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93화 (988/1,132)

< -- 993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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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31년, 콜로니 총회가 열릴 쿠트라스 신전 앞은 이런저런 억울한 사연을 가지고 콜로니 각지에서 모여든 수천의 시위대들, 혹은 그냥 ‘잘난 사람들 보러 나온’ 구경꾼들로 북새통이었다.

안전요원들의 인도를 받으며 인파 사이를 가까스로 뚫고 들어온 차 안에서 훌쩍하니 큰 키의 헤네티 장교 정복 차림의 여자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내려서서는 뒤쪽 상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고맙다.”

제대로 멋을 내어 차려입은 금발에 벽안의 미남자가 상석에서 나름 우아한 자태로 내려서서는 바리케이드 너머 일반인 구경꾼과 시위대들을 느끼한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콜로니 연합, 혹은 국제 연합 총회’는 다음 해 연합정부의 행정 예산을 의결하고 세속 법안과 정책 방향을 대신관에게 승인받는 자리였다.

콜로니도 공식적으로는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삼고 있고, 교단과 행정조직인 콜로니 연합은 분명 별개의 조직이었다. 하지만 연합에는 허울만 좋은 순환 임기제의 총회 의장을 빼면 사실상 통솔하는 수장은 없었다. 결국 중요한 정책의 결정권은 대신관의 몫이었고, 이권만 따지는 의원들을 혐오하는 대다수 시민들도 대신관이나 마구스들의 결정에는 거의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만큼 철저히 신뢰했다.

그렇게 정치, 행정조직인 총회가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 보니, ‘하늘같은’ 대신관을 마주해야 하는 이런 연차 총회에서는 말 그대로 깨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게다가 객관성과 공평성을 유지하기 위해 200여명의 콜로니 의원들은 총회가 진행되는 내일까지 외부와의 접촉이 금지되었고, 개인 수행원을 대동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곳까지 오는 길에도 교단이 참석 의원들에게 무작위로 한 명씩 할당해주는 전담 헤네티 사관이나 장교를 따라오도록 되어 있었다.

이 느끼남을 ‘모셔’ 온 여자 헤네티 장교가 출입 통제를 맡고 있는 트라카 교단 헤네티 대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신분증을 내밀고 코윈 억양이 섞인 유창한 바람어로 보고를 올렸다.

“다하카르 헤네티 제3전대, 중위 마라부트 투아레그.”

“어느 분을 맡고 있지?”

“아켐의 자코프 아유브 의원입니다.”

대위는 의원 출입구 앞에 도착한 ‘투아레그 중위’의 신분을 확인하며 습관처럼 눈을 위로 치켜떴다. 중위의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 성직자 뺨치는 바람어와 귀품 넘치는 외모는 경비를 맡은 헤네티들의 경계심을 확 풀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신분증도, ‘일일 경호원’ 명부에 올라 있는 인적사항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의도적으로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중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슬쩍 확인한 트라카 헤네티 대위는 신분증을 돌려주며 묘한 웃음과 함께 귀에 대고 슬쩍 속삭였다.

“조심하시오, 장미가시보다 무서운 남자니까.”

중위가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그가 이곳에 데려온 남자는 아켐의 라호르 지역을 대표하는 콜로니 7선 의원 자코프 아유브였다. 그렇지만 ―이후 손녀 네페티에게까지 이어질― 새하얀 피부, 눈에 확 띌 만큼 빛이 나는 금발머리와 사파이어빛 눈동자에서 보이듯, 그는 원래 아켐 사람은 아니었다.

이곳 쿠트라스의 부유한 광산가 가문 출신인 이 절세 미남은 아켐의 대 명문가인 플레렌 가 종장 파티마의 첫째 남편으로 장가를 가 부인이 죽은 이후 종부(宗夫) 신분으로 가문을 이끌고 있었다.

“아무도 관심이 없으면 가시가 필요하겠습니까?”

중위가 신분증을 받아들며 저 남자보다 한술 더 뜨는 느끼한 표정으로 씩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호위를 맡은 이 미남자를 인도해 북적거리는 쿠트라스 대신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가 내부에 잠입하면서, 콜로니 총회장을 쑥대밭으로 만들려는 민병대 작전의 1단계가 일단 성공 가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 헤네티로 위장한 민병대원 오르마즈는 아직까지도 왜 민병대, 아니 자신이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확신이 없었다. 오늘의 임무는 간단하지만 치명적이었다. 내일부터 있을 콜로니 총회 본회의를 앞두고 오늘 저녁엔 안건을 정리하고 친목을 다치는 의원들의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르마즈의 임무는 이 자리에서 ‘최대한 많은’ 의원들과 대신관, 트라카 마구스까지 몰살시켜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 달 전 만났던 파란기스의 말이 굳이 아니더라도, 이번 임무는 오르마즈에겐 분명 피하고픈 작전이었다. 그는 자신이 쓸데없이 민병대에서 눈에 띄는 존재가 되는 것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엄마와 동생들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이 임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얄궂게도 가족들 때문이었다. 호출을 받고 처음 지도자 파냐드 앞에 나갔을 때, 그가 받은 건 큼직한 편지 꾸러미였다. 그건 그가 비번일 때마다 민병대 본부로 달려와 미배달 우편물 창고를 온통 헤집어가며 애타게 찾았던 지난 10년간의 엄마의 편지들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편지엔 소인도, 배달표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편지들은 엄마가 갇혀 있는 수용소 당국에서 아예 발신을 차단한 채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엄마가 꼭꼭 싸서 보낸 막내 세네피스의 아기옷 꾸러미와 그 와중에도 오르마즈를 위해 직접 손으로 뜬 허름한 목도리,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까지 함께 있었다.

군대에 끌려간 맏딸을 생각하며 엄마가 지독한 그리움을 실어 썼을 편지들은 수용소를 떠나지도 못한 채 그곳의 창고에 처박혀 누렇게 변색되어가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오르마즈를 가장 의아하게 한 건 파냐드가 적군인 코메트 당국이 보관하던 편지를 대체 어떻게 입수했는지였다. 하지만 파냐드는 명확한 대답 대신, ‘네 가족들은 코메트 수용소에 있지만 내 손 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야.’라는 모호한 말로 오르마즈의 머리털을 쭈뼛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를 이 임무에 밀어 넣으며 던진 파냐드의 마지막 말은 여전히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 극과 극은 원래 공생하는 법이라네, 젊은이. -

그와 함께 오르마즈의 머리에는 이번 작전에 대한, 더 정확히는 민병대 자체에 환멸감도 함께 심어졌다. 그렇지만 그에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도 코메트 부대와 대신관 사이에 어딘지 불협화음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은 정보국의 지인에게서 몇 번 들은 일이 있었다.

그는 엄마와 동생들을 수용소에서 빼내어 준다는,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알쏭달쏭한 파냐드의 약속에 결국 이번 작전을 위한 혹독한 훈련을 이겨내야만 했다.

‘엄마…….’

쿠트라스 신전의 메인 홀에 들어선 오르마즈는 제단을 올려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이곳은 그가 20여년 전, 엄마와 함께 찾아와 다하카르에게 간택을 받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오르마즈는 가슴 속에 달고 있는 엄마와의 옛 사진을 꼭 쥐어보았다.

“투아레그 중위라고?”

오르마즈는 뒤따라오며 또 말을 거는 자코프 아유브 의원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 남자는 이번 행사에서 자신의 개인 경호를 맡기로 되어 있던 진짜 헤네티 장교가 이미 피살당했다는 것도, 그리고 그를 가장해 숙소로 마중을 온 이 젊은 장교의 정체가 뭔지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오는 내내 오르마즈를 곁눈질하며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심한 놈.’

오르마즈가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방금 입구에 있던 장교의 말대로, 이 금발의 절세미남은 ‘장미가시보다 무서운’ 자였다. 수명개조 이전만 해도 거의 어머니뻘이었을 18살 연상의 아내 파티마는 명문가 종장으로는 처음으로 제니안의 지도자까지 지낸 초기 유학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자하크 대신관의 종교탄압이 절정을 이루었던 그 시기 제니안 멤버 대부분이 그랬듯 그도 숨어서 조직을 이끌고 유학을 공부해야 했다. 집안에서 그 사실을 아는 건 남편과 어린 세 아들 바니샤드, 하산, 칼림 셋뿐이었다.

그렇지만 파티마는 ‘집안 누군가’의 밀고로 한밤중에 잡혀가 지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홀몸이 된 이 남자는 당시 15살이었던 어린 장남 바니샤드를 대신해 가문을 사실상 장악했고, 이젠 아켐을 대표하는 10명의 의원 중 하나가 되어 부인이 살아있을 때보다 몇 배는 콧대가 높아져 있었다. 민병대 입장에선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인물이지만, 애석하게도 이 기회주의자는 이번 작전의 수단일 뿐 직접적인 표적은 아니었다.

“내 나이대에선 너처럼 훤칠하니 큰 여자가 거의 없거든.”

자코프는 앞서서 길을 인도하는 오르의 키를 재는 척 그의 어깨를 살짝 더듬었다. 오르마즈의 속이 확 끓었지만 겉으로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흘렸다.

“제 나이대에선 의원님처럼 미모에 재력까지 겸비한 남자는 거의 없죠.”

“오호, 이제야 말이 통하는 것 같은데.”

상대가 절반 넘어왔다고 생각했는지, 자코프의 금빛 속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그는 아내 사후 거의 70년 가까이를 ‘서류상 수절’하고 있지만 재혼으로 종부 지위를 잃지 않으려는 고도의 계산일뿐이었다. 그는 나이 들고 외모도 볼품없던 죽은 아내의 빈자리를 젊고 싱싱한 미녀들로 시시때때 갈아 치워가며 나름 왕성한 ‘사교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이번 작전의 수단으로 낙점된 것도 그의 끊임없는 여색, 그것도 키 크고 갈색 머리를 한 미녀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의 유별난 식성 때문이었다. 사실 여자들 입장에서도 이렇게 잘생긴 외모에 높은 지위, 말솜씨 좋고 부유한 전처의 어마어마한 유산까지 있는 남자의 애인 자리를 마다할 리 없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그는 이렇게 ‘우연히’ 만난 여자들을 놓친 일이 한 번도 없는, 사교계의 손꼽히는 ‘선수’였다.

“오늘 만찬에 모일 의원은 200명이나 돼. 지금부터 자정 가까이까지.”

자코프가 슬쩍 운을 띄우며 저녁 7시로 가 있는 벽시계를 가리켰다.

“만찬에 나 하나 빠졌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자코프가 오르마즈의 뒤에 더 바싹 달라붙으며 속삭였다.

“내 안건은 이미 조율도 다 끝났고.”

오르마즈는 값싸게 구는 대신, 못 들은 척 홀을 가로질러 계속 들어갔다. 고작 헤네티 중위 따위가 자신에게 뻣뻣한 모습을 보이자 오기가 난 자코프가 다시 말을 걸었다.

“나 솔직히 별 것 아닌 년이 내 앞에서 콧대 높게 구는 건 진짜 못 참거든. 관두자.”

남자가 무관심이라는 극약처방까지 썼지만 오르마즈는 속이 탄 남자가 발광을 하건 말건, 들은 척도 않고 계속 걸음만 옮겼다. 자코프가 머물던 처소에서 이곳까지 단둘이 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도, 그는 이렇게 찰나의 눈웃음과 얼음장 같은 군인의 모습을 오가며 이 콧대 높은 바람둥이 남자의 속을 새까맣게 태워놓기만 했다.

1층 홀 안에는 오늘의 총회에 참석할 의원들, 경비를 맡은 전갈 문장 크바르나 헤네티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여전히 답을 듣지 못한 남자의 속이 터지기 일보 직전, 오르마즈가 더운 듯 장갑을 벗으며 갈색 머리칼을 슬쩍 쓸어내렸다.

“전 자정까지만 근무합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동시에 그의 왼쪽 손목에 늘어진 다이아몬드-오팔 팔찌가 뒤따라오는 자코프의 눈에도 당연히 들어갔다. 자코프만큼 눈썰미 있고 멋 낼 줄 아는 남자라면 여자가 ‘자기 돈으로 살 만한’ 물건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기에 충분했다.

혈압이 확 치솟았는지 자코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지금껏 내내 변죽만 울려 놓고 이제와 애인 있다는 헛소리는 아니겠지?”

“이 정도 선물까지 받는 괜찮은 여자를 용감히 빼앗을 만큼 대담한 남자분은 못 되시나 보죠?”

오르마즈의 대답 속에 살짝 비웃음이 스며 있었다. 그의 한 마디에 자코프의 하얀 얼굴이 발끈하며 더 빨갛게 상기되었다. 명색이 콜로니 의원에 여자라는 여자들은 다 겪어 본 노련한 자신을 갖고 노는 듯한 상대의 태도에 자코프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날 잘못 봤나본데.”

남자다움에 상처를 입은 그는 오르마즈의 팔뚝을 거칠게 붙들며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내가 용감히 빼앗지 않아도 어차피 여자들은 다 알아서 무릎을 꿇거든? 너도 그리 될 테고.”

“오호, 그러신가요? 여기서요?”

오르마즈가 그와 거의 숨결이 닿을 듯 작은 소리로 되물었다. 그 말에 당황한 자코프가 얼른 주변을 살폈다. 신전의 홀에 모인 의원들과 헤네티들, 총회 관련자들이 멀쩡한 여자 헤네티 장교의 팔뚝을 붙들고 으르렁대고 있는 자코프를 의심어린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일 아닙니다.”

주변 시선을 의식하며 당황한 자코프가 헛기침을 하며 얼른 그의 팔을 놓았다. 오르마즈가 앙칼지게 그의 팔을 떨치고 계속 앞장섰다. 그리고는 만찬장인 지하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난 추잡하게 여자 집이나 숙박시설 들락거리는 사람이 아냐. 근사하게 살 곳 하나 마련해 주는 건 능력 있는 남자의 기본이지. 잘만 하면 한몫 잡을 텐데 너 남자를 제대로 다루려면 콧대를 좀 낮춰야겠구나?”

결국 급해진 자코프가 재산으로 미끼를 슬쩍 던졌다.

“그 전에 네가 그 수준이 되는지 한 번 확인해야겠다.”

오르마즈가 속으로 코웃음을 몇 번째나 치며 이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하룻밤 프로포즈 치고는 참 재수 없게 하시는군요.”

자코프의 표정이 막 돌변하려는 찰나, 오르마즈가 그 비싼 눈웃음을 다시 잠깐만 보여주었다.

“지하 수술실 블록은 어떤가요?”

자코프의 눈이 그제야 번쩍 뜨였다. 막 지하층에 내려선 그는 연회장인 홀의 제일 안쪽에 있는 철문을 힐끔 돌아보았다. 오르마즈가 머뭇대고 있는 이 사내에게 비장의 요청을 던졌다.

“수술실 블록의 출입권한을 가지고 계신 줄 압니다만?”

자코프의 얼굴이 굳었다. 오르마즈가 말한 소위 ‘수술실 블록’은 콜로니 연합 총회가 열리는 이 대신전 지하와 옆 건물을 연결하는 보안상 중요한 통로였고 총회가 열리는 지금은 당연히 폐쇄되어 있었다. 다만 비상시를 대비해 그곳의 출입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몇 있고, 트라카 교단 병원의 가장 큰 재정적 후원자인 이 남자도 그 중 하나였다.

“그 권한 잠깐만 쓰시죠.”

오르마즈가 만찬장 문 바로 앞에서 딱 멈춰서며 속삭였다. 그리고는 구석에 있는 수술실 블록 출입문을 슬쩍 턱으로 가리켰다.

“여기 지하에 침대 있는 방음실은 저기에밖에 없을 겁니다.”

오르의 속삭임에 눈이 딱 마주친 자코프의 흰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의 눈웃음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던 자코프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조금 끄덕거렸다.

“하, 하긴.”

“그럼 모두발언 후 첫 휴식시간 끝난 직후에 저 문 앞에서 기다리죠.”

오르마즈는 만찬장에 들어가는 자코프를 놓아둔 채 뒤로 딱 돌아서며 경례를 올렸다. 그리고는 그를 호위하는 ‘공식적’인 임무는 종료되었다.

자코프를 데려다 준 오르마즈는 만찬과 예비모임이 열리고 있는 신전 홀을 내려다보는 2층 테라스에 경비장교 신분으로 조용히 서 있었다. 테라스에는 그 말고도 방패와 할버드로 무장한 헤네티 사관과 장교들이 거의 50척(15m) 정도마다 한 명씩 서서 도끼눈을 뜨고 밑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대신관이 입장할 예정이라서인지, 일반 헤네티들에게 발사무기 소지는 허용되지 않았고, 오르마즈도 키 높이의 할버드를 어깨에 삐딱하게 기대어 세우고 ‘안 보이게’ 건들거리는 중이었다.

발 밑의 홀에는 콜로니 각지를 대표하는 200여명의 의원들과 각 교단에서 온 성직자 100여명이 웅성대며 내일 있게 될 안건에 관해 이런저런 논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말이 논의지 연합 의원들은 들고 온 안건에 관해 성직자들이 퍼붓는 서릿발 같은 질문 세례와 질타에 해명하고 설명하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 뜯어고치기까지 하느라 살벌한 분위기였다. 시민들이 교단을, 아니 정확히는 마구스들에게 견제의 권한을 넘겨주고 신뢰하는 것도 사사로운 이권에 얽매이지 않는―실상 그럴 필요도 없는― 그들만의 엄한 도덕률 때문이었다.

“그러고 계시니 헤네티보다 더 헤네티다우십니다.”

오르마즈는 옆에서 다가오는 익숙한 발소리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흉내를 잘 낼 뿐이야.”

“정말 교단에 몇십 년 계셨던 분 같은걸요.”

헤네티 중사 차림새의 이트닌이 오르마즈의 옆에 붙어 서며 그의 이마에 박힌 다하카르의 문장을 가리켰다.

“조금만 더 연습하시면 성직자 흉내 내셔도 되겠어요.”

“내가 성직자 될 뻔했었다는 얘기는 했던가?”

오르는 키득거리면서도 여전히 시선을 홀에 두고 있었다.

“나비 같군.”

“나비요? 어디에요?”

“의원들 모여 서 있는 모양새가 나비 같지 않냐고.”

“아, 항상 그래 왔죠. 왼쪽엔 교단 지시를 비교적 잘 따르는 친 교단 의원들이 있고, 오른쪽엔 교단과 걸핏하면 날을 세우는 친 군부 의원들이죠. 친 교단 의원들 대부분은 성직자 출신이거나 순수 민간인들인데 친 군부 의원들 대부분은 코메트 현직 장교들이거나 재정지원을 하고 있는 자들이고요.”

특무대 장교 시절 많은 경험이 있는 ‘이등별’ 이트닌이 ‘이쪽에서는 아직 초보인’ 보스에게 나름 아는 것을 전해주었다.

“우와우, 보이세요? 모스 바에자 장군도 있어요.”

“코메트 1사단장? 그게 저 여자야?”

오르마즈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친 군부측 의원 제일 앞자리에서 조용히 파일을 보고 있는 중키의 한 여자를 응시했다. 콜로니를 통일한 영웅 아프라시아 이후 제일의 명장이라는 바에자 장군이었다. 그런데 크지 않은 체구에 단정한 차림새와 장난기 많은 소녀 같은 앳된 인상 덕분인지 전혀 군인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허어, 사단장보다는 사단장 관사 마당에서 뛰어다니는 말괄량이 딸내미라고 하면 더 어울리겠네.”

오르마즈의 극적인 비유에 이트닌이 피익 웃었다.

“생긴 거랑 딴판이라 더 무섭다니까요. 오죽하면 지도자가 저 목에 2계급 특진하고 무공훈장을 걸었겠어요. 나이도 젊어요. 지금 40대? 50대? 보스보다 아주 조금 많을 거예요. 원래 그냥 ‘바에자’였는데 에시마 교단에서 ‘모스’라는 이름을 받아서 이젠 가문까지 창건했죠.”

“휴우.”

오르마즈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콜로니 시민 대부분은 성이라는 것이 없었다. 성을 가진 건 소수의 명문가 혹은 놀랄만한 공을 세워 교단에서 ‘영웅적인 조상을 기릴 권리’을 허락받은 몇몇 사람들의 제한된 자손들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었다.

“그래도 마녀가 호랑이보단 쬐끔 더 어울리는데.”

다시 큰 소리로 웃을 뻔했던 이트닌이 얼른 입을 가렸다. 민병대에선 ‘진줏빛 마녀’라고 부르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코메트들 사이에선 그의 1사단 상징을 본따 ‘진줏빛 호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저 여자 잡고 이번에 사관 달게 해 주시는 건가요?”

이트닌의 말에 오르마즈가 피익 웃었다.

“근데 자기 목에 걸린 게 고작 2계급 특진이라는 걸 알면 저 여자도 섭섭하지 않을까?”

“하긴.”

이트닌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세요? 저 여자 지금까지 전적이 무패랍니다. 지도자가 저 여자 이름 들을 때마다 거의 노이로제를 보일 만도 하죠.”

“듣긴 했는데, 그게 사실이야?”

오르마즈가 반신반의하는 눈초리로 이트닌을 쏘아보았다. 사실 오르가 아는 민병대의 웬만한 전투에서 ‘모스 바에자’라는 이름은 빠짐없이 등장했고, 그가 패한 일은 없었다. 심지어 오르마즈가 죄수부대를 이끌며 오름에서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그 때도 그가 이끄는 코메트 2집단군만은 민병대의 난공불락 화산 방어선을 돌파해 민병대 본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물러났었다. 나머지 2개 집단군이 돌파에 실패해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물러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민병대를 무너뜨린 최고의 영웅으로 등극했을 터였다.

“근데 군단장 승진을 안 하려고 든다며?”

“이미 몇 번이나 중장 승진 대상에 올랐는데 자긴 사단장이 좋다고 주구장창 사단장으로만 있나 봐요. 아시잖아요, 군단장 되면 지도 놓고 서류짓이나 하지 사실상 야전하고는 빠이빠이잖아요. 그래서 대신 코메트 지휘부에서 1사단을 사실상 군단 규모까지 키워줬다죠. 이름만 사단장이지 군단장이나 마찬가지에요.”

“오호, 그럼 저기도 ‘이등별’이군.”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오르의 농담에 이트닌이 다시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적이긴 한데 솔직히 인간적으론 존경스러운 사람이에요. 듣자하니 무덤지기하는 가난한 미혼모한테서 태어났다는데 어릴 때부터 사람들 피하는 갖은 더러운 일을 다 했나 봐요. 무덤 구덩이 파는 일부터 시작해서 묘비 청소하고 시체 수습하는 그딴 일 하다 보니 주변에서 따돌림도 당하고 학교도 못 다녔다죠.”

“생긴 건 꽤 엘리트 냄새나게 생겼는데?”

“신기하죠? 그 엄마가 무덤지기긴 해도 굉장히 똑똑했나봐요. 직접 아이 공부도 가르치고 없는 살림에 딸에겐 뭐든지 다 해 주고, 말 그대로 딸 하나만 헌신적으로 키웠다죠.”

“…….”

“그러다가 에시마 교단 헤네티로 입대해서 군 장학생으로 신학교까지 졸업하고 이젠 장군에 영웅 대접까지 받고 있으니 이건 뭐 개천에서 용 난 셈이죠. 출세하고 나서도 엄마를 그렇게 극진히 모시고 있다는데 효녀로 소문이 자자하다죠.”

순간 오르마즈는 의원들 사이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바에자 장군의 모습에서 마치 자신과 어머니의 환영을 보는 듯했다.

이트닌이 계속 수다를 떨었다.

“이런 말 하면 헌병대에서 몰매 맞을지 몰라도 제 딸아이도 저 정도만 자라도 소원이 없겠어요. 눈치만 안 줬으면 저도 아이 이름을 바에자라고 지었을지도 몰라요.”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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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질주한 팽팽한 분위기도 풀어줄 겸~

간만에 반가운 오르마즈의 재등장과 선수끼리의 배틀(?)입니다. ㅎㅎㅎ

*추천, 코멘트, 평점 좋은 흔적으로 의욕 올려주시는 분들께선 복받으실 겁니다. ~~~(연재하는 유일한 낙입니다. ㅎㅎㅎ)   ( ̄∇ ̄)ブ~~★

아참, 그리고 이북(ebook)은 다음주 초 지난번 알려드린 곳(http://www.upaper.net/kiltie)에서 판매 개시 예정입니다. 1부의 1~4권부터 함께 올립니다.  (아직은 샵이 텅 비었습니다만 어느날 갑자기 짠~ 하고 4권이 뜰 겁니다. ㅎㅎㅎ) 예스24나  리브로 같은 제휴판매사이트에 올라오기까지는 1주 정도 기간이 더 걸린다고 하는군요.

앞으로도 1달 이내 간격으로 4권 단위씩 계속 추가하겠습니다. 다음 연재와 함께 공지로 올리겠습니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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