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83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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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 생활 3년차를 넘긴 중위 오르마즈 카파키의 삶은 여전했다. 아침에 일어나 점호와 구보를 하고, 초소들을 둘러보고, 밀린 서류를 처리하고, 비번인 병사들을 모아 훈련을 하는 식으로 보통의 소초장과 똑같은 시간을 보냈다. 다만 남는 시간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무얼 하는지 나타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이 날라리 소대장이 보나마나 퍼질러져 잘 것이라 생각했지만 누구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비번인 날은 ‘날 찾지 마.’라며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져 하루가 꽉 차게 지난 무렵에나 돌아왔다. 병참부의 솔로스 대위를 빼면 민병대 내에 별반 친구도 없는 그가 그 시간에 무얼 하는지 모두 궁금해 했지만 그는 어딜 다녀왔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나름 베일에 휩싸인 소대장에 관해 소대원이 다 알고 있는 딱 하나는 저녁 일과였다. 그는 저녁을 먹고 난 8시면 어김없이 2분대장 베흔이나 3분대장 이트닌을 데리고 나가 두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먼지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가끔은 몸에 상처가 나 있기도 했고 군데군데 시커먼 멍이 들어 있거나 삐어서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오르는 ‘훈장 하나 얻었네.’라고 넉살을 떨곤 했다.
하지만 그가 다녀올 때마다 창고엔 연습용 볼트가 왕창 줄어있었고, 이가 빠지거나 부러진 연습용 창칼이 몇 개 늘어나 있곤 했다. 어쨌든 덕분에 빨랫감이 늘어나고 밤새 약을 바르고 주물러야 하는 와헷만 고생이었다.
“오늘 훈장은 좀 많이 크신데요.”
소염제를 들고 온 와헷은 옷을 벗고 엎드려 있는 오르의 등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엇에 맞았는지 옆구리 뒤쪽에 시커먼 멍이 웬만한 어린애 얼굴만하게 나 있었다.
“베흔 중사 주먹이 좀 커야 말이지.”
피곤에 지친 오르가 베개에 얼굴을 절반 묻은 채 잠에 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맙소사, 그 왕주먹으로 때렸다고요? 소대장님을요?”
“인정사정 보지 말고 치라고 했어. 근데 한 번 맞으면 흉기가 따로 없다니까. 아구구.”
오르는 약을 바르려는 와헷의 손이 멍 자리에 닿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녹초가 되어버린 그는 곧 눈을 감으며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많이 아파요?”
“생까고 그냥 발라.”
와헷은 독한 냄새가 풍기는 미끌미끌한 진통 소염제를 큼직한 멍 위에 조심조심 발랐다. 처음에 몸서리를 쳤던 오르는 진통제 덕분인지, 아니면 만져주는 손길 덕분인지 점점 눈이 가늘어지며 축 늘어졌다. 와헷이 목소리를 잔뜩 죽이고 물었다.
“주무세요?”
“이눔아, 자는 눔이 대답하대?”
어눌한 대답에 와헷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오르의 한쪽 팔이 침대 옆으로 툭 떨어졌다.
와헷이 등을 톡톡 쳐 보았지만 이번엔 정말로 대답이 없었다. 오르는 말 그대로 녹초가 되어 뻗어 있었다.
“왜 이러셨어요.”
와헷이 한숨을 내쉬며 뻣뻣해진 오르의 목과 어깨를 정성껏 주물러 주었다. 소년의 손길이 맘에 들었는지 그는 어느새 쌕쌕 숨소리를 내며 꿈처럼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축 늘어진 오르의 팔을 이불 속으로 넣어주려 몸을 기울였던 와헷은 코끝에 느껴지는 그의 살내음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직 여자 손도 제대로 잡아본 일 없는 만 17살 풋풋한 소년이지만 성숙한 여자의 체취까지 못 느낄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체격만으로 보면 이젠 그가 ‘누나’ 오르보다도 도리어 더 컸다.
와헷은 문고리가 잠긴 것을 확인하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군법회의감이지만 이 순간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웃옷 단추를 끄르고 엎드린 오르의 맨 등에 살며시 가슴을 포갰다. 듬성듬성 솜털이 돋은 그의 가슴이 쌕쌕거리는 오르의 매끈한 등에 살며시 닿았다. 그냥 이 느낌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누나?”
무서워진 와헷이 다시 속삭여 확인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오르의 손등을 잡았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리면 좋을 것만 같았다. 그는 오르의 뒷덜미에 코를 묻고 그의 냄새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그때, 소초장실 밖에서 무언가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와헷은 얼른 몸을 일으켜 단추를 잠갔다. 아니나다를까, 문 밖에서 선임사관 토로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대장님! 비상 2호입니다!”
“어, 엉?”
오르가 그제야 눈을 배시시 떴지만 피곤과 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와헷이 아무 일 없는 척 얼른 일어나 문을 열어주자 토로가 뛰어 들어와 비몽사몽간의 오르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비상 2호입니다. 전투대기입니다.”
“아우, 씨이, 어떤 그지같은 새끼가 이 시간에 사고를 친 거야. 아유, 등짝이야.”
오르가 잠투정을 쏟아내며 멍투성이 몸에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아직 실전에 나갈 수 없는 소년병 와헷은 잠이 덜 깨어 횡설수설하는 소대장의 옷과 무장을 챙겨주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눈에 다크서클이 축 늘어진 오르는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줄이 늘어진 신발을 직직 끌고 일단 소초장실 밖으로 나섰다. 토로는 혼자 남은 와헷을 한 번 슬쩍 흘겨보고는 오르를 따라 방을 나섰다.
비상 2호 대기는 토벌군 특수부대나 암살수 침투같이 비정규 공격이 있을 때 내려지는 상황이었다. 이런 일선에선 한두 달에 한 번은 겪게 되는 흔한 상황이지만 실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보니 병사들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받았어?”
오르가 늘어진 군화끈을 매며 토로에게 물었다.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일선 부대를 불시 시찰하던 요인 하나가 행방불명됐다는 같습니다. 적 특수부대의 소행이 아닐까 해서 비상이 내려진 모양입니다.”
“불시시찰 따위를 해서 천벌 받은 거야.”
오르의 농담이 긴장하고 있는 병사들이 분위기를 한 번에 풀어버렸다. 모처럼 껄껄대고 웃는 병사들 사이에서 오르가 대충 준비를 마치고 일어섰다.
“초소들에 이트닌 분대가 나가 있으니까 내 괜찮은지 돌아보고 오지. 토로, 베흔 분대는 여기서 언제든 출동할 준비 갖추고 있어. 망치하고 뼈다귀, 톱날 셋 따라와.”
마지막으로 할룩스를 귀에 꽂은 오르는 죄수부대 심복들을 거느리고 막 문을 나서려 했다. 그때 할룩스를 딱 짚은 오르는 문가에 선 채 멈칫거렸다. 그의 굳어진 표정에 병사와 사관들의 표정도 동시에 얼어붙었다. 토로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무슨 연락입니까?”
오르는 잠시 답이 없었다.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오르는 대기하고 있던 베흔에게도 나오라며 손짓했다.
“중사도 따라와. 분대는 선임병한테 맡기고.”
“비상 2호인데 영내 대기해야 하지 않습니까?”
“내 언제 부대를 떠난다고 했나?”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어리둥절해 있는 토로와 베흔에게 오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파란기스 카이 부인이 행방불명이다. 본부에서 우리 소초로 오다 일을 당하신 모양이다. 초소들 좀 둘러보고 와야겠다.”
토로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적이 들어왔을지 모른다는데 왜 굳이 소대장님께서 초소 순찰을 나가십니까? 제가 나가겠습니다.”
“됐어, 상사는 나 없는 동안 소초를 맡고 있어. 영내대기는 영내대기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남의 일처럼 이번 일을 대하던 오르는 소초에 달랑 고작 4벌 걸려있는 갑옷 중 하나를 내리며 함께 나갈 병사들에게도 손짓을 했다.
“너희도 입어.”
“저희도 완전무장이요?”
망치와 뼈다귀, 톱날이 분대장들 눈치를 보며 갑옷을 내려 몸에 걸쳤다. 곤궁한 민병대 형편에 갑옷과 투구, 방패를 다 갖출 수 있는 건 장교와 사관들뿐이었고 사병들은 검은 물 먹인 군복에 가죽 보호대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지급된 갑옷도 덥고 불편해서 평상시엔 내무반 장식품에 불과했다.
제대로 무장한 오르는 3명의 병사들과 베흔을 거느리고 어느 때보다 진지해진 얼굴로 서둘러 소초를 나섰다. 뒤에 남은 토로는 걱정스런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 하필 파란기스 부인이…….”
토로가 낯을 찡그렸다.
카파키 가의 사실상 첩자 역할로 민병대에 와 있는 만큼, 다른 일선 사관들보다 민병대 내부 사정에 관해 듣는 내용도 많았다. 그리고 최근 들어 안 내용 중에는 오르의 후원자인 에르네스토 파란기스 부부가 작년에 장남 샤미르를 낳은 후 어머니인 지도자 파냐드와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었다.
파냐드는 어찌된 일인지 2순위 후계자인 장손자 샤미르를 공개하지도 않았고 며느리 파란기스와도 얼굴을 붉히는 일이 부쩍 잦아진 듯했다.
심지어는 파냐드가 남편에 이어 이번엔 며느리를 제거하려는 게 아니냐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 마찰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직은 섣부른 시나리오일 뿐이었다.
파란기스가 행방불명되었다면, 그것도 하필 남편의 심복이 있는 소초로 오다가 불상사를 겪었다면 그것들과 무관치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안 입던 갑옷까지 챙겨 입던 오르의 굳은 얼굴을 보아 그도 뭔가 생각이 있는 듯했다.
그때, 토로는 소초장실 안에서 무언가 탁탁 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소초장실에서 소년병 와헷이 먼지 묻은 오르의 훈련복을 창밖에 털고 있었다.
“와헷, 나 좀 보자.”
“예?”
선임사관의 무거운 목소리에 지레 놀란 와헷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털고 있던 옷을 한쪽에 대충 밀어놓고 토로를 따라 소초 내무반 건너편 취사장으로 향했다. 내무반과 뚝 떨어져 있는 취사장은 당번 와헷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사, 상사님, 무슨 일로…….”
어두운 취사장 안쪽에 우뚝 선 토로는 입구 부근에서 못 들어오고 벌벌 떨고 있는 와헷에게 다시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왜 불렀는지 네가 더 잘 알지?”
순진한 와헷은 뻔뻔하게 잡아떼지도 못한 채 벌벌 떨기만 했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고!”
토로의 쩌렁쩌렁한 고함과 함께 그의 발길질이 와헷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징 박힌 군화에 다리를 찍힌 와헷은 그대로 취사장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 피도 안 마른 어린 게 눈독 들일 곳이 따로 있지!”
팔뚝만한 장작을 집어든 토로는 쓰러진 와헷의 등과 엉덩이, 허벅지를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되도 않은 촌놈이 감히 카파키 가 아가씨한테!”
토로가 와헷의 허벅지를 터질 만큼 세게 후려졌다. 쓰러진 와헷이 맞을 때마다 바들바들 떨며 끙끙거렸지만 군대의 구타가 그렇듯 저항이나 비명소리는 한 마디도 내지 못했다.
“일어나, 이 새끼야.”
힘이 쭉 빠질 때까지 와헷을 두들겨 팬 토로가 바닥에 쭉 뻗어버린 와헷의 엉덩이를 툭툭 걷어찼다.
“상사님, 제발, 제발요 한 번만요.”
곤죽이 된 와헷이 솥을 붙들고 엉금엉금 기어 일어섰지만 다리가 풀려 다시 휘청거렸다. 토로는 그런 와헷의 오금을 뒷굽으로 내리찍어 바닥에 무릎을 꿇게 했다.
“그 콩알만하던 놈이 이제 여물었다 이거지?”
토로는 발로 그의 사타구니 위를 지그시 밟아버렸다. 바싹 굳은 와헷은 자리에서 숨도 못 쉬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잘못했어요, 그냥 몸이 이렇게 됐어요.”
그대로 실토해버린 와헷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너, 또 그런 모양새가 내 눈에 띄었다간.”
토로가 와헷의 다리 사이를 각목으로 툭툭 올려쳤다. 그때마다 와헷이 움찔하며 파르르 떨었다. 토로가 그의 코앞에 서슬퍼런 검날을 대뜸 들이댔다.
“아예 싹둑 잘라내 줄 테니 알아서 해.”
토로는 겁을 먹고 바싹 얼어버린 와헷의 엉덩이를 다시 장작으로 힘껏 내리쳤다. 곤죽이 되어 철퍼덕 쓰러진 와헷은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찢겨진 바지 안쪽으로 시커멓게 멍이 들고 터진 엉덩이와 허벅지가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장작을 내버린 토로는 고통에 울고 있는 소년을 놓아둔 채 씩씩거리며 내무반으로 돌아가 버렸다.
“저어, 여긴 초소 순찰로가 아니지 않습니까?”
오르를 따라나온 베흔이 엉뚱한 길로 접어드는 그의 모습에 당황하며 물었다.
“알아.”
오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가파른 화산 골짜기로 바삐 내려갔다. 본부에서 자신의 소초로 올 때 거쳐야 하는 길이었다.
“비상 2호 아닙니까? 초소 순찰하러 가신다면서요?”
“이쪽에도 초소는 있으니 잔말 말고 따라와.”
오르는 가파른 바위를 훌쩍 뛰어내렸다. 소대장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음을 눈치 챈 베흔은 죄수부대 출신들처럼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랐다. 일행은 화산재로 풀이나 나무 한그루 못 자라는 황량한 민둥산자락 좁은 돌길을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조심하십시오.”
뒤따르던 망치가 미끄러운 바닥에 놀라 주춤거리는 오르를 얼른 잡아주었다. 건기다보니 고운 화산재 흙바닥이 바싹 말라붙어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발이 죽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왜 수색대가 하나도 없죠?”
오르를 뒤따라 한참 내려온 베흔이 의심어린 얼굴로 물었다. 지금쯤 판지셰르의 본부에서 파란기스를 찾으려는 수색대를 보냈어야 했지만 바위산의 절반을 내려올 때까지 길가엔 수색대는 고사하고 불빛이나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앞에 뭐가 있습니다.”
베흔이 후다닥 달려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물체들을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본부에서 요인 경호를 담당하고 있는 위병대 차림 시체와 다리를 다쳐 쓰러진 말이었다. 도망치다 뒤에서 공격을 받은 듯 목과 엉덩이에 볼트가 박혀 있고 목에는 칼로 베어 확인사살한 흔적이 있었다.
오르가 본부 사정에 밝은 베흔에게 물었다.
“지도자 며느리의 이동이라면 경호원이 몇이었을까?”
“아군 활동지역이니 많아야 기마 위병 서넛이었을 겁니다.”
벌떡 일어난 오르는 좌우를 재빠르게 둘러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파란기스 부인! 어디 계십니까! 저 오르마즈입니다!”
“적 특수부대라는데 소리 내셔도 됩니까?”
망치가 정색을 하며 말리려 들었지만 오르마즈는 들은 척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며 걸음을 옮겼다.
“부인! 접니다! 저니까 나오셔도 됩니다!”
오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황량한 골짜기 사이를 메아리치자 지레 겁먹은 병사들이 바싹 움츠러들었다. 그 와중에 소대장의 의도를 눈치 채고 잠자코 따르고 있는 건 중사 베흔뿐이었다.
“부인! 카파키 중위입니다! 누가 공격했는지 압니다! 제가 왔으니 나오십시오!”
모퉁이를 막 돌아선 일행들은 앞에 나타난 형상에 화들짝 놀라 석궁을 쳐들었지만 사람이 아니고 백마였다. 죽은 위병의 말과는 달리 푹신한 안장에 자수 장식이 된 고삐까지 달려 있었다. 말의 발치엔 방금 전의 시체처럼 목이 절반 베인 위병의 시체 한 구가 더 보였다.
“본부의 그 멍청이들은 다 어딨답니까!”
다혈질의 망치가 분통을 터뜨렸다.
“부인의 말 같습니다. 멀리에 시체 한 구가 또 보이는데 위병 같습니다.”
베흔이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파른 골짜기 측면을 따라 난 길은 위로는 작은 언덕이 있고 아래로는 언제든 흙이 무너져 내릴 듯한 가파른 비탈이 보였다.
“이 언덕 위로 도망치셨거나 온 길을 돌아가신 게 아니라면 이미 납치를 당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벽 아래는…… 미끄러워서 저희도 못 내려가겠네요.”
베흔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오르는 주변 절벽에 대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부인! 접니다! 대답하세요!”
오르와 네 명의 병사들은 위병들 시체를 지나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갔다. 오르마즈는 그 와중에도 목이 쉴 만큼 계속 소리를 질렀다.
“……잠깐.”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던 오르가 주먹을 번쩍 쳐들었다.
“이봐, 절벽 밑에서 무슨 소리 안 나나?”
“설마요, X인 제가 못 듣는 걸 소대장님께서 들으시다뇨.”
베흔이 황당하다는 듯 손을 저었다. 하지만 오르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소대장님?”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오르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베흔도 그제야 무슨 소리를 듣고는 움찔했다.
“저쪽 절벽 아래입니다.”
베흔의 손짓에 오르마즈가 얼른 달려가 절벽 밑으로 몸을 내밀었다.
“이크!”
바싹 마른 화산재가 밑으로 흘러내리면서 오르도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했다. 베흔이 얼른 허리를 잡아주자 오르가 다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고 랜턴을 켰다.
“부인, 여기 계십니까? 엇.”
오르는 랜턴 빛에 반사된 두 개의 까만 눈동자에 화들짝 놀랐다. 흙투성이가 된 파란기스 카이 부인이 길에서 40척(12m) 정도 아래에 머리를 내민 바위에 힘겹게 몸을 걸치고 있었다. 위장포로 온몸과 얼굴까지 온통 가리고 있었지만 공포에 질려 있는 까만색 눈동자는 분명했다.
“미안해요, 소리 들었는데 큰 소리 내면 흙이 무너질 것 같아 대답 못 했어요.”
파란기스가 조소조근 속삭이듯 답했다. 위험천만한 상황에 비하면 놀랄 만큼 침착한 모습이었다. 파란기스가 있는 바위 밑으로는 당장이라도 쓸려 무너질 것 같은 화산재와 고운 흙들이 까마득한 골짜기 바닥까지 이어져 있었다.
망치가 서둘러 로프를 꺼내어 오르의 손에 건네주었다.
“잘 잡고 있어.”
오르는 다리 사이에 로프를 돌려 감고 반대편 끝을 덩치 큰 망치와 톱날에게 내밀었다. 나무나 큰 바위 하나 없다보니 마땅히 줄을 맬 곳이 없었다.
“베흔 중사는 뼈다귀랑 주변 경계하고. 너희 둘 덩치값 못 하면 내가 저승에서 벼락 내릴 테니까 알아서 해.”
오르는 그 둘에게 로프 끝을 맡기고는 곱고 가는 화산재가 줄줄 쏟아져 내리는 미끄러운 비탈을 조심조심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심하세요, 제가 내려갑니다.”
오르가 계속 말을 하며 떨고 있는 파란기스를 달래주었다. 그는 흙이 무너지지 않게 살살 바닥을 디뎌 내려가 파란기스가 있던 바위를 발끝으로 살짝 밟았다.
“이크!”
오르의 체중이 얹히기가 무섭게 약한 흙더미에 위험천만하게 얹혀 있던 바위가 흔들거렸다. 놀란 파란기스가 비명을 지르며 바위를 끌어안았다. 오르가 얼른 손을 내밀어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바위에 매달려 있던 파란기스도 더듬더듬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손목을 꽉 잡았다. 오르가 맞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됐어요, 저도 잡았으니까 조심해서 제 쪽으로 움직이십시오. 안 놓치니 걱정 마세요.”
파란기스가 돌을 더듬더듬 짚고 오르에게 다가와 갑옷 벨트와 어깨띠를 붙들고 목을 꼭 안았다. 긴장한 파란기스가 내뿜는 격하고 빠른 숨소리가 오르의 귓가를 울렸다. 오르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 하마터면 딴생각을 할 뻔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위에 고함을 질었다.
“당겨!”
위에서 힘 좋은 두 거한들이 줄을 잡아당기면서 오르의 몸이 위로 조금 딸려 올라갔다. 오르는 그제야 안도하며 파란기스를 안은 팔에 힘을 꼭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언덕 위다!”
베흔의 고함이 울리더니 머리 위 절벽에서 볼트 몇 발이 휙 소리를 내며 스치는 것이 보였다. 톱날 녀석의 짧은 비명과 동시에 오르와 파란기스를 받치고 있던 로프가 갑자기 주르륵 풀려 내려왔다.
“이크!”
오르가 반사적으로 줄을 꽉 쥐었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둘은 미끄러운 화산재 비탈을 그대로 곤두박질쳐 조금 전 파란기스가 기대어 있던 바윗덩이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보스!”
망치가 절벽 밖으로 몸을 내밀어 로프를 힘껏 움켜쥐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오르와 파란기스가 떨어진 바위는 두 사람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흙을 타고 언덕 밑으로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로프에 매인 채 바위와 함께 함께 밑으로 죽 내려가던 오르와 파란기스는 중간에 다시 탁 걸리며 출렁거렸다.
“제가 잡고 있습니다! 보스!”
등에 방패를 진 채 바닥에 엎드린 망치가 쏟아지는 사격 속에서 로프를 움켜쥐고 두 사람분의 몸무게를 받치고 온 힘을 다해 버티었다. 망치가 버티고 있는 사이 베흔과 뼈다귀 둘이 적이 사격을 퍼붓고 있는 언덕 위로 번개처럼 뛰어올라 반격을 시작했다.
“조금만 버티세요! 보스!”
그 때, 절벽 중간에 매달려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오르의 머리 위로 더 높은 곳에서 쓸려 내려온 바윗덩이가 번쩍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제기랄!”
오르가 파란기스를 꽉 안으며 몸을 움츠렸다. 짧은 비명과 함께 머리통만한 바윗덩이가 그의 투구와 어깨의 견갑을 후려쳤다. 오르의 고개가 뒤로 휙 꺾이면서 충격이 그대로 로프로 전해졌다.
“악!”
피가 날 정도로 줄을 움켜쥐고 있던 망치의 손아귀 힘도 순간 바닥을 드러냈다. 그가 줄을 놓치면서 오르와 파란기스는 골짜기 밑으로 주르르 흘러내려갔다.
“가만히 계십시오!”
그나마 갑옷을 입은 오르가 맨몸에 가까운 파란기스를 품에 꽉 안고 그의 몸을 필사적으로 지켜냈다. 둘은 가파른 흙 언덕을 몇 번이나 데굴데굴 굴러 계속 밑으로 떨어졌다. 오르가 중간에 어떡해서든 멈춰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욱!”
쿵 소리를 내며 화산암 바위에 부딪쳐 박살난 투구의 뺨받이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옆으로 튕겨난 오르는 파란기스를 안은 채 거의 20척(6m) 가까이를 뚝 떨어져 다시 흙더미에 곤두박질쳤다. 오르마즈는 파란기스의 머리가 다치지 않게 그의 얼굴을 품에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퍽 소리를 내며 비탈진 흙더미 위에 떨어진 둘은 다시 한참을 굴러서야 어딘가에 멈추었다.
“헉, 헉.”
평지에 도착한 오르마즈가 눈을 떴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나니 엉겨붙은 피가 씻기면서 시야가 비로소 조금씩 밝아졌다.
“괜찮아요?”
먼저 일어나 물은 건 파란기스 쪽이었다. 파란기스는 누더기가 된 투구 틈새로 손을 넣어 오르의 얼굴을 짚어보았다. 다행히 이마가 좀 찢긴 것을 빼면 아주 큰 상처는 없었다.
“일어나지 말아요. 내상이 있을지도 몰라요.”
파란기스가 벌떡 일어나려는 오르를 얼른 진정시켰다. 오르는 그 와중에도 눈동자를 굴려 재빨리 주변을 확인했다. 둘은 바위가 사방에 널려 있는 골짜기 거의 밑바닥까지 내려와 있었다.
“구해드리겠다고 해 놓고 어째 제 꼴이 더 웃기게 됐네요.”
오르가 떨어지느라 정신이 몽롱해진 와중에도 웃으며 넉살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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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의 유료란인 노블레스란에 무삭제 출판본이 연재중입니다. 뷰어 왼쪽에 있는 [작가의 다른 작품]을 통해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노블레스 이용해주시는 분들께선 흔적 남겨주시면 굉장히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1부 1권부터 시작했고요, 매일 조금씩 꾸준히 올릴 예정입니다만 양을 조절해야 하는 연재라는 특성상 완결도 종이책 쪽이 훨씬 빠를 겁니다. 제 글만 보시거나, 맥이 안 끊기고 죽 보기를 원하신다면 종이책 출판본을 권해드립니다. ^^ (물론 눈도 편하고요....구세대인가봅니다.)
* 시스템 특성상 종이책에 있는 도표나 삽화, 조판이나 첨부되는 사은품은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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