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94화 (989/1,132)

< -- 994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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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접선은 하고 왔나?”

오르가 손을 내밀자 그제야 임무로 돌아간 이트닌이 도면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내민 도면에는 이 트라카 대신전의 1층과 지하층의 평면도와 경호 계획서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엔 [특급 기밀]이라는 붉은 도장이 쾅 찍혀있었다. 복사본이라 상태는 좋지 않지만 그럭저럭 알아보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런 기밀자료를 흘린 내부인이 누군지 정말 궁금한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홀의 커튼 옆에 서 있으면 누군가 와서 건네줄 거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니까요. 남자 손이라는 것밖에 못 봤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오르마즈는 도면을 유심히 살폈다. 정확히 좌우대칭으로 되어 있는 신전 지하에는 이 홀이 있고, 오르마즈가 자코프와 ‘밀회’를 약속한 [수술실 블록]을 통해 건너편에 있는 부설병원 지하와 연결되어 있었다.

한 장을 넘기고 보니 화재나 테러리스트의 기습처럼 ‘지상층으로 올라갈 수 없을시’를 대비한 제2계획도 있었다. 예상대로, 수술실 블록을 통해 옆 병원 건물로 이동하도록 계획이 잡혀 있었다.

“대대적인 개보수를 여러 번 했어도 틀 자체가 수백 년 된 옛날 건물이라 취약한 부분이 좀 있습니다. 어디는 최첨단이고 어디는 개척민 시대 모양새 그대로이고……우리들한테는 천국이죠.”

“이런 아름다운 곳을 훼손하고 싶지 않은 걸 보니 난 아직 특무대원이 되려면 멀었나봐.”

오르마즈가 감탄어린 눈길로 홀을 둘러보았다. 홀 내부는 하나하나 손으로 깎은 아름다운 대리석과 목조 마감으로 그 자체가 예술작품이었다.

이트닌이 작품감상에 빠져 있는 지휘관의 제정신을 찾아 주었다.

“수술실 블록의 복도는 3개입니다. 비상시 홀의 안쪽 문을 열어서 사람들을 복도로 유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의원과 성직자들은 저 두 개의 문으로 나가게 되어 있는데, 수술실 블록의 양옆 복도와 연결이 되어 있죠.”

이트닌이 홀의 연단 양쪽 아래에 있는 닫힌 문 두 개를 가리켰다.

“운영요원까지 합치면 유사시 대피해야 할 사람은 4백명이 넘습니다.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복도의 문들이나 복도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는 완전히 잠가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생각 없이 전진만 하면 병원에 도착할 수 있게요.”

“중간 복도는 그럼…….”

“중간 복도는 단상 바로 뒤 쪽문, 그리고 아까 그 미남 아저씨랑 들어가실 철문과도 연결됩니다. 마구스들과 측근들이 대피하기 위해 비워두도록 되어 있고요.”

이트닌이 가리킨 단상에는 이미 큼직한 베일이 드리워 있었다. 대신관은 1년에 단 한 번, 이마 력(曆)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창조일에만 외부에 모습을 드러낼 뿐 다른 때는 그의 실제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심지어 창조일 행사 때도 안전을 위해 ‘대역’을 내보낸다는, 사실인지 아닌지 아직 분명치 않은 소문까지도 있었다.

오르마즈가 도면을 눈에 담으며 마지막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임무는 간단했다. 신전 바깥의 시가지에 시위대를 위장해 잠입해 있는 ‘기동대’ 들이 신전 외부를 기습 공격해 얼을 빼 놓은 동안, 오르마즈의 팀이 탈출하려는 의원과 마구스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는 것이었다.

지도자 파냐드는 구체적으로 누굴 죽이라고 지목한 건 아니었다. ‘가능한’ 대신관과 트라카 마구스를 죽이고, 의원들의 탈출로 중 하나를 막고 최대한 많이 죽여 적들에게 공포를 심어준 후 빠져나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면을 확인한 오르마즈는 다시 홀을 내려다보며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결론은 우리 보고 민간 의원들을 죽이라는 뜻이네?”

“예?”

이트닌이 얼른 도면을 확인했다. 일이 터지면 왼쪽에 모여 선 민간 의원들은 당연히 왼쪽 문으로 나갈 테고, 그렇다면 3개의 통로 중 북쪽에 있는 복도를 이용해야 했다.

“북쪽 복도 쪽……그러니까 북쪽 창고에 우리가 탈출할 수 있는 물품 반입용 쪽문이 있군요. 죽지 않고 빠져나가려면 북쪽 복도가 작전지역이 되겠군요. 정말 친 교단측 민간 의원들을 죽이게 되겠군요.”

오르마즈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이 도면을 준 놈 얼굴을 못 봤다고 그랬지?”

“예, 지도자께서 말씀하신 그 위치에 있었더니 커튼 너머에서 누군가 슬쩍 주고 가더군요.”

“자네 경험이 많으니 묻는 건데, 작전지역 지도를 다 들어온 후에 받아서 그 자리에서 결정한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나?”

이트닌은 입을 다문 채 바로 대답을 못 했다.

“이 도면을 도저히 못 믿겠다.”

오르마즈는 도면 구석에 있는 작은 숫자 하나를 가리켰다. 도면의 다른 숫자나 글자들은 다 정상이지만 그 숫자 하나만 마치 거울로 본 것처럼 좌우가 뒤집어져 있었다. 이트닌의 어깨가 들썩했다.

“도면을 거울상으로 복사하면서 다 고쳤는데 이것 하나는 깜박 놓쳤군.”

오르마즈는 손에 들고 있는 암호 통신기로 외부의 시위대에 섞여 있는 망치에게 짧게 전문을 보냈다.

- 지하에서 나갈 수 있는 쪽문이 남북 어느 방향인지 확인할 것. -

오르마즈와 이트닌은 망치에게서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십여분 후, 오르마즈의 통신기로 짧은 문장이 들어왔다.

- 남쪽입니다. -

“훗.”

오르마즈가 코웃음을 쳤다. 예상대로, 이트닌이 받아 온 도면은 거울상으로 복사해 남북이 뒤바뀐 엉터리였다.

“코메트 놈들이 우릴 이용해 먹고 버리려는 수작이군.”

“예?”

“이네들 내부의 어떤 세력이 적인 우리를 이용해 친 교단 의원들이나 마구스들을 제거하려고 역공작을 했거나, 아니면 함정을 판 게지.”

이트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어쩌죠? 이제 돌아나갈 수도 없습니다.”

“작전은 예정대로 진행한다.”

“아, 아니 그랬다간…….”

오르마즈가 여전히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침착하게 말했다.

“다만 작전지역이 출구가 있는 남쪽 복도일 뿐이다.”

이트닌의 표정이 굳었다. 오르마즈가 생각을 확인해 주었다.

“친 군부 의원들을 죽인다고. 됐나?”

때맞춰 울려 퍼진 나팔소리에 오르마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변의 출입문이 일제히 쾅 하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연단의 작은 문이 열렸다.

“위대한 현신께서 납십니다.”

대신관을 호위하는 크바르나의 카랑카랑한 외침과 동시에 홀의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위대한 현신의 은총을 찬양하나이다!”

경비병으로 배치된 오르마즈와 이트닌도 할버드를 오른쪽 어깨에 기대어 세우고 이 함성을 따라 외치며 부동자세로 고개를 꼿꼿이 쳐들었다. 그는 살짝 곁눈질로 혹여 대신관을 볼 수 있을까 했지만 그가 느낄 수 있는 대신관의 흔적은 느릿한 발걸음 소리와 단상의 큰 베일 너머 아주 희미한 남자의 실루엣 뿐이었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 그쪽에서 시선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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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스난은 배에 얹혀 있는 남자의 굵은 팔과 큰 손이 혐오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가 누군가와 잠자리를 하고 난 후 눈물을 흘려 본 건 18살 때 그를 유린했던 포주와의 악몽 같은 첫날밤 이후 처음이었다. 물론 그때보다 훨씬 호사스런 침실에서 마구스 수행 시녀들의 접대까지 받으며 누워있지만 그렇다고 끔찍한 느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어디인지도 모를 ‘건물’ 안에 갇혀 있었다. 지난밤 내장을 쏟아내며 매달린 황제 스파이들과 황족들 절반은 죽었고, 끔찍하지만 절반은 하루가 넘어간 지금까지도 여전히 숨이 붙어 자신의 생존력을 저주하고 있었다.

그런 곳을 빠져나가려 어쩔 수 없이 이 남자를 받아들여야 했기에, 더 끔찍했다.

살름의 품 안에서 한숨을 내쉬던 케스난은 침대 옆에 뒹굴고 있는 그의 가방에서 삐죽삐죽 나와 있는 몇몇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혹시 바람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 공용어로 쓰여 있어서 몇몇 내용들을 볼 수는 있었다.

그는 혹시 교단 기밀문서일까 하는 생각에 잔뜩 주시했지만 문외한인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화학식과 염기서열 뿐인 것을 보고는 실망하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자신을 안고 있는 이 덩치가 원래는 농학자였었다.

케스난은 일단 서류에 있는 아는 글자만이라도 읽어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학술적인 내용은 케스난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항바이러스제], [내성], [유전자조작 옥수수, 감자, 밀], [44호 바이러스] 같은 부분적인 내용들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45호 바이러스 추출 실패]라는 문장에 유독 눈길을 주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이들이 요즘 바이러스에 관심이 많은 것이 분명했다.

“우, 음, 가만히 있어.”

살름이 어눌하게 중얼거리며 케스난을 품 안으로 다시 잡아끌었다. 시커먼 털이 북슬북슬한 살름의 가슴팍이 등에 와 닿은 순간, 그는 바퀴벌레가 무더기로 달라붙은 것 같은 끔찍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갑자기 황제 생각이 났다. 다정한 말을 속삭이며 유리 다루듯 소중하게 매만져주던 황제의 손길과 품이 그리워 미칠 것 같았다. 그가 황제와 관계를 가질 때는 갖은 앙탈에 거친 애무를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는 흥분을 못 이기고 갈고리로 상처까지 자주 내곤 했었지만 희한하게도 끝난 후 기억에 남는 건 그런 자극적인 순간보다는 그가 속삭여준 따스한 한 마디, 혹은 진심이 담긴 짧은 입맞춤 한 번이었다.

지금도 그와의 격한 섹스보다는 ‘무서웠겠구나.’라고 속삭이며 다정히 안아주는 따뜻한 포옹 한 번이 정말로 그리웠다.

“어땠냐?”

케스난은 이번엔 아예 대답을 않기로 했다. 관계 도중에도, 끝난 직후에도, 뭘 그리 확인하고 싶은지 저 한심하고 짜증나는 질문을 틈만 나면 해 대고 있었다. 처음엔 나름 교태를 부리며 받아주었지만 이젠 그의 인내도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어땠냐고?”

살름이 쩌렁쩌렁한 고함과 함께 팔에 힘을 주며 케스난을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놀란 케스난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갈비뼈 옆 시커먼 멍자리를 눌려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이것도 7척(210cm)이 넘는 이 거인이 흥분한 나머지 그 괴물 같은 손아귀로 옆구리를 꽉 움켜잡아 남겨놓은 상처였다.

사실 그는 애무 한 번 받아보지 못했고, 먼 옛날 밑바닥 창녀 시절 그랬듯 일방적인 명령에 치욕적으로 따라야 했다. ‘받는 것에만 익숙한’ 마구스에겐 애당초 상대를 배려한다는 것 따위는 없었다. 그에게 인간 여자는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흥분하면 반응하며 소리를 지르고, 마지막엔 자신의 정액을 받아주는 인형에 불과했다.

그제야 배시시 눈을 뜬 살름이 케스난의 옆구리에 난 멍을 보고는 미안한 듯 괜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네가 워낙 맘에 들어 이런 거야.”

“두 번 맘에 들면 목을 비트시겠어요.”

케스난이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눈물자국을 감추었다.

“이 정도면 보통 인간에겐 내 딴엔 최선을 다한 거지. 내 신도라면 이 멍 정도는 은혜로 생각해야 마땅하지.”

살름이 코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 소름끼쳤다. 하지만 정작 이 사내는 그와의 잠자리가 꽤 맘에 들었는지 벌써 두 번 유린한 것으로도 모자라 다시 그를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이제 좀 그만해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이 괴물 같은 남자는 여전히 굶주림을 다 못 채운 모양이었다. 그는 케스난의 뒷덜미를 덥석 붙들고는 그의 얼굴을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자, 다시 해 봐, 네 입에서 ‘현신님이 최고였어요.’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계속 시킬 테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진 케스난이 목을 비틀며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려 하는 순간, 밖에서 들려온 웬 목소리가 케스난을 위기에서 빼내 주었다.

“현신이시여, 이쪽은 괜찮으십니까?”

“움?”

살름이 케스난을 옆으로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가운을 대충 걸치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를 따라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던 케스난은 옆구리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간 것 같았다.

“뭐냐?”

문 앞에는 중무장한 헤네티가 이번 내방객 중 하나인 듯한 웬 남자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서 있었다. 그들을 데려온 쿠마르가 조심조심 말했다.

“놈들이 미끼를 물었습니다. 다섯 놈 정도가 빠져나가려고 기계실로 접근하던 걸 잡아냈고, 두 놈은 무기를 소지하고 위대한 현신의 처소에 접근하다가 잡혔습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케스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걱정대로, ‘비어있는 말뚝’에 지레 놀란 남은 프락치들이 폐쇄된 공간 안에서 결국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말뚝 여러 개 더 박아야겠군.”

살름이 키득거리며 쿠마르의 발밑에 팽개쳐져 있는 남자의 얼굴을 꾹 밟았다. 하지만 쿠마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놈들은 내일 아침 매달 참입니다. 저어, 그런데…….”

쿠마르는 침대에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케스난을 의식했는지 살름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그리고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마무리했다.

“생각 외로 크게 당한 것 같습니다.”

얼굴이 굳어버린 살름이 목소리를 잔뜩 낮춰 다시 물었다.

“위대한 현신께선 뭐라 하시나?”

“그곳 계획을 서둘러야겠다고만 하셨습니다. 현신님들을 다 불러 모으셨습니다. 최대한 빨리 채비 갖추고 올라가 보셔야 할 듯합니다.”

“제기랄.”

살름은 케스난을 만족할 만큼 즐기지 못한 것이 내심 불만인지 침대에 있는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쿠마르가 짧게 덧붙였다.

“저 여자도 데려오시랍니다.”

“엉?”

이 순간 살름보다 더 놀란 건 케스난이었다. ‘이제 끝장인가.’하는 아찔한 느낌이 먼저 뇌리를 스쳤고, ‘그게 아니라면 진짜 대어’일지 모르겠다며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어느 쪽이든, 이젠 운명에 맡길 도리밖에 없었다.

“일어서 따라와. 너도 그분을 뵙겠구나.”

살름의 손짓에 케스난이 옆구리의 지독한 고통을 이를 악물고 버티며 일단 몸을 일으켰다.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섣부른 행동을 피해 아직까지 죽지 않은 것만으로 일단 만족하며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부주의하게 잡힌 자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는 적진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얼굴이 가려진 채 살름의 침실을 나선 케스난은 옆구리의 고통을 이를 악물고 견디며 걸음을 내디뎠다. 다행히 살름이 30분쯤 이따가 오라며 먼저 나간 덕분에 끔찍하리만큼 더럽혀진 몸도 몇 번이나 씻고, 아픈 옆구리에 진통제라도 바를 시간은 있었지만 여전히 걷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시종인지 헤네티들인지는 알 수 없는 남자 둘의 손에 이끌려 복도와 엘리베이터를 한참 돌고 돌아 낯선 방에 도착했다. 그는 얼굴의 자루가 벗겨지면 바로 바깥부터 확인하리라 맘먹었지만 허탈하게도 이 방 역시 창문은 없었다.

“저년입니까, 살름?”

몇 시간 전, 행사장에서 들었던 바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케스난의 온몸이 확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그는 가슴에 손을 모으고 교단 방식대로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의 앞에는 반투명한 베일이 쳐진 원탁이 보였고 ‘대신관’은 그 안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케스난은 호기심에 휩쓸려 섣불리 안쪽에 관심을 두고 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소녀 현신의 새로운 육체를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바닥에 코를 가까이 가져갔던 그는 비릿한 쇠 냄새를 느꼈다. 잠시 의아했던 그는 곧 생각을 바꿔야 했다. 얼굴 옆 줄눈에 길게 스며있는 핏자국이 보였다. 그 길이를 보아 조금 전, 이곳에서 누군가의 목숨이 달아난 듯했다.

“네 10년 동안 한 번도 문제 없이 거래를 이어왔다지?”

“소인 사업가이옵니다. 북부 사업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상대인 이디나가 북부 조합의 실무자 출신이라는 것을 떠올린 케스난은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기는 대신 자신의 실리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로 작전을 정했다. 다행히 작전이 적중했는지 위쪽에서 불호령 대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보아하니 내 이 몸뚱이의 이전 모습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하구나?”

“제 기억력이 망가진 게 아니라면 바하칼리의 제련소 현장에서 실무자들 모두가 앞 다투어 칭송하던 바로 그 몸 아니시옵니까?”

다시 대신관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장사꾼이라면 당연히 그런 이야기는 놓치지 않았어야 하지. 네 맘에 드는구나, 일어나 고개를 들어 봐라.”

베일이 열리며 밑단이 바닥에 스르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바닥에 코를 대고 있던 케스난은 비로소 비릿한 피 냄새를 벗어나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앞에는 사람 열댓 명은 족히 누움직한 큰 원탁이 놓여있었고, 그 중 다섯 자리가 차 있었다. 4명은 낯이 익었지만 한 명은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탁에 새겨져 있는 문장과 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그 ‘익숙치 않은 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케스난은 먼저 와 있던 살름의 눈치를 보았다. 무슨 이유인지, 그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 보였다. 그의 앞에는 곡물 종자가 가득 든 작은 병 몇 개와 정체불명의 검은 가루가 든 병이 함께 놓여 있었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케스난은 저것들이 황실에서 쫓고 있는 ‘오염 곡물’ 종자와 ‘검은 재’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두 개가 끔찍한 결혼을 하면서 지금 제국민들 수백만을 노화와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런 눈치를 챈 듯, 짓궂은 악동으로 유명한 샤마시 교단의 가르시바 마구스가 케스난에게 볍씨가 든 병을 불쑥 내밀었다.

“눈 딱 감고 이걸로 오늘 저녁 밥 해 먹으면 내 자네한테 우리 교단 입찰 건 다 맡기지.”

“정말 그랬다가는 저 여자가 아니고 그 자식한테 입찰 줘야 할 텐데?”

마구스들이 시시덕거리며 실없이 웃는 모습에 당황한 케스난이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짐작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의 농담이 지난 후,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내 네게 아주 간단한 일 하나를 맡기려 한다.”

케스난이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이번엔 똘마니인 살름이 아닌, 대신관이 직접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려는 게 분명했다.

“우리도 애써 보았지만, 이번 일은 너처럼 밑바닥 사정에 밝은 사람이 필요할 듯 하구나.”

“말씀만 주십시오.”

“사람을 찾아서 데려오는 일이야.”

케스난이 입술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의 머릿속에 황제의 심복들이나 스파이를 잡아내 데려오라는 그런 류의 내용들이 무수히 스쳤다.

“그런 일은 제 전문이지요.”

케스난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번엔 대신관에 뒤이어 아트위야 마구스가 입을 열었다.

“오르마즈 카파키 그자의 둘째 남편이었던 네포프 칼리를 찾아오거라.”

“예에?”

케스난의 어깨가 들썩했다. 오르마즈의 둘째남편 네포프 칼리 경은 아내의 사후 행방불명이 되어 200년 가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는 지금 황제 역시도 오르마즈 경의 유품에 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그 남자를 애타게 찾는 중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케스난의 눈앞이 막막해졌다. 그자를 찾는 것도 찾는 것이려니와 설사 찾는다 해도 이들에게는 절대 넘길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자를 찾아오면, 내 너에게 정말로 중요하고도 큰 임무를 하나 맡길 것이다.”

대신관의 목소리에 케스난의 숨이 탁 막혀왔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일단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맨손으로 시작하느니보다는 발판 하나라도 놓는 것이 나으니…… 혹 그 남자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계신다면 알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아트위야가 잠시 대신관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대신관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궁금하면 알려주지, 그 남자가 지 마누라 죽은 후에 한동안 근위대 나팔수 노릇 하며 비난하고 다닌 건 알 거다.”

“들은 일 있사옵니다.”

“그러면서 당시에 근위대장도 꽤 두둑한 사례를 해 주었는데, 그 중엔 네포프 칼리 그자의 특별한 요구사항도 하나 있었다는군.”

“그게 뭡니까?”

“처제 세네피스 카파키 전 황후.”

충격을 받은 케스난의 어깨가 들썩했다. 그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물었다.

“그래서……소원대로 해 주었답니까?”

“약속은 지킨 것 같더군. 지금까지 파악된 그놈 마지막 행적도 콜 정치범 수용소에 들러 그 여자를 만나고 떠난 것이었으니까. 그 뒤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지. 휘익~”

아트위야가 손바닥 위에 대고 숨을 후우 부는 모습이 마치 장난처럼 보여 묘하게 기분이 나빴지만 어쨌든 케스난에겐―그리고 황제에겐― 천금 같은 정보가 틀림없었다.

“알겠사옵니다. 혹시 더 주실 정보는 없으신지요?”

케스난이 바싹 긴장하며 다시 물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들이 자신에게 이 임무를 맡긴 이상 그자를 찾는 데 교단의 알짜배기 정보나 이들의 자원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니 도리어 행운이라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아, 그리고 그날 네포프 칼리 그자를 태우고 사라진 차를 운전하던 놈이 아주 덩치가 좋았는데 외모가 정말 특이했다더군. 몸 반쪽에 화상자국이 있었는데 꼭 양쪽 다른 놈들 둘을 잘라 붙여놓은 것 같아서 경비병들도 잊어버리지를 않고 있던걸. 그 외엔 별건 없다.”

시종 한 명이 아트위야가 내놓은 파일을 케스난에게 전해주었다. 네포프를 찾아 이들에게 넘겨주어서 마구스들의 신임을 따낼지, 아니면 그냥 황제에게 넘길지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겠지만, 어쨌든 케스난으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천한 소녀에게 이런 임무를 주시어 감사하옵니다.”

케스난은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살름 쪽을 힐끔 곁눈질했다. 살름은 자기가 데려온 여자가 나름 임무를 받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표정이 밝지 않았다. 대신관이 그에게 좀 웃으라며 슬쩍 눈치를 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중요한 임무를 받았으니 이곳에서 내보내 주마. 살름 현신이 오늘 저녁 여길 나갈 참이니 함께 가도록 해.”

케스난으로서는 지금까지 들은 말 중 가장 기쁜 한 마디였다. 드디어 사지를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갑자기 긴장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현신의 넓은 배려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대신관의 손짓을 받은 케스난은 아트위야가 넘겨준 파일을 가슴에 보물처럼 껴안고 뒷걸음쳐 마구스들 앞을 빠져나왔다.

비록 황제의 프락치들이 몰살을 당했고, 지독한 공포를 버텨내야 했던 이틀간이었지만, 최소한 케스난 한 명으로만 보면 수확이 없지 않은 날들이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 이곳 사정을 황제에게 알릴 생각에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달랬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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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자르기가 뭣해서 좀 길게 올립니다. 추천, 코멘트, 평점 좋은 흔적으로 의욕 올려주시는 분들께선 앞으로도 긴 글로(?) 복받으실 겁니다. ~~~(연재하는 유일한 낙입니다. ㅎㅎㅎ)   ( ̄∇ ̄)ブ~~★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어 평소보다 좀 일찍 올리고 나갑니다.

같은 사정으로 eBook 올리는 것이 자꾸 늦어지고 있어 정말 죄송합니다. 1부 1~4권까지 작업은 거의 끝난 상태이고 샵에 올리고 판매 승인만 받으면 되는 상황인데 마지막 단계에서 시간이 좀 걸리고 있네요. 3,4권은 19금으로 판매예정입니다.

조만간 올리고 이곳에도 공지 올리겠습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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