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95화 (990/1,132)

< -- 995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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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식전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오르마즈는 이번 작전의 최대 표적인 베일 안쪽 ‘대신관’을 뚫어지게 관찰했지만 수확은 별로였다. 그가 볼 수 있는 건 옥좌에 앉아있는 검은빛 실루엣뿐이었다. 펑퍼짐한 로브 위에 케이프와 머플러, 앞뒤로 이런저런 장신구를 워낙 주렁주렁 달고 있어 외모 구분은 고사하고 임산부가 저 안에 들어앉아 있어도 알아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다만 분명한 건 키는 제법 커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서 약간 떨어진 왼쪽의 다른 옥좌에는 대신관과 거의 비슷한 차림새이지만 로브부터 장신구까지 흰색으로 치장한 채 대조를 이루고 있는 또 한 명이 보였다. 그 역시 다른 건 몰라도 키는 ‘대신관’과 얼추 비슷해 보였다.

“저 사람이 대신관 맞을까?”

“예?”

이트닌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다하카르 가문 사람들은 대대로 중키에 곱상한 외모라고 들었는데 키가 너무 크잖아? 대충 어림해도 6척 2촌(184cm)은 넘어 보이는걸.”

“흐음, 그렇긴 하네요.”

이트닌의 표정도 그제야 한결 심각해졌다.

“공개행사에 대역을 내보낸다는 말은 전부터 있었죠. 이번에도 대역일까요?”

“대역이라고 해도 중요한 행사니까 가까운 데서 지켜보고는 있을걸. 대역한테 어떤 결정을 내려줄지 알려주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니겠어?”

오르마즈는 한편으로는 표적이 대역이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저 표적에서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괜한 느낌이지만, 생김새도 안 보이는 저 정체불명의 표적을 꼭 언젠가 만난 것 같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크바르나로 위장했을지도 모르죠.”

이트닌이 대신관과 트라카 마구스 바로 뒤에서 할버드를 쥐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 4명의 크바르나 헤네티들을 가리켰다. 대신관 직속의 최정예 헤네티인 저들은 교단 병력 내에서 X와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오늘 들고 나온 무기도 실용성과는 거리가 있어보였고, 다소 요란스런 장식용의 투구와 조각품에 가까운 갑옷, 거추장스런 보랏빛 망토는 정작 싸울 때는 도리어 짐이 될 듯 보였다. 사실 오늘의 작전도 저들의 그런 약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때, 의원들의 모두발언을 경청하고 있던 문제의 ‘표적’이 무언가 느낀 듯 갑자기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어느 순간 오르마즈가 있는 2층 테라스를 휙 올려보았다. 기겁을 한 오르마즈와 이트닌은 재빨리 뒤로 슬쩍 물러나 다시 할버드를 쥐고 부동자세를 잡은 척했다.

“설마 우릴 보고 있는 건 아니겠죠?”

이트닌이 입술을 최대한 조금 움직이며 웃기는 발음으로 물었지만 오르마즈는 얼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베일 때문에 시선 방향까지 구분할 수는 없어도 저 대신관인지 가짜 대역인지의 고개가 이쪽을 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 봤자 제대로 정복 차려입은 장신의 헤네티 장교와 땅콩만한 사관 둘이 보일 뿐이겠지만.

다행히 이곳을 바라보던 대신관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요동의 대표위원 암바카이 치노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후우.”

둘이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모두발언이 이어지는 동안, 그 ‘대신관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무언가 불안정한 기색으로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트닌이 슬쩍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대신관이 잔혹하긴 해도 꽤 진중한 사람이라 들었는데 저리 산만한 인물이었나요?”

“글쎄, 나도 처음 봐서.”

오르마즈가 건성 대답하며 시계를 보았다. 1시간여의 모두발언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본안 토의가 있을 다음 세션까지는 20여분간의 휴식시간이 남아있었다. 다음 세션에선 대신관을 지키는 크바르나들만 남고 오르마즈 같은 일반 헤네티들은 자리를 비워주어야 했다.

“자코프 아유브 의원은 ‘대신관’보다도 더 방정맞군요.”

이트닌은 홀 중간에서 틈틈이 이쪽을 곁눈질하는 자코프를 가리켰다. 그는 뜻밖에 낚은 횡재 같은 미녀를 안을 생각에 벌써부터 몸이 달았는지 몇 번이나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붙였다 하며 시계만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모두발언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리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슬슬 시작이군.”

오르가 할버드를 어깨에 대충 걸치고 홀 밖으로 향했다. 이제 이곳엔 다시 돌아올 일이 없을 터였다.

“으음?”

문을 나가려던 그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베일 너머 대신관, 혹은 그 대역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의 뒷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투구 때문에 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마치 진짜 신에게 행동을 읽히고 있는 듯한 두려움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그는 감히 ‘위대한 현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

‘왜 이러니, 오르마즈.’

그는 급히 시선을 거두며 문을 나섰지만 마치 무언가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나가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선을 떨치고 나온 오르마즈는 뒤따라 나오는 이트닌에게 일렀다.

“내가 수술실 블록 문을 열어놓고 들어갈 테니 너흰 뒤따라와서 대신관의 탈출로에 매복하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오르마즈의 마음이 어딘지 무거웠다. 알 수 없는 눈길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대신관’을 죽이는 임무가 이제 시작될 참이었다.

홀을 나온 오르마즈가 약속한대로 지하 복도로 이어진 수술실 블록 철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 금발의 느끼한 미남자는 이미 기둥 뒤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세션은 한 시간 동안이야.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안건들이지.”

자코프는 휴식시간을 마치고 도로 닫혀있는 문을 가리켰다. 휴식시간을 마친 홀 안에서는 다음 세션이 시작되었는지 누군가 혼자 목청 높여 말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둘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재빨리 확인했다. 대신관을 지키는 크바르나 헤네티들은 행사장인 홀 내부에 모여 있고 다른 일반 헤네티들은 이렇게 복도를 순찰하거나 대신전 밖에서 시위대들을 막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덕분에 대신전 내부 다른 곳들은 사실상 텅 비어있는 셈이었다.

주변을 확인하던 오르마즈는 위층에서 순찰을 돌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우람한 체구의 한 다하카르 헤네티에게 흘끔 시선을 주었다. 붉은 머리칼에 초록색 눈동자를 한 그 건장한 헤네티는 오르마즈에게 피식 웃음을 한 번 보였다. 오르마즈는 입놀림으로 베흔에게 슬쩍 지시사항을 확인했다.

“15분 후다.”

베흔에게 지시내용을 확인시킨 오르는 다시 자코프에게 돌아섰다.

“제 아랫놈이죠. 눈치가 빠르군요. 아무도 못 오게 할 겁니다.”

경비병의 등장에 잠시 놀랐던 자코프는 그제야 손등 피하에 설치되어 있는 생체 칩을 철문의 보안시스템에 가져갔다.

“여길 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여자 앞에서 잘난 체하고 싶어 몸아 달아오른 자코프가 문의 생체 인식장치를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수술실 블록과 통하는 이 보안문은 마치 거울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것이 대체 어디가 문이고 어딜 당겨야 하는지도 모르게 생긴 희한한 구조였다. 이 안엔 신전 부설병원과 의학교에서 사용하는 수술실과 실험실이 있고, ―원래 용도는 아니지만― 만약의 경우 총회가 열리는 홀에서 건너편 병원 건물로 달아나는 비상 탈출구로도 쓰일 예정이었다.

사실 수술실과 실험실에 불과한 이곳이 이렇게 첨단의 보안시설을 갖춘 건 트라카 교단의 중심 연구시설이어서였다. 이전 X들을 연구하던 트라카 교단의 연구소가 민병대에 약탈당한 이후로 트라카 교단은 연구시설의 보안에 히스테리라고 할 만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트닌을 포함해 보안국의 내로라하는 보안 전문가들이 회의장과 이어진 이 문을 통해 병력을 접근시켜 보려 별의별 시도를 다했지만 손잡이 하나 없는 이 희한한 거울 모양 미닫이 문은 도무지 어떻게 열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걱정하는 부하들을 향해 ‘까짓 기계를 못 뚫으면 인간을 뚫으면 될 것 아닌가?’라며 결국 ‘조금 다른’ 해결책을 내놓았고, 그 표적이 이 사내였다.

“봐, 됐지?”

자코프의 손등이 중앙에 닿자 잠금장치에서 파란 불이 켜졌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넣으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자코프가 별 의심도 없이 6자리의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이음매 하나 안 보이던 문 왼쪽에서 딸깍 하며 손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잡이에 손을 넣고 당기자 꿈쩍도 하지 않을 듯 보이던 이 유리문이 매끄럽게 옆으로 밀리며 입을 벌렸다.

“즐길 시간이군.”

자코프는 오르마즈의 손을 붙들고 수술실 블록에 들어섰다. 안에서 도로 잠기는 문을 힐끔 돌아보았던 오르마즈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싸늘한 느낌의 길고 음침한 복도가 그의 앞에 놓여있었다. 오르마즈는 그제야 이곳이 어딘지를 깨달았다.

“엄마…….”

오르마즈가 침을 삼키며 이마에 박힌 다하카르의 조각을 더듬었다. 20여년 전, 위층의 대신전에서 다하카르에게 간택된 직후 이 조각을 박기 위해 무서운 아저씨들에게 붙들려 끌려 내려왔던 바로 그 길고 소름끼치는 복도였다. 끌려가는 내내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었던 기억이, 그리고 뒤에서 딸을 찾는 엄마의 절규가 희미하게 메아리쳐 들려왔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런데 부설 병원으로 귀빈처럼 ‘모셔져’ 아무 고통도 없이 조각을 박았다는 다른 간택자들과는 달리 왜 자신만 이 소름끼치는 지하실에 끌려와 혼자 그 고통스런 수술을 받아야 했는지, 엄마는 남들 다 기뻐하는 일에 왜 그리도 슬프게 울었는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빨리 들어오지 않고 뭐 해.”

엄마의 추억을 방해당한 순간, 발끈한 오르마즈는 하마터면 자코프의 턱에 주먹을 날려버릴 뻔했다. 하지만 일단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미리 준비해 온 작은 쇳조각을 문의 잠금장치에 몰래 슬쩍 끼웠다. 오르마즈가 들어서면서 문은 다시 잠겼지만 기술진이 만들어준 저 쇳조각이 제 역할만 한다면 밖에서 베흔과 이트닌이 다시 문을 열고 뒤를 따라올 수 있을 터였다.

“여긴 중간 복도야. 여긴 원래 사람 다니라는 복도가 아니고 양옆 수술실에 들어가는 설비하고 동력 파이프 지나가는 서비스 통로라 문도 없지.”

오르마즈는 말없이 자코프를 따라 들어갔다. 이곳에 도면에 있던 3개의 복도 중 대신관의 탈출로인 중간 복도였다. 자코프는 계속 잘난 체하며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오르로서는 제 입으로 구조를 다 말해주고 있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

“왼쪽으로 나가면 수술실하고 처치실이 있을 거야. 조용히 놀기는 딱이지.”

중간 복도는 머리 위로 파이프만 그득할 뿐 따로 갈래길도, 문도 없다보니 직선으로 계속 죽 이어졌다. 아마 이래서 대신관의 탈출로로 선정한 모양이었다. 한참 후에야  양옆으로 통로 하나씩이 나타났다. 도면의 기억을 되짚어보니 양옆의 ‘사람 다니는 통로들’과 이어진 문이었다.

“여긴 나 없으면 너 혼자는 다니지도 못 해.”

자코프는 또다시 잘난 체를 하며 손등의 칩을 대고 비밀번호를 누른 후 문을 통과해 남쪽 복도에 들어섰다. 자코프의 말대로, 이자가 없이는 돌아다니지도 못할 판이었다.

‘안되겠군.’

이미 뒷주머니에서 단검을 잡고 남자의 급소를 딸 태세만 갖추고 있던 오르마즈는 사방팔방 널린 잠금장치에 생각을 미루기로 했다. 언젠가 이트닌에게서 생체 칩은 당사자가 죽으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이 느끼남을 함부로 죽였다가는 자칫 계획이 다 망가질 판이었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바로 맞은편에 ‘처치실’이 보였다.

“그래, 네 생각이 맞아, 더러운 창고보다는 여기가 훨 낫겠어.”

처치실에 들어선 자코프가 입고 있던 머플러와 케이프를 벗어 내던지며 오르마즈를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가 있는 벽으로 거칠게 몰아붙였다.

“내 한 시간이나 기다리느라 내 거시기가 미칠 뻔했다.”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마냥 허겁지겁 바지 벨트부터 끌렀다.

“날 만족시켜주면 앞으로 평생 먹고 살 걱정 안 하게 해 줄 수도 있어.”

그는 오르의 손을 덥석 잡아 자신의 바지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신가요?”

오르마즈가 나머지 한 팔로 그의 뒤통수를 붙들고 품에 안는 척 꼭 잡아당겼다. 흥분한 나머지 기뻐하며 오르의 가슴팍을 풀어헤치려 했던 자코프는 무언가 뒷덜미의 서늘한 느낌에 멈칫했다.

“절 만족시켜주지 못하면 이 침대가 아니고 옆에 있는 영안실에 눕게 되실 겁니다.”

오르마즈가 자코프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이며 마수를 드러냈다.

“어디 무엄하게 그 따위 농담을…….”

버럭 화를 내려 했던 자코프는 귀 옆에서 반짝거리는 단검 날끝을 그제야 보았다.

“으윽!”

자코프는 뒷덜미를 정확히 얻어맞고는 오르마즈의 허벅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명 의식은 있지만 몸이 잠시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헤네티라고 여겼던 이 키 큰 여자는 미리 준비해 온 줄로 쓰러진 그의 입과 손을 순식간에 동여매고는 절반쯤 벗어놓은 바지 중간을 꽉 묶어 다 벗지도, 제대로 입지도 못 하게 만들어놓았다. 자코프는 그제야 당한 것을 알았지만 이 텅 빈 수술실 블록에서 이 괴한에게서 그를 구해 줄 사람은 없었다.

“일어나세요, 뺀질이 아저씨.”

오르마즈가 손발이 묶인 남자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는 자코프를 질질 끌고 처치실을 나서서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는 구석진 곳에 있는 시체실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자코프가 무어라 떠들려 했지만 입이 묶여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시체실 문을 걷어차 연 오르마즈는 제일 안쪽에 있던 보관고 문을 서슴없이 확 열어젖혔다.

“으익.”

놀란 자코프가 한 발 물러나려다가 바짓자락에 걸려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다, 움직여 봐.”

오르마즈의 지시에 보관고 자루 안에 들어있던 ‘시체’들 중 둘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오르마즈가 꾸물거리는 자루 주둥이를 칼로 뜯어내자 안에 숨어었던 뼈다귀와 톱날이 창백하게 얼어붙은 몸을 비틀어 녹이며 엉금엉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지난밤 해부실습용으로 들여다 놓은 20구의 기증 시체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아우, 욕창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보스.”

“냄새는 또 어떻고, 으휴, 질식해 안 죽은 게 용치.”

몸이 굳어버린 둘이 진절머리를 치며 제자리를 방정맞게 이리저리 마구 뛰어다녔다.

오르마즈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5분 남았으니 준비해. 이 남쪽 복도다.”

“알겠습니다.”

굳은 몸을 대충 푼 셋은 시체주머니에서 무기와 산소마스크, 인화물질 통을 꺼내 챙겨들고 복도로 달려 나갔다. 뼈다귀는 사방에 인화물질 통들을 설치했고, 톱날은 천장에 달린 소방시설들을 부수고 유사시 유독가스를 내보내는 응급 배기구에도 발포 스프레이를 뿌려 무용지물을 만들어버렸다. 그 사이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갔다.

“다 됐나?”

오르마즈의 물음에 작업을 끝낸 두 전사들이 헐레벌떡 돌아와 오르의 옆에 섰다. 그리고는 손에 든 석궁과 칼을 확인했다. 이전 오름의 전투에서 빼앗아 온 자그만 헤네티 석궁이 이젠 오르에게도 몸처럼 익숙했다. 뻥 뚫린 복도를 보며, 오르마즈가 큰 숨을 들이마셨다.

“시간 됐다. 손님들 올 시간이다.”

헤네티 사관 차림으로 회의가 열리는 1층 홀 입구를 서성거리던 청년 베흔은 일반인 기준에서는 너무 큰 체격 때문에 자신이 괜히 주목을 끌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X로서는 처음 이런 임무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에 부담감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X들은 특무대 전투병력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들의 역할은 소위 말하는 ‘몸빵’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 큰 체구와 우락부락한 외모, 빈약한 상식 때문에 교단의 엘리트들이나 종교적 열정과 지식으로 충만한 헤네티들 사이에서는 쉽게 티가 나기 일쑤였다.

게다가 민병대 지휘부 사이에서도 X들은 무식하고 단순하다는 편견이 워낙 굳어져 있어 그들에게 변변한 정규교육을 시키지도 않았다보니 지식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제대로 대처를 못 했다. 결국 그들의 역할은 시민 지휘관 밑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사실 어느 쪽이 원인이고 결과인지는 닭과 달걀의 문제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는 그래왔고, 이번에도 베흔은 원래는 밖에서 상황을 관찰하는 시위대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인사권을 가진 지휘관 오르마즈는 윗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번 작전의 핵심 임무를 기꺼이 맡겨 주었다.

때마침, 복도에서 짧은 방송이 울려퍼졌다.

- 현재 신전 바깥에서의 시위가 폭력 양상이 되고 있으니 헤네티 2지대는 외부 치안요원들을 도울 것. -

“망치 놈이 제법 잘 하고 있네.”

베흔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총회장 밖 시위대에 미리 섞어 놓은 바람잡이들과 프락치들로 상황을 격화시켜 내부 주의를 돌려놓는 것도 오르마즈의 계획 중 하나였다. 시위가 커졌으니, 이제 안쪽에서 슬슬 일을 벌일 때였다.

계단을 막 내려가던 베흔은 머리를 빡빡 깎은, 제법 예쁘장한 스루바라 교단 여자 성직자와 딱 마주쳤다. 성직자가 먼저 말을 건넸다.

“다하카르와 그의 힘을 지배하시는 위대한 현신께 영광을.”

“스루바라와 그의 어둠을 품으신 화신께 복종을.”

베흔은 스루바라 교단 여자 성직자에게 유창한 바람어로 답을 해 주었다. 그 성직자는 베흔의 매끄러운 발음과 굵고 지적인 목소리, 남자답고 매력적인 외모에 호감을 느꼈는지 살짝 눈웃음까지 건네며 지나갔다. 사실 성직자와 헤네티가 연인이나 부부가 되는 경우도 꽤 흔했다.

‘휴우.’

내심 불안에 떨고 있던 베흔은 자신의 외모와 태도가 상대방에게 통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잠시 움츠러들었던 자신감이 다시 충만해졌다. 그는 지나는 성직자나 헤네티들에게 태연히 눈웃음을 보내며 홀 주변을 빙 둘러 난 통로를 순찰하듯 걸었다.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도중엔 크바르나들을 제외한 일반 헤네티들은 내부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복도 끄트머리에 도착한 베흔은 머리 위에 있는 작은 철망 환풍구를 힐끔 쳐다보았다. 워낙 옛날에 지어진 건물이라 홀 안쪽과 바깥을 관통하는 얼굴만한 크기의 철망 구멍이 군데군데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베흔은 주머니에 있던 음료수 병을 꺼내 뚜껑을 살짝 비틀어 내용물이 조금씩만 흘러나오게 하고는 환풍구에 슬쩍 눕혀놓았다. 이제 병에서 흘러나온 인화물질이 홀 안쪽 벽을 타고 흘러내려 ‘겉보기는 화려한’ 합성섬유 마감재를 흠뻑 적실 터였다. 4번째까지, 이제 완성이었다.

‘끝났나?’

그는 암호 송신기에 나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트닌이 보낸 ‘1’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준비 완료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기다렸다.

1분 정도나 지났을까,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에서 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불이다! 주 계단 계단참이야!”

베흔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이트닌이 첫 시작을 때맞춰 끊은 모양이었다. 그는 방금 인화물질을 부어놓은 철망 환풍구에 미리 준비한 나트륨 조각을 슬쩍 밀어 넣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인화물질의 수분과 만난 나트륨에서 짧은 틱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번지기 시작했다.

“불이야! 불! 계단으로 가!”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계단으로 달려가고 있는 새, 베흔도 소스라치게 놀란 척 복도를 뛰어다니며 인화물질로 흠뻑 적셔놓은 4개의 철망 안쪽에 간단한 화학지식만으로 아무도 모르게 작은 불을 붙였다. 이트닌의 말대로, 과거와 최신 기술이 공존하는 이 건물은 다른 건 몰라도 화재에는 턱없이 약했다.

“오지 말아요! 위험해요!”

베흔이 위층과 이어진 계단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불이 난 목조계단 중간은 이미 시뻘건 불길이 뒤덮어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불을 끈다 해도 저렇게 타버린 나무계단을 걸어 오를 수는 없었다. 나무계단이 타면서 홀을 둘러싼 복도 전체가 매캐하고 탁한 연기로 가득 들어찼다. 이트닌이 붙인 불이 1탄을 끊었으니 이젠 베흔이 홀 안쪽에 저질러 놓은 일이 터질 차례였다.

“불이야! 불!”

이번엔 회의 중이던 홀의 문이 확 열리더니 파랗게 질린 의원들이 몰려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200여명의 의원과 성직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던 내부도 베흔이 붙여놓은 불 때문에 회색빛 유독가스로 가득 차 있었다. 딱히 화염은 보이지 않지만 벽의 장식재로 쓴 합성섬유가 타며 내는 유독가스가 문제였다.

“의원님들은 비상구로 되돌아가십시오! 여긴 안 됩니다!”

계단의 불을 끄려 하고 있던 헤네티들이 연기에 당황해 몰려나오려는 의원들을 저지하며 외쳤다.

“정면 양쪽에 비상 출구가 있습니다! 옆 건물로 이어지니 그리로 가세요!”

“어떻게 된 거냐! 왜 여기저기서 다 불이 날 수 있는 거냐?”

격앙된 의원 한 명이 헤네티 소령의 멱살을 붙들고 악을 썼다. 소령이 그를 달래주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방화인 듯 하지만 보시다시피 아주 큰불은 아니니 염려 마십시오. 소방대가 오고 있다 하니 일단 옆 건물로 대피부터 하십시오, 이미 신전을 폐쇄했으니 방화범은 저희가 잡겠습니다.”

잠시 혼란에 빠졌던 의원들은 헤네티들의 침착한 대처에 곧 안정을 되찾고 미리 비상구로 설정되어 있던 안쪽 출구로 줄을 맞춰 움직였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전요원을 맡은 크바르나들이 홀 안에서 수술실 블록과 연결된 양쪽 2개의 비상구 문을 열고 의원들에게 빨리 오라며 손짓했다. 지금까지는 모두가 오르의 예상 그대로였다.

“이 통로 쭉 타고 가세요! 계속 따라가면 부속병원 지하까지 가십니다! 큰 화재가 아니니 걱정은 마십시오! 만일을 대비해 잠시만 피하셨다가 돌아오시면 됩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통로 두 개로 부대끼며 움직이려다보니 군데군데 사람들이 밀려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크바르나와 헤네티들의 비교적 침착한 대처에 의원들과 성직자들의 탈출은 비상시 매뉴얼 그대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의원들은 오르마즈가 기다리고 있는 복도로 일제히 몰려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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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역시 길군요;;; 너무 길면 뒤가 잘리는 경우도 있다던데 잘리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어쨌든 추천, 코멘트, 평점 좋은 흔적으로 의욕 올려주시는 분들께선 앞으로도 긴 글로(?) 복받으실 겁니다. ~~~(연재하는 유일한 낙입니다. ㅎㅎㅎ)   ( ̄∇ ̄)ブ~~★

eBook은 오픈마켓인 http://www.upaper.net/kiltie 에 올라서 유료판매 승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부의 1권~4권까지입니다. (승인이 아직 안 나서 이 글 올리는 지금은 텅텅 비었습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면 나지 않을까 싶은데 이번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승인이 나면 1주~열흘 정도면 예스24, 알라딘, 리브로, 영풍, 반디앤루니스에서도 연계되어 구입할 수 있습니다.

구입처에 따라 뷰어의 종류가 달라지니 이곳에서 직접 구입하실지, 대형서점 연계로 구입하실지는 무료책 등을 구입해서 뷰어를 써 보신 후 정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가격은 권에 따라 종이책의 2/3 선인 6천원~7천원입니다. 아시겠지만.....제 책 한 권은 일반적인 장르소설 두세 권 합본한 정도로 용량이 많아서요..... ^^;; (일반적인 장르소설 이북이 250~350kb 수준인데, 제 책은 700~800kb입니다.)

종이책과 같은 무삭제본이고, 그림과 부록도 함께 포함되었습니다.

* 8월 17일 새벽업뎃  -,.-;; :  이북이 특정 뷰어에서 양쪽맞춤이 잘 안 맞는 것이 발견되어서 승인신청 취소하고 다시 전체 수정에 들어갔습니다. 밤새 확인한 결과 폰트 호환의 문제인 듯합니다. 본문 전체의 폰트를 수정해야 할듯하네요...ㅠ.ㅜ;; 조금 늦어지더라도 최적의 이북을 만들기 위한 단계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ㅠ.ㅜ;;;

오늘중으로 수정 끝내고 다시 승인신청 예정입니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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