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77화 (972/1,132)

< -- 977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이번 회부터 새 파트 시작합니다. ^^

카렐이 외도를 끝내고 황제의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배경도, 분위기도 싹 바뀝니다.

제목부터 유혈낭자한 제국회의 전야제입니다.

내용도 살벌하고, 충격적인 전개(?)도 있을지 모릅니다.

청소(?)되는 캐릭도 많고, 반가운(?) 캐릭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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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보다 키가 훨씬 크네.”

난생 처음 지도자 집무실에 발을 들여놓은 초보장교 오르마즈 카파키를 맞아준 건 지도자 파냐드의 후계자인 19살 소년이었다. 키와 체격은 오르마즈에 맞먹을 만큼 컸지만 앳된 인상만은 숨길 수가 없었다. 지도자 파냐드가 교단의 암살 미수로 중상을 입고 의식불명에 빠지면서 그간 민병대 행정부서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던 이 소년이 어머니를 대신해 집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비록 중요한 결정들은 지도부와 어머니의 남편들이 내리고 있지만 살기등등한 지도자 파냐드가 이 아들을 대리인으로 못박아놓은 덕분에 최소한 아직까지는 그들도 소년의 위치를 넘보지 못하고 있었다.

지도자 집무실은 생각만큼 화려하거나 크지는 않았다. 금고 몇 개와 서류 캐비넷, 허름한 회의용 원탁과 책상 정도가 전부였다. 10만이 넘는 민병대와 제니안, 정교분리론자의 연합세력을 이끄는 총본산이라고 하기엔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동안 죄수부대에서 고생 많았다지.”

소년은 경례를 올리려는 오르의 거친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예상치 못했던 환대에 도리어 놀란 건 오르였다. 오르와 마주선 에르네스토는 숱한 상처와 화상 자국까지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얼굴도 왜 이리 상처가 많아? 흉터치료도 안 한 거야?”

“어딘가에서는 가슴에 붙는 훈장보다 이걸 더 중요하게 봅니다.”

오르마즈가 에르네스토에게서 살며시 손을 빼냈다. 죄수부대에서 흉터는 오래 살아남았다는 나이테와 비슷했다. 애당초 약품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탓이기는 했지만 약이 있어도 흉터를 지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네 얘기했던 기억이 나.”

소년 에르네스토가 오르마즈에게 자리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저를 말입니까? 입실론께서요?”

오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에르네스토의 아버지 입실론을 만났던 때는 파티장에서 잔심부름하는 말단 병사에 불과했고 지도자의 첫째 남편이 기억할 만큼 무게감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그나마도 그 한 번의 만남이 유일했다.

“설마 그분께서 저 같은 졸병을 기억해 주셨을 줄은…….”

“공치사 아냐. 내 11살 생일이었던가? 아버지가 ‘오르마즈 카파키’라는 이름을 잘 기억해놨다가 나중에 크게 쓰라고 하셨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동안 생각을 못 했는데 2수형대대 전과 보고서에 네 이름이 있어서 깜짝 놀랐지 뭐야.”

오르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와 입실론은 이전에 알던 사이도 아니었고, 됨됨이를 파악할 만큼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 남자에게 ―연인 나즈라 못지않게― 좋은 인상을 받기는 했지만 아내의 압박으로 집안에 갇혀 지내는 남자와 만날 일도 없었고 이젠 이 세상 사람도 아니었다.

“늦었지만 아버님께 벌어진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오르마즈가 나름 조심스레 입을 열었지만 소년은 생각보다 의연했다.

“뭘, 이제 7년이나 지났는데.”

소년은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오르마즈가 입실론의 죽음을 전해들은 건 샤워장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을 무렵이었다. 평소처럼 아내 파냐드의 곁에서 멀쩡히 잠들었던 입실론은 다음날 아침 시체로 발견되었다.

정보국에서는 교단 암살수가 지도자를 독살하려 놓은 음료를 실수로 남편이 마신 것 같다고 발표했지만 민병대 밑바닥의 소문은 달랐다. 온화한 성격의 입실론은 아내 파냐드의 잔혹한 정책과 강경파의 잦은 민간인 학살에 이런저런 수단으로 제동을 걸곤 했고, 그런 그를 탐탁지 않아하던 강경파의 압박에 파냐드가 결국 남편을 제거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는 아는데, 그때 얘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 어머니야.”

에르네스토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20살 가까운 나이라면 자신을 사실상 돌보고 키워 주었던 착한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된 루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오르도 더 이상 입실론의 죽음에 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저어,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봐, 할 수 있는 거면 해 줄게.”

에르네스토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제가 재판받을 때 제 편 증인으로 나왔던 사환 와헷을 찾고 싶습니다. 그때 7살이었는데 저 없는 동안 잘 있었는지 궁금해서요. 헌병대에 찍혔을 텐데 혹시라도…….”

오르의 물음에 에르네스토가 정색을 하며 파일을 펼쳐들었다.

“아아, 자네 파일에서 봤어. 혹시나 해서 알아봤는데 솔로스 대위가 재판 직후에 다른 곳에 보냈더라고. 어디더라? 아, 테나토 지부로 보냈네. 사환으로 적합지 않아서 부모를 찾아 돌려보냈다고 되어 있어.”

오르의 표정이 굳었다. 오르의 이전 부탁대로, 솔로스 대위가 헌병대에 불리한 진술을 한 꼬마를 고향으로 돌려보낸 모양이었다. 와헷의 부모가 아이를 또 인신매매단에 팔지나 않았을지 걱정이 들었지만 이곳에 남아 헌병대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때, 집무실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어, 이제 왔나?”

진지했던 에르네스토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 환한 얼굴로 후다닥 나아가 문을 열었다.

“어서 와요, 지난번 말한 카파키 소위가 와 있어요.”

누군지 어리둥절해진 오르마즈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단 자세를 잡았다. 아직 익숙지 않은 장교 정복이 영 불편했다. 문을 열어 준 에르네스토는 문가에서 웬 여자와 포옹을 하고는 다정하게 입맞춤을 나누었다.

‘이 녀석 복 터졌네.’

남편과 함께 들어서는 여자를 본 순간, 오르의 머리에 든 건 이런 한심한 생각이었다. 이 19살의 후계자는 얼마 전 결혼해 가정까지 꾸민 어엿한 신혼의 가장이었다.

‘어디서 저런 미녀를 구했을까?’

에르네스토와 함께 들어온 건 짙은 까만 머리에 흑진주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한, 누가 봐도 깜짝 놀랄 만큼 매혹적인 미녀였다. 10대의 앳된 신랑과 함께 서 있으니 언뜻 보아서는 누나 동생이나 모자지간이라 해도 어울릴 것 같았다.

남편과 인사를 나눈 여자는 오르마즈에게 휙 돌아섰다. 그리고는 그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죽 보며 입가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에르네스토가 흐뭇한 얼굴로 아내를 소개했다.

“내 아내 파란기스야. 파란기스 카이. 초면이지? 이쪽은…….”

“오르마즈 카파키, 타리프 카파키 신관님의 후손 맞죠?”

에르네스토의 아내 파란기스는 고개를 숙이려는 오르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흐, 음, 부, 부인?”

당황한 오르마즈가 에르네스토의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파란기스의 등을 안아주었다. 한참이나 오르마즈를 안고 있던 파란기스는 그의 그레이오팔 눈동자와 상처투성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시 웃었다. 오르마즈는 웃고 있는 파란기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정말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오르마즈는 파란기스의 발음이 어딘지 이상하다고 느꼈다. 비음과 연음이 잔뜩 섞인 파란기스의 특이한 발음은 죄수부대에서 웬만한 지역 출신들을 다 만나 본 오르에게도 퍽이나 낯설었다. 마치 공용어를 모태어로 배우지 않은 사람 같았다. 오르마즈를 보는 파란기스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멋있게 자랐을까요.”

오르마즈의 얼굴을 만지던 파란기스는 다시 그를 품에 꼭 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과해도 너무 과한 환대에 난처해진 오르마즈가 남편 에르네스토의 눈치를 보았지만 다행히 이 젊은 신랑이 노골적인 질투를 보이지는 않았다.

“자네 증조부 때문이야. 타리프 신관이 아내를 한동안 돌봐 주셨거든.”

“아……, 그러시군요.”

오르마즈는 태연하게 대답하면서도 어딘지 부담스러웠다. 좀 더 솔직히는 이 미녀의 포옹에 갑자기 흥분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당혹감 때문이었다.

뒤늦게야 그런 눈치를 챈 듯 파란기스가 그에게서 한 발 물러서며 웃음을 지었다.

“다하카르 교단에 쫓겨 다니는 신세였는데 그분께서 돌봐주셨어요. 그분 소개로 민병대에 와서 지내다가 이런 좋은 신랑도 만나게 됐고요. 나이는 어려도 책임감 강하고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아내의 칭찬에 에르네스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작년에 타르서스 지부에 갔는데 거기 자료보관실 사서가 천하절색이라고 하더라고. 처음엔 얼마나 예쁜지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첫눈에 이 사람이다 싶어서 무작정 프러포즈하고 그날 밤 바로 사고 쳐 버렸지.”

에르네스토의 무용담에 이번엔 파란기스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에르네스토가 오르의 품에 있던 아내의 허리를 보란 듯 안아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오르가 눈치껏 뒤로 물러나주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머님께서 가만히 계시던가요.”

“웬걸, 어머니가 펄쩍 뛰셨는데 이미 일 저질렀으니 알아서 하시라고 집안 다 엎었지 뭐야.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딨겠어.”

에르네스토가 아내의 어깨에 턱을 걸며 그의 곱고 아름다운 옆 얼굴을 흐뭇한 미소로 쳐다보았다. 아내를 보는 따뜻한 시선은 남편들을 종 부리듯 하는 어머니 파냐드보다는 죽은 아버지 입실론과 훨씬 비슷했다.

“미안, 미안. 내가 헛소리만 했네.”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오르의 모습에 당황한 에르네스토가 얼른 아내를 안은 손을 풀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앞으로 내 사람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소년의 진지해진 태도에 오르도 뒤따라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머니는 곧 회복하실 테고, 내가 여기 집무실에 있을 날도 얼마 안 남았어.”

에르네스토가 오르마즈의 두 손을 꼭 잡으며 간곡하게 말했다.

“자네 지난번 재판 내용하고 죄수부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다 봤어. 억울하게 중형을 받았다는 거 나도 알아. 아버지 눈썰미하고 아내 추천도 믿지만 내 눈에도 자네 참 맘에 들었어. 그래서 늙은 장군들 반대하는 거 막무가내로 감수하고 장교로 삼아서 여기로 불러올렸어. 제발 나 실망시키지 마. 알았지?”

에르네스토의 표정이 간절했다. 이 소년은 어머니를 대신해 민병대를 맡은 천금 같은 기간에 미래 자신의 사람이 될 인재들을 미리 심어놓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맘 같아서 중앙의 편한 자리 주고 싶었는데 중앙에서는 죄수부대 출신을 받으려는 부서가 없더라고. 다행히 골짜기 서쪽 소초에 소초장 자리가 하나 비었더라고. 일선 소초장이 승진도 제일 빠르니까 눈 딱 감고 내가 자리 잡을 때까지 몇 년만 버텨 줘.”

“감사합니다.”

오르마즈는 내심 다행이다 싶었지만 승진 때문은 아니었다. 그에게 악몽을 안겨 준 짜증나는 판지셰르의 사령부는 이제 내키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알려주는 건데.”

에르네스토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네 감방에 넣었던 하메스타 중위가 지금 헌병사령관실에 있어. X한테 장교 달아준 거 보니까 어머니가 키워주려 하시는 것 같아. 지난번 샤워장 사건도 어머니 인맥 동원해서 죄 없는 자네만 얽어 넣고 빠져나갔을 거야. 내 듣기로는 자네 온다니까 어디로 배치 받을지 사방에 꼬치꼬치 캐묻고 다녔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오르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경례를 올리고 돌아서려는 오르마즈의 손을 파란기스가 다시 잡았다. 그는 환히 웃으며 오르마즈를 다시 한 번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파란 다하카르의 문장이 박혀 있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오르마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서 듣기는 어딘지 이상하고 어색한 말이었지만 파란기스의 표정은 순수하고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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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릭스에게 망신을 당한 황후 아메스는 내내 불안에 떨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이 불륜을 눈치 챘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차마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곧 황제가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도 그를 좌불안석으로 만들고 있었다. 다행히 오늘 밤늦게 아케메니아로 환궁하기로 되어 있던 황제가 일정을 늦춰 일단 한숨은 돌렸지만 그래 봤자 곧 황제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폐하.”

“응?”

엘리베이터에 멍하니 있던 아메스는 150층 시종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미 문은 열려 있었고, 150층 시종들과 시녀들이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그래.”

아메스는 시종들 사이를 지나 황제 처소인 150층에 들어섰다. 원래 150층 황제 처소는 황후라 해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지만 황제가 자리를 비운 지금은 내명부 수장인 그의 책임 하에 있었다. 그래 봤자 그가 하는 일은 매일 퇴근시간 무렵 이곳에 올라와 내관 사무실에 들러 그날의 서류들에 결재를 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오늘도 다를 건 없었다. 심복인 시녀장과 함께 150층에 올라온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멀지 않은 내관부 사무실에 들러 시종장이 미리 준비해 둔 서류들에 대충 서명을 하느라 10분 남짓 머물고는 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저어, 폐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시종장이 막 사무실을 나서는 황후에게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황실 종친회장이신 광림대군과 아침부터 내내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아메스가 짜증스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에르네스토의 손자이고, 유평대제의 사촌동생인 광림대군은 황제령에서도 가장 부유한 휴양지 수에니 경제특구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대부호였고 종친회의 실세였다.

“내가 왜 400살 다 되어가는 돈 많은 양반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하지?”

“종친들의 안위를 챙기는 건 황후의 책무……입니다.”

시종장이 아메스의 눈치를 보았다. 바쁜 황제가 직접 챙기기 어려운 황족들 문제는 종부인 황후 몫이지만 ‘황제의 그림자’ 역할에 넌덜머리를 내는 아메스에겐 끔찍이도 싫은 일이었다. 오랫동안 종친회를 이끌었던 레곤 대공주가 본업인 탐험에 열중하겠다며 자리에서 물러나고 페로와 친분이 있는 숙부 광림에게 자리를 넘겨준 것도 종친 일에 무관심한 종부에 대한 섭섭함의 표현이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경호대에 연락해서 수사관 보내.”

아메스가 짜증스레 손을 저으며 갈 길을 재촉했다.

“안 봐도 빤하지, 어디 길거리에서 만난 창녀 품에서 좋아라 하고 있을걸.”

아메스의 대꾸에 얼굴이 빨개진 시종장이 헛기침을 했다. 광림이 워낙에 호색한으로 유명한 사내이고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보니 누구라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사실 당연했지만 가문의 큰 어른을 놓고 종부가 남들 앞에서 할 말은 분명 아니었다.

별 생각 없이 다시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아메스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생각해 보니 한 달 가까이 이곳을 매일 드나들면서 정작 황제가 일상을 보내는 안쪽 내실들에는 들어가 본 일도 없었다. 내일 아침이면 수베르로 떠나야 하니 오늘은 그가 이곳에 와 볼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날이었다.

‘내가 무심하긴 했나 봐.’

아메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30년을 넘게 함께 한 배우자가 대부분의 일상을 보내는 곳을 명색이 조강지처인 자신이 왜 전혀 궁금해 하지도 않았는지 한심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황제가, 그의 살내음이 그리워졌다.

“온 김에 한 번 둘러봐야겠다.”

지금껏 150층엔 관심조차 없던 황후가 불쑥 황제 처소로 걸음을 옮기자 당황한 시종장과 시종들이 급히 뒤를 따랐다.

아메스가 마지막으로 황제의 침실에 들어왔던 건 침실에서 잠시 쉬던 황제가 발작을 했던 한 달 전 일이었다. 그때도 황제가 발작을 했다는 말에 엉겁결에 불려왔다가 세네피스와 다투고 잔뜩 성질이 나서 나갔다보니 제대로 둘러볼 정신도 없었다. 어차피 황제는 밤 시간에는 대개 비빈 중 하나의 처소에 머물렀고 150층은 황제가 틈틈이 혼자 쉬거나 사적인 업무 혹은 몸단장을 위해 들르는 곳에 불과했다.

“왜 이리 썰렁해.”

복도에 우뚝 멈춰 선 아메스는 새삼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황제의 개인 처소가 있는 곳이지만 150층 내부는 내명부 전체에서 가장 초라했다. 몇 번이나 페인트 덧칠을 한 밋밋한 벽에는 비빈 처소마다 경쟁적으로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나 조각품, 그림 같은 장식도 하나 없고, 바닥에도 군데군데 닳을 만큼 낡은 카펫만 깔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150층 시녀나 시종들도 내명부에서 못생긴 사람들만 모아놓은 듯했다.

이전만 해도 150층, 그 중에서도 침실 전담 시녀나 시종은 꿈의 부서였다. 150층은 ‘결혼 전력이나 자녀가 없고 선발시험과 1년의 수련기간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17세에서 30세 까지의 남녀’만을 배치하도록 되어 있었다. 여기에 실무에서는 뒷조사를 통해 애인이 있는 사람까지도 모조리 탈락시켰다. 그렇다보니 150층은 항상 젊고 싱싱한 미모의 인재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어차피 상류층 출신들이 내관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보니 경쟁을 뚫고 150층에 든 젊은이들에게 다음 목표는 뻔했다. 변변한 배경이 없는 평민이나 몰락한 귀족 출신 젊은이들 처지에 승은을 받아 내명부에 들고 황자를 낳는 건 단번에 인생역전과 자손의 미래까지 도모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황제 입장에서도 검증된 젊은이에게 승은을 내리는 것이 그저 욕정을 푸는 수단만은 아니었다. 승은을 받은 젊은 시녀나 시종들은 곳곳의 요직에 배치되었고, 조금이라도 사랑과 관심을 더 받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그래서 황제들은 수십, 많게는 수백 명을 품에 들이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곤 했다.

그렇지만 카렐에게는 그런 것들이 해당되지 않았다. 30년이 넘는 동안 단 한 명에게도 승은을 내리지 않은 황제를 보다못한 측근들이 가끔이라도 승은을 내려줘야 사기가 오르고 인재도 모이지 않겠냐며 은근히 몰아붙였지만 그는 자신만 보면 무서워 벌벌 떠는 놈들을 어떻게 침대에 들이겠냐며 웃음으로 때우곤 했다.

물론 식인 가디언이라는 옛 악명과 특이한 몸 탓에 황제를 처음 마주한 초짜 시녀나 시종들이 공포에 질려 입도 못 여는 건 사실이지만 이후 익숙해지고 조금이라도 감정을 품은 기색이라도 보일라치면 아메스와 페로가 바로 150층에서 쫓아내버리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눈에 띄는 미모를 지닌 남녀들도 당연히 퇴출 대상이었다.

황제 주변 사람들에 대한 황후의 병적인 구박에 화가 난 황태후 세네피스는 철딱서니 없는 황후가 복에 겨워 행복한 줄도 모른다며 핏대를 세우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메스는 ‘그럼 네가 데리고 살아’라며 뺨이라도 한 대 후려치고픈 맘이었다.

아니, 세네피스야 자기 자식이니 그렇다 치고 그때마다 능글맞게 맞장구를 치는 실리페 태후는 더 미웠다.

‘유령의 집 같네.’

아메스가 중간 중간 몇 번이나 멈춰 서서 썰렁한 150층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복도를 나아가던 아메스는 ‘폐쇄’라고 붙어 있는 1번 침실 문 앞에서 멈칫했다.

“여긴 왜 이러냐? 공사 중이냐?”

뒤를 따르던 시종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1번부터 5번 침실은 6년 전 폐쇄했습니다. 아직 모르셨습니까?”

“폐쇄? 언제?”

자신이 황제에게 너무도 무심했다는 것을 재차 깨달은 아메스의 얼굴이 빨개졌다.

“예산 문제로 6년 전부터는 6번 침실 하나만 쓰고 계십니다.”

“황상의 안전은 어쩌고?”

“저희도 그리 간했지만……아시다시피 침실 규모도 크고 내부에 이런저런 시설이 많아 유지비와 관리 인원이 많이 들었습니다. 황상께선 암살 정도는 몸소 대처할 수 있으시니 예산도 아낄 겸 폐쇄하라 명하셨습니다. 조만간 다른 용도로 개조할 예정입니다.”

황제에게 너무 무관심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아메스는 급히 1번 침실 앞을 지나가 버렸다. 150층에 6개나 되는 비슷한 침실이 있는 건 당초 황제가 어디서 자는지 알 수 없게 해서 혹시 모를 암살을 피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황제들은 이 6개의 침실을 무작위로 돌아가며 사용해 온 것이 관례였다.

“그래, 돈이 원수지.”

아메스가 남 일처럼 중얼거렸지만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출혈열로 제국민 수천만이 죽고, 정치개혁으로 어마어마한 예산을 쏟아 부으면서 황실이 돈에 쪼들리게 된 건 맞지만 분명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원인은 황제의 예산절감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자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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