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98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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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회의 1차 회의가 열리는 토로 캠프의 아스트라이아 홀에는 사뭇 공포서린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있은 끔찍한 사건으로 제후나 중앙귀족들이나 모두 압도당한 분위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혹은 늙어 죽어가고 있는 끔찍한 현실을 논의조차 하지 않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런다고 황제가 보내주지도 않겠지만.
가파른 피라미드 모양 단을 중심으로 바로 밑에는 황실 각료들과 20개 중앙귀족가문 대표들 200여명이 둥글게 빙 둘러앉아 있고, 그 바깥으로는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각 지역 제후가를 대표하는 200여명의 대표들이 각자의 가문을 대표하는 색색의 비단포와 머플러를 걸고 줄을 맞춰서 앉아있었다.
그리고 제일 바깥쪽에 놓인 참관석에는 초대를 받아 참석한 학계 권위자들과 직군단체 대표들 같은 일반 시민대표들이 오늘 오갈 내용들에 잔뜩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중앙의 피라미드 모양의 단 꼭대기에 쏠려 있었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도 않을 그 까마득히 높은 자리엔 사방으로 돌 수 있는 회전 옥좌에 앉은 황제가 사뭇 전의를 다지고 있는 그 6백여 명의 대표들과 참관인들을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앉아있었다. 황제의 그런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제후나 관료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의 회의의 ‘표면적인’ 안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장 제국을 휩쓸고 있는 작물의 돌림병과 대흉작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사 직전에 놓인 동부와 북부 일부 지역에 대한 남부의 식량 금수조치를 조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 한 달을 지나는 동안, 이 중 첫 번째 안건은 사실상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델루지 가 종부 오르테 부인이 죽기 직전 황실에 바친 잎마름병 방제법은 이미 한 달 전부터 황제의 이름으로 제국 전역에 보급되고 있었다. 거기에 이번에 귀환한 황제는 개회와 동시에 잎마름병을 퍼뜨리는 멸구의 근원지도 박멸했다며 공식 발표했다.
결국 흉작은 7년 전, 하루아침에 치료약이 등장했던 출혈열 퇴치 때처럼 또다시 황제의 손에 의해 최소한 원인은 해결된 셈이었고, 이제 그 뒤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덕분에 참석자들은 거의 두 시간 가까이를 대흉작 사태 해결에 관한 보안국의 설명과, 황제에 대한 찬사와 감사의 인사를 감내하며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래도 이쯤이면 황제 앞에게 반감을 품은 제후나 귀족들조차 감히 기근 문제를 들고 나올 상황이 되지 못했다.
“델루지 가가 어딘지 썰렁해 보이는군요.”
제네르가 옆에 앉은 부총리 대리 아리아노에게 귀엣말로 물었다. 그곳을 돌아본 아리아노가 입가에 잔뜩 힘을 주며 안 좋은 감정을 실어 대답했다.
“마누엘 그놈이 오늘은 보이콧하고 안 들어온 모양입디다.”
아리아노의 눈은 델루지 가의 자리에 수하 하나 없이 혼자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외손녀 세데스를 안쓰러운 듯 향하고 있었다.
슈발츠발트의 광산에서 황제와 함께 교단의 비밀기지를 습격했던 세데스는 가문 원로들이 요구했던 대로 엄마 오르테의 관과 살인자 쿠베의 시체 조각을 가지고 종가로 개선했지만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르테의 시신과 진짜 살인자의 머리를 가져오면 살인 혐의와 종장 권한 정지를 풀어주겠다던 마누엘과 가문 원로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을 체포하려 드는 델루지 가 근위병들을 피해 가까스로 오르테의 시신만 챙겨 종가 가까운 황실군의 남부 파견군 사령부로 도망쳐야 했다.
덕분에 비엔에서는 그를 체포하러 온 델루지 가 군대와 황실 남부 파견군 사이에 팽팽한 대치 상대가 벌어지기까지 했지만 파견군 사령관 모릭스의 기지로 그는 황실군 수색부대에 섞여 가까스로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묏자리도 못 찾고 있는 엄마의 시신과 함께 이제 떠돌이 신세였다.
“그 패거리들은 무슨 핑계로 안 들어왔답니까?”
제네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서열과 인구별로 안배한 델루지 가의 배정석은 제후들 중 가장 많은 축에 속하는 10자리였지만 맨 앞의 세데스와 제일 뒷자리의 말단 농무관 한 명이 전부였다. 누가 봐도 명백한 보이콧이었다.
“무엄하다고 쳐넣을래도 그 새끼 서류상 종장 신분은 아니니까.”
아리아노가 다시 입가를 씰룩거렸다. 종장 외에는 ‘의무출석’이 아니니 원로 의장 겸 군 사령관이 안 들어왔다고 처벌할 근거도 없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무더기로 자리를 비운 델루지 가 원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범죄를 저질러 재판에 회부된 종장’을 보호하고 있는 황실에 공식 항의 문서를 보냈지만 그 건은 이 회의와는 표면적으로는 무관했다
“마누엘 그놈이 언제부터 그리 똑똑해졌을까요?”
제네르의 비아냥거림에 아리아노도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사실 그들은 오르테의 시신을 갖고 종가까지 제 발로 찾아온 세데스를 충분히 잡아넣을 수 있었지만 근위병을 20분이나 늦게 부르는 ‘석연찮은 실수로’ 그에게 달아날 여유를 주었다.
그리고 그가 파견군 사령부로 도망갔을 때는 즉시 비엔 주둔 야전군단을 동원해 황실군과 공개적으로 대치하는 기민함을 보였으면서도 정작 그가 황실군으로 위장해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무려 반나절이나 지난 후에야 뒤늦게 각 터미널에 수배령을 발동했으니 사실상 황제에게 가라며 놓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쟤가 아니어도 어떤 식으로든 황실과 마찰을 일으킬 빌미는 만들었겠지.”
아리아노가 회의 내내 말 한 마디 없는 세데스를 보며 다시 딱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델루지 가는 세데스를 돌려달라며 계속 항의를 해 올 테고, 황실과 마찰을 일으킬, 아니 황실이 주도하고 있는 기근 대책에서 발을 뺄 그럴싸한 빌미가 될 터였다.
34년 전, 제위가 공석일 당시 코리온이 교리정치를 선언했을 때 발 가가 일부러 그와 마찰거리를 만들어 참여를 빠져나가 페로, 카렐과 덥석 손잡았던 것과 마찬가지 작전이었다.
“황상께서도 저들이 약속을 안 지킬 걸 예상하고 계셨던 것 같던데요? 세데스 경에게 미리 빠져나올 구멍을 만들어 놓고 종가로 돌아가라 하셨답니다.”
눈치 빠른 제네르의 지적에 아리아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은 양쪽 모두 명분 쌓기 싸움을 한 것 아니겠는감? 어쨌든 저애는 약속을 지켰으니 이 자리에서 권한 있는 종장임을 자처할 수는 있으니까.”
“그렇긴 한데 델루지 가의 식량을 못 뜯어내면 1, 2년 안에 북부와 동부 인구 2할 이상이 굶어죽는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말이 2할이지 5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뿐이면 다행이게.”
아리아노가 답답한 표정으로 피라미드 위를 힐끔 올려보았다. 황제에 대한 찬가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작 황제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속 보이는 칭송이 지겨워진 듯 사뭇 굳은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서류만 뒤적이고 있었다.
“기근은 항상 더 큰 재앙의 시작인 법이지.”
연륜이 쌓인 아리아노의 엷은 눈주름이 돌연 짙어졌다.
“자넨 늙어죽는 걸 걱정하게 되리라는 걸 상상이라도 해 본 일이 있었나?”
제네르의 새파란 눈동자 주변에도 갑자기 그늘이 드리웠다. 황제가 기근을 불러 온 돌림병을 없애느라 동분서주하던 한 달 새, 이젠 그 누구도 예상 못했던 또 하나의 재앙이 더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재해’는 3년의 기근으로 약해진 제국민들을 절망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보다 더 무서운 ‘키니’가 있습니다!”
황제 찬가에 지겨워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황제도 그제야 서류를 놓으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1차 회의의 거의 끝무렵에야 드디어 나온 중요한 주제였다.
정확히 누가 먼저 쓰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키니’는 사람들의 수명개조를 깨뜨리고 늙게 만드는 ‘오염된 곡물’을 뜻하는 이름으로 공공연히 쓰이고 있었다.
“돌림병과 오염된 곡물, 토양으로 버려진 농지가 많아졌습니다. 비록 근본 문제는 황상의 은총으로 해결하였으니 새로 파종한 곡물이 수확되고 농지를 재건해 곡물 수급이 정상으로 돌아가려면 최소한 1, 2년 이상은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까지 제국은 계속 굶주려야 하고, 상당수의 빈민들은 어쩔 수 없이 키니일지 모르는 위험한 곡물을 먹어야 할 겁니다!”
예상대로, 가장 위기에 직면해 있는 동부최고제후 다히르 슈트란 경이었다. 이번 기근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 빈곤한 동부와 식량자급능력이 없는 북부였고, 뒤이어진 문제 또한 가장 심각했다.
“지금까지 키니 유통이 무려 400여건이 적발되었습니다. 그 중 50여건은 암시장이 아닌 정상적인 거래시장이었습니다. 오염된 곡물은 성장기간이 절반밖에 되지 않아 극(極)조생종 종자로 위장해 이미 시장에서 팔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재래종을 권해도 농민들은 곡물가가 높을 때 한몫 잡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도 조생종을 찾아 심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곡물을 일정량 이상 먹으면 우리 몸에 공생하며 수명개조를 유지시켜 주는 공생 레트로 바이러스가 모두 죽게 됩니다.”
다히르 경의 울부짖듯 격앙된 목소리가 홀을 쩌렁 울렸다.
“저희가 추산하기로 저희 동부에서만 이미 2백만 명 가까이가 오염된 곡물에 노출되었습니다. 그 중 공생 바이러스가 모두 죽고 노화가 시작된 것으로 확진된 사람이 7만으로 늘었습니다. 그렇지만 빈민이나 유목민 상당수가 병원에 출입을 못 하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로는 몇 배일 겁니다.”
이번엔 황실 내무대신 압둘 모투바 경이 일어나 입을 열었다.
“이번에 황실에서 키니를 찾아내는 간이 실험키트를 제작해 보급에 들어갔습니다. 오염 곡물 유통 문제는 곧 잡힐 것입니다.”
“물론 압니다. 하지만 한 번 실험에 노동자 열흘치 임금이 필요한데 일반 시민들에게 얼마나 효용이 있을 것 같습니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뒤이어 학계 전문가로 참석한 한 농학자가 손을 번쩍 들어 발언권을 요구했다. 진행을 맡은 루스탐이 황제를 휙 올려보았다. 황제의 고갯짓에 루스탐이 그 학자에게 일어나라며 손짓을 보냈다.
서부에서 온 듯한 그 농학자가 꺼질 것 같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오염된 곡물, 키니는 공생 바이러스를 죽이는 물질을 스스로 생산하는 염기 코드가 삽입된 있는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문제는 그 후손도 문제의 염기 서열을 가지고 똑같은 물질을 생성할 수 있다는 겁니다.”
좌중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미 서부 테나토 3곳에서 키니 2세대가 섞인 농장이 발견되어 농장의 전량 소각을 요구하였으나 2세대는 소각 대상이 아니라 하여 거부당했습니다. 이러다가 결국은 제국의 모든 작물이 오염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이곳에 계신 귀족님들의 식탁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충격적인 보고에 사람들이 웅성대며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동부와 지난번 반란이 일어났던 남부 페스트, 그리고 북부의 일부 열악한 광산지역을 제외하면 오염된 곡물, 키니는 아직까지 ‘빈민들이나 먹는’ 불법거래 시장에나 돌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어, 우리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는데, 거기도요?”
동부 트라티누스 가 대표단 한 명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이어 요동에서 온 카나 가 대표단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우리 뿐이 아니었잖아?”
그동안 쉬쉬해왔던 지역들에서 봇물처럼 터치면서 충격에 휩싸인 귀족들로 갑자기 장내가 시끌시끌해지지 시작했다. 황제의 목소리가 비로소 흘러나왔다.
“2세대라 하여 소각을 안 한 것이 사실인가? 발 가에서 답해 보게.”
카렐이 테나토의 발 가 영주인 사우드 부인에게 사뭇 노기 띤 얼굴로 물었다.
“그, 그게……2세대는 아직 위험성이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라서……기근 상황에서 작물을 태워 버리는 것인데 좀 신중해야 할 것 같아 미루었을 뿐입니다.”
나름 변명을 해 보려던 사우드 부인은 주변의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얼른 머리를 다시 조아렸다. 서부가 지금껏 기근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이 테나토의 농업 덕분이었지만 자칫 이 소문이 커졌다가는 테나토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농업이 송두리째 무너질 판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소각하겠나이다.”
일단 이슈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 카렐은 다른 제후들을 노려보며 쩌렁쩌렁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부터 키니의 2세대 농작물을 발견하도고 당장의 물욕에 사로잡혀 소각하지 않는 가문이 있다면 짐의 군대를 보내어 직접 그 일대를 쑥대밭을 만들고 경작한 농민과 공직자를 체포할 것이니 각오하라. 알겠는가?”
군대 이야기까지 나오자 분위기는 더더욱 뒤숭숭해졌다. 황제가 일단 약속을 받아냈지만 그 농학자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여전히 일어서 있었다. 그는 황제의 조치도 맘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젓고 있었다.
“폐하의 뜻은 분명 맞사옵니다. 그러나 꽃가루는 사방으로 날릴 수 있고, 수송 중 도로에 떨어진 종자가 도로변 어딘가에서 멋대로 싹을 틔울 수도 있습니다. 곡물은 불량 공산품을 수거해 폐기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일단 우리에서 풀려난 저 괴물들은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어딘가에서 증식하면서 결국은 제국 전역에 퍼질 겁니다! 시간 문제일 뿐이지 우린 절대 이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길 수 있다.”
황제의 굵고 단호한 목소리에 그 농학자가 당황한 듯 숨을 죽였다.
“하지만 생명체란…….”
“그래, 그대 말이 맞다. 생명체란 어떻게든 살아남아 씨를 뿌리려 하지.”
황제의 손짓에 홀 주변의 문이 갑자기 확 열리더니 흰 제복을 입은 수십의 사람들이 척추 천자용 기계를 들고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사바늘에 괜한 알러지를 지닌 몇몇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움찔거렸고, 학자들 중 몇몇은 ‘아아’ 소리를 터뜨렸다.
“그러니 우린 못 이겨도 바이러스는 이길 수 있지 않겠나?”
황제가 옥좌에 가슴을 펴고 앉으며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제국 각지에서 여기에 모인 그 누구보다 건강한 8백 명 중에 그 성분에 내성을 지닌 변형 공생 바이러스를 가진 자가 하나라도 있을지 누가 아는가?”
아스트라이아 홀에서의 1차 회의가 끝나고 부설 연회장에서 열린 만찬은 사실상 이번 제국회의에서의 첫 사교모임이었다. 얼떨결에 천자로 골수를 뽑힌 사람들 중 몇몇이 군데군데 끙끙대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황제가 [혹 내성 바이러스를 찾으면 발견된 사람 이름을 붙여주고 큰 포상을 내리마.]라고 의욕을 돋워 준 덕분인지 ‘어쩌면 나일지도 몰라.’라며 나름 기대를 품고 있는 모습들도 보였다.
정말로 그렇다면 제국을 뒤흔들고 있는 키니나 검은 재 소동에서도 완전히 자유롭다는 증명서가 되니 그들이 별 반감 없이, 아니, 나름 잔뜩 기대를 품고 기꺼이 골수 샘플을 기증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지금의 수명개조를 이룬 공생 바이러스는 마지막 대신관이었던 야푸르가 후계자 시절 발견한 것이었다. 현 제국민들 모두의 몸 속에 살고 있는 이 고마운 바이러스는 일반적인 명명대로라면 ‘야푸르 바이러스’가 되어야 했겠지만 감히 위대한 현신의 이름을 ‘바이러스 따위’에 붙일 수는 없다며 이전 실패한 몇몇 바이러스의 순서를 세어 [44호 바이러스]라는 몰개성한 공식 이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45호 바이러스]의 가능성을 조심스레 기대하고 있었다.
카렐은 여느 연회에서처럼 오늘도 혼자였다. 애당초 파티 같은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도 있지만 자신이 끼어들었을 때 분위기가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지간한 파티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파티장에서는 보이지 않은 이런 높은 테라스에 홀로 앉아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수많은 대화들을 예민한 귀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들도 나름 조심을 한다고 하지만 이런 사교모임에서 무심결에 튀어나오는 말들까지 모두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런 대화는 황제가 그들을 다루는 훌륭한 도구가 되어주었다.
다행히 오늘은 모처럼 황후 아메스가 그의 곁에 앉아있었다. 이전엔 파티라면 사족을 못 쓰던 그였지만 30년 전, 술을 끊은 이후로 그의 파티사랑도 이전 같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꼭 황상과 함께 있고 싶다며 내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 시간 네페티는 딸 마하의 최고제후 후계자 수업 겸사겸사 서부의 현안 토론 자리에 가 있었고, 베아트릭스는 이번 반란 사건의 마무리를 하느라 황실군 사령부에서 엉덩이를 못 떼고 있었다.
딱히 할일이 없는 솔과 에스더는 페스트의 전투를 겪고 온 장태자와 엘룬, 그리고 그 전에 있었던 페스트의 반란과 포로생활, 광산에서의 모험을 겪은 주페와 마리안이 서로 자기들이 더 무시무시한 경험을 했다며 몇 시간째 침 튀기며 우기고 있는 2:2 전쟁터에서 중재를 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연회장은 아침의 공포 분위기를 잠시나마 떨궈놓은 듯 활기에 찬 모습들이었다. 내일 있을 2차 회의를 위해 재고가 풍부한 남부의 제후들과 곡물 수입가격을 놓고 사전에 협의를 보려 광분하고 있는 동부와 북부 사람들도 보였고, 자기들이야말로 수명개조를 다시 살릴 기술을 갖고 있다며 투자자금을 모으러 다니는 사설 연구소 사람들, 아니면 그저 인맥을 넓히러 나온 사교계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그리고 다른 여느 큰 모임처럼, 본인, 혹은 자식들의 혼처를 찾기 위해 눈을 굴리고 있는 귀족가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 반역사건 소식을 받고 아픈 몸으로 뒤늦게 달려온 페로는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상종가를 치고 있었다.
해쓱한 모습으로 이동의자에 앉아있는 페로의 주변에는 미혼의 딸을 데려온 귀족가 사람들부터 지난 제위전쟁 때 자신에게 등을 돌린 남편들을 모두 정리해버리고 홀몸이 된 나람 눌레딘 부인, 그리고 페로와 수십 년째 ‘비공식적인 약혼자 겸 연인’으로 있는 사우드 발 부인까지 내로라하는 미녀 제후들이 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그림자처럼 맴돌고 있었다.
“아버지 이번엔 정말로 결혼하실지도 모르겠어요.”
“또? 저 둘 중에 누구?”
페로의 주변을 지켜보고 있던 카렐은 황후 아메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나람 부인은 페로의 첫 번째 연인에 약혼자였고 한때는 그의 아이까지도 가졌던 여자였다. 사우드 부인은 지난 30여년간 페로와 정치적으로―혹은 개인적으로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니 어느 쪽과 결혼해도 이상할 건 없는 상황이었다.
최근 사교계에선 그가 사우드 부인을 정실로, 나람 부인을 둘째로 둘 다와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리고 있었다. 자이센 가에서도 종장인 페로에게 빨리 결혼할 것을 독촉하고 있었지만 그는 지난 30여년간 자신의 결혼에 관해선 한 마디도 꺼낸 일이 없었다.
“다히르 경이 아버지가 계모 알리야 아야톨라 부인과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공식적으로 청혼장을 보냈더군요.”
“훗. 하나 또 늘었네.”
카렐이 속내를 감추며 씁쓸하게 웃었다. 능력 있고 외모까지 출중해 항상 남성호르몬이 철철 넘치는 페로의 곁에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로라하는 미녀들과 힘 있는 여자 세력가들이 떠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종조부의 처였던 여자라 어색할 텐데.”
“어차피 피도 안 섞였는걸요. 슈트란 가에서도 부인의 존재가 부담스러운가봅니다.”
그때, 연회장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카렐이 문득 시선을 돌렸다. 검은 드레스 차림을 한 눈부신 미녀의 등장에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며 길을 열어 주었다. 동부최고제후 다히르 슈트란 경과 팔짱을 끼고 들어선 그 수줍은 많은 여인은 사람들의 갑작스런 관심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한테는 두 제후들보다는 저렇게 순종적인 여자가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저 여자와 페로라…….”
카렐이 어딘지 허전한 얼굴로 알리야 부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중간 키에 새까만 머리와 눈동자, 가무잡잡한 피부에 온화한 인상이 도드라진, 전형적인 서부 미녀의 모습이었다. 네페티 모녀, 솔의 어머니 마리안 부인과 함께 사교계에서 ‘제국 3대 미녀’로 거론되었었고, 제위전쟁 당시 연합군 편에 섰다가 전사한 샤자한 공의 미망인 ‘알리야 아야톨라’ 부인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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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새 파트가 시작됩니다. 제목 그대로, '길'을 놓고 싸움이 벌어집니다.
출판본은 6권의 후반부쯤 될 것 같네요. (이 말은 조만간 출판공지가 있을 것이라는 뜻...^^;;)
어쨌거나~~ 추천, 코멘트, 평점 좋은 흔적으로 의욕 올려주시는 분들께선 앞으로도 복받으실 겁니다. ~~~(연재하는 유일한 낙입니다. ㅎㅎㅎ) ( ̄∇ ̄)ブ~~★
* 이 글의 무삭제 출판본이 조아라 유료란인 노블레스에서 2011년 6월 10일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노블레스 독자분들은 그쪽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텍스트 부분은 종이책의 무삭제판이 그대로 들어갔지만 시스템상 삽화나 도표, 조판 구성 같은것은 넣지 못했습니다.
뷰어 왼쪽의 [작품]에 보시면
혈맥 The Iron Vein [무삭제출판본] - 제1부 : 세상의 중심으로
링크가 있습니다. ^^
* 2011년 9월부터 전자책 서비스도 시작되었습니다. 전자책도 물론 무삭제 출판본 기준이고 표나 삽화, 부록 등이 함께 들어있고, 기간제한없이 영구적으로 소장하고 볼 수 있습니다. 9월 말 현재 4권까지 올라 있고 1달 단위로 2~4권씩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일부 권은 성인용입니다.)
전자책은 유페이퍼(http://www.upaper.net/kiltie), 예스24, 알라딘,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리브로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vein' 혹은 '혈맥' 으로 검색하시면 될 겁니다.]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조아라 노블레스 : http://t.co/ErnaaB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