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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960화 (955/1,132)

< -- 960 회: 파트10. 그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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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을 마치고 자정이 다 되어 처소로 돌아온 황빈 베아트릭스는 황빈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뜻밖의 얼굴에 당황했다.

“웬일이십니까, 장태자 전하.”

황빈전의 입구 옆 으슥한 모퉁이에서 혼자 서성거리고 있는 건 장태자 카이였다. 베아트릭스는 뒤따르는 수행원과 시녀들의 눈치를 살피며 얼른 목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용무가 있으시면 미리 알리시고 수행원들과 함께 오셔야죠. 이건 어디 법도입니까.”

“미안해요,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카이가 억지로 웃었다. 비록 황자라 해도 12살 이후부터는 친모가 아닌 다른 비빈의 처소에 개인적으로 들어가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도 자정 무렵에 장태자가 황빈전 앞을 서성거리는 건 의심을 사고도 남을 행동이었다.

“수행원들은 다 어쩌시고요.”

베아트릭스가 여전히 무서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카이는 어딘지 안절부절 못 하며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들어오세요, 기왕 오셨으니 엘룬도 불러다가 다과라도 함께 하죠.”

무언가 이상한 눈치를 챈 베아트릭스는 장태자를 데리고 일단 안으로 향했다. 일단 딸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카이가 왜 왔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응접실에 앉은 후에도 카이는 여전히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바로 옆에 시녀와 시종, 경호 가디언들까지 함께 있다 보니 두 사람 모두 함부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엄마, 지금 몇 시인데 깨워.”

잠시 후, 자다가 억지로 불려온 엘룬이 반쯤 감긴 눈으로 시녀의 손에 이끌려 나타나 잠투정을 늘어놓았다. 황제를 닮았으면 했던 엄마를 속상하게 만든 딸이었지만 잠버릇 하나는 확실히 황제의 핏줄이었다. 아이는 누구처럼 시도 때도 없이―심지어 지난번 페스트의 전장에서도― 퍼져 자곤 했고, 일단 잠이 들면 시체가 따로 없었다.

“카이 오빠 왔잖아. 인사 안 해?”

“응, 잘 왔어. 울 엄마랑 놀다 가.”

억지로 의자에 앉혀진 엘룬은 바로 과일접시에 코를 박고 또 자기 시작했다. 꿈나라로 떠나기는 했어도 여하튼 딸을 자리에 앉혀 쓸데없는 의심을 차단한 베아트릭스는 비로소 수행원들에게 나가 있으라며 지시 할 수 있었다.

“이 한밤중에 대체 무슨 급한 일로 법도도 무시하고 이렇게 오셨습니까.”

카이와 둘이 남은 베아트릭스가 잠든 딸의 얼굴 밑에 쿠션을 대어주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정말 미안해요. 오늘밤이 아니면 상의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카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황빈한테 이런 거 상의해선 안 된다는 거 알지만 말할 사람이 없어요. 황상께는 절대 안 되고, 그렇다고 국구께 말씀드릴 수도 없고…… 정말 미안해요.”

베아트릭스는 황후 문제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딸이 잘 자고 있는지를 재차 확인하고는 카이를 데리고 응접실 구석의 바(Bar)로 향했다.주스잔을 받아든 카이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비밀 지켜주겠다고 약속해요. 꼭이요. 날 위해서라도요.”

“태자 전하는 제게도 친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베아트릭스가 잔을 든 장태자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카이가 그제야 눈물을 참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다들 만찬에 가셔서 마하하고 마리안 데리고 황비전 마하 공부방에 모여서 주사위 게임하고 놀았어요. 엘룬은 자고 있어서 안 불렀고요.”

“그런데요?”

“중간에 마하가 갑자기 아프다고 쓰러져서 우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 부르려고 나갔는데 다들 연회실에 가 있어서 복도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비상벨 울리면 괜히 어른들 만찬까지 망칠 것 같아서 황비전 시녀장한테 알리려고 그리로 갔어요,”

베아트릭스는 옆에서 쿨쿨 자고 있는 딸 엘룬을 얼른 돌아보았다. 사실 마하가 통증을 호소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점점 회수가 잦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가 불안해하는 것이 마하의 통증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카이가 조심조심 말을 이었다.

“근데 황비전 시녀장이 우리 엄마 시녀하고 몰래 귀엣말을 하고 있는 걸 봤어요. 둘이서 뭔가 주고받고 있더라고요. 절 보고 그렇게 놀라는 건 처음 봤어요. 황후전 시녀는 절 보자마자 놀라서 인사만 하고 도망쳤고 황비전 시녀장은 얼굴이 새하얘졌거든요. 받은 걸 주머니에 막 감추고요.”

“그랬군요.”

베아트릭스가 소년의 손을 만져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정도는 모른 척 넘어가 주세요, 어머님께서 알아서 해결하실 겁니다.”

베아트릭스의 말에 카이가 이해되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소년에게는 놀라운 광경이었겠지만 베아트릭스에겐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비빈들이 황제나 다른 비빈의 시녀들을 매수해 일정과 일거수일투족은 물론이고 어떻게 몸단장을 하는지, 심지어 황제와 어떻게, 몇 번 사랑을 나누었는지까지 빼낸다는 건 어차피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문제로 쫓겨나는 시녀들도 종종 있었지만 역정보에 이용하기 위해 알면서 놔두는 경우가 더 많았다.

베아트릭스에게도 정보원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황제의 건강상태일 뿐 다른 비빈들의 신변잡기 따위엔 무심했다. 카이의 난산과 크낙스의 죽음으로 황후가 황제에게 소홀해지고 가정이 흔들리면서 그동안 의지 하나로 버텨오던 황제의 건강까지도 조금씩 나빠지는 것이 그의 유일한 고민거리였다.

“그게 그리 놀라우셨나요?”

베아트릭스는 놀란 장태자를 안심시켜주려 했지만 카이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요…….”

카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메어오기 시작했다.

“시녀장이 마하 상태 보고 있는데 뒤에서 보니까 주머니가 불룩하더라고요. 죄송해요, 나쁜 짓인 거 알지만…… 엄마 시녀한테서 뭘 받은 건지 너무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처음이었어요.”

장태자가 도둑질을 했다는 말에 베아트릭스가 화들짝 놀랐지만 지금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카이가 내놓은 사진을 본 순간 그의 머릿속이 띵해졌다. 그는 서둘러 사진을 뒤집어버렸다.

“누가 이걸 또 봤죠? 몇 장이나 있었는데요?”

“열댓 장 있었는데 이거 하나밖에 못 꺼냈어요. 너무 놀라서 얼른 주머니에 넣었어요. 아무도 보여줄 수가 없었어요.”

카이가 다시 옷소매로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엄마가 이제 다른 사람 좋아하는 건가요? 혹시 내가 아기 때 엄마 힘들게 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엄마한테 좀 더 잘하면 될까요?”

“설마요.”

베아트릭스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꾹 참으며 사진을 손 안에 슬그머니 감추었다. 그리고는 울고 있는 카이의 어깨를 다정히 안고 다독여 주었다.

“그런 거 아닐 겁니다. 다른 사람 모습이 찍혔을 거예요.”

“근데 이런 걸 왜 엄마 시녀가 황비전 시녀장한테 주냐고요.”

“제가 알아보고 해결할 테니 염려 마세요. 황후께선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시니 믿으시고요. 괜히 오해하기 딱 좋은 사진을 집으신 것뿐이에요.”

베아트릭스는 충격을 받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카이는 그제야 조금 안정을 찾은 듯 그의 품 안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베아트릭스의 맘은 무겁다 못해 찢어질 것 같았다.

“별 일 아닐 겁니다. 제가 알아볼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울고 있는 카이를 일단 달래놓은 베아트릭스는 친정 플라칼 가에서 얻어 온 사슴뿔을 챙겨들고 수행원 하나 없이 혼자 147층 황비전으로 올랐다. 자정이 넘어간 시각이었지만 마하 대군이 또 앓기 시작하면서 황비전 분위기는 뒤숭숭해 보였다. 시녀들도 잠도 자지 못한 채 마하의 처소 부근에 모여 걱정스레 수군거리는 중이었다.

문제의 시녀장도 마하의 침실 앞에서 시녀들을 단속하고 있는 중이었다. 베아트릭스는 시녀장의 허리춤 호주머니를 흘끗 보았다. 미처 처소에 돌아갈 시간이 없었던 듯, 장태자 말대로 주머니가 여전히 불룩했다.

“베아트릭스 플라칼 황빈께서 오셨습니다.”

시녀장이 알렸지만 아픈 딸의 침대맡을 지키던 네페티는 그를 한 번 힐끗 돌아보고는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제게도 남 일 같지 않네요. 이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쿠엘스크산 사슴뿔은 제 가문에서도 손꼽는 보약이니 대군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베아트릭스는 사슴뿔을 선물로 내놓았다. 원래는 황제에게 보양식으로 쓰려 가져온 것이었지만 마하 문병을 빙자해 황비전에 올라오면서 딱히 쓸 만한 소품이 이것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황빈.”

네페티가 불덩이같은 딸의 이마를 만지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만찬장에서의 밝고 짓궂던 요부의 자태는 온데간데없이 이젠 앓는 자식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평범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리 나쁘지는 않아요, 베티. 오전에 오렌 묘지 다녀오느라 찬바람 쐰 게 탈이 났나 봐요. 내의원에서도 보고 갔는데 괜찮다고 하고.”

청순가련해 보이는 황비의 모습에 베아트릭스의 마음도 자꾸 약해지려 했지만 조금 전 보았던 가증스러운 사진을 떠올리며 맘을 최대한 다잡았다. 그는 아픈 대군의 얼굴을 어루만져주고는 몇 마디 상례적인 위로의 말을 건네고 돌아섰다.

“살펴 돌아가십시오.”

들어올 때처럼 시녀장이 그를 문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막 떠나려던 베아트릭스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시녀장을 향해 휙 돌아섰다.

“아참, 아까 장태자가 나한테 와서 페스트 전장에서 구한 전리품 단검을 아까 정신없을 때 잃어버리셨다고 하더군. 황상께 자랑하려던 참이셨는데 지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셔.”

“아, 그러신가요?”

시녀장은 ‘그런 걸 왜 나한테 물어?’라는 듯 짜증스런 표정을 애써 감추며 머리를 조아렸다. 베아트릭스가 못 본 척 그를 계속 몰아붙였다.

“혹시 대군 공부방에서 단검 못 봤나?”

“글쎄요, 단검은 못 봤습니다만…….”

“급한 맘에 자네 방까지 뛰어가다가 복도나 자네 방에 흘린 건지도 모르겠다던데, 잠깐 나하고 그 길 따라 같이 좀 가 주겠나?”

“아, 예, 기꺼이 도와드려야죠.”

시녀장은 아무 의심 없이 카이가 달려갔던 황비전 복도를 따라 앞장서기 시작했다.

둘은 태피스트리와 붉은 카펫으로 장식된 황비전 복도를 구석구석 확인하며 나아갔지만 당연히 단검 따위는 없었다. 결국 마하의 처소에서 시녀장 개인실까지 도착했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긴?”

잠겨있는 시녀장 개인실 앞에 도착한 베아트릭스가 문을 눈짓했다. 잠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시녀장이 마지못해 문을 열어주었다.

“거, 참 큰일이네, 장태자께서 황상께 자랑하려고 잔뜩 기대하고 계셨었는데.”

베아트릭스가 단검을 찾는 척 바닥에 쭈그려 앉자 시녀장이 얼른 그를 막아서며 먼저 안에 들어갔다.

“제가 찾겠습니다. 황빈께서 이런 데서 허리를 굽히시다니요.”

베아트릭스는 허리를 펴고 시녀장의 방을 빙 둘러보았다. 황비전 시녀장은 품계로는 7품의 과장급 중견간부에 불과하지만 바깥세상에서는 어지간한 고위관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알짜배기 실세였다. 그렇다보니 이렇게 자기만의 집무실에 책상과 서류캐비넷, 작은 회의실에 수발을 드는 시녀의 자리까지 모두 갖춰져 있었다.

“저어, 여기 흘리신 것 아닌듯합니다, 황빈 마마.”

바닥을 뒤지고 막 돌아서려 했던 시녀장은 일순간 목이 뒤로 비틀리며 사정없이 밀려나 벽 모서리에 부딪쳤다. 문은 어느새 잠겨 있었고, 베아트릭스의 단단한 팔뚝이 뒤에서 목뼈를 짓누르고 있었다.

“크, 흑, 화, 황빈 마마?”

시녀장이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대는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황실 대장군이었다. 이 단단한 근육질의 흑인 전사는 그의 저항 따위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디 있냐?”

“예? 다, 단검은 ……보시다시피 ……없지 않습니까, 마마.”

얼굴이 새파래진 시녀장이 가까스로 대답을 했지만 이 무서운 상대는 검은빛 얼굴 위로 하얀 흰자위를 더 크게 부릅뜨며 무섭게 목을 조여왔다.

“내 말길 못 알아들어? 이거 말고 또 있을 텐데?”

베아트릭스가 시녀장의 불룩한 호주머니에서 사진 묶음과 데이터 칩을 꺼냈다.

“황비께서 설마 처소에 이런 지저분한 자료를 직접 보관하실 리는 없겠지? 응?”

자료를 빼앗긴 시녀장이 공포에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게 ……전부입니다, 정말입니다.”

“시녀장이 으슥한 데서 황빈을 암살하려 한 게 그럴싸할까? 아니면 황빈이 이유도 없이 황비전 시녀장 목을 비틀어 죽인 게 더 말이 될까? 황상께서 누구 편을 드실까?”

베아트릭스의 노골적인 협박에 시녀장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베아트릭스가 방금 빼앗은 사진 뭉치를 내보이며 물었다.

“이 사진은 일련번호가 2로 시작되잖아? 1로 시작되는 칩과 뭉치가 어디 있냐고 묻는 거다.”

베아트릭스의 협박과 함께 목을 누르는 힘도 더 강해졌다.

“나도 황후가 예쁜 건 아니지만 황상께서 이 따위 추한 일로 상처를 입으시는 건 더 싫거든? 그러느니 너 같은 것 열 놈 모가지를 따는 게 나아. 그러니 착하신 황비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못돼먹은 우리 둘이 조용히 해결하자고. 무슨 뜻인지 알지?”

“제, 제가 찾아 드리겠습니다.”

“오호, 그런 친절 필요 없거든? 설마 거기에 사진뿐이겠어? 닥치고 어디 있는지만 말해.”

베아트릭스의 힘이 더 강해지면서 시녀장이 자기도 모르게 욱 하고 비명소리를 냈다. 뒤로 비틀린 한쪽 어깨가 완전히 빠져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자신의 잔꾀에 넘어가지 않자 막막해진 시녀장이 눈을 감으며 파르르 떨었다.

“……제일 아래 서랍입니다. 열쇠는 제 허리춤에…….”

베아트릭스는 준비해간 끈으로 시녀장의 입과 손을 묶고는 바닥에 동댕이쳤다. 그리고는 시녀장의 열쇠로 서랍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황후의 일거수일투족, 심지어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해놓은 자료들도 쏟아져 나왔지만 베아트릭스가 원하던 건 아니었다. 서랍 안쪽의 비밀 칸막이를 떼어내자 사진과 데이터 칩들이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베아트릭스는 문제의 자료들만 재빨리 챙겨 사슴뿔을 가져왔던 보자기에 쌌다. 그리고는 다시 서랍을 정리해 놓고는 비로소 시녀장을 풀어주었다.

“황비께 이 일을 일러바칠 만큼 바보는 아닌 줄로 안다.”

베아트릭스는 기진맥진해진 시녀장을 구석으로 밀어놓고는 급히 그곳을 나섰다.

황빈전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카이를 놀라게 했던 사진을 다시 꺼내보았다. 사진에는 며칠 전 황후가 친정 페로관에 갔던 날 늦은 저녁이 기록되어 있었고 3번 도시에 있는 호텔 이름까지 쓰여 있었다.

사진엔 알몸의 여자가 커튼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는 광경이 실려 있었다. 아마도 밖에서 무슨 일이 있어 내다보는 듯했다. 얼굴은 커튼에 가려 절반만 나왔지만 아메스라는 것을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후우.”

밖을 내다보는 아메스의 한쪽 젖가슴과 그 위의 붉은 키스마크가 선명했다. 그리고 그 뒤로 살짝 보이는 침대와 그곳에 누워 아메스의 허리를 당기고 있는 웬 건장한 남자의 상체가 보였다. 이것만으로도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하기는 충분했다. 어린 장태자가 엄마의 이런 사진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는 말하나마나였다.

베아트릭스는 방금 시녀장에게서 빼앗은 동영상 필름을 꺼내보았다.

“이게 뭐야.”

베아트릭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장태자의 손에 다른 사진이 잡혔던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곳엔 조금 전 그 방의 불 꺼진 커튼 너머로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황후의 적외선 실루엣이 찍혀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베아트릭스는 차마 더 보지 못하고 사진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제기랄.”

잠시 맘을 가다듬은 그는 사진과 칩들을 모두 싸들고 군사기밀 서류를 처리하는 소각기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던져 넣었다. 황제에게 자칫 비수가 될 지도 모르는 것들을 괜히 가지고 있을 이유도, 더 보고 싶은 맘도 없었다.

네페티가 황후와 자이센 가에 치명타를 입히기 위해 모아왔던 사진과 자료들이 하나 둘 고열 속에서 녹아 사라져버렸다.

자료들을 모두 없애버린 베아트릭스는 다시 응접실로 향했다. 여전히 엘룬은 테이블에 이마를 박은 채 쿨쿨 자고 있었고, 카이 장태자는 구석에 웅크린 채 그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확인하셨어요? 정말 엄마 맞아요?”

장태자의 눈이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초롱초롱 빛을 냈다. 베아트릭스가 손수건으로 그의 눈가를 닦아주며 웃었다.

“불순한 놈들이 어머님 닮은 여자를 고용해 음해하려 연출한 사진이랍니다. 내명부에서 뒷조사하고 있었던 걸 장태자께서 어쩌다 보신 겁니다. 이런 유치한 협박 정도는 자주 있는 일이죠.”

“그렇죠? 그런 거였죠?”

장태자가 그제야 안도한 듯 두 손을 꼭 모아 쥐었다.

“엄마였을 리가 없어요. 이번에 동생도 낳겠다고 하셨는데 그러셨을 리가 없죠.”

“그럼요.”

베아트릭스가 그를 안고 다정히 토닥여주었다.

“어른들 일이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비밀은 꼭 지키시고요. 황상께는 절대 말하시면 안 됩니다. 그분도 힘드신데 괜한 걱정 끼치시면 안 돼요. 아시죠?”

“알았어요. 그건 저도 알아요. 아무한테도 말 안할게요.”

카이가 야무지게 입술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아트릭스가 그런 소년을 더 꼭 안아주며 양 주먹에 힘을 주었다.

“장태자 전하의 눈에 눈물이 나게 만든 그놈은 제가 정신 똑바로 차리게 매운 맛을 보여줄 테니 걱정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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