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61화 (956/1,132)

< -- 961 회: 파트10. 그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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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 도시의 친정에서 다음날 오전까지 푹 쉬고 오겠다며 황궁을 떠났던 황후 아메스는 무슨 변덕인지 새벽 일찍 궁으로 돌아왔다. 모처럼 늦잠에 게으름을 만끽하고 있던 황후전 시녀와 시종들도 덕분에 난데없이 꽁지에 불이 붙어 황후를 맞느라 부산을 떨어야 했다.

황후전에 들어온 아메스를 맞아준 건 어딘지 초조한 얼굴로 엄마를 기다리는 아들 카이와, 그리고 침대 위에 놓인 웬 나무 상자였다. 상자에는 ‘그대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기를 바랍니다. 내 선물이니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요.’라는 황제의 자필이 쓰여 있었다.

무심결에 웃으며 상자를 잡았던 아메스는 뜨끔하는 느낌에 도로 상자를 놓고 말았다.

‘당신 정말 바보군요.’

멍하니 서서 상자를 내려다보던 아메스는 상자를 구석으로 치워놓고는 비단포를 벗어던졌다. 그때, 상자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맛.”

소리에 놀란 아메스와 카이가 화들짝 놀라 물러섰고 구석에 있던 가디언이 재빨리 황후의 앞을 막아섰다.

“안에 뭔가 있습니다.”

무언가 생각하던 아메스가 가디언을 뒤로 밀어내고는 혼자서 상자에 다가갔다.

“설마, 그걸까.”

아메스는 조심조심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복실복실한 흰 강아지 한 마리가 머리를 쏙 내밀었다. 주먹만한 강아지의 등에 매어진 큼직한 리본에 아메스의 입에서 웃음이 픽 터져 나왔다. 그동안 외로움에 강아지라도 키우고 싶다는 말을 지나가며 몇 번 했었지만 내명부에서 동물을 키워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 때문에 차마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했던 터였다.

“예쁘긴 하네.”

아메스는 강아지를 품에 꼭 안아보았다. 짤막한 꼬리를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리 흔들며 품에 쏙 안기는 것이 순하고 붙임성 좋은 강아지였다. 리본을 풀고 바닥에 내려놓자 강아지는 그의 발치와 치맛자락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주변을 정신없이 뱅글뱅글 맴돌았다. 우울했던 아메스의 기분도 활달한 강아지의 모습에 한결 풀어졌다. 하지만 아메스보다 카이가 더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보세요, 황상께서 어머니를 얼마나 아끼시는데요. 어머니께서 이렇게 밝게 웃으시는 것도 퍽 오랜만에 봐요. 돌아오시면 정말 잘해 주세요.”

아메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아들 카이가 이런 식으로 황제와 황후 사이를 언급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어쨌든 느닷없는 황제 이야기에 잠시 좋아졌던 아메스의 기분도 확 헝클어져 버렸다.

유모가 아메스의 비단포를 벗겨주며 말했다.

“5일 정도 후면 착상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번엔 내의원에서도 각별히 신경 많이 썼으니 배란도 잘 되었을 테고요. 황상께서 아기 소식에 기뻐하실 모습 상상이 되지 않으시나요.”

아메스는 무심결에 아랫배를 다시 짚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황제가 자신이 없을 때 벌어진 일을 안다면 어찌될지 상상을 해 보니 눈앞이 아찔했다.

“어머머, 얘 좀 봐요.”

털북숭이 강아지가 낑낑대며 아메스의 발목을 기어오르려는 모습에 유모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작 아메스는 조금 전까지도 너무너무 예뻤던 강아지가 갑자기 걷어차고 싶을 만큼 꼴도 보기 싫어졌다.

“강아지가 황후 폐하를 정말 잘 따릅니다. 시녀들 시켜서 강아지 집하고 용품들 마련하라고 해야겠습니다.”

“집안에 짐승은 하나로 충분해. 냄새나니 내다버…….”

홧김에 입을 열었던 아메스는 주먹만해진 아들과 유모의 눈동자에 놀라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들 카이의 표정이 마치 당장 울 것 같았다.

당황한 아메스는 강아지를 얼른 다시 팔에 안으며 둘러댔다.

“상자 안에 오줌을 쌌던걸. 냄새나기 전에 내다버리라고.”

“아, ……예. 황태후께서도 남극성당에서 올라오셨다 하니 빨리 옷을 갈아입고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좀 있으면 비빈들이 문안을 올라올 겁니다.”

“알았어, 알았어.”

창가에 혼자 선 아메스는 보드라운 강아지의 털을 더듬으며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었다. 강아지는 새 주인의 속도 모른 채 손을 핥으며 짧은 꼬리를 계속 흔들었다.

아침 문안에 들어온 아메스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사가에서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은 게 분명했지만 그는 아무 언급도 없이 평소처럼 단정한 성장으로 갈아입고 황제를 대신해 상석에 앉아 네 비빈들과 황자들의 아침 문안을 받았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매일 치러야 하는 제일 귀찮은 일과 중 하나였다.

“마하가 어젯밤 다시 앓기 시작했다고요. 비빈들께서도 황자들의 건강에 각별히 조심하시고요, 황상께서 치료법을 찾아내실 때까지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분이시니 조금만 믿고 기다리시면 하늘이 보답을 주실 겁니다.”

병영으로 출근 준비를 끝내고 군복 차림으로 엘룬과 서서 황후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베아트릭스는 옆의 네페티를 힐끔 돌아보았다. 시녀장이 지난밤 일을 정말로 비밀에 붙인 것인지, 아니면 딸의 일로 아직 경황이 없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직 그에게 딱히 적대적인 눈길을 보내지는 않았다.

황후의 일장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내내 무표정하던 네페티가 아메스에게 한 마디 꺼냈다.

“그분의 사랑과 노력을 가족들이 다 알아줘야 할 텐데 안타까울 뿐이지요. 아참, 사가 방문은 어떠셨는지요?”

“처음 다녀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3번 도시는 올해 풍작이 들었다면서요. 제국 전역이 기근으로 난리인데 축하드립니다. 그 풍성한 기운이 폐하의 회임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누굴 닮은 아이가 태어날지 정말 궁금하옵니다.”

진담인지 비꼬는 것인지 알쏭달쏭한 네페티의 인사말에 괜스레 맘이 불편해진 아메스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을 뿐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틀 후엔 내명부 식구들도 모두 제국 회의가 있을 수베르로 떠나야 하니 미리미리 채비들 하시고요, 프리깃을 잡아 놨으니 다 함께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에스더 귀인은 갈 수 있겠습니까? 자칫 그곳에서 출산할 수도 있는데.”

“낳아도 황상께서 계신 곳에서 낳겠습니다.”

“그럼 별 수 없지요, 초산이시니 몸의 작은 변화도 숨기지 마시고요, 궁금한 건 저를 포함해 다른 비빈들이 도움을 줄 것이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물으세요. 그럼 오늘도 다들 좋은 하루가 되길 빌겠습니다.”

내명부 어른다운 모습으로 아침 문안을 마친 아메스가 아들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빈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우고, 카이도 자기 방으로 돌아갔지만 베아트릭스는 여전히 응접실을 떠나지 않고 서 있었다.

“저어,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네? 황빈께서 무슨 일로요?”

성장을 막 벗으려던 아메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아트릭스를 쳐다보았다. 워낙 내명부 일에 관심도 없고, 그저 매일아침 문안을 마치고 슬레이프니르 사령부로 출퇴근하는 것이 일과인 사람이 느닷없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물으니 그에게도 놀랄 일이었다.

“사람들을 물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아메스는 함께 있던 시녀들과 경호원들에게 나가 있으라며 눈짓했다. 그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것을 확인한 베아트릭스는 문까지 단단히 잠그고 돌아섰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요, 황빈?”

아메스가 목에 건 금빛 황실 머플러를 풀며 막 고개를 돌린 순간, 무언가가 눈앞에서 번쩍 하며 그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그는 비명 한 마디 내지 못한 채 그대로 기둥이 쓰러지듯 옆으로 픽 주저앉고 말았다.

“멍은 안 남길 테니 걱정 마라.”

바닥에 쓰러진 아메스는 멍하니 입을 버린 채 위를 올려보았다. 반들거리는 베아트릭스의 군화발이 그의 뺨에 닿아 있었고, 그는 오른손에 수건을 감으며 황후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메스가 이를 빠득 갈며 사람들을 부르려 했다.

“네, 이년이 어딜!”

베아트릭스는 무어라 쏘아붙이려는 아메스의 멱살을 왼손으로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수건을 감은 오른주먹을 사정없이 내질렀다.

“우웁!”

배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아메스는 다리가 풀렸지만 베아트릭스의 왼손이 여전히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직 영문을 모르는 아메스가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 했다.

“이년이…… 어딜 ……감히 ……이러다 황자에게 탈이라도…….”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호텔에서 네가 탔던 그 사내놈 씨가 아니고?”

수건을 두른 베아트릭스의 주먹이 다시 아메스의 아랫배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너무 아파 눈물이 뚝뚝 흐를 지경이었지만 숨이 막혀 비명도 나지 않았다.

“어떤 놈 씨인지 내 확실하게 없애줄까?”

“욱!”

또다시 같은 곳을 얻어맞은 아메스는 베아트릭스의 가슴에 기댄 채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어디를 어떻게 쳤는지 몰라도 말을 할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어떡해서든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그의 팔다리는 베아트릭스의 손아귀에 허수아비처럼 맥없이 축 매달려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파르르 떨고 있는 아메스의 귓가에 입술을 닿을 듯 들이대고 흑인종의 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아들이 또 이 따위 사진 보고 울지 않게 하려면 똑바로 해. 내가 네년 이뻐서 사고 친 것까지 뒤치다꺼리 해 줬는지 알아?”

옆구리에 작렬한 베아트릭스의 마지막 펀치에 아메스가 다시 한 번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입에서 침까지 줄줄 흘렸다.

베아트릭스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황후를 질질 끌어 소파에 내동댕이치고는 지난밤 카이가 보았던 사진을 무릎 위에 던져놓았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아메스는 그 사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런…… 맙소사.”

아메스가 힘든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고개를 가누어 베아트릭스를 올려보았다. 베아트릭스가 씩씩거리며 쏘아붙였다.

“나머지는 내가 다 없앴으니 그건 알아서 해. 장태자에겐 조작이라고 해 놨으니까.”

주먹에서 수건을 풀어낸 베아트릭스는 얼굴에 묻어난 땀을 닦고는 아메스의 옆에 던졌다.

“이만 출근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사람들 오기 전에 침은 닦으시죠.”

가쁜 숨을 고른 베아트릭스는 소파에 주저앉아 있는 아메스에게 군대식으로 경례를 올리고는 휙 돌아 나가버렸다.

아메스는 무릎 위에 있는 자신과 킵의 벗은 사진에서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그곳에 겹치는 아들 카이의 모습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어딘지 이상하던 아들의 태도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이가……카이가…….”

아메스 혼자 남은 응접실에 낮은 울음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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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마즈가 엄마의 첫 편지를 받은 건 가족들이 수용소에 끌려가고 1년 넘게 지나서였다. 하지만 그 편지를 들고 온 건 뜻밖의 얼굴이었다.

“토로?”

급양대 창고에서 밀가루 포대를 내리고 있던 오르는 민병대의 빳빳한 새 군복에 큰 백을 짊어지고 입고 나타난 토로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그의 떡 벌어진 어깨엔 민병대 사관을 뜻하는 계급장도 붙어있었다. 토로는 한때 비쩍 말랐던 얼굴에 살집이 붙어 건강해진 모습의 오르를 보고는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저도 귀순했습니다.”

오르가 살짝 눈에 힘을 주었다. 그가 아는 토로는 절대 가문을 버리고 민병대에 자진 귀순할 사람이 아니었다.

토로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30일 동안 사상검증하고 정신교육 받고 제2수송대에 배치받았습니다.”

“으, 음, 다행이네, 영내에 아는 사람이 와서 정말 다행이야. 중사님이면 나도 빽이 든든해졌네.”

오르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밀가루 내리는 일도 대충 끝나 한동안은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함께 짐을 내리던 후임병에게 대충 끝내라고 눈짓하고는 토로와 함께 사람이 없는 창고 구석으로 향했다.

“거짓말 마.”

“예?”

오르의 첫 마디의 토로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위장귀순이지?”

토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상검증을 하는 민병대 정보요원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또렷하게 답했을 그였지만 지금 그를 노려보는 17살 소녀의 무지개빛 눈동자 앞에선 감히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1년은 짧은 시간이지만 그새 세상 물을 너무 많이 먹어버린 소녀는 이제 그전의 순박한 산골 아이가 아니었다.

“대답 안 해도 돼, 아니, 하지 마. 난 아무 것도 몰랐던 거야.”

오르가 한 발 물러나며 토로를 궁지에서 놓아주었다.

“제가 자원했습니다.”

토로가 결국 한참만에 자진해 입을 열었다.

“민병대에 해를 끼치려는 건 아닙니다. 종장님께서 이쪽 동향을 궁금해 하셔서…….”

“알아, 민병대 안에 사람을 심어놓고 사정을 파악해야 수주도 따낼 수 있을 테니까. 뻔하지.”

오르는 민망함에 대답을 못 하며 우물쭈물하고 있는 토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빌루이는 외부에 티만 나지 않는다면 교단과 같은 무기를 민병대에 동시에 팔아먹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미련할 만큼 가문에 충성스러운 이 사내 정도면 몇 년, 혹은 수십 년을 민병대에 처박아 놓아도 걱정할 일 없는 확실한 투자일 터였다.

그때, 멀리 철조망 너머에서 누군가 부르는 손짓을 본 토로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꼬깃꼬깃한 편지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수용소의 아지드 마님께서 보내오셨습니다. 아가씨께 전해드릴 방도가 없어 그동안 제가 갖고 있었습니다.”

“엄마? 엄마 편지라고?”

편지를 받아든 오르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1년만에 느껴보는 엄마의 흔적이었다. 그는 목에 건 로켓을 무심결에 더듬었다.

“엄마 어떻게 계신 거야? 동생들은 다 무사하대?”

“이 편지 받을 때까지는요.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토로가 급히 백을 짊어지고 돌아섰다.

“전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그래. ……너도 조심해. 앞으로는 내가 먼저 경례해야겠네.”

토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2수송대가 있는 곳으로 멀어져갔다.

혼자 남은 오르는 편지를 들고 자대인 X부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연병장 구석의 볕 잘 드는 곳에 쭈그려 앉아 편지를 살펴보았다. 편지엔 발신지 표시가 없었고 [검열 완료]라는 표시가 두 번 찍혀있었다. 하나는 수용소를 운영하는 코메트 부대의 것이었고, 하나는 토로에게 들어갈 때 찍혔을 카파키 가문 치안부대 도장이었다.

“용의주도하시군요, 할아버지.”

오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엄마 아지드가 보낸 편지를 순순히 토로에게 전달해 주고, 그가 편지를 갖고 이곳까지 오도록 만든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저도 투자로 보이기 시작하셨나요.”

오르는 씁쓸한 표정으로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엔 누런 저질 습자지에 질 나쁜 펜으로 꼭꼭 눌러 쓴 편지와 작은 사진, 그리고 정체 모를 작은 천조각이 들어있었다.

“엄마…….”

오르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갓난아기의 출생등록용 사진이었다. 편지 중간중간이 검열이라는 빨간 도장과 함께 칼로 잘려나가 있었지만 ‘동생들은 모두 괜찮다.’는 반복된 내용과 갓 태어난 막내에 관한 부분만은 무사히 남아있었다.

“세네피스?”

오르가 사진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아기의 크고 동글동글한 눈은 엄마 아지드의 예상대로 다른 동생들과는 완전히 다른 엷은 회색이었다. 편지엔 아이 눈의 무지개색이 서너 살은 되어야 드러날 것 같다고 적혀 있었지만 엄마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여하튼 아기는 좀 말랐지만 혈색은 좋아보였다.

“정말 예쁘네.”

오르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아기는 아무리 봐도 엄마나 다른 동생들과는 별로 닮지 않은 것 같았다. 아기의 눈과 해맑게 웃는 얇은 입술은 말 그대로 몸서리쳐지게 예뻤다.

“세네피스.”

오르가 다시 중얼거렸다. 편지 끝머리엔 ‘이 애가 네 품에서 보호받고 있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단다.’라는 말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들어있었다. 전에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나곤 했었지만 막상 자신과 닮은 아기의 모습을 보고 나니 이 아이를 꼭 품에 안아보고 싶었다.

오르마즈는 함께 들어있던 정체 모를 천조각에 코를 대 보았다. 살짝 젖내가 풍겨왔다. 아기가 입던 옷이나 손수건 조각을 일부러 보낸 게 분명했다. 그곳에 코를 대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지며 입에서 괜히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그때, 취사실 쪽에서 오르마즈를 찾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편지를 얼른 품에 감추고 취사실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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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스의 캐굴욕이 있는 이번 편을 끝으로......지난 파트의 긴장감을 잠시 식히는 막간 쉬는 파트인 [파트10. 그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들]은 사실상 끝을 맺습니다. ^^

그런데 용량이 한 편으로 짜르기는 뭣해서.....원래는 다음 파트에 시작에 잡혀있는 과거 이야기를 살짝 끌어당겨 붙였습니다. ^^;;; (출판본에는 다음 파트로 잡히겠죠.) 과거 이야기는 다음편까지 이어집니다.

다음 파트(그러니까 다다음회)부터는 다시 본래 큰줄기으로 돌아가서....아들 주페를 구하고 마지막 남은 사제의 키를 찾기 위한 카렐과 코리온, 교단의 대결이 재개됩니다.

(과거편에서는 오르가 민병대 영웅으로 자라나는 부분이 펼쳐지고요.)

그리고 다다음 파트는 잠시 몸져누웠던 페로까지 합류하면서 출판본 3부 3차 출판(5,6권)의 클라이맥스가 될 제국회의 씬이 펼쳐집니다..... 3부의 스케일이 이제 조금씩 커질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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