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56 회: 파트10. 그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들 -- >
.
.
.
“테나토 산 고산 사과입니다. 올해는 과수도 작황이 좋지 않지만 농장들을 다 뒤져 제일 상태가 좋은 것들을 골라왔습니다.”
서부 플레렌 가 집사가 가져온 상자 앞에 선 네페티는 주먹만한 사과들을 만지작거리며 불만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이리 하나같이 씨알이 작고 못생겼는가. 며칠 후에 황상께 올릴 것들인데 모양도 좋아야지. 그분께서 사과를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건조지대 산악에서 나온 거라 모양은 좀 이래도 맛은 제일 좋습니다. 워낙 흉작이라 고산 사과 중에는 이 정도 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농약이나 나쁜 비료도 못 치게 하고 좋은 것만 솎아내어 정성껏 가꾸었습니다.”
“그렇긴 하네.”
사과를 껍질째 한입 깨물어 본 네페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리며 며칠 후 제국회의 때 돌아올 황제에게 개인적으로 대접할 음식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폈다. 모두 그의 친정인 서부에서 선별해 가져온 것들이었다.
“사과 모양까지 따질 만큼 까다롭지는 않으시지만 그래도 생김생김은 올린 이의 정성 아닌가. 으웁, 이 포도는 빼. 너무 시잖아.”
네페티는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어보고는 신맛에 몸서리를 치며 뱉어냈다.
사실 그는 요리는 고사하고 칼도 쥘 줄 모르고, 주방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본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최소한 함께하는 날 올릴 음식만은 이렇게 직접 고르는 게 철칙이었다.
비빈들의 성격이나 처한 상황 탓도 있지만, 네페티는 비빈들 중 가장 황제에게 헌신적이었다. 황제가 발작을 한 날은 며칠이건 밤을 새워 곁을 지켰고, 상태가 좋지 않은 날 황제와 함께 자는 건 위험하다는 주변의 간언과 황제 자신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한 이불 안에서 그를 안고 직접 체온으로 덥혀주었다.
게다가 오늘처럼 서부는 물론이고 제국 전역을 뒤져가며 각지의 명산물과 보양식을 챙기는데도 열심이었다. 오죽하면 황제가 ‘짐이 궁에서 살기 싫다고 도망치면 황비가 억지로 먹이는 보양식 때문이라고 생각하구려.’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지만 네페티는 ‘도망칠 만큼 기운이 좋으신 건 소첩이 올린 보양식 덕분이옵니다.’라며 결국 황제의 웃음보를 터뜨리곤 했다.
심지어 먼 옛날엔 몸이 아픈 마구스들을 소년 소녀와 한 침대에서 자게 했다는 말을 듣고는 서부에서 특별히 뽑은 예쁘장한 10대 소년 소녀들까지 황제 처소에 들여보내어 자다 말고 놀란 황제를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럼 사과는 이걸로 하고, 아까 본 수베르산 양고기도 부드럽고 기름 많은 걸로 드시기 직전에 도축해 올릴 수 있게 하고 ……아, 저거?”
수조에 다가간 네페티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아 물장구를 치고 있던 딸 마하 옆에 함께 앉았다. 수조 안에는 팔뚝만한 크기의 통통하게 살이 오른 물고기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아라무트산 민물고기인데, 원주민들 말이 사냥 때 미끼로 쓰면 악어들이 미쳐서 자기들끼리 싸울 만큼 굉장히 좋아한답니다.”
집사는 어감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는지 네페티의 눈치를 힐끔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네페티는 화를 내는 대신 침착하게 그를 재촉했다.
“무슨 뜻인지 아니까 계속 말해 봐.”
“살도 기름지고 소화도 잘 된다 하니 황상께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수고했다.”
네페티가 흐뭇한 얼굴로 물고기를 이리저리 살폈다.
“큰 건 수라에 올리게 산 채로 수조에 보내고, 작은 건 약재 넣고 푹 고아 황비전에 보내라. 지난번 주문한 양고기 포도 완성되었으면 함께 보내. 외지 생활로 기력이 떨어지셨을 테니 사과하고 같이 간식으로 올려드려야겠다. 그리고…….”
말을 잇던 네페티는 알현실 뒷문으로 들어와 헛기침을 하는 황비전 시녀장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는 손에 묻은 물기를 털고 집사에게 다 끝났다고 손짓했다.
알현실을 나오자마자 네페티는 곧바로 얼굴 위에 베일을 내리며 헌신적인 부인에서 요부로 돌변했다. 그렇게 얼굴을 감춘 그는 시녀장과 함께 조용히 147층 황비전의 복도를 걸었다.
마치 사무실처럼 썰렁한 분위기의 위층 황후전과는 달리 황비전의 복도는 네페티가 친정인 서부에서 가져온 진귀한 화초들과 붉은 톤의 화려한 벽걸이 카펫으로 화사한 분위기였다.
“알아봤나?”
“황후께선 2시경에 캡슐을 가지고 침소에 드셔서 5시쯤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친정 자이센 가로 떠나셨습니다.”
“또? 며칠이나 됐다고?”
네페티가 파랗게 날이 선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보다 훨씬 큰 시녀장을 힐끔 올려보았다.
“황도 날씨가 고약해서 하룻밤 친정에 있다 오신다 했다는군요.”
“허, 이 무렵 황도 날씨 고약한 거 누가 모르나. 30년 넘게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왜 그래? 그것도 인공수정까지 해 놓고 침대에나 조용히 붙어있을 것이지.”
“황상께서 출타중이시니 자유를 만끽하고프신 모양이죠.”
“그분께서 놀러나가셨나? 이럴수록 더더욱 황후가 진중히 자리를 지켜야지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어디 어린 것이 철딱서니 없이…….”
평소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인 말을 쏟아낼 뻔했던 네페티는 곧 표정을 가다듬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 인공수정은 잘 되었다는 것 같고?”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문제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긴, 어려운 건 아니니까. 그런데 황상께서 잠자리에서 해 주신다면 모를까 혼자 하는 건 정말 민망했을 텐데.”
“사방에 커튼 쳐 놓고 혼자서 했다고 하니 딱히 민망할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복도를 걷던 네페티가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황후가 혼자? 커튼까지 쳐 놓고?”
무언가 생각하던 네페티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다시 물었다.
“캡슐을 넣은 통은 찾았는지 혹시 알아 봤나?”
“예? 통이라뇨?”
“세포가 든 캡슐을 보호하는 투명한 통 말이다. 몸에 캡슐을 넣었다면 빈 통을 버리든지 어떻게 했을 거란 말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까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네페티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당장 제대로 알아봐라. 그 통에도 보안표지가 되어 있어서 사용 후엔 유전자은행에 반납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황제가 다 해 줬으니 그 철딱서니가 그것까지는 모를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친정 가서 뭘 하는지 최대한 파악해 오도록 해.”
네페티는 걸음을 재촉하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난 황상께서 궁에 돌아오시면 새 대군을 회임해야겠다. 시녀들 시켜서 황비가 황자를 낳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라고 소문 퍼뜨려 놓도록 해.”
“예에?”
네페티의 말에 시녀장이 당황한 듯 네페티의 배를 힐끔 쳐다보았다. 네페티의 갓난 아들 오렌 대군이 급사하고 고작 한 달 조금 넘게 지난 후였다.
“예에? 출산하시고 아직 몇 달 되지 않으셨사온데 ……아직은 좀 더 회복하셔야 하는데 황상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내 핏덩이를 잃고 품 안이 허전해 견딜 수 없다고 애원하면 어차피 거절 못하실 테니.”
검은 베일 너머로 살짝 웃고 있는 네페티의 입술이 희미하게 보였다. 시녀장이 걱정어린 얼굴로 다시 그를 설득하려 했다.
“오렌 대군께서도 그리 되셨는데 자칫 황자분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자가면역 치료법이 발견된 후에…….”
복도 끝에 도착한 네페티는 활짝 핀 국화꽃을 만지작거리며 얼음장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분께 내 존재를 더 부각시킬 기회가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다 따질 수 있나.”
“황제를 꼭 닮은 딸이면 정말로 좋겠다.”
페로 관 사랑채의 자기 방에 누운 페로는 황궁에서 문병차 찾아와 준 황후 딸에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페스트의 전장에서 눈과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던 페로는 오늘 아침에야 페로관에 돌아와 몸을 추스르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병상에 누운 그는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딸의 아랫배를 민망할 만큼 곁눈질하며 중간중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 이런 말 하면 네가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네 뱃속의 아이가 솔의 딸아이 만큼만 황제를 닮으면 소원이 없겠어.”
아메스는 쓴웃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친손자 카이를 빼면 페로가 가장 예뻐하는 황자는 얄궂게도 부인 마리안의 사생아인 솔이 낳은 마리안 옹주였다. 그가 듣기로도 마리안이 어린 시절 황제와 눈 색깔만 빼면 쌍둥이처럼 닮기는 한 모양이었다.
수십 년 전부터 ‘황제를 닮은 아이들로 황실과 우리 가문을 잇고 싶다’며 입버릇처럼 달고 있는 페로였지만, 정작 그에겐 유전자의 확률 놀음이 행운을 주지 않았다. 페로 자신을 닮은 카이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난해 죽은 크낙스 공주도 친자확인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농담이 돌았을 만큼 생김새나 성격 모두 황제와는 딴판이었다.
아메스는 자신을 쏙 빼닮은 외모에 털털하고 다혈질의 성격까지 그대로 물려받은 딸 크낙스를 맏이 카이보다도 아꼈었고, 황제도 겉으로는 ‘힘들어하는 황후를 닮아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정작 페로는 자이센 가를 이을 종손이 황제 닮은 구석이라고는 거의 없다는 것에 대놓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었다.
“이 애는 자이센 가를 이어야 하는데 나나 아버지를 닮아야지 왜 황제를 닮아요.”
아메스가 퉁명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 가문을 이을 아이가 황제 닮는 건 싫어요.”
딸의 엉뚱한 고집에 페로가 접시를 치우며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솔직히 황제가 너보다 훨씬 미인이잖니.”
“목 위만 보면 그렇죠. 그 괴상한 몸뚱이 씻기고 단장하는 일 초짜 시녀한테 시켰다간 징그럽다고 거품 물고 발작하는 거 아세요?”
“황후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도 되는 거냐? 지난번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페로가 처음으로 딸에게 꾸짖는 투로 언성을 높이자 아메스도 질세라 짜증을 냈다.
“아빠도 황제 몸 보고 처음엔 거의 기절하셨다면서요. 그냥 부녀지간에 가볍게 한 농담인데 발끈하시긴. 저도 황제가 가디언이었던 때 쓰던 말투가 몸에 배서 안 고쳐지는 걸 어쩌라고요. 아빠도 툭하면 반말 내뱉으시면서 나한테만 그러셔.”
“난 둘이 있을 때만 그러잖아. 넌 입조심 좀 해. 이번에 또 문제 일으켰다간 너 정말 단단히 각오해야 돼. 남들 앞에서 황제 흉 좀 보지 말고 존경하는 척이라도 해 봐. 어디서 또 실수하려고 그러냐?”
아버지의 질타에 아메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괜히 문병 와서 잔소리만 실컷 듣고 가네요.”
딸의 반격에 페로도 비로소 표정을 고치며 물었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갈 참이라며? 지난번에도 나 없을 때 와서 자고 갔다더니 또 그래도 되는 거냐?”
페로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딸에게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아메스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저 말고 다른 비빈들도 다 있고 부총리하고 제네르 경도 다 궁에 있으니 알아서 좀 잘 하겠어요? 황도 날씨가 너무 칙칙해서 햇빛이라도 좀 보고 가려고 해요. 내일이면 황태후도 온다는데 이젠 오고 싶어도 못 와요.”
“그래 ……너 쓰던 방 다 정리해 놨을 거다. 온돌에 불도 넣으라고 했으니 따뜻한 데서 몸도 지지고 가라.”
“잠깐 시내 구경이라도 좀 하고 오려고요.”
“오늘? 인공수정을 해 놓고 나가긴 어딜 나가! 설마 술이라도 마시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페로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지만 아메스가 능청맞게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웃음을 지었다.
“술은 무슨 술이에요, 저 30년 동안 술 거의 안 마신 것 아시잖아요. 그냥 간만에 신분 감추고 시내 나가서 구경만 하고 올 거예요.”
딸의 대답에 페로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술 문제는 아메스가 제대로 극복해 낸 게 사실이었다. 지난 제위전쟁 끝날 무렵까지도 술독과 파티에 빠져 살았던 아메스는 전쟁 끝머리에 술로 저지른 큰 실수 이후로 술잔이 난무하는 질펀한 잔치와는 정말로 담을 쌓고 살고 있었다.
“요즘 3번 도시에 축제 중이잖아요. 친정 와서 그 정도 바람 쐬는 것도 못 해요?”
“나중에 황제하고 함께 나가. 지난번에도 멋대로 시내에 나갔다 왔다며?”
“진짜, 우리 아빠 재미없게 이러시기예요? 황궁에서 감방살이하다가 모처럼 구경 좀 하겠다는데. 딱 4시간이면 돼요. 12시까지는 꼭 들어올게요.”
외동딸의 애교 반 애원 반에 결국 이기지 못한 페로는 뚱한 표정으로 돌아누우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12시까지 안 들어오면 나중에 황제한테 다 고자질할 테니까 알아서 해. 킵 데리고 가.”
“고마워요, 아빠. 내일 아침에 또 올게요.”
아메스는 눈에 붕대를 감은 아버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사랑방을 나섰다.
떡갈나무 언덕이 그대로 내다보이는 사랑채의 넓은 마루는 그가 살던 때와 비슷한 익숙한 나무 냄새를 풍겼다. 썰렁한 황도와는 다른 온화한 날씨, 흙냄새 섞인 따뜻한 바람과 마당의 불빛 주변을 맴도는 날벌레들, 파란 팔찌를 낀 익숙한 가디언들의 모습에 아메스의 입가에도 절로 웃음이 번졌다. 이곳의 모든 것이 입궁 전 어린 시절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오늘밤 시내까지 모시라고 들었습니다. 차량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보안 책임자인 킵이 황후를 따라온 수행원들을 의식하며 아메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메스는 황궁에서부터 따라온 시녀와 비서관, 경호 가디언들에게 사랑채 행랑들을 가리켰다.
“유모는 여기서 수행원들 데리고 행랑의 손님방에서 자도록 해. 난 시녀장 하나만 데리고 시내에 잠깐 다녀올게.”
“허나…….”
유모가 기겁을 하며 입을 열었지만 아메스가 바로 그의 다음 말을 막았다.
“황상께서도 여기서만은 결혼 전처럼 지내도 된다고 하셨어. 여기서까지 황실 수행원들 줄줄이 달고 다니고 싶지는 않아. 지난번에도 말했고만 또 왜 그래.”
아메스가 버럭 화를 내자 유모도 하는 수 없이 한 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메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황후는 제국 어디에 가든 황실 가디언들과 수행원들이 곁을 지켜야 하는 게 원칙이지만 황제도 황후가 친정 페로관에 갈 때만은 황실의 손을 벗어나 결혼 전과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라며 따로 지시한 일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킵 대장님, 오늘 폐하를 잘 지켜 주십시오.”
유모는 하는 수 없이 시녀들과 수행원들을 데리고 행랑채로 멀어져갔다. 비로소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 아메스는 친정의 공기를 가슴 속 깊숙이 들이키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제야 살만하네. 가자, 킵.”
황제령의 과일 주산지이고 자이센 가의 근거지인 3번 도시에서는 올해도 수확을 축하하는 요란스런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제후 지역을 휩쓸고 있는 대기근이 다행히 황제령은 약간 비껴나간 덕분에 올해의 수확축제 분위기도 전년도와 크게 다를 것 없이 소란스러웠고 종이로 만든 색색의 과일 모양 전등이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오늘 축제의 이름은 과일 수확제이지만 그 이름이 무색하게 짝을 찾으려는 젊은 남녀들, 이미 짝이 된 커플들이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벗어나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는 날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늦은 저녁이 되고 나니 사방에서 터뜨리는 폭죽이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고, 기분 좋게 한잔 걸치고 나온 취객들과 고성방가하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노골적으로 애정행각을 벌이는 커플들과 새 짝을 찾아보려는 실랑이가 뒤섞인, 어쨌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축제다운 모습이었다.
“남부 페스트에서도 수확 축제에서 안 좋은 일이 터졌다보니 이번엔 경계가 삼엄합니다. 거기처럼 기근이 든 것도 아니고 민심도 좋은 편이긴 하지만 어쨌든 조심하십시오.”
아메스를 호위하는 킵이 골목골목 서 있는 치안군 병사들을 가리키며 잔뜩 겁을 주었다. 가디언 중에서는 그나마 체격이 작은 그는 함께 데려온 페로 가디언에게 반대편을 제대로 지키고 있으라며 손짓했다.
“아이, 씨, 티 좀 내지 마.”
평상복 차림인 아메스가 행인을 거칠게 밀치며 길을 내는 킵에게 눈을 흘겼다. 그의 손에는 ‘짝을 찾는 홀몸의 여자’를 뜻하는 노란 복숭아가 들려 있었다.
“황후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인파에 휩쓸려 가면 되지. 이럴 거면 추적장치는 뭐 하러 달았어.”
아메스가 짜증을 내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먹자골목에 들어섰다. 사방에서 풍기는 진한 음식냄새와 장사꾼들의 호객하는 소리에 정신이 멍멍해진 킵이 낯을 찡그렸다.
“이런 데선 사람이 많아서 저희도 자칫 폐하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 달고 있잖아. 축제 와서 뭐 먹지도 말라는 거야?”
아메스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작은 추적장치 겸 긴급 신호기를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킵은 그의 불평을 한 귀로 흘리며 먹자골목을 가득 채운 싸구려 음식 좌판들을 둘러보았다.
“이런 데서 드시고 탈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요. 기왕이면 좀 조용하고 깨끗한 곳에…….”
“정말 답답하긴, 축제를 즐길 줄도 모르네.”
아메스가 기가 막힌 듯 혀를 차며 보란 듯 과일과 생선 꼬치구이를 파는 좌판에 다가가 즉석에서 몇 개를 집었다. 그리고 고객이 누군지 꿈에도 모를 상인에게 동전 몇 개를 건네고는 신나게 입에 물고 걷기 시작했다.
“이래야 좀 사람 사는 것 같잖아. 아휴, 그놈의 답답한 황궁.”
아메스가 구운 토마토를 씹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지금의 아메스는 누가 봐도 그냥 길거리에 놀러 나온 밝고 명랑한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그때, 맞은편에 지나가던 청년 한 명이 아메스에게 슬쩍 다가와 ‘짝을 찾는 홀몸의 남자’를 뜻하는 키위를 건넸다. 남자의 얼굴을 힐끔 올려 본 아메스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남자도 두말없이 멀어져갔다.
“이런 낙도 다 있고.”
남자의 접근이 싫지는 않은지 아메스가 복숭아를 만지작거리며 킬킬거렸다.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킵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황상께서 아무리 자유롭게 돌아다니시라 허락하셨지만 이건 좀 ……아니, 결혼반지는 어디에 빼 놓고 나오셨습니까?”
뒤따르는 킵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아메스는 본척만척 짓궂게 더 큰 소리로 떠들었다.
“아아, 이 예쁜 복숭아를 받을 멋진 왕자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복숭아를 안은 아메스가 환한 표정으로 주변 청년들을 둘러보았다.
비록 화장도 안 했고 딱히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았지만 내명부에서 워낙 매일같이 갈고 다듬은 외모다보니 화장도 안 한 맨얼굴에 평상복만으로도 길거리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는 충분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