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79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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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마즈가 에르네스토와 파란기스 부부를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병석에서 복귀한 지도자 파냐드는 다시 민병대를 장악했고, 외진 바위산 소초에 부임한 오르마즈는 매일매일 병사들만 들볶으며 평범한 소대장으로 또 1년을 넘게 보냈다.
그의 장교생활 첫 1년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병사들은 ‘이젠 사람이 없다없다 죄수까지 장교로 쓰네.’라며 뒤에서 비아냥거리기 일쑤였고, 장교들은 학교 문턱도 넘지 못한 한심한 전과자를 동료로 취급해 주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부임하고 딱 열흘 만에 소대원 셋이 밤에 몰래 마약을 피우다 토벌군 수색대에 통째로 목이 잘리는 사건까지 생기면서 난생 처음 시말서라는 것을 써 볼 기회도 얻었다. 한 달째에는 마약을 피던 병사를 두들겨 패다가 밀고로 끌려가 시말서 쓰는 법을 복습했고, 3달째, 10달째, 1년째는 술에 만취한 것, 늦잠으로 점호 펑크 낸 것, 사소한 서류 실수까지 누군가 계속 헌병대에 밀고하면서 시말서 쓰는 데는 전문가가 되었다.
그렇긴 해도 한 달에 서너 명씩 죽어나가기 일쑤인 최전방 소초에서 퇴각 한 번 없이 1년을 병사 셋만 잃고 버틴 건 꽤 훌륭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소초 주변, 특히 그가 주로 이용하는 순찰로에서는 부비트랩이 5번이나 발견되었고, 절벽을 오르는 줄사다리가 끊기는 봉변도 두 번이나 당했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오르는 순찰로를 몇 번이나 바꿨지만 적은 마치 그가 다닐 길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귀신같이 부비트랩을 설치해 그의 목숨을 위협했다. 어린 시절 산악가이드로 익힌 감각이 아니었다면 몇 번은 죽고 남았을 상황이 이어졌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는 답답한 처지였다.
그렇게 칼끝에 선 듯한 소초장 자리에서 1년을 버틴 후, 그는 벌점 누적으로 중위 진급도 탈락했고, 중앙으로의 순환근무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렇지만 ‘죄수부대 출신 낙하산 장교’라는 딱지는 그에게 따돌림과 아울러 새로운 기회라는 두 얼굴을 선사했다. 1년 동안 죄수 출신 상관을 맘에 안 들어 하는 병사들, 심지어 소대에 둘 있던 X출신 사관까지 갖은 핑계를 들어 그의 소대를 떠났지만 빈자리를 메울 사람은 충분했다. 오름의 사수전에서 사면을 받아 자대로 돌아간 죄수부대 출신들 상당수가 동료와 상관들의 차가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차라리 보스에게 돌아가겠다’며 그의 소대에 앞 다투어 지원을 해 왔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중위 진급해서 탈락했다는 통지를 받을 무렵 그의 소대는 어느새 면면으로는 이전의 죄수부대와 별반 다름없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남들 보기에 오르마즈의 소초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면서’ 멀쩡하던 소초가 우두머리부터 말단까지 전과자 집합소로 전락한 꼴이었다. 그렇지만 실상 오르마즈는 병사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는 다른 소초장들과는 달리 알아서 오겠다는 지원자들 가운데 쓸 만한 자들을 가려 받는 사치까지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오겠다는 병사들은 넘쳐났지만 정작 부족한 건 따로 있었다.
“우리 소초에 부임한 새 사관 두 분이 곧 도착한답니다.”
소초의 사관 역할을 맡고 있는 이트닌 하산 하사가 소초장의 달콤한 낮잠 시간을 깨워놓았다. 너저분한 소초장실에서 근무일지 파일을 베고 널브러져 자고 있던 26살의 젊은 유급생 소위는 눈곱을 떼며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이런 일선 산악 소초는 군인이라면 다 꺼리는 곳이지만 죄수 시절에 비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화산재 벽돌로 지은 건물에 나무 침상까지 있으니 벽도 없는 천막 밑에서 담요 한 장 깔고 자던 때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게다가 명색이 장교인 오르는 따뜻한 아궁이 바로 옆에 손바닥만한 방까지 하나 가졌으니 호강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방금 뭐라고 했지?”
잠이 덜 깬 오르는 주전자의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 크게 하품을 했다. 잠들기 전 왕창 몰아서 쓴 근무일지 몇 장이 떡진 뒷머리에 붙어 우수수 떨어졌지만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학벌 탓인지, 성격 탓인지, 이 소위의 서류 업무는 시말서 쓰기만 빼고는 낙제점에 가까워서 장교 출신인 이트닌이 매번 손을 봐 주어야 했다. 그래도 진짜 중요한 내용을 잊어버리거나 빼먹는 일이 없는 건 이트닌 보기에도 정말 신기했다.
“우리 소초 분대장 맡을 사관 둘이 오고 있다고요.”
“에이, 난 또 밥시간이라는 줄 알았네. 아휴 배고파,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나.”
오르가 홀쭉해진 배를 만지며 먹는 타령부터 했다. 죄수부대에서 못 먹고 말라 말 그대로 뼈다귀만 남았던 그는 1년새 이전의 늘씬하고 다부진 몸을 되찾아 건강한 모습이었다. 주변에서는 ‘죽지만 않으면 다 오르는’ 중위 진급에서 탈락한 소초장이 침울해하고 있을 것이라 수군댔지만 정작 본인은 세상만사 정말로 편안해 보였다.
“근데, 대체 어느 멍청한 사관이 이 죄수소굴에 오겠다고 했을꼬?”
“둘 다 지원이라던데요?”
“자네 좋은 날도 다 갔네, 이트닌.”
“웬걸요, 홀가분하죠. 이 완장부터 제 팔뚝엔 너무 커요.”
이트닌이 팔에 차고 있던 큼직한 선임 사관 완장을 끌러놓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등병 주제에 선임사관이 뭐냐고요.”
“분대가 셋인데 둘만 오면 어차피 한 자리 부족해.”
오르가 이트닌에게 완장을 다시 내밀었다. 서류상 계급은 소령에서 이등병으로 주저앉았지만 나이도 소초에서 제일 많은데다가 출신이 출신이라 오르가 ‘사관 대우’를 해 주어도 감히 불만을 품을 병사는 없었다. 소대의 허리인 사관이 이런저런 핑계로 모조리 떠나버리고 없다보니 ‘싸움질은 일류, 병사로는 삼류’인 전과자들을 다루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저 이등병이라니까요.”
“자네 정도면 이등별이지 뭘.”
“아휴, 소대장님이 그러시니 우리 소초가 맨날 콩가루 소리 듣죠.”
“왜, 소대에선 내가 왕이야. 내가 하라면 하는 거야.”
오르마즈는 주전자의 찬물 한 모금을 벌컥 들이키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었다.
그때, 소초 밖에서 딱딱 끊어지는 걸음으로 바닥을 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의 천방지축 전과자 병사들에게서는 듣기 힘든 절도 있는 발소리였다. 잠시 후 거구 둘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어마마, 이게 웬일이야.”
오르가 깔깔대며 일어나 그 검은 피부색의 전사를 와락 껴안았다. 토로 로버넬 상사는 이런 환대가 어색한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토로를 맘껏 환영해 준 오르는 그를 뒤따라온 붉은 머리의 덩치를 보며 손뼉을 짝짝 쳤다.
“3918? 아니지, 이젠 베흔 중사잖아? 세상에.”
오르가 청년 베흔의 솥뚜껑만한 손을 덥석 잡아주고는 그를 와락 껴안고 뺨에 입까지 맞춰주었다. 이 내성적인 X청년은 기대치 않은 환영에 얼굴까지 붉어지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베흔의 배치 명령서를 받아든 오르는 일그러질 뻔했던 얼굴을 얼른 추슬렀다. 이 젊은 X 사관의 경력이라고는 관사 관리, 급양대, 초소 신축처럼 X에게 맡길 이유가 없는 이상한 업무 몇 개를 떠돈 것이 전부였다. 26살의 X라면 한참 전장에서 밥값을 하는 전사여야 하지만 그는 일선에도 나가지 못한 채 여전히 따돌림을 당하는 모양이었다. 오르는 그제야 모두가 기피하는 자신의 소초를 왜 그가 지원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헛기침을 몇 번 한 베흔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희 같은 시커먼 사내들보다 더 기뻐하실 선물이 있습니다.”
“응?”
“지원병이 하나 있습니다.”
“병은 더 필요 없어. 지금도 침대 놓을 데가 없어 미어터질 지경이라고.”
오르마즈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젓자 토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번병 하나쯤 두시라고요.”
“소대장 주제에 무슨 당번병이야.”
토로의 손짓에 소초 밖에서 또 다른 ‘시커먼 사내’ 하나가 등에 큰 백을 둘러메고는 쭈뼛거리며 들어서며 얼른 모자를 벗었다. 짜증스런 얼굴로 그쪽을 보았던 오르의 눈이 조금씩 가늘어졌다. 6척(180cm) 가까이 훌쩍 큰 이 사내, 아니 덩치만 큰 소년의 앳된 얼굴이 눈에 익숙했다.
“와헷?”
오르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소년병의 뺨을 짚어 보았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우람하게 커졌지만 시골 소년의 얼굴만은 여전했다. 그는 오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이등병 와헷 신고합니다.”
“고향에 돌아갔다더니?”
“누나……아니, 소위님이 찾고 계신다고 지부에서 들었습니다. 16살 넘어가서 소년병으로 다시 지원했습니다.”
와헷이 이를 드러내고 수줍게 웃어보였다.
“어디 계신지 몰라 로버넬 상사님하고 베흔 중사님한테 편지 몇 번이나 썼습니다.”
“그렇다고 여길 왜…….”
오르가 와헷의 거친 얼굴과 짧게 친 머리, 넓어진 어깨를 더듬으며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다. 그가 원했던 건 이 소년이 고향에서 평범한 농부로 크는 것이지 민병대로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그가 자신 때문에 돌아왔다는 말이 반가우면서도 죄책감과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긴 네가 올 데가 아냐. 20살 전에는 언제든 신청하면 나갈 수 있다.”
“20살 전엔 전투병은 못 돼도 소초 당번 정도는 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전투 벌어지면 당번이고 전투병이고 없어.”
“내보내시면 전 헌병대에 죽습니다. 저 계속 지켜주세요.”
와헷이 입술을 꽉 깨물며 바로 배수진을 쳐 버렸다. 난감해진 오르는 하는 수 없이 그를 그냥 품에 꼭 안아주고는 한 발 물러났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여기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비로소 표정이 환해진 와헷이 큼직한 백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해맑게 웃었다.
“어쨌거나, 이제야 좀 부대 모양이 되어가는 것 같네.”
볕 좋은 밖으로 나간 오르는 능선 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놓은 보급품 박스에 털썩 앉았다. 따뜻하던 여름도 지나고 산자락에는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지정석을 차지한 오르는 어제 먹다 말고 밑에 숨겨놓았던 술병을 꺼내 입에 물었다.
“망치 놈이 전입오면서 바하칼리산 럼이라고 한 병 구해다 줬는데 정말 일품이야. 앞으로 이놈만 마셔야겠어.”
토로가 당황하며 뭐라 입을 열려 하자 오르가 손가락을 입을 가려보였다. 근무 중 음주는 당연히 징계감이었고 시말서도 여러 번 썼지만 그는 될 대로 되라는 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르는 벽에 등을 기대고 마지 장군이라도 된 양 어깨를 쭉 펴고 편하게 앉아서는 양옆을 옹위하고 선 토로와 이트닌, 베흔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경치 멋있지 않아?”
“에……에?”
오르의 손짓에 새로 온 두 사관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억지로 감추었다. 소초 주변은 근사한 경치는 고사하고 나무에 잡풀까지 다 걷어낸 회색빛 민둥산이었고, 언덕 밑으로도 화산재 황무지가, 지평선 가까이 먼 언덕에는 토벌군인 코메트 숙영지가 희미하게 보였다.
소초 조금 아래 비탈에선 선선한 날씨 속에서도 웃통을 벗어던진 병사들이 참호를 파느라 바쁜 모습들이었다.
“봐봐, 부대 모양 이렇게 만드는데 1년이나 걸렸다고.”
“예?…… 새로 지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눈치 없는 토로가 소초가 있는 능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본부가 있는 판지셰르 외곽 산맥을 지키는 수십 개의 흔한 소초들 중 하나였다. 이트닌이 그의 말을 대신 해석해 주었다.
“병사들이 소대장님 명령에 삽질을 하고 있는 거 말입니다. 한 달 전에 끝냈어야 하는 건데 게으름을 피워서 저 꼴이죠.”
표정이 먼저 굳은 건 베흔 쪽이었다. 지금까지 고참병들은 죄수출신 낙하산 소대장을 길들이겠다며 일부러 참호를 무너지게 파기도 했고, 그가 초소 순찰을 다니는 길에 진흙 웅덩이를 만들어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전에 오르마즈를 따랐던 죄수 출신들이 하나 둘 들어오면서 상황은 조금씩 역전되고 있었다.
오르가 머리 뒤로 손을 깍지끼며 중얼거렸다.
“1년이나 꾹 참았으니 나도 이젠 슬슬 움직여볼까 해.”
그날 저녁, 오르의 소대는 1년 전의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이어 또다시 4명의 병사를 잃었다. 공사가 덜 끝난 참호를 철야로 지키던 고참 병장과 3명의 병사들은 다음날 새벽 순찰을 돌던 이트닌과 망치에게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차를 끓이던 둘은 둔기에 머리가 부서져 있었고 참호 구석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던 병장과 상병은 능숙한 기술로 목이 베어진 채 죽어 있었다. 이런 짓을 저질러 놓은 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현장을 확인한 소대장 오르마즈는 적 수색대의 기습으로 추정된다며 보고서를 작성했고, 전사한 병사들의 소지품은 적이 정보가 담긴 서류로 알고 가져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남겼다. 일선 초소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일이다보니 아무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낮 동안 소초를 지킨 선임사관 토로 로버넬 상사는 대대에서 종일 조사를 받고 한밤중에야 돌아온 소대장을 잔뜩 걱정이 어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대대장님께서…….”
“응, 별 거 아냐. 소위 생활 6달 더 하면 돼.”
아무 일도 아닌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소초에 들어선 오르는 아궁이 불가에서 젖은 양말을 말리고 있던 망치를 엉덩이로 툭 밀어내고는 따뜻한 명당자리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아궁이에 쪼그려 앉아 고구마를 굽던 이트닌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또 진급 탈락이요?”
“탈락은 무슨, 소위 조금 더 하는 거라니까.”
오르가 군화를 벗고 젖은 맨발을 아궁이 옆에 올리며 태연히 대꾸했다.
“엎어치나, 메치나.”
이트닌의 대답에 소초 안에서 교대 순찰 준비를 하던 열댓 명의 토로 분대 병사들이 껄껄대고 웃기 시작했다. 전투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참호를 제때 마무리 짓지 못한 탓에 고참병을 넷이나 잃었으니 이번에도 또 시말서감이었다.
“도전도 안 했는데 무슨 탈락이냐?”
“잘하면 최장수 일선 소위 기록 세우시겠어요.”
망치가 다시 오르 옆으로 파고들며 킥킥거렸다.
“사령관 원수 할 것도 아닌데 2년 소위든 20년 소위든 뭔 상관이냐.”
오르는 이트닌이 잘 구워놓은 고구마를 냉큼 집어 입에 물었다. 명문가 자제답지 못하게 밑바닥 죄수 출신 병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그의 이런 모습이 맘에 안 드는지 토로가 입가를 씰룩거렸지만 오르는 못 본 척 먹던 고구마를 반으로 뚝 잘라 천연덕스럽게 그에게 내밀었다.
“와헷 그놈은?”
“글쎄요, 아까 보니 소대장님 방 청소하고 있던데요. 빨래하러 갔을 겁니다.”
오르가 문을 열어보니 그새 먼지구덩이 이불에 산더미 같던 빨랫감까지 싹 치워져 있었고 사방에 널브러져 있던 서류들도 탁자 위에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 오밤중에 혼자?”
오르의 표정에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투구를 꾹 눌러 쓴 토로는 준비를 마친 14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소초를 나섰다. 참호 쪽으로 내려가려던 그는 큼직한 망태기를 둘러메고 언덕 아래에서 혼자 올라오고 있는 와헷과 마주쳤다.
“밤중에 어딜 다녀오는 거냐? 소대장님이 얼마나 걱정하셨는데.”
“밑의 샘에 물이 고였다길래 가서 소대장님 옷하고 이불 빨래 좀 했어요. 소초 물탱크 채우고 물이 좀 남았더라고요.”
와헷이 찬물에서 빨갛게 곱은 손가락을 호호 불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등에 짊어진 망태기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빨래가 가득 들어있었다.
토로의 옆을 지나가려던 와헷이 갑자기 그의 신발을 가리켰다.
“신발 왜 그러세요?”
“응?”
토로는 그제야 군화 한쪽 밑창이 떨어져 덜렁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출발할 때는 멀쩡하던 것이 그새 이 꼴이 되어 있었다. 곤궁한 민병대에서 군화를 몇 번이나 재생해 쓰다보니 이 정도는 흔했다.
“이런 빌어먹을.”
토로는 선임병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하고는 새 신으로 갈아신으려 급히 소초로 돌아섰다. 와헷과 함께 초소로 되돌아온 토로는 그가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오르의 빨래를 너는 모습을 힐끔 보았다. 이 16살 소년병은 정말로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소대장님, 와헷이 빨래 끝내고 돌아왔…….”
토로는 병사들이 거의 자리를 비운 소초의 문을 열어젖혔다.
“움?”
아궁이에 둘러앉아 있던 오르와 이트닌, 망치가 그를 휙 돌아보았다. 소초 안에는 그 셋뿐이었고, 탄내가 풍기고 있었다. 이트닌과 망치는 지난 새벽 죽은 병장의 짐을 뒤지고 있던 참이었다.
“소대장님?”
당황한 토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르가 그를 보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하여간, 첫날엔 꼭 뭘 빼먹는다니까, 그렇지 않나?”
“아, 예, 그렇지요.”
토로가 눈치를 보며 급히 신발을 갈아 신었다. 아궁이를 흘끔 보니 손으로 쓰다 만 종이 몇 장이 타고 있었다. 그 한쪽엔 [요주의자 동향보고]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오르가 부지깽이로 종이를 아궁이 깊숙이 쑤셔 넣으며 혼잣말을 이었다.
“이놈들 삽질이라도 잘 했으면 용서해 주려고 했는데. 밀고 5번에 날 7번이나 죽이려 해 놓고 삽질도 그 모양이면 용서 못 하지. 하긴, 헌병대에선 삽질을 안 한다지.”
오르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투서 또 한 뭉치를 아궁이에 쑤셔 넣었다.
“그놈들이었습니까?”
눈치가 그리 빠르지는 못한 토로였지만 본부에서 들은 소문과 오르가 보인 이상한 행동들에서 이젠 그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소대장 오르의 발목을 계속 잡았던 밀고를 누가 올린 것이었는지, 매번 소초장의 순찰로를 노리고 설치되었던 치명적인 부비트랩은 누구의 짓이었는지도 분명해졌다.
“낮에 술 한 번 마셔 줬더니 미끼를 덥석 물더군.”
오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근무태만과 음주가 섞인 자신의 오늘 일과가 그대로 적힌 쪽지를 다시 아궁이에 쑤셔 넣었다. 쪽지엔 병장이 목이 베이며 흘린 혈흔이 선명했다.
“날 신고할 텐가?”
“아가씨를 위협한다면 제게도 적입니다.”
토로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르마즈에게 이런 짓을 저지를 사람은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죄수부대로 보냈던 헌병대 실력자 하메스타뿐이었다. 그리고 오르는 승진 탈락을 감수하며 죄수부대 시절 심복들을 동원해 그가 박아놓은 프락치 넷을 아예 제거해 버린 게 분명했다.
“고맙네.”
오르도 그에게 웃음을 보이며 마지막 뭉치를 아궁이 안에 휙 던져넣었다.
“엄마하고 동생들 만날 때까지라도 살아야 하거든.”
오르의 무지개빛 눈동자 속에서 아궁이의 노란 불빛이 타탁거리며 타올랐다.
“그때까진 절대 못 죽어주지.”
오르마즈는 비슷한 시기 임관한 소위들보다 1년이나 늦게 중위 계급을 달았다. 에르네스토는 그를 곁에 두고 싶어했지만 워낙에 벌점이 많아 그는 중앙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날리게 될 또 다른 사건을 기다리며 3년 동안이나 산골의 구석진 소초에서 열등생 소대장으로 시간만 때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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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용무가 있어 조금 일찍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