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92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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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와 함께 수베르 별궁에 들이닥친 병부대신 제네르에게 먼저 와 있던 아메샤 스펜타와 보안국 헌병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메샤 스펜타의 사령관인 케레사스 솔로스 대장군이 굳은 얼굴로 입구에서 그를 맞아주었다.
“말씀하신대로, 별궁 일대에 에너지장벽을 쳤고 외부와 일체의 통신을 차단했습니다. 별궁의 지역 행정청을 기습하려던 반역도당 29명을 체포했고 67명을 사살했습니다. 지금 90여명이 행정청 내부에서 문을 잠가놓고 대치중입니다.”
문득 멈춰 선 제네르가 별궁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실의 안위가 걸린 긴박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토로 기지 전경은 겉보기로는 얄미울 만큼 평화롭고 조용했다.
“문제는 꼭대기층의 통제실입니다. 내부인 중 몇이 공모를 했는지 저희가 진압을 시도했을 때 이미 안에서 문을 폐쇄한 상태였습니다. 놈들이 자기와이어와 에너지장벽을 모두 꺼 놓았습니다. 지금 기지 전체의 방공망이 무방비상태입니다.”
제네르는 고개를 들고 수베르 별궁 위층을 흘겨보았다. 20층에 위치한 중앙 통제실은 이 토로 기지를 외부 기습에서 보호하는 에너지장벽과 자기 와이어를 제어하는 곳이었고, 이곳을 드나드는 셔틀이나 화물선, 프리깃을 관제하고 심지어 이곳을 운행하는 차량들까지 모두 한 눈에 볼 수 있는 핵심 시설이었다.
제네르가 손끝으로 꼭대기층을 재차 가리켰다.
“놈들이 그걸 풀고 버티고 있다는 건 내부 반란에서 끝나지 않고 외부에서도 공격이 있을 거라는 뜻이냐?”
제네르가 바로 핵심을 짚어내자 솔로스 대장군의 얼굴이 대번 붉어졌다.
“그, 그렇군요. 다행히 저희가 통신은 모두 두절시켜 놓아서 외부에 이곳 상황을 알리지는 못하고 있을 겁니다.”
그때, 자다 말고 끌려온 이곳의 수석 엔지니어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자기와이어와 에너지장벽은 30분만 주시면 수동으로 재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켤까요?”
“아니.”
제네르가 딱 잘라 대답하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분명 육로는 아닐 테고, 이 시간에 강을 타고 움직일 것도 아니니 보나마나 하늘에서 오겠지. 아직 들킨 걸 모르고 있을 테니 그냥 접근해 오게 놔 둬라.”
“예에?”
제네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통제실 차지하고 있는 놈들은 보안국에 맡겨두고 아메샤 스펜타는 병력수송차량에 올라 대기해라. 무인 자폭셔틀 10대 인화물질 가득 실어서 준비해 놔라. 착륙하려고 속도 낮출 때 성대한 환영식 치러줘야겠다.”
반란을 일으킨 테번이 제네르의 다락방 문을 때려 부수다가 붙잡혔을 무렵, 민간의 대형 수송선 한 척이 궤도 밖에서 천천히 수베르로 접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공식적인 반입 면장에는 토로 시에 들어가는 농기계와 중장비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었다.
“착륙허가가 났습니다.”
선장의 목소리에 선교(船橋) 안에는 잠시 긴장이 감돌았다.
선장에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평상시처럼 순번제로 일을 맡아 북부의 화주(貨主)를 찾아갔던 그는 적재 장소가 바뀌었다는 연락에 아무 생각 없이 키를 돌렸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무언가 구린 구석이 있는 화물이라는 뜻이었지만 그래 봤자 화주가 밀수를 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도리어 선장에겐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웃돈을 받아 한탕 제대로 할 좋은 기회였다.
특히나 기근과 곡물 부족으로 시끄러웠던 지난 몇 년간은 남부에서 반출 금지된 곡물을 몰래 다른 지역으로 운송하는 건들이 유독 많아 선주나 선장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 주었다. 누군가는 재해를 이용해 돈을 번다며 욕을 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암거래마저도 없었다면 동부나 북부에서 굶어죽는 사람은 두 배 이상 많았으리라 믿어버리는 것이 이들 나름대로 양심의 가책을 피해가는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화물선을 기다리고 있는 컨테이너에는 밀수품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람’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도선사로 위장한 헤네티가 이미 키를 잡은 후였다. 선장은 이들에게 어떻게든 저항해 보려 했지만 이들이 보여준 처자식의 영상 앞에서 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선장은 턱을 부들부들 떨며 선창의 보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선장 역시 전시에 군함을 조종했던 만큼, 선창에서 무장을 점검하고 있는 중무장한 병사들의 정체를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들 중간중간엔 금색 가디언 팔찌를 지닌 자들이 거의 10명에 한 명 꼴로 섞여 있었고, 몇몇은 팔뚝이나 등, 가슴에 옛 근위대 8군단을 뜻하는 문신을 하고 있었다. 바로 33년 전, 사오시안트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부대였다. 언뜻 어림해 봐도 자신이 싣고 온 저 괴물들이 족히 2만 가까이는 되어보였다.
선장은 선교 한쪽에 무뚝뚝한 얼굴로 서 있는 두 무장들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이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단발머리의 여자는 갓 병원에서 나온 듯 상처투성이에 혈색도 그리 좋지 않았고, 칼 한 자루를 빼면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말을 아끼는 건지, 벙어리인 건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의 뒤에는 양 눈에 마치 카멜레온 눈 같은 보조 장치를 한 크고 늘씬한 또 다른 여자 무장이 서 있었다. 그 여자의 발밑에는 처음에 저항을 시도했던 갑판장과 수베르에 접근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옮겨 탄 운 없는 수베르 지역 도선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자잘한 일들은 저 여자의 몫인 듯했다.
그런데 정작 윗사람은 아무 말 없었지만, 그는 중간중간 마치 지시라도 받는 듯 어느 순간 ‘예.’라고 하며 인질로 잡힌 화물선 선원들을 여러 차례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이스마엘 가에서 비밀 전문입니다.”
그때, 처음 보는 미끈한 외모의 남자 무장이 성큼성큼 들어와 그 우두머리에게 할룩스를 넘겨주었다. 그 단발머리 여자는 할룩스로 들어온 메시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무표정하게 넘겨주었다. 카멜레온 여자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우두머리 대신, 방금 들어온 남자 무장이 대신 대답했다.
“조금 전에 아라무트 영주인 이스마엘 가에 리쿠 학장이 들른 모양입니다. 죽이고 싶었지만 서부 일반인들이 리쿠 학장 하면 워낙 꾸뻑 죽다보니 차마 손은 못 쓰고 접대만 하고 보내줬는데 바로 레즐린 가로 간 것 같다고 합니다. 황제 심복인 자이나브 카메네이 그자도 함께 왔고요.”
“종장 사이르 그놈이 있었으면 확실히 해결했을 텐데.”
카멜레온 여자 무장이 쓴 입맛을 다셨다. 서부 아라무트와 테나토의 주인인 5제후 이스마엘 가 종장 사이르 경은 제국 성립 이후 어쩔 수 없이 표면적으로 교단을 버려야 했던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뒤로는 줄곧 교단에 충성을 바쳐오고 있었다. 지난번 아라무트 암살교단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사카가 목숨을 건질 수 있던 것도 그가 보냈던 수색대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번 황제 암살 시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제후였다.
“그나저나 학장이 레즐린 가엔 왜 간답니까?”
이 카멜레온 여자 무장은 아직 이 조직의 내부 사정에는 밝지 못한지 이런 식으로 중간중간 기초적인 질문을 자주 던지곤 했다. 남자도 그러려니 하며 대답했다.
“그게 문제인데, 이놈이 아라무트의 레즐린 가로 ‘자료 조사차’ 가는 중이라는 것 같답니다. 아다시피 아샤드 그놈의 창고에 오르마즈 놈이 생전에 훔쳐간 고향행성하고 잔딕 관련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거든요. 황제가 그쪽에 기웃거리며 냄새를 맡는다는 뜻이니 좋을 건 없잖소.”
“황제가 전에도 보안국 시켜서 거길 뒤졌었다고 하지 않았소? 사제의 키하고 타리프의 일지를 찾는다고 광분하는 중이라 들었는데?”
여자의 카멜레온 눈이 초점을 맞추는지 길게 앞으로 빠져나왔다.
“그렇긴 했지, 하지만 멍청한 보안국 놈들은 어차피 코앞에서 일지를 빤히 보고도 못 찾았을 거요. 그런데 학장이 간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왜요? 보안국에도 똑똑한 놈들 많은데 학장 그 한 놈이 간다고 뭐 달라지겠소?”
“타리프 신관은 일지 사본을 남긴 걸 교단에 들키지 않으려고 파란기스를 시켜서 고향행성 언어로 써 놨거든. 문제는 학장이 고향행성 언어를 ‘조금’ 안다는 것이고.”
그때, 선교의 스크린에 곧 수베르 1번 행성의 대기권에 진입한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덕분에 선장은 더 이상 이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카멜레온 여자가 당장 전투에 뛰어나갈 듯 허리춤에 찬 칼을 쥐고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토로 기지 중앙의 연병장에 착륙해라.”
“예에?”
선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선장은 항해 데이터 화면과 선창의 카메라 화면을 번갈아 보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거, 거긴 자기 와이어가 24시간 걸려 있어서 맘대로 착륙 못 합니다.”
“풀려 있을 테니까 착륙하라고.”
카멜레온 여자 무장의 목소리가 긴장 때문인지 짜증으로 가득했다.
“아, 알겠습니다.”
선장의 손끝은 더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실군의 총사령부인 토로 기지를, 그것도 자기와이어를 무단으로 풀어 착륙해 기습한다는 건 결국 누군가 내부 요직에 반역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전투 준비를 완비한 2만의 근위대를 태운 이 민간 화물선은 수베르의 대기권 안쪽으로 조금씩 접근해갔다. 이들의 말대로, 자기 와이어가 풀리면서 착륙 유도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 선장은 착륙 유도 신호에 좌표를 맞추었다. 이들의 말대로, 지금 이 화물선을 유도하고 있는 신호의 발신지는 황실군 사령부인 토로 기지 중앙이었다.
조금씩 대기권을 뚫고 접근한 화물선은 어느덧 스캐너상에서 토로 시 일대 강과 산, 지형지물이 분간될 만큼의 거리까지 접근했다. 선장은 지도를 보며 고도를 급격히 낮추기 시작했다.
미심쩍은 눈으로 휙 돌아보는 ‘카멜레온 눈’ 여자에게 선장이 얼른 둘러댔다.
“토로 기지 부근은 고고도 비행이 안 됩니다. 고도를 낮추고 저속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선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토로 시에 접근하는 민간 항공기는 고도를 낮추고 군에서 규정한 ‘민간용 항로’를 따라 북쪽에서 천천히 접근해야만 했다. 규정을 어겼다가는 강 주변에 깔려있는 방공부대들에서 바로 장애파가 날아와 화물선을 물로 처박아버릴 터였다.
“닥치고 군용 수송선 항로로 접근하란 말이다.”
남자 무장이 으르렁거리자 놀란 선장이 얼른 고도를 다시 높였다. 그리고 높은 고도에서 기지에 바로 착륙하는, 군용 항로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심야의 시내는 거의 불이 꺼져 조용했고, 멀리 지평선 부근에 보이는 토로 기지도 마찬가지였다. 2중의 견고한 담과 철조망으로 가려진 기지 경계는 그 누구도 넘어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선장의 스캐너 화면과 선교의 메인 스크린에 토로 기지의 전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민간용 항로로 비행할 때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아직 조용한가봅니다.”
카멜레온 무장이 앞에 선 윗사람에게 말했다. 기지는 주변을 빙 둘러 설치된 담장과 초소들을 따라 마치 목걸이처럼 초소와 서치라이트 불빛이 총총히 빛나고 있는 것을 빼면 내부는 도리어 컴컴했다. 누가 봐도 아무 일 없는 군부대의 조용한 밤시간이었다.
카멜레온 무장과 미남자 무장이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이것저것 확인하느라 부산했지만 단발머리의 우두머리 무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얼음이었다. 중키의 그 여자는 팔짱을 낀 채 메인 스크린에 보이는 화면만 뚫어져라 살피고 있었다.
그때, 남자무장이 간만에 입을 열었다.
“2분 후면 위험지역에 접어듭니다. 그때부터는 자기와이어나 장애파 발생기의 사정거리 내입니다.”
남자에 이어 카멜레온 여자가 냉큼 말을 낚아챘다.
“자기와이어는 꺼졌고, 장애파 발생기는 이런 대형 화물선에는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걱정 안 해도 될 듯 한데.”
그 와중에도 우두머리 무장은 스크린만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을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혹시 눈을 뜬 채 자는 건 아닐지 선장이 막 의문을 품을 무렵, 그가 갑자기 앞으로 한 발 내밀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게 뭐냐?”
그가 말을 꺼내자 나머지 둘이 도리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명이 고장 난 모양입니다.”
카멜레온 여자 무장이 더듬거리며 대답했지만 우두머리는 듣지도 않는 듯했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토로 기지 북쪽 작은 언덕에서 불빛 하나가 불규칙하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기억력을 동원해서 자세히 본다면 긴 신호 한 번에 짧은 신호 3번, 그리고 또다시 긴 신호에 짧은 신호 2번이 무한 반복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배 돌려! 당장!”
선교를 쩌렁 울리는 단발머리 지휘관의 째지는 목소리에 놀란 건 선장 뿐만이 아니었다. 기겁을 한 선장은 영문도 모른 채 반사적으로 역추진을 가동하고 키를 최대한 돌렸다. 화물선 내의 중력이 한쪽으로 확 쏠리면서 선창을 보여주는 화면에서도 막 나갈 준비를 갖추던 병사들이 비명과 함께 넘어지고 구르며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이크!”
잡을 것도 없이 서 있던 카멜레온 무장도 중심을 잃고 벌렁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남자 무장은 재빨리 벽을 짚은 덕분에 위험하나마 일단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있었다.
“최고속도로 빠져나가!”
그 단발머리 무장, 바에자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손끝으로 선장을 휙 가리켰다. 선장은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출력을 최대로 올렸다.
바에자는 여전히 어리둥절해 있는 남자 무장의 가슴팍을 퍽 소리가 날 만큼 세게 후려치며 고함을 질렀다.
“슈라 이 바보 같은 놈! 아직까지 모르겠느냐!”
바에자에 밀려 바닥에 나뒹굴었던 슈라가 더듬더듬 벽을 짚고 다시 일어섰다. 그는 비로소 토로 기지의 언덕 꼭대기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빛의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먼 옛날, 코메트 시절에 비상용으로 쓰이던 탐조등 신호였다. 누군가 강한 손전등으로 이쪽에 신호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
“매복이라고요?”
“기지에서 무언가가 날아옵니다!”
선장은 이미 꼭대기까지 올려놓은 출력 레버를 계속 밀어올리며 쓸데없이 힘만 낭비했다. 스캐너 화면에 이 화물선을 향해 거리를 좁혀오는 열 개가 넘는 비행체가 보였다.
“자폭셔틀입니다!”
군 경험이 있던 선장은 자신을 납치한 자들 앞에서 괜한 고함을 질렀다. 맘 같아서는 찢어 죽이고픈 놈들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같은 운명이었다.
“우리가 돌리는 걸 보자마자 쏜 것 같습니다!”
“더 빨리 가지 못하나!”
다급해진 선장은 밀수를 하다가 걸리면 도망칠 때 쓰려 달아놓았던 비밀 보조엔진 스위치까지 모조리 켤 수밖에 없었다. 비밀엔진까지 작동하면서 엄청난 속도를 감당 못 한 화물선이 당장 박살이 날 듯 무섭게 흔들렸다. 최고속도로 가속한 화물선은 무려 10개나 되는 자폭셔틀로 함정을 놓은 황실군 사령부를 벗어나 스페이스로 필사적으로 내빼기 시작했다.
이륙이나 착륙 직전의 셔틀이나 화물선을 박살을 낼 때 쓰이는 자폭용 셔틀은 착륙도 하지 않은 채 바로 방향을 돌려 가속한 밀수선을 잡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언덕 위에서의 신호가 없었더라면, 아니, 바에자가 그 신호의 의미를 단 30초만 늦게 읽어냈어도 이미 화물선 전체가 조각조각 파편이 되어 이미 지면으로 쏟아지고 있을 판이었다.
그때, 대기권을 거의 벗어나며 선장이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기지 외곽에서 발사되었던 또 한 대의 자폭셔틀이 빠른 속도로 뒤를 따라붙어왔다.
“으악! 왼쪽에 붙습니다!”
선장의 비명과 동시에 엄청난 충격이 화물선의 좌현을 때리면서 기체가 다시 흔들렸다. 바닥에서 가까스로 일어나려 했던 테나스도 다시 넘어져 바닥을 굴렀지만 바에자는 이 와중에도 선교 중앙에 똑바로 서서 꿈쩍도 않고 있었다.
“이런, 니미럴!”
목을 삐끗한 선장이 한 손으로 뒷목을 잡고 재빨리 좌현 스크린을 켰다. 예상대로 화물선의 보조엔진과 보조 연료탱크가 수만 개의 파편이 되어 스페이스로 흩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그쪽에 적재한 컨테이너를 받치고 있던 고정장치까지 함께 손상되어 컨테이너가 요란하게 덜크덩거리고 있었다. 저대로 놔뒀다가는 흔들리는 컨테이너 때문에 선체까지 손상을 입힐 판이었다.
자식 같은 화물선이 박살나는 모습에 선장의 눈에서 피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장이 눈치를 보며 그 사실을 알리려는 순간, 바에자가 먼저 물었다.
“화물선이 손상되지 않았나! 몇 번 컨테이너냐!”
바에자의 물음에 선장은 한편으로 안도하면서도 마치 저자가 선장이고 자신은 항해사 정도로 추락해버린 느낌을 받았다. 그는 저자에게 고마워하고 있는 스스로가 정말 한심해 보였다.
“29번과 30번 컨테이너가 실렸습니다.”
“버려라.”
바에자는 단 0.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 슈라가 한 발 늦게야 그 컨테이너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건물 파쇄장비와 아나콘다, 방화에 쓸 인화물질입니다.”
마음이 급해진 선장은 이미 컨테이너를 버리는 레버를 막 내리고 있었다. 요동을 치며 선체를 위협하던 커다란 컨테이너 2개가 스페이스로 붕 튕겨 날아갔다.
“일단 워프루트로 빨리 가라.”
바에자가 이 한 마디와 함께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환호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고, 선교에는 침묵만 흘렀다. 십여 대의 자폭셔틀 대부분은 대기권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멀어지고 있으니 적들도 이 화물선을 잡으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 못 한 셈이었다.
“이제 어쩌죠?”
그제야 비틀거리며 일어난 테나스가 침울한 얼굴로 물었다. 2만의 중무장한 최정예 병력을 싣고 어렵게 달려와 헛걸음한 꼴이었다.
“아무래도 저곳에서의 거사 전체가 틀어진 모양입니다. 황제 암살도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낙담한 슈라가 한숨을 내쉬었지만 바에자는 팔짱을 끼고 입술에 단단히 힘을 준 채 말이 없었다.
“곧 황실군 추격 셔틀이 따라붙을 겁니다. 워프 루트가 닫히기 전에 빨리 목적지를 정해 움직여야 합니다.”
“본부로 돌아갈까요?”
“안 돼.”
바에자가 딱 잘라 대답했다.
“이미 우리 화물선을 포착했으니 계속 추격해 올 거다. 화물선 콜사인도 들통이 났고 한쪽이 부서졌으니 이 상태로는 제국 어디로 도망쳐서 착륙해도 어차피 황실군이 다 읽고 기다리고 있을 거다.”
“……본부는 절대 안 되겠군요.”
슈라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대신관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건 본부인 크테시폰 궁의 위치까지 노출시킨다는 뜻이었다. 바에자가 입술을 야무지게 깨물었다.
“걱정 마라, 어차피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계획도 다 세워져 있으니.”
그때, 슈라의 할룩스로 메시지 하나가 들어왔다. 움찔했던 그는 바에자에게 내용을 보여주었다.
- 토로 기지를 폐쇄 직전에 가까스로 탈출했습니다. 지금 고립되어 있으니 제발 도와주십시오. 사이르 이스마엘. -
“지금 우리가 이놈 도와줄 형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슈라가 고개를 저었다.
“너희 신이 나를 도와주려나보다.”
바에자가 갑자기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그의 묘한 웃음에 슈라와 테나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스크린에 제국 지도를 크게 확대시킨 바에자는 그 한구석의 한 지점, 이곳 수베르에서 멀지 않은 한 곳을 가리켰다.
“당장 너희 교단 조직을 총동원해서 사이르 그자를 구해내라. 그리고 우린 그자의 영지인 아라무트로 간다. 어차피 제국회의는 황제가 별의별 재주를 부린다 해도 제후들의 탐욕 때문에 성공 못 한다. 우리 두 번째 계획은……굶주려 미쳐버린 제국 전체를 전쟁터로 만드는 거다. 전쟁을 시작하기에 아라무트만한 곳이 없을 거다.”
두 무장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라무트부터 말입니까?”
“우린 이미 출정식까지 치르고 칼을 뽑았다. 어디로 도망가도 황제가 쫓아올 테고, 이스마엘 가가 황제를 저버린 것도 다 들통 난 판국에 다른 도리가 있느냐? 이참에 귀찮은 크바르나 잔당들을 박살내고 그놈들 창고도 불태워버린 후에 아라무트와 테나토를 차지해야겠다.”
바에자가 손끝으로 가리키고 있는 아라무트는 얼마 전 황제 카렐과 사카가 오르마즈의 시체와 세네피스를 놓고 암살교단에 먼저 닿기 위한 사투를 벌였던 바로 곳이었다.
암살교단의 근거지이기는 하지만 그곳의 공식적인 주인은 어쨌든 이스마엘 가였다. 그리고 하급제후인 레즐린 가, 아니 크바르나가 약간의 땅을 빌려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4제후 이스마엘 가는 지금껏 정체를 감춘 채 황제에 충성하는 아샤드 경의 크바르나 부대와 같은 행성 안에서 나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이번 일로 반역도의 정체가 드러났으니 어차피 더 이상 아샤드 경과는 친하게 지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라무트와 테나토가 우리 손에 들어오면 서부와 남부의 길목이 차단된다. 어차피 마누엘이 곧 남부의 독립을 선언할 것이니 황제가 타리프의 일지를 차지하는 것도 막고, 남부의 독립도 도울 수 있으니 양수겸장이구나. 성공하면 제국을 반토막내는 거다. 아라무트는 시작일 뿐이야.”
“코리온 그자를 죽이는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코리온과 자이납을 잡으러 간다는 말에 테나스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가 아버지와 두 눈을 잃은 페스트의 폭동 때도 진압군의 군사 역할을 했던 코리온 때문에 결국 패전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이납도 그때 아버지를 끌고 가 죽음으로 몰고 갔던 일당 중 하나였다. 바에자가 그런 그의 태도가 맘에 드는지 피익 웃었다.
“테나스, 루토와 둘이서 지휘를 맡아라.”
큰 임무를 맡은 테나스가 기쁜 얼굴로 바닥에 엎드렸다.
“제게 영광스럽게 죽을 기회를 주시어 감사하옵니다.”
2만의 시한폭탄을 실은 화물선은 제국회의가 열릴 수베르를 뒤로 하고 기근으로 굶주리고 있는 제국의 어딘가에 전쟁이라는 불씨를 일으키기 위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황제를 죽이고 제국회의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간단히’ 황실을 무너뜨리려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이젠 제국 전체에 전쟁과 죽음이라는 저주를 뿌리는, 이들의 궁극적인 계획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이 노리는 발화점은 코리온이 가 있는, 그리고 오르마즈의 흔적이 있는 아라무트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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