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54 회: 파트10. 그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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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이디나는 금고를 열고 안에 있던 흰 원피스와 할룩스를 꺼냈다. 그는 황제의 체취가 배어 있는 원피스에 코를 대고 다시 들이켜 보았다. 매일, 어느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그의 냄새를 맡곤 했지만 질리기는 고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간절해지기만 했다.
“역시 아버지가 옳았어. 저주가 따로 없잖아.”
이디나가 몇 번이나 실감했던 사실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할룩스를 켜고 황제의 코드를 다시 열어보았다. 역시나 아무런 수신내용이 없었다. 황제는 수송선 갑판으로 추락해 헤네티들에게 잡혀간 그가 아버지 아스탈에게 봉변을 당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설마……벌써 날 잊었을까?”
이디나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황제가 이미 이 할룩스를 폐기했거나 번호를 없애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안 돼.”
순간 그는 온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연결]을 눌러버리고 말았다. 신호가 연결되고 있는 동안 그는 이번에도 쿵쾅거리는 가슴을 제대로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지난번보다는 조금 오래 기다릴 수 있었지만 결국 그의 손가락은 이번에도 [연결 해제]를 누르고 말았다.
“빌어먹을.”
그는 끊긴 할룩스를 든 채 자신의 멍청한 짓을 탓했다. 기계를 도로 금고 안에 던져버리려던 그는 이번에 수신을 알리며 울리는 할룩스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런.’
발신자를 확인한 그의 가슴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손끝 한 번만 움직이면 바로 황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지만 쉽사리 되지를 않았다. 한편으로는 지금 받지 않으면 어쩌면 그와 영영 끊길 수 있다는 공포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할룩스를 들고 아주 조심스럽게 ‘음성 연결’을 눌렀다. 그새 익숙해진 대신관 로브와 케이프, 화려한 서클렛이 이 순간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연결이 되고도 낮은 숨소리 뿐, 한동안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상대 역시 조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예요.”
이디나가 작고 조심스런 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존엄한 차림새를 하고 겁먹은 소녀처럼 속삭이는 자신의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대신관의 억류당한 딸 행세를 해야만 했다.
“아프라시아……씨인가요.”
“무사한 거요?”
무뚝뚝하고 거칠지만 분명 황제의 목소리였다.
“예.”
“높은 데서 떨어졌던데 다치지는 않았고?”
“어깨를 조금 삐었지만 괜찮아요.”
이디나가 그날 이후 계속 욱신거리는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황당하지만, 그 날의 사건 이후 누군가에게서 처음으로 괜찮냐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이디나는 황제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잠시 말이 없던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아버지에게 죽었는줄 알았소.”
“변명 잘 해서 일단 목숨을 건졌어요.”
이디나는 첫 거짓말을 했다. 황제가 믿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죽이고 내가 새 대신관이 되었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바깥출입은 어렵게 되었지만요.”
이디나가 자꾸 울먹이려는 목소리를 감추며 억지로 말을 이었다.
“살아있어 다행이요. 이디나.”
황제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이디나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그저 자기만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황제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는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다. 물론 ‘그의 정체’가 다시 달라졌지만.
“고마워요, 무서워서 끊었는데 연락해 줘서.”
건너편에서 황제의 낮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 자신의 모습까지 드러날 터였다. 건너편에서 다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젠 안전한 거요?”
“……모르겠어요. 솔직히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처지에요.”
이디나는 두 번째 거짓말을 했다. 유치한 줄 알지만 그에게서 관심과 걱정을 받을 수 있다면 더 유치한 소리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최대한 불쌍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 맘에 달렸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시오.”
“실은 부탁이 있어 걸었어요.”
“부탁이라니?”
“아트위야와 살름 마구스에게 후계자 찾는 걸 돕겠다고 약속하고 목숨을 건졌어요. 그들이 아니었다면 전 죽었을 거예요.”
황제에게서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 둘에게 보내신 할룩스는 문제가 생겨서 못 쓰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 둘한테 황실과 다리를 놓겠다고 했어요.”
“훗, ……그랬던 거군.”
황제의 맥 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말을 해 놓은 이디나도 생각해 보니 그냥 운 좋게 살았다는 말보다 이편이 훨씬 그럴싸한 것 같았다.
“아트위야 마구스가 협상 대표로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 날짜와 장소만 지정해 주시고 안전만 보장해 주시면…….”
“아트위야 마구스가 날 만나러 올 거라고?”
‘나’라는 말에 이디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제는 마구스들의 후계자 반환 협상을 직접 하려는 모양이었다.
“직접 협상하신다고요?”
이디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절세미녀 아트위야와 황제가 얼굴을 마주하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판이었다. 하지만 일단 약속을 했으니 그 암고양이 같은 여자가 미모와 특별한 능력으로 황제를 홀리는 일에 도전할 무대를 연출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아트위야 마구스가 자식의 일이니 직접 나서겠다고 하던데요.”
“날 만만하게 봤군.”
묘한 비웃음이 섞인 황제의 대답에 이디나의 가슴이 다시 철렁했다.
“총리에게 썼던 수법이 내겐 안 통할 거라 전하시오.”
황제의 단호한 대답에 걱정이 들어야 하는 이 순간, 이디나는 도리어 안도하고 있었다. 카렐이 재차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여자보다 훨씬 아름다운 비빈들과 잘생긴 남자들이 날 사랑해주고 있다고 전해주시오.”
이디나는 황제의 저 말이 아트위야가 아니고 마치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디나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이가 사자로 가기로 했으니…….”
이디나가 막 본론을 꺼내려는 찰나, 황제의 청천벽력 같은 한 마디가 전해졌다.
“아트위야는 필요 없소. 그대가 사자로 오시오.”
“예에?”
이디나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내 교환 요구조건은 그대가 오면 그때 제시하겠소.”
이디나는 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절 사자로 보내주실 리 없습니다.”
“내 조건이 그러하다면 살름과 아트위야가 알아서 당신 아버지를 설득할 것이요. 당신은 나서지 말고 한 발 물러나 있으시오.”
단호한 황제의 목소리에 이디나의 혼란은 더해갔다. 그의 이성은 황제가 자신을 미끼로 마구스들 사이에 내분을 일으키려 한다고 꼬집고 있었고, 그의 감정은 황제가 진심으로 자신을 보고 싶어 하고, 염려해주고 있다며 달콤한 속삭임을 건네고 있었다.
“누가 와요,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뭐라 답해야 할지 막막해진 이디나는 그대로 ‘연결 해제’를 누르고 말았다. 황제와의 짧은 통화는 이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탁자 위의 할룩스를 멍하니 쳐다보던 그는 옆에 있는 거울을 돌아보았다. 그 안엔 그 누구보다 당당해야 할 대신관이 초라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미쳤어, 이디나. 왜 연락했니.”
울컥한 그는 홧김에 할룩스를 던져버릴 뻔했다. 이디나는 카렐의 냄새가 배어 있는 원피스를 다시 집어 들고 코에 가져갔다. 또다시 맘이 약해지고 있었다.
“멍청한 황제 같으니.”
발끈한 이디나는 손바닥에서 피가 날 만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난 널 죽일 사람이라고, 알아?”
그는 카렐의 코드가 나와 있는 할룩스를 노려보며 마치 다짐처럼 혼잣말을 계속했다.
“난 식솔들은 모조리 죽여 짐승 밥으로 줘 버릴 거고 네 몸뚱이는 박제를 만들어서…….”
다음 말이 막혀버린 이디나는 다시 한참을 바보처럼 멍하니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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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대도 떠나고, 아지드의 가족이 잡혀가고, 카파키 가 보안부대와 헤네티 부대도 모두 떠난 주르반 마을은 다시 평화로운 평소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런 이곳에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밤중에 몰래 찾아온 건 민병대의 습격이 있고 두 달이나 지난 후였다.
자정도 넘은 시각에 마을에 나타난 시커먼 그림자는 그물처럼 얽힌 좁은 골목을 자기 동네처럼 빠른 걸음으로 익숙하게 지나 마을 안 깊숙이까지 들어왔다. 그리고는 공동 헛간 옆에 있는 한 빈집 앞에서 서성거렸다.
“엄마.”
절반 부서진 문을 똑똑 두드리며 내는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엄마 ……나야.”
살던 가족이 모두 잡혀가고 두 달이나 지난 판잣집은 이미 폐가가 다 되어 있었다. 그 괴한은 난장판이 되어버린 컴컴한 집안을 빤히 보면서도 절망 섞인 목소리로 몇 번이나 엄마를 불렀지만 대답이 올 리 없었다. 그는 결국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엄마 ……나 돌아왔다고.”
부서진 문 앞에 앉아 눈물을 훔쳐내는 그의 팔뚝엔 민병대 징집병을 뜻하는 붉은 낙인이 딱지까지 앉은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옷과 신발은 온통 해졌고, 곱던 다갈색 머리칼은 떡이 져 헝클어진 몰골이었다. 그의 형편없는 몰골에서 반짝이는 건 오팔빛의 눈동자 두 개와 이마에서 빛나고 있는 다하카르의 사파이어 뿐이었다.
“이렇게 돌아왔는데 어디 간 거야, 엄마.”
낙담한 그는 추운 고산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골목에 주저앉아 울기만 했다. 민병대의 손아귀를 벗어나 천신만고 끝에 어렵게 돌아온 그의 집은 이렇게 버려진 채 텅 비어있었다.
지난 두 달이 끔찍했던 건 훈련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민병대 말단 징집병에게 훈련은 애당초 있지도 않았다. 셔틀 편에 변방 센지로 끌려간 오르마즈는 간단한 신체검사만 받은 후 바로 일선부대에 넘겨졌다. 그게 전부였다. 훈련도, 무기도, 군복이나 장비도 없었다. 민병대원의 흔적으로 그가 받은 건 팔뚝에 찍은 고통스런 낙인과 손목을 묶은 밧줄이 전부였다.
그는 낙인의 화상이 채 낫지도 않은 그대로 집결소에서 만난 5명의 동기들과 함께 하임달의 사막 한복판에 보내어졌다. 그리고 그곳 동굴에 숨어 지내는 50여명의 비적 무리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은 강경파 중에서도 악질로 손꼽히는 타르서스의 군벌 헤크마 가문의 일원이라 했지만 행색을 보아선 원주민을 털어먹고 사는 파렴치한 사막 비적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민병대 군벌의 이름을 빌려 쓰며 비적질에 마치 명분이 있는 척했고 신병까지도 받아갈 수 있었다. 민병대에선 그들의 머릿수로 규모를 과시하고 필요한 때 가끔 동원하며 악독한 공생관계를 이어갈 뿐 제대로 된 주종관계도 아니었고, 체계도 없었다.
오르마즈가 처음부터 그리 빨리 탈영을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도착한지 보름만에 있은 ‘첫 임무’부터 상황은 그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았다. 사막의 한 고립된 마을을 습격한 그들은 있지도 않은 성직자를 내놓으라며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마을의 돈 나가는 물건은 모조리 약탈했다.
그때까지 전투에 나갈 자격도 못 되었던 오르마즈는 여전히 손발이 묶인 채 뒤에서 그 황당한 광경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들에게 ‘전투에 나갈 자격’은 전투기술을 습득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며칠, 혹은 몇 달을 붙잡혀 있으면서 악행을 강요받는 것이 그들의 훈련이었다.
대부분이 강제로 잡혀온 햇병아리 민병대원들은 처음에는 극도의 거부감과 분노를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강요에 의해서든 실수에 의해서든, 일단 손을 더럽히고 나면 이전처럼 되돌아갈 수 없어진 스스로를 깨닫고 자포자기해 자신이 저주했던 무리의 일원이 되어버리는 것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그렇다보니 그들에게 강요되는 ‘악행’은 악독할수록 효과가 확실했다.
하지만 오르의 첫 전투는 중간부터 완전히 꼬여버렸다. 소대장은 오르마즈의 동기들을 불러내 평소 신병들을 가르칠 때처럼 마을의 갓난 쌍둥이 아기와 노인들을 산채로 우물에 집어던지라고 명령했다. 그 순간, 그때까지는 양같이 고분고분하던 마을 주민들이 갑자기 폭발해 결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씨족 마을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 못했던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절반 가까운 병사들이 광분하는 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궁지에 몰리자 소대장은 급한 나머지 묶여있던 나머지 신병들까지 풀어주고 주민들과 싸우라고 지시했다. 그렇지만 이미 8살에 사람을 죽여 보았던 16살의 여자 신병을 풀어 준 건 실수였다. 오르는 포승에서 풀려나자마자 소대장의 목을 서슴없이 비틀어버렸다. 열흘이나 지났지만 그 신병은 조금도 그들의 일원이 되지 않았고, 도리어 어깨너머 배운 그들의 살인법을 그대로 흉내내어 돌려주었다.
소대장을 눈 깜짝할 새 살해한 오르는 주민들에게 잡혀 죽는 비적들을 놓아둔 채 동기 신병 둘, 그리고 노예로 잡혀와 부대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어린 소년만 데리고 사막으로 도망쳐 버렸다. 마을에 남은 비적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몰살당했고, 미래 제국 최고 영웅의 ‘첫 소속부대’는 단 보름 만에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도망친 오르에게도 행운만 따른 건 아니었다. 한 달 가까이 사막을 헤매는 동안 함께 도망친 두 동기 신병들은 사막 한복판에서 탈진해 죽었고, 고향이 어딘지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6살 소년 와헷만이 오르를 따라 그 지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주르반 마을에서 잡혀오기 직전, 엄마 아지드가 꽂아주었던 얼마 안 되는 여비는 그의 생명줄이었다. 속옷에 감춰두었던 그 돈 덕분에 오르는 사막을 빠져나온 직후 몇 병의 물과 먹을 것을 구해 질긴 목숨을 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덩치도 훌쩍 큰 외지 젊은이가 어슬렁거리며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6살 소년과 남매 행세를 하는 편이 사람들의 의심을 따돌리고 동정을 얻기는 훨씬 유리했다. 덕분에 오르는 가까스로 코윈으로 오는 화물선 컨테이너에 숨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쩌지.”
오르는 문간에 주저앉아 눈물만 훔쳤다. 이제 그에겐 갈 곳도 없었다.
“엇.”
어디선가 느껴지는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란 오르가 품에서 녹슨 단검을 얼른 빼들고 헛간 쪽으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1달이 넘는 도망생활동안 늘어난 건 고양이처럼 예민해진 감각 뿐이었다.
“중사님, 방금 언덕 아래에서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마을 예배당 쪽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였다. 어투로 보아 군인이 분명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오르는 신발도 벗고 살금살금 마을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배당이 있는 언덕에서 오르의 빈집 쪽으로 내려오는 군인의 실루엣이 보였다. 카파키 가 치안부대 병사 같았다.
“이런.”
오르는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민병대의 첫 습격을 경험한 카파키 가문이 이곳까지 상주병력을 보낸 게 분명했다. 오르는 마을 뒤편의 바위절벽 쪽으로 헐레벌떡 달리기 시작했다. 강경파 민병대 낙인이 찍힌 자는 잡히는 즉시 교수형에 처해지는 게 보통이었고, 운이 더 없다면 종교재판소에 끌려가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어린 소년병들은 교화과정을 거쳐 구제받기도 했지만 그는 이미 16살을 넘겼으니 잡히면 끝장이었다.
“엄마, 엄마.”
오르마즈는 맨발과 손이 엉망이 되어가며 거친 바위를 허우적허우적 기어올랐다. 어릴 때부터 무서운 아버지의 난동을 피해 도망칠 때 항상 습관처럼 올랐던 곳이었다. 이곳으로 도망치면 누구도 쫓아오지 못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기운도 없었지만 순전히 살겠다는 본능 하나로 그는 필사적으로 바위를 올랐다.
“이크.”
절벽 꼭대기로 막 손을 뻗은 오르의 눈앞에 회색빛 군화 코가 나타난 순간, 그의 머릿속이 무언가로 얻어맞은 듯 아찔해졌다. 그는 숨을 멈추고 천천히 위를 올려보았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아가씨.”
귀에 익숙한 탁한 흑인종의 목소리였다. 오르마즈는 시키는 대로 절벽에 매달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금 떠나온 집 쪽에서 병사의 고함이 들려왔다.
“중사님! 여긴 아무도 없습니다.”
“들짐승이다. 내가 확인했으니 위치로 돌아가.”
토로가 무전기에 대고 침착하게 병사들에게 일렀다. 병사들은 투덜거리며 다시 초소로 멀어져갔다. 병사들이 돌아간 것을 확인한 이 덩치 큰 치안부대 사관은 비로소 오르마즈의 손을 붙들고 위로 끌어올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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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정으로 이번 회는 하루 일찍 올립니다.
다음 연재부터는 정상적으로 올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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