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75화 (970/1,132)

< -- 975 회: 파트11.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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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안에 오빠 있다니까요.”

“알아요, 아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세데스는 여전히 광산 배기구 앞에서 떼를 쓰는 마리안과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황상께서 거의 도착하셨답니다. 방금 옹주마마 떨어뜨리고 갔던 불릿인지 뭔지 몸소 몰고 여기로 오시는 중이시고 보안국 특수부대도 곧…….”

투닥거리던 세데스와 마리안, 그리고 가디언 셋은 배기구 안쪽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압력의 변화에 거의 같은 순간 고개를 휙 돌렸다.

“뭐지?”

물로 가득 찬 배기구 안쪽을 멍하니 쳐다보던 셋은 갑자기 안에서 폭발하듯 밀려나오는 물살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할 새도 없었다.

“이, 이런!”

탄광 안에서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나온 물살이 이 셋을 순식간에 배기구 밖으로 토해냈다. 물살에 휩쓸린 셋은 배가 떠 있는 강물 한복판에 마치 나뭇조각마냥 튕겨나갔다. 엄청난 수압에 절벽 아래 정박해 있던 검은 수송선까지 위아래로 출렁거리며 선착장에서 밀려갈 지경이었다.

“옹주마마?”

얼떨결에 강 중간까지 밀려난 세데스가 중간에 놓쳐버린 마리안을 황급히 찾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위를 올려보니 문제의 건물이 있던 절벽 위, 노천광 쪽에서 거대한 검은 연기가 하늘로 무럭무럭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때맞춰 귀에 꽂은 할룩스에서 언덕 위에 보내놓은 가디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탄광이 폭발한 것 같습니다. 탄광 입구로 시커먼 연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질식한 채로 나와 쓰러져 있고요. 어쩌죠?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제후님! 저기 보십시오!”

이번엔 함께 쓸려나온 가디언의 고함에 세데스가 조금 전 빠져나온 탄광 배기구 쪽을 휙 돌아보았다. 폭발 압력에 어마어마한 물을 쏟아냈던 배기구로 이젠 다시 물이 쓸려 들어가고 있었고 그 중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마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저대로라면 배기구 안, 탄광 지하 9층으로 빨려 들어갈 판이었다. 가디언이 꼬마를 잡으려 필사적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옹주 마마!”

가디언을 뒤따라 마리안을 구하려 넋을 잃고 필사적으로 헤엄을 치던 세데스는 아차 싶었다. 어느새 그 역시 물에 빨려가고 있었다.

“이런, 젠장! 어떤 병신새끼가 탄광을 터뜨린 거야!”

세데스는 다시 돌아나가려 했지만 아무리 버둥거려 봐도 힘과 체력만으로는 급류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마리안을 쫓아간 가디언이 꼬마를 덥석 붙들어 품에 안았지만 그 역시 물살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빨려 들어가지 말고 옆을 잡아!”

세데스가 악을 썼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시커먼 입을 벌린 배기구는 하얀 승마셔츠를 입고 버둥대던 조그만 소녀와 그를 껴안은 가디언을 무심히도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물에 휩쓸린 세데스도 배기구에 점점 가까워졌다.

“으익!”

물에 빨려 들어가던 세데스는 배기구 모퉁이라도 잡아보려 위로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다행히 큰 키 덕분에 위를 가까스로 잡기는 했지만 뒤이어 물살에 밀려온 나무토막에 등을 받치며 비명을 질렀다.

“우, 우악!”

나무토막에 받쳐 손이 미끄러진 세데스도 마리안에 이어 시커먼 배기구 안으로 그대로 쏙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몇 번이나 중심이 잃고 여기저기 배기구 벽과 중간의 이물들에 부딪쳐가며 빛도 없는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다.

“빌어먹을! 끝장이네!”

세데스가 악을 썼다. 그 순간, 갑자기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 같더니 물 속으로 다시금 풍덩 처박혔다. 놀라 버둥거리던 그의 손을 누군가의 작고 고운 손이 덥석 잡아주었다. 세데스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무작정 붙들었다.

“물 먹지 말고 조금만 숨 참으세요, 제후님!”

세데스가 물 안에서 중심을 못 잡고 한 바퀴를 빙 돌았다. 다리를 최대한 뻗어 보니 바닥에 발끝이 살짝 닿는 것도 같았다. 물 깊이는 어깨 정도였지만 배기구에서 쏟아져 떨어지는 물살 때문에 제대로 서기도 쉽지 않았다.

“학, 학!”

가까스로 발을 디디고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세데스는 자신이 마리안의 손을 붙들고 있던 것을 그제야 알았다. 아이 손에 구출되었다는 데 부끄러워진 그는 얼른 벽에 매달리며 마리안의 손을 놓았다. 잔뜩 겁을 먹었을 꼬마는 건장한 가디언 아저씨의 품에서 놀랄 만큼 침착하게 있었다.

“후우.”

세데스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물에 완전히 잠겨 있었을 지하 9층 갱도는 빛 하나 없이 깜깜했지만 할아버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적외선 시야가 작동하면서 탄광의 음산한 실루엣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방금 전 폭발의 압력에 순간적으로 위쪽의 물이 밀려나가 빈 공간이 잠시 생겨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숨 쉴 수 있는 건 고작 몇 뼘 정도에 불과했고, 그나마 거대한 배기구로 다시 물이 콸콸 들어오고 있으니 도로 물로 차는 건 시간 문제였다.

“들어온 구멍으로 다시 나가긴 힘들겠습니다.”

가디언이 물이 세차게 밀려들고 있는 배기구를 가리켰다.

“차라리 위층으로 올라가는 게 낫겠다.”

물 속에서 할딱대던 세데스는 광산 도면을 꺼냈다. 그때, 위에 남겨두고 온 가디언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에 꽂은 이어셋으로 들어왔다.

“제후님? 지금 대체 어디 계십니까? 연락이 끊겨서 놀랐습니다.”

가디언의 목소리가 알아듣기 힘들 만큼 지직거렸다. 아무래도 떨어지는 와중에 여기저기 부딪쳐 할룩스도 망가진 것 같았다.

“셋이 다 9층으로 빨려 들어왔다. 물이 거의 꼭대기까지 찼는데 배수구로는 물이 계속 들어와서 못 나가.”

“거기서 조금만 버티십시오! 곧 작전이……!”

“언제까지 버텨! 배기구가 여기 말고도 3개나 된다고! 거기로 물이 다 들어오고 있을 텐데 누구 물귀신 되는 꼴 보고 싶냐!”

세데스는 다시 물 밖으로 힘겹게 고개를 빼냈다. 9층의 수위가 점점 높아져 이젠 바닥에 발끝이 닿지를 않았다. 숨 쉴 공간은 이제 천장에서 고작 두세 뼘 남아있었다.

“여기선 더 못 버티니 8층으로 올라가겠다.”

도면을 대충 머릿속에 담은 세데스는 위층과 이어진 사갱(斜坑 : 경사진 갱도) 쪽으로 천장을 짚고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가디언의 고함이 지직거리며 다시 들려왔다.

“황상께서도 막 도착하셨으니 거기서 조금만…….”

“젠장! 황상인지 밥상인지 당장 내가 빠져죽게 생겼는데 기다리긴 뭘 어떻게 기다려!”

급한 맘에 반쯤 이성을 잃은 세데스가 악을 쓰고 고함을 질렀다. 그때, 건너편 목소리가 갑자기 바뀌었다.

“옹주도 거기 있다고?”

잠시 성깔을 냈던 세데스는 전율이 느껴지는 황제의 목소리에 순간 온몸이 확 굳어버렸다. 황제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가디언의 품에 안겨 있던 마리안의 눈이 초롱거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내 당장 내려갈 테니 위치를…….”

황제의 격앙된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더니 그 뒤로는 치익거리는 잡음만 들려올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폐하?”

세데스는 이어셋을 두들겨 보았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

“이봐, 네 껀 안 돼?”

세데스가 마리안을 안은 가디언에게 물었다.

“제껀 박살이 났습니다.”

“젠장. 내 팔자야.”

세데스는 턱까지 차오른 물을 헤치고 어두운 탄광을 더듬더듬 나아가기 시작했다. 랜턴으로 앞을 밝히고 물과 사투를 벌이며 한참을 나아간 세데스는 8층으로 올라가는 오르막 사갱에 다가갔다. 제법 가파른 기울기의 사갱 위쪽에서도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후우.”

세데스가 등 뒤를 돌아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9층은 이미 물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조금만 더 머물렀다간 정말로 물귀신이 되었을 판이었다.

“경사가 가파르니 옛날 말뚝 박혔던 곳 짚고 올라오세요. 앞서서 올라가 볼 테니 옹주마마를 맡아주십시오.”

가디언이 품에서 놓아주자 마리안은 두말없이 세데스의 뒤로 가서 그의 목을 꼭 안았다.

“저 위층에 오빠하고 당숙 있어요.”

가디언을 따라 막 올라가려던 세데스가 움찔했다.

“농담 아니죠?”

“정말이에요. 저 위에 있어요, 분명히.”

세데스의 목 뒤에 매달린 마리안은 이 깜깜한 갱도 안에서 마치 환한 바깥세상이라도 보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손가락으로 방향까지 가리켰다. 세데스는 만일을 대비해 허리에 찬 무기를 단단히 확인하고는 앞서 올라가는 가디언을 따라 몸을 힘껏 끌어올렸다.

멍한 정신 속에서 눈을 뜬 주페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온몸이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 욱신욱신 쑤셨고 귀도 멍멍해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는 물 속이 아니고 질척한 땅 위에 누워있었다.

“학, 학.”

매캐한 탄내가 풍겨왔고, 어디선가 뜨거운 공기가 흘러드는 것도 같았다. 공기가 탁해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는 뒤통수를 누군가의 손이 받치고 있는 것을, 그리고 가슴 위에 얹힌 묵직한 팔을 느꼈다.

“당숙?”

주페가 고개를 번쩍 돌렸다. 얼굴이 파랗게 변한 코리온이 그를 안고 있던 자세 그대로 옆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벗은 그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주페는 그제야 내리꽂히는 무서운 물살 속에서 자신을 꽉 껴안고 부르르 떨고 있던 그의 품을 떠올렸다.

“당숙, 괜찮으세요?”

몸을 일으킨 주페는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코리온의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귀에 물이 들어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심장이 뛰고 있었다. 주페는 코리온의 외투에서 할룩스를 꺼내 보았지만 먹통이었다.

“제발 눈 떠요, 살았잖아요. 눈 떠 봐요.”

주페의 목소리에 코리온이 눈을 가늘게 눈을 떴지만 가스에 중독되고 수압까지 이겨내며 아들을 지켜낸 그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오른쪽 갱도로 해서 6층으로 가.”

“일어나야 가죠. 빨리 일어나요.”

“내 신발 벗겨 신고 혼자 가.”

“미쳤어요!”

주페는 울먹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쪽으로는 자신이 물에 쓸려 내려온 수갱 입구가 보였고 동그라미를 위아래로 붙여놓은 낯익은 글자가 그 옆에 쓰여 있었다. 둘은 폭발로 물이 밀려나간 8층에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빠져나갔던 지하수가 다시 8층으로 밀려들면서 바닥은 어느새 물이 흥건했다.

“잠깐 기다려요. 보고 올게요.”

주페는 방금 물에 밀려서 내려온 수갱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뜨거운 열기가 먼저 그의 얼굴을 때렸다. 위를 보니 7층은 군데군데 난로 속처럼 시뻘겋게 타고 있었다. 방화복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위로 올라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저곳에 있던 경비병들의 운명은 보나마나였다.

낙담한 주페는 다시 무릎으로 기어 코리온에게 돌아왔다.

“안되겠어요, 위로는 못 가요. 당숙.”

또 ‘당숙’이라 했던 주페는 죄책감을 느꼈다. 주페는 자신을 아빠라 불러달라던 이상한 청을 그의 정신이 온전할 때 안 들어준 것을 이제야 후회했다.

“아까 제 말 들으셨죠? 그렇죠?”

젖은 채 축 늘어진 코리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주페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갔다. 갸름한 턱, 긴 콧날과 눈매, 곱슬기 없는 검은색의 긴 직모가 그의 눈을 떠나지 않았다.

“그 말씀 정말 농담이셨어요?”

주페가 코리온의 얼굴을 짚으며 물었다. 황후 아메스의 둥근 얼굴과 흑인종 흔적이 남은 도톰한 입술, 반곱슬머리, 짧은 콧날 중에서 그는 하나도 닮은 것이 없었다. 주페는 머리를 자신처럼 짧게 깎은 이 ‘당숙’의 모습을 무심결에 떠올려 보았다.

“제발요, 정말 농담이셨냐고요.”

코리온은 눈만 껌뻑이고 있을 뿐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못 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그는 ‘농담이었다.’라는 대답을 결국 내놓지 않았다.

그때, 불타고 있는 7층 쪽에서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에 주페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안되겠어요.”

주페는 코리온의 외투에서 도면을 꺼냈다. 지하 8층은 6, 7, 9층을 연결만 하는 Y자 모양의 좁고 긴 굴이었다. 왼쪽 길은 더 깊은 9층으로, 오른쪽 길 끝엔 두 층 위인 지하 6층과 연결된 수직갱이 있었다. 코리온은 이 오른쪽 길을 통해 6층으로 올라가라는 의도였던 듯했다.

“걱정 마세요, 이젠 제가 구해드릴게요.”

그때, 뒤쪽의 7층에서 귀에 익은 쿠베의 신경질 섞인 고함이 들려왔다.

“이 멍청이들!”

혼비백산한 주페는 작은 어깨로 코리온을 힘껏 부축하고 일어서서는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발로 거친 바닥을 디디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냥…… 가. 그 발로 어떻게 걸어.”

“아빠를 두고 어떻게 가요.”

“난……네 아빠가 아냐.”

주페가 멈춰서 뒤를 휙 돌아보았을 때, 코리온은 그를 똑바로 보고 있지 못했다.

“거짓말 마요.”

주페는 끄응 소리를 내며 앞으로 걸어 갈래길에 도착했다. 주변은 움푹하게 팬 깊은 웅덩이가 있었고, 6층과 이어진 오른쪽 굴은 육중한 갱차 한 대가 쓰러져 막고 있었다. 웅덩이를 조심조심 밟고 나아가던 주페는 9층과 이어진 왼쪽 길에서 인기척을 느끼고는 멈칫했다.

“이런.”

갈래길에 선 주페가 앞뒤를 번갈아 보았다. 그때, 이번엔 7층과 이어진 뒤쪽 길에서 시커먼 재와 갱목 한 무더기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당황한 주페는 길을 막고 있는 갱차 안쪽으로 코리온을 끌고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이크.”

가스 폭발로 불타고 있는 7층에서 누군가가 훌쩍 뛰어내렸다. 방열 보호복에 고글과 호흡장치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 명으로 끝이 아니었다. 뒤를 이어 두 명, 세 명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 숨었냐.”

7층에서 뛰어내린 쿠베가 머리에 쓴 헬멧과 보조 호흡기를 휙 벗어던지며 주페와 코리온이 간 방향으로 손끝을 겨누었다.

그 때, 이번엔 반대편인 9층과 이어진 굴에서 인기척이 가까워지더니 모퉁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엇.”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에 주페가 화들짝 놀랐다. 마리안을 업고 9층에서 올라온 세데스가 주페와 코리온을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달려오려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코리온과 주페를 만난 반가움은 잠깐이었다.

“이런, 니미럴.”

세데스는 반대편에 있는 쿠베 무리를 발견하고는 절로 욕을 내뱉었다. 상대는 특등급 가디언 쿠베와 3명의 코런덤 헤네티이지만, 이쪽에서 꼬마 둘과 코리온을 빼면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세데스와 3등급 가디언 둘뿐이었다.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었다.

“이건 또 웬 떡이야.”

쿠베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세데스에게 칼을 겨누었다.

“내가 안아준지도 꽤 오래된 것 같은데, 내 살냄새 안 맡고도 잘 지내셨나?”

쿠베의 노골적인 조롱에 세데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나저나, 9층은 물로 막혔을 텐데 대체 어떻게 들어왔지?”

골이 난 세데스는 아무 대답을 않고 말없이 쿠베를 노려보기만 했다. 9층이 물에 잠겼으니 그도 사실상 막다른 길이었다. 유일한 탈출로는 이제 6층으로 이어진 굴―조금 전 주페가 가려 했던― 하나뿐이었다. 쿠베의 큰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가문에서도 쫓겨났다지? 그간 든 정이 있으니 잘못했다고 빌면 까짓 거 내가 다시 거두어주지. 나도 솔직히 너 죽이는 게 맘이 편치는 않거든?”

수치심에 부르르 떨고 있는 세데스를 뒤에 업혀 있던 마리안이 갑자기 꽉 붙들었다.

“저기요.”

업혀 있던 마리안이 세데스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신경이 곤두선 세데스의 표정이 대뜸 험악해졌다.

“닥쳐, 이 꼬맹이야. 내가 죽게 생겼는데 니 오빠 챙기게 생겼어?”

세데스가 화를 버럭 내며 등에 업고 있던 마리안을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놀란 마리안이 바닥에 떨어진 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왜요, 약속했잖아요.”

“제후님?”

세데스를 따라온 가디언이 울고 있는 소녀를 얼른 일으켜 주었다.

“듣기 싫으니까 조용히 좀 시켜.”

씩씩거리던 세데스는 훌쩍거리고 있는 소녀와 이젠 움직일 기운도 남지 않은 코리온, 그리고 그를 껴안고 있는 주페를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편에 도저히 가망이 없음을 재차 확인한 그는 옆으로 난 갈래길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를 읽은 쿠베가 껄껄대고 웃기 시작했다.

“왜? 짐덩이 꼬마 버렸으니 6층으로 도망가려고? 미안해서 어쩌나. 저기도 옛날 사고 때 무너진 크레인하고 갱목으로 중간이 막혀 있을 텐데?”

그때, 위층 어딘가 꽤 멀리에서 우르르 하며 무너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잘은 몰라도 두세 층 정도 위인 것 같았다. 쿠베가 다시 잘난 체를 했다.

“이봐, 여긴 800년이 넘은 탄광이야. 방금 전의 폭발을 버텨낸 게 용하지. 위에 7층은 이미 불바다거든? 6층도 비슷할 거야. 올라가 봤자 갱도를 지나지도 못하고 바삭한 통구이가 될 테니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

쿠베가 혼자서 세데스에게 한 발 다가왔다. 벽에서 철철 흘러내린 지하수가 조금씩 바닥에 고여 질척거리고 있었다.

“이 밑의 9층은 강물에 다 잠겼을 테고, 위층은 불바다고, 여기 8층은 이 지하수에 곧 잠기겠지? 어떡할까? 응?”

쿠베는 흔들리고 있는 기색이 역력한 세데스에게 다시 슬그머니 다가가며 어깨에 찬 보조호흡장치를 가리켜 보였다.

“여분 호흡튜브가 있어서 하나 정도는 더 데려갈 수 있어.”

쿠베가 세데스에게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비록 처음엔 다른 꿍꿍이로 접근했었지만 어쨌든 세데스는 순수하던 어린 소녀 때 그에게 처녀를 주었고 내내 그의 품에 안겼던 여자였다. 게다가 어머니 오르테를 빼닮은 미인에 명문 델루지 가와 라자루스 가의 피를 받은 훌륭한 혈통이기까지 했다.

잔혹함 하나로 살아 온 쿠베였지만 20년 넘게 정을 나눈 여자를 눈앞에 마주한 순간 미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개죽음하느니 내 아내로 미래를 도모하는 게 훨씬 낫지. 네가 귀화를 맘먹었다면 우리 위대한 현신께서도 널 용서하실 거야. 델루지 가 원로들 쓸모가 다한 후에 복직시켜 주실 테고.”

‘쿠베의 아내’라는 말에 세데스의 표정이 짧게 일그러졌다.

“이게 청혼이라면 정말 거지 발싸개 같은 타이밍이네.”

“그게 중요한가. 지금 널 살려주겠다는 거잖아. 날 사랑했었던 거 잊었어? 난 너한테 첫 남자라고.”

한 발짝 더 다가온 쿠베가 갈등하고 있는 세데스에게 팔을 벌려 보였다. 그때, 조금 전보다는 더 가까워진 곳에서 다시 굉음이 올려왔다. 이번엔 무언가 쿵쿵쿵 하며 일정한 간격으로 연이어 두들기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분명한 건 저 정체불명의 굉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고, 바닥의 물은 이미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자, 빨리 결정해. 내 품에서 나중을 도모할 거야? 아니면 여기서 개죽음할거야?”

“후우.”

두려운 표정으로 갈등하던 세데스가 결국 손에 쥔 검을 내려놓고 쿠베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울고 있는 마리안을 안은 가디언이 애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후님, 정말 투항하실 겁니까.”

“넌 닥치고 있어.”

쓰러진 갱차 앞을 지나가던 세데스는 코리온을 안고 있는 소년 주페에게 짧게 시선을 주었다.

“죄송합니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네요.”

“제발, 이러지 마시오.”

주페가 자신들을 버리고 무심하게 앞을 지나는 세데스의 발목을 덥석 잡았지만 그는 소년의 작은 손을 매정하게 툭 차내고는 쿠베에게 다시 나아갔다. 그는 치욕감에 물든 표정을 억지로 감추며 말을 꺼냈다.

“네가 정말 내 남편이 되고 싶으면 지난번처럼 날 모욕하지 말고…….”

“허어, 시간 없다니까 진짜.”

세데스가 시간을 끌자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쿠베가 버럭 화를 냈다. 그때, 문제의 ‘무너지는 소리’가 또 한 번 천장 위를 흔들었다. 이번엔 꽤 가까웠다. 쿠베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세데스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정말이야, 지난번처럼 내게 손찌검했다간 끝장이야. ……날 존중해야 하고 ……다른 년을 안기라도 했다가는…….”

“알았어, 알았으니까 당장 오기나 해!”

마음이 급해진 쿠베가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세데스를 힘차게 안았다. 하지만 때맞춰 이번엔 이 층 어딘가에서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베의 품에 안긴 세데스도 바싹 움츠러들었다.

“알았어. 널 믿고 갈게. 미안해, 쿠베.”

세데스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이 사자같은 사내의 우람한 가슴을 살며시 품에 안았다. 그제야 안도한 쿠베도 세데스의 허리를 꼭 안았다. 세데스가 쿠베의 넓고 다부진 가슴에 기대며 울먹였다.

“나도 너 사랑하니까 다시는 나 배신하지 말고…….”

뒤이어, 또다시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울리자 이번엔 쿠베도 정확히 방향을 읽어냈다. 그는 방금 전 막혀 있다고 말했던 오른쪽 갈래길 끝이었다. 이 수상쩍은 굉음은 마치 이곳을 알고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데? ……우읍.”

세데스의 품 안에서 잠시 넋을 놓았던 쿠베는 순간 옆구리 뒤를 무언가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에 움찔했다. 같은 순간, 등 뒤에서 들리는 헤네티들의 비명소리가 쿠베의 귓가를 메아리쳤다.

“대장!”

바싹 얼어붙은 쿠베는 품 안에 있는 세데스를 멍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오른쪽 허리 뒤였다. 방금 전까지 그의 등을 다정히 쓰다듬던 세데스의 손에 쥐어진 짧은 톱날 비수였다.

“더 움직이면 너도 죽어. 비장하고 복부대동맥 바로 앞이거든.”

그에게 안겨 있는 여자가 마녀처럼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내가 엄마를 죽인 개새끼 품에서 바보천치처럼 웃어줄 줄 알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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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데스도 사고뭉치 황족들 따라 부창부수(???) 3루타 하나 날립니다. ^^

'팔자 타령'은 라자루스 가 여자들의 전매특허입니다. ㅎㅎㅎ

오늘은 일이 있어서 조금 일찍 올립니다.

내용 맞춰 자르다보니 좀 길어졌습니다. 다음편엔 조금 짧아질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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