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58 회: 파트10. 그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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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스가 친정으로 떠나버린 그날 저녁, 내명부의 큰 어른이 된 네페티는 전장에서 돌아온 베아트릭스를 환영해 준다는 핑계로 다른 비빈들을 모두 황비전에 불러 모아 작은 가족 만찬 자리를 가졌다. 잔정 없고 질투도 심한 아메스 황후가 주인으로 있는 동안에는 상상도 못 했을 자리였다.
“내명부 큰 주인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니 분위기가 썰렁하지만.”
만삭으로 몸이 무거운 귀인 에스더를 직접 부축해 안쪽의 제일 크고 푹신한 상석에 앉혀 준 네페티는 다른 비빈들처럼 원탁의 보통 자리에 앉아 그들의 접시에 직접 음식을 담아 내주었다.
“내일이면 황태후께서도 돌아오시고 내명부에 다시 잔소리할 윗분들이 버글거릴 테니 간만에 우리 비빈(妃嬪)들끼리 윗어른들이나 ‘그분’ 잘근잘근 씹어드리는 자리 한 번 마련해도 좋을 것 같아서.”
솔과 에스더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진지한 베아트릭스는 ‘황제를 씹는다’는 말이 불만인지 뚱한 얼굴이었다. 네페티가 못 본 척 혼자 말을 이었다.
“궁을 비우신지 한 달째인데 비빈들에게까지 잘 있냐는 안부 한 마디 없으신 건 밤새 신나게 씹히셔도 할 말 없으실걸. 베티 황빈. 그 양반 오늘 밤 주무시다 말고 귀가 간지러워 후비고 계실 거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나?”
오늘따라 유난히 화려한 히잡을 두른 네페티가 비빈들 중 제일 덩치가 큰 대장군 베아트릭스의 앞에 두 번째로 큰 양갈비를 놓아주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근데 그게요.”
주변 눈치를 슬금슬금 보던 에스더가 불룩한 배를 만지며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그분께서 보안국 사람 시켜 이걸 보내셨는데요.”
에스더가 화려한 보석병에 담긴 작은 향유병을 내보였다.
“임산부 배의 튼살에 특효약이라고 편지에 있던데요. 아주 특별한 데서 나는 귀한 향유라고…….”
“뭐야.”
에스더가 내보인 병에 갈비 접시를 든 네페티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하여간, 임신이 벼슬이라니까. 그럼 자넨 빠지게나.”
네페티가 에스더의 앞에 제일 큰 양갈비 덩이를 놓아주었다. 뒤이어 솔이 허리춤에 매고 있던 황금빛 호박 장식품을 슬그머니 꺼내보였다.
“저어, 이거 저한테만 주는 거니까 아무한테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적혀있어서…….”
“엥?”
솔이 내놓은 장식품을 본 베아트릭스가 화려하게 수공된 아라무트산 단검을 허리에서 풀어 식탁 위에 턱 올려놓았다.
“내 참, 그 분 이러셨을 줄 알았다니까.”
그 셋이 내놓은 물건들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던 네페티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거 왜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지?”
낙담한 네페티의 표정에 당황한 다른 비빈들이 얼른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베아트릭스가 ‘그걸 왜 말했어.’라며 에스더에게 급히 수화를 했고, 솔은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만 긁적거리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그분께서 황비 전하를 잊으셨을 리가 있나요, 아마도…….”
“난 또 나만 받은 줄 알았잖아.”
네페티가 버럭 짜증을 내며 섬세한 보석 자수가 놓인 화려한 히잡을 풀어 식탁 옆에 휙 내려놓았다. 잠시 긴장했던 만찬자리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에스더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보나마나 황후께도 뭐 보내셨겠죠?”
“안 보내셨으면 그 양반이 아니지. 그럼 그 양반 오늘밤은 일단 용서해 드려야겠네. 난 이제 알 바 없으니 오늘 선물 받은 건 나중에 자네들이 알아서 침대에서나 고마워해 드리게나.”
네페티의 말에 이번엔 에스더가 배를 만지작거리며 아주아주 심각하게 물었다.
“근데 침대에서 어떻게 고마워해 드릴까요?”
에스더의 노골적인 물음에 네페티와 솔이 웃음을 못 참고 뒤로 자지러졌고, 진지한 베아트릭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페티가 웃음을 추스르며 목에 냅킨을 걸었다.
“에스더 자넨 조만간 힘들게 아기 낳을 테니 지금 고마워해 드릴 필요까지는 없겠군. 그거 아나? 내 선배로서 조언하는데, 애 낳을 땐 그 양반 물어뜯고 할퀴고 때리고 그동안 묵은 감정 있는 거 몰아서 확 다 날려버려. 세상에 제국 황제를 맘 놓고 두들겨 팰 수 있는 기회가 어디 자주 오는 줄 아나?”
“황비께선 대군 낳을 때 정말 그러셨어요?”
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페티가 과일을 씹으며 장난스레 대답했다.
“출산할 때 자네들도 그분이 안아주지 않으셨나? 근데 마하 머리 나오려고 할 때 너무너무 아픈 게 힘내라는 말까지 징그러울 정도로 얄밉게 들리지 뭔가. 그래서 신나게 때리고 꼬집고 팔뚝도 막 물어뜯었지. 그 양반 산모 앞에서 아프다 내색도 못 하고 눈물만 찔끔거리면서 다 맞아주시는 걸 보니까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던걸.”
네페티가 보란 듯 양갈비를 한 입 물어뜯어 보이자 발끈한 베아트릭스가 일순간 폭발 직전까지 갔다.
“그분만큼 배려해주시는 분이 또 계시던가요! 아픈 몸으로 그렇게 곁을 지켜주신 분께 감동하지는 못해도 세상에…….”
베아트릭스가 흥분하고 있는 같은 때, 순진한 솔의 눈은 놀라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이요? 그래서 정말로 속이 시원하셨어요?”
“당연히 농담이지 시원하긴 뭐가 시원해.”
네페티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자리가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분 아랫사람들 앞에선 탯줄 자르다가 가위에 찝혔다고 둘러대시는데 옆에서 듣기 민망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던걸.”
“가위요?”
에스더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되물었다.
“아니,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상께서 가위를 잘못 쓰셨다니 그런 순 엉터리 변명이 어디 있대요?”
네페티가 빵을 씹으며 싱글벙글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그 양반도 가끔은 어처구니없이 허술한 때가 있으시다니까. 그럴 때마다 정말 너무너무 예뻐서 깨물어드리고 싶지 뭔가.”
“황비께서 그분 좋아하시는 걸 너무 잘 아시니 저희가 항상 쫄리잖아요. 알려주지도 않으시고.”
에스더가 짐짓 삐진 듯 투덜거리자 솔이 냉큼 받았다.
“그건 맞아요.”
죽이 착착 맞아 떠드는 네페티와 에스더, 그 둘의 대화에 넋이 팔려 맞장구만 치는 순진한 솔, 그리고 안 듣는 척 뚱해진 얼굴이면서도 귀는 잔뜩 기울이고 있는 베아트릭스의 나름 오붓한 만찬시간이 계속되었다.
“알려주긴 뭘? 듣자하니 베아트릭스 황빈은 애무보다는 스트레이트를 좋아하고 솔 황빈은 가슴에 키스만 받아도 천국으로 유체이탈한다니까 알고 말고 할 필요도 없을걸. 뭐, 에스더 자넨 임신 중이니 좀 참아.”
얼굴이 빨개진 두 황빈에게 네페티가 눈웃음을 지으며 망고주스를 부어주었다. 난처해진 베아트릭스가 상기된 얼굴을 추슬르며 대꾸했다.
“황후께서 들으면 섭하시겠어요.”
“그분? 걱정 말게, 하나도 안 섭하실 테니.”
베아트릭스의 표정이 막 굳어지려는 찰나, 옆에 있던 에스더가 장난스런 말로 얼른 분위기를 추슬렀다.
“황비께선 깨무는 것보다는 그 반대를 훨씬 더 좋아하신다던데, 제가 잘못 들었나봐요.”
“풋.”
네페티가 갑자기 터진 웃음보 때문에 하마터면 주스를 엎을 뻔했다.
“이거야, 원 방정맞은 시녀들 입단속 좀 시켜야지.”
분위기가 한참 화기애애한 그때, 네페티의 시녀장이 소리 없이 슬그머니 들어와 주인의 뒤에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황비 전하, 잠깐만…….”
시녀장을 슬쩍 흘겨보았던 네페티는 함께 식사하던 비빈들에게 가볍게 웃음을 보이고는 황제에게서 선물받은 히잡을 챙겨 방을 나섰다.
“당연히 비빈들의 만찬에 끼어들만한 사안이겠지?”
복도에 나선 네페티가 얼굴 위에 황제에게서 받은 히잡을 휙 두르며 냉담하게 물었다.
“황후를 쫓던 티사가 죽었습니다.”
네페티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지만 이번에 그의 얼굴을 가린 히잡 안쪽으로 아무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3번 도시의 축제장에서 황후의 시녀장을 쫓고 있다는 게 마지막 메시지였습니다.”
“황후가 아니고 왜 그 여자를?”
“유전자은행 최고 보안물품 코드를 추적했는데 황후가 아니고 그 여자에게서 잡혔다고 합니다. 그래서 추적을 명했는데 파티장 한쪽에서 웬 잡화상의 시체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정황을 보아 그자를 죽이던 중 한패거리에게 기습당한 것 같습니다. 전문가 솜씨입니다.”
시녀장은 소매깃 사이로 보이는 네페티의 작고 고운 주먹에 순간 힘줄이 확 뻗치는 것을 보았다.
“티사가 생각 없이 사람을 죽일 리 없어. 죽은 잡화상도 뭔가 있겠지?”
“조사 중입니다.”
“문제의 ‘보안물품’은?”
“찾지 못했습니다. 인근에서 추적이 안 되는 걸 보아 특별한 장치에 넣어 신호를 완전 차단한 것 같습니다. 그 여자가 어딘가로 넘긴 것 같습니다.”
한참을 무언가 생각하던 네페티가 다시 만찬이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섰다.
“황후가 무덤을 제대로 파고 있군.”
“…….”
“그 세포가 어디로 갔는지, 누구 손에 들어갔는지 반드시 알아내라.”
네페티는 이 한 마디만 남기고는 다시 만찬장으로 휙 돌아섰다.
“그것만 입수하면 황후를…… 아니, 자이센 가를 끝장낼 수 있을 테니.”
20분을 기다려 달라던 아메스는 1시간이 넘어갈 때까지도 침대 구석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방 한편에서는 킵의 할룩스가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침대 반대편에 걸터앉아 있던 킵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아메스의 눈치를 보았다.
“뭐 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아메스는 한참만에 고개를 들고 할룩스를 받으라고 눈짓해 보였다. 킵은 그제야 얼른 일어나 할룩스를 받아들었다. 그는 ‘그런데?’ 와 ‘알았다.’만을 몇 번 연발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는 할룩스를 끊고는 다시 아메스를 돌아보았다.
“도시 남쪽 행사장에서 살인사건이 난 모양입니다.”
“근데? ……우리랑은 관계 없잖아?”
아메스는 자신의 벗은 몸을 보며 힘없이 되물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분위기가 험악하니 가문에서 관심 두기 전에 일찍 들어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빨리…….”
“아냐, 됐어.”
아메스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고는 굳은 표정으로 침대에서 내려서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아무리 황제가 밉고 야속해도 도저히 킵의 아이를 임신할 수는 없었다.
그의 모습에 체념한 킵도 결국 수확 없이 도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북동쪽 공연장에서 제가 찾은 것으로 하고 아까 먹자골목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걱정 마십시오.”
“알아. 무서워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 난 정리하고 나갈 테니 넌 먼저 나가 있어.”
킵을 먼저 내보낸 아메스는 헝클어진 머리와 옷 매무새도 대충 정리하고 다시 망토로 머리끝까지 푹 가렸다. 그리고는 들어왔을 때처럼 허름한 복도와 계단을 지나 여인숙을 나섰다. 결국 그의 계획은 이렇게 막판에 망가지고 말았다.
여전히 북적거리는 여인숙 앞 골목에서 킵이 그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아메스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앞장서는 킵은 우울해 보이는 그의 눈치를 몇 번이나 살폈다.
“제가 뭐 잘못한 게 있습니까?”
“그런 거 아냐, 괜찮으니까 계속 가.”
입으로는 그러면서도 아메스의 맘은 내내 무거웠다. 나름 고심에 고심을 거쳐 내린 결단이었지만 지금 남은 건 허탈함과 공포뿐이었다.
오늘 일도 일이지만 얼마 전, 페스트의 토벌전 출정을 코앞에 두고 있던 킵과 시내의 호텔에서 관계를 가졌던 건 변명할 여지도 없는 외도였다. 그때는 킵의 복원이 제대로 되었는지, 아버지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한다는 핑계를 대며 충동적으로 그를 안은 것이었지만 곧 황제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아랫배 속에 칼이라도 품은 듯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늦었어, 이 바보야.’
아메스가 이제와 후회하고 있는 스스로를 몇 번이나 꾸짖었다. 하지만 머릿속엔 계속 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고를 치고, 말썽을 피우고, 후회하고, 황제에게 용서를 받는 일이 반복되었지만 이번 일은 지나간 ‘말썽’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제아무리 너그러운 황제라 해도 이번 일까지 용서할 리는 없었다. 그 걱정을 이 순간에 와서야 처음 했다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한심했다. 비록 이번엔 킵의 아이를 안 가졌어도 그는 이미 폐위감에 해당하는 큰 죄를 저지른 후였다.
‘내가 미쳤던 게 분명해.’
킵과 한 침대에 누울 때만 해도 황제가 밉고 그의 핏줄이 저주스러웠지만 막상 황제가 아닌 다른 이의 일부를 몸 안에 품고 보니 밀려드는 죄책감에 미칠 것 같았었다. 그날의 기억이 계속 머릿속을 괴롭혀 오늘은 도저히 몸을 열어줄 수가 없었다.
‘왜 그랬니, 아메스, 이 바보야.’
아메스는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황후전 침대 반대편에서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주며 씁쓸하게 웃고 있던 황제의 모습이, ‘너 같은 괴물의 자식을 갖는 게 아니었는데.’라며 멱살을 잡고 울부짖던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눈물만 글썽이던 무지개빛 눈동자가, 딸의 시체 앞에 주저앉아버린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든든하던 품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킵이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아메스는 넋 나간 사람마냥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킵은 분명 좋은 남자였다. 며칠 전에도 그는 황후를 만족시켜주려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아메스는 내내 기계적으로 흥분하고 동물적으로 반응했고, 끝난 후에 남은 건 허탈감뿐이었다. 황제의 품에서처럼 푸근하지도 않았고. 온몸을 저리게 하는 짜릿함도 얻지 못했다. 사랑을 나누고 난 후 황제의 살내음을 맡으며 느끼던 진한 만족감과 기분 좋은 나른함도 없었다.
‘병신.’
아메스는 다른 이의 품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황제의 품이 얼마나 따뜻했는지를 느낀 한심한 자신을 욕했다. 어쨌든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둘은 어느새 처음 헤어졌던 먹자골목에 돌아와 있었다. 그곳엔 남쪽 댄스파티장에서 돌아온 신참 가디언과 창백해진 표정의 시녀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넨 표정이 왜 그런가?”
아메스가 억지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지만 시녀장은 별일 없다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가디언들에게 물러서라고 손짓한 아메스가 시녀장에게 바싹 다가서서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준 그거……어떻게 했지? 아직 갖고 있어?”
아메스는 이런 질문을 하는 스스로가 가증스러워졌다. 그는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어 다시 물었다.
“혹시 아직 안 버렸다면…….”
“명하신대로 처리했습니다. 골목 밖에 음식 쓰레기 소각로가 있길래 그곳에 넣어버렸습니다.”
“쓰레기……소각로에?”
황제의 소중한 딸 세포가 쓰레기와 함께 타 버렸다는 대답에 순간 말문이 막힌 아메스는 힘없이 표정을 추스르며 돌아섰다.
“수고했다.”
아메스는 주머니에서 분홍색 리본을 꺼내들었다. 캡슐 위에 매어져 있던 그 리본 위에는 아이를 꼭 지켜주겠다는 황제의 친필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것 봐, 내가 못 지킨다고 했지.’
아메스는 조용히 골목 밖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은 어느 날보다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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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파 민병대의 일원이 된 오르마즈는 판지셰르의 병영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진짜 민병대 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숫자만 많지 제대로 된 숙영지도, 체계도 없던 강경파 군벌 때와는 달리 민병대 본부인 판지셰르의 거대한 병영은 사람들이 아는 ‘진짜 군부대’의 모습이었다. 이곳 병영과 주변 일대엔 교단의 정교일치 정책에 거부하고 모여든 1만 가까운 넘는 민병대원들과 그에 육박하는 가족, 민간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고, 지도자 파냐드를 중심으로 하는 지휘체계도 확실했다.
물론 이곳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부대별로 나뉘어 날카로운 세 싸움을 벌이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 양쪽은 서로의 영역과 주장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조금은 불안한 공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오르는 군번과 군복도 받았고, 아직 제대로 쓸 줄은 모르지만 무기와 장비도 받아 최소한 겉보기로는 그럴싸한 한 명의 군인이 되었다. 오르마즈야 신체 조건만으로는 전투병과로 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12살만 넘으면 무조건 무기를 쥐어주는 강경파 민병대와는 달리 온건파 민병대에서는 성인이 아니면 아예 받아주지도 않았고, 그나마 20살이 되지 않은 젊은 신병들은 2, 3일에 한 번 정도만 가벼운 훈련을 받고 나머지 시간은 내내 잡일만 시키는 것이 규칙이었다.
16살의 오르마즈가 맡은 일도 비슷한 또래인 5세대 젊은 X들이 훈련받는 훈련소에서 청소와 취사보조를 하는 것이었다.
아직 세상물정 잘 모르는 오르에게 X들은 퍽이나 신기한 존재들이었다. 온건파 민병대의 주력군인 이 X들은 여자는 없이 남자뿐이었고, 일반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하고 빨라서 교단의 웬만한 헤네티들도 상대를 할 수가 없었다. 온건파 민병대가 콜로니 수도인 아케메니아 북쪽의 판지셰르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데도 교단이 함부로 공격을 시도하지 못하는 건 X 때문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들은 따로 부모도 없이 병영에서 자라 8살이면 군사훈련을 시작해 20살 무렵이면 곧바로 사관 계급장을 달았다. 그리고 적당히 경력을 쌓으면 십여 명의 보통 병사로 구성된 자신만의 분대를 이끄는 리더가 되어 모든 작전에서 가장 앞장서 달려 나가는 선봉을 맡았다.
그 X들 중 오르마즈가 일하는 병영의 5세대 X들은 가장 젊은 축에 속했다. 그들은 나이가 많아 봤자 20대의 현직 사관들이었고, 상당수는 아직 임관도 못 한 오르마즈 또래의 소년 생도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형제’라 부르며 엄격한 상하관계와 동기애로 똘똘 뭉쳐 폐쇄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 외부인들, 심지어 이성조차 바늘 하나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비슷한 또래 여자인 오르마즈가 청소를 하고 있는 도중에도 아무렇지 않게 옷을 훌훌 벗어던졌고 소변보는 모습을 보여도 전혀 부끄러운 기색조차 없었다. 이 잡일꾼 신병은 X 생도들 사이에서 그냥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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