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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968화 (963/1,132)

< -- 968 회: 파트11.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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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나의 파격적인 요구에 잠시 대답이 없던 카렐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디나는 황제의 얇고 파리한 입술을 당장이라도 차지하고 싶은 맘을 꾹 억누르며 한 발 물러났다.

“들어가는 길은 저도 자료에서만 본 거라서 헤맬지도 몰라요.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새벽까지 수학원 지하를 모두 비우고 아무도 훼방 놓지 못하게 해 주세요.”

“기꺼이.”

밖에 있는 사에나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보낸 황제가 큰 늑대털을 어깨에 조이고는 허리에 칼을 찼다. 발밑까지 늘어진 늑대털 때문인지 몰라도 전보다 더 커 보이는 그의 체격이 이디나를 묘한 흥분으로 이끌었다.

“따라오세요.”

이디나가 가방에서 랜턴을 꺼내들고 수장고 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기둥에 붙어있는 숫자를 하나하나 살폈다.

“90-001번 기둥 왼쪽.”

수장고는 하나로 이어진 공간이지만 워낙 많은 기둥과 간막이벽, 수장품들로 가득 차 있다 보니 깜박 방향을 놓쳤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심지어 이곳의 관리인이나 부업으로 청소를 하는 생도들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를 정도라고 투덜댈 정도였다. 이곳에서 길을 잃지 않고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은 각각의 기둥에 붙은 고유번호 뿐이었다.

“여기요.”

이디나가 가리킨 곳에는 이젠 별 가치도 없는 오래된 민병대 군복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옷들을 치우고 구석으로 들어간 이디나는 ‘청소용품 보관실’이라고 쓰여진 작은 문의 자물쇠를 쥐고 황제를 돌아보았다.

“여기인가 봐요. 이 정도는 해결해 주실 거죠?”

카렐은 그에게 물러나라 손짓하고는 자물쇠를 통째로 힘껏 손으로 잡아당겨 단번에 끊어냈다. 문고리가 떨어지면서 어두컴컴한 방이 나타났다. 안에는 오랫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듯한 바싹 마른 빗자루와 걸레 같은 것들이 구석에 몇 개 있을 뿐 텅 비어있었다. 이상하리만큼 찬 기류를 느낀 순간, 카렐은 바로 이곳의 정체를 눈치 챘다.

이디나가 빗자루를 치우고 안쪽 벽을 밀어내자 아니나 다를까, 더 깊은 지하로 뚫린 시커먼 좁고 굴이 입을 벌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오세요.”

이디나가 랜턴을 들고 앞장서 나아갔다. 굴은 사람 한 명이 가까스로 지나갈 정도 크기에 바위를 깨어낸 모양 그대로였고 따로 마감은 없었다. 천장엔 먼 옛날 설치한 듯한 광산용 등도 있지만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가파른 굴은 몇 번을 구불구불 돌아 계속 아래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 방향감각이 흐려지기는 했지만 대충 태학전 밑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굴은 습하고 한기가 흘렀다. 앞서가는 이디나의 비로 젖은 몸에서 옅게 김이 오르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간 후, 둘의 앞에 바람어가 새겨진 웬 돌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맘 파티카람 니야쉬타야 카르타나이……. 이 건물은 나의 창조물이로다.”

카렐이 돌문을 손으로 짚으며 속삭였다. 그리고는 문을 힘껏 뒤로 밀었다. 제법 묵직한 저항감이 느껴지는 것이 보통 사람 한 명의 힘으로는 열기 어려울 듯했다.

“흐음.”

문 너머에 발을 들여놓은 카렐이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랜턴 따위로는 밝힐 수 없을 만큼 넓은 지하신전이 펼쳐져 있었다. 벽과 천장은 돔 모양으로 깎아낸 거친 바위모양 그대로이지만 바닥엔 거울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진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지름만 250척(75m)은 되어 보이는 이 거대한 공간에 기둥이라고는 중앙의 제단 주변 4개가 전부였다. 카렐과 이디나는 이 웅장한 지하 홀의 벽에 뚫린 한 작은 발코니석에 서 있었다.

“언제였지?”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난생 처음 와 본 곳이지만, 이 비슷한 곳에 언젠가 와 본 것 같다는 데자뷰를 문득 느꼈다.

“여기가 대체 뭐 하던 곳이지?”

“다하카르 가문의 자궁이었죠. 여기서 잉태되고, 태어나고, 처음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시 잉태하고.”

이디나가 카렐에게 돌아서며 엷게 웃었다.

“제 아버지도, 할아버지 야푸르와 할머니 이디나도 이곳에서 잉태되셨죠.”

이디나가 묘한 눈웃음을 흘리고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여기에요. 따라오세요.”

이디나가 랜턴으로 앞을 밝히며 발코니에서 바닥으로 이어진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려갔다. 바닥에 내려선 이디나는 벽을 더듬더니 스위치 하나를 올렸다. 그러자 벽과 천장의 조명 몇 개가 깜박거리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너무 오래되어서인지 작동되지 않았다.

“그래도 몇 개는 켜지니 다행이네요.”

“흐음.”

중앙의 제단으로 다가가려던 카렐이 눈가를 찡그렸다. 2백 구쯤 되어 보이는 유골이 제단이 있는 언덕을 몇 겹의 동심원으로 줄을 맞춰 에워싼 채 누워 있었다. 유골은 전혀 훼손이 없이 죽을 때 상태 그대로였고, 대부분은 군인, 일부는 성직자 차림이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누워 군인들은 이가 빠지거나 부러진 칼을 보물처럼 품고 있었다.

“이자들은 다 뭐고?”

“아프라시아 관을 마지막까지 지키던 198명의 헤네티들이요. 입구를 막은 오르마즈 경이 직접 들어와 항복을 권했지만 거부하고 보다시피 집단으로 음독자살했어요. 그 후에 오르마즈 그 사람이 존중의 의미로 입구를 무너뜨리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다죠. 저렇게요.”

앞서가던 이디나가 신전의 제일 안쪽을 가리켰다. 세 마리의 용의 천장까지 몸을 꼬며 오르는 모양의 자연석 문틀 사이로 지금은 돌로 막혀 있는 주출입문이 보였다.

무너진 출입문 부근에는 위의 수장고에 있는 것과는 격이 다른 고급스런 장식품들과 보석, 조각상들이 있고, 그 안쪽의 장식장엔 고위 신관, 마구스들이 입던 예복들도 정리되어 있었다. 당장 입어도 될 만큼 보존상태도 모두 완벽해 가치를 매기기 어려울 만큼 귀한 유물들이었다.

하지만 카렐의 눈을 가장 강하게 사로잡은 건 신전 모퉁이에 사람 키 몇 배의 높이로 쌓여있는 책과 서류, 진공튜브와 데이터 칩 더미였다. 모두 제대로 분류도 되지 않은 채 쌓여 있어 언뜻 쓰레기 매립지 하나를 통째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남극성당이 민병대에 넘어갈 때 아프라시아 관에 남아있던 연구 자료예요. 헤네티들이 닥치는 대로 가져다가 던져놔서 그 모양이 되었어요. 타리프 신관이 연구하던 R의 자가면역질환 자료와 종균도 여기 있는 걸로 되어 있어요. 아트위야 마구스가 갖고 있는 종균도 먼 옛날에 여기의 균주에서 분양받은 것이었죠.”

카렐이 자료 무더기 중간에서 책 하나를 집자 그 위의 책과 칩, 자료들까지 우수수 쏟아져 바닥에 흩어졌다. 카렐은 손 댈 엄두도 나지 않는 엄청난 무더기를 올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많은 것 중에 대체 어떤 거냐?”

카렐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제단 옆에 선 이디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쉽게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카렐은 어른 몸통만한 큰 나무상자를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종균과 실험용 세포가 들었을 수백, 아니 수천 개가 훨씬 넘을 캡슐들이 고유번호 하나이 달랑 붙은 채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대체 몇 번이냐고!”

마음이 급해진 카렐의 목소리가 신전 안을 쩌렁 울렸다. 이디나가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음흉하게 웃었다. 빗물에 젖은 그의 몸에서 습하고 차가운 공기 속으로 김이 모락모락 솟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번호는 적어 왔으니. 관련된 자료가 든 파일 번호도요.”

이디나가 몇 개 없는 조명을 도로 꺼 버리면서 이 거대한 신전 안에는 이제 제단 위의 작은 횃불 하나만 남아 흔들리고 있었다. 카렐은 그런 이디나를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출발할 무렵부터 여자의 속내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지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의 축축한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약속은 지켜요. 대신 제게도 성의를 다해주세요.”

이디나가 제단 위에 걸터앉으며 카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카렐은 수많은 전사의 유골들 사이를 가로질러 천천히 제단에 다가갔다.

잠시 격해졌던 감정을 가라앉힌 카렐은 제단에 앉아있는 이디나의 젖은 어깨에 늑대털을 벗어 덮어주었다. 이디나는 모피에 밴 카렐의 냄새를 한 번 맡아보고는 비로소 입가에 순수한 웃음을 품었다.

“이 정도론 안돼요.”

이디나는 모피를 두른 채 제단 위에 완전히 올라앉았다. 방금 전까지는 단단한 돌처럼 보였던 제단 위가 그가 앉자마자 마치 젤리처럼 푹신하니 출렁거렸다. 이디나가 손을 내밀어 카렐의 큰 손가락을 누군가의 손목을 잡듯 꼭 쥐었다.

“나 아직 숫처녀에요.”

“……난 제국 황제다. 누구든 안을 수 있지만 아무나 안지는 않는다.”

카렐의 말투는 냉담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이디나를 향하고 있었다. 볼품없는 뾰족한 턱에 매부리코, 크지도 않은 째진 눈매, 누구라도 못생겼다고 말할 외모에 심지어 핏줄까지도 적의 딸이지만 그의 이런 노골적인 유혹이 이상하게도 아주 싫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당신을 택했죠.”

이디나가 제단 위에서 몸을 일으켜 카렐의 가슴을 다시 끌어당겼다.

“이런 날 아름답게 보는 한 사람이면 충분해요.”

이디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카렐은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직접 하나 둘 빼기 시작했다. 이디나는 그의 어깨를 감은 검은 용 문신을 살짝 깨물며 눈을 감고 품을 파고들었다. 두 대신관은 수백의 충성스런 전사들이 에워싸고 지켜보는 가운데 그렇게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수장고의 회담에서 쫓겨나 있던 쿠마르와 야투 박사는 폭풍우가 몰아치던 지난 밤 내내 분을 삭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차였다. 그들은 협상에서도 철저히 배제되었고, 내용에 관해서도 대신관은 그들과 일말의 상의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사에나는 그들에게 ‘사자는 황상께서 내어주신 좋은 처소에서 하룻밤 자고 갈 참이다.’라는 말만 일방적으로 전달했고, 정작 어디서 자는지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사자의 신변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며 펄펄 뛰었지만 그 뻣뻣한 보안국장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결국 화가 꼭지까지 다다른 그들이 ‘주제도 모르고 실세인 자신들을 농락한 1회용 대신관’을 이번엔 어떤 식으로든 혼구멍을 내 놓지 않으면 앞으로 후환이 더 커질 것 같다는 데 합의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침까지도 잔뜩 골이 나 있던 쿠마르와 야투 박사는 대신관이 황제와 아침식사까지 함께 하고 나온다는 말에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장 난 셔틀을 대신 도착한 셔틀 앞에 웅크리고 앉아 내심 벼르고 있던 그들은 막상 대신관을 마주한 순간 지난밤 잔뜩 준비해 놓았던 독설 중 단 한마디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밤새 해사해진 얼굴이 되어 돌아 나오는 이디나의 뒤에는 그동안 포로로 잡혀 있던 살름의 딸 하페즈가 따라오고 있었고, 아트위야 아들의 시신이 담긴 관도 보안국 요원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가씨?”

지난밤의 독설을 꿀꺽 삼켜버린 둘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도 애당초 이번 협상이 성사되기 거의 불가능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디나는 멍해져 있는 그들 앞을 태연히 지났다. 대신관은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던 협상을 성사시키고 능력을 증명한 셈이었다.

“뭐가 그리 놀라운가.”

이디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셔틀에 성큼성큼 올랐다. 그리고 포로에서 풀려난 하페즈 역시 그를 따라 셔틀에 올랐다.

셔틀에 막 들어선 하페즈는 멀리 수장고 입구에 서서 자신들 일행을 쳐다보고 있는 황제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황제가 무슨 의도인지 그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후훗.”

자신에게 보내는 작별인사라고 생각한 하페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처음에 협박을 당하기는 했지만 고분고분 복종한 덕분에 그 이후로는 딱히 학대나 고문을 당한 일도 없었다.

사실 황제는 무료해하는 그를 틈틈이 찾아와 다과까지 함께하며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를 나누어 주었다. 물론 대화 도중 튀어나오는 비밀을 주워보려는 속셈이었겠지만 마구스의 후계자로 거의 수백 년을 누군가와 개인적인 관계를 끊고 살아 온 그에게 그런 대화를 나누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말벗 이상의 호감은 절대 아니었고, 마구스 후계자로서의 본분을 잊은 일도 없었다.

셔틀 문이 닫히자 하페즈는 그간 나름 정들었던 황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가에 담고 안쪽으로 돌아섰다.

“욱!”

문이 닫히자마자 무언가에 얻어맞은 하페즈의 뺨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어딜 그리 쳐다보나.”

“뭐? 뭐야?”

눈 깜짝할 새 뺨을 맞은 하페즈는 얼떨떨한 얼굴로 이디나를 쳐다보았다. 고작 대신관의 잡종 딸이 마구스 후계자를 때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하극상이었다. 발끈한 하페즈가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코런덤 헤네티들이 얼른 그의 앞을 막아섰다.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하페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싸늘하게 눈을 부릅뜬 이디나가 셔틀의 제일 뒤쪽 상석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지난밤 황제와 함께 누웠던 늑대털을 싼 꾸러미를 보물처럼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지금부터 황제에게 눈깔이라도 돌렸다가는 저자에게 홀려 배신한 줄로 알겠다. 알겠느냐?”

이디나는 여전히 씩씩대며 서 있는 그 다혈질의 후계자를 흘겨보며 태연히 물었다.

“뭘 그리 보는가, 위대한 현신의 새 몸이 맘에 안 드는 것이냐, 하페즈 빈트 샤마시.”

그제야 실상을 눈치 챈 하페즈의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위대한 현신이시여.”

정신이 퍼뜩 든 하페즈는 한 마디 대꾸도 못한 채 구석 자리에 쪼그려 앉을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입이 근질근질한지 눈치를 보던 쿠마르가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기뻐하실 소식입니다. 아라무트의 정글에서 행방불명되었던 사카 대장이 구조대에 발견되었습니다. 영감의 궁전에서 2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탈출했지만 한 명은 중간에 잃었고 한 명을 구해서 데리고 나오는 중이었습니다. 바로 혼수상태에 빠져 후송중입니다.”

“거 봐라, 내 뭐라고 했나.”

또다시 얻은 희소식에 이디나가 자리에서 손뼉을 짝짝 쳤다. 그간 아랫사람들의 집요한 재생 요구에도 끝까지 기다리겠다고 버티며 모두가 반대하는 구조대까지 파견했던 새 대신관의 또 하나의 승리였다.

“그날 결정이 오판이었던 건지, 최고의 결정이었던 건지 정말 헛갈리는군.”

야투 박사가 쿠마르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그 둘은 새 대신관이 어쩌면 1회용으로 쓰고 버릴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셔틀은 막 날씨가 개기 시작하는 남극성당을 박차고 이륙하기 시작했다.

“저어, 어떤 조건으로 성공하신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궁금증을 참다못한 야투 박사가 물었다.

“성공? 그게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군, 양쪽 다 손해 볼 건 없는 결과를 얻었으면 된 것 아니냐?”

야투 박사는 차마 더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새 셔틀이 좋긴 좋네.”

황제까지도 감쪽같이 속여 넘긴 이 무서운 새 대신관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조금 전 바로 자신이 하페즈에겐 눈길도 주지 말라 했던 황제 쪽을 혼자 ㅤㄸㅡㅀ어지게 보았다. 밤새도록 보고 또 보았지만 아직도 시선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지난밤 함께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모르는 황제는 여전히 수장고 문 앞에 서서 떠나는 셔틀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제의 손에는 그가 찾아 건네준 면역억제제 제조법 파일과 종균 캡슐이 소중하게 쥐여 있었다. 이제 곧 황궁 내명부엔 황제가 황자들의 치료법을 찾았다는 희소식이 퍼질 테고, 조금만 서두른다면 한 달 이내로 완벽한 발작 예방약을 만들어낼 수 있을 터였다.

사실 이디나도 계산 없이 저것들을 내준 건 아니었다. 며칠 후 있을 그의 큰 거사에는 ‘앞으로도 계속 살 수 있는’ 장태자가 꼭 필요했다. 물론 설사 독이 든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황제가 ‘자식을 살리는 약’을 마다하지는 못했겠지만.

“황제도 세상 빛 볼 날 며칠 안 남았네.”

이디나는 가슴을 더듬어서는 작은 병을 꺼냈다. 지난 저녁까지도 황제의 세포 캡슐이 들어있던 병은 이제 텅 비어있었다. 남극성당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그는 황제의 늑대털을 풀어 몸에 두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달콤한 체취에 기분 좋은 나른함과 피곤이 함께 몰려왔다. 고작 몇 분 못 봤는데도 벌써 그의 품이, 그의 입술이 그리워졌다.

“쿠마르, 달콤한 게 먹고 싶구나. 요구르트 좀 없느냐.”

이디나는 이제 정말로 홀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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