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78화 (973/1,132)

< -- 978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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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지난 30년간 야심찬 개혁을 통해 선황 시절 잃은 권력을 조금씩 되찾았지만 기득권층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주거용 토지 국유화와 공공주택사업, 10년의 의무교육, 미등록자 인구조사에는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어갔고, 노예 세습을 금지하는 개혁을 입법했을 때는 남부의 저항으로 내전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

결국 범죄자에 대한 노예강등을 확대하면서 타협을 이루었지만 어쨌든 결과는 황제의 승리였다.

개혁의 효과는 분명 드러나고 있었다. 호구조사에서 밝혀진 누락인구만 1억 가까이였고, 부모의 굴레를 벗고 ‘신 평민’으로 자라는 수십만의 노예 2세 젊은이들은 보안국이나 친위군 배지가 일생의 꿈이라고 할 만큼 광적인 황제의 지지층이 되었다.

이런 개혁은 당연히 대규모 부동산과 노예를 소유한 부호들의 반발을 자아냈다. 거기에 영지민을 통계에서 누락시켜 세금을 빼먹고 문맹자들을 착취해 온 제후들의 반대도 이겨내야 했다.

그런 황제에게 7, 8년 전 출혈열은 가장 큰 위기였다. 3년에 걸친 전염병과의 전쟁으로 황실 예산이 바닥을 드러내자 반대세력들은 당장 효과도 없는 사업에 돈을 낭비할 수 없다며 황제를 궁지에 몰아붙였다. 하지만 황제는 빈곤과 무지가 병을 더 키웠다며 그 와중에도 사업을 밀어붙였고, 재력가들에게는 ‘위기에서 지도층으로서의 의무’라며 거액의 임시 부유세까지 뜯어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불만이 황제의 키를 넘어설 만큼 쌓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황제는 정치적인 어려움 수준을 넘어 생명의 위협에도 직면해야 했다. 타르서스의 한 공식 행사에선 무심코 잡은 연단의 철제 난간에 고압전류가 흘러 팔과 어깨의 심한 화상으로 후송되었고, 남부의 공식 방문에서는 인화물질을 가득 실은 셔틀이 호텔에 충돌해 건물 전체가 불타는 와중에 황후를 업고 벽을 몸으로 부수며 빠져나온 일도 있었다.

그 모두 배후는 황제의 토지개혁으로 손해를 본 유지와 귀족들의 막강한 카르텔이었다. 그들은 황제에 관한 근거 없는 악소문을 퍼뜨렸고, 별 것 아닌 실수나 작은 부패사건도 모조리 싸잡아 황제의 책임이라며 몰아붙였다. 황제는 ‘제위가 종신직이 아니었다면 난 아마 물러나자마자 어디 뒷골목에서 시체로 발견됐을 거야’라며 종종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초라한 황제전을 둘러보는 황후의 굳은 표정에 시종장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외부인이 드는 것도 아니고 승은을 내리거나 잔치를 하실 일도 없으니 최대한 검소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아메스에겐 황후로서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검소 수준을 넘은 황폐한 풍경에 무거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구멍을 때워놓은 카펫을 보며 굳은 얼굴로 물었다.

“마지막 인테리어 작업은 언제 했느냐?”

“출혈열 이후로는 한 번도 안 한 것 같습니다. 8, 9년쯤 되었겠지요.”

말을 잃은 아메스는 구멍 난 바닥을 건너뛰어 계속 걸었다.

출혈열로 예산이 궁핍해지자 황제는 행궁들을 정리했고, 리쿠 가 사람이라는 이유로 하는 것 없이 놀고먹다시피 하는 먼 황족들에 대한 연금도 끊어버렸다. 심지어 솔선수범하는 의미에서 내명부 예산도 절반으로 깎겠다고 선언해 제국민들의 지지를 자아냈지만 그런 황제를 보는 기득권층의 시선은 더 험악해졌다.

다행히 유교적 전통이 강한 서부를 대표하는 황비 네페티와 정치적인 부담이 없는 두 황빈들은 황제의 뜻에 쉽게 따랐지만 황제령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자이센 가 종손 아메스에겐 간단한 선택이 아니었다. 배우자와 지지세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그는 결국 ‘얄팍한 쇼에 동참하지는 않겠다.’며 황제의 방침에 반발했고, 아버지를 졸라 줄어든 예산만큼 친정에서 가져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뒤늦게 그 사실을 안 황제가 ‘짐의 내명부에서 왜 사가의 돈을 쓰는가?’라고 노발대발하면서 아메스의 자존심에도 큰 상처가 났고, 우울증도 극도로 치달았다.

그렇게 황후전에 처박혀 가족과 대화까지 끊어버린 황후의 모습에 괴로워하던 황제는 한 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황후전 예산을 유지하는 대신 황제전 미술품을 모두 팔아버렸고, 황궁 상층의 밀실과 개인 위락시설도 체력단련장 하나를 빼고 모두 폐쇄했다. 시녀와 시종도 절반으로 줄였고, 심지어 24시간 곁을 지키는 전담 경호팀도 해체해 황궁 경호대로 돌려보내어 가까스로 예산을 맞출 수 있었다.

아메스는 장식품 하나 없는 썰렁한 복도를 지나 제일 안쪽의 6번 침실에 들어섰다.

“후우.”

그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150층 모서리에 위치한 6번 침실은 황도 아케메니아 시가 모두 내려다보이는, 전망 하나는 최고의 방이지만 보기 좋은 건 그것이 전부였다.

흔한 조각상 하나 없이 휑뎅그레한 침실에는 오래된 침대와 책장, 책상, 몇 개의 구급약품만 있는 약장이 전부였다. 한때 화려한 분수대와 실내정원, 근사한 미남 미녀들과 건장한 경호가디언들이 채우고 있었을 빈 공간이 더 썰렁해 보였다. 인공연못 겸 욕장으로 침실을 장식했던 중앙의 풀(Pool)은 이젠 흙으로 채워져 화분처럼 쓰이고 있었다. 그곳을 보며 얼굴을 찡그리는 황후에게 시종장이 군색하게 변명을 했다.

“황상께서 수침하실 때 물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하셔서…….”

아메스는 말없이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소리는 핑계일 뿐 유지비를 줄이느라 그랬다는 건 뻔할 뻔자였다.

아메스는 황제의 침대에 다가가 보았다. 세나우스 2세 시절부터 쓴 오래된 침대엔 평범한 무명 차렵이불에 무늬 없는 시트와 베개 하나가 전부였다. 보통 사람 서너 명은 누워 잘 엄청난 크기만 빼면 평범한 가정집에서 집어왔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초라한 잠자리였다.

“사람들 좀 내보내.”

아메스의 눈짓을 받은 시종장이 얼른 수행원들을 내보냈다. 경호 가디언과 시종장, 자신의 시녀장만 남자 아메스는 숄을 벗고는 침대에 올라 이불을 덮고 누워 보았다. 제국 지도가 그려진 색 바랜 천장 그림이 보였다.

“황상 냄새가 나네.”

아메스의 입가에 모처럼 웃음이 번졌다. 한 달이나 지났지만 베개에, 이불에, 시트에 여전히 그의 체취가 배어있었다. 그동안 황제에게 품었던 갖은 불만과 원망들이 잠시나마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메스는 황제와 처음 함께했던 날을 문득 떠올리며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휙 뒤집어썼다. 황제의 체취가 짙게 밴 이불 속은 왠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땐 참 좋았었지.’

그가 처음 황제의 품에 안겼던 건 동부 샤레이에서 남부 플라칼 가와 루사의 결전을 치르던 전장의 병영에서였다. 그때만 해도 젊고 열정에 불탔던 그는 최음제까지 뿌리고서는 맘먹고 카렐의 천막을 찾아갔었다.

‘언제 여기 와서 하룻밤 같이 자 볼까.’

황제와의 첫 밤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만족스러웠었다. 그는 반인반수의 식인 가디언이라는 세간의 믿음이 무색할 만큼 그를 소중하게 어루만져 주었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바로 옆에서 자신을 보며 반짝이고 있던 그의 무지개빛 눈빛은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며칠이건 그대로 누워있고만 싶었다.

지금도 황제의 품은 여전히 그를 행복하게 했다. 황제가 궁을 비운 이후, 몸이 너무 달아올라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워지는 날엔 그가 죽고 나면 세상 무슨 낙으로 살까 하는 막막함에 혼자 눈물지은 일도 여러 번이었다.

지난 생일에 황제는 그를 예고도 없이 납치(?)해서는 직접 모는 셔틀에 태워 열대의 무인도, 그것도 사방의 수평선이 다 보일 만큼 아주 작은 섬으로 데려가는 깜짝쇼를 벌이기도 했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했다. 몸뚱이만한 새치를 잡아오겠다며 큰소리를 치고는 낚싯줄 하나 들고 물에 뛰어든 카렐이 새치는 고사하고 손바닥만한 쥐치 한 마리 못 잡아 쩔쩔 매는 모습을 보며 깔깔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한 시간의 사투 끝에 잡은 참치를 한 손에 번쩍 쳐들고 젖은 몸으로 의기양양하게 물에서 나오던 그는 세상에서 제일 멋져 보였다. ‘새 행궁’을 지어주겠다며 도끼로 나무를 찍고 큼직한 잎과 덩굴을 따 즉석에서 움막을 짓던 그의 땀에 젖은 모습도 가슴 설레게 할 만큼 섹시했었다.

그날 저녁, 석양을 보며 직접 잡은 참치와 조개를 구워먹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환상적이었다. 보는 사람 없는 무인도의 고운 모래 위에서 별빛을 받으며 단둘이 사랑을 나누던 황홀했던 순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쩌다 우리가 이리 되었을까.’

아메스는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더 누워있자니 황제의 빈자리가 너무너무 아쉬웠다.

“내 오늘밤은 여기 와서 자야겠다.”

황제와 소원했던 황후의 난데없는 말에 시종장이 깜짝 놀랐다. 아메스는 한쪽에서 뭣 씹은 듯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심복 시녀장의 눈길을 의식하며 몸을 일으켰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가?”

“돌아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침실을 나선 아메스는 다시 수하들을 거느리고 온 길을 되돌아나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황상만한 분이 또 계실까 싶긴 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선 아메스는 중지의 오팔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황제는 배우자들에게나, 자식들에게나 항상 다정했고, 다른 황제들처럼 주색잡기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홀로 몸서리쳐지는 어린 시절을 겪어낸 황제는 자신의 식솔에게만은 그런 경험을 절대 물려주지 않겠다며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황제로서의 쾌락과 안락함까지도 희생만 하고 있었다.

바로 아래층 황후 처소까지는 잠깐이었다. 단 한 층 내려왔는데도 화려한 장식과 활기 넘치는 분위기, 수많은 시녀들로 북적거리는 것이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황후전에 들어서며 무심코 거울을 본 그는 흡사 어머니 마리안이 그 안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실 아메스에게 어머니의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에게 어머니는 ‘천한 가디언과 몸을 섞고 남편과 딸을 배신한 더러운 여자’일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어머니를 증오했고, 어머니에게 독배를 내린 아버지의 결정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엄마처럼은 안 살아.’

아메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처소로 향했다. 조금 전 떠나 온 황제 침실에서 느낀 그의 체취가 금세 그리워졌다. 교활한 신료들과 싸우며 한 달재 홀로 내명부와 황궁을 지키고 있으려니 황야 한복판에 벌거벗겨 내버려진 듯한 두려움에 무섭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실 날도 얼마 안 남았을지 모르는데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드렸어야 하는데.”

아메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30년을 함께 해 온 배우자에게 자존심 타령이나 하고 못된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정말 한심했다. 가끔씩 기분이 정상으로 돌아갈 때마다 자신이 그를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 떠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왜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점점 이렇게 신경질적이고 못되어지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참 과거에 빠져 있던 아메스를 시녀장이 순식간에 현실세계로 돌려놓았다. 처소 문 앞에 선 아메스는 심복의 심각한 표정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꼭 지금 해야 하냐?”

아메스가 처소에 들어서자 주인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희고 복실복실한 강아지가 짧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만져달라며 아메스의 치마에 앞발을 대고 낑낑거렸다.

“오후 일정이 늘어져서 약 드실 시간을 몇 시간이나 넘기셨네요. 기분이 축 처지신 게 그 때문인지 모르겠네요.”

시녀장이 내의원에서 처방해 온 알약 두 알을 물과 함께 내놓았다.

“지금 드시고 9시쯤 한 번 더 드셔야 합니다.”

아메스는 손바닥에 있는 노란 알약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10년이 넘게 갖은 우울증 약이라는 약은 다 먹어봤지만 도무지 효과는 없었다.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왜 먹는지 모르겠어.”

아메스가 씁쓸한 얼굴로 약을 입에 가져갔다. 그때 약을 입에 넣으려던 아메스의 손에서 한 알이 똑 떨어져 치맛단을 타고 바닥에 굴렀다.

“앗.”

아메스가 화들짝 놀랐다. 치맛단에 매달려 아양을 부리던 강아지는 사료인 줄 알았는지 바닥에 떨어진 알약에 후다닥 달려들었다.

“안 돼.”

아메스가 말리려 했지만 강아지는 작은 알약을 훌떡 삼켜버렸다. 놀란 아메스가 얼른 강아지를 들어 확인했지만 다행히 멀쩡하게 계속 꼬리를 치고 있었다. 시녀장이 약장을 뒤지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마지막 약이었는데, 당장 내의원에 연락해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됐어, 어차피 9시에 또 먹어야 하니 지금은 하나만 먹지 뭐. 효과는 기대도 안 해.”

아메스는 한 알 남은 약을 마지못해 삼켰다.

의사들 말대로라면 그의 우울증은 나아도 몇 번은 나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약을 먹을 수밖에 없는 건 금단현상 때문이었다. 몇 번인가는 약을 안 먹겠다며 버텼다가 하루도 채 못 가 몸살이 나고 땀을 비 오듯 흘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좋아하던 술까지도 단번에 끊었을 만큼 나름 독한 아메스였지만 이 약의 금단현상만은 버틸 수가 없었다.

시녀장이 약을 삼키고 있는 황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외람된 질문이오나……임신 문제는 어찌하셨는지요?”

“내가 알아서 하겠다지 않았나?”

“필요하시다면 X의 정자를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제가 황상과 꼭 닮은 외모의 X에게서 정자를 얻어놨으니 언제라도 말씀주시면…….”

아메스는 대답을 생략한 채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황제의 아이 대신 킵의 아이를 가지려던 계획도 결정적인 순간 맘이 흔들려 어그러졌으니 이젠 나머지 벌여놓은 상황들을 어떤 식으로든 수습해야 했다.

“됐다. 필요 없을 것 같다.”

아메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페티와 베아트릭스가 눈치를 채버렸으니 지금 임신을 했다가는 들통이 날 게 뻔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아메스는 발밑을 계속 뛰어다니던 강아지를 안아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메스의 입술이 막 떨어지려는 순간, 시녀장이 목소리를 낮추며 끼어들었다.

“실은 보안국의 제 정보원을 만났습니다.”

아메스가 시녀장을 흘끔 쳐다보았다.

“황후 폐하께서 보름쯤 전 3번 도시 ‘키스라 호텔’에 가지 않으셨는지 물었습니다.”

강아지를 쓰다듬던 아메스의 손길이 딱 멎었다. 키스라 호텔은 며칠 전, 그가 킵과 처음 잠자리를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보안국에서?”

아메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친위조직인 보안국에서 황후의 행적을 물었다면 황제도 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슨 소리냐, 난 그날 자네와 악극공연을 보고 있었잖아,”

황후의 변명에 시녀장이 내심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

“저도 그리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물어서 당황했습니다.”

아메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지만 시녀장은 못 본 척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 친구가 왜 그런 소리를 할까 모르겠습니다.”

시녀장이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물은 정보원 따위는 없었다.

“폐하께서 객실에 올라가시는 걸 누가 봤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확인하는 중이라는군요.”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강아지를 안은 아메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외도를 했던 그날도 아메스는 외출을 핑계로 사복 차림으로 시내에 나가 무려 4시간짜리 지긋지긋하게 긴 악극 표를 샀었다. 하지만 공연 도중 자리가 맘에 안 드니 다른 자리에서 혼자 보겠다며 시녀장을 놓아둔 채 나가버렸다. 황후는 시녀장을 떼어놨다 믿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교단 심복이 공연장 바로 옆 ‘키스라 호텔’로 향하던 황후의 뒤를 밟고 있었다.

아메스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뭐라 대답하였느냐.”

“그냥 모른다고만 했습니다. 어차피 공연을 보고 계셨던 것을 제가 잘 아는데 더 뭐라 하겠습니까.”

“잘했다.”

아메스가 아무렇지 않은 척 강아지를 도로 내려놓았지만 시녀장은 그의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는 것을 빤히 보고 있었다.

‘넌 어차피 돌아가긴 틀렸어.’

시녀장이 떨고 있는 황후를 보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잠시나마 황제에게 맘이 되돌아갈 뻔했던 황후를 어떡해서든 적개심에 불타게 해야 했다. 이디나의 ‘다음 계획’을 위해선 반드시 황후를 공략해야 했다. 황후의 우울증과 외도는 교단이 노리고 있는 황실 제일의 약점이었다.

“혹시라도 오해가 있으신지 모르니 황상께 먼저 해명하시는 편이…… 제가 증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닥쳐. 뭐 하러 긁어 부스럼을 만드냐?”

신경이 곤두선 아메스가 언성을 높였다. 불륜에 대한 죄책감과 황제가 자신을 감시했다는 데 대한 분노가 일순간 그의 머릿속에 뒤엉켜 있었다. 화가 치밀어 미칠 것 같았다.

‘날 감시했다고? 날 의심했다는 거야?’

조금 전까지도 황제에 대한 그리움에 떨던 황후였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황제가 조강지처인 자신을 의심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며 발밑을 귀찮게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밟아버리고 싶을 만큼 분노가 솟구쳤다.

시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덧붙였다.

“거슬리시더라도 황상께 빨리 해명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해명이라니? 잘못한 게 없는데 뭘 해명해?”

아메스가 분노를 참으며 물었다. 시녀장이 갈등하는 척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낮에 오찬에 가셨을 때 이부대신께서 다녀가셨습니다.”

시녀장은 목소리를 더 낮추고는 아메스의 귓가에 바싹 다가갔다.

“외부에 계신 황상께서 이부와 법무부에 비밀리에 유권해석을 물으셨는데……첩실 자녀를 먼저 죽은 정실의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는 데 법적인 문제는 있는지 궁금해 하셨답니다.”

순간 아메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화, 황상께서?”

연이어 최악의 소식만 접한 아메스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닉 가에 첩으로 시집보낼 밀리타를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아메스에겐 마치 황제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것 말고 다른 무슨 얘기는 안 했고?”

“제게는 안 털어놓더군요. 폐하께 꼭 할 말이 있는 눈치였습니다. 한 번 불러 얘기해 보심이…….”

시녀장이 슬쩍 운을 띄웠지만 아메스는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타르서스의 재벌 출신인 이부대신 볼토 트라우제는 제위전쟁 시절 페로 진영에 가담해 황실 최초의 평민 계급 대신으로 화려하게 입각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심복인 만큼,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다면 자신에게 알려주려 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메스가 황후로서 만나기는 껄끄러웠다. 당초 황제가 평민 볼토를 등용했을 때는 귀족의 철옹성이던 황실 내각의 유리벽을 부수려던 것이었지만 그는 제위전쟁 이 후 논공행상에서 귀족 계급을 요구해 황제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황제에게 필요했던 건 평민 출신 귀족 대신이 아니고 그냥 평민 대신이었다.

결국 그는 황제의 설득에 평민으로 남았지만 계급에 이어 토지개혁에서까지 황제와 마찰을 빚으며 소원해졌다는 건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자리를 버틴 건 페로 때문이었다. 개혁에 불만이 많지만 카렐과 차마 대놓고 맞설 수 없었던 페로가 ‘대리전 용사’로 뒤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몇 번은 잘리고도 남았을 터였다.

아메스는 나름 위험성을 따져보았다. 아버지의 심복이고, 황제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니 별 걱정 없이 의도를 따져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트라우제 대신 보고 저녁 9시쯤 오라고 해.”

시녀장은 고개를 숙이고 황후전 처소를 나섰다. 혼자 남은 황후의 초조한 표정이 그를 흐뭇하게 했다.

“약발 한 번 확실하군.”

시녀장이 나간 후, 혼자 분을 삭이고 있던 아메스는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강아지에게 다가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메스의 주변을 맴돌며 만져달라 보채던 작고 흰 털북숭이는 고운 비단쿠션 위에 시무룩한 모습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니.”

아메스는 황제가 선물해 준 이 순한 강아지를 꼭 안고 눈물을 곱씹었다. 세상 모두가 무섭고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만 같았다. 그는 강아지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으익!”

털을 쓰다듬던 아메스가 강아지의 주둥이에서 손을 확 빼냈다.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난 그의 손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려 쿠션을 적셨다. 황제가 선물해 준, 그 착하고 순하던 강아지가 갑자기 주인에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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