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65화 (960/1,132)

< -- 965 회: 파트11.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

[어제 저녁에 올려야 했지만 조아라의 보안서버 구축 때문에 좀 늦게 올립니다. 대신 평소보다 분량을 훨씬 더 많이 올립니다. ^^ ]

분량 많다고 코멘트나 추천이 줄면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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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의 보루 꼭대기의 망루에 앉은 오르마즈는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지켜보며 줄곧 말이 없었다. 불에 심하게 덴 왼팔이 쓰라리고 아파도 내색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거의 삭발에 가깝게 짧게 친 머리칼에서 떡이 진 흙덩이를 툭툭 털어 보았지만 피와 엉긴 흙덩이는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무너진 토벽 무더기 속에서 적군과 백병전을 벌이느라 온몸이 이런 흙덩이 투성이였다.

“제길.”

오르는 외모 손질 따위는 포기하고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지금의 그는 X병영에서 속편하게 잡일을 할 때와는 겉도, 속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원래 컸던 키는 이제 6척 2촌(186cm)이 넘어갔지만 몸은 코윈의 산골에 있을 때보다 더 여위어 있었다. 움푹 들어간 뺨과 눈가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그득했고 그동안의 고생으로 자글자글해진 얼굴 탓에 실제보다 대여섯 살은 더 들어보였다. 하지만 이 정도는 팔뚝의 쇠창살 문신과 함께 죄수병이라면 누구나 얻는 훈장이었다.

그가 있는 오름은 프라임 지역 남쪽의 비옥한 평야지역에서 황량한 판지셰르 화산지대로 접어드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판지셰르 화산지대는 황이 많은 토질 때문에 농사도 잘 되지 않았고, 지진까지 잦아 사람들이 살기엔 고약한 곳이었다. 그렇지만 담을 두르듯 지키고 선 험악한 산맥은 아케메니아에서 접근해오는 코메트 토벌군을 상대로는 훌륭한 자연방벽이 되어주었다.

그렇지만 그 자연방벽에도 넘어갈 수 있는 길목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산맥을 넘는 골짜기를 딱 막고 선 이 작은 기생화산의 1백여 죄수들에게 등 뒤의 거대한 산맥은 자신들의 처지를 각인시키는 잔혹한 철조망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력 정비를 한답시고 죄수들만 남겨둔 채 후방의 산 중턱으로 물러나버린 본대는 7일 동안 이 오름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육전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의 죄수들에겐 서쪽과 남쪽에서 7일간 애타게 공세를 퍼부은 1천2백―지금은 그보다 훨씬 줄었겠지만―의 코메트 정규군보다 자신들을 버리고 물러나 버린 동쪽의 민병대가 더 원수 같았다.

“팔에 이거 감으세요.”

나잇살이 제법 얼굴에 묻어나는 자그만 사내 하나가 사다리를 타고 망루에 올라와 흰 속옷조각을 내밀었다.

“난 괜찮으니까 망치 저 새끼나 줘.”

오르는 망루 밑에서 몸 절반이 불에 탄 채 끙끙대고 있는 덩치를 가리켰다. 새벽에 1백의 코메트 결사대가 화염방사기와 연료통을 들고 보루에 기습공격을 했을 때 불 붙은 연료통을 맨몸으로 밀어내다가 통 한쪽이 폭발하면서 저 꼴이 된 사내였다. 그리고 불 속에서 그를 끌어내던 오르의 왼팔도 덩달아 이 꼴이 되었다.

“망치 저놈이 보스 필요할 거라고 해서 갖고 온 건데요. 코메트 놈 입던 메리야스니까 우리 속옷보다는 질이 나을 거랍니다.”

“빤쓰가 아니니 다행이네.”

오르는 마지못해 천 조각을 받아들었다. 민병대 보급품으로 나오는 싸구려 합성섬유 속옷보다 훨씬 부드러운 진짜 면이었다. 남자가 팔꿈치부터 손등까지 모조리 데어버린 오르의 손을 보며 물었다.

“상처는 어떠십니까?”

“방금 뼈다귀 새끼 오줌으로 닦았더니 좀 나아. 장갑 안 꼈으면 손도 병신 될 뻔했어.”

오르는 진물이 흐르는 왼손에 천조각을 두르며 보루 주변을 재차 둘러보았다.

화산재로 만든 벽돌과 흙, 돌, 나무에 갖은 자재를 있는 대로 섞어서 지은 지름 500척(150m)의 원형 보루는 이미 온전한 곳이 얼마 없었다. 보루의 원래 높이는 15척(4.5m)으로 맞춰져 있었지만 지금은 그 절반이나 되면 다행이었고 서너 군데는 보루라기보다는 돌더미에 더 가까웠다.

보루 안쪽엔 숙소로 쓰는 천막 십여 채와 무기고인 토루가 하나 있었지만 이젠 다 불타고 무너져 흔적뿐이었다. 지금 토루가 있던 구덩이엔 먼저 죽은 2백 가까운 죄수들의 시체가 수북이 쌓여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절반은 전투 도중 죽었고 나머지 절반은 치료를 받지 못해 앓다 죽은 자들이었다. 죄수들만 모아놓은 판국에 의무병도, 군의관도 있을 턱이 없었다.

죄수들은 처음엔 동료의 시체 위에 흙을 덮어주는 성의라도 보였지만 전사자가 절반을 넘어가면서 이젠 그나마도 포기한 상태였다.

“탄내 한 번 지독하네.”

오르는 코끝에 느껴지는 독한 악취에 얼굴을 찡그렸다. 보루 주변엔 코메트 결사대들이 남겨두고 간 시체만 30여구가 넘었고 망루 바로 밑에도 불에 탄 시체 3구가 보였다. 동료들 시체도 제대로 못 처리하는 판국에 적 시체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아까 보셨어요? 적 지휘관이 또 바뀐 것 같던데요.”

“6일만에 짜르다니, 너무했네.”

오르가 망루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공격 둘째 날, 저격에 쓰러진 적 지휘관을 대신해 새로 부임했던 신임 지휘관도 어제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적 연대기 주변엔 어제 저녁부터 새 얼굴의 무장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새벽 공격은 마지막 발악이었을까요? 아니면 신고식이었을까요?”

사내가 여전히 사다리에 매달린 채 보루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 보루를 새카맣게 에워싼 1천이 넘는 코메트들이 보였다.

“그런 건 장교였던 자네가 더 잘 알 것 아냐?”

“어차피 다 말소당한걸 이전 계급 얘긴 왜 하십니까, 보스.”

사내가 낯을 붉히며 대꾸하자 오르가 다리를 반대로 꼬고 앉으며 피식 웃었다.

“뭘, 특무대 이트닌 하산 소령 하면 알 사람 다 알던데. 성(姓)까지 있는 걸 보니 집안도 좋은 것 같구먼.”

“갑자기 웬 실명이세요. 가문 하면 제가 보스한테 댈 바인가요. 그냥 땅콩이라고 부르세요. 전 고작 2년차입니다. 보스는 8년차고요.”

남자가 얼굴을 붉히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말대로, 죄수부대의 불문율은 이전 계급과 나이, 심지어 이름도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말단 이병이었건, 장교였건, 이곳에서 죄수들의 서열을 정하는 건 오직 얼마나 오래 살아 버텼는지 하나뿐이었다.

“8년이라, 질기게 버티긴 했네.”

오르가 키득거리며 손의 상처를 꾹 눌렀다.

8년 전, 그가 판지셰르의 본부에서 사고를 쳤을 때 어린 와헷까지 그를 구명하려 증인으로 나섰지만 너무 어려 신빙성이 없다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고작해야 몇 개월 노역으로 끝날 사건은 죄수부대 20년 복역의 중형이 선고되면서 끝맺어졌다.

그 와중에 헌병대 주임상사인 하메스타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와헷을 납치해 죽이려 한 4명의 생도들도 숙소 무단이탈로 3달의 근신조치를 받으며 마무리되었다.

‘죄수’라는 딱지를 달았지만 했지만 돈과 사람 모두 태부족인 민병대 처지에 공짜밥을 줘 가며 운영하는 형무소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형을 선고받은 병사들은 흔히 죄수부대라고 불리는 ‘수형대대’에서 가장 더럽거나, 가장 위험한 일을 떠맡아야 했다.

오르가 속한 3백의 3죄수대대도 마찬가지였다. 3죄수대대는 2군단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쓰레기와 분뇨처리를 했고, 혹한의 고지에 물자를 날랐고, 전투가 있은 후엔 시체를 처리해야 했고,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에 들어가는 임무도 그들 차지였다.

하지만 죄수들이 전염병보다 무서워하는 건 퇴각이었다. 죄수부대가 전투 임무를 맡는 건 따라다니던 부대가 퇴각하는 때뿐이었다. 그들에겐 마약이 든 술 한 병과 자살용 독약캡슐 하나씩이 주어진 채 매번 가장 위험한 길목에서 시간을 끄는 임무가 맡겨졌다. 간수를 맡은 기간병들은 죄수들에게 마약과 술을 먹인 후 참호에 집어넣고 발에 쇠사슬을 채워두거나, 때로는 이탈하면 자동으로 불이 붙어버리는 폭발물을 놓아둔 채 떠나버렸다.

아이러니하지만, 추격하는 토벌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도 잃을 것 없는 죄수부대였다. 마약을 먹은 죄수들은 도망치지도 않았고, 광기 속에서 마지막까지 날뛰다가 온몸이 난자당하거나 화염방사기의 불꽃을 뒤집어쓴 후에야 자신의 운명을 깨닫곤 했다. 그렇다보니 토벌군들도 죄수다 싶으면 화염방사기나 화염병으로 태워버리는 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곳에서 첫 1년을 보낸 후, 오르는 어느새 고참이 되어 있었다. 1년이면 부대원 둘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지는 곳에서 생존은 곧 계급이고 강하다는 상징이었다. 계급이 말소된 죄수부대지만 소위 ‘보스’를 정점으로 하는 폭력적인 서열구조는 공식적인 계급보다 더 무자비했다.

“아세요? 도망간 기간병 놈들 보스가 며칠 이따가 사라질지 내기 걸었답니다.”

“그래? 그럼 다 틀리면 다 내 돈인가?”

오르가 킬킬거렸다.

“솔직히 아랫놈들도 신기해하고 있는 거 아시잖아요.”

오르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가 8년이나 살아남은 건 용감하게 전장에서 싸워서가 아니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제일 먼저 읽어내고 도망칠 길을 귀신같이 찾아낸 때문이었다. 마약에 취한 동료들이 사기를 높이며 분기탱천할 때 그는 도주로와 쇠사슬 끊을 방법부터 찾았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광기에 날뛰는 흉악범 동료들과 함께 지옥에 빠지는 대신 미련 없이 도망을 택했다. 그는 살아 도망치기 위해 몸을 단련했고 자물쇠 푸는 법과 쇠사슬 끊는 법을 연구하고, 말 타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그는 부대가 거의 전멸한 전투에서 5번이나 혼자 살아남아 귀환했고 9번은 동료들의 시체더미 사이에서 약간의 부상만 입은 채 발견되었다. 윗사람들은 그의 ‘놀라운 행운’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았지만 본인은 마지막까지 저항했다고 버텼고, 목격자는 없었다. 얄궂게도 그가 도망친 전투에서 죄수들이 대부분 몰살당했다는 건 그의 판단이 매번 옳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후에 붙을 명성에 비해 그리 영웅적이지 못한 건 분명했지만, 오르마즈는 ‘비열한 놈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제일 비열해져야지.’라며 별로 양심의 가책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생존담이 늘어나면서 쉬쉬하면서도 그를 리더로 따르는 이들이 하나 둘 늘었다. 그리고 6년차에는 그동안 그간 보스 노릇을 하던 무기수가 혼자 남겨진 벙커에서 발이 묶인 채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면서 그는 23살에 3죄수대대의 사실상 보스가 되었다.

간수들은 모두 오르마즈를 의심했지만 다른 죄수들이 약속이나 한 듯 그가 작업 중이었다고 진술한 덕분에 유야무야 덮이고 말았다. 어차피 그들에게 필요한 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살 길을 찾을 줄 아는 재주 좋은 보스이지 정의로운 리더가 아니었다.

그때, 망루 밑에서 망치 녀석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곰 같은 우람한 체구에 힘쓰는 일이라면 죄수대대, 아니 군단 제일의 사내지만 그도 슬슬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늘은 버티겠나?”

오르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저렇게 고통스럽게 버텨 봤자 뭐 합니까.”

이트닌의 표정이 처음으로 어두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약이라도 좀 남겨두시지요.”

“난 또 자네 솜씨에 그 정도는 훔쳐올 수 있을 줄 알았지.”

“차라리 적 연대장 목을 따오라고 하세요.”

이트닌이 마지못해 웃었다. 공학박사 출신에 한때 특무대 보안전문가였던 그는 교단 연구소에서 자료를 탈취하는 특수임무 도중 전리품인 실험의약품을 훔쳐 이 처지가 되고 말았다. 듣기로는 빼돌린 약품만 내놓으면 문책으로 넘어가겠다는 상부의 설득도 끝내 거부하고 징역 10년에 소령에서 이등병으로의 강등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조사 도중 그의 갓난 딸이 공교롭게도 그 약이 쓰이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훔쳐간 약품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못 버티고 죽을 것이라던 아기에게선 이젠 ‘아빠 잘 있어?’하는 목소리가 담긴 칩까지 우편으로 종종 들어오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의 오르에게 특수부대 장교 출신의 이트닌은 가장 든든한 오른팔이었다. 둘째 날 적 지휘관을 저격해 쓰러뜨린 것도, 완전히 붕괴된 남쪽 토벽을 3일이나 도맡아 지켜낸 것도 그의 공로였다.

“어쩌면 나도 이번 베팅은 틀렸다는 걸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보스의 말에 이트닌의 표정이 굳었다. 연대는 사방이 탁 트인 오름의 보루에 3백의 죄수들만 남겨둔 채 ‘3일 후에 되돌아오겠다.’며 지휘관이나 기간병 하나 남겨두지 않은 채 물러나 버렸다. 이들에게 남겨진 건 3일치 식량과 보루 곳곳에 파묻혀 있는 무선 작동식 인화물질 탱크가 전부였다. 연대장은 ‘보루가 넘어가면 터뜨리겠다.’며 말하고 갔지만 사실은 ‘항복하면 싹 다 죽을 줄 알아라.’라는 협박이었다.

항복해 봤자 코메트들도 낙인이 있는 죄수병은 어차피 포로로 취급해 주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화염방사기로 불태워 죽여 버렸다.

가망 없는 보루와 3백의 흉악범들을 떠맡은 25살의 보스는 죄수들의 발목을 모두 풀어주었고 술이나 마약도 주지 않았다. 애당초 3일이라는 약속이 지켜지지 못할 것임을 눈치 챈 그는 3일치 식량도 절반으로 줄여서 배식했다.

모래알 같은 죄수들이 그런 상황에서도 7일이나 멀쩡한 정신에서 싸울 수 있었던 건 지금껏 별의별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보스가 아직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잠에서 깨어 인사 대신 하는 말도 ‘보스 잘 있냐?’고 동료에게 묻는 것이었다. 오르가 저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보루 전체에서 다 보이는 이 망루에 머무는 것도 절망의 문턱에 선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백 번 천 번 성공할 수 있어도 실패 한 번이면 끝인 게 이 바닥 아냐.”

오르는 망원경을 이번엔 서쪽과 남쪽의 적진으로 돌렸다. 새벽에 몰래 들어왔던 적 결사대 100명은 무너진 잔해를 쌓아 급조한 마지막 방어선까지도 넘어 들어왔지만 오르와 이트닌, 그리고 지금은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망치’ 셋이 그곳을 다시 차단하면서 결국 절반의 병력을 잃은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동료들의 모습과, 7일간의 공격에 지친 적진의 분위기도 뒤숭숭해 보였다.

“빌어먹을.”

오르가 무기를 쥐고 망루에서 일어섰다. 코메트 전 병력이 각자의 무기와 짐을 싸들고 숙소에서 나오고 있었다. 보스가 일어서는 모습에 보루 구석구석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죄수병들도 하나 둘 손에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오르는 이번엔 아군 연대가 있는 등 뒤의 산 중턱을 망원경으로 보았다. 7일 동안 후방의 토굴에 숨어있던 민병대도 아침 공기 속에서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르는 어딘지 긴장이 감도는 양쪽 진영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꼴이 볼만해졌군. 오늘이 전투 마지막 날 아니면 살아서 마지막 날이겠네.”

“설마 총공격을 할까요? 지금까지도 배후에 있는 우리 연대 때문에 총공격은 못 했지 않았습니까?”

“난 그런 복잡한 거 모른다니까.”

신경이 곤두선 오르가 손사래를 쳤다.

“내가 장군도 아닌데 알아서 뭐 해.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저 새끼들 윽박질러 죽어라 버티는 것뿐인데. 모르는 게 속편하지. 내려가 준비해.”

보스의 짜증에 이트닌이 멋쩍게 웃으며 망루 밑으로 내려갔다.

그는 저 25살 청년이 스스로의 엄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정규교육도 전혀 받지 못한 촌뜨기라고 밝혔지만 이마의 다하카르 간택자 문장과 ‘카파키’라는 성을 안다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트닌이 보기에도 ―사실 그도 카파키 정도 대명문가의 귀공자를 진짜로 본 일은 없었다.― 보스에겐 정말로 그런 기품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사기꾼 냄새를 풍기는 달변가도 아니고, 무모하게 용감한 선동가도 아니지만 특유의 자신감과 대담함, 솔직함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3백의 말썽꾼 죄수들이 ‘난 남아 지킨다.’는 그의 한 마디에 이렇게 일심동체가 된 것도, 소령 출신의 이트닌이 실전 지휘 경험이 거의 없는 일병 출신 보스를 위해 기꺼이 참모 역할을 자처한 것도 보스의 이런 매력 때문이었다.

“보스께서 일어나셨다!”

망루에서 몸을 일으킨 보스의 모습을 본 죄수들도 줄줄이 따라 일어나 무너진 보루 벽에 매달려 바깥을 내다보았다. 완전 군장을 갖추고 나선 1천2백의 적도 인원점검을 하는 듯했다. 그리고 등 뒤의 민병대 연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쪽 군대가 충돌한다면 바로 이곳이 될 터였다.

그때, 망루에 있던 보스가 한 손을 높이 치켜들자 고작 백여 명 남은 죄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향했다. 보스가 손을 앞으로 하면 전투준비, 손가락을 아래로 하면 분대장을 맡고 있는 죄수들이 각자의 부하들에게 자살용 독약 캡슐을 나눠주라는 의미였다.

공중으로 올라간 보스의 손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소름끼치는 침묵 속에서, 망루 아래 쓰러져 있던 망치 녀석이 화상의 고통을 못 참고 내는 울음소리만 쌀쌀한 새벽 공기 속을 낮게 흘렀다.

“움직인다.”

적군 사이에서 울리는 나팔 소리에 지레 놀란 죄수병 몇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 보스의 엄지손가락이 위를 향했다.

“적이 물러난다.”

보스의 말에 이트닌이 양 손을 쳐들고 손뼉을 짝짝 쳤다.

“적이 퇴각한다!”

벽에 매달려 있던 죄수병들도 7일간 보루를 새카맣게 에워싸고 있던 1천이 넘는 적병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멍한 얼굴들이었다.

“아군이 옵니다!”

이트닌이 후방의 산 중턱을 가리켰다. 지난 7일 동안 저곳에 숨어 꿈쩍도 않으며 ‘전력 정비’인지 나발인지를 하고 있던 연대가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그보다 조금 먼 북쪽의 골짜기에서는 더 많은 병력이 막 판지셰르의 산맥을 넘어오는 중이었다.

“우리 군단본부 같습니다. 지난 7일 동안 반격을 준비한 모양입니다.”

“3일이라더니.”

보스의 퉁명스런 대꾸에 이트닌은 더 이상은 쓸데없는 ‘장군놀이’는 하지 않기로 했다. 분명 보스도 이 보루의 의미와 주변 상황은 알고 있었을 테지만 지금껏 스스로는 한 번도 연대장 탓을 한 일도, 도망친 아군을 씹어죽이겠다는 말도 한 일이 없었다.

“이겼다!”

아군 지원군이 돌아오고, 적군이 물러나는 모습을 완전히 확인한 죄수들이 비로소 서로 끌어안고 기쁨을 나누기 시작했다. 오르도 비로소 망원경을 내려놓고 죄수병들에게 돌아서서는 두 손을 치켜들고 크게 박수를 짝짝 쳐 보였다.

“수고 많았다.”

죄수병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망루 밑으로 모여들었고, 지금껏 울고 있던 망치 녀석도 갑자기 힘이 나는지 밑에서 휘파람을 불며 분위기를 함께 띄웠다.

“다 너희들과 저 구덩이에 누워 있는 동료들 덕분……응?”

죄수병들에게 격려의 말을 던지려던 오르가 뒤를 휙 돌아보며 몸을 움츠렸다.

“우읍!”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볼트가 그의 겨드랑이 조금 아래 옆구리를 꿰뚫으면서 죄수병들 사이에서 비명소리가 터졌다. 볼트에 맞아 쓰러진 오르마즈의 몸이 망루 위에 죽 늘어지며 밑에 모여 있던 죄수들의 머리 위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저격이다!”

날랜 이트닌이 바로 손도끼와 석궁을 집어 들고 보루 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북쪽이다! 너희 둘 따라와!”

“보스! 보스!”

다시 저격이 날아들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건장한 죄수 둘이 아랑곳없이 사다리를 타고 허겁지겁 망루로 기어올라 그를 어깨에 메고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 사이 발 빠른 베테랑 이트닌은 볼트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황무지 바위들 사이를 지그재그로 번개처럼 가로질러 접근하며 저격수를 조여 갔다.

“저기!”

이트닌의 빠른 반격으로 오르를 미처 확인사살하지 못한 저격병이 위장 수트를 허겁지겁 벗어던지고 북쪽으로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왜 북쪽이지?’

이트닌이 순간 의문을 품었다. 지금 적군은 남쪽으로 도망치는 중이고, 북쪽으로는 지금 민병대 주력군인 군단 본부가 오는 중이었다. 임무에 실패한 저격수는 후방에 미리 대기시켜놓았던 말에 훌쩍 뛰어올라 등을 보이고 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차가 거의 못 다니는 황무지에선 말이 훨씬 유용했지만 그렇다고 놓칠 이트닌이 아니었다.

“어딜!”

이트닌은 손에 익은 석궁을 번쩍 쳐들고 도망치는 저격수를 겨누고 바로 당겼다.

“우읍!”

이트닌의 일격에 목을 명중당한 말이 비명을 지르고 나뒹굴면서 저격수도 함께 돌바닥에 내리꽂혔다. 이트닌이 헐레벌떡 달려갔을 때, 그곳엔 온몸에 위장칠을 한 저격수가 바닥의 큰 돌덩이에 허리가 뒤로 꺾인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이 저격수가 떨어뜨린 듯한 저격수용 석궁이 보였다.

“어디 소속이냐.”

이트닌이 저격수의 턱을 붙들며 이를 드러내고 물었지만 예상대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건 헤네티용 석궁이야. 피아 막론하고 저격수들이 제일 선호하는 모델이지. 민병대에서도 실력 좋은 놈들은 저걸 어떡해서든 구해서 써. 내가 널 민병대라고 의심하는 게 그리 이상하냐?”

이트닌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 저격수는 숨이 조금씩 희미해지더니 뒤로 축 늘어졌다. 이트닌은 입을 씰룩거리며 석궁을 주워들었다. 석궁엔 헤네티의 정식 보급품 말고 여러 볼트를 쓸 수 있도록 카트리지 부분을 개조한 흔적이 있었다. 민병대 저격수가 분명했다.

“이럴 줄 알았지.”

이트닌은 뒤따라온 두 명에게는 아무 말도 않은 채 터벅터벅 보루로 되돌아가야 했다.

“저격수는 잡았다. 보스는 괜찮으시냐?”

보루로 돌아온 이트닌은 쓰러진 오르마즈를 에워싸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죄수병들에게 물었다. 급한 대로 의무병 노릇을 해 왔던 푸줏간 출신 죄수병이 계속 피가 흐르는 오르의 옆구리에 지혈을 하려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신장은 비껴난 것 같습니다. 볼트를 빼지만 않으면 한두 시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만 견디십시오.”

이트닌은 보루에 제법 가까워진 연대 선봉의 기병대를 보며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르의 옆에 쭈그려 앉아 방금 구해 온 헤네티 석궁을 쥐어주었다.

“보스 가지세요. 내 피를 한 번 봐야 진짜 내 무기가 된다잖습니까.”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오르가 이트닌에게 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예?”

이트닌이 오르의 입가에 귀를 바싹 들이댔다. 오르가 거칠게 끓은 소리로 물었다.

“코메트냐, 민병대냐.”

이트닌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이 젊은 보스는 이미 자신 못지않게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민병대, 아니, 연대나 군단장이 ‘쓸데없이 큰 공을 세운 죄수 패거리 보스’를 탐탁지 않게 여기리라는 것을, 생각하기도 싫은 ‘죄수 영웅’에게 공을 빼앗기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상하시는 대로입니다.”

이트닌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며 셔츠를 벗어 보스의 머리 뒤에 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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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름은 화산 옆면 혹은 밑에 생기는 작은 기생화산을 뜻하는 우리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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