곤란하긴 곤란했군.’
상심에 빠진 황후를 보며 네페티가 속으로 코웃음을 지었다. 황후는 ‘치료법을 찾을 때까지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인도적이다.’라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댔지만 주변 분위기는 그런 그를 매정한 책임회피로만 몰아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이는 장태자로 황실을 이어야 하고, 주페는 직계가 몰살당한 카파키 가의 후계자가 될 예정이니 이젠 아메스가 종손으로 있는 자이센 가와 로퍼크 가의 아이가 태어날 차례였다.
그런데 난산과 크낙스의 죽음으로 두 번의 큰 상처를 입은 황후는 더 이상 황제의 아이를 원치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네페티도 황실 체면상 차마 터뜨리지 못하고 있는 충격적인 일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아, 그럼 아침에 내의원에서는…….”
아들을 품에서 놓아준 황후에게 네페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배란유도 처치를 받느라고요.”
“오늘 아침에요? 아침에 처치를 받으셨다면 오늘 밤까지는 수정을 시키셔야 할 텐데요? 황상께서 돌아오시려면 아직…….”
“이미 교지는 내려 있으니 상께서 안 계셔도 오늘 중으로 마칠 참입니다. 그러고 나서 제국 회의에서 황상께 소식을 전해 기쁘게 해 드려야죠.”
‘그럼 그렇지.’
아메스의 말을 듣던 네페티가 고개를 숙인 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전 이만…… 대군이 추위를 타서 빨리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네페티는 괜한 딸 핑계를 대며 그의 손을 붙들고 묘역에서 돌아섰다.
엄마 손에 붙들려 계단을 내려가던 마하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철없이 물었다.
“우와, 저 이제 그럼 막내 여동생 생기는 거예요?”
“글쎄다.”
“예? 방금 황후께서 공주 회임하신다는 거 아니었어요?”
눈이 동그래진 딸에게 네페티는 손가락으로 입을 슬쩍 가려 보이고는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그게 왜 하필 황상이나 황태후께서 안 계신 지금이냐는 거지.”
네페티는 혼자 낮게 웃으며 얼굴 위에 평소처럼 히잡을 휙 뒤집어썼다. 그 뒤로 그의 표정은 누구도 볼 수가 없었다. 네페티가 뒤를 따르는 심복 시녀장에게 힐끔 눈짓을 주었다. 플레렌 가 정보국 간부 출신의 눈치 빠르고 똑똑한 여자였다.
“황후 주변에 있는 것들한테 감시 확실히 시켜. 아무래도 무슨 일이 날 것 같다.”
“아참, 방금 황후와 말씀 나누시는 동안 급보가 들어왔습니다만.”
시녀장이 네페티와 함께 갑자기 걸음에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마하는 걸음을 멈추고 엄마와 적당히 떨어져 주었다. 시녀장이 네페티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납치당한 줄 알았던 세네피스 황태후께서 몇 시간 후에 남극성당에 무사히 돌아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납치당하신 게 아니었다고?”
네페티의 눈이 갑자기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경호실에서는 잠시 여행을 떠나셨던 것이라 부인하고 있습니다만 좀 수상쩍습니다. 대제학실 쪽 첩보에 의하면 황상과 함께 돌아오신다 하는 걸 보니 정말로 납치당하셨던 걸 황상께서 구출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네페티의 입가에 슬쩍 웃음이 돌았다.
“황상께서 몸소 구하러 가셨다면…… 세네피스 그 양반에겐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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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안 섞인 맏딸을 소원대로 민병대에 보내버렸지만 투르케스크가 그 순간부터 책임감 있는 아버지로 돌변한 건 아니었다. 그는 아지드를 자신의 진짜 자식들과 함께 주르반 마을에 그대로 놓아둔 채 민병대와 함께 떠나버렸다. 그는 애당초 ‘내 핏줄이든 아니든’ 식솔들을 부양할 생각도, 능력도 없었다.
물론 그건 누가 봐도 멍청하거나, 혹은 무책임한 짓이었다. 어린 자식들을 민병대에 납치당하고 얼마 안 되는 재산까지 약탈당한 가난한 마을 사람들의 분노가 이제 어디로 쏟아질지는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투르케스크는 카파키 가 가족을 마을 사람들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 큰소리를 치고 떠났지만 자신의 땅에 민병대를 끌어들인 철없는 양아들의 식솔을 빌루이가 지켜주리라 믿은 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게다가 아지드의 집 안에선 교단 헤네티 표식을 지닌 변사체가 두 구나 뒤늦게 발견되어 그를 더 궁지에 몰아넣었다. 아지드는 대신관이 오르마즈의 안전을 위해 미리 파견해 놓은 경호요원들의 시체임을 직감했지만 어쨌든 그 시체들 때문에 그의 처지는 더 난감해지고 있었다.
민병대가 마을을 떠나기가 무섭게 아지드와 아이들은 분노한 마을 사람들에게 끌려 나가 꽁꽁 언 찬물 세례를 뒤집어쓰고 돌팔매질을 당해야 했다. 자칫 가족들이 다 맞아죽을 상황에서 마을에 들이닥친 가문 치안부대는 차라리 구세주였다. 그들은 격해진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아지드의 가족들을 일단 구출해낸 후 ‘반역자 가족’이라는 혐의로 모두 체포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서도, 마을 사람들에게서도 버림받은 아지드와 다섯 아이들은 창문도 없는 죄수 호송차에 실린 참담한 모습으로 16년간 살던 주르반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가족을 태운 호송차가 어딘지도 모르는 추운 황무지를 가로질러 가는 내내, 어린 아이들은 오르 언니를 찾으며 엄마 품에서 엉엉 울기만 했다. 아지드가 충격을 받은 아이들을 달래주려 했지만 동생들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맏이의 빈자리는 다른 집안의 아빠만큼이나 컸다.
거의 한나절을 달려온 호송차는 쿵쿵거리는 비포장길을 지나며 속도를 죽이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가까워졌음을 깨달은 아지드는 호송차의 뚜껑 틈새로 난 작은 구멍에 기를 쓰고 눈을 들이댔다. 차는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를 지나고 있었고, 몇 개의 철조망과 경비탑이 눈 앞을 스쳤다.
“수용소다.”
아지드가 무심결에 배를 만지작거렸다. 뱃속에 있는 어린 세네피스가 태어나고 자랄 곳은 반역자들의 가족을 격리시켜두는 집단 수용소인 모양이었다. 호화스런 곳에서 살게 될 것이라 예상했던 건 아니었지만 대신관이 이런 곳에서 친딸을, 그것도 그토록 사랑했던 프사이 세네피스의 딸을 기르기로 맘먹었다는 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오시오!”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들기더니 호송차의 뒷문을 확 열어젖혔다. 갑자기 몰아닥친 찬바람과 낯선 이들의 고함에 겁을 먹은 어린 남매들이 오들오들 떨며 엄마 아지드의 품으로 와르르 모여들었다. 아지드는 놀란 어린 아이들을 품 안에 끌어안고 다독여 주었다.
‘이놈들 누구지?’
차 밖을 내다본 아지드가 움찔했다. 호송차를 둘러싸고 있는 건 처음 이들을 체포했던 카파키 가 치안부대가 아니었다. 이 낯선 수용소를 지키고 있는 건 그들과는 다른 군사조직인 ‘코메트부대’ 소속 병사들이었다.
“이런.”
코메트 병사들을 본 순간, 아지드는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코메트는 과거 고향행성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져 지금은 민병대를 사냥하는 토벌군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수십만을 헤아리는 대군으로 규모는 크지만 병사들의 질이 낮았다. 이들은 마구스들보다는 각 지방 토후들의 입김이 컸고, 게다가 대신관 자녀들과도 직간접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빨리 내리라니까요!”
코메트 사관이 머뭇거리고 있는 가족을 노려보며 차 바닥을 칼자루로 쾅쾅 쳤다. 아지드는 막내아들을 품에 꼭 안고 조심조심 차에서 내려섰다.
“표정을 보니 벌써 눈치를 챘나봐.”
코메트 병사들 뒤편엔 머리를 빡빡 깎은 앳되고 잘생긴 남자 성직자 한 명이 두툼한 담비털 코트를 두르고 서 있었다. 청렴을 모토로 사는 보통의 성직자들은 웬만해서는 입을 일이 없는 엄청난 고가품이었다. 남자의 모피코트 안쪽으로 검은색의 로브와 머플러가 희미하게 보였다. 로브 깃을 본 아지드는 이 남자가 보통 성직자가 아닌 ‘신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옆에는 모피 숄을 두른 그레이오팔의 미녀도 마치 악세사리처럼 함께 서 있었다.
남자 신관은 아지드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를 슬쩍 올려보았다. 소년처럼 곱상하게 생긴 그 남자는 자신보다 키가 큰 아지드의 모습이 불쾌한지 회색빛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웬만해서는 윗사람에게 반사적으로 절을 올리던 아지드였지만 이 사람에게는 어찌된 일인지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내 동생들을 둘이나 죽이고 도망가더니, 사는 꼴 한 번 볼만하군.”
아지드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젖먹이 막내 하르파구스를 품에 더 꽉 안았다. 남자가 다시 물었다.
“내 소개는 안 해도 알겠지?”
“아스탈 신관님. ……위대한 현신께서도 제가 여기로 온 걸 알고 계십니까?”
“아니, 난 코윈 교구장일세. 반역자 가족을 코메트가 위탁 운영하는 수용소에 넣는 건 당연한 절차야. 그런 것까지 그분께 시시콜콜 보고할 필요가 있나?”
“그분께선 딸이 이런 곳에서 태어나는 걸 원치 않으실 겁니다.”
아지드가 아스탈에게서 한 발 물러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용소의 풍경은 한 눈에 보기도 끔찍했다. 훤히 뚫린 눈벌판 한복판에 수백 동의 허름한 집단 숙소가 보였고 몇 겹의 담과 철조망, 경비병들의 막사와 감시탑이 보였다. 이 황량한 곳에서 몇 년이나 살아 버틸 수 있을지 아찔한 환경이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남극성당 인근 부유한 농촌마을보다는 여기가 훨씬 못한 게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자네가 반역자 마누라라는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라네.”
아스탈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야푸르 대신관은 아지드 가족을 가까운 남극성당 인근에 두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대신관의 후계자인 이 남자는 아버지의 계획을 알면서도 아지드의 가족을 중간에서 납치해 이곳에 끌고 온 셈이었다.
“뭐, 지금까지 살던 마을보다 여기가 딱히 크게 나쁘지는 않을 거다. 거지같이 살던 것들이 갑자기 좋은 곳에서 배가 불러지면 못쓰지.”
아스탈이 손가락으로 일라드의 콧잔등을 손으로 툭툭 치고 물러났다.
“설마 저희를 인질로 그분을 위협하려는 ……겁니까.”
“그건 맘대로 생각해.”
아스탈은 무표정하게 휙 돌아서서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레이오팔 여인에게로 향했다. 아지드는 자신의 뱃속에 세네피스를 착상시켰을 때 함께 있었던 여의사 밀리타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저 여자는 원래 후계자 아스탈에게 주어진 여자였지만 형제자매들에게서 철저히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처량한 처지에 있다고 알고 있었다.
밀리타에게로 돌아가던 아스탈은 갑자기 휙 돌아서서는 아지드의 배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네 뱃속의 그 아기는 나중에 내 것이 될 테니 소중히 잘 키워라.”
아스탈의 야릇한 웃음에 순간 온몸이 오싹해진 아지드는 아랫배를 손으로 감싸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아스탈은 아지드 가족들을 에워싸고 있는 코메트 경비병들에게 말했다.
“임산부 가족이니 따로 살 판잣집 하나 정도는 내줘라. 특별한 수용자니 다른 놈들이 함부로 손 못 대도록 하고 죽지 않고 살 만큼은 해 줘라. 알았냐?”
밀리타의 뺨에 보란 듯 입을 맞춘 아스탈은 그를 데리고 호사스런 고급 승용차에 올라 모습을 감추었다.
“엄마,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둘째딸 샤르나즈가 엄마의 다리를 안으며 울먹였지만 아지드도 대답해 줄 것이 없었다. 그들은 거칠게 밀어붙이는 코메트 병사들에게 이끌려 수용소 안쪽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제 이런 데서 살아야 되는 거예요?”
일라드가 주변을 둘러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곳은 종교재판에서 노역형을 받은 죄수들과 장기간 도주 중인 이단 반역자들의 직계가족들이 수용된 시설이었다. 죄수들이 지내는 막사는 작은 방 하나에 수십 명씩을 몰아넣은, 말 그대로 돼지우리만도 못한 곳들이었다.
콜로니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는 만큼 이들은 단순히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곳에 집어넣는 건 아니었다. 종교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는 자들 대부분은 민병대에 정보를 흘려 약탈을 사주했거나, 혹은 성직자들을 모욕하거나 성물을 훼손하는 것 같은 신성모독을 저지른 자들이니 아지드 입장에서는 이곳 수용자들은 상종하기도 싫은 인간 말종들이었다.
하지만 아지드에겐 그나마 다행히도 도망자 가족들의 거주지는 길 하나 건너 조금이나마 나은 곳에 가족 단위로 살도록 만들어진 판잣집촌이었다.
간단한 옷가지만 가까스로 챙겨 나온 아지드 가족은 앞장서는 병사를 따라 지저분한 판잣집 사이를 덜덜 떨며 걸었다. 주르반 마을에서도 어차피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았으니 이곳의 판잣집 풍경이 견디기 힘들만큼 끔찍한 광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신관의 아들 아스탈의 손아귀에서 아지드로서는 이제 하루하루가 죽음과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다.”
병사가 개중에는 상태가 제법 나은 판잣집 문을 열어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바로 옆에 작은 예배소와 경비부대 막사가 있고 줄에 매인 덩치 큰 경비견도 몇 마리 보였다.
“그래, 이젠 여기서 살아야 해.”
아지드가 판잣집에 발을 들여놓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래된 석탄난로와 몇 개의 침상이 있고 부엌 같은 건 없었다. 깨어진 창으로 찬바람이 몰아쳐 들어왔다.
“아주 나쁘지는 않구나.”
그는 여전히 언니를 찾으며 울고 있는 둘째딸 샤르나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언젠간 오르 언니가 와서 구해줄 테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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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다녀오느라 연재가 좀 늦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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