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88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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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좌표까지는 못 고치겠습니다.”
지휘소의 임시 함교에서 좌표와 씨름을 하던 베아트릭스가 난감한 얼굴로 지휘소 6층 부근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화면을 올려보았다. 그곳엔 여전히 ‘좌표 데이터 없음’을 알리는 경고 화면이 깜박이고 있었다.
유사시에 황제가 전군을 지휘하는 이 지휘소는 프리깃 중앙부의 2층부터 6층까지, 층수로는 5개이지만 2층과 3층의 층고를 생각하면 웬만한 건물 7, 8층의 높이를 관통해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공간이었다. 지휘소 외곽에는 5층으로 구획된 여러 용도의 사무실들이 빙 둘러 있지만 핵심적인 시설은 정중앙의 거대한 오벨리크스였다.
오벨리스크에는 꼭대기의 황제석부터 그 밑의 임시 함교, 그 밑으로 또다시 각군 지휘관과 행정관들의 발코니가 고리처럼 밑으로 겹겹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공중에 드리운 수십 개의 철제 다리들이 이 발코니들과 외곽 사무실들을 연결하며 거대한 중앙 신경망을 완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거대한 두뇌는 텅 비어 있고, 사람도 오벨리스크 꼭대기 부근의 함교 테라스에 서성대는 두 여자들뿐이었다.
“어떻게 좀 해 봐!”
피 묻은 칼을 쥐고 베아트릭스 뒤에서 지켜보던 아메스가 버럭 짜증을 냈다.
“아니, 자네 물리학 박사 아니었어? 물리학 박사가 모르면 누가 알라고?”
“전 탄도학자지 항공물리학자가 아니라고요! 이런 건 공부해 본 일도 없습니다!”
“내가 뭐 복잡한 워프 계산을 시킨 게 아니잖아? 그냥 목표 좌표만 처음 출발할 때 것으로 돌려놓으면 된다고!”
“그게……비밀번호가 바뀌면서 이전 좌표 데이터가 보안을 위해 자동으로 삭제되던가 감춰진 것 같습니다. 워프좌표 계산할 줄 아는 전문 항해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베아트릭스의 난감해하는 모습에 더 난감해진 건 이번 상황을 모두 계획했던 아메스였다. 미처 생각 못한 오류 때문에 믿었던 베아트릭스가 작업을 못 끝내면서 계속 귀한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다 하면 프리깃이 정말로 궤도에서 벗어나 모두 끝장이 날 판이었다.
“아마 놈들이 이미 눈치 채고 여기 오고 있을 거라고! 여기로 그놈들 들어오면 우리 둘 다 끝장이야!”
“좌표를 못 돌려도 끝장이긴 매한가지죠. 그땐 다 죽습니다.”
“그럼 어쩌라고?”
두 비빈들은 서로 난감한 표정을 마주한 채 잠시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떻게 해 보죠.”
베아트릭스가 한숨을 내쉬며 다룰 줄도 모르는 기계에 다시 달라붙었다.
한 시간 전, 이곳으로 옮겨 탄 황제가 황후와 함께 선실로 올라간 후, 그는 에스더와 황자들을 데리고 따로 선실로 올라가던 참이었다. 그 중간에 난데없이 티틀에게서 ‘중요한 것’이라며 쪽지를 건네받은 베아트릭스는 처음엔 이 시종이 반쯤 미친 것 아니냐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혹시나 하는 의심으로 바뀌었고, 티틀이 손바닥에 깨알같이 써 놓았던 비밀번호를 본 순간 베아트릭스도 일단은 그 시종의 쪽지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뒤따르는 시종과 시녀들을 먼저 선실로 보냈고, 에스더와 아이들은 2층의 빈 선실로 핑계를 붙여 내려 보낸 후 속는 셈 치고 혼자 지휘소로 올라와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티틀, 혹은 황후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휘소 입구를 지키는 경호원과의 싸움으로 얼굴과 손이 피투성이가 된 채 함교를 혼자 지키고 있는 황후의 모습에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대충 황후의 계획대로 되었지만 제일 중요한 일―함장이 넣은 궤도 이탈 좌표를 안전한 좌표로 되돌리는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엇.”
때마침 울린 경보음에 베아트릭스가 다시 공중의 화면을 돌아보았다. 밖에서 누군가 4층과 5층 출입문을 ‘공격’하고 있다는 붉은 등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감시 카메라 화면을 확인해 보니 열릴 수 있는 문 두 개 모두가 십여명쯤 되는 의전대 경호원들 손에 바깥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이번엔 또 한쪽에서 [20분후 궤도 이탈]을 알리는 붉은 등이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탈출정에 오도가도 못하고 갇힌 반역자들은 공포에 떨고 있을 테고, 수백의 대다수 승객들은 다가오는 위험도 모른 채 각자의 선실에서 곯아떨어져 있을 터였다.
“저놈들이 비밀번호를 알아선 안 돼.”
아메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저들은 일당들이 탄 탈출정을 내보내기 위해 광분을 하고 있을 테지만 아메스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외부에 도움을 구하려 통신을 열 수도 없었다. ‘더 큰 계획’의 성공을 위해선 이 프리깃 내의 진압작전은 외부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용히 벌여야 했다.
원래는 궤도만 바꾼 후 이곳을 나가 다시 황제에게로 돌아갈 참이었지만 이젠 그 계획도 불가능해 보였다.
“애당초 무리였나…….”
막막해진 아메스가 칼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그간 속고 살아 온 지난 30년을 떠올렸다. 이제 와 돌아보니 누구 하나 제대로 믿을 수 없었고, 최측근까지도 적의 한패거리였다.
이번에도 자신을 문 강아지의 피와 알약을 밖으로 가져나가 분석해보니 시녀장이 자신에게 준 건 우울증 약이 아니고 도리어 감정을 격하게 하는 중독성 마약이었다. 그런 시녀장이 24시간 곁에 있다 보니 누군가를 맘 놓고 만날 수도, 연락할 수도 없었다.
맘 같아서는 시녀장부터 잡아들인 후 이 계획을 세우고 싶었지만 평상시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가는 자칫 의심을 받을 것 같아 그는 철저하게 [약에 중독된 사람 행세]를 해야만 했다. 결국 이번 계획도 군대나 그 어떤 조직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믿을 수 있는 단 세 사람, 티틀과 베아트릭스,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기댈 수 있는 또 한 명에 의지해야만 했다.
“황후 폐하.”
베아트릭스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아메스에게 다시 화면을 가리켰다. 5층 지휘소 문 밖을 보여주는 화면에 반역도 볼토와 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더 합류하는 모습이 보였다. 순식간에 5층 문 밖에는 거의 20명 가까운 반역도당 병사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이제 5층 문이 열리고 그들이 난입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가 있는 오벨리스크의 함교 테라스와 5층 문 사이엔 80척(24m) 깊이의 아찔한 허공이, 그리고 2개의 좁고 긴 철제 다리가 이어져 있었다.
“이대로 당할 순 없지.”
칼을 내려놓은 아메스가 제어판넬에 손을 대고 잠겨 있던 프리깃의 경보 시스템과 방송을 열었다. 그는 방송 지역에서 에스더와 황자들이 있는 2층을 뺀 후 마이크에 대고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제국 황후 아메스 로퍼크 자이센이다.”
아메스의 떨리는 목소리가 구내방송을 타고 프리깃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금 선실에 남아있는 그대들은 황실의 충성스런 신하들임을 잘 안다. 반역도당의 수괴들은 이미 탈출정에 갇혀 있으며, 일부 남은 의전대의 잔당들이 프리깃 곳곳에서 소동을 벌이고 있다.”
아메스는 5층 문 밖에서 의전대 경호원들이 거세게 두들겨 부수고 있는 굉음을 의식하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잔당’이라고 표현했지만 상대는 무려 100여명이나 되는 무장 정예병력이었다.
“지금 반역도당들에 의해 프리깃이 궤도를 이탈했으며 극히 위험한 상황이다. 그런데 의전대의 무리들 때문에 수습이 지체되고 있다. 지금 그대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아메스는 고개를 들고 공중의 화면에 나타난 프리깃 곳곳의 선실 감시 카메라 화면을 눈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충성스런 아랫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을 내심 기대했던 아메스는 절망감에 고개를 저어야 했다.
“이건 말도 안 돼.”
명색이 내명부 수장인 황후가 위험한 상황이라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랫사람들의 반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웠다. 그가 계획에도 없던 150층 신참 시종과 시녀들까지 막판에 무더기로 태운 건 황제가 특별 채용한 노예 2세들과 지난 제위전쟁 참전병 출신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급선실 시종들은 눈만 멀뚱멀뚱 뜬 채 고개만 갸우뚱거리거나 수군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앞장서 나서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간부 내관이나 관료들이 있는 상급선실에서도 누구 하나 바깥 동향을 살피는 기미조차 없었다.
그때, 5층 문 쪽에서 덜크덩거리며 큰 소리가 들려왔다. 잠금장치가 조금씩 녹아내리면서 문이 반쯤 뜯겨나가 있었다. 다급해진 아메스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싸울 능력과 용기가 있는 자들은 밖으로 나와 그들을 사냥해 황상께 충심을 증명해 보여라, 그리고 지휘소 앞을 치고 있는 반역도당들을 없애어 황실을 지켜내라.”
조금씩 침착함을 잃어가는 아메스의 목소리가 다시 선내를 울렸지만 여전히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아랫사람들에게 존경을 못 받아왔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황제와 불화를 빚는 것으로 사방에 소문이 자자한 황후의 말을 목숨 걸고 따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울컥하는 마음을 꾹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들과 대화하거나 돕는 자들은 모두 반역자로 간주할 것이다. 혹 반역 사실을 모른 채 명령에만 따른 의전대원이 있다면 당장 스스로 무장해제하고 위치를 이탈할시 최대한 선처할 것이다.”
아메스는 다시 화면을 확인했다. 여전히 달라진 건 없었다. 심지어 잠시 흔들리는 듯 보였던 문 바깥의 의전대원들도 자기들끼리 워라 수군거리더니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무기력함을 절감한 아메스는 온몸이 발밑으로 빨려드는 느낌이었다.
“이크!”
지휘소를 울리는 굉음에 아메스의 어깨가 들썩했다. 5층 문 밖에서 의전대원들이 잠금장치가 완전히 녹아 떨어진 문을 들이받아 힘으로 부수고 있었다. 저들이 들어왔다간 고작 비빈 둘이 지키고 있는 지휘소의 함교는 끝장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보다 못한 베아트릭스가 아메스에게서 마이크를 넘겨받으려는 그때, 조금 다른 목소리 하나가 아메스에 뒤이어 함 내를 울렸다.
“수고하시었소, 황후. 나머지는 짐이 해결하겠소.”
쇳소리처럼 걸걸하지만 묵직한 힘이 깔린 음성이었다. 이 프리깃에 탄 사람이라면, 아니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폐하?”
아메스와 베아트릭스가 동시에 모니터를 올려보았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짧지만 분명한 한 마디의 위력은 폭발적이었다. 그때까지도 머뭇거리던 하급선실의 시종들이 일제히 쇠막대든 식칼이든 아무 것이나 싸울 도구들을 찾기 시작했다. 노예 2세들과 참전용사들은 그새 철봉으로 만들어진 자신들의 침대를 때려 부수고, 심지어 공구나 청소도구까지 집어들고 선실 밖으로 일제히 몰려나왔다. 그들 중 몇몇은 어디서 찾았는지 어느새 소방용 도끼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바깥에 있는 놈들은?”
아메스는 지휘소 문 밖 상황을 급히 확인했다. 5층 문을 공격하던 경호원도 황제의 목소리에 놀라 하나 둘 머뭇거리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살의에 찬 지휘관과 동료들 사이에서 홀로 나서서 반기를 들지는 못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때, 뻘겋게 달아올라 있던 5층 쪽 출입문 잠금장치가 바닥에 뚝 떨어지며 내는 요란스런 소리가 조용하던 지휘소 안의 공기를 흔들었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베아트릭스가 투구를 꾹 눌러썼다.
“곧 뚫릴 것 같습니다. 피하십시오, 황후 폐하.”
베아트릭스는 함교가 있는 테라스로 들어오는 두 개의 좁은 철제 다리 중 하나를 막아서며 손에 방패와 중투장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런 건 피할 데가 있을 때 하는 말이라네.”
뒤따라 투구를 쓴 아메스도 바닥에 내려놓았던 방패와 피 묻은 투모카프의 시미터를 다시 집어 들고 나머지 다리 앞을 막아섰다. 공중의 화면에서는 [14분 후 궤도 이탈]이라는 붉은 글씨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젠장, 나가는 건 이미 글렀군.”
어둠에 휩싸인 거대한 지휘소 안에선 두 여자들의 거친 숨소리만 가늘게 기류를 흔들었다.
뒤이어 방패를 앞세운 경호원 둘이 지휘소 안으로 우르르 들이닥쳤다.
“황상의 선물이다!”
깜깜한 지휘소로 뛰어든 그들 앞으로 뭔가 시커먼 것이 공중을 휙 가로질러 날아들었다. 처음에 뭔지도 모른 채 멍하니 고개를 들었던 그들은 그 괴물이 코앞에 들이닥치고서야 정체를 깨달았다.
“중투창이다!”
어마어마한 회전력으로 공중을 가르며 날아온 베아트릭스의 강력한 중투창이 선두에서 머뭇거리던 경호원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바로 뒤에 붙어서 따라오던 또 다른 경호원의 목젖 아래를 찢어 즉사시켰다. 선두에서 들어간 동료 둘이 접근도 못 해 본 채 주저앉자 공포에 질린 다른 경호원들이 얼른 난간 밑으로 몸을 낮추었다. 이곳에서 함교로 접근하려면 바닥에서 거의 5층 높이에 걸쳐져 있는 2개의 철제 다리 중 하나를 통과해야 했다.
“제기랄! 황빈이잖아! 최대한 몸 낮춰!”
베아트릭스의 투창 실력을 잘 아는 파냐드가 부하들을 재촉하며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 반대편에서는 아메스가 질세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이놈들! 내가 너희의 직속 지휘관이거늘 지금 뭐 하는 수작이냐!”
파냐드가 난간 위로 슬쩍 고개를 내밀어 양쪽의 다리를 살펴보았다. 왼쪽은 투창을 든 베아트릭스가, 오른쪽은 아메스가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둘 중 주력으로 공격해야 할 쪽은 뻔했다.
“5명씩 나뉘어서 다리를 건너가! 나머지는 훼방꾼들이 못 들어오게 뒤를 지켜! 비밀번호를 알아내야 하니 황후를 죽여선 안 된다.”
철망으로 된 난간에 몸을 바싹 붙인 10명의 경호원들이 아메스와 베아트릭스가 지키는 양쪽 철제다리 쪽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파냐드는 행여 이탈하는 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아메스를 공격하는 자들의 제일 뒤쪽에서 짧은 검을 쥐고 뒤따라갔다. 제일 앞서서 철제 다리에 접어든 병사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다리가 너무 좁아서 웅크리고 지나기 힘듭니다.”
“닥치고 가지 못해.”
파냐드가 으르렁거렸지만 이해 못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철제 다리의 폭은 보안을 위해 딱 한 명만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마주오던 두 사람이 지나려면 옆으로 돌아서서 게걸음으로 지나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면 선두 혼자서 황후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일렬로 철제다리에 접어들었다.
“저것들이!”
베아트릭스가 아메스 쪽으로 움직이는 5명의 경호원들을 노리고 다시 직사로 자리드를 힘껏 날렸다. 근거리에서 날아온 중투창은 단번에 난간의 철망을 찢어내고 그 뒤에서 웅크린 채 나아가던 두 번째 경호원의 허벅지를 북 찢어놓았다.
“아, 아아악!”
다리가 뚫린 경호원이 버둥거렸지만 철망을 뚫은 자리드가 근육에 단단히 박혀 앞으로 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었다. 좁은 다리 중간에서 중상을 입고 말 그대로 꿰어버린 경호원은 뒤에 오는 동료의 진로까지도 완전히 막고 있었다.
“이봐! 빨리 안 따라와?”
제일 앞서서 가던 경호원은 뒤따라와야 할 동료들이 중간에 막혀 버리자 못 오자 당황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아메스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개새끼는 주인이나 알아보지!”
경호원이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황후 아메스가 방패를 앞세우고 무섭게 돌진해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웅크리고 있던 경호원은 막 일어나려다가 그의 방패에 얼굴을 얻어맞고 뒤로 휘청거렸다.
“우읍!”
“네놈은 내 개새끼 밥으로도 아깝다, 씨발!”
아메스의 악에 받친 칼날이 그자의 목을 뎅강 베어내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몸통에서 떨어져나간 머리는 먼 바닥으로 뚝 떨어지며 멀어져갔다.
하지만 아메스의 손쉬운 승리는 그리 길지 못했다. 세 번째에 있던 장신의 경호원이 다리가 꿰어 신음하는 동료의 몸을 훌쩍 타고 넘어 아메스에게로 돌진해왔다.
“이익!”
6척 반(195cm)이 훌쩍 넘는 상대의 큰 키와 힘에 밀린 아메스가 주춤주춤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가디언들과 함께 훈련받으며 자이센 가의 무장으로 자란 그도 순순히 당해주지는 않았다. 그는 발끝으로 상대의 발목을 툭 채어 중심을 빼앗은 뒤 뒤로 힘껏 밀어붙였다.
당황하며 물러나던 그자는 목이 잘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료의 몸에 다시 발이 걸리며 뒤로 중심을 잃었다. 아메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자의 높은 턱을 머리로 힘껏 들이받으며 방패를 앞세우고 난간 뒤로 밀어버렸다. 그자는 난간을 붙들고 중심을 잡아보려 했지만 큰 키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난간 뒤로 몸이 휙 밀려나고 말았다.
“앗!”
뒤늦게 달려온 네 번째 경호원이 난간을 넘어 추락하는 동료를 구하려 손을 뻗었지만 정작 자신의 운명은 미처 챙기지 못했다. 동료의 뒷덜미를 덥석 붙잡은 그의 팔뚝 위로 아메스의 칼날이 내리꽂혔다.
“너도!”
“끄악!”
팔뚝이 단번에 잘린 경호원이 피를 내뿜으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큰 키의 경호원은 동료의 잘린 손을 매단 채 까마득한 지휘소 바닥으로 떨어지며 쿵 소리를 냈다.
세 명을 연달아 쓰러뜨리고 기세가 오른 아메스가 팔이 잘린 경호원의 목을 내리치려 칼을 번쩍 쳐들었다. 하지만 이 짧은 방심이 화근이었다. 방패 밑으로 드러난 그의 하체를 향해 제일 뒤에 있던 파냐드가 쏜 석궁이 정확히 날아들었다.
“악!”
석궁은 그의 정강이 보호대를 박살내고 안에 입은 수트까지 찢어놓은 후 옆으로 빗나갔다. 그 충격에 아메스가 몇 걸음을 휘청거리며 테라스까지 뒷걸음질로 밀려났다. 상처가 큰 건 아니었지만 정강이뼈를 바스러뜨릴 것 같은 충격에 아메스가 비명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황후 폐하!”
반대편에서 또 다른 다리를 몸으로 막아선 채 사투를 벌이고 있던 베아트릭스가 고함을 질렀지만 지금은 그 역시 도우러 달려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때, 파냐드의 앞에 있던 다섯 번째 경호원이 악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아메스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하지만 아메스도 지지 않고 그자를 힘껏 발로 밀어내고 다시 칼을 휘두르려 했다.
“씨발, 어디 쌩 잡놈이 황후를!”
가슴 위의 경호원을 밀어내고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던 아메스의 눈앞에 무언가가 휙 하고 날아들었다. 파냐드가 휘두른 칼등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아메스의 투구 앞부분이 쩍 소리를 내고 쪼개지며 바닥에 굴렀다. 동시에 아메스의 터진 입술과 찢긴 뺨에서도 피가 벌컥 솟았다.
십년감수한 경호원이 머리에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는 황후의 팔을 뒤로 비틀고 붙들어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독한 년 같으니라고.”
파냐드가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아메스의 부서진 투구를 확 벗겨 던지고는 머리채를 덥석 붙잡았다.
“무슨 황후께서 이리도 입이 걸하신가?”
피를 보고 신경이 곤두선 파냐드가 눈을 부릅뜬 아메스의 얼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악!”
아메스가 피를 토하며 바르르 떨었다.
파냐드도 가까스로 이 무장 출신 황후를 잡았지만 피해가 막심했다. 그의 발악에 부하 다섯 중 넷이 죽거나 쓰러졌고 남은 건 그의 팔을 비틀고 서 있는 하나뿐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파냐드는 궤도 이탈까지 남은시간 5분을 가리키고 있는 화면을 휙 돌아보았다. 그 전에 누군가 이 프리깃의 궤도를 돌리지 못하면 양쪽 모두 몰살당할 판이었다.
한쪽에서는 아직까지도 저항하고 있는 베아트릭스와 부하들의 싸움도 계속되고 있지만 지금 그곳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파냐드가 피를 뚝뚝 흘리며 늘어져 있는 아메스의 귀를 움켜쥐며 물었다.
“얼굴 짓이겨지고 않으면 당장 바꾼 비밀번호 말해.”
“버러지떼 박멸할 기회인데 내가 돌았냐.”
“이년이!”
아메스의 뺨을 또다시 후려친 파냐드는 단검을 꺼내 얼굴에 들이댔다.
“이번엔 귀만 도려낼 테지만 다음번엔 코를 잘라내 줄 거야.”
애써 태연하려 했지만 여자로서 얼굴을 도려낸다는 말에 아메스도 계속 여유를 부릴 수만은 없었다. 아메스의 귓불에 댄 파냐드의 단검 날에서 엷게 피가 배어나 턱으로 흘러내렸다.
그때, 파냐드의 눈동자가 슬쩍 위로 움직였다. 함교가 있는 이 테라스 바로 위는 오벨리스크의 꼭대기인 황제석이었다. 잠시 기척을 느끼고 멈칫거렸던 파냐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다시 아메스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싫다 이거지?”
아메스의 귀를 막 도려내려던 파냐드는 등 뒤에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주먹만한 쇳덩이 하나가 공중을 붕 날아와 그의 투구와 뺨을 일격으로 짓이겨 놓았다.
“칵!”
난데없는 기습에 얼굴 한쪽이 으스러진 파냐드는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파냐드는 바닥에 쓰러진 후에야 자신을 쓰러뜨린 적을 볼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건지는 몰라도― 위층 황제석에서 뛰어내려 그를 기습한 건 자그마한 키에 험상궂은 인상과 떡 벌어진 어깨를 한 여자였다. 여자의 긴 팔에는 주먹만한 쇳덩이가 매달린 섬뜩한 프레일 철퇴가 쥐어져 있었다.
“이놈은 뭐야!”
황후의 팔을 비틀어 붙들고 있던 경호원이 그를 옆으로 팽개치고는 재빨리 칼을 쥐었다. 그렇지만 그 험상궂은 여자의 삐죽삐죽한 철퇴가 막 칼을 빼려는 경호원의 손을 뭉개버리는 쪽이 좀 더 빨랐다.
“우읍!”
손이 으스러진 경호원은 비명과 함께 옆으로 휘청거렸다. 공중을 한 바퀴 빙 돌고 내리꽂힌 철퇴가 아메스의 코앞을 휙 스쳐 경호원의 뒤통수를 박살을 내 버렸다. 깨진 머리에서 터져 나온 피가 옆에 쓰러져 있던 아메스의 얼굴까지 붉게 물들였다.
아메스는 자신을 구한 여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30년 전, 그가 황궁 지하에서 일부러 놓아주었던 자이센 가의 원수, 코나 시디크였다.
“야, 이 새끼들아! 여기 지원 안 오고 뭐 해!”
바닥에 쓰러진 파냐드는 문 쪽에 남겨두고 온 병사들에게 바락바락 악을 썼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곳에 남겨둔 경호원들도 선실에서 몰려든 시종들의 공격으로 이미 궁지에 몰려 있었다. 주동자인 볼토 트라우제는 그새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어차피 형장에서 산 채로 찢길 것 같은데 미리 내가 야들야들하게 해 줄까?”
머리가 절반 깨진 채 버둥거리는 파냐드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코나는 악마처럼 히죽거리며 파냐드의 양 팔과 다리를 철퇴로 한 번씩 후려쳐 박살을 내 버렸다. 눈 깜짝할 새 그는 도망갈 수도, 죽을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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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맥을 끊지 않으려니 이번회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쿨럭;;
*추천, 코멘트, 평점이든 좋은 발자국 한 번 남겨주고 가시는 분들께선 복받으실 겁니다. ( ̄∇ ̄)ブ~~★
요즘 전자책 작업으로 바쁩니다. 혈맥의 전자책은 일단은 전자책 오픈마켓인 유페이퍼(http://www.upaper.net/)를 통해 서비스를 생각중입니다. (확정된 건 아닙니다만 일단은 그쪽 툴로 작업중입니다. 지금은 가 보셔봤자 [타사우프]라는 이름의 텅 빈 미니샵만 있을 겁니다. ㅎㅎㅎ)
예스24, 리브로, 영풍, 알라딘, 반디앤루니스에서도 제휴로 연결된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유페이퍼의 뷰어가 더 낫습니다;;; 가능한 빨리 1부의 1~4권부터 낼 예정입니다.
몇몇 분들이 말씀하신 북큐브는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노블레스 연재는 걸핏하면 태클을 당하는군요. 돈버러지라느니 소리까지 들으면서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글 자체가 연재보다는 책 양식에 맞는 만큼 앞으로는 종이책과 전자책으로 주력할 참입니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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