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66 회: 파트11.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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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트 토벌대가 퇴각하면서 산 중턱에서 내려온 민병대 9연대의 선봉대 1백이 개선장군처럼 우렁찬 나팔소리를 울리며 오름의 동쪽 언덕을 올라왔다. 선봉대 중에는 뜻밖에 연대장의 모습도 보였다. 기수를 거느린 연대장은 번쩍거리는 갑옷에 투구, 잘 다린 근사한 푸른색 망토까지 두른 근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연대장과 지휘부, 기병들이 보루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안쪽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 새끼들 뭐야.”
참다못한 연대장 부장이 말에서 뛰어내려 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들기기 시작했다.
“뭐야! 이 죄수 새끼들! 당장 열지 못해!”
“열어 줄까요? 보스.”
문을 지키던 죄수가 당연한 것도 보스에게 물어왔다. 문 안쪽에서 들려온 이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연대장과 선봉대의 심사가 확 비틀어졌겠지만 죄수들에게 연대는 더 이상 전우가 아니었다.
저격으로 쓰러져 있던 오르가 사람들 사이로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펴 보이자 문을 지키던 죄수들이 비로소 안쪽의 문을 열고 바깥문 아래 고여 놓았던 쐐기도 뽑아냈다.
“이크!”
7일 내내 몇 번이나 불에 타고 발리스타의 집중 표적이 되었던 문짝은 쐐기가 빠지자마자 사방으로 잿가루와 먼지를 날리며 바깥으로 우당탕 쓰러져 버렸다. 덕분에 밖에서 빨리 열라며 문을 두들기던 연대장 부장이 문에 깔려 비명을 질렀다.
“푸하하!”
문에 깔린 부장의 비명에 죄수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열렬한 환호를 예상하며 왔던 연대장과 선봉대에는 말 그대로 황당하고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더러운 놈들.”
연대장은 짐짓 태연한 척 갑옷과 말에 앉은 먼지를 털어내고는 20여기의 기병들과 함께 쓰러진 문을 밟으며 보루에 발을 들여놓았다. 들어서자마자 풍겨온 시체 썩는 악취와 푹푹 빠지는 진흙탕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보다 더 그를 불쾌하게 한 건 환영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부상으로 쓰러져 있는 죄수들을 빼고 나머지들은 보루 위에 무표정하게 서 있거나 오르마즈가 있는 반대편 망루 아래 와글와글 모여서는 연대장 일행을 소 닭 보듯 하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격분한 연대장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기수에게서 깃발을 빼앗아가서는 보루 중간 바닥에 푹 꽂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9연대가 이 보루를 다시 수복했음을 선언한다.”
“뺏긴 일도 없었는데 수복은 개뿔.”
다리가 잘린 채 구석에서 신음하던 죄수 하나가 연대장의 외침을 듣고는 언성을 높였다.
“이놈 뭐야!”
연대장을 호위하는 기병들이 부상병을 위협하려다가 어딘지 심상찮은 분위기에 주춤주춤 멈춰 섰다. ‘수복’이라는 말에 발끈한 죄수병들이 적의 퇴각과 함께 내려놓았던 이 빠지고 녹슨 무기를 하나 둘 움켜쥐고 있었다.
“지금 수복이라고 개소리 한 게 누구야.”
조금 전까지도 죽을 듯 끙끙대던 ‘망치’가 한 손에 해머를 집어 들며 무너진 토루의 대들보를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수복’이라는 건 죄수들이 7일간 사투를 벌여 이곳을 지켰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뒤이어 다른 죄수들의 분노에 찬 고함이 차례로 울렸다.
“내 귀가 잘못된 거 아니지? 저놈들 지금 수복이라고 했지?”
보루 토벽 위에 둘러선 죄수병들 손에서 석궁이 철크덕 하며 장전되는 소리가 차례대로 울리며 얼떨결에 중간에 고립된 20여명의 지휘부를 순식간에 포위했다.
“가만, 저놈 3일 이따가 온다고 했던 그 새끼 아냐?”
방금 보루 문을 열어 주었던 수문장 죄수가 안쪽의 문을 확 잠가버리고는 재빨리 토벽 위로 기어올랐다. 눈 깜짝할 새 시체구덩이 보루 안에 갇혀버린 20여명의 지휘부가 당황하며 연대장 주변으로 모여서는 두려움을 감추고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들 감히 어디서 무기를 쳐들고 지랄이야!”
호통은 여기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사고를 친 전력이 있는 죄수들이었고, 여기서 또 큰 사고를 친다 해도 고작해야 나중에 죽을 것 조금 먼저 죽을 뿐이었다.
“이놈들…… 뭐 하자는 속셈이야?”
죄수들에게 포위당하고 공포에 질린 연대장의 턱이 따닥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잠긴 문 바깥에 남겨진 선봉대가 무슨 일이냐며 고함을 질렀지만 굶주림에 이성을 잃고, 이젠 속임수에 분노한 죄수병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바깥에 있는 민병대들이 잠긴 보루 문을 때려 두들기고 있었지만 연대장 일행을 죽일 시간 정도는 충분했다.
그때, 서쪽 망루 아래 모여있던 죄수들 사이에서 작은 체구의 사내 하나가 침착하게 나서서는 입을 열었다.
“이 보루를 7일간 사수한 2군단 직속 수형대대에 9연대가 지원군으로 도착했다고 말씀하신 것 아니십니까? 아무래도 흥분한 병사들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9연대장님. 맞습니까?”
이트닌이 연대장을 힐끔 올려보았다. 연대장이 바로 대답을 못 한 채 우물쭈물하는 동안 토벽 위의 죄수 몇은 이미 그를 향해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이트닌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말씀해 주십시오, 지원군으로 오신 것이 아니신지요? 저흰 군단 직속부대이고 이곳은 2군단 작전지역입니다. 9연대가 저희 군단 작전지역에 무단으로 진주했다면 내란이 의심되는 상황이므로 교전수칙에 의거해 정당하게 공격할 수 있습니다.”
이트닌이 뒤의 한 마디에 힘을 주었다. 물론 엉터리 궤변이지만 뭔가 그럴싸한 협박으로는 충분했다. 이트닌이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저흰 통신장비도 없어 군단에 확인연락도 불가능하고, 정식 지휘관도 없습니다. 협의로 결정해야 하니 빨리 답변을 주십시오.”
다급해진 연대장이 하는 수 없이 일단 꼬리를 내렸다.
“그래, 그, 그동안 여길 지키느라 수고한 수형대대와 임무 교대를 위해 왔다.”
결국 연대장이 무릎을 꿇자 이트닌이 병사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며 손짓했다. 하지만 지독한 굶주림과 피에 미쳐버린 죄수들이 모두 이트닌처럼 침착하지는 않았다.
“이봐, 내란 그거 말 되네, 어차피 나가면 딴소리 할 텐데 그냥 죽여버려!”
토벽 위의 죄수 분대장 하나가 씩씩거리며 목소리를 높이자 이트닌의 지시에 멈칫거렸던 다른 석궁수들도 약속한 듯 우르르 다시 무기를 쳐들었다. 그 모습에 연대장의 변명도 더 커졌다.
“아, 아니, 정말이라니까! 정말로 지원군으로 온 거라니까! 삼, 삼일 만에 못 온 건 군단의 행군이 늦어져서라고!”
연대장의 장황한 애원이 이어졌지만 죄수들은 아랑곳없이 석궁을 장전하고 가늠자에 눈을 가져갔다. 연대장이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정말, 정말 약속한다니까! 여긴 7일 동안 너희가 지킨 게 맞아!”
배신당한 죄수들에 둘러싸인 연대장과 일행들이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그만.”
작은 목소리 한 마디에 폭발 직전의 죄수들이 일제히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았다. 극한의 공포까지 몰렸던 연대장은 이 한 마디에 험악한 죄수들이 일제히 누그러들지 놀란 듯 눈알을 양옆으로 재빨리 굴렸다.
“이렇게라도 와 주셔 감사합니다, 대령님.”
옆구리를 다친 오르마즈가 양옆에서 죄수들의 부축을 받아 절반 부서진 의자에 앉으며 끄응 소리를 냈다.
“저흰 더 잃을 것 없는 처지라는 건 아시겠지요.”
젊은 보스의 노골적인 협박에 연대장의 낯빛이 백짓장이 되었다.
“아참, 이 헤네티 석궁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오르마즈가 방금 이트닌이 구해 온 저격용 석궁을 무릎 위에 놓으며 음산하게 웃었다. 그는 입으로는 예의바르게 말하면서도 눈으로는 연대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제 옆구리에 박혀 있는 이 볼트도 말이죠.”
화들짝 놀란 연대장은 얼른 오르의 다음 말을 막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래, 너희 모두 수고했다. 그러니 당장 보루 문을 열고 지원군을 들여보내!”
“뭐가 그리 급하신데요?”
오르가 계속 여유를 부렸다. 이대로 문을 열어줬다가는 바깥의 정예병들이 몰려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아직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저것들 보이시죠?”
오르는 무너진 토벽들 밑에서 삐죽삐죽 모서리를 내밀고 있는 통을 돌아보았다. 죄수들이 항복할 때를 대비해 저 연대장이 보루 곳곳에 묻어놓고 간 인화물질 통이었다. 저것들이 한 번에 터졌다가는 오름 꼭대기 전체를 한 방에 날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약속대로 사수했으니 저 기폭장치를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받아오겠습니다, 보스.”
이트닌이 재빨리 달려가 연대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궁지에 몰린 연대장이 다시 좌우를 둘러보았다. 토루 위의 죄수들은 당장이라도 다시 석궁을 쳐들 태세들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목에 걸고 있던 작은 무선 기폭장치를 풀어 이트닌에게 내놓았다. 장치를 받아든 이트닌이 후다닥 달려와 오르의 손에 장치를 쥐어주었다. 순간 죄수들 사이에서 조금 전 승전을 했을 때보다 더 큰 함성과 휘파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르가 한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저희가 이곳을 넘겨드리고 군단 본부로 안전하게 물러날 때까지는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아참, 통 중의 상당수는 무너진 토벽에 깔려 있어서 한동안 파내기 어려우실 겁니다.”
기폭장치를 받아든 오르가 악마처럼 웃으며 기폭장치를 목에 걸었다. 일병 출신 보스의 기세에 완전히 짓눌린 연대장은 그는 보루 중간에 박아놓았던 연대기를 슬그머니 빼서 다시 기수에게 넘겼다.
“이봐.”
오르의 손짓에 비쩍 마른 죄수 한 명이 그동안 망루 옆에 꽂혀 있던 수형대대 깃발을 가져다가 그 자리에 깊이 꽂아 넣었다. 오르가 잠겨 있던 문을 향해 손을 쳐들었다.
“문 다시 열어줘라. 지원군들이다.”
기원 25년 봄, 대신관 후계자 아스탈의 주도로 코메트 9만을 동원한 대공세는 민병대를 궤멸 가까이 몰아넣은 1개월간의 대장정이었다. 그 시작이었던 지도자 파냐드 암살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지만 그가 중상을 입고 자리를 비운 것만으로도 코메트엔 더도 없는 기회였다. 그때를 틈타 아스탈은 3개의 집단군으로 민병대 본거지인 판지셰르에 총 공세를 퍼부었다.
막후에서 모든 계획을 추진한 아스탈은 세 집단군 중 하나는 민병대 주력군을 잡아두는 역할을 하고, 나머지 둘이 돌파에 성공하는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실제로 북쪽의 툰드라를 통해 남하하던 1집단군이 민병대 주력군과 ‘툰드라의 회색곰’ 슈엘러 쉐너 대령의 원주민 부대에 막힌 동안 나머지 두 집단군의 전투부대가 서쪽과 남쪽에서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계획대로 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산맥 남쪽 기슭의 한 오름에서 3집단군의 보급부대 진로가 막히면서 계획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노발대발한 아스탈이 집단군 사령관과 연대 지휘관을 해임하고 6일째부터는 직접 지휘까지 맡고 나섰지만 결국 오름을 점령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급이 딸리고 병력이 쪼개진 3집단군은 툰드라에서 달려온 슈엘러 쉐너 대령의 반격을 받아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코메트 제일의 명장 ‘진줏빛 마녀’ 모스 바에자 장군의 2집단군은 민병대가 ‘절대 뚫릴 리 없다’며 자신했던 산맥을 돌파해 지도부가 달아난 민병대 사령부까지 모조리 태워버리는 전과를 올렸지만 뒤를 받쳐 줄 부대가 없어 결국 눈물을 머금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칫 다른 이름으로 기억될 뻔했던 오름에서의 7일간의 혈전은 죄수들의 바람처럼 [오름 사수전]으로, 그리고 개국공신 오르마즈의 첫 승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덕분에 교과서에까지 실리는 유명한 전투가 되어 당시 참전한 죄수들에게도 평생을 두고두고 자랑할 거리를 선사했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죄수들의 분전은 아무 주목도 받지 못했고 보상도, 훈공도 주어지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가장 큰 공을 세운 슈엘러 쉐너 대령이 민병대의 영웅이 되어 장군으로 승진한 건 당연했지만 죄수대대를 사지에 놓아둔 채 물러났던 9연대장에게 ‘옳은 판단’을 했다는 이유로 훈장이 주어진 건 죄수들에겐 충격이었다.
오르마즈의 때늦은 사면은 폭동 직전까지 간 심상찮은 분위기에 놀란 민병대 지휘부의 결정이었다. ‘위험인물’을 아예 죄수부대에서 빼내는 게 좋겠다는 제안을 받은 지도자 대리 에르네스토는 오름 사수전의 생존자 전부에 사면 혹은 감형을 명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이등병으로 복귀했을 오르에게는 장교로 임관시키라는 뜻밖의 지시까지 덧붙였다.
그렇게 오르마즈는 소위가 되어 8년 만에 판지셰르의 화산재를 다시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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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비엔의 슈발츠발트 숲을 여섯 괴한들이 살금살금 지나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그림자를 선두로 3개의 크고 건장한 전사의 실루엣이 보였고, 그 뒤로 보통 사람의 그림자 둘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따르는 중이었다. 선두에 선 여자는 다른 다섯 명과 비교가 될 만큼 작다보니 도리어 눈에 쏙 들어왔다. 분명 낮 시간이지만 거목들과 빽빽하게 우거진 수풀 때문에 마치 새벽이나 어슴푸레한 저녁시간 같았다.
“잠깐.”
두세 시간동안 거친 숲을 가로질러 온 일행은 선두의 손짓에 얼른 멈춰 섰다. 지금껏 일행을 인도했던 작은 체구의 여자는 손에 든 지도를 가방에 넣으며 나무 틈새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옛날에 버려진 듯한 오래된 벽돌 저택이 이후 자란 덩굴들에 뒤덮인 채 내버려져 있었다.
“저기 맞아요?”
선두의 니사가 저택을 가리키며 뒤따라온 전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사이에 섞여 있던 짙은 피부색의 여자가 고개를 쓰윽 내밀었다. 빽빽한 수풀 사이에서 두 개의 하얀 눈자위만 유독 번들거렸다.
“돌아버리겠네. 저건 아니잖아.”
건물을 확인한 세데스는 고개를 저으며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벽돌건물이 아니고 대리석이니까. 어쩐지, 경비병도 안 보이는 게 이상하다 했어.”
지친 세데스가 이마를 싸쥐며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흙투성이가 된 니사도 허탈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젠장, 뭐 하나 맞는 게 없네.”
“기왕 지붕 달린 곳 만났으니 잠깐 한숨 돌리고 가자.”
허탈해하던 세데스가 앞장서서 버려진 저택으로 향했다. 몇 시간이나 숲을 강행군했던 일행들은 퍽퍽해진 다리를 두들기며 을씨년스러운 저택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젠 또 어딜 가야 하나.”
거실 구석에 웅크려 앉은 니사는 방금 가방에 넣었던 지도와 옛 비엔의 수도원 설계도를 꺼내보았다. 1천년 가까이 된 문서들은 이제 누렇게 변색되고 삭아서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공용어, 심지어 바람어도 정착되기 이전 문서다보니 그림 정도만 알아볼 수 있을 뿐 문자로 된 부분은 숫자 정도를 빼면 읽을 수도 없었다.
“지금 보니 잔딕에 새겨져 있던 숫자가 이거랑 꽤 비슷하네요.”
“고작 숫자만 읽을 수 있는 도면 들고 와서 찾겠다고?”
신경이 곤두선 세데스가 죄 없는 니사에게 마구 짜증을 냈다.
“어떻게 당신네 교단 수도원을 못 찾아? 좌표도 없어?”
“이봐요, 850년 전에는 절대 좌표를 안 썼다고요. 여기엔 ‘까사 델 파즈’라는 수도원 이름하고 지금은 있지도 않은 옛날 길 이름하고 주변 지형만 나와 있는데 어쩌라고요. 그것도 공용어로 통합되기 이전 문자라고요, 댁은 읽을 수나 있어요?”
세데스의 재촉에 부아가 난 니사가 지도를 대뜸 코앞에 들이댔다.
“당시엔 개척 초기라 주소도 제대로 없었어요. 게다가 지금 같은 숲도 아니고 습지였다고요. 나중에 관개공사를 해서 숲이 되면서 길하고 지형이 다 변했는데 어쩌라고요. 외지인인 나도 아는 걸 남극성당까지 나왔다는 여기 제후가 몰라요?”
니사의 따발총같은 공격에 할 말이 막힌 세데스는 죄 없는 빵만 짜증스레 뜯으며 혼자 씩씩거렸고 니사는 맞지도 않는 옛 지도와 도면, 시방서와 배치도를 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도면과 옛 지도에 있는 문장만 다 해석해도 범위를 훨씬 좁힐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게 안 되니 문제였다.
“하기야, 그놈의 케케묵은 고대어 나부랭이나 붙들고 되도 않는 도리나 떠드는 논리력 결핍증 환자들만 모인 주제에.”
니사가 심술을 부렸지만 이번엔 세데스도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말문이 막힌 그는 일단 질문으로 니사의 입을 막았다.
“가야 될 곳이 몇 개 남았지?”
“비슷한 지형을 말씀하시는 거면 우리가 자동 추출한 것만 286개 정도요. 저희 말고 보안국 수색대가 다섯 팀 와 있으니 나눠서 둘러봐도 하나에 반나절씩…….”
“미치겠네.”
세데스가 이마를 싸쥐며 씩씩거렸다.
지난 며칠은 그에게 지옥 같았다. 교단에 속아 아라무트의 정글에서 며칠이나 생고생을 하고, 부상을 입고 돌아간 델루지 종가는 이미 원로들이 장악한 후였다. 이디나의 공작에 넘어간 원로들은 ‘살았든 죽었든’ 오르테 부인을 내놓으라며 아라무트의 사지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그를 종가 문 앞에서 쫓아내버렸다.
물론 그도 떳떳한 처지는 아니었다. 어머니를 누가 죽였든, 명색이 딸이라는 자가 살해당한 어머니의 시체를 감춘 것만도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남부에서 탄핵감인 건 분명했다. 문제는 그가 선처를 호소하고 싶어도 어머니의 시체를 이미 남의 손에, 그것도 그를 제거하려 안달이 난 교단 손에 넘겨줬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가문에 영영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어쨌든, 일단은 엄마의 시체를 찾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리고 황제와의 약속대로 주페도 구해내려면 문제의 수도원 ‘까사 델 파즈’ 부터 반드시 찾아야 했다.
“태자를 꼭 찾아야 하는데.”
이번엔 니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세데스에겐 말 못 하고 있지만 ‘주페가 죽으면 코리온의 대가 끊길지도 몰라.’라는 귀띔 한 마디에 그는 고생길이 될 것이 뻔한 이번 일에 자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286개를 다는 못 찾아요.”
니사의 말에 세데스가 눈을 흘겼다.
“허어, 반나절 만에 벌써 포기한다고? 퍽이나 논리적이네.”
“지금 상태로는 못 찾는다고요.”
니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자신을 이곳까지 호위하고 온 2명의 보안국 요원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들도 지쳤는지 입구 부근에서 서로 물을 나눠 마시며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
세데스도 덩달아 작은 소리로 물으며 니사와 바싹 붙어 앉았다. 서로가 달가운 관계는 아니지만 일단 목적이 일치하는 이상은 손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지도의 고문자는 우리 고문서학자들이 해독하는 중이에요. 하지만 당시는 수십 개나 되는 언어들이 뒤죽박죽 쓰이던 때예요. 해석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매번 해석 결과를 놓고 싸움이 벌어질 만큼 한마디로 개판이에요. 인정하기는 부끄럽지만 우리 학자들 머리 다 합쳐도 이거 다 해석하려면 분명히 수십 일은 걸려요.”
“그러니까 본론부터 말해.”
맘이 급해진 세데스가 짜증을 내며 니사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태자를 구한다면 이걸 광속으로 해석할 사람이 있기는 하죠.”
그제야 니사의 의도를 눈치 챈 세데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그 벽창호 서생한테 교단 문서 해석을 부탁한다고? 허, 태자가 아니고 황제가 교수대에 매달려 도와달라 해도 교단 물건엔 손 안 댈걸.”
“아닐걸요?”
니사는 다시 보안국 요원들의 눈치를 보았다. 문서 해독을 코리온에게 맡기자는 이야기는 니사가 진즉 내놓았었지만 황제는 학장이 보나마나 직접 구하러 나설 거라며 펄쩍 뛰었던 터였다. 차라리 주페를 늦게 찾는 한이 있어도 코리온이 끼어들게 해선 안 된다고 황제가 못을 박아 놓았으니 니사로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니사가 눈치를 보며 잔뜩 숨죽인 소리로 말했다.
“난 사정이 있어서 그분한테는 연락 못 하니 당신이 연락해요. 알았죠? 당신 혼자 알아서 연락한 거지 난 전혀 모르는 거예요. 나하곤 아무 관계 없어요.”
니사가 두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세데스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그런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잠시 쳐다보던 세데스는 니사에게서 지도와 문서를 넘겨받았다.
“그 벽창호가 안 도와준다고 하면 알아서 해.”
세데스는 지도와 문서를 재빨리 영상 데이터로 옮겨 담고는 사람들이 안 보는 집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니사는 세데스가 코리온과 몰래 연락하는 광경을 짐짓 못 본 척 피곤한 듯 하품을 하고 구석에 웅크렸다. 코리온이 어찌 나올지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지만 그의 입장은 황제와는 달랐다.
‘운명을 거부하면 당신도 별 수 없죠.’
니사가 눈을 감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구스 자리를 죽어라 거부하고 있는 코리온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이 니사에게는, 아니 트라카 교단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수나의 사후 트라카 교단을 혼자 힘겹게 이끌고 있는 니사로서는 주페만 구할 수 있다면 그 골 아픈 유학자에 계속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마구스가 되지 못한 혈통은 어차피 도태되니.’
니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알면 경을 치겠지만, 트라카 교단 입장에서는 차라리 가망 없는 코리온을 일찌감치 도태시키고 아직 어린 주페를 새 마구스로 지금부터 키우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니사는 다시 세데스 쪽을 돌아보았다. 막 연락을 마친 세데스가 자신도 믿어지지 않는지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지금 여기로 직접 온다는데 어쩌지?’ 라며 입놀림을 해 보였다. 황제가 걱정했던, 그리고 니사가 예상했던 결과였다.
니사가 웃으며 답했다.
“내 그럴 거라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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