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85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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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다려 주니 행복합니다, 황후.”
어깨를 짚어주는 황제의 손길에 아메스가 비로소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황제와 나란히 서 있는 주페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태자?”
아메스가 주페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주페도 ―친어머니건 아니건을 떠나― 그동안 어머니라고 생각해 온 그의 품을 다정하게 안았다.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주페도 아메스를 힘 주어 꼭 안았다. 평소 둘째아들을 소 닭 보듯 하던 황후의 환대가 유독 각별한 것이 어딘지 어색했지만 어쨌든 그에겐 키워 준 어머니가 분명했다. 어머니와 포옹을 나눈 그는 기뻐하고 있는 베아트릭스, 에스더와도 반가움을 나누었다.
“티틀 아저씨!”
카렐의 옷자락을 잡고 뒤따라 나온 마리안이 황후 수행원들 사이에 서 있는 한 선임시종의 품에 후다닥 뛰어들었다.
“아쿠쿠, 이러시면 안 됩니다.”
소녀에게 밀린 시종이 주춤주춤 한 발 물러났지만 입가엔 웃음이 가득했다. 카렐의 가디언 시절, 할복하고 쓰러져 있던 그의 목숨을 구하고 얼마간 주인 노릇을 했던 그는 전사단에서 결혼해 아이도 여럿 얻었고, 지금은 ‘황자 공부방 주임’이라는, 누구나 탐내는 땡보직으로 속편하게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아빠 경력을 십분 활용해 공부로 바쁜 초보엄마 솔 대신 마리안을 아기 때부터 키워 ‘본업은 옹주의 유부(乳父)’라며 놀림 아닌 놀림을 받고 있었다.
“히이이.”
마리안은 이 다정한 아저씨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춰주고는 다시 뛰어내려서는 도크 안을 또 여기저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황후가 궁을 지켜 준 덕에 맘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수고했소, 황후.”
아들을 일단 먼저 인사시킨 카렐은 식솔들을 대표해 한껏 멋을 내고 자신을 기다려준 황후 아메스에게 다정한 포옹과 입맞춤을 해 주었다.
황제에게 발돋움을 해 안긴 아메스는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셔틀 안쪽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스치는 것을 보았다. 셔틀 조종사 옆에 소리 없이 있던 코나는 아메스의 시선을 받자 안으로 쓰윽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아메스도 30년 만에 처음 본 그 ‘가문의 원수’ 존재를 못 본 척 외면해버렸다.
“그런데 용안이 왜 이러십니까.”
아메스가 황제의 얼굴을 가로지른 큰 흉터를 보며 정색을 했다. 그는 말없이 웃고만 있는 카렐의 가슴을 그 어느 때보다 다정히 꼭 안았다. 그의 환대에 카렐의 입가에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걸핏하면 자신을 외면하던 황후가 몸단장까지 하고 이렇게 안아준 것만으로도 그간의 피로를 싹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혼식 날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니 앞으로도 종종 궁을 비워야겠습니다.”
카렐이 거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어투로 아메스에게 속삭였다. 아메스는 문득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올려보았다. 애정이 깃든 따스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키 작은 아메스가 발돋움을 해 그의 입술을 다시 맛보며 속삭였다.
“못 뵈온 동안 황상의 자리가 얼마나 컸는지를 실감했사옵니다. 제 품을 떠나시는 건 이번으로 충분합니다.”
교태를 부리는 아메스를 뒤에서 지켜보는 베아트릭스의 시선이 그리 곱지는 않았다. 자신이 궁을 비운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리 없는 카렐은 오랜 우울증으로 걱정을 안겼던 조강지처의 환대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카렐은 아메스의 품을 일단 놓아주고는 그 뒤로 걸음을 옮겼다.
“황빈.”
베아트릭스에게 나아가려던 카렐의 품에 에스더가 불쑥 뛰어들었다. 하지만 자의로 안긴 건 아니었다. 베아트릭스에게 등 떠밀려 얼떨결에 안긴 에스더가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쪽은 2인분이니까 제가 양보하고,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해야죠.”
베아트릭스의 난데없는 유머에 카렐이 피익 웃으며 만삭의 에스더를 조심조심 안아주고 그의 무거운 배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비빈들 중 마지막으로 베아트릭스와 반가움을 나누었다. 여느 때처럼 별다른 애교도 없는, 마치 동료들과 인사하듯 서로의 느낌만을 나누는 힘 있는 포옹이었다.
“예방약 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모두 폐하 덕분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베아트릭스가 그의 가슴에 기댄 채 입을 열었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카렐도 이 정도면 이 말수 적은 무장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고마움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이 얻은 업보이니 내가 해결해야지요.”
카렐은 팔에 힘을 주어 베아트릭스의 가슴이 부서져라 꼭 안아주었다. 베아트릭스는 황제에게 묵혀놓은 말을 해 주고 싶어 입술이 떨려왔지만 여위고 지친 그의 모습에 꾹 참기로 했다. 그리고는 이대로 계속 있고픈 맘을 억누르며 살짝 입맞춤만 해 주고 물러났다.
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카렐의 옆에 펄쩍 뛰어올라 목에 매달렸다.
“이제 어디 가시면 안 돼요. 저 또 아팠다고요.”
놀란 카렐이 앞으로 휘청할 뻔했지만 얼른 아이의 몸을 받쳐주었다. 순식간에 황제의 품을 차지한 마하가 그의 얼굴과 목에 몇 번이나 열렬히 뽀뽀세례를 퍼부었다.
“대군은 병이 그새 똑~ 떨어졌나봅니다.”
아이의 극성을 보다 못한 아메스가 결국 한 마디 꺼내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는 들은 척 만 척 카렐에게 입술을 불쑥 내밀었다.
“엄마가 다른 프리깃에 타고 가셔서 저보고 대신 맞아드리고 오랬어요. 그러니까 저도 엄마처럼 여기에 뽀뽀해줘요. 이마나 뺨 말고요.”
아이가 내밀어오는 입술에 카렐이 몸서리를 치며 몸을 뒤로 뺐다. 어릴 때야 귀엽다고 매일 해 주던 뽀뽀였지만 키가 5척 반(165cm) 가까이 자라 엄마만큼이나 커버린―물론 엄마가 작은 탓이 크지만― 만 12살 딸의 입술에 정말로 뽀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렐이 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건 어른들끼리만 하는 뽀뽀란다.”
“저도 다 컸어요. 뽀뽀 안 해 주면 이것도 안 드릴 거예요.”
마하가 목에 걸고 있는 작은 주머니를 슬쩍 열어보였다. 그 안에는 마하가 얼마 전 페로관에서 자신을 납치하려던 쿠마르를 감쪽같이 속여서 훔쳐낸 14번 잔딕이 보물처럼 꼭 숨겨져 있었다. 네페티가 일부러 딸에게 들려 보낸 모양이었다.
“풉.”
카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속셈은 빤했지만 져 줄 수밖에 없었다.
“황비는 이렇게 목에 안 매달리는데 뽀뽀 대신 안아주기 5분으로 바꾸면 어떻겠니.”
난감해진 카렐이 비빈들 눈치를 보며 왼팔 위에 딸을 앉히고 오른손으로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럼 그동안 저한테서 가슴 떼지 말기에요. 그러면 또 5분이에요.”
계획대로 ‘거래’를 성사시킨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두 팔과 두 다리로 그의 목과 허리를 끌어안고 카렐의 품을 독차지해버렸다. 가끔은 친엄마 네페티의 얼굴까지도 붉히게 할 만큼 극성맞은 아이다보니 이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참, 선물은요?”
마하가 대뜸 카렐의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카렐이 눈이 똥그래져서 물었다.
“무슨 선물?”
황제의 이런 반응에 마하의 눈시울이 당장 울음을 터뜨릴 듯 떨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갑자기 카렐의 어깨를 양 손으로 마구 때리며 앙앙거렸다.
“보름 전이 제 생일이었다고요, 저 오팔 팔찌 사주기로 했잖아요. 너무해요.”
“아아, 그랬던가?”
카렐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마하는 보는 사람이 민망할 만큼 서럽게 울며 카렐의 등짝을 마구 때렸다.
카렐이 아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면 구두는 안 줄 거다.”
그제야 거짓말처럼 울음을 뚝 그친 마하가 눈물을 잽싸게 닦으며 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샀어요? 무슨 색깔인데요?”
“글쎄다, 오팔 팔찌랑 맞춰 샀으니 받거든 그때 보렴.”
“지금 줘요, 지금 신어볼래요.”
“안 돼, 셔틀에서 안 가지고 나왔으니까 수베르 가면 주마.”
“아잉, 지금, 지금, 지금.”
“황상께서도 피곤하신데 대군은 그만 좀…….”
옆에서 보다 못해 무어라 잔소리를 하려는 베아트릭스에게 카렐이 괜찮다며 손짓을 했다.
“수베르로 가는 동안 내 함교를 지키고 있을 테니 비빈들께선 각자 처소에서 쉬시구려. 주페와 마리안이 고생을 많이 했으니 황후께선 둘이 황자다운 모습으로 내릴 수 있게 쉴 수 있도록 챙겨 주시고요. 내 5분 이따가 마하도 보내주겠소.”
목에 마하를 매단 채 평소처럼 함교로 올라가려는 황제에게 아메스가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피곤한 건 폐하시지요.”
아메스는 가디언 팔찌가 부서져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카렐의 손목을 살며시 붙들었다.
“한 달이나 고생하셨는데 오늘만이라도 함교 가시지 말고 선실에서 쉬세요.”
아메스가 카렐의 손목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눈 달린 성인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그의 간절한 눈빛에 카렐이 멈칫거렸다.
황제의 팔을 만지작거리는 황후를 힐끔 보았던 마하가 뾰로통해진 얼굴로 카렐의 목을 더 찰싹 끌어안았다.
“황자들은 그럼 저희가 돌보지요.”
베아트릭스가 얼른 나서서 주페의 손을 잡았다. 주페의 눈짓을 받은 티틀이 망아지처럼 로비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의전대 병사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마리안을 가까스로 붙들어 질질 끌고 왔다. 주페가 버둥대며 도망가려는 천방지축 막내의 뒷덜미를 꽉 붙들고는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황빈한테 호드르의 전투 이야기 들을래요. 9시간이나 걸린다는데 몸단장은 다 가서 해도 될 것 같아요.”
난처해진 카렐이 다시 아메스의 눈빛을 보았다. 가족이 탄 프리깃 함교는 반드시 스스로 지켜 왔었지만 그리도 냉담했던 황후가 모처럼 몸단장까지 하고 자신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긴, 퀭한 황제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을 건 없지.”
손목을 잡아 끄는 아메스의 간절한 눈빛에 카렐은 결국 함교 쪽에서 특등 선실이 있는 곳으로 슬쩍 돌아섰다. 하지만 마하는 그때까지도 카렐의 목을 안고 매달려 있었다.
“마하, 내려와. 너도 나하고 가자.”
주페가 동갑내기 누이동생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지만 마하는 못 본 척 아예 눈까지 감아버리고 카렐의 품에 매미처럼 찰싹 매달려 있었다. 어쨌든 5분을 약속한 카렐은 하는 수 없이 팔에는 마하를 안고, 다리는 아메스와 함께 선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를 따라가는 에스더의 얼굴은 웃음을 참느라 빨갛게 변해 있었다.
“먼저 가 있을 테니 놀아주시고 5분 후에 오세요.”
결국 아이에게 두 손을 들었는지, 아메스가 황제를 놓아둔 채 특실이 있는 위층으로 황황히 사라져 버렸다.
카렐은 복도 중간에 멈춰 선 채 그런 황후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카렐은 맞쥐고 있던 손가락 사이를 만져보았다. 평소 차고 건조하던 아메스의 손이 뜨겁고 땀도 그득했다.
카렐이 뒤따르던 시종장을 가까이 불러들여서는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황후 건강에 혹 문제라도 있나? 몸 상태도 안 좋아 보이고 손에 상처도 있던데?”
“아뇨, 지난밤 폐하 침대에서 잘 주무셨고 수라도 잘 드셨습니다. 손은……서류 작업을 하다가 송곳에 찔리셨다 들었습니다.”
“내 침대에서 황후가?”
카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 힘들게 했나…….”
카렐은 우울증까지 있는 황후에게 내심 미안한 마음에 혼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팔에 안긴 마하가 빤히 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시계를 보았다. 아직 마하를 안고 있어야 할 시간이 한참 남아있었다. 카렐은 아메스와 꼭 맞쥐고 있었던 축축한 손바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카렐을 놓아둔 채 특등 선실에 돌아온 아메스는 방에 들자마자 벽에 기대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함께 온 시녀장이 힘들어하는 그에게 힘을 주려는 듯 어깨를 꼭꼭 주물러 주었다.
“잘 하셨습니다. 절반은 되었네요. 나머지만 잘 하시면 됩니다.”
짧은 연극만으로 기진맥진해진 아메스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람처럼 숨을 고르며 물 한 모금을 벌컥 들이켰다.
시녀장이 불안해하는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곧 황상께서 오실 겁니다. 평상시처럼 맞아 주셔야죠.”
아메스는 숨을 고르고 방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운명이 결정될 특등 객실의 풍경이 들어왔다. 넓은 객실 중간엔 보랏빛 커튼과 속이 비치는 레이스가 드리운 큰 침대가 있고 안쪽엔 반투명한 유리로 막힌 욕실 문이 보였다. 아메스는 침대 머리맡의 큰 창을 내다보았다.
“돌아갈 길도 없군.”
프리깃이 워프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별들의 모습이 긴 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젠 돌릴 길 없는 반역의 급류에 몸을 던져놓은 셈이었다.
“침대 옆에 독한 포도주와 잔 두 개를 마련해 놨습니다. 완전히 맘을 놓으신 것 같으면 그때 권하세요. 맛으로 느껴지는 것보다 도수가 훨씬 강해서 바로 잠이 들 겁니다. 그리고 잠든 거 확인하시면…….”
시녀장이 치맛단 속에서 희고 뾰족한 물건을 꺼내 내밀었다.
“그래, 까짓 거, 마지막으로 즐겨야지.”
아메스가 입술을 야무지게 다물며 시녀장이 내민 뼈칼을 받아들었다. 동물의 뼈를 손으로 갈아 만든 이 단검은 고작 손가락 길이 정도의 작은 날을 품고 있지만 최대한 상처를 크게 낼 수 있도록 톱날 돌기가 양쪽에서 무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꽂은 채로 놔두시면 지혈이 되어 바로 죽지 않을 수 있답니다. 손목을 관통할 만큼 힘껏 꽂았다가 다시 빼내서 조직을 완전히 망가뜨리셔야 합니다.”
“알아.”
단검을 받아든 아메스는 침대로 다가가 베개 커버 안에 깊숙이 감추었다. 그리고는 곧 황제의 관이 될 화려한 비단 침대 위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황상께서 드십니다.”
루스탐의 목소리에 아메스가 문 쪽으로 휙 돌아섰고, 시녀장도 얼른 선실의 구석으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루스탐이 눈치껏 밖으로 사라지면서 방 안에는 황제와 황후, 그리고 관례적으로 황제의 잠자리를 지키는 시녀장만 남았다.
“폐하.”
아메스가 얼른 표정에 웃음을 씌우고는 사뿐사뿐 다가가 황제를 맞아주었다. 마하를 떨궈놓고 온 황제는 선실에 들자마자 그의 귀에 대고 장난스레 속삭였다.
“이거 아홉 시간이 너무 짧으면 어쩌지요?”
아메스가 카렐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더도 말고 딱 한 시간만 뜨겁게 안아주면 돼요.”
“탄광에서 나와 아직 목욕을 못 해서 씻어야 할 것 같은데. 시녀들을 불러서…….”
“제가 직접 씻어 드리면 되죠.”
아메스가 노골적으로 눈웃음을 짓는 모습에 카렐도 전혀 의심 없이 뒤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황제의 목욕 수발은 원래 시녀들의 일이다보니 황후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씻지 않은 황후의 체취 그대로가 더 짜릿한데.”
황제의 속삭임에 아메스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시녀장 자넨 들어가 있어.”
“필요하면 아무 때나 부르시옵소서.”
시녀장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커튼이 쳐져 있는 구석의 자그만 밀실로 재빨리 물러났다. 시녀들이 황제의 잠자리를 지키도록 만들어진 손바닥만한 공간이었다.
“저기선 제가 봉사할 테니 나오면 절 즐겁게 해 주셔야 해요.”
아메스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황제의 버클을 끄르며 욕실로 사라졌다.
시녀장은 밀실에 혼자 앉아 이번 계획만 계속 곱씹고 있었다. 잠시 후, 욕실 안에서 물 텀벙거리는 소리와 황제의 낮은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황제를 자극하는 아메스의 웃음소리와 교태 섞인 신음소리도 뒤엉켜 나왔다. 황후의 ‘봉사’에 황제가 꽤나 만족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러고 가면 서럽지는 않겠네.’
커튼 틈새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시녀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시계를 확인한 그는 할룩스를 켰다. 아직 통신은 정상이었다. 그는 ‘계획대로 진행 중. 준비할 것.’이라는 짧은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주머니에 감추었다.
황제와 황후의 목욕은 평소보다 길었다. 시녀장은 행여 황제가 황후에게서 다른 남자의 냄새를 맡지나 않을지 속이 바싹바싹 탈 지경이었지만 정작 황후는 욕실에서 황제와 끝도 없이 노닥거리며 지난 한 달간의 한풀이를 다 하는 모양이었다.
한참 후, 큰 수건을 몸에 둘둘 두른 아메스가 황제의 손을 이끌고 욕실에서 모습을 나타내자 시녀장이 바싹 긴장해 커튼 틈으로 눈을 내밀었다.
아메스가 커튼을 걷고 침대 위에 드러누우며 황제에게 손을 뻗었다.
“이젠 제가 받을 차례라고요.”
카렐이 뒤따라 침대에 올라 아메스 위에 몸을 기울이며 그의 몸에 두른 수건을 확 풀어버렸다.
‘어, 저년이?’
당황한 시녀장이 얼른 시계를 보았다. 약속대로라면 아메스는 황제의 애만 계속 태워야 하고 몸을 내어주어선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예민한 황제가 바로 3, 4일 전 다른 남자와 살을 섞어 달라진 황후의 체취를 눈치라도 챘다가는 일이 다 깨칠 판이었다.
‘안되겠군.’
급해진 시녀장은 의자 옆 선반에 놓인 구급상자를 슬쩍 밀었다. 거의 가슴 높이에서 떨어진 금속 상자는 단단한 선실 바닥에 부딪치며 찢어지는 소음을 냈다.
“엇.”
황제가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 침대맡의 칼을 집어 아메스의 앞을 막았다. 그와 함께 황제와 황후의 짜릿한 순간도 산산조각이 났다.
“죄송합니다. 졸다가 떨어뜨렸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시녀장이 얼른 커튼 밖으로 나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뭐냐.”
맥이 빠져버린 카렐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칼을 다시 집에 넣었다.
“됐다, 부를 일 없을 테니 넌 가서 그냥 자.”
황제는 칼을 도로 베개맡에 내던지며 시녀장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황제의 뒤에 숨었던 아메스는 슬쩍 눈짓을 보내며 커튼 뒤로 사라지는 시녀장의 모습에 부르르 떨었다. 그는 침대맡 선반의 시계를 보았다. 약속했던 시간이 이미 넘어가 있었다.
“저 아직 안 식었어요.”
아메스가 카렐을 뒤에서 살짝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그리고는 아이를 눕히듯 그를 자리에 편안하게 눕혀주고는 그의 가슴 위에 몸을 실었다.
“딱 한 모금만 마시고 제 앞에서 괴물이 되어 봐요.”
아메스가 포도주병을 따는 모습에 카렐이 피식 웃었다.
“내 술 먹고 미쳐 날뛰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오늘은 괴물의 노리개가 되어도 좋은데.”
독한 포도주를 병째로 입에 벌컥 들이부은 아메스는 밑에 누운 카렐의 입술에 바로 가져갔다. 카렐도 자연스럽게 입을 벌리고 쌉쌀한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술맛을 느낀 카렐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다. 아메스가 입술을 떼었을 때, 카렐의 눈은 이미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이 술 좀 독하네.”
카렐이 깊은 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괴물이 되기는 고사하고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고 있었다. 아메스가 그런 카렐의 위에 몸을 기울이며 뺨을 다정히 매만졌다.
“별로 안 독한 건데, 피곤하셨나봐요.”
“그래도 황후 안아주는 정도는…….”
카렐이 무거운 눈동자를 껌벅거리며 억지로 아메스의 허리를 안으려 했지만 결국 그의 큰 두 손도 바닥에 툭 떨어졌다. 전장에서 수백 수천의 목숨을 도륙했던 그였지만 술기운으로 천근만근 무거워진 눈꺼풀과 황후의 따뜻한 손길은 당해내지 못했다.
그는 푹신하고 부드러운 비단 시트 위에 벗은 몸을 털썩 뉘이고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후, 이게 아닌데…….”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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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에서 며칠간 평점 1점 폭격을 당했습니다. 평점 1점을 만점이라고 오해하신 분께서 실수하신 것이라 혼자 자뻑중입니다.
움하하........~( '')~;;;;
*추천과 코멘트는 독자와 작가의 유일한 피드백 수단입니다. 작가의 의욕을 고취시켜 주시면 안 나올 글도 더(???) 나옵니다. 추천이든 코멘트든 높은 평점이든 발자국 한 번 남겨주고 가시는 분들께 꽃비 한 움큼 뿌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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