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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971화 (966/1,132)

< -- 971 회: 파트11.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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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이다.”

“예?”

니사가 다시 코리온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그는 암갈색 눈을 크게 치켜뜨고는 북쪽의 구릉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코리온이 북쪽을 노려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애는 북쪽에 있다.”

북쪽을 노려보는 코리온의 숨결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가야겠다.”

코리온은 셔틀로 헐레벌떡 뛰어들어서는 조종석에 앉았다. 니사가 말리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 어딜 가시게요! 이제 군인들이 가서 할 일입니다!”

“그 애는 나밖에 못 찾는다.”

코리온이 니사를 뿌리치며 셔틀의 문을 닫았다. 셔틀 안에서 자고 있던 가디언과 보안국 요원들도 갑자기 이륙을 하자 잠에서 깨어 무슨 일이냐며 웅성대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코리온의 모습에 니사는 황제가 왜 그를 개입시켜선 안 된다고 말했는지를 깨달았다.

“아, 알았다고요, 바로 거기에 대시면 착륙하기도 전에 추락해서 끝날 겁니다. 적어도 100스타디아(15km) 밖에 저고도로 착륙하셔야…….”

“네가 안 떠들어도 알아!”

코리온이 불릿의 출력을 높이면서 이 은색 기계는 희미하게 드리운 어둠을 가르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속도로 날기 시작했다.

“으익.”

발밑을 스쳐가는 어마어마한 속도에 지레 놀란 세데스가 좌석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고 혼비백산한 니사는 얼른 부조종석에 앉았다. 순식간에 음속을 돌파하면서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속도가 붙은 불릿은 지면을 꼭꼭 덮은 나무들 위를 당장이라도 스칠 듯 낮게 날아가더니 가파른 바위절벽 옆을 날카로운 곡선을 그리며 휙 돌았다.

“엄마야.”

엄청난 중력가속도에 엉덩이가 바닥에 딱 붙어버린 니사가 벌벌 떨며 물었다.

“이렇게 빨리 안 가셔도…….”

조종을 전혀 모르는 니사 눈에도 계기판의 숫자들이 붉은 빛과 경고음을 여기저기 깜박거리고 있는 모양새는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셔틀 경주광이라는 이 괴짜 학장의 면모를 이제야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밑을 스쳐 지나는 나무들 몇이 충격음에 흔들리거나 통째로 쓰러지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네들이 안 보게 해야 한다지 않았느냐!”

“으악.”

셔틀이 한쪽으로 휙 기울면서 이번엔 뒤쪽에서 세데스와 가디언, 보안국 요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옆으로 기운 기체가 움푹 팬 절벽 골짜기 사이를 거의 닿을 듯 휙 스치고 지나며 날카로운 충격파가 갑자기 째질 듯 높아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체가 충돌하는 줄로 알았던 탑승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 당숙 멋져요!”

“얘는 또 뭐야.”

이 와중에 손뼉을 짝짝 치며 좋아하고 있는 꼬마 마리안의 모습에 세데스가 대뜸 눈을 흘겼다. 정면의 산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한 불릿은 산의 완만한 사면을 잰 듯 휙 하고 스쳐 넘어갔다. 능선을 넘는 순간, 충격파에 우수수 쓸려 넘어지는 나무들이 모니터에 고스란히 보였다.

“뭐, 뭐 이런…….”

부조종석에 딱 붙어있던 니사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조종에 집중하고 있는 코리온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황제에게서도 여러 번 느꼈지만, 눈앞의 이 남자도 보통의 사람과는 다른 종의 생명체 같아보였다. 산맥을 넘어간 셔틀은 순식간에 방향을 확 틀더니 이번엔 작은 강물 위를 따라 낮은 고도로 무섭게 바람을 갈랐다.

“이, 이건 경주가 아니라고요…….”

불릿의 궤적을 따라 충격파에 갈라진 물이 양옆으로 파도처럼 쓸려나가며 긴 물보라가 그려졌다. 창에 얼굴을 붙인 채 넋이 빠져 해해거리고 있는 마리안 하나만 빼면 탑승자들 모두가 얼굴까지 잔뜩 일그러진 채 완전히 흙빛이 되어 있었다.

“우읍.”

셔틀이 갑자기 속도를 늦춘 순간, 니사는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에 또 비명을 냈다.

“휴우.”

니사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발밑에는 강물이 굽어지며 생긴 작은 모래톱이 보였다. 고작 2, 3분의 짧은 비행이었지만 탑승자들에게 저승 문턱의 맛을 보여준 아찔한 순간이었다. 불릿이 부드러운 모래톱 위에 내려앉으면서 사람들이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코리온이 낮은 숨을 내쉬며 비로소 조종간에서 손을 떼었다.

“예상지역에서 110스타디아(16.5km) 정도 떨어진 곳이니 서두르면 오늘 밤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그, 그렇군요.”

정신을 차린 니사는 코리온의 옆에 놓인 할룩스가 한참 전부터 깜박거리고 있는 것을 그제야 보았다. 하지만 코리온은 할룩스를 우두커니 보기만 할 뿐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니사가 누구의 연락인지 보려 하자 코리온이 얼른 손으로 가려버렸다.

“안 받으세요?”

코리온은 뒤의 캐빈에 앉아있는 마리안을 흘끔 돌아보았다. 꼬마는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양 잔뜩 들떠서 강변을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재차 한숨을 내쉰 코리온이 마지못해 할룩스를 켰다.

“대체 어찌된 거요. 내 거기는 가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할룩스를 켜자마자 잔뜩 성이 난 황제의 모습이 나타나자 혼비백산한 니사가 얼른 캐빈 쪽으로 도망을 쳐 버렸다. 코리온이 황제의 눈길을 피하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가 아니면 찾을 수 없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겐 그대가 더…….”

언성을 높이려던 황제가 다음 말을 억지로 목 뒤로 삼켜버렸다. 코리온이 조종석에서 내려와 바닥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압니다.”

코리온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감고 낮게 중얼거렸다.

“어떤 처벌을 내리시든 기꺼이 받겠사오니…….”

그때, 그새 무장을 챙겨든 세데스가 둘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학장님께는 제가 연락했습니다. 제 책임입니다. 마리안 옹주도 여기에 무사히 있습니다.”

세데스가 코리온의 뒤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살며시 짚으며 황제에게 웃음을 보였다. 그런 세데스의 모습에 카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세데스가 지금 입고 있는 건 30여년 전, 카렐이 남부에서 코리온과 함께 쫓길 때 사 주었던 바로 그 망토였다. 그날 이후 코리온은 그 누구에게도 저 옷에 손을 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세데스는 부아가 난 황제의 속도 모르고 말을 이었다.

“학장님 덕분에 태자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것 같습니다.”

“주페를 찾았다고?”

화가 덜 풀린 카렐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황제의 속을 알 리 없는 세데스가 코리온에게 대놓고 다정한 눈길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모두 이분의 공입니다. 저와 제 가디언들이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것으로 부디 이분의 책임은 면해 주십시오. 차라리 저를 벌하십시오.”

세데스가 코리온의 뒤에 꿇어앉으며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살며시 잡았다. 카렐은 차마 내색도 못한 채 그런 세데스에게서 의도적으로 시선을 떼며 입을 열었다.

“지난 약속대로 세데스 경 그대가 들어가 찾아내시오. 보안국 정예 가디언들이 이끄는 특수부대를 그리로 보낼 터이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놈들의 동향만 감시하고 있으시오. 내 지금 그곳으로 가는 중이니 학장은 거기서 옹주와 함께 꼼짝도 말고.”

“따를 수 없습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인 코리온이 낮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뭐라고?”

카렐의 목소리 톤이 확 높아졌다. 그렇지만 코리온은 그의 무서운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한 채 말을 이었다.

“제 코앞에서 잡혀간 태자입니다. 제 손으로 되찾지 못하면 황상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소신도 세데스 경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 뒤에 어떤 벌이든 받겠나이다.”

“어딜 감히…….”

격분한 황제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코리온이 할룩스를 뚝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이래도 되는 거예요?”

파랗게 질린 세데스가 코리온의 어깨를 짚었다. 코리온은 그제야 눈을 번쩍 뜨고는 버럭 화를 내며 그의 손을 쳐내버렸다.

“지금 어디에 감히 손을 대나.”

그제야 세데스를 돌아본 코리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설마 황상 앞에서 이걸 입고 있었단 말인가!”

흥분한 코리온이 세데스에게서 망토를 거칠게 빼앗았다.

“그런데요? 뭐 잘못됐나요?”

상대의 까탈스런 성미를 익히 들어 아는 세데스는 망토를 빼앗아가는 그의 격한 행동에 도리어 능청맞게 웃음으로 답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정말로 화가 났거나, 혹은 그 반대거나 둘 중 하나였다.

“걱정 마세요, 향기가 너무 좋아 벗을 맘이 안 나더라고요. 다시 가져가세요. 옷 냄새는 충분히 맡았으니 됐고, 다음엔 직접 맡게 해 주시면 돼요.”

코리온에게 가벼운 웃음을 남긴 세데스는 당혹감에 떨고 있는 그를 놓아둔 채 휙 돌아서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세데스와 잠시 실랑이를 벌인 코리온이 씩씩대며 조종실에서 나왔을 때, 그의 앞에는 막 할룩스를 끊은 두 명의 보안국 요원들이 굳은 얼굴로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들이 코리온의 앞뒤를 지켜서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황상의 명으로 작전이 끝날 때까지 학장님을 억류합니다.”

코리온의 뒤에 선 여자 요원이 그의 손을 끈으로 묶으려 했다. 하지만 코리온이 거칠게 힘으로 손을 빼내어 앞에 있는 남자 요원의 턱을 덥석 붙들었다.

“너희가 날 억류해?”

코리온의 선제공격에 놀란 요원이 그의 손을 쳐내려 했지만 이 무서운 학장과 눈이 딱 마주친 순간 그의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라, 날 억류한다고?”

요원을 노려보는 코리온의 두 눈이 이글거리며 빛을 뿜었다. 창백해진 요원이 멍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아닙니다…….”

그때, 코리온의 뒤에 있던 여자 요원이 코리온의 팔을 힘껏 비틀었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요원은 훈련받은 동작으로 코리온을 쓰러뜨려 동료를 구하려 했지만 별 것 아닌 듯 보였던 이 호리호리한 서생의 괴력은 시민 출신 요원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코리온이 그를 거칠게 잡아당겨 바닥에 쓰러뜨리고 위에서 순식간에 깔아뭉갰다.

“으, 읍!”

여자는 코리온의 눈을 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지만 맘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채 잠시 버둥대던 여자 요원은 마취약을 맞은 사람마냥 파르르 떨더니 저항을 멈추었다. 코리온이 요원에게 눈을 똑바로 들이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흰 여기서 라말라 박사와 함께 옹주를 지키고 꼼짝도 말고 있어라, 알겠느냐.”

평소의 곱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딴사람 같은 무시무시한 속삭임에 요원의 눈빛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반쯤 얼이 빠진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대체 뭘 하신 겁니까? 이게?”

수하의 두 가디언들과 함께 옆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세데스가 얼떨떨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도 학장이 ‘눈으로 사람을 조종한다.’는 말을 들은 일은 있었지만 그냥 근거 없는 뜬소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코리온에게 완전히 제압당한 두 보안국 요원들은 그가 손을 뗀 후에도 정말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을 뿐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코리온이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세데스 경 그대는 죄가 없소. 다 내 멋대로 저지른 일이요. 황상께도 내가 그대의 눈을 노려보며 같이 데려가라 조종했다 하시오. 그러면 뭐라 못 하실 것이요.”

멍하니 서 있던 세데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코리온은 구석에서 찹쌀과자를 먹다 말고 얼음처럼 굳어 있는 마리안 옹주를 사뭇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어른들이 위험한 곳으로 갈 참이니 옹주는 방해되지 않도록 이 안에 있으시오, 황상께서 명하셨으니 여길 떠나면 크게 화내실 것이요.”

어른들의 싸움에 놀란 마리안은 입에 찹쌀과자를 한가득 문 채 얼이 빠진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요, 빨리 오빠 구해오세요.”

마리안이 눈치를 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코리온에게 압도당해 반쯤 넋이 빠진 요원들과는 달리 이 꼬마의 눈은 코리온의 무서운 눈길을 받고서도 여전히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코리온이 당황한 듯 휙 돌아섰다.

“그것까지 닮았다니.”

길고 거추장스런 머리를 끈으로 질끈 묶은 코리온은 보안국 요원들이 썼던 배낭을 뒤집어 쓸 만한 용품들을 다시 챙겨 등에 훌쩍 짊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니사에게 조종석을 가리켜 보였다.

“내 없는 동안 적이 나타난다거나 위급한 일이 생기면 조종석 중앙에 있는 붉은 상자를 깨고 안의 버튼을 눌러라. 내 미리 세팅해 둔 안전지대로 자동으로 비행할 거다.”

“전 따라가지 말라고요?”

“여기서 옹주를 지키고 있으라는 뜻이다.”

“운명도 안 받아들이고 계신 분의 말을 제가 왜 들어야 하는지요? 저 이번 일로 황상께 얼마나 혼날지 알고나 계세요?”

교단 유적지에 니사를 데려가지 않으려는 코리온의 속내를 눈치 챈 니사가 천연덕스럽게 자기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곧 코리온을 흘끔 보며 능청맞게 말했다.

“‘제2신관 니사 라말라에게 명령한다.’라고 한 마디만 하시면 안 따라갈게요.”

니사의 빤한 속내에 코리온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하지만 셔틀 밖에선 그새 준비를 다 끝낸 세데스 일행들이 그가 나오기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니사가 코리온의 눈길을 슬쩍 피하며 능청맞게 말했다.

“제 눈 보고 말씀하시면 무효예요. 저까지 넋을 빼 놓으시면 옹주를 제정신으로 지킬 어른이 하나도 안 남는 거 아시죠?”

“씨이.”

아들 생각에, 그리고 마리안에 대한 걱정에 맘이 급해진 코리온이 결국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말라 신관은……여기 머물러 있도록 해라.”

“복명하겠나이다. 2신관 니사 라말라, 현신의 명대로 이곳에 머물겠사옵니다.”

니사가 기다렸다는 듯 가슴에 양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여 붙였지만 코리온은 못 들은 척 이미 등을 보이고 셔틀에서 뛰어내리는 중이었다. 어쨌든, 니사로서는 손해 본 건 없었다. 마리안과 함께 셔틀에 남겨진 니사는 숲으로 사라져가는 코리온의 뒷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폐광 깊숙이 들어온 주페는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갱도는 지상으로 향하기는 고사하고 점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지면과 멀어지면서 공기도 점점 탁해져갔지만 그렇다고 어느 길로 돌아가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 어떡해요.”

주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구멍을 빠져 나왔을 때 적이 벽을 부수는 소리에 지레 놀라 아무 곳으로나 도망친 것이 문제였다. 발현자의 뛰어난 두뇌로도 이성을 잃고 도망치던 그 순간까지 다 기억해내지는 못했다.

“엄마.”

모든 것이 무서워진 주페가 앞뒤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쿠베의 무리는 이미 블록벽을 무너뜨리고 갱도를 구석구석 뒤지고 있을 것이 뻔했다. 맨발바닥은 온통 까져 걷기도 힘들었고, 굶주림과 탈진이 몰려와 다리를 더 무겁게 했다. 음산한 공기가 벗은 몸을 뚫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어떡해요, 엄마.”

막막해진 주페는 움푹한 홈 안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가 찾고 있는 건 아들에게 무심했던 황후 아메스가 아니었다. 평소에는 ‘황상’, 혹은 ‘폐하’라는 호칭에 가려 차마 이 이름으로 불러보지 못했던 그 사람이었다.

“엄마.”

온몸을 파고드는 추위에 으슬으슬 떨던 주페는 자기도 모르게 같은 이름을 몇 번째 불러보았다. 황궁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니 또 눈물이 나왔다.

황제는 황후에게서 사랑을 못 받는 태자들을 데리고 종종 강변에 밤낚시나 산책을 나가곤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날은 황제가 어머니 황후의 침소에 들던 날이었다. 황후전에 드는 시늉만 한 황제는 얼마 안 가 되돌아 나왔고, 남은 밤은 아들 중 하나, 혹은 둘 다를 데리고 욱리하의 작은 섬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이런저런 대화로 보냈다. 처음엔 크낙스 공주도 함께했었지만 황후를 유독 따랐던 공주는 어느날부터인가 엄마의 눈치를 보며 군색한 핑계를 대고 나오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황궁 교사들과의 대화에서 항상 부족함을 느끼던 두 태자들에게 그렇게라도 얻은 황제와의 시간은 정말로 소중했다. 카렐은 어린 아들들이 경험 못 한 넓은 세상 이야기를 해 주었고, 아이다운 어처구니없는 질문부터 교사들도 대답을 못 해주던 어려운 문제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이 답을 찾아낼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아들들에게 황제는 세상 그 자체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황제가 주페만 데리고 나갔던 날은 꼭 코리온이 함께 있었던 것 같았다. 사실 말수 적고 엄격한 당숙은 어린 황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주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섬에서 함께한 코리온은 겉보기는 여전히 차가웠어도 아이들이 상상했던 무서운 괴물은 아니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강바람에 잔뜩 곱은 주페의 작은 손을 꼭 잡아 말없이 가슴에 품어주던 코리온의 모습은 주페의 기억 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남아있었다.

“아후, 추워.”

다시 현실로 돌아온 주페는 곱은 손을 비비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속옷 속에 숨겨놓았던 빵조각을 꺼내어 질겅질겅 씹었지만 몇 입 먹지 못하고 도로 옷 속에 쟁여 넣었다. 목이 말라 빵이 넘어가지를 않았다. 그는 그제야 목이 타들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멀리 가지 않아 어디선가 비릿한 물 냄새가 풍겨왔다. 서둘러 달려가 보니 갱도의 천장부터 측벽을 타고 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에서 쇠 냄새 비슷한 것이 났지만 그런 것을 따질 판국이 아니었다. 그는 깨진 돌 위에 혀를 대고 냄새가 나는 물을 열심히 핥았다.

“읍.”

젖은 돌 위를 핥던 주페는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퉁탕거리며 규칙적으로 철판 위를 딛는 것이 분명 사람 발소리였다. 주페는 벽에 딱 붙은 채 혹시나 하는 맘에 꼼짝도 않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위층 갱도와 이어진 천장의 환풍구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지하 5층 막장엔 없습니다.”

“설마 더 내려갔나?”

웅웅거리며 들려오는 쿠베의 목소리에 주페의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발소리가 어딘가로 멀어지자 주페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어디로든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엄마.”

주페가 다시 눈가를 훔치며 계속 갱도를 걸었다. 또다시 내리막이었지만 되돌아가기는 너무 무서웠다. 빼어난 발현자의 두뇌도 어둠과 공포 속에서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소년의 뒷덜미를 잡아주지는 않았다.

주페는 누더기가 된 발을 질질 끌며 시커먼 입을 벌린 갱도 안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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