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74 회: 파트11.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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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페는 자신이 몇 층에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공기는 점점 탁하고 습해졌고, 갱도는 내려갈수록 좁고 험해졌다. 게다가 이 층의 곳곳엔 무릎 깊이까지 물이 차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되돌아 올라가고 싶었지만 이미 두 번이나 인기척을 느끼고 허겁지겁 도망친 후로는 온 길을 되밟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페는 탈선해 처박혀 있는 녹슨 갱차(坑車) 옆을 돌아 더 안쪽으로 접어들려 했다.
“으윽.”
왼발의 통증에 주페가 얼른 발바닥을 들어보았다. 발바닥 중간이 길게 찢겨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무언지는 몰라도 물 속에 잠겨 있던 쇠붙이를 밟은 모양이었다. 고인 물 때문에 바닥이 보이지를 않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다친 발을 절뚝거리며 안으로 들어간 주페는 막다른 길에 멈칫거렸다.
“후우.”
수정처럼 맑은 지하수 밑으로 아랫층까지 이어진 깊은 수직갱이 보였다. 아래층 갱도가 있는 듯했지만 물로 차 더는 내려갈 수가 없었다.
“이제 끝인가.”
주페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쳤다. 지하수면까지 내려왔으니 이젠 막다른 길이었다.
낙담한 주페는 온 길을 되돌아나가기 시작했다. 성치도 않은 발로 들어온 길을 돌아나가려니 두 배는 더 힘들었다. 찬물에 체온을 빼앗겨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왔고, 같은 숨을 쉬어도 호흡이 가빴다. 산소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힘든 숨을 참으며 복잡한 갱도를 되짚어 나온 주페는 위층 갱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있는 수갱(竪坑, 수직갱)에 조심조심 접근했다. 사다리를 잡고 올라가던 주페는 무언가 코끝이 아린 느낌에 얼굴을 찡그렸다.
“으웁.”
위층에 올라간 주페는 터져 나오려는 재채기를 가까스로 참았다. 속도 메스껍고 눈도 지독하게 매웠다. 주페는 손으로 입을 막고 비틀비틀 앞으로 나아갔다. 눈물이 쏟아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우.”
벽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던 주페는 조금 전 다친 발의 통증에 부르르 떨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끙끙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는 또다시 코를 찌르는 자극에 결국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그의 재채기 소리는 갱도를 타고 웅웅거리며 번져나갔다.
“이크.”
주페가 기겁을 하며 방향을 돌렸지만 눈앞이 흐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헐떡거리며 몇 발짝을 디디던 주페는 어딘가에 발이 걸리며 바닥에 요란스레 뒹굴었다. 그의 발에 채인 통이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며 귀를 찢는 소음을 냈다.
“이런.”
주페는 사방의 갱도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짧은 도주극이 거의 막다른 길에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안 돼.”
주페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사람들이 오는 반대방향으로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눈앞이 점점 흐려져 제대로 보이지를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기어가던 주페는 바닥이 푹 꺼지는 느낌과 함께 공중에 붕 내던져진 것을 느꼈다.
“아악!”
그는 사다리를 가까스로 붙들었지만 잔뜩 삭은 오래된 사다리는 그의 체중을 버티지 못하고 우당탕 소리를 내며 부서져 버렸다. 사다리의 잔해와 함께 바닥에 나뒹군 주페는 머리 위에서 경비병들의 다급한 외침을 들었다.
“소대장님, 발견했습니다! 7층으로 내려가는 1번 수갱 아래에 떨어졌습니다!”
주페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다시 도망을 치려 했지만 병사 둘이 로프를 걸고 재빨리 내려와 방향도 분간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소년의 양옆을 얼른 막아섰다.
“오지 마!”
주페는 얼굴에 방독마스크와 야시경 스코프를 쓴 경비병들의 모습에 놀라 옆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병사들이 재빨리 그물을 던져 그를 옭아버렸다.
“저희가 그물로 잡았습니다, 소대장님.”
사냥에 성공한 병사들이 의기양양하게 첫 연락을 보냈다.
“이놈 최루가스 때문에 완전히 맛이 갔는데 그냥 잡을까요?”
곧 이들의 지휘관인 여자 소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도착했으니 내가 갈 때까지 손대지 말고 기다려. 나머지 소대 전원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그때, 갑자기 소대장과의 연결이 뚝 끊기더니 할룩스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쿠베 대장이다. 6소대장의 지시를 따르지 마라. 반복한다. 6소대장의 지시를 따르는 자는 반역자로 간주하며, 보는 즉시 체포하라. 저항하면 사살해도 좋다. 6소대는 선임사관이 지휘를 맡는다.”
“무슨 소리야?”
주페를 둘러싼 두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반역? 우리 소대장님이?”
자초지종을 모른 채 어리둥절해하던 병사들은 인기척에 문득 위를 올려보았다. 방금 연락을 했던 자신들의 소대장이 줄을 타고 수갱을 내려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반사적으로 석궁을 그에게 겨누었지만 차마 쏘지는 못했다.
“뭐야, 너희 지금 누굴 겨눈 거냐?”
줄을 내려오던 소대장이 자신을 겨눈 부하들을 보고는 발끈하며 호통을 쳤다. 병사들은 평소와 똑같아 보이는 지휘관의 모습에 선뜻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 저희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소대장님을 체포해야겠습니다.”
“뭐? 새끼들이 지금 약을 처먹었나? 당장 무기 거두지 못해!”
직속 지휘관이 화를 버럭 내자 일순간 움츠러든 병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석궁을 내렸다. 그때, 수갱 위 6층에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다! 침입자다!”
“엉?”
소대장의 호통에 잠시 혼란에 빠졌던 병사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조금 전까지 자신들을 꾸짖던 소대장이 그들을 향해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아앗!”
그들이 석궁을 재차 겨누려던 순간, 줄에 매달려 있던 소대장의 석궁이 선제공격을 날렸다. 짧은 볼트가 병사 중 한 명의 방독마스크 눈에 명중하면서 그대로 피를 뿜으며 즉사해 어두운 지하 갱도에 나동그라졌다.
“이크!”
나머지 한 병사가 매달려 있던 소대장을 향해 사격을 날렸다. 부하의 석궁에 팔을 맞은 소대장도 사다리를 놓치며 바닥에 뚝 떨어졌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와중에도 마치 고통을 전혀 못 느끼는 기계마냥 자신을 겨눈 부하에게 또 한 발을 날렸다.
“악!”
볼트에 목을 스친 병사가 주춤주춤 물러나자 소대장이 벌떡 일어나 부하에게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 사이, 그물에 갇혀 있던 주페는 경비병들의 이 난데없는 내분에 뭐가 어찌된 건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때, 수갱 위층 6층에서 다시 사람들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저 머리 긴 놈 잡아! 내려가잖아!”
소대장에 뒤이어 웬 큰 키의 승마복 남자가 랜턴을 입에 물고는 줄을 타고 지하 7층 갱도에 훌쩍 뛰어내렸다. 내려오는 줄을 확 풀어버린 그는 어두운 갱도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주페? 여기 있냐!”
“여기요!”
익숙한 목소리에 주페가 그물 사이로 손을 빼 그 남자 쪽으로 힘껏 뻗었다. 주페를 발견한 그는 추위 속에서 잔뜩 곱은 주페의 거칠어진 손가락을 고운 손으로 꼭 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정말로 따뜻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코리온이 단검으로 그물코를 몇 개 뜯어내고는 이 벌거벗은 소년을 안에서 끄집어내 품에 안았다. 한 달 가까이만에 느껴보는 아들의 체온이었다.
“당숙?”
주페가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을 억지로 그에게 향하고는 코리온의 얼굴을 더듬었다. 아이의 이 모습에 코리온은 문득 데자뷰 같은 것을 느꼈지만 상봉의 감격 따위를 나누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저기 말고 다른 수갱으로 올라가자.”
코리온은 위에서 아이의 손목을 부러져라 붙들고 더 안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코리온은 추격자에게 들키기 쉬운 랜턴을 끄고 죽은 정보장교에게서 빼앗아 온 스코프를 대신 켰다. 다친 병사와 소대장이 뒤엉켜 싸우느라 정신이 팔린 동안 코리온과 주페는 복잡한 막장 갱도에 허겁지겁 뛰어들었다.
“내 지도에서 봤더니 수갱이 저기 말고도 2개 더 있어.”
코리온은 지상에서 보았던 탄광 도면을 떠올리며 미로처럼 좁은 갱도들 사이를 요리조리 내달렸다. 제대로 못 쫓아오는 아이가 내는 끙끙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맘이 급해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이의 손목을 멍이 들 만큼 꽉 움켜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복잡한 갱도를 필사적으로 달렸다.
“여기만 돌면…….”
7층 갱도를 가로질러 달려온 코리온이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의 앞에는 무너진 돌더미와 썩어 흔적만 남은 갱목들, 위로 석탄을 끌어올리는 데 썼을 도르래와 바스켓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탈출로 수갱은 무너져 막힌 상태였다.
“맙소사.”
코리온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돌더미 한쪽엔 옛날 광부들이 썼던 듯한 오래된 안전모와 장비들이 검댕이와 세월의 녹을 뒤집어쓴 채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예전 이곳에서 있었다는 폭발사고의 흔적이었다.
“……잠깐만요.”
코리온은 아이의 신음소리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아이가 바닥에 웅크려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우는 것이 눈이 매워서만은 아니었다.
“주페?”
코리온은 그제야 아이의 발에서 철철 흐르고 있는 핏줄기를 보았다. 놀란 코리온은 손수건으로 급히 아이의 발을 묶고는 외투에 셔츠까지 모두 벗어 덮어주었다. 아이의 발은 도저히 걸을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주페가 발을 움켜쥐고 흐느꼈다.
“발도 아프고 숨을 못 쉬겠어요. 이제 어떡해요.”
“최루가스하고 메탄 때문인가 보다.”
코리온은 주머니를 뒤져 죽은 장교에게서 빼앗아 온 가스 계측기를 확인했다.
“수백 년을 이렇게 있었으니 메탄이 가득한 게 당연하지.”
코리온은 자신이 쓴 마스크 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는 급했던 나머지 아이의 상태도 확인 안 했던 한심한 자신을 탓하며 마스크를 벗었다. 매운 느낌이 그의 눈과 코를 찔렀고 숨이 탁 막혔다. 이런 공기를 지금껏 아들이 숨 쉬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빨리 쓰세요. 여기 매워요, 당숙.”
눈물 범벅이 된 주페가 그를 말리려 했지만 코리온은 그의 얼굴에 자신의 마스크를 덥석 씌워주었다.
“난 어른이니까…… 메탄가스도 더 오래 버틸 거다.”
코리온이 발을 다친 아이를 등에 업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 목 꼭 안고 있어라.”
코리온이 벗은 등에 아이를 업고 다시 갱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 전 경비병들이 내려오던 수갱을 피해 마지막 하나 남은 수갱으로 가는 길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산소가 희박해져서인지 평상시처럼 머리가 돌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주페가 코리온의 목을 꽉 안고 매달리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래.”
코리온이 가빠지는 숨을 몰아쉬며 야시 스코프를 낀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심지어 벗은 어깨와 등, 가슴에서도 어느새 식은땀이 송송 맺히고 있었다. 한참을 걸었지만 다음 수갱은 나타나지 않았고 희박한 산소 속에서 발을 다친 아이까지 업고 가야 하는 코리온의 숨소리는 점점 힘겨워졌다.
주페가 마스크를 풀어 코리온에게 다시 씌워주었다.
“전 이제 괜찮아요.”
주페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던 코리온은 숨 몇 번 들이마시고는 다시 소년의 얼굴에 씌워주었다.
“더 쓰고 계세요, 제발요.”
“난 괜찮아.”
코리온은 마스크를 벗으려는 주페의 손을 탁 치며 씩씩거렸다. 코리온은 힘들게 숨을 내쉬며 반쯤 무너진 갱도 모퉁이를 돌았다. 이곳에도 폭발사고의 흔적인지 부서진 공구들과 안전모, 거의 썩어가는 갱목들이 사방에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주페는 다시 마스크를 벗어 코리온에게 물려주었지만 이번에도 몇 숨 쉬지도 않고 벗었다. 주페가 정색을 하며 그에게 마스크를 더 물려주려 했다.
“전 가디언 피가 섞여서 당숙보다…….”
“여기서 잘난 체하면 손모가지를 부러뜨려 버릴 테다.”
코리온이 대뜸 주페에게 이를 드러냈다. 생전 처음 보는 벌개진 눈과 무서운 표정에 겁에 질린 주페가 바싹 얼어붙었다. 메탄과 산소부족으로 그는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알았어요, 말씀 안 하셔도 돼요. 당숙.”
“말끝마다 그놈의 당숙 소리.”
코리온이 주페를 받친 팔에 더 힘을 주며 마치 울먹이듯 씩씩거렸다. 그의 빨개진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주페는 이 ‘당숙’이 독가스에 중독되어 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울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페가 늘어진 소맷자락으로 코리온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조심조심 닦아주었다. 그때, 멀리 어디선가 군인들이 지르는 고함소리가 메아리처럼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소리에 표정이 창백해진 코리온은 걸음에 더 속도를 붙였다.
“저어, 당숙, 혹시…….”
생각 없이 또 ‘당숙’라고 말했던 주페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무서운 당숙은 화조차 내지 않고 계속 걸음만 옮겼다. 하지만 그렇게 무겁게 걸음을 옮기던 코리온은 갑자기 자리에 우뚝 멈춰서며 마스크 속의 주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짙은 암갈색 눈동자와 갸름한 턱선, 부드러운 콧날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당숙이라 하지 말고……아니다.”
잠시 정신이 희미해졌던 코리온은 하마터면 가슴에 묻어놓았던 말을 토해낼 뻔했다. 다행히 그는 바로 입을 다물고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주페가 이번엔 훨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이쪽 제가 이미 왔던 곳 같은데요.”
“이쪽이 수갱이야.”
“여기 밑은 물로 막혔어요. 아까 제가 보고 돌아 나왔어요.”
“밑이 아니고 위로 가려는 거다.”
“그래요?”
생각해 보니 주페가 그곳을 갔을 때 미처 위쪽은 볼 생각을 못 했었다. 어차피 보였다고 해도 키가 작아 기어오르지도 못했겠지만.
“내가 키가 훨씬 크니까…….”
코리온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멀지 않은 갱도를 누군가 지나는 소리에 둘이 얼른 숨을 죽였다. 주페는 땀으로 미끄러워진 코리온의 몸을 부서질 듯 꽉 끌어안았다. 간 길을 또다시 가고 있지만, 이 사람과 함께라는 것이 정말로 든든했다.
잠시 후, 발밑에서 물이 텀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금 전 돌아나왔던 문제의 수갱에 가까워지는 모양이었다. 그곳도 가망이 없다면 끝장이었다.
“그, 그냥 농담인데 말이다.”
코리온이 숨 두세 번 을 쉬고 마스크를 돌려주며 입을 열었다. 주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빛이 흐려진 코리온이 이미 몇 번째 비틀거리고 있었다. 주페가 알기로, 이 당숙은 절대 농담 같은 건 안 하는 사람이었다.
“정말 농담이란다.”
“말씀하세요.”
“대부 말고 아빠라고 한 번만 불러주겠니…….”
주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지금껏 대부 역할을 해 온 사람이라 해도 태자가 누군가에게 농담으로라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페가 머뭇거리던 그때, 비틀거리며 다가가는 둘의 앞에 탈선한 갱차가 나타났다.
“발 조심하세요, 밑에 뭐 있어요.”
주페는 ‘아빠’ 소리 대신 이 말로 일단 난처한 순간을 벗어났다. 종아리까지 차는 물을 차며 모퉁이를 돌아 막다른 길까지 도착한 코리온은 위부터 올려보았다. 주페가 미처 못 보았던 그곳엔 위층으로 이어진 시커먼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잘 안 보이는구나.”
코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스코프를 조절해 보았지만 눈앞이 흐려 초점이 잘 맞지를 않았다. 그는 곧 스코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볼게요. 무등 태워주세요.”
코리온의 시력이 흐려진 것을 눈치를 챈 주페가 그의 어깨를 타고 위로 올랐다. 그리고 천장을 짚고 고개를 빼 위층 갱도로 올라갈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길이 있느냐?”
코리온의 물음에 주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힘이 빠진 코리온의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당숙 잘못이 아니에요…….”
주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위쪽은 붕괴된 토사와 석탄, 썩은 갱목으로 꽉 막혀 있었다. 그때, 멀리에서 사람들 다가오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리기 시작했다. 코리온을 쫓아온 경비병들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코리온은 물로 꽉 차 웅덩이가 되어 있는 아랫층 수갱과 천장에 달려 있는 부서진 광산등(燈) 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젠 박물관에나 있음직한 백열전구였다. 유리는 광산폭발 때 날아간 듯 보이지 않았고, 빛을 내던 필라멘트도 삭아 없어진 후였다.
코리온은 주페에게 입혀 준 외투 주머니에서 계측기를 꺼내보았다.
“메탄 농도가 높구나.”
주페를 내려놓은 코리온은 갱차 안쪽에 손을 넣어 보았다. 오래된 안전모와 불에 탄 공구, 먼지만 가득했다. 그는 안에 잔뜩 쌓여 있던 더러운 먼지를 한 움큼 모았다. 그는 석탄가루에 쇳가루, 섬유에 갖은 더러운 것들이 모두 모인 먼지를 손으로 비벼 길게 덩어리를 만들었다.
그때, 뒤에 두고 온 주페가 다가와 코리온의 바짓자락을 덥석 잡았다.
“……무얼 하시려고요?”
공포에 질린 아들의 눈동자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코리온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경비병의 발소리 방향을 휙 돌아보았다. 그는 방금 만든 ‘먼지 덩어리’를 손가락에 끼고 천장의 광산등에 손을 뻗었지만 산소부족과 현기증에 위를 올려보지 못하고 도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제가 할게요.”
주페가 코리온의 어깨에 다시 무등을 타고 올라 방금 코리온이 만든 먼지 덩어리를 광산등 필라멘트가 있던 곳에 조심조심 맸다.
“메탄은 위로 모이죠?”
“아는구나”
흐뭇하게 웃어 보인 코리온은 소년의 이마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춰 주고는 갱차에서 주운 녹슨 헬멧을 씌워주었다.
경비병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벽을 더듬어 천장의 등과 연결된 전선을 찾아냈다. 불을 켜는 스위치는 날아갔고 누더기가 된 전선만 벽 옆에 축 늘어져 있었다. 코리온은 랜턴을 뜯어 안에 든 전지 팩을 뜯어냈다. 크기는 작아도 광산이 운영되던 시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력한 물건이었다.
경비병들이 오는 방향을 노려보던 코리온은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머지 선을 연결했다. 그리고는 깡통 하나를 집어 벽에 힘껏 던졌다.
“누구냐!”
반대편에서 경비병들의 고함소리와 함께 두 개의 그림자가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다! 2번 수갱에서 학장이 도망친다!”
경비병들을 끌어들인 코리온은 녹슬어 뒹굴고 있는 묵직한 갱차 바퀴를 들고 급히 모퉁이를 돌아 막다른 수갱 웅덩이 앞에 섰다. 주페는 웅덩이에 한 발을 슬쩍 넣어 보았다. 아무 것도 밟히지 않았다. 둘의 바로 앞에는 9층으로 이어지는 깊은 수직 갱이 차가운 물로 가득 찬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경비병이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나타낸 건 그때였다. 코리온은 그들에게 돌아서며 오른손에 주페를, 왼손에는 육중한 갱차 바퀴를 꽉 안고 마치 항복하는 사람마냥 바닥에 털썩 꿇어앉았다.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었다. 자신을 쫓아온 수십의 경비병들이 이곳으로 벌떼처럼 모여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허, 그 쇳덩이는 뭐냐? 한 대 치기라도 하시게?”
억지로 고개를 쳐든 코리온은 궁지에 몰린 자신과 아들을 보며 히죽거리고 있는 경비병들의 모습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희박한 산소 속에서 아들을 지키려는 의지력 하나로 버텼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였다. 주페는 조금씩 중심을 잃고 뒤로 기우는 코리온의 목을 꼭 안았다.
“제발 버텨요, 아빠.”
그때, 둘의 귀에 ‘무슨 탄내 안 나?’ 라며 묻는 경비병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천장에서 무언가 번쩍 하며 그들의 짧은 비명소리가 갱도를 울렸다.
“사랑한단다, 얘야.”
코리온은 이 한 마디와 함께 주페와 쇳덩이를 꽉 안은 채 깊은 수갱 밑으로 그대로 몸을 던졌다. 물 속으로 조금씩 잠겨가던 주페는 수면 위를 거대한 광채가 뒤덮자 눈이 부셔 얼른 코리온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버려진 탄광에 수백 년간 쌓여 있던 메탄가스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갱도 전체를 일순간 화염으로 집어삼켰다.
“우우읍!”
물을 타고 전해지는 엄청난 압력 속에서 주페는 자신의 작은 몸을 껴안고 있는 코리온의 단단한 팔을 느꼈다. 천지를 뒤흔드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진동과 물살이 이 둘을 지하 9층 밑바닥, 아니 더 안쪽까지 한 번에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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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뭉치 황족들의 3연타석 안타입니다. 이번엔 좀 ㅤㅆㅔㅂ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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