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97화 (992/1,132)

< -- 997 회: 파트 12. 血浴齋戒 (혈욕재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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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포기하고 돌아가.”

오르마즈가 도면에서 미리 보아 둔 남쪽 복도의 출구로 비틀비틀 걸었다. 대신관과 크바르나들이 침입자의 존재까지 완전히 확인하고 도망쳤으니 이제 이곳이 폐쇄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조금 전 오르마즈가 친 군부 의원들을 떼거지로 태워죽인 남쪽 복도로 돌아온 셋은 도면에 있던 외부로의 쪽문으로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자코프를 끌고 먼저 지나간 톱날 녀석이 출구를 열어놓은 상태였다.

이트닌이 쪽문을 통해 제일 먼저 머리를 내밀었을 때, 심야의 신전 주변은 현판과 플랭카드를 내던지며 폭도로 돌변한 천 명이 넘는 시위대들과 보안요원들과의 숨바꼭질 싸움으로 이미 난장판이었다. 사방에서 몽둥이와 돌멩이가 날아다니고, 몇몇 곳에서는 화염병들까지 공중을 빙빙 날며 보안요원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민병대 정보부서에서 미리 시위대들 사이에 심어놓은 바람잡이들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얼떨결에 시위에 휩쓸린 자들의 불만 대상은 ‘부패한 의원들’이었지 교단은 아니었다. 이들은 교단이 좀 더 엄격하게 행정부 의원들을 때려잡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어찌 보면 가장 교단을 신뢰하는 자들이었다.

덕분에 이 무질서의 와중에도 최소한 신전이나 헤네티들에 돌을 던지거나 화염병을 던지는 자들이 하나도 없다는 건 오르마즈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민병대에 몸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과연 옳은 것인지 또다시 갈등에 사로잡혔다.

“여기요, 여기요.”

먼저 나간 톱날과 시위대들을 선동한 망치 녀석이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일행들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손짓했다. 방독면을 벗어 내던진 일행들은 폭동이라는 광란에 빠져 있는 다른 젊은이들에 뒤섞여 잔디밭 광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신전 내부에서 침입자들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린 건 오르마즈 일행이 이미 신전 앞 시위대들 사이에 뒤섞여버린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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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베르의 ‘토로 캠프’에 지난밤 한바탕 거대한 폭풍이 지나갔지만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날 아침은 제국회의를 위해 황제가 도착하는, 다소 피곤한 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바람이 조금 부는 것을 빼면 날씨는 화창했고 누가 보아도 기분 좋은 아침 같았다.

오늘부터는 제국회의가 열릴 예정이었고,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과 제후가 사람들이 모여 기근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수명개조를 깨뜨려 제국민들을 무더기로 늙어죽게 만들고 있는 오염된 곡물과 검은 재 문제를 다룰 예정이었다.

사실 기근의 시작점이 된 곡물의 전염병은 델루지 가 종부 오르테 부인의 결단으로 잎마름병의 방제법이 보급되었고, 황제의 손에 숙주인 멸구의 진원지도 잡히면서 해결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이 1차 기근은 이후 올 더 큰 재해의 무대장치에 불과했다. 이젠 이전에 상상도 못 했던 ‘늙어죽는다’는 공포가 8년 전 출혈열의 창궐 때보다 더 무섭게 황실과 황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오늘도 사람들은 여느 아침처럼 일어나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고 각자의 소속부대로 출근들을 했다. 그리고 황제의 영접을 맡은 몇몇 부대와 제국회의에 참석할 황실 대신과 각지의 제후들 같은 내빈들은 황제의 프리깃을 영접하기 위해 주기장이 있는 중앙 광장 부근에 하나 둘 모여들었다.

하지만 별 생각 없이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마치 황제에게 바치는 선물과도 같이 펼쳐져 있는 충격적인 장면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몇몇이 그 끔찍한 광경에 놀라 광장에서 돌아나가려 했지만 일단 들어온 이상, 광장을 물샐 틈 없이 에워싸고 있는 5천의 아메샤 스펜타들을 지나서 나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살벌한 표정으로 서 있는 보안국 요원들에게 통신기기를 포함한 소지품을 모조리 모두 압수당한 채 벌벌 떨며 그 안에 들어서야 했다.

“1호 프리깃이 5분 후 도착한다!!!”

슈로 기사단장 릴라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황제의 행차를 알리는 긴 나팔소리가 연병장을 뒤덮었다. 오늘 황제가 사열을 받을 5천의 1군단 보병들이 붉은 카펫이 깔린 긴 보도 양옆으로 10열 횡대로 늘어서 있고 5백의 슈로 기사단, 슬레이프니르의 기병대가 그 뒤에 5열로 줄을 맞춰서 늘어서서 연병장을 가득 덮고 있었다. 황제의 행차라고 해도 이만큼의 대규모 정규군을 사열에 동원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1천 명 가까이 되는 황제령과 제후 지역의 문무백관들이 그 거의 끝부분에 카펫의 양옆으로 벌떼처럼 모여 섰다.

“준비!”

릴라크의 손끝이 남쪽 하늘을 가리켰다. 곧이어 하늘에 검은색 점 하나가 나타나더니 점점 크기가 커져갔다. 프리깃이 접근하면서 연병장에 난기류가 조금씩 강해졌지만 거세게 흔들리는 깃발들을 빼면 사열을 준비하는 군인들은 물론이고 내빈으로 와 있는 제후, 대신들도 마치 인형들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프리깃이 머리 위에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고, 마지막에 땅을 딛고 착륙하면서 바닥을 흔든 육중한 진동음이 마무리될 때까지, 연병장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와 드문드문 들리는 끔찍한 비명을 빼면 감히 누구도 입을 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모두가 잔뜩 긴장하며 황제의 모습을 기다렸지만 메인 해치가 열리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특히나 지난밤 연락 두절 직전, 황제가 황후와 함께 있던 욕실에서 보낸 마지막 메시지 이후로 지금까지 황제의 ‘살아있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제네르와 아리아노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 둘과 가디언부대장 시로, 슈로 기사단장 릴라크, 아메샤 스펜타 사령관 솔로스 대장군, 호위대장 카토와 같은 무장들이 해치 앞에 줄을 맞춰 섰다. 원래대로라면 부총리 겸 재무대신 이브라힘 경, 내무대신 압둘 모투바 경 같은 주요 문관들이 앞서서 황제를 맞아야 했지만 오늘 그들은 멀찍이 후방에서 군인들에 둘러싸여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설마 성공하셨겠죠?”

릴라크의 걱정어린 물음에 제네르는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황제는 ‘저들이 음모에 성공한 것으로 믿게 하기 위해 난 도착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이 프리깃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외부에 단 한 번도 통신을 전송하지 않았다. 황제와 황후가 함내 반란을 무사히 진압했을지. 아니면 그들 손에 이미 죽임을 당한 상태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지난밤 황제가 함내 반란을 다스리는 데 실패했다면 이 해치가 열리자마자 안에서 반란세력이 쏟아져 나올 테고, 그 순간이 제국의 붕괴가 시작되는 신호탄일 터였다.

갑옷으로 제대로 무장한 제네르를 비롯한 무장, 가디언들이 허리춤의 칼을 단단히 움켜쥐고 앞으로 나섰다. 법무대신인 아리아노 경도 비단포 속에 특수 수사관들이 입는 방검복에 칼과 석궁을 지니고 있었다. 원래 황제를 맞는 자리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차림이지만 지금은 만일을 위해 모두 무장을 하고 나오라는 제네르의 특별한 명령이 있었다.

그들은 숨을 잔뜩 죽이고 해치가 열리기만을 눈을 부릅뜨고 기다렸다. 만약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황제가 아니라면, 함께 돌격해 안에 있는 자들을 죽여 버릴 참이었다.

해치가 열리는 순간, 그들의 오른손은 잔뜩 긴장하며 이미 칼자루 주변을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해치 발판이 바닥에 내려지면서 내부의 풍경이 비로소 사람들 앞에 공개되었다.

“하늘 아래 제국의 눈이 닿는 곳 그 모두를 지배하시는 위대한 황제 카렐 대제께서 드시니 모두 그 앞에 꿇을지어다!”

루스탐의 우렁찬 고함이 사열을 준비 중인 군인들의 머리 위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칼 주변을 맴돌던 무장들의 손이 즉시 왼쪽 가슴으로 올라갔고, 그들 모두가 일제히 붉은 카펫 위에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카펫 양옆으로 황제를 영접하기 위해 모여 있던 1천여 명 가까운 문무백관들까지 마치 물결치듯  주르르 자리에 꿇어앉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뒤이어 짧은 침묵이 다시 흘렀고, 또각거리며 바닥을 딛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압 성공을 하례드리옵니다.”

고개를 숙인 제네르는 황제의 신발 코를 살짝 덮고 있는 검은색 긴 치맛단을 보며 비로소 엷게 웃음을 지었다.

“수고했네, 짐의 충성스러운 용사들.”

황제의 두 손이 제네르와 아리아노의 어깨를 살짝 짚어주었다.

“연호하라!”

릴라크의 외침에 5천의 보병들과 1천의 기병들이 일제히 창끝을 하늘을 향해 번쩍 들어 올리고는 자루 끝으로 쿵쿵쿵 바닥을 세 번 내리치고 길고 큰 함성으로 황제에 대한 환영의 뜻을 알렸다.

제네르와 아리아노를 격려해 준 황제는 수천의 병사들 앞을 지나 붉은 카펫 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프리깃의 그림자를 벗어나면서 그의 이마에 늘어진 서클렛의 사파이어가 아침 햇빛에 눈부시게 빛을 뿜었다.

“이런 차림새는 퍽 오랜만에 뵈옵니다.”

뒤따르는 제네르의 말에 황제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피맛을 보는데 이만한 차림새가 또 있던가.”

제네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황제의 차림새는 정말로 상복을 연상케 했다. 목까지 가리는 무늬 없는 검은 공단 드레스 자락은 뒤로 한참을 끌릴 만큼 길었고, 긴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어깨에 걸친 검은 케이프에도 황실을 상징하는 황룡 문장을 빼면 아무 무늬도 없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고리, 팔찌에도 아무 색깔이 없었다.

“황자들을 안 데리고 나오셨군요.”

제네르가 뒤따르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피 묻은 갑옷 차림의 황후 아메스와 황빈 베아트릭스가 한 발 뒤에서 조용히 황제를 따르고 있고, 황자들이나 임신 중인 에스더는 보이지 않았다.

“손에 피를 묻히는 건 나 하나로 족해.”

황제는 한참 뒤쪽 꽁무니에서 자신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바닥을 엉금엉금 기며 따르고 있는 황후전 시녀장을 향해 기이한 미소를 흘렸다. 발목이 묶인 채로 바닥을 기느라 무릎과 손바닥이 다 까져 속살까지 드러난 시녀장은 당장 저승에 밀어 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낯빛이 온통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예상……밖이군요.”

제네르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었다.

“언제는 그들이 우리 예상대로 굴었던가.”

황제의 눈이 눈앞에 펼쳐진 수천의 질서정연한 사열 부대를 훑었고, 뒤이어 그들 앞에 펼쳐져 있는 대조적인 풍경을 보며 마치 오르가즘에 빠진 사람처럼 입을 살짝 벌리고 얕은 숨을 내뱉었다.

“이런 멋지고 아름다운 광경이라니.”

카렐이 붉게 칠한 입술에 살짝 웃음을 품었다. 황제 일행이 나아갈 붉은 카펫 양옆으로 세워진 2백 개가 넘는 말뚝에는 아직 숨이 붙은 알몸의 죄수들이 가는 철사줄로 목에 매인 채 서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 2백여 명은 먼저 죽은 동료의 시체 한 구씩과 얼굴부터 온몸까지 마치 포옹하듯 꼭 맞대고 묶인 채 목에 걸린 철사줄에 기대 위태롭게 까치발로 서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지금까지는 가까스로 버티고 있지만 다리 힘이 풀려 발꿈치로 디디는 순간, 철사가 목을 조여 죽을 운명이었다. 쇠줄이 목과 사지의 상처를 파고들면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붉게 적시고 있었고, 금세 지쳐 빨리 목숨을 놓아버린 몇몇 반역도들은 혀를 길게 뺀 채 철사줄에 축 늘어져 소름끼치는 장식품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에나 경이 모처럼 창의성을 발휘했군.”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죄수들을 돌아보는 황제의 창백하리만큼 흰 옆얼굴이 검은 드레스와 어울려 오늘따라 더 섬뜩해 보였다. 무채색 일색의 황제에게서 ‘색채가 있는’ 곳은 이마의 사파이어와 붉게 칠한 입술, 색색의 오팔빛 눈동자 뿐이었다.

카렐은 울부짖는 죄수들 사이를 검은빛 긴 치맛자락을 끌며 조용히 걸어 나아갔다. 사실 이곳에 묶인 제물들은 우두머리들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의 운명은 따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름끼치는 행진로 거의 끝부분에 문무백관들과 제후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서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대신들 앞을 조용히 지나던 카렐은 문무백관들의 선두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수명개조 당대, 초로(初老) 정도 외모를 한 사람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선상반란에 관해 짐에게 할 말 있지 않은가? 이브라힘 경.”

황제의 걸음이 멈추면서, 동시에 그 대신의 어깨도 가늘게 흔들렸다. 두 명의 보안국 헌병과 사에나가 이미 그 대신의 뒤에 소리 없이 서 있었다. ‘선상반란’이라는 말에 아직 영문을 모르고 있던 대신들과 제후들이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에나에게서 쪽지를 건네받은 황제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자네들이 여기로 날 마중 나온 동안 보안국 요원들이 숙소와 소지품을 모두 수색하고 있네.”

황제의 이 말에 신료들 몇몇은 크게 당황하는 표정들이었고, 일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거의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자들뿐만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카렐이 프리깃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지난밤 반란이 있었던 1호 프리깃에서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편 젊은 시종들이 전선줄에 줄줄이 엮인 반역도들을 질질 끌고 해치를 내려오는 중이었다. 죄수들은 착륙장에 펼쳐져 있는 끔찍한 광경에 충격을 받아 주저앉기도 했고, 이성을 잃은 채 고래고래 잘못했다고 소리만 지르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상당수는 오는 길에 프리깃에서 이미 고문을 당한 듯 이미 끔찍한 몰골이었다.

프리깃에서 끌려나오는 반란 가담자 하나하나의 얼굴에 대신들은 물론이고 황제의 뒤를 따르는 제네르와 무장들의 표정도 조금씩 굳어갔다. 그리고 중간쯤에 나온 익숙한 얼굴의 거구의 사내를 보았을 때 제네르는 휘청할 만큼 놀라고 있었다.

카렐이 웃으며 앞에 있는 이브라힘 경을 내려다보았다.

“짐의 충성스런 종들이 목숨을 걸고 수습해서 거의 다 잡았는데 말이야, 마지막 마무리가 깔끔치를 못했네. 반역도당들을 가득 태운 화물선이 여기로 접근할 때 수신호로 함정이라고 알려 준 어떤 찢어죽일 놈 때문에 말이지.”

노대신과, 그 뒤에 서 있는 젊은 아들의 어깨도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카렐이 자신의 앞에서 떨고 있는 이들 부자에게 다시 물었다.

“내 앞에서 말할 텐가? 며칠 후에 코리온 대군을 불러오면 그때 말할 텐가? 이브라힘 가우라 경?”

“므, 무슨 말씀이시온지……, 소신은 전혀…….”

황제의 물음에 벌벌 떨던 부총리 이브라힘 경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 나이 많은 대신은 중앙귀족 명문가 출신 회계전문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ㅤㅋㅞㄹ크의 전사단 시절 카렐부터 30년이 넘게 카렐과 함께했던 오랜 수하였다. 수명개조 당대인 그는 젊은 시절 코메트 부대의 경리장교로 한동안 있은 후 전역해 콜로니의 중간 공무원으로 경력을 쌓았고, 제국의 성립 뒤로는 기업 전문 회계사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어차피 젊은 시절 고위 관료를 지낸 것도 아니었고, 워낙 오랜 기간 교단과는 무관하게 살아왔다보니 그가 전사단에 들어와 황실 내각의 초대 경제관료가 되었을 때도 그 누구도 그를 의심한 일은 없었다.

“방금 보안국 요원들이 자네 책상 위에서 코메트 부대의 장교용 필드 매뉴얼을 찾았는데 뭐라 설명할지 정말로 궁금하네 그려.”

카렐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수백 년도 지나 곰팡내 나는 책을 굳이 꺼내어서 황제령에서 여기까지 들고 온 이유가 아마 있었겠지? [탐조등을 이용한 시각 신호] 페이지가 벌어져 있더군?”

이브라힘 경은 여전히 대답을 못한 채 떨고만 있었다.

“지금 말하면 자네와 뒤에 있는 맏아들에서 끝나겠지만 한 시간 지날 때마다 자식 하나씩이 더 사라질 걸세.”

황제의 최후통첩에 이브라힘 경이 다리가 풀린 듯 휘청거렸다. 카렐은 프리깃에서 끌려나오고 있는 전 대제학이며 페로의 숙부인 헤데론 자이센을 흘끔 째려보았다. 이미 프리깃에서 고문을 당해 팔다리 관절이 모두 꺾여 제대로 걷지도 못 하고 있었다. 탈출정에서 잡혀 나온 그는 계속 살려달라며 주변에 울부짖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이브라힘 경의 뒤에서 보안국 헌병들이 그의 장남의 오금을 찍어 쓰러뜨리고 사정없이 포박을 채웠다. 겁먹은 아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폐, 폐하,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발, 그때 안 도와주면 출혈열 때문에 가족이 다 죽을 판이었다고요, 제발요, 아버지, 아버지, 제발 살려주세요.”

카렐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이브라힘 경의 장남은 바로 며칠 전 총리 대리에 오른 아버지와 헤데론의 입김으로 보안국의 특무 담당관―교단이나 제후지역에 대한 스파이 파견을 담당하는―으로 확정이 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도 8년 전, 헤데론과 마찬가지로 가족 모두가 출혈열로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네 아들이 아직 심사도 통과 못 됐고 내 승인이 없어 정식 발령도 못 받은 주제에 아비 입김으로 감히 보안국 간부요원 행세하며 일부 자료에까지 접근했다지?”

카렐의 미간에 불쾌감을 나타내듯 내천(川)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아참, 듣자하니 이브라힘 경 자네의 장녀가 지금 남극성당 규장각 5층 휴게실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는군.”

표정을 돌변하며 웃음을 보인 황제의 말에 이브라힘 경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에겐 이 장남 말고도 다섯이나 되는 아들딸이 또 있었다.

“누굴 죽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번 사건의 전모도 전 모릅니다. 그네들은 자기네도 비밀리에 초대를 받아서 눈에 안 띄게 몰래 오는 거라고 했습니다! 전 그냥 ……황실이 초청을 해 놓고 화물선을 노리는 최악의 상황에만 미리 신호를 해 달라고 부탁받았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최악? 그대에겐 우리가 그 잔당들을 한 방에 날리는 게 최악이었나 보지?”

황제가 으르렁거렸다. 당황해 말실수를 저지른 이브라힘 경은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어딜 감히 황제 앞에서 엉덩이를 땅에 대는가!”

사에나와 헌병들이 즉시 부총리에게도 포박을 지우고 행렬 뒤로 사정없이 끌어냈다. 카렐이 이브라힘 부자에게서 휙 돌아서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리아노 경, 페로 자이센 총리가 복직할 때까지 그대가 자리를 대신해 주게.”

“황공하옵니다.”

법무대신 아리아노 라자루스 경이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총리나 부총리직은 내무나 재무대신이 대리를 맡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법무대신에게 그 자리를 맡긴다는 의미는 분명했다. 앞으로의 칼바람을 직감한 대신들 사이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한 카렐은 중간중간 손가락으로 2명의 차관급 대신과 3명의 제후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여지없이 보안국 헌병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사정없이 줄에서 끄집어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지난 출혈열 때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었고, 부동산 혹은 엄청난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던 부호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중 사교도로 알려졌거나 그렇다는 소문이라도 있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하와 제후들은 제국 회의장이 있는 홀을 향해 움직이는 황제의 뒤를 따라 바늘에 실이 끌려가듯 줄을 맞춰 나아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도 자신의 옆에 있던 대신이 저승사자 같은 황제의 손짓 한 번에 무참하게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본 나머지 사람들의 충격도 대단했다. 그들은 황제의 발걸음이 자신들 앞을 ‘아무 일 없이 지나간 것’에 일제히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너무 긴장했던 신하들 몇은 다리가 풀리며 지레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지난 전쟁 직후의 대대적인 숙청 이후, 30여년간 이런 집단체포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의 목숨을 직접 노렸던 만큼, 이번 일이 조용히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수많은 시체와 울부짖는 죄수들 사이를 지나 연병장 거의 끄트머리의 아스트라이아 홀 앞에 도착한 카렐이 뒤따라온 신하들과 제후들을 향해 돌아서며 두 팔을 벌리고 소름끼칠 만큼 음산하게 웃어보였다. 검은 공단 드레스와 긴 케이프가 펼쳐지면서 황제의 위압적인 외모가 더 두렵게 보였다.

황제는 그들을 향해 짧게 한 마디를 꺼냈다.

“제국회의에 와 준 문무백관과 제후 여러분들을 환영하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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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의 변신(?)이 있는 이번 편을 끝으로 파트12 혈욕재계가 끝을 맺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새 파트가 시작됩니다. 출판본으로 치면 6권쯤 되겠네요. 새 출판본은 가을 무렵 공지 예정입니다. 그러고보니 1000회가 머지않았네요. ^^

어쨌든 추천, 코멘트, 평점 좋은 흔적으로 의욕 올려주시는 분들께선 앞으로도 복받으실 겁니다. ~~~(연재하는 유일한 낙입니다. ㅎㅎㅎ)   ( ̄∇ ̄)ブ~~★

* 2011년 9월부터 전자책 서비스 시작되었습니다. 전자책도 물론 무삭제 출판본 기준이고 표나 삽화, 부록 등이 함께 들어있고, 기간제한없이 영구적으로 소장하고 볼 수 있습니다. 9월 말 현재 4권까지 올라 있고 1달 단위로 2~4권씩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일부 권은 성인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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