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84화 (979/1,132)

< -- 984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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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엉금엉금 일어난 파란기스가 옷을 벗어 오르의 가슴에 덮어주며 손을 꼭 잡았다. 다행히 오르가 결사적으로 지켜 준 덕분에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위에 있는 부하 놈들이 잘 싸워야 하는데.”

오르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순간에도 그의 신경은 온통 언덕 위에 가 있었다. 베흔과 세 병사들이 적을 제대로 제압했을지 궁금했지만 가파른 비탈 중간의 꺾이는 곳이 있어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서로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긴장되는 시간이 흘렀다.

뒤이어, 굵고 거친 고성과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언덕 위를 울렸다. 놀란 파란기스가 누워있는 오르를 가슴을 짚으며 진정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지금껏 진짜 싸움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일 없던 풋내기 중사 베흔의 첫 싸움이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잘 할 겁니다.”

오르가 파란기스의 손을 잡으며 눈을 껌벅거렸다. 베흔과 망치의 격한 고함소리가 언덕 꼭대기에서 함께 들려왔다. 아직은 어느 쪽이 이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듣기 싫은 칼 부딪치는 소리, 볼트가 방패에 비껴 맞으며 내는 몸서리쳐지는 마찰음,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고, 옮기라는 고함과 추격하라는 베흔의 다급한 재촉이 멀리서 동시에 울렸다. 그리고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잠시 후, 절벽 위에서 망치가 애타게 울부짖는 고함이 들려왔다.

“보스! 보스! 놈들 도망갔습니다! 무사하면 대답하세요!”

오르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풋내기 X 베흔이 이제야 전사다운 밥값을 한 모양이었다. 오르마즈는 귀의 할룩스를 더듬었지만 투구 뺨받이와 함께 날아갔는지 있지도 않았다.

“베흔 중사, 내 목소리 들리면 망치 녀석 입 좀 막아.”

오르가 바닥에 누운 채 평상시보다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소음이라고는 전혀 없는 조용한 산자락이라 X라면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며느리를 제거하려는 파냐드의 공작인지, 아니면 정말 적 특수부대의 기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은 아직 주변 어딘가에 있을 테고, 파란기스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 다시 공격을 해 올 것이 분명했다.

그걸 막으려면 지원군이 올 때까지 죽은 척 하는 것이 제일 현명했다.

잠시 후, 울부짖는 망치의 목소리가 뚝 끊어지더니 성난 고함이 들려왔다.

“소대장님 돌아가신 것 같으니까 닥쳐.”

베흔이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아래까지 들려왔다. 놀란 망치가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무슨 소리에요! 여긴 낭떠러지도 아닌데!”

“떨어지다가 바위에 머리 부딪쳐서 둘 다 끝장나는 거 봤어. 그만해! 본대에 시신 찾으러 오라고 연락해 놨으니까 조용히 있어!”

베흔의 임기응변에 밑에서 듣고 있던 오르가 픽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오르가 파란기스를 보며 눈을 쫑긋거렸다.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눈치 채는 놈입니다.”

눈치 없는 망치가 덩치에 안 어울리게 펑펑 우는 소리가 골짜기를 울렸다. 억지로 우는 척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 진짜로 우는 것이었다.

“안 돼요, 우리 보스 어떡해요! 그럴 리가 없어요!”

“으이구.”

밑에서 듣던 오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좀 괜찮아졌나요?”

파란기스도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 듯 오르의 얼굴을 새삼 더듬어 보았다. 희미한 달빛에 두 개의 무지개빛 눈동자만 반짝거리고 있었다.

“당신하고 이 콜로니에서 살아서 마주하는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는데.”

“이제 살았으니 걱정 마세요.”

파란기스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 못 한 오르마즈가 엉뚱한 대답을 했다. 흙바닥에 누운 채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던 오르마즈는 10년도 넘게 지나 잊고 있던 첫사랑의 얼굴을 문득 떠올렸다. 이유는 몰라도 파란기스와 나즈라의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는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까지도 어딘지 닮은 것 같았다. 오르마즈의 입가에 스르르 웃음이 번졌다.

“왜 부인 손이 닿으니 안 아프죠?”

순간 파란기스의 얼굴이 굳었다. 별 뜻 없이 말을 했던 오르는 그제야 유부녀에게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잠시 후 파란기스 쪽에서 먼저 미소를 보이며 스카프를 벗어 그의 머리에서 흐르는 끈적한 피를 꾹 눌러주었다.

“다행이에요. 그렇게 느껴줘서.”

파란기스가 오르마즈의 부서진 투구와 갑옷을 조심조심 벗기고는 마치 아이를 안듯 자신의 무릎에 기대어 눕혀주었다. 오르마즈는 그런 파란기스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이 여인의 남편을 생각하면 절대 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의 살내음이 정말로 달콤했다. 마치 나즈라의 품에서 느꼈던 그것 같았다.

“제게 무슨 용무로 오시던 길이셨죠?”

스스로에게 당황한 오르마즈가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며 주제를 돌렸다. 파란기스가 그의 얼굴을 만지며 대답했다.

“당신한테 알려줄 게 있어서요. 비밀은 지키셔야 해요.”

“물론이죠, 전 군인입니다.”

오르는 얼굴을 스치는 파란기스의 손길을 인식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며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님께서 당신에게 임무를 주려 하고 계세요, 굉장히 위험한 임무일 거예요.”

“……전 일개 야전 보병대 중위에 불과합니다. 지도자께서 저 같은 하찮은 말단장교에게 직접 임무를 주시다니요?”

“어머님은 당신이 누군지도 잘 모르세요. 당신을 추천한 건 인사부 하메스타 대위에요. 코윈과 쿠트라스의 상류층 말투를 쓸 줄 알고, 바람어를 구사할 수 있는 다하카르 간택자 출신 민병대 장교가 몇이나 되겠냐고 그러니 어머님도 당연히 넘어가셨죠. 무슨 의미인지 아시죠?”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 하시는데요?”

“4달 후에 거기서 콜로니연합 총회가 열려요. 수백 명의 의원들과 상류층 인사들이 모이고 교단에선 하마피타와 하마타를 대표해 대신관과 트라카 마구스도 참석할 거예요.”

순간 말문이 막힌 오르마즈는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그 정도 규모의 행사에서 일을 벌인다는 건 파란기스의 말대로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그런 작전은……특무대 소관이 아닌가요.”

오르의 물음에 파란기스가 침착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특무대엔 싸움 잘 하는 전사들이나 똑똑한 이론가들도 많지만 당신처럼 명문가와 교단을 경험하고 자란 사람은 없어요. 당신으로 낙점되면 특무대로 전출될 거예요. 그리고 몇 달간 특무대에서 외부와 단절되어서 혹독한 훈련을 받겠죠. 남편은 반대하고 있지만 어머님 뜻이 강경해서 어려울 것 같아요.”

오르마즈의 눈앞이 막막해졌다. 어쩌다가 운명에 휩쓸려 민병대 장교까지 오게 되었지만 그가 원했던 건 이런 삶이 아니었다.

“그래서……절 특무대로 데려가러 오신 거라고요?”

“아뇨.”

파란기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에게 특무대에 잡혀가기 전에 탈영하라고 말해주러 왔어요. 어머님께서 제가 작전을 망치려는 걸 눈치 채고 여기서 절 공격한 것이겠죠.”

“예에?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놀라고 당황한 오르마즈는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지만 머리가 깨질 듯 아파 곧 도로 그의 무릎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파란기스가 얼른 그의 손발을 주물러주며 어린애를 달래듯 속삭였다.

“제발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요.”

“왜요, 왜 제게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파란기스는 오르마즈의 가슴을 꼭 안으며 울먹였다.

“당신은 소모품이 될 거예요. 일단 가면 살아서 못 돌아올 거예요. 당신을 또 잃고 싶지 않아요.”

파란기스가 오르의 뺨에 코끝을 부비며 말을 이었다.

“성공해서 당신이 두 마구스들을 죽이는 것도 싫어요. 제발 다하카르나 트라카의 헤네티들에게 투항해요. 그리고 [7번 여자]가 보냈으니 마구스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해 주세요. 당신은 간택자이기도 하니까 분명 믿어 줄 거예요. 마구스들에게 내 얘기를 하면 돌봐 줄 거예요.”

“무슨 소립니까, 당신도 민병대를 위해 일하지 않았나요? 미인계로 들어온 첩자였습니까? 그자들이 왜 당신을 알죠?”

오르마즈가 의심에 찬 눈길로 파란기스의 까만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파란기스는 결국 ‘그 둘은 내 손자와 딸이라고요.’라는 말을 가슴 속으로 삼켜버리고는 오르의 이마에 박힌 다하카르 조각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난 그저 힘든 사정이 있어서 교단에서 도망쳐야 했어요. 믿어줘요.”

“뜬금없이 적을 살려주라는데 제가 어떻게 당신을 믿습니까?”

오르마즈가 씩씩거렸다. 민병대 장교로서 몸만 성하다면 당장 파란기스를 체포하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 이 여인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의 눈빛에 분명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파란기스는 절벽 위에 사람들이 도착한 듯 시끌시끌해지는 소리에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시면 증조부 타리프 신관께서 남기신 일지를 보세요. 한 세트는 교단에서 보관하고 있지만 나머지 한 세트를 당신 할아버님께서 갖고 계실 거예요.”

“빌루이 할아버지요?”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요. 당신은 여기 콜로니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제발 대신관에게 가세요. 그 사람이 다 설명해 줄 거예요.”

오르마즈에겐 모든 것이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지도자의 맏며느리인 파란기스가 왜 자신을 이렇게 각별히 생각하는지, 왜 시어머니와 남편의 뜻을 거슬러가면서까지 교단의 수괴인 두 마구스들을 살리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쓰레기 같은 콜로니 의원들은 다 죽여도 상관없지만 두 마구스들은 안 돼요. 당신 손으로 그 둘을 죽여선 절대 안 돼요.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면 크게 후회할 거예요, 제발 약속해 줘요.”

다급해진 파란기스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위에서는 소초에서 달려 내려온 부하들이 긴 로프를 걸고 내려오고 있었다.

“제발, 탈영까지는 바라지 않을 테니 그 둘을 죽이지 않겠다고 만이라도 약속해 줘요.”

파란기스가 오르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오르마즈의 입에선 쉽사리 ‘알았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줄을 맨 오르의 소대원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맘이 급해진 파란기스가 오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아요, 제발, 그들을 살려주면 당신 원하는 대로 내 몸이라도 줄게요.”

“예에?”

놀라고 당황한 오르의 눈이 주먹만해졌다. 들것을 짊어진 이트닌을 선두로 줄을 타고 내려온 오르의 소대원들 네 명이 절벽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들 죄수부대에서부터 따라온 충실한 심복들이었다.

“보스! 보스!”

그들은 파란기스의 무릎 위에 쓰러져 있는 소대장에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파란기스는 아쉬움이 남는 얼굴로 그에게서 한 발 물러나 주었다. 오르가 걱정에 찬 표정의 이트닌에게 일렀다.

“난 괜찮으니 부인부터 모셔. 에르네스토 도련님께서 걱정하고 계실 거다.”

오르의 손짓에 병사들이 파란기스를 먼저 들것에 실었다. 여전히 답을 듣지 못한 파란기스는 오르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오르가 그런 그에게 작은 소리로 답했다.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소장 아무리 아름답고 탐이 난다 한들 가져도 될 것과 아닌 것은 구분할 줄 압니다.”

답변은 언뜻 차갑게 들렸지만 오르마즈의 눈빛은 온화했다. 들것 위의 파란기스가 손을 뻗어 오르의 거친 손등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오르는 무어라 말하려는 파란기스에게 살며시 고개를 저어 보이며 침착하게 답했다.

“제 본능과 느낌으로 결정하겠습니다. 믿으십시오. 결과가 어찌되든 제 운명입니다.”

오르가 들것에 실려가는 파란기스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춰 주었다. 파란기스를 실은 들것이 병사들의 손에 절벽 위로 올라가면서 그의 고운 손도 오르마즈의 입가에서 스르르 빠져나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를 바라보던 파란기스의 그윽한 눈길은 여전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코메트 특수부대의 기습’에서 지도자의 맏며느리 파란기스를 구해낸 오르마즈는 대위 특진과 함께 특무대 지원을 제안받았다. 형식은 제안이었지만 거부하면 이전의 사면을 취소한다 했으니 사실상 강제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오르마즈는 ‘이전 소초의 부하들 중 지원자들을 함께 데려간다,’는 조건을 달아 그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특무대 사령부 입장에서도 정예군의 자부심으로 가득한 특무대 요원들 중 죄수부대 출신의 열등생 장교 밑에 들어갈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오르는 베흔과 이트닌, 망치를 비롯한 열댓 명의 죄수부대 출신들, 잡일을 할 당번 와헷을 데리고 특무대 예하 20명 규모의 신생부대인 기동대의 첫 중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쿠트라스에서 곧 있을 ‘특별한 작전’을 위한 훈련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은 더 이상 파란기스를 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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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잘못하면 막내 황자가 수베르에서 태어날지도 모르겠는걸.”

프리깃 2층 선창의 셔틀 도크로 내려온 베아트릭스는 만삭인 에스더의 불룩한 배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1번함’의 도크에 모인 황제 식솔들과 내각의 고관들, 내명부와 비서관의 수행원들 사이에선 황제의 귀환을 앞두고 가벼운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카렐 황제 즉위 직후, 선황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거대한 크루즈 프리깃을 모두 해체하고 새로 건조한 5척의 황실 전용 프리깃은 황제의 실용적인 성향을 나타내듯 이전 황제 때에서 절반 가까이 줄인 전장 500척(150m)의 견고한 중형선이었다. 이 프리깃은 황실을 위한 몇몇 특별한 공간이 있지만 유사시엔 2천 가까운 병력을 태워 기동작전에 동원되거나 지휘본부로도 사용할 수 있는 사실상 군함이었다.

프리깃의 셔틀 도크는 양쪽으로 각각 4대씩, 총 8대의 셔틀이 결합할 수 있는 넓고 긴 복도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황제 전용 아르다가 셔틀은 제일 안쪽의 7번 도크 게이트에 결합될 예정이었다.

“황빈께서도 수베르에서 엘룬 낳으셨으면서.”

여전히 명랑한 에스더는 나온 배를 슬쩍 추스르는 시늉을 하며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래도 황상께서 함께 있어주실 때 낳는 게 어디에요. 황빈께선 초원 한복판에서 혼자서 덜컥 낳으셨잖아요.”

“누군 산실(産室)에서 낳기 싫어 거기서 낳았남?”

베아트릭스가 눈을 흘겼다. 11년 전, 연례 기동훈련 지휘를 해야 한다며 황제의 만류도 뿌리치고 만삭의 몸으로 부득불 수베르의 초원에 나갔던 그는 야전 막사에서 자다 말고 얼떨결에 엘룬을 낳아 아랫사람들을 당황하게 한 전력이 있었다.

진통 1시간 만에 씀풍 낳은 아기를 안고 무안하게 누워있던 그의 모습에 아케메니아에서 고속셔틀을 직접 몰고 폭주해 날아온 황제가 황당해 할 말을 잃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산실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못 본 사람 속 터지게 하지 말라고.”

에스더가 여전히 밝은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엘룬이 효녀죠. 그러지 마시고 저도 쉽게 낳는 비법 좀 알려주세요.”

“비법은 무슨, 출산했다고 유세도 못 해 보고 괜히 황후 눈치밥만 잔뜩 먹었는걸.”

‘황후 눈치밥’이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던 에스더는 얼른 입을 가리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양반되긴 틀리셨어요.”

출입문 쪽에서 의전대 경호원들을 선두로 아메스가 도크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바닥까지 길게 끌리는 타이트한 롱드레스에 두툼한 숄을 두르고 머리까지 틀어올려 성숙한 관능미를 한껏 뽐낸 모습이었다.

황후의 뒤에는 시녀장과 이부대신 볼토 트라우제의 모습도 보였다. 황제의 이동을 준비한 담당자들은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이렇게 황제와 함께 탑승하는 것이 관례였다.

‘저도 찔리긴 찔리나보네.’

침대 옆에서나 어울릴 듯한 황후의 도발적인 차림새에 울컥한 베아트릭스는 긴 치맛자락을 확 밟아 자빠뜨리고 싶은 심정을 꾹 억눌렀다. 황후의 장미향수 냄새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오늘은 몸이 좀 달으셨나?’

도도한 표정의 아메스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는 베아트릭스와 에스더 앞을 휙 지나 곧 황제가 나올 도킹 도어 앞으로 성큼 나아가 섰다. 그리고 그의 주변을 다시 의전대 경호원 십여 명이 둘러쌌다.

“이번 경호는 의전대가 맡는다죠?”

에스더가 또 가벼운 입을 참지 못하고 속삭였다.

“어떤 분 덕택에 황상 전담 경호팀이 통째로 해체된 덕분이지.”

베아트릭스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경호대는 그럼 한 명도 안 온 건가요?”

“걔네들은 황궁에 남았던가 수베르에 가 있겠지.”

“그래도 나쁘진 않네요.”

에스더가 붉은 망토를 한쪽 어깨에 걸친 화려한 제복 차림의 잘생긴 의전대 경호원들을 보며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군기는 제법 세도 부대 특성상 사교계를 많이 접하다보니 외모에 자신 있는 상류층 자제들이 인맥과 군 경력을 동시에 쌓기 위해 앞 다투어 들어오려는 부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페로 정파 자제들이나 그쪽에 줄을 댄 집안 젊은이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뭐, 어차피 황궁 사람들 타는데 함선에서 일 날 리도 없고, 말이야 바른 말로 시커먼 가디언들보다 이네들이 눈은 훨씬 즐겁잖아요?”

“이 아이도 ‘시커먼 가디언’ 핏줄이거든?”

베아트릭스는 만삭을 한 귀인의 배를 손가락을 톡톡 치며 쏘아붙였다.

“빌어먹을, 그분도 참, 나보다도 실력 못한 놈들 경호를 받으셔야 한다니.”

아메스의 고집으로 황제 전담 경호대가 없어진 것에 앙금이 남아있던 베아트릭스가 애먼 의전대 경호원들 들으라는 듯 투덜거렸다.

임무가 임무인 만큼 이들도 시민군 중에서는 꽤 정예부대였지만 베아트릭스의 눈에는 어깨에 걸친 근사한 망토까지도 다 미워보였다. 이들은 군인 본연의 임무보다는 행사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이 크다보니 보니 하나같이 크고 출중한 외모에 중앙군 내에서 제일 근사한 제복으로 한껏 멋까지 내고 있었다.

“아직 안 오셨죠?”

제일 마지막으로 헐레벌떡 등장한 건 슬슬 성숙한 티를 내기 시작한 옅은 갈색머리 소녀였다. 웬만해서는 소화할 엄두를 내기 어려운 화사한 주황빛 비단포도 이 아름다운 소녀에게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황실 문양 머플러 위에 박힌 화려한 루비 브로치는 이런 미모를 물려준 엄마 네페티의 선물이었다.

“엘룬한테 저딴 거 줬다간 보나마나 몰래 팔아서 말이나 칼 샀을 거야.”

“그보다는 수백이나 되는 친구들 다아~ 불러다가 과자파티 여는 데 걸게요.”

베아트릭스의 농담에 에스더가 얼른 입을 가렸다. 황제를 맞으러 나온 마하 대군은 오늘 아침까지도 몸살기가 있다며 끙끙대던 아이가 맞나 싶을 만큼 환한 얼굴로 머리에 옷 매무새를 가다듬느라 정신이 없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본 베아트릭스는 로비에 모인 남자 경호원들이나 수행원들의 눈동자 절반 이상이 마하에게 쏠려 있는 것을 깨달았다.

“모전녀전이죠?.”

에스더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국 제일의 미녀 중 하나로 꼽히는 어머니와 크고 당당한 황제에게서 미모와 기품을 고루 물려받은 이 소녀는 죽어라 멋을 내고 나온 황후보다도 도리어 더 관심을 끌었다. 사실 황자들 중에서도 외모로는 누가 봐도 가장 출중했다.

그때, 정면의 도킹 도어 너머 셔틀이 결합하는 가벼운 충격음이 전해져왔다. 그 앞에 선 아메스는 살짝 긴장했는지 천장을 올려보며 큰 숨을 깊숙이 들이마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파란 불이 켜지자 승무원들이 나아가 두꺼운 도킹 도어를 비틀어 열었다.

“황상께서 납십니다.”

상선 루스탐의 고함에 수행원, 승무원들이 일제히 자리에 꿇어앉아 바닥에 이마를 댔다. 시종들이 출입문 앞에 붉은 카펫과 발판을 깔자 세 비빈들과 마하가 그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숨을 죽이고 있던 황후 아메스는 황제가 발판을 딛는 소리에 침을 꿀꺽 삼켰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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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의 유료란인 노블레스란에 무삭제 출판본이 연재중입니다.  뷰어 왼쪽에 있는 [작가의 다른 작품]을 통해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노블레스 이용해주시는 분들께선 흔적 남겨주시면 굉장히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1부 1권부터 시작했고요, 매일 조금씩 꾸준히 올릴 예정입니다만 양을 조절해야 하는 연재라는 특성상 완결도 종이책 쪽이 훨씬 빠를 겁니다. 제 글만 보시거나, 맥이 안 끊기고 죽 보기를 원하신다면 종이책을 권해드립니다. ^^

* 시스템 특성상 종이책에 있는 도표나 삽화, 조판이나 첨부되는 사은품은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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