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69화 (964/1,132)

< -- 969 회: 파트11.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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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 앞에 선 세데스는 니사와 함께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숲 속에선 무성한 나무 때문에 하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이곳엔 마당에 깐 돌 덕분에 큰 셔틀 한 대는 충분히 착륙할 수 있을 듯 보였다.

“정말 그 서생이 도움이 될까?”

세데스가 니사 손에 들린 오래된 지도를 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가 쓸데없이 이런 고민에 빠져있을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남쪽 하늘에서 무언가 반짝 하더니 처음 보는 이상한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저게 셔틀이야?”

생전 처음 보는 은빛의 화살촉 모양 비행체에 세데스의 눈이 주먹만해졌다. 낮은 고도에서 말 그대로 빛처럼 빠른 속도로 주변을 휙 하니 한 바퀴 돈 비행체는 어느 순간 이들의 머리 위에 와 있었다.

“아니, 이 빌어먹을 쇳덩이는 대체 뭐냐고.”

머리 위를 보며 멍해진 세데스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몇 번이나 비볐지만 눈앞의 ‘빌어먹을 쇳덩이’는 여전했다. 그 쇳덩이는 잡초와 덩굴로 우거진 땅 위로 소리 하나 없이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어디 하나 모난 곳 없는 뾰족한 송곳 모양이 언뜻 보아서는 어디가 창이고 문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우와, 그 며칠 새 이렇게 완벽히 길을 들이셨네.”

니사가 환한 얼굴로 달려가 ‘불릿’의 문 앞에 섰다. 동체 중간에서 요술처럼 문이 열리더니 장발의 호리호리하게 큰 미남자가 어깨 위에 긴 망토를 두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다리는 좀 괜찮아지셨는지요.”

니사가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지만 코리온은 본 척도 않고 앞을 휙 지나가 버렸다. 페스트에서 추락해 다쳤던 다리는 이제 걷는 정도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다. 말을 타다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온 듯 평소와는 다른 승마복 차림이었다.

니사를 무시해버린 코리온은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데스에게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오랜만이요, 세데스 델루지 경. 가문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 들었소.”

코리온이 평소처럼 지극히 사무적이고 차가운 투로 인사를 건넸다. 세데스는 나름 미인이라 자부하던 자신을 내려다보며 형식적인 눈웃음 하나 없는 이 미남자의 도도함에 갑자기 묘한 호기심이 동했다.

“간만에 뵙습니다, 대군 마마. 잠시 오해가 있었으나 이번에 해결하려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세데스가 가슴에 손을 대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마친 그는 다시 코리온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사실 이 남자와 공식 석상이나 모임에서 먼발치로 보거나 통성명만 하고 형식적으로 스친 일은 있었지만 이렇게 1대1로 가까이 만나보기는 처음이었다. 전부터 익히 듣기는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가 기억했던 것 이상으로 미남이었다.

“역시 듣던 대로 외모가 출중하시옵니다.”

가슴 위까지 늘어진 코리온의 검고 매혹적인 생머리와 크고 늘씬한 몸을 재빨리 훑어보며 세데스가 씨익 웃었다. 몸에 딱 붙은 검은 승마바지는 어지간한 남자가 입었다가는 눈 둘 곳 찾기 민망한 모양새가 연출되기 십상이었지만 이 남자의 길고 시원하게 쭉 뻗은 다리에는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목깃이 약간 흐트러진 흰 셔츠와 단추를 푼 자켓도 아주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출중한 옷걸이 덕분에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왜 이런 남자를 아직 몰라봤지?’

생각해 보니 지금껏 쿠베에 빠져 지내느라 ‘성숙한 진짜 귀족 남자’를 만나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사실 남부의 귀족 남자들 대부분은 자리에 오래 앉아 배만 볼록해진 유학자이거나,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말 그대로 덩치들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세데스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남부 행사에도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셨다면 남부 남자들이 못생겼다는 편견도 없어졌을 텐데 말입니다.”

“황실 행사마다 핑계를 대고 빼먹은 제후가 할 말은 아닌 듯 하네만.”

세데스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지만 상대의 이런 공격적인 태도가 매력까지 깎아먹은 건 아니었다. 남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곱고 차분한 목소리는 안에 담긴 가시를 전혀 못 느끼게 했다.

“대군께서 참석하신다면 앞으로는 절대 빼먹지 않겠습니다.”

“지금 시간 없어요.”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세데스는 니사의 짜증스런 참견에 급히 현실세계로 되돌아와야 했다. 세데스의 판타지를 무참히 깨어놓은 니사는 가방에서 꺼낸 지도를 얼른 코리온에게 내밀었다.

“850년 전에 그 건물이 지어질 때 지도하고 도면이에요. 지형도 변했고 배치도나 지형도의 문장도 해석이 잘 되지를 않아서 지금 위치로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어요. 좀 도와주세요.”

“여기에 태자가 있다는 말인가?”

조금 전까지도 잔잔한 물 위에 띄워놓은 듯 차분하던 코리온의 목소리가 갑자기 흔들리고 있었다.

“여긴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셔틀 안에서 보지.”

코리온은 지도를 들고 총총히 불릿 안으로 움직였다. 덕분에 습하고 쌀쌀한 숲에서 반나절을 고생했던 일행들도 인공조명이 있는 실내로 잠시나마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안은 뭐 그저 그렇네.”

세데스는 빈 자리 하나를 찾아 앉으며 행여 주인인 코리온이 들을까 조심조심 말했다. 최대한의 속도를 내게 만들어진 불릿 내부 객실은 6개의 좌석과 선반을 빼면 별다른 치장도, 장식품도 하나 없이 썰렁했다.

“초기 이주민 언어로군.”

코리온은 객실 캐빈 한쪽 테이블 스탠드를 켜고는 니사의 지도와 자료들을 죽 늘어놓았다. 니사가 지도를 보며 조심조심 물었다.

“옛날 저희 교단 수도원이에요. 이 안에 태자가 갇혀 있는 걸 세데스 경이 만났다고 하니까 대강의 위치만 찾으면 가서 눈으로 건물을 확인할 수 있어요. 최대한 빨리 가능할까요?”

“네 떠드는 시간도 아깝다.”

도면과 지도를 노려보는 코리온의 턱에 힘줄이 곤두섰다. 앞뒤 꽉꽉 막혔기로 소문난 이 서생이 사교의 문서를 해독하는 데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리라고는 미처 예상 못 했던 세데스가 놀란 얼굴로 니사에게 눈을 쫑긋거렸다.

니사가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어 조심스레 물었다.

“해석할 줄 아시나요?”

“아니.”

코리온의 대답에 니사의 맥이 탁 풀려버렸다. 이 천재님을 데려다만 놓으면 도면과 시방서를 술술 다 해석해 줄 것으로 믿었던 그로서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그럼 여긴 왜 온다고 하셨는데요?”

“도와 달라 했지 언제 해석해달라고 했더냐?”

코리온이 뻔뻔하게 대답하며 도면에 눈을 가져갔다.

“공용어 통합을 강행하면서 너희가 옛 언어자료는 거의 없애버리지 않았느냐.”

“알아요, 알아, 그래서 우리 쪽 언어학자들이 이쪽엔 완전 젬병이라는 것도 아니까 어떻게 좀 해 달라고요.”

옆에서 재촉하는 니사를 슬쩍 흘겨보았던 코리온은 시방서와 배치도에 있는 문장들을 옮겨 적으며 말했다.

“30개 정도의 표음문자로 이루어진 고향행성 주류 어족이었을 거다. 이주 초기까지는 5개 정도 분파가 있었는데 얼마 못 가 문법과 어휘가 뒤죽박죽 섞이면서 최악의 언어가 되고 말았지. 결국 공용어로 다른 어족이 채용되면서 급격히 사멸했고.”

“주류라고 말씀하시는 건 해석이 쉽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니사가 코리온을 슬쩍 보며 운을 떠 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이전 언어를 말살한 자들이 감히 물을 내용은 아닌 듯하구나?”

“어쨌든 당시 언어통일의 효과를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건 분명 사실 아닌가요?”

니사가 슬쩍 반박을 해 보았다. 천하의 코리온도 니사의 이 반박에만은 그다지 가시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생략한 채 다시 지도에 시선을 가져갔다.

“내 방금 이것저것 뒤섞여 최악의 언어가 되었다 하지 않았더냐.”

“그럼 이건 해석을 할 수 있으시다는 건가요? 아니라는 건가요?”

마음이 급해진 니사가 밖을 휙 내다보며 물었다. 조금씩 흐려진 하늘에선 설상가상 가는 빗줄기까지 하나 둘 보이고 있었다.

“어휘는 비슷하니 일단 살펴보는 수밖에. 나도 토막토막밖엔 모른다.”

코리온은 그답지 않게 자신 없는 투로 답하고는 시방서를 더듬더듬 읽었다.

“casa del paz……em frente de montanha ……demonio?”

“알고는 읽으시는 건가요?”

마음이 급해진 니사의 닦달에 코리온이 눈을 흘겼다.

“모르면 어쩔 것이냐? 네가 그리 따진다고 모르는 것까지 만들어 쏟아내야겠느냐”

천재라는 세간의 믿음에 어울리지 않게 솔직한, 너무나도 솔직한 그의 반응에 니사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proceder mamore ropeway…….”

짜증을 내며 시방서를 계속 서툴게 읽던 코리온은 거의 끝에 있는 한 부분을 반복해 읽었다.

“transporte por cabo? ……그게 대리석 건물이라 했던가?”

한쪽에서 내내 잠자코 있던 세데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잘은 기억 안 나지만 대리석이었던 것 같던데요. 때가 많이 타 있긴 했어도요.”

“초기 교단은 대리석을 가져다 건물을 지을 만큼 돈이 많진 않았다.”

“그만큼 깨끗했다는 뜻이죠. 그나저나, 말씀하신 게 무슨 뜻인데요?”

니사의 참견에 코리온이 눈을 흘겼지만 지금 이 마당에 논쟁으로 시간을 끌어 아들의 목숨을 걸 만큼은 아니었다.

“‘악마의 산’과 삭도* 이야기가 나오니 돈이 많아 대리석 건물을 지은 게 아니고 인근에 대리석 산지가 있었을 거다. 산이 험악해서 삭도를 설치해서 날랐겠지.”

“대리석이요? 그게 어떤 곳에서 나죠?”

니사도 코리온 바로 옆에 바싹 붙어 함께 지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전 같았다면 가까이오지 말라며 날뛰었을 이 유학자도 지금은 지도에 집중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악마의 산’ 비슷한 지명을 가진 곳이 있나? 지명은 시간이 지나도 흔적이 남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산은 없지만 어감으로 보아서는 그리 평탄하고 완만한 산은 아니겠죠.”

“이 2백개가 넘는 곳 중에서 삭도를 놓을 만하고 대리석 산지인 ‘악마의 산’이 가까이 있는 곳을 걸러내야겠다. 나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하지.”

지질도를 꺼내든 코리온은 200개가 넘는 후보자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가며 확인하기 시작했다.

코리온과 니사 둘이 바쁘게 지도를 뒤적이는 동안, 이곳까지 길을 뚫느라 녹초가 된 세데스는 구석의 의자에 널브러져 여전히 코리온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코리온은 흰 셔츠 목깃 단추까지 몇 개 풀어헤치고는 테이블 위에 몸을 기울이고 뚫어질 듯 자료를 살피는 중이었다.

‘사이코라니, 진짜 아깝네.’

세데스는 무언가에 빠져들 듯 집중해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넓고 매끈한 가슴, 잘록한 허리와 탄탄하고 쭉 빠진 다리까지 어느 하나 멋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펑퍼짐한 무명포만 입는 평상시에는 절대 못 볼 귀한 광경이었다.

세데스는 조금 전 코리온이 어깨에 걸고 나갔던 그의 두툼한 모직 망토를 담요 대신 몸에 휙 둘렀다.

“어?”

망토 모서리를 만졌던 세데스가 화들짝 놀랐다. 결벽에 가까운 깔끔한 성격에 웬만한 남자들은 엄두도 못 낼 긴 치마까지 즐겨 입을 만큼 옷빨 잘 받는 학장에게는 어색할 만큼 낡은 망토였다. 대체 몇십 년을 입었는지 모서리는 군데군데 손으로 기운 흔적까지 있었다.

‘근검도 이 정도면 병이네.’

세데스가 내심 황당해했지만 낡은 망토 정도가 저 남자의 매력까지 깎아 먹지는 않았다.

세데스는 망토에 코를 묻고 그곳에 깊게 밴 코리온의 체취를 맡아보았다.

‘남자 냄새가 이렇게 달콤할 수도 있다니.’

세데스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사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그와 코리온은 부부가 될 수도 있었을 사이였다. 저 사이코 맏아들의 결혼에 여전히 미련이 남은 대공주는 아직도 이 가문 저 가문 뛰어다니며 아들의 신부가 되어 줄 여자를 찾는 중이었다.

학장 본인은 이미 맘을 준 이가 있으니 더 이상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겠다며 단호히 선을 그었지만 그럼 빨리 결혼식이라도 올리라며 닦달하는 어머니에게 정작 그게 누군지 밝히지도 않았다. 그러니 대공주로서는 죽은 연인을 못 잊고 있는 아들의 핑계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전에 코리온과 결혼했던, 아니 결혼한 척만 했던 수많은 여자들이 어떤 봉변을 겪고 쫓겨났는지 알 사람은 다 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보니 미혼의 딸을 둔 명문 귀족가 부모들은 대공주가 좀 만나자고 할 때마다 지레 놀라 경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딸 가진 집안을 다 헤집고 다니던 대공주의 귀에 세데스 이야기가 걸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는 세데스의 어머니 오르테와 외할머니 아리아노에게 집요하게 혼담을 부탁했고, 몇 번을 예의껏 거절하다 지친 오르테가 5년쯤 전 마지못해 상견례를 마련했었지만 ―아리아노의 예상대로― 주인공인 코리온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흐지부지 되어버렸었다.

‘그날 나와서 잠자리까지 갔다면 굉장했겠어.’

야릇한 상상에 휩싸인 세데스의 입가에 스르르 미소가 번졌다.

‘젠장, 너무 오래 남자 냄새를 못 맡은 탓이야.’

세데스는 억지로 스스로를 자제하며 눈을 감았다. 쿠베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나서는 남자의 살냄새, 아니 정확히는 성숙한 남자의 살냄새를 맡아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눈앞에서 일에 몰두하고 있는 저 크고 아름다운 남자에게 ‘나 한 번만 안아주고 나서 해요.’라고 말하고도 싶었지만 일단은 망토에서 풍기는 그의 향기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유학자 중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다니, 왜 몰랐을까.’

코리온의 매력에 넋이 빠져 혼자 웃고 있던 세데스는 어디선가 들려온 아주 작은 진동에 눈을 번쩍 떴다.

“음?”

그는 고개를 쳐들고 셔틀 캐빈 안을 둘러보았지만 한창 바쁜 코리온과 니사를 빼면 이틀간의 강행군에 지쳐 곯아떨어진 가디언 둘과 보안국 요원 둘뿐이었다. 세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의자에 웅크렸다. 그때 또다시 무언가 작은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도 일반인은 듣지 못할 만큼 소리가 작았지만 옆의 2등급 가디언이 자다 말고 눈을 번쩍 뜨기엔 충분했다.

“쉿.”

세데스가 손가락으로 가디언에게 조용히 하라며 손짓했다. 가디언이 ‘무언가 씹는 소리 같습니다.’ 라는 수화를 보내왔다. 세데스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좁은 셔틀 안을 빙 둘러보았다. 셔틀 안엔 무언가를 먹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조심스레 소리가 나는 곳을 찾던 세데스와 가디언의 시선은 한 곳으로 모아졌다.

“흐음, 뭐 마실 거 좀 없나.”

세데스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캐빈 한쪽의 작은 선반에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도 들리던 ‘씹는 소리’는 그가 다가가자 뚝 끊어졌다.

“여기 물이 있네.”

세데스는 물병을 집는 척 손을 내밀며 반대편 손으로 칼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허벅지 높이쯤 되는 수납장 손잡이를 조심스레 잡았다.

“누구냐!”

수납장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세데스의 고함이 셔틀 안을 쩌렁 울렸다. 그때까지도 해독에 열중하고 있던 코리온은 물론이고 잠들었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눈을 뜰 정도였다.

“뭐요, 세데스 경?”

전의를 불태우던 세데스의 눈에 누군가의 자그만 장화 코가 보였다. 세데스는 조심스레 허리를 굽히고 안에 깊숙이 숨은 이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확인했다.

“엄마야.”

좁은 수납장에 잔뜩 웅크리고 숨어있던 ‘외간여자’가 세데스와 눈이 딱 마주치자마자 얼른 빵을 뒤에 감추었다. 코리온과 함께 말을 탔던 듯 똑같은 모양의 승마복 차림이었다.

“엥?”

생각도 못 했던 불청객에 기겁을 한 세데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코리온에게 따져 물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설마 황제령에서 함께 데려오신 겁니까?”

“누굴 말인가?”

코리온이 그제야 책과 지도를 놓고 다가와 수납장 앞에 쭈그려 앉았다. 웬만해서는 놀라는 일이라고는 없던 이 벽창호 서생의 눈이 주먹만해졌다.

“아, 아니, 오늘 저녁은 곤란하니 돌아가라 하지 않았습니까!”

“히이이.”

수납장 안에서는 황제를 쏙 빼닮은 6, 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크고 초롱초롱한 눈을 가늘게 뜨며 최대한 불쌍하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궁으로 대체 왜 안 돌아갔습니까!”

코리온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먹을 것을 가져온 작은 수납장에 몇 시간을 미동도 않고 숨어있었던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당숙. 헤헤헤.”

마리안이 먹다 만 고기빵을 뚝 잘라서는 작은 손으로 코리온에게 쑥 내밀며 다시 능청맞게 웃었다. 물론 이 뻣뻣한 서생 앞에서 이 정도 애교와 웃음작전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승마 나머지는 다음에 가르쳐 드리겠다지 않았습니까?, 이게 뭡니까, 옹주.”

코리온의 엄한 꾸중이 이어지자 마리안은 갑자기 표정을 돌변하며 울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지만 코리온도 꼬마의 작전에 쉽사리 넘어가주지 않았다.

“막내딸이 이리 위험한 곳에 온 걸 아시면 황상께서 얼마나 걱정하실지 아십니까. 아무리 어리기로 이렇게 생각이 없으시다니요!”

코리온이 계속 몰아붙이자 결국 마리안은 먹다 만 빵을 꼭 쥔 채 눈물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주페 오빠 이야기하시는 거 듣고 여기 숨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코리온이 혀를 찼다. 그가 할룩스로 통화를 한 건 마리안에게서 수십 보는 떨어진 곳에서, 그것도 최대한 숨죽이고 말한 것이었다. ‘용서’라는 단어를 모르는 코리온이었지만 크고 예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울먹거리는 소녀 앞에서는 차마 험악한 소리를 계속 내지 못했다.

“정말이에요, 주페 오빠 보고 싶어서 왔어요.”

마리안이 대뜸 안에서 튀어나와 코리온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는 옷자락에 눈물을 부벼댔다. 속이 빤히 보이는 소녀의 눈물작전에 코리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웬만한 아이들은 그의 차가운 기세에 지레 기가 눌려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지만 이 꼬마에게만은 도무지 통하지를 않았다. 게다가 1분 1초가 바쁜 마당에 꼬마 하나를 돌려보내러 숲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판국이었다.

하필 그 때, 코리온을 껴안은 마리안의 배에서 꼬르륵 하고 소리가 났다. 옆에서 이 둘을 보고 있던 세데스는 이 심각한 와중에 배고프다며 시위를 하는 아이의 배를 보며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좁은 수납장 안에서 몇 시간을 주린 배를 쥐고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빵에 손을 댄 모양이었다. 식탐만 봐도 이 꼬마숙녀 역시 황제의 피가 분명했다.

씩씩거리던 코리온이 마지못해 구석진 빈 자리 하나를 가리켰다.

“저 자리에 꼼짝 말고 계십시오, 옹주. 어른들 중요한 일에 더 이상 걸림돌이 되면 용서하지 않습니다.”

“헤에에.”

눈 깜짝할 새 눈물을 싹 씻은 마리안은 방금 먹다 만 빵으로도 모자란지 찹쌀과자와 육포까지 주머니에 가득 챙기고는 자리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는 누가 시키기도 전에 좌석 테이블을 쫙 펼쳐놓고는 자기 집처럼 냉장고까지 뒤져서는 꿀에 절인 사과에 주스까지 죄다 꺼내다놓고 아주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설마 황제도 어릴 때 저랬나?’

아이가 홀랑 털어 간 냉장고를 보며 세데스가 혀를 찼다. 셔틀 주인인 코리온이 뭐라 짜증을 낼 듯도 했지만 그는 아이가 뭘 먹든 별 신경도 안 쓰는 듯했다.

‘가만, 저 양반 채식주의자 아니었나?’

세데스가 수납장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 안엔 고기소가 잔뜩 든 빵에 기름진 찹쌀과자와 육포까지 가득 들어있었다. 생각해 보니 학장이 이런 것들을 수납장에 넣고 다니는 것도 꽤나 이상했다.

“별꼴이야.”

세데스는 다시 지도에 집중하고 있는 학장을 훼방놓는 건 일단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에게 별난 군것질 식성이 있건 말건, 지금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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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설문을 올렸습니다. 누구에게 낙하산을 줄지(?) 한표씩만 행사해 주세요~)

* 삭도는 나무나 돌 같은 중량물을 줄에 달아 옮기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케이블을 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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