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87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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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의 11번 탈출정 앞에 ‘진홍 망토를 입은 아메스’가 다가가고 있을 때, 이부대신 볼토 트라우제는 의전대장과 함께 함교에서 보안카메라를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프리깃의 함교는 그에게도 아주 낯선 공간은 아니었다. 먼 옛날 보따리장사와 종군 상인으로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크고 작은 셔틀과 민간용, 군용 함선은 다 타 봤고 지금은 사업을 위해 딴 수송선 면허까지 갖고 있었다. 그가 이번 계획을 주도해서 짤 수 있었던 것도 함선에는 나름 박식하다는 자신감 덕분이었다.
‘재무대신만 시켜줬어도…….’
볼토는 혼자서 이런 식으로 몇 번이나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사실 그가 맡은 이부대신은 황실의 5부 대신 중에서는 가장 별 볼일 없는 자리였다. 이부의 일이래야 황실 행사와 황궁 관리, 운영을 담당하고 공부(公簿) 기록을 관리하는 것이다보니 그의 권력은 황실의 안방 문턱 이상을 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사업가 경력을 앞세워 힘 있는 재무대신이나 공부대신 자리를 간절히 원했지만 황제는 ‘사업가는 한쪽 눈으로밖에 정책을 못 본다.’며 사업가 출신에겐 경제정책에 관련된 직책을 절대 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황제는 사업가가 정치와 손을 잡을 때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부정부패를 더 염려하는 듯했다.
“도착했군.”
볼토가 화면 구석을 응시했다. ‘아메스’가 탈출정 판넬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함교 중앙의 총괄 제어석에 앉아있는 함장에게 다가가 슬쩍 귀띔을 했다.
“준비해라.”
지시를 받은 함장은 화면 속 ‘아메스’가 입력해 넣는 12개의 숫자를 유심히 관찰하며 자신의 앞에도 조심스레 함께 입력해 넣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숫자를 넣는 순간, 뒤따라 넣고는 그가 [확인]을 누르기 직전, [외부 통신 차단] 명령을 입력했다.
“성공입니다.”
긴장했던 함장의 입가에 짧게 웃음이 번졌다. 몇 초 후, ‘아메스’가 탈출정 문을 열면서 함선 전체에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지만 이제부터 이곳의 상황은 더 이상 황궁이나 수베르의 본부에는 전달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함교에 있던 2명의 승무원들은 통신 두절이라는 경보에 영문을 몰라 우왕좌왕거리기 시작했다.
“함장님, 외부 통신이 이상…….”
함장 쪽을 막 돌아보려던 무선사는 목에서 번쩍 하는 칼날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크게 열린 눈은 영영 감기지 못했다.
“뭡니까!”
동료의 비명소리에 벌떡 일어나던 항해사도 살인 훈련을 받은 의전대 장교의 단단한 팔뚝에 그대로 목이 뒤로 뒤틀리며 숨이 끊기고 말았다. 함교를 지키고 있던 의전대 경호원들은 볼토의 지시에 따라 그들의 시체를 내던지고 얼른 뒤로 물러났다.
“이제 진정시켜야겠군.”
12자리 비밀번호로 함선의 최고권한을 획득한 함장은 함교를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경보 시스템을 수동으로 완전히 꺼 버렸다.
“함장이다, 방금 전 비상경보는 기기 오작동이니 해제한다. 알린다. 비상경보를 해제하니 모두 위치로 돌아가라. 각실 점검에 들어갈 예정이니 각자 지정된 객실에서 나오지 마라. 허락 없이 나와 복도에 돌아다니는 자는 체포한다. 오류 확인하는 동안 유선을 제외한 프리깃 내외의 무선통신은 모두 차단한다.”
프리깃 곳곳에 설치된 보안카메라로 짧은 비상경보에 놀라 뛰어나왔던 승무원과 시종들 대부분이 짜증을 내며 되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 경보음을 신호로 탈출하라는 지시를 미리 받아놓았던 교단 프락치들과 이번 음모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한 자들은 돌아가지 않고 하나 둘 미리 약속해 놓은 각 층의 탈출정 부근으로 모이고 있었다.
황제에 충성했던 자들과, 아닌 자들이 비로소 완벽하게 구분되는 순간이었다.
“잘 되어갑니다.”
함장은 마지막으로 자동비행 궤도 데이터를 ‘이탈하도록’ 새로 고쳐 넣기 시작했다. 이젠 프리깃은 그들의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그들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볼토가 함장에게 물었다.
“궤도 이탈해서 폭발할 때까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지?”
“40분 정도입니다만 탈출정이 함께 딸려가 이탈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30분 이내엔 여기서 탈출해야 합니다.”
좌표를 넣은 함장은 이번엔 탈출 시스템을 불러냈다. 그곳엔 이 프리깃에 설치된 탈출정들과 그 앞의 광경이 나타나고 있었다. 2대의 탈출정 앞에 각각 2, 30명씩 사람들이 모여 서성대고 있었다. 볼토가 명단에서 재빨리 그들을 확인했다.
“염병할 황후 그년이 아침에 인원을 더 태워서 탈출시킬 놈들도 덩달아 늘어났잖아.”
볼토가 머릿수를 세며 짜증을 냈다. 이번 반역과 교단의 조력자들을 이 프리깃과 함께 저승으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차로 탈출할 사람은 52명이니 대충 다 모인 것 같군.”
화면에 보이는 사람들 중에는 간부급 시녀나 시종들이 절반 이상이었고, 비서실이나 내각 고위직 사람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구석진 한쪽에는 유난히 덩치가 큰, 유학자라면 누구나 알 눈에 익은 사내와 그 일가 서너 명이 누군가에게 띄어선 안 되는 사람마냥 안절부절 못 하고 모여 있었다.
“1차로 저 사람들 내보내고 2차로 의전대들하고 황후 내보내면 다 끝나. 나머지는 황제 편들이니까 싹 다 보내야지. 황후하고 같이 가려면 나도 슬슬 11번 탈출정 쪽으로 내려가야겠다.”
그때, 방금 항해사의 목을 비틀어 죽인 의전대의 여자 장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어깨에는 의전대장을 뜻하는 금색 사슬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황후를 꼭 데려가야 합니까? 우리 계획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차라리…….”
“말버릇부터 고치게, 평상시에 입 험악하게 굴렸다간 나중에 큰코다쳐, 파냐드 리쿠 중랑장.”
원로 대신의 경고에 그 황족 출신 여자 무장은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다.
“황후가 없으면 세네피스 황태후가 섭정이 되는데 설마 그걸 원하는 건 아니지? 황후가 맘에는 안 들지만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야.”
이번엔 함장이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전 어떡합니까?”
“자네는 의전대 군복 빌려줄 테니 그거 입고 빠져나가. 일단 구출되면 우리 사람들이 자넬 슬쩍 빼 줄 테니까 돈 다 챙겨서 가족들 데리고 어디 조용한 데로 가면 돼.”
함장은 목이 베인 채 함교에 쓰러져 있는 두 간부선원들을 보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들은 조금 먼저 죽었을 뿐 어차피 프리깃을 움직이는 휘하 승무원들 모두가 승객들과 함께 이곳에 남아 떼죽음당할 운명이었다.
“저희 프리깃 애들은…….”
“쓸데없는 생각 말고 포기해.”
볼토의 단호한 대답에 함장은 하는 수 없이 탈출정 출입문 잠금을 풀었다.
“탈출정 문 엽니다.”
탈출정 앞에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던 사람들은 출입문에서 파란 불이 켜지자 일제히 문을 비틀어 열었다. 30여명이 탈 수 있는 탈출정은 따로 추진장치도 없이 그저 구조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생존수단만 있는 밀폐된 정방형의 금속 상자였지만 그들은 당장 프리깃이 폭발하기라도 할 듯 탈출정 안으로 앞 다투어 들어갔다.
혹시나 못 빠져나갈까 잔뜩 긴장하고 있던 그들은 탈출정 좌석에 앉아 문을 안에서 잠그고서야 비로소 안도하는 표정으로 미뤄놓았던 깊은 숨을 내쉬었다.
52명의 탑승의 완료되자 함장이 탈출정들의 출입문 잠금을 확인했다.
“탈출정 2개 1차 이함(離艦)합니다. 튕겨나갈 땐 충격이 있을 수 있으니 벨트와 머리받침 단단히 고정하십시오.”
함장은 안전장치를 열고 스위치를 신중하게 눌렀다.
“움?”
함장의 턱에 핏줄이 곤두섰다. 2개의 탈출정 모두에서 나갔다는 신호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보안카메라 화면에 나타나는 탈출정 문 앞 판넬에도 그 너머 탈출정이 함선을 떠났음을 뜻하는 붉은 등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함장은 다시 탈출정 이함 스위치를 눌러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무슨 일이냐?”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감을 눈치 챈 볼토가 눈을 흘겼다. 당황한 함장은 이탈 버튼을 몇 번이나 거듭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당황한 그가 다른 화면을 보았을 때, 그곳엔 [권한 없음] 이라는 표시가 나오고 있었다.
“이상합니다, 분명 비밀번호를 넣었는데.”
얼굴이 파랗게 질린 함장은 방금 ‘아메스’가 입력했던 12자리 비밀번호를 서둘러 다시 입력했다.
- 비밀번호 오류 -
“이씨!”
신경이 곤두선 함장이 주먹으로 계기판을 쾅 쳤다. 방금 전 분명 작동했던 비밀번호가 이젠 먹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당황하고 있던 함장의 코앞에서 갑자기 함내 보안카메라 화면들이 일제히 꺼져버렸다. 동시에 반란 세력의 눈도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비밀번호도 바꾸고 보안 시스템도 통째로 꺼버렸습니다!”
함장의 비명 비슷한 소리가 울렸다. 바로 그때, 제어 판넬에 ‘11번 탈출정 이함’ 이라는 메시지가 뜨고 있었다. 함선의 스캐너 화면엔 함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11번 탈출정의 모습이 멀리 스페이스 상에 점처럼 깜박거리고 있었다.
“뭐야? 황후 혼자 도망친 거야?”
눈앞이 캄캄해진 볼토가 비명 비슷하게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함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젠장, 탈출정 전체에 수동 이함도 못 하게 죄다 락을 걸어버렸습니다. 문도 못 엽니다. 어떡하죠?”
“황후도 도망갔는데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비밀번호 아는 놈도 없잖아!”
공포에 사로잡힌 볼토의 목소리가 커졌다. 비밀번호가 바뀌어 이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탈출하는 줄로 알고 탈출정에 올랐을 50명 넘는 교단과 반역도 패거리들도 꼼짝없이 통조림처럼 갇혀 오도가도 못 하게 된 판이었다.
함장이 그제야 이마를 탁 쳤다.
“프리깃 중앙에 있는 지휘소가 유사시엔 함교 역할을 대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함장이 볼토를 빤히 올려보았다. 프리깃의 정중앙부, 2층부터 6층까지 5개 층을 꿰뚫고 만들어진 거대한 지휘소는 황제 전용 프리깃에만 있는 특별한 시설이었다. 유사시에 황궁을 떠난 황제가 전군을 지휘하고, 제국 전역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받고 지시를 내릴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이 총집결되어 있었다.
“거긴 전시에 군함으로 쓸 때만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황후가 거기에 미리 심복을 숨겨놓았다가 혼자만 탈출하려고 비밀번호를 바꿔버린 게 분명합니다.”
“거길 지금 들어갈 수 있어? 평상시엔 폐쇄해 놓잖아!”
“3층과 6층 출입문은 안에서 수동 자물쇠로만 잠그는 강철문이지만 4층과 5층은 관리를 위해 자동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알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없다. 바뀐 비밀번호 당장 알아내지 못하면 다 죽어!”
볼토가 창백해진 얼굴을 감추며 짐짓 침착하게 파냐드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부하들 보내서 지휘소 차단하라고 해. 비밀번호 바꾼 놈이 도망치면 안 된다. 당장 외부 통신 다시 열어서 바깥에도 일이 꼬인 걸 알려야 해!”
볼토의 명령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파냐드는 이미 지휘소 쪽을 지키는 분대장에게 비상용 유선망으로 연락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일단 봉쇄하라고는 했는데 가서 잡아야지요. 황빈과 태자들도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태자를 인질로 비밀번호를 말하라고 협박하면 될 겁니다.”
“함선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할 테니 내가 태자와 옹주를 붙잡아 뒤따라가마. 황빈은 위험하니 죽이는 게 낫겠다.”
경호원 둘에게 함장을 감시하라고 눈짓을 한 볼토가 서둘러 함교 밖으로 나섰다. 그곳엔 정말로 나쁜 마음으로, 혹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직속상관의 명을 따라 이번 일에 몸담게 된 의전대 정예 경호원 50여명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말고 또 50여명은 프리깃 곳곳에 흩어져 중요한 지점들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모두가 귀족가문 출신에 웬만한 정규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예병들이었다.
파냐드가 부하들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프리깃에 반역도당들이 탄 것 같다. 20명은 당장 날 따라오고, 10명은 이부대신님을 따라가라. 나머지는 함교에 아무도 접근 못 하게 지키고 있어.”
‘반역도당’이라는 말이 무얼 뜻하는지 눈치를 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이해한 자들 모두의 표정이 흙빛이 되었다. 20명의 정예병을 거느린 파냐드 리쿠 중랑장은 프리깃 심장부에 있는 지휘소로, 볼토는 베아트릭스가 황제의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특등 객실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7층의 함교에서 6층의 특등 객실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길목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이 볼토에게 꾸벅 인사를 해 보였다. 그는 고급스런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성큼성큼 지나 베아트릭스가 있을 3호 특등실 문을 확 열었다.
“황빈 마마!”
거친 고함을 지르며 뛰어든 볼트는 방 안의 풍경을 본 순간 멈칫했다. 텅 빈 방에는 베아트릭스도, 세 황자들도 없었고 멍한 얼굴로 얌전히 있는 시녀와 시종들뿐이었다. 옆방을 확인한 경호원이 헐떡거리며 달려와 외쳤다.
“귀인 마마도 안 계십니다!”
“씨이, 이것들이 대체?”
볼토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상급선실이 있는 6층 전체는 누구도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도록 완벽히 폐쇄되어 있었으니 그들이 빠져나갔을 리가 없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경호원에게 멱살이 잡힌 시종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어, 황자님들은 로비에서 황상을 맞은 후엔 6층에 안 돌아오셨습니다. 황빈께선 투창 연습을 하시겠다면서 무기를 챙겨서 아래층으로 가셨고요.”
“뭐어?”
머리가 띵해진 볼토가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빌어먹을! 당장 선실이라는 선실은 다 뒤져! 비빈들하고 황자를 당장 내 앞에 끌고 오란 말이다!”
황제 가족들을 놓치고 당황한 볼토가 선실들을 뒤지고 있는 동안, 파냐드 리쿠 중랑장은 ‘함교 행세를 하고 있는’ 지휘소를 장악한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잡기 위해 광분하고 있었다.
“지휘소 출입문은 4층과 5층에 각각 하나씩 있다. 내가 5층으로 진입할 테니 너희 1분대는 4층을 차단하고 있어라.”
투구를 막 눌러쓰려던 파냐드는 귀 밑을 만지작거렸다. 그곳엔 한때 그의 자랑이었던 원형의 황족문이 만져졌다.
“파냐드 군(君).”
파냐드가 입을 삐죽거렸다. 에르네스토의 서손녀(庶孫女)인 그는 2차부터 5차 혼란기까지 모두 참전했던, 근위대에서 나름 알아주는 장교였다. 그와 그의 가족은 사촌언니 유평과 당질 오넬론이 황제로 있었을 때만 해도 풍광 좋은 4번 도시에서 수백의 노예로 운영되는 대농장을 운영하며 누구보다 풍요롭게 살았었다.
사실 그에게 농장 운영은 간판에 불과했다. 그의 가족 모두는 두둑한 황족연금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오넬론 황제 말기 곤궁해진 빈민들에게 힘으로, 혹은 회유로 헐값에 사들인 주택과 토지는 새 황제가 오르고 정국이 안정되면서 바로 금값이 되었다. 거기에 노예가 낳은 아이들을 시장에 내파는 것도 짭짤했다.
농장은 어차피 노예와 토지를 합법적으로 소유하기 위한 수단이다 보니 잡초가 자라건 홍수로 초토화되건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도리어 전쟁이나 기근 때처럼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커지는 때가 그에겐 재산을 늘리는 기회였다.
그렇지만 카렐의 개혁으로 낙원은 지옥이 되었다. 노예 아이들을 강제로 부모와 떼어 팔 수도 없게 되었고, 농장 명의로 사 놓았던 금싸라기 토지는 황실의 주거 토지 국유화에 본전만 겨우 건진 채 빼앗겼다. 설상가상으로 황족연금 지급 대상도 ‘현 황제의 4촌 이내’로 줄면서 한때 호사의 극치를 달리던 그도 그저 평범한 농장주로 주저앉았다.
그래도 터 좋은 대농장이 손에 있으니 웬만큼 사는 것엔 문제가 없었지만 황족의 화려한 삶에 익숙해진 가족들에겐 평범한 농장 지주의 삶은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농장 수입만으로는 절대 이전처럼 살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농장을 남편과 아이들에게 맡긴 채 군대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름을 물려준 증조모를 전혀 닮지 않은― 크고 당당한 체구와 반반한 용모, 황족이라는 간판으로 나름 편하다는 의전대장을 맡았지만 자신을 그렇게 만든 황제를 빛내주어야 하는 악세사리 역할은 정말로 혐오스러웠다. 행복을 모조리 빼앗아간 황제만 제거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참에 내전이라도 일으켜 피바람의 와중에 큰 기회를 낚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기꺼이 팔아버릴 참이었다.
“지휘소에 누가 있건 죽여선 안 된다. 반드시 비밀번호를 알아내야 한다. 알겠나?”
파냐드가 뒤따르는 병사들에게 굳은 어조로 일렀다. 계단을 후다닥 내려가던 파냐드의 눈에 복도 모퉁이 너머에서 흘러나온 붉은 액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놈이냐.”
시체 앞에 선 파냐드가 이를 갈았다. 이곳의 시체는 약간의 몸싸움을 벌인 흔적이 있었고 칼로 목을 여러 번 벤 흔적이 있었다. 통신이 끊긴 상태라 공격을 당하면서도 위에 알리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전문가 솜씨는 아니다. 암살수나 특수요원은 아닌 것 같다.”
칼을 빼든 파냐드가 이를 갈며 지휘소 입구로 향했다. 지휘소의 5층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문을 가리키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안에서 잠겨 있습니다. 배신자가 안에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저희가 지키고 있었으니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파냐드가 얼굴을 찡그리며 절단기를 갖고 뒤따라온 부하에게 물었다.
“열 수 있나?”
“강철 보강문은 전시에만 달게 되어 있어서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뭐 해? 당장 시작하지 않고?”
파냐드가 짜증을 내며 문을 가리켰다. 3명의 병사들이 잠긴 지휘소의 문에 달라붙어 틈새를 절단기와 용접기로 녹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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