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99화 (994/1,132)

< -- 999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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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야 부인의 등장에 사람들의 관심이 이렇게 쏠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인은 집안에서 조용히 머물며 남편만 내조하는 현모양처의 전형이었고, 순종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외부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도 않다보니 신비감까지도 한 꺼풀 덮여 사람들의 호기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종전 직후, 카렐의 심복들은 이 미모의 여인도 당연히 황제가 전리품으로 거두어야 한다며 아우성을 쳤지만 카렐은 페로나 아메스와의 껄끄러운 관계를 생각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마터면 황제의 후궁이 될 뻔했던 저 매혹적인 과부는 그동안은 새 최고제후가 된 전처소생 다히르가 마련해 준 거처에서 사람들의 접촉을 피한 채 조용히 지내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혼자 살 만한 여자가 못 되니 언젠가 ‘결혼 시장’에 나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그래서, 자이센 가에서는 뭐라고 했고요?”

“아버지는 다히르 경과의 친분 때문에 말을 아끼는 것 같고, 가문에선 환영하는 분위기던걸요. 솔직히 아버지도 싫지는 않으신 것 같아요. 젊어서 요동에 피해 계셨을 때 종부였던 알리야 부인이 많이 도움을 줬다고 들었어요.”

“복도 많아, 3대 미녀 중에 둘을 가지게 되었으니.”

카렐이 억지로 대답했지만 뒷맛이 씁쓸했다.

페로에게 다가간 알리야 부인은 지난 전쟁터에서 입은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걱정스레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이 갑자기 시끄러워져 카렐의 귀로도 뭐라 말했는지는 들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 아버지가 페스트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오신 후에도 페로관에 찾아와 한 3일 정도 곁에서 수발도 했나봐요. 사람들 말이 알리야 부인 요리솜씨가 주방 요리사보다 낫다고까지 하더군요. 듣자하니 전에 남편 샤자한 공 식사도 꼭 본인 손으로 지어서 간까지 맞추고 올렸었다죠. 지금 아버지 입고 계신 옷도 부인이 손바느질로 지어 준 것일 거예요.”

페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있는 부인을 보며 카렐은 그저 무겁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잠깐 내려가 아버지하고 부인한테 인사라도 해야겠네요. 부부인이 될지도 모르는데.”

아메스는 카렐의 손등을 한 번 어루만져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카렐은 오늘도 또다시 평소처럼 혼자 남겨졌다. 내려가서 아는 척을 하기는 자리가 너무 불편해 보였다.

홀로 앉아 북적대는 내빈들을 지켜보고 있던 카렐은 누군가 뒤쪽 기둥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보안국장 사에나였다.

“부르셨습니까?”

“심문은?”

“아직 별 성과가 없습니다. 본인의 역할들은 다 털어놓았지만 교단 내부 사정에 관해 아는 자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카렐이 이맛살을 살짝 찡그렸다.

“우두머리가 남은 것 같다 하지 않았었나?”

“모두 메시지를 통해 지시를 받았고 직접 만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테번 그 녀석은?”

카렐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앞의 테이블에 놓인 핏빛 체리주스를 한 모금 삼켰다.

“현역 장교라 헌병대에서 1차로 심문중입니다만 태도가 완강해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는 저희 보안국이 이첩받을 예정입니다.”

“‘어딘지 맘에 안 들더니.”

카렐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촌누나인 세데스 모녀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테번을 이용하려 했던 의도도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카렐은 그 아이를 황자들 못지않게 아껴주고 잘 키워 줄 생각이었다. 그는 친구 수우의 아들이었고, 네페티 황비의 손자였다.

“괜한 망상을 갖게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테번이 어릴 때, 수우와 구르베스에게 해 주었던 경고를 떠올리며 카렐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세데스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카렐 자신의 편이 되었고,  그건 테번에게 델루지 가 종권은 사실상 멀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이제 고작 서른 조금 넘은 말단 초급장교가 그 정도로 분노해 반역까지 꾀했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다른 증거는 없고?”

“델루지 비장의 동료들 말로는 누군가와 연애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고 하더군요. 사방에 미인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다는데 정작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요. 지금 행적을 추적 중에 있습니다.”

“수우는 돌려보냈나?”

“예. 셔틀에 실어 강제로 쿠트라스에 데려다줬습니다. 다시 오지 말라고 경고도 했고요.”

카렐이 팔짱을 끼며 눈가를 찡그렸다. 몇 시간 전, 막무가내로 황제를 찾아온 수우는 거의 사색이 다 되어 있었다. 그는 아들을 제발 살려달라며 카렐의 발을 붙들고 엉엉 울기까지 했지만 군인의 신분으로 황제 시해 모의에 가담해 군 최고지휘관인 상장군의 집에 무장하고 난입했던 자를 용서한다는 건 말이 안 될 소리였다. 거기에 진술까지 거부하고 패거리를 감싸돌고 있으니 사면은 고사하고 처형의 가중형을 빼 줄 명분조차 없었다.

게다가 아들의 바보짓으로 수우도 이젠 안전한 처지가 아니었다. 30년 전, 명목상 연합군의 최고 수장이었던 수우에게 20년 연금형이라는 턱없이 가벼운 처분을 내리며 있었던 논란이 다시 불붙을 분위기였다. 그렇게 된다면 이젠 아들 테번이 아니고 수우 자신의 목숨부터 챙겨야 할 판이었다.

그가 아들을 살려주기 전에는 안 떠나겠다며 버티는 수우를 보안국 요원들 시켜 강제로 쿠트라스에 보내 버린 것도 이번 일로 수우를 옭아맬 궁리를 하고 있을 자들로부터 그를 지켜주기 위한 배려였지만 아마도 수우 자신은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심한 친구 같으니.”

카렐이 붉은 주스잔을 빙빙 돌리며 혀를 찼다.

사에나가 물러난 후, 카렐은 우울한 얼굴로 테라스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다행히 루스탐이 황제의 쓸데없는 잡생각을 덜 수 있게 해 주었다.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고 다가온 그는 낮은 헛기침으로 황제를 돌아보게 했다.

“폐하, 모셔왔습니다.”

루스탐이 가리킨 복도 한구석엔 머리까지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어딘지 엉거주춤한 태도로 서 있었다.

“어서 오시오.”

카렐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를 향해 돌아섰다. 망토 후드 밑에서 무지개빛 눈동자 두 개가 잠시 황제를 올려보았다가 힘없이 바닥을 향해 꺾였다.

“이 좋은 자리에서 힘이 없으면 어쩌오.”

카렐은 그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그를 품에 살며시 안고 속삭였다.

“섭섭할지 모르나 나와 이렇게 만나는 것이 오늘로 마지막이면 정말 좋겠소, 밀리타.”

밀리타의 머리칼에서 풍겨오는 엷은 발삼향에 마음이 확 쏠린 카렐은 갑자기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은 맘에 자기도 모르게 팔에 힘을 꽉 주었다. 하지만 결국 아쉬운 한숨과 함께 팔을 풀고 한 발 물러섰다. 말로만 표현 못했을 뿐, 밀리타도 내심 아쉬움을 감추느라 표정이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카렐은 얼굴을 감춘 밀리타를 데리고 연회장을 나서서 정원을 걸었다. 원래 황무지였던 이곳에 군 기지를 만들면서 함께 만든 정원에는 여러 그루의 유실수들과 연못, 벤치와 분수대, 잘 다듬어진 잔디밭이 아기자기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군인들이 연회장 주변을 통제해 놓은 덕분에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데이트하기 참 좋은 날이요.”

카렐이 뒤따라오는 밀리타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자연석이 깔린 산책로 주변을 따라 난 가로등과 하늘을 밝히는 3개의 노란 달을 올려보며 엷게 웃었다.

“오늘 같은 날은 어지간한 사람 데려다 놔도 다 예뻐보일 것 같으니 이걸 어떤담.”

카렐이 억지로 웃었지만 밀리타는 역시 조용했다. 그는 뒤따르는 중간중간 멈춰 서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지만 카렐은 그의 걸음을 따라 멈추고 기다려줄 뿐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정원을 가로질러 한참을 나아가니 작은 정자 하나가 보였다. 그곳엔 두 남녀가 조금은 긴장된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둘은 동시에 자리에 꿇어앉았다.

“오랜만이요, 이렌느 세닉 경.”

남부 4제후 세닉 가 종장인 이렌느 경은 황제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침착하게 일어섰다. 6척(180cm)이 넘는 큰 키에 구릿빛 피부색과 다부진 인상의 이 여인은 얼마 전 죽은 친어머니 수나 마구스와 무척이나 비슷했다. 한 지역을 이끄는 대영주로서 오랜 관록 때문인지,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남동생 예르마크와는 달리 눈빛에서는 직업적인 완고함과 냉정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미모 여부를 떠나 사실 여자로서, 혹은 인간적인 매력이 묻어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제 맏아들이고 후계자인 요아킴입니다.”

이렌느 경이 함께 온 늘씬한 근육질의 남자를 가리켰다. 그 남자도 황제의 발끝에 입을 맞추고 일어서서 머리를 조아렸다. 할아버지 요아킴을 빼닮은 얼굴만 보아서는 사촌동생 코리온과 쌍둥이 같았지만 그보다는 조금 작은 키에 팔뚝과 어깨의 도드라진 근육, 군인 냄새 물씬 풀기는 짧은 머리 덕분에 헛갈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제국 제일의 미남들을 줄줄이 낸 세닉 가 혈통답게 누가 보아도 매력적인 남자였다.

“상급귀족 요아킴 칼리 세닉 2세입니다, 폐하. 남극성당을 졸업해 가문 농업 행정관과 아켐, 황제령 부(副)대사를 거쳐 지금은 가문 중장보병대 중랑장을 맡고 있습니다.”

남자의 얼굴을 본 카렐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감돌았다. 가문 행정과 외교부서, 이젠 군대까지 두루 거치며 후계자 수업을 밟는 모양이었다. 사실 첫인상만 따지자면 고집스럽고 까칠한 성깔이 얼굴 가득 묻어나는 코리온에 비해 훨씬 호감을 주는 남자였다.

“정말 잘생기고 매력적인 아들을 두시었소, 이렌느 경.”

남자의 출중한 외모에 만족한 카렐은 내심 기뻐해 보려 애썼지만 맘대로 되지는 않았다.

카렐은 뒤따라온 밀리타를 돌아보았다. 카렐의 손짓에 밀리타가 더듬더듬 망토를 내리며 얼굴을 드러냈다. 선명한 그레이오팔 눈동자와 조금 말랐지만 또렷한 이목구비의 매혹적인 얼굴이 정자 앞 가로등 불빛에 형형하게 반짝거렸다. 이렌느 경도 그의 미모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밀리타 레즐린입니다. 평민이고 북부 콜로니 아카데미에서 의학과 경제학, 정치학, 경학을 박사까지 공부했고 상급 회계사와 상급 법률사, 신경과와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쿠트라스 중앙조선소, 헤켈 차량사업소, 샤디스 병기창에서 최고경영자로 재직하였고 노에누스 가 재무장관과 황실 초대 군수부장으로 있었습니다.”

“후우.”

웬만해서는 놀라는 일이 없을 듯해 보이는 이렌느 경이 자기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무리 제국의 수명개조가 있었다지만 이 정도의 경력과 학력을 지닌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이렌느 경도 황제가 주선해 준 며느리감에 만족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요아킴, 인사해야지.”

고개를 숙여붙이고 있던 요아킴은 어머니의 부름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고개를 든 밀리타와 조심스레 눈을 맞추었다. 카렐은 둘의 심장박동이 일순간 짧게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같은 R로서, 서로의 존재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속내야 어쨌든, 둘의 몸은 같은 R인 서로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밀리타가 대놓고 싫다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던 카렐은 둘이 첫 만남부터 교감하는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묘한 섭섭함을 애써 지워내야 했다.

“그럼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비켜줘야지.”

카렐은 밀리타의 어깨를 살짝 어루만져주고는 이렌느 경과 함께 정자를 빠져나왔다.

몇 걸음을 걷던 카렐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호젓하고 분위기 좋은 정자에서 요아킴과 밀리타 둘이 아직은 어색한 듯 고개를 숙이고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특별한 문제만 없다면, 저 둘은 상급귀족가의 관례대로 짧은 만남을 가진 후 하룻밤을 함께하게 될 터였다.

“이번만은 꼭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시오.”

카렐이 웃었다. 잡종이라는 이유로 형제자매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오르마즈에게서는 배신했다며 버림받았고, 아스탈에게는 믿을 수 없는 여자라 학대당하며 지금껏 그 누구에게서도 사랑이라는 것을 받아보지 못했던 외로운 여자였지만 이젠 누군가의 품에서 진짜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어보였다.

요아킴과 단둘이 남은 밀리타는 그의 잘생기고 선한 얼굴을 다시 보았다. 이전의 요아킴을 기억하는 그에게 눈앞의 남자는 정말로 그의 분신처럼 보였다. 황제가 자신에게 좋은 짝을 찾아주려 정말로 맘을 써 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의 머리는 현실에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황제의 처지를 이젠 이해하고 한 발 물러서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를 위해서라도, 눈 딱 감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맘먹었다.

“수베르는 처음인데, 날씨가 참 좋네요. 왜 여길 새 수도로 삼으셨는지 알겠어요.”

밀리타가 먼저 분위기를 잡아보려 입을 열었지만 남자는 말이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밀리타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남자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시겠지만……전 이미 네 번이나 결혼한 남자입니다. 가문 후계자라는 이유로……어머니 강요에 그리 됐습니다.”

밀리타는 묘한 불안을 직감하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조강지처께선 돌아가시고 첩실 셋만 남아 계시다는 건 압니다.”

“부인들이 아이 둘씩을 낳았지만 여덟 모두를 잃었습니다. 모두 열 살을 못 넘겼습니다. 제 R이라는 것 때문이라더군요.”

“…….”

“7년 전 제 조강지처가 출혈열로 세상을 떠나던 날 제게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제가 할 말이었는데.”

밀리타는 재혼을 위해 나온 남자가 시작부터 전 부인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이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지만 일단은 꾹 참고 있기로 했다.

“부인은 출혈열에 걸리기 직전 딸을 낳았습니다. 어머니는 어차피 죽을 테니 외부에 알리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8살입니다. 중증이라 올해를 넘기기 힘들 거라고들 하지만 전 믿지 않습니다. 아내를 많이 닮았습니다. 아플 때마다 이 못난 아빠만 찾습니다. 제겐 아내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듣자하니 황상께서 R 아이의 수명을 연장할 약을 찾아내셨다고 하는군요. 그 얘기를 듣고 아이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밤새 엉엉 울었습니다.”

밀리타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곤두섰다.

“제가 소실을 들일 때 아내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압니다. 종부라는 의무감에 환영해 주는 척했지만 숨어 운 것도 압니다. 제 곁을 떠나던 날도 말로는 빨리 재혼하라 했지만 속으론 영원히 자기만의 남자로 남길 원했을 겁니다.”

순간 밀리타는 화내는 것도 잊은 채 맥이 풀려버렸다. 요아킴의 ‘무례한’ 언사가 계속되었다.

“어머니께서 당신과 만나면 그런 약도 필요 없는 건강한 아이를 낳을 거라 하시더군요. 그 아이를 죽은 아내의 양자로 입적시켜 제 후계자로 삼으시겠다고요. 지금 딸아이는 너무 약해서 설사 산다고 해도 가문은 절대 못 물려준다고 하셨습니다.”

요아킴이 고개를 반짝 쳐들고 밀리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은 아름답고 능력 있고 매혹적인 여자 같습니다. 하지만 황상과 어머니의 진노를 사 후계자 자리를 잃는 한이 있어도 아내와 딸의 자리에 당신과 그 핏줄을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요아킴이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밀리타에게서 돌아섰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보다 좋은 사람 만나십시오.”

요아킴은 매정하리만큼 휙 돌아서서는 정자에서 멀어져갔다.

휑한 정자에 혼자 남겨진 밀리타는 별빛 가득한 아름다운 하늘이 마치 머리 위를 짓뭉개는 것 같은 느낌에 잠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는 넋이 나간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이 넓고 아름다룬 정원은 인기척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다리가 풀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또다시 버림받았고, 이젠 눈물도 나지 않았다.

혼자 연회장으로 돌아온 카렐은 또다시 빈 테라스에 덩그러니 앉아 연회 광경을 구경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회장에서 알리야 부인과 귀엣말을 나누던 페로는 피곤해서 더 못 있겠다는 핑계로 그와 함께 나가버렸고, 아메스는 동부 사람들과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엄마 네페티와 함께 사람들 얼굴을 익히고 다니던 딸 마하 대군은 평소보다 몇 배는 피곤한 얼굴로 구석진 의자에 앉아 혼자 주스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아이를 한참이나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던 카렐은 문득 뒤를 휙 돌아보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루스탐의 앞을 지나 미친 듯 달려가기 시작했다.

“폐하? 마하 대군에게 가십니까?”

루스탐이 헐레벌떡 따라갔지만 그로서는 도저히 카렐의 빠른 발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아래층 연회장으로 뛰어 내려가려던 카렐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모습에 급히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는 복도 끝 큰 창문으로 내달렸다.

“폐하! 말씀이라도 좀…….”

“조용히 따라와!”

순식간에 복도 끝까지 달려간 카렐은 3층 창문을 홱 열어젖히고는 그대로 밑으로 몸을 날렸다. 황제는 연회장 건물 뒤쪽 정원으로 그대로 뛰어내린 모양이었다.

“이크.”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루스탐이 허겁지겁 방향을 돌려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뒷문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황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봐! 황상께서 어디로 가셨나!”

그는 경비를 서는 가디언에게 물었지만 그들도 황제가 따라오지 말라면서 숲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밖에는 대답해주지 못했다.

“밀리타! 밀리타!”

정원 중간 정자까지 달려온 카렐은 텅 비어 있는 그곳의 모습에 놀라 얼어붙었다. 정자의 작은 벤치 밑에는 밀리타가 두르고 있던 실크 스카프가 그대로 내버려져 있었다. 카렐은 오감을 최대한 곤두세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밀리타의 머리에서 느껴지던 엷은 발삼향이 더 깊은 숲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카렐은 스카프를 움켜쥐고 다시 숲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허겁지겁 숲을 가로질러 달려간 카렐은 멀리 나무들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적외선 온기를 볼 수 있었다. 카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곳은 이 기지에서 쓰는 물을 두기 위한 커다란 저수지 겸 인공호수가 있는 곳이었다.

“밀리타! 나요!”

나무들 사이를 지나 헐레벌떡 달려간 카렐은 인공호수 수로 위 구름다리에서 그 온기의 출처를 발견했다. 노란 가로등 아래 밀리타가 신고 있던 구두와 망토가 곱게 개어져 바닥에 놓여있었다.

“이런, 바보같이!”

카렐은 앞뒤 볼 것도 없이 물에 몸을 던졌다. 그 역시 몸 때문에 수영을 못 하는 처지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 키보다 훨씬 깊은 물속에서 숨을 참으며 온기를 찾아 한참을 나아간 카렐은 바닥에서 물살을 따라 흐느적거리고 있는 흰 형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읍.”

카렐은 그쪽에서 먼저 자신의 손목을 덥석 잡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그 형체를 확 끌어당겨 가슴에 안고는 위로 힘껏 발을 차고 뛰어올랐다.

“아푸!”

가까스로 머리를 내민 카렐이 숨 한 번을 들이마셨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다. 그는 밀리타를 안은 채 다시 물 속으로 빨려들었다. 겨우 숨 한 번을 몰아쉰 카렐은 수로 측벽에 달라붙으려 다시 방향을 틀고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물속에서 방향감각을 잃어 어느 쪽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가슴에 안긴 밀리타의 몸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이런.’

물 위를 올려본 카렐은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구름다리 그림자를 따라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저수지 측벽에 손이 닿자마자 다시 공중으로 힘껏 뛰어올랐다.

“헉, 헉.”

한 팔로 수로 옆 돌을 붙들고 매달린 카렐은 가슴에 안겨 축 늘어져 있는 여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얼굴은 하얗게 변했고 입술도 파랗게 질려 있지만 아직 분명 살아있었다. 카렐은 지친 몸에 힘을 주어 물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색색의 꽃과 잘 가꾸어진 나무들, 정돈된 벤치와 산책로의 아름다운 공원 밤 풍경은 여전했다.

“루스탐, 저수지 북쪽 구름다리다, 의사 한 명 조용히 데려와, 최대한 빨리.”

할룩스를 내려놓은 카렐은 망토를 벗어 바닥에 깔고는 온몸이 젖은 밀리타를 조심스레 눕혀놓았다. 물을 토해 낸 밀리타는 자신처럼 흠뻑 젖은 채 가슴 위에 몸을 기울이고 있던 카렐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보았다.

“왜 이런 거요, 대체.”

밀리타가 오른손을 천천히 쳐드는 모습에 손을 잡아달라는 줄로 생각했던 카렐은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려 했지만 착각에 불과했다. 밀리타의 오른손 끝은 카렐의 손을 벗어나 그의 가슴을 툭 하고 쳤다. 이유를 깨달은 카렐은 온몸이 확 굳어버렸다.

“밀……리……타?”

밀리타는 놀라 할 말을 잃은 카렐의 가슴을 또다시 쳤다. 밀리타의 턱에 힘줄이 바싹 서 있었다.

“왜 당신 멋대로 자꾸 살려요?”

밀리타가 이번엔 카렐의 뺨을 탁 하고 좀 더 세게 쳤다. 그는 이를 드러내고 씩씩거리며 카렐의 가슴과 어깨, 얼굴을 네 번, 다섯 번, 계속 때렸다. 카렐은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그의 손찌검 아닌 손찌검을 계속 맞아주고 있었다. 밀리타가 카렐의 옷깃을 움켜쥐며 쥐어짜듯 말했다.

“왜 내가 당신 때문에 두 번이나 더 살아야 하냐고요?”

멍하니 엎드려 있던 카렐은 바닥에서 흐느끼며 몸부림을 치는 밀리타를 힘을 주어 꼭 안았다. 지금은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의 품 안에서 발버둥을 치던 밀리타는 결국 힘이 빠지며 축 늘어졌다.

밀리타의 짧은 저항이 멈춘 후, 카렐이 그의 마른 손을 꼭 잡아주며 속삭였다.

“당신도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나 보오.”

저항을 멈춘 밀리타가 카렐의 눈을 빤히 올려보았다.

생각해 보니 누군가에게서 소중한 존재가 되어 본 일은 처음이었다. 그는 저주스러운 불륜의 씨로 태어나 젖도 제대로 못 먹어 본 채 어머니를 유리병 속에서 죽게 했고, 할아버지 자하크 대신관을 죽게 만든 씨앗이었다.

그에게 사랑은 애당초 사치였다. 아버지를 빼면 그 누구도, 심지어 형제자매들조차 정을 준 일이 없었다. 애정에 대한 갈망은 누구보다 컸지만, 사랑이라는 것을 느껴 본 일은 없었다. 그는 오르마즈에게서도, 아스탈에게서도 버림을 받았고, 언젠가는 어머니를 따라 유리병에 처넣어질 것이라며 평생을 구박과 멸시와 저주 속에서 살아야 했었다.

“당신의 텅 빈 마음이 내 덕분에 꽉 차면 그땐 당신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줄 수 있게 될 거요.”

카렐이 그의 젖은 몸을 소중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밀리타도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의 목을 안았다. 밀리타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황제의 어깨에 턱을 걸고 눈물을 꾹 참았다. 카렐이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속삭였다.

“어차피 당신은 새 재무대신으로 계속 내 곁에 있을 거고.”

“폐하! 폐하! 어디 계십니까!”

숲 너머에서 루스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큰 응급함을 대신 든 루스탐이 주치의 니사 라말라 박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

“폐하?”

“쉿.”

한 팔에 밀리타를 안은 카렐은 서둘러 다가오려는 니사와 루스탐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목에 매달려 있는 밀리타의 여윈 몸을 꼭 안고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비록 연인은 될 수 없을지언정, 밀리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얼굴로 그의 품에 머물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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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은 자르기 뭣해서 좀 많이 길어졌네요;;;; 에구구;; (너무 길어 모바일로 보실 때 잘리면 댓글로 말씀해 주세요. 앞으론 좀 줄이겠습니다.)

글고보니 999회입니다~~~ 꺄아악~

카렐은 빈 대신자리를 눈 깜짝할 새 채웠고.....그리고 다음편(하필 1000회;;;)부터는 한 방 맞은 이디나의 상당히 쿨한 역습(?)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아참, 이제야 1부 1~4권 전자책이 승인이 나서 판매가 시작되었네요. (3,4권은 성인용이라 비회원으로 그냥 접속하면 1,2권만 보일 겁니다.)

전자책은 기간제한이 없어서 쫓기며 볼 일이 없고 삽화나 부록, 목차나 폰트 등도 그대로 살아있으니 제 글만 보실 분이라면 노블레스보다 유리할 겁니다.

http://www.upaper.net/kiltie 에는 지난 주말에 올랐고 예스24에는 주중으로 오르지 않을까 싶네요. 무료 미리보기도 한 권 만들긴 했는데 보려면 회원가입이 필요할지 모르겠네요.

예스24에는 무료책은 못 올린다고 그래서 미리보기는 못 올렸습니다;;; 예스24 말고 다른 서점들도 있지만 예스24는 모바일 뷰어로 한컴리드온도 쓸 수 있어서 K전자책밖에 못 쓰는 다른 서점들보다는 뷰어 조건이 좀 나은 것 같네요.

표지가 종이책 표지와 많이 달라도 당황하지 마시고요 ^^;; 코딱지만한 전자책 트레이에서 썸네일로 볼 때도 잘 구별되게 하려고 표지를 좀 바꿨습니다. 글씨가 커서 가까이서 보면 살짝 부담스럽지만....뭐, 무슨 책인지도 안 보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어쨌거나~~  추천, 코멘트, 평점 좋은 흔적으로 의욕 올려주시는 분들께선 앞으로도 복받으실 겁니다. ~~~(연재하는 유일한 낙입니다. ㅎㅎㅎ)   ( ̄∇ ̄)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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