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96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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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사람들이 불을 끄거나 탈출하고 있는 와중에,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복도 구석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거구의 사내 하나와 그와 비교됨직한 자그만 남자가 방금 전 오르가 자코프와 들어갔던 거울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사람들은 불을 끄는 데 정신이 팔려 이들이 있는 구석진 문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이트닌이 오르마즈가 거울문에 끼워놓고 간 얇은 철물을 살살 움직여 잠금고리에 걸었다. 수십 년간 이런 일만 전문으로 해 온 보안 전문가인 그에게 이 정도는 낚싯바늘에 걸려 기진맥진한 물고기나 다른 게 없었다. 그의 능숙한 손길에 잠금고리가 탁 하고 풀리자 둘은 주변을 재차 확인하고는 문을 스르르 열고 안으로 재빨리 뛰어들었다.
“현신님들께 진짜 신이 깃들었는지 한 번 볼까.”
이트닌과 중간복도에 들어선 베흔이 이런 불경스런 말을 중얼거리며 준비해 온 방독면과 위장포를 재빨리 얼굴에 뒤집어썼다. 그들의 손에는 최대한 강하게 조제한 독가스와 최루가스, 인화물질이 든 통이 들려 있었다. 회의 경비에 투입되는 헤네티들, 심지어 크바르나들까지도 실용성 빵점의 장식용 무장만 갖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만한 공격 수단이 없었다.
준비를 마치고 괴물같은 모양새로 변한 둘은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후다닥 달려갔다. 회의장인 지하 홀에서 나온 대신관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좋은 자리를 선점해야 했다. 이미 오르가 자코프와 함께 지나간 중간 복도는 양 옆으로 문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차가운 인조석 벽이 마치 심연의 터널처럼 멀리까지 죽 뻗어있었다. 덕분에 숨을 곳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옆은 안 되겠다.”
베흔은 머리 위를 올려보았다. 다행히 신전과 병원을 연결하는 굵은 설비와 동력 파이프들이 머리 위를 빽빽하게 덮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대여섯 명 정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키가 큰 X 베흔이 재빨리 공중으로 훌쩍 뛰어올라 천장의 파이프 뭉치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가 내민 손을 붙들고 이트닌이 뒤이어 그곳에 올랐다.
베흔이 이트닌에게 복도 더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
- 내가 뒤쪽을 맡을 테니 앞쪽을 맡아. -
둘은 가스가 든 통을 품에 꼭 껴안고 재빨리 흩어졌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멀리 복도 끝에서 흰 물체가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베흔은 적외선 시야를 크게 부릅뜨고 그쪽을 유심히 살폈다. 얼굴을 가린 검은 색과 흰색 로브 차림새의 두 사람이 4명의 크바르나들에게 앞뒤로 호위를 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 까마귀와 비둘기 접근 중. 깃털 넷. -
베흔이 암호 발신기로 조금 앞쪽에 숨어 있는 이트닌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나서 자세히 적들을 살폈다. 그런데 적들이 가까워지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4명의 크바르나 중 2명은 어디서 구했는지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이런.”
적들이 방독면을 쓴 모습에 베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독가스만으로 저들을 잡는 건 힘들 듯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왜 4명 중 2명만’ 방독면을 썼는지였다.
‘설마?’
때맞춰 그 4명이 숨어있는 베흔의 밑을 지나갔다. 베흔은 숨을 죽이고 독가스 통을 움켜쥔 양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들이 밑을 지난 것을 확인한 베흔이 손에 들고 있던 독가스통을 밑에 휙 던졌다.
“움?”
네 명의 크바르나들이 동시에 위를 휙 올려보았다. 아주 짧은 시차를 두고 반대편, 그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있던 이트닌이 그들을 향해 폭발성 인화물질이 든 통을 휙 던졌다. 동시에 붉은 화염이 확 솟구쳐 두 명의 마구스들과 크바르나들을 덮쳤다. 독가스는 갑옷을 입은 크바르나들을, 화염은 도주로를 막고 마구스들을 끝장내기 위한 확인사살용 무기였다.
“성공이다!”
기쁨에 찬 이트닌이 무기를 빼들며 파이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뒤이어 뛰어내린 베흔이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조심해! 2명은 방독면을 썼어!”
아무 보호 장치도 갖추지 못했던 2명의 크바르나들은 갑옷이 불꽃까지는 막아주었지만 짙은 독가스까지는 어떻게 해 주지 못했다. 그리고 얼굴을 가린 베일에 로브를 입고 있던 ―마구스로 추정되는― 두 명도 몸 곳곳에 불이 붙은 채 그들 옆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하지만 방독면에 갑옷까지 갖추고 있던 2명이 문제였다. 그들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베흔에게 달려들었다.
“으익!”
베테랑 X인 크바르나가 휘두르는 무서운 칼끝에 베흔이 놀라 주춤거렸다. 나름 싸움 실력엔 자신 있었던 그였지만 분명 상대는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그 사이 나머지 한 명이 쓰러져 있던 두 마구스들을 불 속에서 허둥지둥 일으켜 세우고는 불에 타고 있는 거추장스런 로브와 베일을 벗겨 내던졌다. 베흔은 그 두 마구스들이 로브와 베일 안쪽에 방독면과 눈에 안 띄는 경(輕) 갑옷을 갖추고 있었던 것을 그제야 발견했다. 화재경보가 내려지자 헤네티 넷 중 둘이 자신들의 보호구를 대신 내어준 듯했다. 그리고 그 둘은 방독면을 양보한 대가로 생명까지 양보해야 했다.
마음이 급해진 베흔이 무서운 크바르나와 칼을 맞대며 악을 썼다.
“이트닌! 그쪽에서 이놈들 못 가게 해!”
“예!”
마구스들을 향해 이번엔 앞쪽에서 이트닌이 날린 저격용 볼트가 휙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익!”
또 한 명의 적이 있음을 깨달은 크바르나는 대신관을 향해 날아드는 볼트를 무작정 몸으로 막아섰다. 바로 헤네티들 자신이 쓰는 위력적인 볼트가 그들의 장식용 갑옷에 깊은 흠을 남기고 미끄러져 겨드랑이 관절 틈새에 푹 박혔다. 하지만 그자는 몸에 볼트가 박힌 것도 아랑곳없이 마치 쏘아 보라는 듯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두 마구스들을 결사적으로 지키며 계속 이트닌에게 다가왔다. 이트닌의 온몸에서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뭐 저런 놈이!”
이트닌이 주춤주춤 물러나며 두 발, 세 발을 계속 쏘았지만 그자에겐 마구스들을 지키는 것 외엔 머릿속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대뜸 칼을 빼들며 이트닌에게 돌격해왔다. 이미 몸에 대여섯 개의 볼트가 박혔지만 그자는 말 그대로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현신님! 막고 있을 테니 가십시오!”
“이런!”
이 무서운 크바르나와 칼을 맞댄 이트닌이 비명을 질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쓰러져 시체가 되었을 만큼 온몸에 부상을 입었지만 상대는 여전히 강했다. 그리고 이자가 자신을 밀어붙인 새, 제일 큰 표적인 두 마구스들이 바로 코앞을 지나 달아나고 있었다.
“이러다 놓치겠어!”
이트닌이 악을 썼다. 이번에 놓치면 끝이었다. 그는 재빨리 한 손으로 암호기를 눌러 다른 복도에서 작전 중인 오르마즈에게 도움을 청했다.
지하층 수술실 블록 남쪽 복도에서 두 부하들과 의원들의 탈출 행렬을 기다리고 있던 오르마즈는 옆쪽 처치실에 여전히 묶여 있는 자코프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는 바지가 절반 벗겨진 망신스런 모양새로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시간이 좀 있음을 확인한 오르가 그에게 성큼 다가가 입마개를 벗겨주었다.
“아까 위에서 듣자하니 네가 ‘삼각루트’ 어쩌고 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지?”
사실 정치문제 따위는 지금의 오르마즈에게 그리 큰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방금 회의석상에서 이자의 주도로 오가던 ‘삼각루트’ 이야기에서 카파키 가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언뜻 들은 기억이 났다. 가문에 관련된 것이라면 뭔가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그건…….”
오르의 눈치를 힐끔 본 자코프가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제기랄! 바지라도 좀 입혀 줘!”
아랫도리를 훤히 드러낸 자코프가 울부짖었다.
오르마즈는 달래줄 겸 일단 속옷만 올려 입혀주고는 다시 물었다.
“됐지? 이제 말해 봐.”
자코프가 그제야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아켐과 비엔, 하임달 세 곳을 삼각형으로 연결하는 워프루트 건설계획이야. 이미 일부 공사에 들어가 있어.”
오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콜로니의 워프루트는 원칙적으로 수도 아케메니아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도록 만들어져 있었고, 특히나 비엔이나 아켐처럼 인구가 아주 많거나 대명문가 호족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곳―그만큼 나중에 독립적인 힘이 강해질 위험성이 있는 곳―들은 절대 한 번에 직접 연결되지 못하도록 중간에 몇 다리가 걸려 있었다.
그건 모든 길을 아케메니아로 집중시키고, 큰 세력들이 서로 손을 잡아 교단에 반기를 들거나, 혹은 반대로 허락 없이 멋대로 싸우지 못하도록 적당히 권력을 분산시키려는 치밀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였다. 그런데 중요지역을 직결하는 루트가 생긴다면 전략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수 있을 터였다.
“교단에서 그런 걸 허락했나?”
“다른 곳처럼 아무나 사용하는 게 아니고 교단을 위해 비상시에 사용하는 루트로 시작한 거야. 열쇠는 네 분의 현신님들만 갖고 있어. 이제 막 시작한 거라 완공되려면 아직 몇십 년 더 있어야 돼.”
“세 지역인데 네 분의 현신이라면, 비엔의 트라카, 아켐의 에아, 하임달의 트라에타오나……또 하나는 대신관?”
“세 지역 현신님들이 가진 백금 팔찌에 당신의 지역을 여는 코드가 내장되어 있어. 각 지역에 하나씩 있는 제어소나 아케메니안 궁 어딘가의 제어장치에서 양쪽 현신님들의 키로 승인을 하면 길이 열린다더군. 아니면…….”
“아니면?”
“대신관님의 마스터키가 둘 중 하나를 대신할 수도 있고.”
“가만, 그런데 왜 하필 하임달이야?”
오르마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비엔과 아켐이야 이미 크게 개발된 지역이지만 하임달은 변변히 사람 살 만한 곳도 거의 없는 황무지 행성뿐인 곳이었다.
“코윈이나 쿠트라스가 훨씬 규모도 크고 사람도 많이 사는데?”
“젠장, 그런 것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대신관님이 ‘하임달이 나중에 아케메니아나 비엔을 능가하는 낙원이 될 거다.’고 하셔서 그리 된 거라고!”
“보스, 놈들이 옵니다.”
톱날이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알았다. 준비해.”
오르마즈는 자코프의 입에 도로 입마개를 씌웠다. 이놈을 더 몰아붙이면 무언가 더 나올 성 싶었지만 일단은 여기쯤에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복도로 나온 오르마즈는 방독면을 쓰고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기척에 침을 꿀꺽 삼키며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복도 양옆 수술실과 이런저런 병실 문은 이미 다 잠겨 있고, 복도 구석구석엔 유독가스를 내뿜는 통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최후의 방어선’으로 인화물질로 흠뻑 적셔놓은 바리케이드도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는 완벽해 보였다.
- 다가옵니다. -
방독면을 쓴 톱날과 뼈다귀가 수화로 더 안쪽을 가리켰다. 정말로 랜턴을 든 두세 명의 헤네티들을 선두로 회의장을 빠져나온 인파가 꾸역꾸역 몰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좁고 어두운 복도로 몰려드는 수백의 인파는 이젠 오도가도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사냥감이었다. 예상이 맞다면, 저곳엔 마구스들과 각을 세우고 있는 수백의 코메트 지휘관들―적의 명장 모스 바에자 장군을 포함해―과 그 후원자들이 있을 터였다.
‘운명을 따른다 했던가.’
파란기스와의 대화를 떠올린 오르의 머릿속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파란기스에게 운명에 따르겠다고 약속했고, 얄궂게도 ―비록 원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의 운명은 마구스를 돕는 쪽으로 가고 있었다.
수술실 문 뒤에 몸을 숨긴 오르마즈는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조명도 없이 깜깜한 복도를 따라 몰려드는 친 군부 의원들의 행렬 선두가 첫 독가스 탱크를 놓은 곳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새 복도를 꽉 채운 그들의 숫자는 언뜻 세어 봐도 100명은 넘어 보였다.
오르마즈는 독가스 탱크를 여는 원격 장치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적당히 농도를 낮춰놓은 죽음의 가스가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수술실 복도를 채워갔다.
“우읍.”
예민한 몇몇이 반응을 보인 건 그들이 두 번째 탱크까지 거의 다가와서였다. 하지만 이미 화재에 한 번 놀라고 군중심리에 사로잡힌 그들은 구역질을 하며 휘청거리는 사람들 정도는 크게 개의치 않고 계속 복도를 걸어왔다.
“뭐, 뭐 좀 이상하지 않아?”
선두에서 오던 두세 명이 거품을 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은 급한 맘에 뒤따라오던 다른 의원들의 발에 밟히며 거친 비명과 신음소리를 냈다. 그들에 걸려 또 몇 명이 자리에 넘어졌고, 뒤이어 더 많은 사람들이 중심을 잃고 먼저 쓰러진 사람 위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난 화재만 머리에 담고 있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마음은 급한데’ 앞에서 안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계속 밀어붙였다.
“빨리 가! 빨리 가지 못해!”
행렬 후미에 있던 사람들의 격한 고함이 이어졌고, 좁은 복도는 200명 넘는 사람들이 뒤엉키고 쓰러지며 일대 난장판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독가스는 복도를 타고 계속 번져 사람들을 하나 둘 바닥에 쓰러뜨렸다.
하지만 친 군부 의원들 상당수가 현역 장교다보니 얼마 안 가 상황을 눈치 챈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닥은 먼저 쓰러진 자들이 뱉어놓은 토사물과 소변으로 악취가 풍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독가스야! 입 막아! 뒤로 빠져나가라고!”
몇몇 사람들이 악을 썼지만 영문도 모른 채 뒤에서 몰아붙이는 자들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독가스에 쓰러져 거친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몇몇은 오르 일행을 발견하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공격하러 다가오는 자들도 있었다. 경비를 맡은 헤네티들이 몰려와 이들을 구해내기 전에 끝장을 내야 했다.
오르마즈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자신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진줏빛 마녀’ 모스 바에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불 붙여!”
오르마즈의 손짓에 톱날이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수백의 사람들이 뒤엉켜 있는 중간에서 큰 불꽃이 확 일었다. 좁은 복도 내부를 따라 번져가는 붉은 불꽃이 순식간에 독가스에 죽어가던 수십 명의 친 군부 의원들, 코메트 무장들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먼 복도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지만 뭔가 부족했다.
“뭐냐? 앞쪽 것이 안 터졌잖아!”
오르마즈의 고함에 더 놀란 건 톱날이었다. 분명 터졌어야 할 2개의 탱크 중 가까운 곳에 있는 하나가 반응이 없었다. 덕분에 가까운 곳에 쓰러져 있는 자들은 여전히 숨이 붙은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불발입니다!”
당황한 오르마즈의 얼굴이 붉어진 순간, 안쪽에선 더 당혹스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언가로 입을 가린 채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던 바에자가 방금 불발이 된 인화물질 탱크로 번개처럼 달려가서는 기폭장치를 쥔 뼈다귀 쪽으로 확 떠밀었다.
“막아!”
석궁을 쳐든 오르마즈와 톱날이 재빨리 달려 나가 그자를 향해 석궁을 쏘았지만 그는 눈 깜짝할 새 연기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바에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은 더 커져버렸다. 불발된 인화물질 탱크가 겉에 불이 붙은 채 뼈다귀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오고 있었다.
“물러나! 빨리!”
오르마즈가 악을 쓰며 달려갔고, 뼈다귀는 손을 저으며 앞장서 탱크로 달려갔다.
“오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보스!”
굴러오는 탱크를 몸으로 저지한 뼈다귀가 쓰러진 적 의원들 쪽으로 탱크를 도로 힘껏 밀었다. 다행히 탱크는 적들 쪽으로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휴, 십년감수했네요.”
뼈다귀가 오르를 돌아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터진 붉고 큰 불꽃이 살았다며 웃고 있는 그의 형체를 눈 깜짝할 새 휘감았다.
“으아악!”
오르마즈와 톱날도 폭발의 압력에 밀려 뒤로 붕 날아갔다. 무언가 큰 충격이 얼굴 옆과 오른팔을 강타했다.
“안 돼, 안 돼.”
바닥에 나뒹군 오르마즈는 아픔이건 뭐건 깨달을 새도 없이 자리에서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섰다. 절반쯤 무너진 복도 중간에서 뼈다귀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친 군부 의원들 수십도 이 두 번째 폭발에 숯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긴 복도는 백 구가 넘는 불탄 시체들로 뒤덮여 거대한 화장장이 되어 있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모스 바에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야! 이놈아!”
오르마즈와 톱날이 헐레벌떡 달려가 뼈다귀의 몸에 붙은 불을 껐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뼈다귀를 추슬러주던 톱날이 갑자기 오르마즈를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왜?”
“보, 보스 오른팔하고 귀가…….”
오르마즈에겐 톱날의 입술이 붕어처럼 오물거리기만 하는 듯 보였다. 오르마즈는 그제야 자신의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자신의 오른팔을 본 것도 이제야 아픔이 느껴져서였다. 인화 탱크에서 날아온 긴 노즐 파편이 그의 팔뚝을 뚫고 팔꿈치로 쑥 빠져나와 있었다. 귀를 만져보니 귓불이 너덜너덜했다.
“이, 이런.”
순간 오르마즈의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그 순간,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이상한 느낌이 울렸다.
- 넌 그러고도 날 죽이지 못했어. 이 한심한 풋내기 놈. -
놀란 오르마즈가 주변을 얼른 둘러보았지만 이런 차가운 목소리를 낼 여자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순전히 직감적으로 오르마즈는 바에자의 환청을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순간, 변변한 무장도 없었던 적의 명장 바에자에게 결국 자신도 판정패를 당했다는 울분이 갑자기 확 솟구쳤다.
“빨리 나가자, 뭔가 이상해.”
톱날이 중화상을 입은 뼈다귀를 등에 짊어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건너편 복도에서 이트닌이 보낸 메시지가 그의 암호 통신기에 들어왔다.
- 깃털 자르던 중 까마귀와 비둘기 날아갔음. 지원 바람. -
오르마즈가 이를 악물었다. 제일 큰 표적인 대신관과 트라카 마구스를 놓쳤다는 의미였다.
“제가 제일 성하니 가겠습니다.”
“아니.”
톱날이 가려는 것을 오르마즈가 얼른 저지했다. 말은 안 들렸지만 의도는 알 수 있었다.
“내 몸으론 혼자서 뼈다귀 못 데려가. 네가 이놈 짊어지고 저기 자코프 의원 끌고 출구로 먼저 나가 있어. 밖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망치 놈이 기다려주고 있을 거다.”
“보스, 그 몸으로…….”
“빨리 가!”
오르마즈는 노즐이 박혀 피가 뚝뚝 흐르는 오른팔을 대충 옷깃에 걸치고 왼손에 석궁을 단단히 쥐었다. 그러고 보니 한쪽 눈이 매웠다. 방독면의 왼쪽 렌즈 부분이 깨져 자신이 뿌려놓은 독가스가 눈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다행히 호흡 정화장치는 무사하니 피부 흡수까지 몇 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왼눈을 꼭 감고 비틀거리며 대신관의 탈출로인 중간 복도와 이어진 길로 향했다.
“미안해요, 파란기스.”
두 마구스들을 죽이러 가는 오르의 입에서 이 말이 흘러나왔다. 막상 작전에 뛰어들고 나니 파란기스의 부탁은 도저히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암살용 석궁을 왼손에 꽉 쥐고는 조금 전 자코프와 함께 들어왔던 중간 복도와 이어진 문을 어깨로 힘껏 밀어서 열었다. 문 너머에는 설비로 가득한 중간 복도가 정면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트닌과 베흔이 두 마구스들을 놓쳤다면 그곳으로 오고 있을 터였다.
그가 문을 열자마자 때마침 오른쪽에서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다가오고 있는 사람의 발걸음 진동이 느껴졌다. 오르마즈는 ‘까마귀와 비둘기’, 대신관과 트라카 마구스들이기를 바라며 복도로 확 튀어나갔다.
“더는 못 가.”
오르마즈가 왼손에 석궁을 번쩍 들며 그 둘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오던 두 사람도 놀라 멈칫했다. 6척이 넘는 크고 호리호리한 키의 두 사람이 그의 30척(9m)쯤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이들이 마구스?’
분명 아까 베일 안에 있던 그 두 사람들이었다.
‘마구스 맞을까?’
오르마즈는 이 순간 방아쇠를 바로 못 당기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부터 했다. 둘 다 방독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앞에 선 한 명은 남자, 뒤의 한 명은 여자인 듯했다. 그리고 조금 전, 회의장 홀에서 보았던 화려했던 로브가 불에 군데군데 그슬린 채 그들의 몸에 걸쳐져 있었다. 그 둘도 오르마즈의 출현에 놀란 듯 자리에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오르마즈는 여전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대역일지도 몰라.’
순간 오른팔의 찢는 듯한 고통을 느낀 오르마즈가 감고 있던 왼눈을 가늘게 떴다. 매운 눈물이 주르르 흐르면서 그의 무지개빛 눈동자가 깨진 방독면 렌즈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동자가 드러난 순간, 맞은편에 있던 ‘검은 로브의 대신관’이 소스라치게 놀란 듯 오르마즈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그가 자신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는 것도 같았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어딘지 익숙했다.
“가만히 있어!”
오르마즈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대신관, 아니 저 남자에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왠지 저 남자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저 남자가 대신관이 아니라고 정말로 믿고 싶었다.
‘대신관 대역일 거야.’
남자의 목젖 움직임을 보아 오르에게 손을 내밀며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방독면 때문에 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조용히 하라니까.”
팔의 찌릿한 고통이 온몸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오르마즈의 무지개빛 눈동자가 고통에 파르르 떨렸다. 남자가 무어라 애타게 외치며 방독면을 벗으려 하고 있는 것을 뒤쪽의 흰 로브 차림의 여자가 말리고 있었다.
그때, 오르마즈는 짧으나마 환청을 들었다. 옛날, 그의 첫 연인이었던 나즈라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멍해진 귀에서 가늘게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죽을 때가 됐나 봐.’
오르마즈의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그때, 그 둘의 뒤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와 오르마즈를 덮쳤다. 석궁만 겨눈 채 절반 넋을 놓고 있던 오르마즈는 그자에게 재빨리 석궁을 당겼지만 그대로 가슴을 받치며 공중으로 붕 날아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마지막 순간 오르마즈가 당긴 석궁의 볼트가 그 크바르나의 갑옷을 뚫고 목에 정통으로 박혔다.
“으웁!”
바닥에 쓰러진 오르마즈는 목을 찌르려 버둥거리는 헤네티와 한 손으로 거칠게 몸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달려온 또 다른 헤네티는 동료가 오르마즈를 붙들고 있는 새 머뭇거리고 있는 ‘두 마구스’들을 재촉해 힘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린 오르마즈가 그 둘을 다시 쏘려 버둥거렸지만 이미 기회는 날아가 버린 후였다.
크바르나에게 깔린 채 필사의 몸싸움을 벌이던 오르는 그의 어깨 너머로 크바르나를 쫓아오고 있는 베흔과 이트닌의 모습을 발견했다. 오르마즈는 목에 볼트가 박혀 제대로 힘을 못 쓰고 있는 그 크바르나의 옆구리에 단검을 힘껏 박아넣고 옆으로 밀어냈다.
“안쪽으로 도망갔어!”
오르마즈의 고함에 베흔과 이트닌이 방금 전 달아난 두 마구스들을 향해 석궁을 날렸지만 그들을 데려간 크바르나 헤네티가 몸으로 막아내며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헤네티들을 놓쳐서…….”
자잘한 상처투성이가 된 이트닌이 쓰러져 있는 오르마즈를 부축해 일으켜주며 죄인이라도 된 양 어쩔 줄 몰라 했다. 베흔도 지금 실력으로는 크바르나를 도저히 당해내지 못한 듯 팔과 가슴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사실 제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 건 코앞에 ‘마구스들’을 두고서도 방아쇠도 못 당긴 오르마즈 자신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부하들 앞에서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어쩌면 속으로는 의식했을지 몰라도― 결국 파란기스의 소원대로 된 셈이었다.
오르마즈는 ‘마구스들’이 멀어진 중앙 복도의 먼 어둠 속을 짧게 응시했다. 왠지 아쉬움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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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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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오르마즈나 베흔 모두 아직은 좌충우돌 많이 깨집니다. ㅎㅎㅎ
이번 파트도 이제 딱 한 편 남았군요.....애매한 길이를 두 편으로 나누다보니 이번편도 또 길어졌습니다. (에구구) 다음편엔 카렐 컴백해서 파트 엔딩을 장식합니다. 전과는 굉장히 많이 다른 모습을 보실 듯ㅎㅎㅎ
어쨌든 추천, 코멘트, 평점 좋은 흔적으로 의욕 올려주시는 분들께선 앞으로도 긴 글로(?) 복받으실 겁니다. ~~~(연재하는 유일한 낙입니다. ㅎㅎㅎ) ( ̄∇ ̄)ブ~~★
아참, 호환성 문제로 수정에 들어간 eBook은 수정작업이 거의 끝나 다음주 초나 중반 다시 판매 승인을 올릴 예정입니다. 수정하는 동안 몇 가지 다른 자잘한 문제점과 개선책 (몇 개의 오타도;;) 도 발견되어서 도리어 다행이었던 듯합니다. 제 종이책 사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제가 좀 고집 세고 꼼꼼해서 일단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서요...
그대로 올렸으면 후회할 뻔했습니다. ^^;;
판매 개시되면 이곳에 코멘트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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