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59화 (954/1,132)

< -- 959 회: 파트10. 그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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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마즈는 그런 목석들과 병영에서 일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워낙 눈에 튀는 외모 덕분에 헤크마 무리에 있을 때에도 소대장이 걸핏하면 찝쩍거리곤 했었고, 온건파에 온 후에도 기분 나쁘게 추파를 던지는 장교나 사관들 때문에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오르마즈가 X 병영에 배치를 받은 것도 토로의 소개장을 받은 병참담당 케레사스 솔로스 중위의 배려였다. 워낙 고지식하고 의무에 집착하기로는 토로와 형 아우를 다투게 생긴 사내라 자신이 보호를 맡은 이 16살 소녀가 선임들의 음흉한 눈길 속에 있는 꼴을 보아주지 못했다. 결국 그는 ‘절대 찝쩍거릴 일 없는’ 돌덩이들 사이에 오르를 넣어주었다.

덕분에 생전 제대로 된 훈련 한 번 제대로 받아 본 일 없는 땡보직 신병 오르마즈의 군복엔 주제에 맞지 않는 X부대의 견장까지 달리게 되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 이곳 생활에도 나름 익숙해지면서 가족들과 헤어진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갔지만 외로움과 그리움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위로는 함께 있는 꼬마 와헷이었다. 와헷은 또래보다 키도 크고 말도 잘 듣다보니 장교나 사관들의 관사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환으로 보내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도 오르는 솔로스 중위에게 애원해 부득불 아이까지 X부대 사환으로 데려왔다.

오르가 와헷을 기를 쓰며 데려온 건 나름 이유가 있었다. 민병대에선 전사자가 남긴 고아들을 사환으로 거두어 숙식과 교육을 제공했지만 몇몇 질 나쁜 변태들에게 돌볼 사람 없는 어린 소년소녀들은 손쉬운 표적이었고 설사 망측한 일이 벌어져도 제대로 신고나 증언도 못 하다보니 처벌받는 일도 거의 없었다.

“행보관님 술 갖다드렸어? 여기 앉아.”

볕 좋은 오후의 연병장 구석에 앉아 X들의 훈련을 구경하던 오르는 심부름을 하고 돌아온 꼬마 와헷에게 먹고 있던 비스킷을 내주었다. 과자를 받아든 와헷은 입이 헤벌레해져서 오르마즈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취사실 심부름을 하며 이것저것 잘 주워먹은 덕분인지, 한때 뼈만 남았던 이 꼬마도 몇 달 새 살이 올라 통통해져 있었다.

“우와, 과자다. 어디서 났어?”

“저기서.”

오르가 골짜기 위쪽의 절벽을 가리켰다. 지도자 파냐드의 일가와 민병대 수뇌부가 살고 있는 보안구역이었고, 오르 같은 말단 신병은 갈 일도 없는 곳이었다.

“오늘 지도자 맏아들 생일이라 아침에 잔치 했어. 심부름했더니 남은 거 주더라.”

오르가 과자봉투를 와헷의 손에 쥐어주었다. 영내에선 생전 볼 일 없는 달콤한 과자에 눈이 휘둥그레진 와헷이 이를 드러내고 히이 웃어보였다.

“고마워, 누나야.”

“근데 에르네스토라던가? 그 애하고 아빠 굉장히 착해 보이더라.”

오르가 아침의 생일잔치를 떠올리며 혼자 빙그레 웃었다. 지도자 파냐드에겐 남편이 여럿 있지만 11살의 맏아들 에르네스토는 그냥 딱 봐도 첫째남편 입실론의 핏줄이었다. 나란히 서서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는 두 부자(父子)의 다정한 모습은 아버지라는 존재가 악몽으로 박혀 자란 오르가 보기에는 부러울 정도였다.

오르마즈가 듣기로도 입실론은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 불릴 만큼 민병대 수뇌부에서 사실상 씽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공용어와 바람어, 고대어는 물론이고 수많은 방언에 사람들이 거의 모르는 이상한 언어들까지 구사했고 엔지니어들이나 학자들이 막다른 길에 막혔을 때마다 도움을 청하는 마지막 보루였다.

거기에 호감을 주는 잘생긴 외모, 겸손한 성격에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다정한 아버지라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영내 여자들에겐 말 그대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지도자 파냐드는 이 천재 남편이 ‘자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차단했고, 집안에서 아들 교육만 하도록 사실상 가둬버린 탓에 실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럼 저기 사는 사람들 만난 거야? 어떻게 생겼어?”

와헷이 작은 입에 과자를 한가득 물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뭘, 저기 사는 사람들도 그냥 눈코입 달린 사람이지.”

오르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오늘 아침 오르는 그 ‘멋진 유부남’과 뜻밖에 대화까지 나눌 수 있었다. 잔심부름을 하는 오르를 유심히 지켜보던 입실론은 난데없이 다가와서는 이름과 출신지를 물었고, 타리프의 후손이라는 말에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오르는 자신을 보며 뜬금없이 눈물을 글썽이던 그의 시선에서 무언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을 읽었지만 지도자의 경호원들이 허락도 없이 외부인, 그것도 젊은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그의 모습에 마구 화를 내며 데려가 버려 만남은 그 정도로 끝나고 말았다.

“어, 손가락 보이기 시작하네?”

오르가 와헷의 커다란 소매 끝으로 손가락이 드러난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부대의 X 소년들이 어릴 때 입다 작아져 따로 모아놓은 옷을 주워 입힌 것인데도 일곱 살 꼬마에겐 제법 커서 소매를 아무리 접었어도 그동안은 손이 잘 드러나지를 않았었다. 하지만 솜털 같아야 할 어린아이의 손이 거칠거칠해져 있는 모습은 매번 오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오르가 와헷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솔로스 중위님이 알아봤는데, 네 고향은 테나토 같대. 아들 원하는 집에 팔려고 데려온 것 같다고 하던데 그 이상은 모르겠어.”

철없는 꼬마는 오르 누나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하는 것인지, 오르에게 기대어서 과자만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래서 테나토에 있는 지부로 너 보내달라고 부탁했어. 거기 있다 보면 네 고향하고 엄마아빠도 찾을 수 있을 거야.”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과자만 먹던 꼬마는 테나토로 보낸다는 말에 갑자기 기겁을 하며 울기 시작했다.

“나 안 가, 싫어.”

“엄마아빠 안 보고 싶어?”

“싫어, 안 가. 누나랑 여기 있을래.”

와헷이 자지러지게 울며 오르의 목에 매달렸다.

“왜? 엄마아빠가 너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오르가 달래 주었지만 와헷은 숨까지 깔딱거리며 계속 울었다.

“엄마가 나 50골드 받고 팔았어, 두 번이나 돌아갔는데 또 팔았어, 이젠 안 갈래.”

“니네 엄마아빠가?”

와헷의 등을 두드려주던 오르가 처음 듣는 말에 멈칫했다. 지금까지 고향 이야기를 집요하게 물어도 무조건 모른다며 고개만 젓던 꼬마는 납치되어 온 게 아니고 가난한 부모 손에 팔려서 민병대까지 온 모양이었다. 빈민굴에서 밥만 축내는 어린 자식을 푼돈에 팔아버리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다음에 누나 같은 사람 못 만나면 어떡해. 누나 말 잘 들을게, 시키면 다 할게 나 팔지 마. 응?”

와헷은 상처가 큰지 계속 오르의 목에 얼굴을 부비며 울었다. 오르가 제대로 숨도 못 쉬는 꼬마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누나는 사람 안 팔아, 걱정 마.”

“약속할거지?”

“그래, 약속.”

오르는 와헷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는 다시 옆에 앉혀주었다. 방금 전까지도 자지러지게 울던 와헷은 눈물 콧물로 더러워진 얼굴을 소매로 닦고는 다시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무언가 말 돌릴 거리를 찾던 오르는 멀리 연병장에서 석궁 사격 훈련을 받고 있는 X 소년들을 응시했다. 5세대 X들 중 제일 어린 3천8백, 9백대 아이들이 줄줄이 서서 표적판을 향해 석궁을 쏘는 중이었다. 오르의 동갑내기들이었다.

“불쌍한 3918은 오늘도 얼차려네.”

“또 빨간 머리 형아? 어디?”

와헷은 자기 시력으로는 잘 안 보이는지 눈가를 잔뜩 찡그렸다. 오르가 그의 손을 잡아 연병장 반대편 한참 먼 구석으로 가리켰다.

“저어기, 다리에 물통 걸고 물구나무하고 있잖아.”

“빨간머리 아닌데? 대머리인데 저게 3918 형이야?”

“머리 빡빡 깎았잖아.”

“왜?”

“글쎄, 빨간머리가 싫었나보지.”

오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어린 꼬마에게 저 불쌍한 3918 빨간머리 생도가 왜 오늘 머리를 빡빡 깎았는지, 왜 매일같이 동기와 선배들에게 구박을 당하고 얼차려를 받는지까지 자세히 설명을 해 줄 수는 없었다.

“누나야, 저 형아 넘어졌어, 어떡해.”

와헷이 손으로 다시 빨간머리 생도를 가리켰다. 동기들이 사격훈련을 받는 내내 1시간 가까이를 물구나무서기로 버티고 있던 3918 생도는 결국 손목이 꺾이며 거친 자갈밭 위에 나뒹굴고 말았다. 오르도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이고, 또 일 났네.”

사격 훈련을 감독하던 4세대 교관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무어라 고함을 지르며 쓰러진 소년을 마구 걷어차기 시작했다. 머리에 피가 쏠려 기진맥진한 소년은 코와 입술에서 피를 쏟으며 발길질을 그대로 다 맞고만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두들겨 팬 교관은 피투성이가 된 소년에게 수건을 휙 던지고는 다시 사대로 돌아가 버렸다.

“저 형아 불쌍해. 맨날 맞기만 하잖아.”

“쉿, 넌 못 본 척 해. 저애들은 자기 말 하는 거 굉장히 싫어해.”

“응, 알았어.”

와헷은 오르가 시키는 대로 웅크려 다시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엉망진창이 된 3918 생도는 비틀비틀 일어나 연병장 구석의 물 항아리로 가서 피 묻은 얼굴을 대충 닦고 있었다. 하지만 눈이 좋은 오르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소년은 얼굴에 물을 바르며 눈물을 감추고 몰래 울고 있었다.

그날 늦은 밤, 생도들도 모두 잠이 들고 난 막사는 지나가는 발소리에도 깜짝 놀랄 만큼 조용했다. 고도가 높은 화산자락에 위치한 판지셰르 골짜기는 1년 내내 차가운 강풍과 간헐천으로 조용한 날이 별로 없었지만 오늘밤은 정말로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늦게까지 설거지와 식자재 정리로 피곤했던 오르는 까치발을 하고 복도를 걸었다. 그가 랜턴이나 램프도 없이 이 한밤중에 어둠을 뚫고 몰래 향하는 곳은 X부대 막사의 구석에 있는 창고, 아니 좋게 말하면 도서실이었다.

까막눈이 대다수인 민병대 병사들에게 최소한의 교육은 시켜야 한다며 수년 전 기증받은 책으로 거창하게 연 곳이었다지만 그런 식으로 시작한 계획들 대부분이 그렇듯 처음 몇 달간만 독서를 장려하며 부산을 떨고는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그리고 책들은 여기저기 영내 창고를 전전하다가 지금은 유일하게 빈 공간이 난 X막사의 구석탱이를 차지하고 먼지만 뒤집어쓴 몰골로 남아있었다.

오르가 공부를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X부대엔 말벗이 될 동료도 마땅히 없다보니 책을 보는 게 아니면 남아도는 시간에 할 일이 없었다. 행정을 맡은 장교와 사관, 부담스런 헌병들이나 민간인 직원들을 빼면 사병은 오르 혼자뿐이었고 심지어 20명이 자는 널찍한 내무반도 오르와 꼬마 와헷 둘만의 차지였다.

외롭긴 해도 혼자 있어서 얻는 이득이 더 많았다. 취침점호도 유선 보고로 대충 때웠고 기상점호만 시간을 맞추면 밤에 이렇게 돌아다녀도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어쨌든, 그의 자리는 영내에서 손꼽히는 천하의 땡보직이었다.

오르마즈는 모퉁이를 돌아 독서실 문고리를 잡았다.

“어?”

이 시간엔 잠겨 있어야 할 문이 열려 있었다. 오르는 달려나가 헌병에 보고할까 고민했지만 생각해 보니 ‘넌 왜 나와 있어?’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아 일단 생각을 접었다. 그는 문을 조심조심 밀고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퀴퀴한 종이냄새가 가득한 창고 안에 분명 사람이 있었다. 책 더미 사이에 쭈그려 앉아있던 누군가가 문 열리는 것을 감지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선명한 초록색 눈이 반짝 빛났다.

“쉿.”

오르가 얼른 입을 가려보였다. 머리를 빡빡 깎고 얼굴에 군데군데 반창고를 붙인 소년이었다. 소년은 낮이었다면 ‘없는 사람’ 취급했을 이 잡일꾼 신병을 이번엔 잔뜩 겁먹고 경계하는 눈치였다. 오르가 3918 생도에게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괜찮아. 나야, 신경 쓰지 마.”

사실 따지고 보면 무서워해야 하는 건 오르 쪽이었다. 상대는 나이만 16살 동갑이지 오르보다 반 뼘이 넘게 큰 6척 반(195cm)의 어마어마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와 등판도 말 그대로 황소만했다. 긴장해서 움켜쥔 주먹은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것이 제대로 맞으면 웬만한 사람은 즉사시키고도 남들 듯 보였다.

그렇지만 상대가 자신을 더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오르는 전혀 기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나도 너처럼 그냥 책 보러 온 거야.”

오르는 소년이 보고 있던 책을 힐끔 보았다. 어린이용 바람어(語) 교재였다.

소년은 책을 얼른 덮으며 처음 입을 열었다.

“잠깐, 너 이런 데서 날 분간할 만큼 앞이 보이는 거야?”

소년의 목소리는 낮에 얼차려를 받으며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잔뜩 쉬어있었다. 오르는 앞에 선 이 소년이 지금까지 본 다른 X소년들보다 눈치가 상당히 빠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너 만큼은 아닐걸, 난 X가 아니잖아.”

오르는 소년이 흩어놓은 책들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그가 앉았던 자리에는 바람어는 물론이고 역사, 철학, 정치학 같은 인문 책들이 쌓여있었다. 이 책들이 정말 소년이 보던 것이라면 놀라운 일이었다. X는 민병대의 핵심 전력이지만 수뇌부까지는 오르지 못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들은 머리가 나쁘고 단순하다는 이유로 싸움과 병법 외에는 따로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렇다보니 승진을 해도 위관급 정도가 한계였고 고급장교 이상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은 일반인의 차지였다.

“유명한 책들은 원문이 바람어라서 뭔가 그냥 본 거야. 다른 이유 없어.”

소년은 묻기도 전에 변명부터 했다. 교단 성직자들만 쓰는 고급언어인 바람어를 공부하고 있던 것이 자칫 오해를 살지 모른다고 판단한 듯했다.

“알아, 누가 뭐래. 계속 봐.”

이번엔 오르가 소년을 없는 사람마냥 무시하며 몇 발짝 떨어진 다른 책무더기로 향했다. 책걸상이 없다보니 책무더기를 적당히 쌓아 의자를 만들고 빈 상자를 책상 대신 그 앞에 놓았다.

“아무리 X라도 램프는 놓고 책 보는 게 좋을 거야. 눈 피곤해.”

오르는 가져간 가스램프를 켜서 둘의 중간쯤에 놓았다. 바람어 교재를 껴안고 잔뜩 경계를 하고 있던 소년은 그제야 쭈뼛거리며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좁은 창고 안에 이렇게 나란히 앉은 것이 꽤나 어색했지만 사실 오르도 혼자서 몰래 책 보는 것보다는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 나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먹을래?”

오르가 주머니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야참으로 가져온 것이었지만 지금은 한 번쯤 선심을 써도 좋을 것 같았다. 소년은 아무 대답도 않고 책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싫어.’라는 말이 안 나오는 것만으로도 오르는 소년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1분 이내로 집겠네.’

오르가 소문으로 듣기에도 이 빨간 머리 3918 소년 생도는 밥도 맘 놓고 먹지 못하는 날이 수두룩했다. 그의 동기와 선배들은 선명한 초록 눈에 붉은 머리칼을 한 이 소년을 ‘불량품’이라 멸시하며 어지간히 들볶고 있었다. 게다가 소년의 코드인 3918번은 X들 중 제일 마지막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X를 만들던 연구원들이 쓰레기통에 던질까말까 고심하다가 막판에 넣은 게 분명하다고까지 비웃곤 했다.

특이한 외모 때문에 가해지는 괴롭힘은 나머지 X들의 결속력만큼이나 집요하고 가혹했다. 선배 교관들은 별의별 핑계로 소년에게 구타와 얼차려를 가했고, 가끔은 몰래 밖으로 끌어내 집단폭행을 가하기도 했었다. 동기들은 소년의 침대에 오줌을 누어 누명을 씌웠고, 식판을 뒤집어엎었고, 구보 중엔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곤 했다.

소년이 오늘 대머리가 된 것도 어젯밤 화장실로 끌려가 선배들에게 머리를 강제로 깎인 탓이었다. 어젯밤도 밤에 몰래 돌아다녔던 오르는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소년의 비명과 교관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쥐 갉아먹은 머리가 되어 알몸으로 추운 연병장에 내던져진 소년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머지 머리칼을 칼로 직접 밀어버리던 것도 몰래 보고 있었다.

앞에 있는 책을 아무 것이나 집어든 오르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필 그가 별 관심이 없는 병법서와 전투무술 교본이었다. 하지만 일단 군대라는 곳에 몸담았으니 조금이라도 알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오르는 옆을 힐끔 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소년이 그가 내민 사과를 슬그머니 집어 소리 안 나게 씹어 먹고 있었다. 오늘 배식 작업을 했던 오르는 소년의 동기가 그의 식판을 엎어 저녁을 굶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오르는 식당에서 집어 온 빵도 소년의 옆에 슬쩍 내려놓고는 못 본 척 처음 집은 병법서와 씨름을 시작했다. 하지만 빤한 내용을 보자니 5분도 지나지 않아 하품부터 나왔다. 그는 책을 내던지고 전투 교본을 집었지만 이건 한 술 더 떠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이런 걸 누가 책을 보고 공부하나? 내참.’

그때, 옆에서 소년이 무언가를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어 교본에 나온 발음을 나름 연습해보는 모양이었다. 엉터리 발음을 듣다 못한 오르마즈가 입을 열었다.

“‘제왕’은 ‘엑사시아’가 아니고 ‘크사야시아’야. 명사 첫머리는 ‘엑사’가 아니고 ‘크스아’로 읽어.”

소년의 눈동자가 반짝 하며 오르 쪽으로 움직였다.

“너 바람어 할 줄 알아?”

“대충.”

소년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휙 돌아앉아 혼자 더 소리를 낮춰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또 막혔는지 머리만 몇 번을 긁적거렸다.

“이맘……아니, 아드함 미그흐파르……. 이맘? 아드함?”

한참을 혼자 궁리하던 소년은 이번엔 먼저 오르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오르가 자기 책을 보고 있는 척 슬쩍 힌트를 주었다.

“‘아드함’은 주격이고 ‘이맘’은 소유격이야. ‘내 갑옷’이라는 뜻이 되려면…….”

“답이 ‘이맘’이라는 건 나도 알아.”

소년의 얼토당토않은 자존심에 오르가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일단 꾹 참고 재미없는 전투무술 교본을 계속 보았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엔 오르가 물었다.

“손을 겨드랑이 사이로 빼서 어깨 관절을 꺾는다는 게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오르의 물음에 소년이 한쪽 팔을 들어 뒤로 비트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렇게. 그리고 뒤에서 세게 밀면 팔이 부러져.”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소년이 오르에게 물었다.

“너 매일 여기에 와?”

“올 수 있는 날은.”

“바람어 알면 다른 것도 할 줄 알겠네. 뭐뭐 공부해 봤어?”

“고대어하고 고등수학하고 고등과학. 엄마가 역사광이라 역사공부는 징글징글하게 했고.”

“그런 애가 왜 이런 데 왔어? 듣자하니 집안도 좋다며?”

흘끗 돌아보는 소년의 초록색 눈동자가 매서웠다. 그동안 겉으로는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도 뒤로는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게 분명했다. 오르가 냉큼 대꾸했다.

“그러는 3918 넌 누가 공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잠이나 자지 뭐 하러 사서 고생하는데?”

둘 사이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이번엔 오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너 바람어랑 고대어 가르쳐줄게. 책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럼 내가 전투무술 배운 거 가르쳐줄게. 그것도 몸으로 익혀야 하는 거니까.”

“됐네, 그럼.”

둘은 아직은 어색하게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어놓은 채 냉담하게 말했다. 펜으로 바람 문자를 꼭꼭 눌러 쓰고 있던 소년이 지나가는 말처럼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3918이 아니고 베흔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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