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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957화 (952/1,132)

< -- 957 회: 파트10. 그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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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이번엔 잘 꾸며 입은 잘생긴 청년 둘이 아메스와 시녀장에게 다가와 키위 알을 건넸다.

“이 인파 속에서도 광채가 확 나십니다. 우와, 상급귀족이신가요?”

남자들이 아메스 귀 밑의 상급귀족문에 화들짝 놀랐다. 남자들의 행색을 힐끔 올려본 아메스는 그들이 내심 맘에 드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복숭아를 만지작거렸다.

“흐음, 그래요? 그쪽도 두 분 다 정말 잘생기셨는데요? 아직 괜찮은 여자 못 찾으셨어요?”

“지금 막 찾지 않았습니까.”

“이런, 눈도 높으셔라.”

입이 헤벌레해진 아메스가 남자가 내민 키위를 집으려 손을 뻗었다.

“어허, 어딜.”

파란 팔찌가 끼워진 굵고 건장한 킵의 팔이 남자와 아메스 사이를 딱 막아섰다. 사나운 가디언의 등장에 파랗게 질린 청년들이 혼비백산해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아메스가 낙담한 얼굴로 킵을 휙 째려보았다.

“뭐야, 이거 진짜.”

“페로 대공께서도 그냥 구경만 허락하셨지 이런 것까진…….”

“재미로 하는 거지 누가 뭐 바람이라도 피운대? 아우, 됐어, 분위기 망치지 말고 그만 좀 쫓아와.”

아메스가 버럭 화를 내며 킵에게 떨어지라며 손짓했다. 화가 난 황후의 모습에 난처해진 킵이 머뭇거리는 사이, 아메스는 인파 사이로 휙 사라져버렸다.

“어딜 또 가십니까.”

킵이 서둘러 아메스의 뒤를 쫓았다. 하필 그때, 큰 나팔소리가 울리며 수레를 끄는 수백 명의 농부들이 먹자골목을 꽉 채우고 우르르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방에 토마토를 마구 던지면서 먹자골목 일대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맙소사, 아가씨! 아가씨!”

킵이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며 아메스가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지만 인파 사이에 파묻힌 아메스와 시녀장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이런 제기랄!”

다급해진 킵이 추적장치를 켜들었다. 아메스의 추적 장치는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따라와!”

킵은 부하 가디언을 데리고 추적장치를 쫓아 사람들을 헤치며 달려갔다. 씩씩거리며 추적장치를 들고 쫓아온 두 가디언들의 앞에는 주스 노점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었다. 킵이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방금 여기 검은 머리 아가씨 못 봤냐! 흰색 비단포에 중간 키에…….”

“말씀하신 그런 아가씨가 키위주스 한 컵에 1골드나 주고 가시던데요?”

멍한 표정의 노점상이 과일 무더기를 가리켰다. 아메스에게 달아 준 추적 장치는 과일더미 앞에 보란 듯 버려져 있었다.

“미치겠네.”

킵이 얼른 할룩스를 켜 찾아보았지만 예상대로 받지 않았다. 킵을 따라온 가디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했다.

“마, 맙소사, 이걸 어쩌죠? 당장 본가에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직 경험이 짧은 그 가디언은 황후에게 일이 생겼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파랗게 질려 있었다. 똑똑한 킵이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그 부하의 콧잔등을 톡톡 쳤다.

“부산 떨지 마. 일부러 이렇게 해놓으신 거 보니 어디 잡혀가신 건 아닌 것 같다. 그냥 자유롭게 놀고 싶으신 맘에 잠시 도망치신 것 같으니 괜히 일 키우지 마. 아직 3시간이나 남았으니 때 되면 나타나실 거야.”

“예, 예, 예.”

상급자의 말에 조금이나마 안도한 가디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까 보니까 대로 남쪽 홀에서 있는 댄스파티 얘기를 계속 하셨어. 난 여기서 찾고 있을 테니까 넌 댄스파티장 가서 그분 찾아 봐. 그분 찾으면 알리고 2시간 후에 여기서 만나자.”

“예, 알겠습니다.”

군기가 잔뜩 든 가디언은 킵이 가리킨 남쪽 길로 헐레벌떡 멀어져갔다. 아메스의 추적장치를 챙겨든 킵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잔뜩 의식하며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킵과 가디언을 따돌리고 시녀장과도 헤어진 아메스는 망토로 얼굴을 잔뜩 가리고는 혼자서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걷고 있었다. 수많은 축제 인파로 가득한 먹자골목을 빠져나온 그는 익숙한 걸음으로 좁은 뒷골목에 재빨리 접어들었다. 사람 한두 명이 어깨를 맞대고 겨우 지날 수 있음직한 좁은 골목 양쪽으로는 싸구려 술집과 여인숙, 접대부들이 서 있는 음란 업소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혼자 왔어? 잘생긴 남자들 많으니까 방하고 세트로 금액 맞춰 줄게. 물론 여자도 있어.”

접객업소 앞을 지키고 앉은 포주가 히죽거리며 말을 건넸지만 굳은 얼굴의 아메스는 못 들은 척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바깥의 축제장에서 눈이 맞은 남녀들이 2차와 3차를 해결하는 곳이다보니 이곳도 바깥 못지않게 발 디딜 큼 없이 북적거렸고, 여인숙들은 하나같이 ‘방 없음’이라는 팻말을 달고 있었다. 심지어 성질 급한 커플들은 사람 눈이 덜 닿는 구석구석을 이미 차지하고 끓는 본능을 해소하고 있었다.

미로 같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간 아메스는 다른 곳처럼 ‘방 없음’이라고 써 있는 허름한 여인숙에 휙 들어섰다. 주인이 다짜고짜 들어서는 아메스에게 짜증을 냈다.

“눈도 없어요? 오늘은 빈방 없어요.”

“어제 ‘준’이라는 이름으로 예약했어. 찾아봐.”

그제야 눈이 커진 주인이 얼른 장부를 확인했다.

“아아, 2시간 예약하신 분이군요. 혼자세요? 원하시면 괜찮은 것들 불러드릴 수도…….”

“좀 이따가 키 큰 남자 하나 올 테니 방 번호 알려줘.”

아메스는 얼굴을 더 깊숙이 감추고 허겁지겁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이런 싸구려 여인숙에서 일상 같은 광경인지라 주인도 별 관심 두지 않고 자기 하던 일에 열중했다.

삐거덕거리는 낡은 계단을 뛰어오른 아메스는 작은 방들이 벌집처럼 엉켜 있는 복도를 재빨리 지나 키에 써 있는 객실을 열고 들어섰다.

“후.”

문을 닫은 아메스는 비로소 문에 기대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맘이 놓이면서 방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나름 좋은 방이라고 예약한 것이지만 어차피 여인숙 수준에서 방은 뻔했다. 싸구려 벽지는 군데군데 뜯겨나가 있었고 골목이 내다보이는 작은 창 하나에 안이 거의 들여다보이는 샤워부스와 세면대, 철제 프레임이 달린 더블침대가 전부였다.

창에 다가간 아메스는 얼른 커튼부터 치고는 틈새를 약간 열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좁은 골목을 헤치며 다가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커튼에서 물러선 그는 망토를 벗고 세면대의 찬물에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았다. 이곳까지 바쁘게 달려오느라 붉게 달아올라있는 젊고 화사한 아가씨의 얼굴이 보였다. 나름 원숙해졌다지만 여전히 앳티가 남은 소녀같은 얼굴은 누구도 제국 황후라는 사실을 떠올릴 인상은 아니었다.

잠시 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메스는 손의 물기를 털고 침착하게 나아가 문을 열었다.

“일찍 따라왔네.”

남자를 들여보내 준 아메스는 얼른 문을 잠갔다. 남자가 차가워진 아메스의 손을 잡아주며 긴장한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씌웠다.

“오늘은 데려온 놈이 말을 잘 듣더군요.”

킵이 아메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품에 안아주려 했지만 아메스는 차갑게 그를 밀어내며 품에서 빠져나갔다.

“샤워 좀 하고 나와야겠어. 아까부터 씻고 싶어 미칠 것 같았어.”

아메스는 급히 킵에게서 떨어져 샤워부스로 들어가 버렸다. 킵은 반투명한 샤워부스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황후의 알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십여 분 후, 유모가 그리도 말리던 샤워를 소원대로 끝낸 아메스가 가운 하나만 걸치고 나왔다. 킵은 그때까지도 평소 가디언들의 습관처럼 구석에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제가 뭐 잘못이라도……,”

킵이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아냐. 그냥 내 기분 탓이야.”

아메스는 여전히 킵의 얼굴을 외면하며 가방에서 향유를 꺼내어 얼굴과 목에 대충 발랐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야무지고 기품이 깃든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는 문득 귀 밑의 상급귀족문을 더듬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예?”

“난 어릴 때부터 상급귀족과 종손의 의무를 배우면서 자랐어. 황실학교부터 남극성당 박사과정까지 모조리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몸에 결함도 없지. 남극성당에 있을 땐 인기도 좋았어. 한 달에도 몇 번씩은 괜찮은 상급귀족가 귀공자들이 데이트를 청했었거든. 황후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명문가 출신 남편 서넛을 데리고 맘껏 즐기며 살았겠지?”

아메스는 얼굴을 더듬으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가 학교라곤 문턱에도 못 가봤고, 동굴에서 사람고기 뜯어먹으며 짐승처럼 자라 우리 집 가디언으로 굽신거렸던 사람을 나중에 황후가 될 기대 하나로 택했지. 내 눈에 뭐가 씌었던 걸까?”

“…….”

“내가 9살 때였나? 아버지가 그 사람이 말대꾸를 했다면서 사랑채 마당에서 끔찍하게 채찍질을 했었지. 어린 맘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저녁까지 밥도 못 먹고 엉엉 울었어. 그 사람 등이 갈가리 찢어져서 꼭 사냥당한 짐승마냥 형틀에 매달려 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그 뒤로 그 사람도 아버지한테 덤비지 않더군. 끔찍한 기억이었지만 아랫사람은 그렇게 다뤄야 한다는 걸 확실하게 배웠지.”

“그땐 마리안 마님 때문에…….”

킵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메스가 한숨을 내쉬며 결혼반지가 있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황제 등엔 아직도 그때 흉터가 남아있어. 그래도 황후가 될 수만 있다면 신분 따위 잊어버리고 간이든 쓸개든 다 빼줄 수 있을 것 같았지. 그런데 막상 닥쳐보니 안 되는 거야. 그렇게 짐승 취급받던 사람을 이제와 황제랍시고 떠받드는 게 모멸감이 들어 미치겠는걸.”

“그래도 황상께선 하렘도 앞장서 폐쇄하셨을 만큼 가족을 아끼시고…….”

“가족을 아껴? 얼마 살지도 못할 걸 빤히 알면서도 끝까지 키우지도 못할 자식, 그것도 온전치도 못한 애들을 싸질러만 놓겠다는 사람이? 안 돼, 더 이상 내 자식이 부모 잘못 만나 죽는 꼴은 못 봐.”

본심이 나오면서 말이 점점 격해지던 아메스는 결국 한숨과 함께 일단 말을 끊었다.

“곧 치료될 거라는 말만 30년 넘게 믿고 살았지만 이젠 나도 지쳤어. 극복해 내면 좋지만 아닐 때도 미리 준비해야지. 다른 비빈들처럼 보약이나 찾으러 다니면서 미련하게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게 능사는 아냐. 내겐 다른 문제도 있으니까.”

아메스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킵을 돌아보았다.

“황제가 죽으면 난 황태후가 되고 재혼도 할 수 없게 돼. 그 말은 아이도 못 낳는다는 뜻이야. 하지만 난 자이센 가와 로퍼크 가의 종손이고, 그 두 가문에도 후계자가 필요해. 황제만 후손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

“황가와 카파키 가야 어차피 황제의 가문이니까 결함을 물려줘도 자기네 운명이지만 내가 종손인 자이센 가하고 로퍼크 가는 무슨 죄야? 따지고 보면 내 두 가문엔 황제의 피는 굳이 필요 없잖아?”

아메스는 누군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말을 꺼내며 가운의 벨트를 천천히 끌렀다.

“아버지가 아무리 황제 닮은 손녀를 원하셔도 그건 아냐. 피를 더럽히는 건 후손들한테 죄를 짓는 거야.”

아메스는 갓 목욕을 끝낸 자신의 매끄러운 살결을 더듬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병든 황제 놔두고 이런 생각 하는 게 철없고 매정하게 보이리라는 건 알아. 나도 황제와 함께하면 행복하고 든든한 걸 보니 사랑하고 있긴 한가봐.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아닌 건 아닌 거야.”

아메스가 고개를 숙인 채 구석에 서 있는 킵을 다시 돌아보았다. 옅은 갈색 머리칼에 갈색 눈,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 또렷하고 잘생긴 미남 가디언이었다. 황제와 인종도 비슷했고 가디언 중에선 드물게 호리호리하고 귀공자같은 외모에 머리도 똑똑한, 가디언만 아니라면 훌륭한 정자를 제공할 아버지감으로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것도 황제 체면을 위한 거야. 황제 이름으로 우리 가문에 건강한 종손을 남기려면 나도 이 수밖에 없어.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너도 이젠 나 잊고 이번에 복원한 거 빨리 없애. 널 좋아해서 이런 것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고.”

아메스는 보란 듯 흰 가운을 벗어 내렸다. 그동안 황제 하나만을 위해 가꾸어 온 뽀얀 살결과 고운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며칠간 맞은 배란촉진제 때문인지 자그맣던 젖가슴도 훨씬 커져 있었다.

“오늘 밤을 넘기면 기회는 끝나. 곧 황제가 돌아오거든.”

아메스가 커진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난번 했던 대로만 하면 돼. 바보같이 가슴에 흔적 남긴 것만 빼고.”

“황상께선 대단히 민감하십니다. 체취가 변하면 바로 눈치 채실 겁니다.”

“나도 알아 봤어, 체취가 달라지는 건 길어야 4, 5일이야. 제국회의까지는 4일 남았어. 첫날 내 침소에 오면 인공수정 때문에 며칠 잠자리를 피하겠다고 내보내면 돼. 아이 핑계대면 며칠은 군말 없이 다른 비빈들한테 갈 거야.”

“딸이 아니고 아들이 태어나거나 혹 유전자검사라도 하시면…….”

“엘룬 때도 아들로 알았다가 딸을 가져서 놀란 일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겠지. 모렌 박사도 죽었으니 가디언 핏줄이고 대충 비슷하게 생기면 자기 아이라고 믿을 거야. 지금까지 태어난 아이들도 한 번도 검사 안 했어.”

아메스는 속옷까지 모두 벗어 내려놓으며 킵에게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임신할 준비가 모두 끝난 아메스의 몸은 어느 때보다 육감적인 향기를 뿜고 있었다. 아메스가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구석으로 돌리며 침대에 먼저 누웠다.

“오늘은 네가 해. 빨리 끝내면 좋겠어.”

머뭇거리던 킵이 결국 침대 위로 조심스레 올라 아메스에게 몸을 기울였다. 꽉 다물고 있던 아메스의 입술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잠깐. 잠깐만.”

아메스가 난데없이 킵을 살짝 밀어냈다.

“예?”

정신을 차린 킵이 그의 가슴 위에서 얼른 내려갔다.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아냐, 아냐. 너 잘못한 거 없어.”

아메스가 다리를 잔뜩 오므리며 담요로 얼른 몸을 가리고 침대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냥 잠깐 생각 좀 더 하려고.”

아메스가 머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황제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공주를 가지려 거의 한 달을 차근차근 진행해 온 계획이 이제 거의 완성되려는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 떠오른 아들 카이와 황제의 모습에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5분만, 딱 5분만 이따가 하자.”

아메스가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10분…… 아니, 20분만 기다려 봐.”

먹자골목에서 아메스와 헤어진 황후전 시녀장은 혼자서 사람들 사이를 바삐 걷고 있었다. 황후는 혼자 놀고 싶다며 그를 떼어놓고 어딘가로 가 버렸지만 그가 정말로 ‘혼자 놀 생각’이 아니라는 건 어차피 뻔할 뻔자였다. 아메스가 누구와 함께 누워있을지 정말로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황후의 뒤를 밟아서 30년간 쌓아 온 신뢰를 위험에 빠뜨릴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임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그는 망토로 얼굴을 잔뜩 가리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어떤 놈이지?”

시녀장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두꺼운 망토를 뒤집어쓰고 키위 한 알을 든 채 뒤를 계속 알짱거리는 한 남자가 유독 신경에 거슬렸다. 사실 자신도 얼굴을 가렸기는 매한가지지만 대놓고 여자를 구하려 다니는 놈이 얼굴을 온통 가렸다는 것이 영 신경에 쓰였다.

“이봐요.”

시녀장이 대놓고 남자를 불렀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남자는 키위를 쥐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싱거운 놈 같으니.”

남자를 떨군 시녀장은 큰길을 건너 한참 댄스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남쪽 광장에 접어들었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긴장한 그는 품에 지닌 캡슐을 슬쩍 손으로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황제의 세포가 든 캡슐은 여전히 그의 품 안에 있었다.

“빨리, 빨리.”

시녀장은 걸음을 재촉했다. 황실의 보안표식이 되어 있는 이 캡슐을 오래 갖고 있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황실의 최고 보안표식은 특수한 격리함에 넣지 않는 한 추적 장치에 잡히도록 되어 있었다. 누군가 황실 보안코드를 잡아내는 장치를 갖고 쫓는다면, 그때 이것을 갖고 있다가 잡힌다면 고문실과 처형장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는 단 1분이라도 빨리 이것을 그의 진짜 주인에게 넘기려 몸이 달아 있었다.

그때, 웬 덩치 큰 여자 농부 하나가 옆을 지나며 그를 곁눈질하는 모습에 시녀장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 농부는 별 관심도 없는 듯 사람들 사이로 쓰윽 사라져버렸다.

“별 게 다 신경 쓰이네.”

시녀장은 댄스파티장 구석에서 폭죽을 놓고 있는 떠돌이 잡화상 쪽으로 다가갔다. 제국 각지의 이런저런 행사장마다 떠돌며 폭죽이나 축제용 전등 같은 것들을 공급하고 다니는 흔한 장사치였다. 제국의 웬만한 큰 행사가 있는 곳에는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였다.

그 상인은 시녀장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천막 뒤편의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움직였다. 시녀장도 아무 말 없이 그가 가는 곳을 따라 움직였다.

“여기.”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시녀장은 아무 언급도 없이 캡슐을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그 상인도 두말없이 캡슐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둘은 아무 일도 없던 양 갈라져 서로 갈 길로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상인과 헤어져 몇 발짝을 걸어가던 시녀장은 뒤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척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엇.”

시녀장의 어깨가 들썩했다. 방금 캡슐을 건넨 상인이 뒷목에 칼이 꽂힌 채 맥없이 자리에 주저앉고 있었다. 그 순간 시녀장과 살인자의 눈이 정확히 딱 마주쳤다. 방금 전 그의 옆을 스쳤던 덩치 큰 여자 농부였다.

“가증스런 년, 황상의 세포를 빼돌려?”

그 여자는 눈 깜짝할 새 석궁을 꺼내 시녀장를 겨누었다. 황실이나 제후측 요원들이 주로 쓰는 암살용 석궁이었다.

“이런.”

바싹 얼어붙은 시녀장이 끝장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를 겨누고 있던 여자 농부의 목에서 붉은 피가 퍽 터져 나왔다. 급소에 치명상을 입은 그 여자 요원은 비명도 못 지른 채 방금 자신이 죽인 상인의 옆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으익.”

누군가 암살용 석궁을 감추며 천막 뒤에서 쓰윽 나타났다. 워낙 어두워서 인상착의는 잘 구분되지 않았지만 처음에 그의 뒤를 밟았던 키위를 든 사내 같았다. 남자는 쓰러진 여자 농부의 시체에서 통신기기를 찾아 확인하고는 상인의 시체를 뒤져 황제의 세포가 든 캡슐을 재빨리 챙겼다.

“아직 연락한 것 같지는 않소. 내가 뒷처리할 테니 빨리 가시오.”

남자의 손짓에 시녀장이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언가 일이 복잡하게 꼬이긴 했지만 어쨌든 캡슐은 그가 원하는 쪽으로 가게 된 듯 보였다. 십년감수한 시녀장은 허겁지겁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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