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53화 (948/1,132)

< -- 953 회: 파트10. 그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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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묘역에 다녀온 아메스는 아들 카이와 함께 동측별관에 있는 황실 유전자은행으로 향했다. 황후의 방문을 미리 통지받은 직원들 수십의 일제히 문가로 나와 줄을 맞춰 서 있었다.

“위대한 대제의 동반자이신 황후 폐하와 장태자 전하를 충심으로 모시겠나이다.”

아메스에게 꾸벅 절을 올린 소장이 아메스에게 앞을 안내해 보였다. 선대 황제의 실리페 베로 황후 때만 해도 이 정도의 예우는 아니었지만 아메스는 달랐다. 질서정연한 그들의 모습 속에는 선대 황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황제 카렐의 권위만큼 덩달아 함께 높아진 황후 아메스의 위상이 배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폭언사건 이후 황제가 ‘황후에 대한 예우에 행여 흐트러짐이 없도록 해라.’며 단속을 해 놓은 결과이기도 했다.

유전자은행은 모렌 박사가 소장으로 있을 때처럼 여전히 정신없는 분위기였다. 이곳에선 제국 최고수준의 황실 가디언이 끊임없이 합성되는 거대한 자궁이었고, 한편으로는 제국민 전체의 유전 자료가 보관된 데이터베이스이기도 했다.

소장은 실험실과 합성실, 배양실을 차례로 지나며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지난번 교지를 내리시며 황상께서 몸소 골라두고 가신 캡슐이 있습니다. 어차피 무작위이긴 하지만 ……상께서 느낌이 좋으시다며 다음 공주를 회임하실 때는 꼭 그것이었으면 좋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아메스는 입술에 힘을 꽉 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중요한 유전 자료와 데이터베이스를 보관하는 유전자은행의 제일 안쪽 출입문은 육중한 금고문으로 보강되어 있었다. 아메스는 수행원들을 모두 밖에 남겨둔 채 아들과 경호대장 카토만을 동행하고 그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또다시 몇 개의 문을 지나 ‘특별보관실’ 앞에 도착했다.

“드십시오.”

마지막 문을 지난 아메스가 크게 숨을 가다듬었다. 사방에서 훤히 볼 수 있도록 강화유리벽이 쳐진 ‘특별보관실’ 안에는 역대 황가 조상과 공신들의 유전자 샘플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전엔 구석지고 밀폐된 공간이었지만 다 볼 수 있는 편이 차라리 안전하다는 황제의 제안으로 뜯어고친 것이었다.

난생 처음 이곳에 들어와 본 카이가 신기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후와, 대단한데요, 저도 여기서 나온 건가요?”

아메스는 별 대답 없이 특별보관실 출입문의 인식장치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소장이 열쇠를 장치에 꽂고, 카이가 황제 대리인을 뜻하는 손등의 직인을 그 옆에 대자 비로소 문이 열렸다.

“저깁니다.”

소장이 특별보관실 중앙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큰 알약만한 검은 캡슐들이 줄줄이 든 투명한 캐비넷이 보였다.

“아직 6개 남았군.”

보관실에 제일 먼저 들어선 아메스는 보관실 중앙의 장을 쳐다보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모렌 박사가 만들어놓은 15개의 캡슐 중 9개를 이미 썼고 이제 딸세포 셋과 아들세포 셋, 총 여섯 개만이 남아있었다. 각각의 캡슐은 일련번호가 새겨진 시험관같은 투명한 보호통 안에 하나씩 담겨 있었다.

세포 개수를 세어 본 카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6개밖에 없어? 그럼 이걸 다 쓰면 끝인 거냐?”

“모렌 박사가 살아있다면 생전에 만들어놓은 생식 모세포에서 계속 분열을 시킬 수 있었겠지만 이젠 황상의 복제방지코드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저것 이상은 어렵습니다.”

“그럼 이 캡슐에 무슨 일이 생겨도 큰일이네?”

카이의 걱정에 소장이 괜찮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은 마십시오. 이 방은 완전히 독립된 클러스터로 되어 있어서 설사 황궁이 붕괴된다 해도 내용물은 온전히 보존됩니다. 각각의 캡슐과 보호 통에도 보안코드 발신기가 내장되어 있어서 황궁 안에서는 움직임이 계속 추적됩니다. 누군가 무단 반출하려 해도 출입문에서 경보가 울릴 겁니다.”

소중한 6개의 캡슐들을 둘러보던 카이가 웃으며 딸세포 캡슐 중 하나를 가리켰다.

“어, 저거 보세요, 황상다우시네요.”

카이가 가리킨 캡슐엔 꽃 모양으로 매듭이 지어진 분홍색의 리본이 공들여 매어져 있었다.

- 그대를 닮은 예쁜 공주가 될 겁니다. 이번엔 꼭 아이를 지켜낼 테니 부디 날 믿어주시오. -

리본에 깨알같이 쓰인 황제의 친필을 보고서도 아메스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그는 그 캡슐 뒤의 다른 딸세포 캡슐을 집으려 했지만 눈치 빠른 카이가 리본 달린 캡슐을 잽싸게 집어 엄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저도 이게 느낌이 좋아요.”

주변의 눈치를 살핀 아메스는 하는 수 없이 그 캡슐을 챙겨 돌아섰다. 그리고는 출구에 있는 ‘반출 목록’에 번호를 적고 자필 서명을 남겼다. 지금껏 죽어라고 임신을 피했던 그이지만, 이젠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이었다.

캡슐을 갖고 149층으로 돌아온 아메스는 어딘지 달라진 황후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황후가 그동안의 출산파업을 접고 공주를 회임할 것이라는 사실이 내명부에 알려지면서 행여 황제의 사랑을 잃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이 맴돌던 황후전에도 어느덧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침실에 든 아메스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침대에는 사방으로 캐노피를 쳐 놓았고 그 위로 어두운 커튼이 몇 겹이나 드리워 있었다.

“준비 끝냈습니다.”

친정 자이센 가에서부터 따라와 30년 내내 그의 곁을 지켜 온 중년의 유모가 캐노피 한쪽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황상께서 아니 계시니 몸소 하셔야 합니다. 저희는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알아.”

아메스가 퉁명스레 대답하며 옷을 휙 벗어던지고 침대에 다가갔다.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앉은 아메스는 꺼질 듯 한숨부터 내쉬었다. 눈치 빠른 유모가 다른 시녀들을 멀리 보내고는 걱정스레 물었다.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니다.”

입으로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아메스는 손에 든 캡슐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유모가 그런 아메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힘내십시오. 황상께선 여전히 황후 폐하를 사랑하고 계시니 초조해 하실 것도 없고요. 밖에선 사나운 맹수 같으시던 그분 눈빛이 황후전에 드시면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해지시던가요. 그분께선 돌아가신 마리안 부부인 때문에라도 절대 폐하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유모가 캡슐을 쥔 황후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젠 초산도 아니니 난산을 걱정하실 것도 없고요. 기뻐하실 황상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난산 때문이 아냐.”

아메스는 마치 속내를 들킨 사람마냥 어깨를 들썩했다. 근 며칠 아메스는 ‘황제’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무슨 저주라도 듣는 사람처럼 이렇게 화들짝 놀라곤 했다.

유모는 캡슐을 쥔 아메스의 손을 꼭 잡아주며 다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여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몸 안에 품는 것처럼 행복한 게 더 있겠습니까. 그분이 제국의 지배자라면 제국민 누구에게나 꿈 같은 일이지요.”

아메스는 무어라 반박을 하려다가 도로 목 뒤로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 위에 올랐다. 유모가 캐노피를 내려주며 조근조근 말했다.

“자리를 비워드릴 테니 다 마치시면 움직이지 마시고 그대로 누워 한숨 푹 주무십시오. 폐하께서 함께 머물며 안아주시면 제일 좋겠지만 일단은 최대한 안정을 취하시는 편이 인공수정 성공률이 높다고 합니다.”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 아참.”

짜증스레 손을 젓던 아메스가 생각이 난 듯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런데 우리 종가엔 연락했지?”

“‘우리 종가’가 아니고 ‘사가’라 하셔야 합니다. 제국 황후의 종가는 황궁입니다.”

유모의 참견에 아메스가 살짝 낯을 찡그렸다. 죽은 엄마 마리안 부인을 대신해 어릴 때부터 아메스를 키워 준 저 유모는 토박이 시녀들보다도 더 원리원칙을 따지는 통에 자유분방한 아메스와 자주 충돌을 빚곤 했다. 게다가 아버지 페로가 황후전에 일부러 심어놓은 심복이라는 건 내명부 누구나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총리께는 말씀드렸으니 걱정 말고 주무십시오. 이젠 유학자들이 계속 상소를 올려가며 들볶아대지도 않을 테고요.”

유모가 캐노피의 커튼을 덮어주자 침대 위는 다시 어두컴컴해졌다. 아메스는 머리맡의 작은 불을 켜고 옷을 하나 둘 벗었다.

“빌어먹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될 줄이야.”

옷을 모두 벗은 아메스는 운동장처럼 큰 침대에 큰대자로 혼자 누워 침대 캐노피 천장에 붙은 대형 거울을 멍하니 올려보았다. 거울에 비치는 알몸을 보며 혼자 궁상맞게 누워있으려니 원래부터 큰 침대가 더 커보였다. 침대가 황제의 큰 키에 맞췄다고는 하지만 키는 커도 호리호리한 카렐의 몸을 생각하면 세로보다 가로가 더 긴 이런 괴상한 모양으로 침대를 만들 필요까지는 없었다.

어딘지 허전해진 그는 손에 쥔 캡슐을 다시 보았다. 캡슐 보호통 위에 매어진 분홍색 리본이 계속 눈에 걸렸다.

- 부디 날 믿어주시오. -

솥뚜껑만한 큰 손으로 이 깨알 같은 글씨를 써서 여기에 묶고 있었을 황제의 모습을 상상하니 아메스의 가슴이 괜히 먹먹해졌다. 그는 분명 매력적이고 훌륭한 배우자였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황제를 무서워해도 식솔들에게 그는 언성 한 번 높이는 법 없는 다정한 배우자이고 든든한 가장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지 몸도 못 건사하면서, 지키기는 누굴 지켜.”

아메스가 혼자서 또 악담을 늘어놓으며 한참 떨어진 옆자리의 빈 황제 베개를 돌아보았다. 저곳을 보니 황제의 품에 안겨 있던 때가 생각났다. 황제와 사랑을 나누는 자신의 모습을 천장의 거울로 볼 때마다 정말로 행복했다. 그와 황제와의 잠자리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지만 그건 관계를 가질 때뿐이었다.

저곳에서 자다가 발작을 일으키는 황제를 본 일이 적어도 대여섯 번은 되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아메스가 할 수 있는 건 침대 밖으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눈이 벌개진 채 온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워하는 황제에게 잘못 다가갔다가는 그 무시무시한 손에 맞아 즉사할 판이니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는 황제에게 쇠사슬을 칭칭 감으며 사방에서 악을 써 대는 카토와 근위가디언들을 멀찍이에서 보며 벌벌 떨고 있어야 했다.

20년 전, 처음 황제의 발작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후로 그는 절대 황제의 품에 안겨 자지 않았고 심지어 그가 가까이에 있으면 불안해 잠도 오지 않았다.

그의 공포를 알게 된 황제는 처음엔 그를 안아준 후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 혼자 자곤 했지만 ‘황제와 황후가 소원해진 것 같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결국 황후의 침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메스가 침대를 원래보다 옆으로 더 크게 키워놓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관계가 끝나자마자 남남이 된 듯 침대 반대편으로 밀어내는 것에 황제가 섭섭해 하는 것도 알지만 무서움을 참고 한 침대에 있어주는 것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황후의 품에서 밀려난 황제는 멀찍이에서 손을 뻗어 잘 자라며 어깨를 쓰다듬어주고는 혼자 웅크려 눈을 감곤 했다. 그때마다 황제에게 미치도록 미안했고, 그런 그가 한편으로 안쓰럽기도 했지만 두려움과 위험을 감수하게 할 만큼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황제의 발광보다 그가 죽고 난 후가 더 무서웠다. 발작이 반복될 때마다 회복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는 것을 보며, 그는 황제에게 죽음의 사자가 한 발 두 발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막막했다. 이제 겨우 60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황태후라는 의미 없는 간판 하나만 받고 세상의 조연으로 밀려난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는 세네피스처럼 학계의 거두로 결혼 전 이미 자기만의 자리를 굳혀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막강한 권력과 힘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물론 황제 사후에도 어린 카이가 제대로 황제 노릇을 할 때까지 섭정을 하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차피 황제의 이름을 빌린 권력은 오래갈 수 없는 것이 숙명이었다. 그런 권력은 적당한 때에 골방 늙은이라는 족쇄를 스스로 채우고 물러나거나, 혹은 황제를 농락한 악녀로 강제로 끌어내려지는 그리 좋지 않은 결말을 내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계속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 황후로서 누리는 특권과 호사가 클수록 황제의 죽음 뒤에 무너질 자신의 위상이 더 비참하게 느껴져 미칠 것 같았다.

사실 십여 일 전 한 간담회에선 독수공방하는 세네피스와 실리페 베로 태후를 핑계로 태후의 금혼 규정을 폐지하는 게 어떻겠냐며 슬쩍 운을 띄웠다가 속내를 눈치 챈 제네르에게 바로 저지당하기도 했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세네피스 황태후는 황제가 오냐오냐 해 줘서 이젠 똥오줌도 못 가린다며 격분해 길길이 날뛰었고, 황궁 한편에서 황제의 묵인 속에 이 남자 저 남자 섭렵하며 한량 놀이로 잘 살고 있는 실리페도 ‘난 지금이 더 좋은데?’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그의 발언은 한 편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메스 자신이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건 잘 알지만, 그가 아직 살아있는 황제를 놔두고 벌써부터 재혼 걱정까지 하게 된 건 단순히 혼자 사는 것이 싫어서만은 아니었다.

아메스는 10분이 넘게 캡슐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캐노피 밖으로는 잠시 나갔던 침소 시녀들이 다시 들어오는지 살금살금 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메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캡슐 통을 열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아메스는 벗어놓았던 속옷 안쪽 작은 주머니에 통을 집어넣어버렸다. 그리고는 이불을 머리까지 확 뒤집어쓰고 아무 일도 없던 양 잠을 청했다.

하지만 황제의 존재감이 있던 침대 반대편이 무척이나 허전했다. 비록 안겨 잘 수는 없었지만, 저곳에서 손을 내밀어 자신을 쓰다듬어주던 황제의 따스한 손길과 슬픈 눈빛은 정말로 그리웠다.

“내가 황제를 사랑했던 걸까.”

아라무트로 보낸 사카 일행과 연락두절이 길어지면서 이디나는 점점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사카가 12번 잔딕과 세네피스를 데리고 돌아와 귀환 보고를 올려야 할 때가 가까워가지만 그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고, 그가 데려간 20여명의 헤네티들에게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신호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한편에선 자신들의 후계자들을 돌려받기 위한 협상을 빨리 시작하라는 아트위야와 살름의 압박도 계속 그를 조여오고 있었다.

오늘도 또다시 재촉을 해 온 아트위야와 한바탕 말다툼을 하고 난 이디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처소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기분을 또다시 망쳐놓은 건 슈라의 등장이었다. 몇 명의 헤네티들과 들어온 슈라는 가뜩이나 침울한 그의 앞에서 거의 죽상이 되어 무릎을 꿇었다.

“뭐냐.”

창밖을 내다보던 이디나가 짜증스레 물었다. 오랜 기간 머물던 북부 코윈을 떠난 크테시폰 궁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려 워프 루트를 지나고 있는 참이었다.

대신관의 침울함을 눈치 챈 슈라가 보고 대신 가벼운 말로 시작을 끊었다.

“이전까지 활달하게 현장을 돌아다니시던 분께서 계속 궁내에만 계시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디나는 그제야 창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새삼 쳐다보았다. 대신관이 되고 며칠 지나지는 않았지만 이제 화려한 차림새와 몸단장도 눈에 익어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광산의 간부로, 제련소 현장 책임자로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던 그가 근 며칠간 궁 밖을 한 번도 나가 본 일이 없었다.

“궁이 새 위치에 자리를 잡으면 구경이라도 할 겸 나가 봐야지.”

이디나가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외모는 대신관이라는 정상에 서 있지만 아직 마음 속은 현장을 바삐 뛰어다니던 ‘이디나 소장’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되새겨보니 며칠 동안 느껴보지 못한 바깥 공기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황제와 찬바람을 맞으며 마주서 있던 99번 컴플렉스의 수송함 갑판 위의 기억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빌어먹을, 하고많은 것 중에 하필 그 생각이.’

이디나는 냉담한 표정으로 슈라에게 돌아서며 물었다.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어 온 것이 아니더냐.”

머뭇거리던 슈라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방금 전 남극성당에서 세네피스 황태후의 모습이 확인되었습니다.”

순간 힘이 확 들어간 이디나의 턱에 핏줄이 곤두섰다. 슈라가 그의 눈치를 보며 작은 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

“황제가 직접 대제학실로 업고 왔다고 합니다. 황태후는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고요.”

“실패라는 뜻이군.”

이디나는 아무 말 없이 창으로 휙 돌아섰다.

“사카는?”

슈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쪽과는 연락이 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정황상 전사일 가능성이…….”

슈라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엎드린 채 한동안 말이 없던 슈라가 목멘 소리로 입을 열었다.

“재생 과정에 들어갈까요?”

“아니.”

뒤돌아있던 이디나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대신관의 거침없는 대답에 당황한 헤네티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지난 페스트에 이어 거듭 패전한 여단장에게 혹 큰 벌이 내려질지 모른다며 서로 재빨리 수화를 주고받았다. 가뜩이나 무른 성격이었던 아스탈도 패전하고 돌아온 부하들을 용서하는 법이 없었으니 서릿발 같은 새 대신관이 즉위 후 맘먹고 시작한 첫 작전을 실패한 무장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지 벌벌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사지로 떠난 무장을 단 며칠도 못 기다려준단 말이냐.”

“예에?”

놀란 헤네티들이 대신관을 올려보았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디나가 놀라고 있는 그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무장이 전투에서 패하는 게 무슨 허물이냐.”

“무, 물론이옵니다.”

“전사했다는 증거가 없으니 기다려라. 내겐 너희 하나하나가 내 팔다리만큼이나 소중하다.”

이디나가 엎드려 있는 슈라와 헤네티의 어깨를 한 번씩 다정히 쓰다듬어주고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반대편으로 멀어져갔다.

“당장 인근에 수색팀을 보내라. 살아서 못 데려오면 시체나 목걸이라도 가져와라. 그 전엔 재생 따위는 없다.”

“망극하옵니다, 위대한 현신이시여.”

헤네티들은 멀어져가는 대신관의 뒷모습에 대고 머리를 더 깊숙이 조아리고는 급히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헤네티들을 내보내고 자리에 혼자 앉은 이디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제가 아직 무사히 있다는 말에 분노와 묘한 안도감이 동시에 드는 것이 대체 무슨 심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테이블 밑의 금고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 나가라.”

이디나가 집무실의 시녀들과 비서관들에게 손짓했다. 종종 이렇게 집무실에 혼자 있곤 하는 대신관이 대체 무얼 하는 것인지 모두들 궁금해 했지만 누구도 감히 물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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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기존의 주문게시판이 포워딩에서 일부 문제가 발생해서 몇몇 지역에서 접속이 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정 인터넷업체나 해외에서 접속하시는 분들께서 접속에 문제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새 주소로 새 게시판을 오픈했습니다.

혹시 모르니 이전 주문게시판(http://vein.zio.to/) 도 함께 운용할 예정입니다만 새 주문은 가능한 새 게시판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새 주문게시판에 첫 주문글 올려주실 용자(?) 분을 기다리겠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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