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02화 (997/1,132)

< -- 1002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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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대 유치장 독방에 갇힌 테번은 1차, 2차 심문을 받을 때를 빼고는 내내 한 마디도 없었다. 그 자리에 함께 배석한 보안국 요원은 ‘내일 아침부터는 우리 손에 들어올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라.’며 겁을 주었지만 테번에게 그럴 맘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에겐 충성 따위보다, 군인으로서의 의무보다, 심지어 가족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있었다.

테번은 긴 손가락 마디마디, 아직은 멀쩡한 사지를 어루만지며 턱에 힘을 꽉 주었다. 어제 아침 헌병대 조사관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아 이가 부러지고 얼굴이 군데군데 찢기기는 했어도 아직 크게 고문을 당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문을 당한다 해도 그는 황제에게 굴복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황제에 대한 지독한 분노와 악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 사건으로 보안국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관료들만 수백이었고, 헌병대에서 수사를 해야 할 쟁쟁한 고급장교들도 워낙 많다보니 말단 비장 따위에까지 헌병대가 관심을 쓰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네들이 큰 감옥을 다 채우고 있는 덕분에 그는 헌병대 중앙감옥 대신 잡범들을 임시로 가둬놓는 출장소 유치장에 일단 갇혀 있었다.

같은 층 감방들에는 그를 따라 반란을 시도했다가 붙잡힌 수하들, 선상반란을 시도했던 경호대원들 중 심문할 가치가 있다고 남겨놓은 하급 장교와 사관들 몇이 함께 갇혀 있었다. 그 정도 가치도 인정 못 받은 녀석들은 아침에 끌려 나가 황제의 개선식에서 끔찍한 몰골을 당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침이 와서 보안국으로 넘어간다면 그 순간부터 지금의 이 몸뚱아리는 끔찍하게 망가질 터였다. 코리온과 사에나의 심사까지 통과해 뽑힌 그 잔혹한 황제의 들개들은 원하는 답을 얻어낼 때까지 그의 사지를 잘근잘근 찢어놓을 것이 뻔했다.

“테번 델루지. 훗. 테번.”

그에게 ‘델루지’라는 성은 자부심보다는 절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에게 이름을 물려준 할아버지는 남부의 첫 최고제후였고 한때 제국을 쥐고 흔들던 무소불위의 권력가였다. 그리고 그의, 아니 그가 속할 뻔했던 가문은 비록 최고제후 자리는 빼앗겼어도 여전히 제국 최강의 제후가였다. 그렇지만 이제 그 가문은 그와는 엄밀히 말해 남남이었다.

그는 아버지 수우가 정말 미웠다. 아버지는 바로 그 가문의 적생자이고 한때는 황제까지도 꿈꾸었던 남자였다. 그렇지만 이젠 상급귀족 지위까지도 빼앗긴 채 매일매일 대출금 이자와 관객 수를 걱정하는 그저 그런 평민 극단주로 그의 눈엔 추접스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멍청하게 지금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지만 않았어도, 아니, 가문과 상급귀족 지위를 버리고 사교 성직자인 어머니와 결혼해 가문에서 파문당하는 한심한 선택을 하지만 않았어도 아들인 그도 이름을 물려준 할아버지처럼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을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버지가 지금의 황제에게 제위를 빼앗기며 잃은 건 그 스스로의 삶뿐만이 아니고 그 아들인 자신의 미래였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아버지가 이겼더라면 그는 지금쯤 장태자가 되어 아케메니아의 황궁에서 갖은 호사와 권력을 누리며 살았을 터였다.

스무 살 무렵 어쩌다 엿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에서 그는 ‘사촌누나 세데스가 크게 잘못한다면’ 그를 대신해 종장 신분이 되어 델루지 가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부모님은 그냥 희박한 가능성만을 이야기했던 것이었지만, 야심으로 뭉쳐 있던 그의 귀에는 마치 내일 당장 세데스를 몰아내고 비엔으로 개선할 듯 느껴졌었다. 그날 이후, 그는 ‘미래의 델루지 종장’이 된 것처럼 굴었다. 그는 친구들에겐 자신이 얼마나 크게 될지를 큰소리치고 다녔고, 술집에서는 델루지 가 주인이 될 사람이라며 숱한 여자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미래는 현실이 되지 못했고, 그는 이제 허풍선이로 낙인찍혀 있었다. 사촌 세데스는 위기를 넘기고 가문을 장악했고, 황궁, 혹은 델루지 종가에서 떵떵거려야 할 그는 이젠 말단 장교로 허름한 병영에서 말똥 냄새나 맡고 짬밥이나 먹으며 자신이 비웃었던 아버지만도 못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꿈을 되살려 준 사람은 딱 하나뿐이었다. 그가 정말로 사랑했던 한 여자, ‘그림자’는 황제를 죽이기만 한다면 자신이 분명 델루지 가 종장, 아니 멍청한 숙부 제롬이 빼앗긴 남부최고제후라는 자리까지도 되찾아올 것이라며 속삭여 주었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이렇게 몰락한 모든 원인은 멍청한 아버지, 그리고 자신을 돌봐주는 척 했지만 알고 보면 미래를 빼앗아가고 이용해먹은 황제였다. 언젠가부터 그는 황제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아버지는 자기 손으로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젊은 그에게서 꿈을 빼앗아간 황제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정말로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결국 이 꼴이 되고 말았다.

“제기랄.”

그는 자신의 지금 처지를 알려주는 감옥 천장의 거미줄을 올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깥을 보고 싶었지만 헌병대 영창엔 창문이 없다보니 시간감각도 없었다. 감방 안엔 변기와 무른 재질로 만들어진 물대야가 있을 뿐 시간을 알 만한 아무런 도구도 없었다.

그는 잠이 들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조금 전 2차 심문을 마치고 들어올 때 그의 팔을 쥐고 있던 헌병 녀석이 그에게 건넨 ‘5시를 기다려라’는 뜬금없는 말이 진담인지, 아니면 그냥 장난인지 그는 아직까지도 확신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애써 졸음을 쫓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은 다른 수도 없었다.

잠시 후, 바닥을 울리는 규칙적인 진동이 깜박 꿈나라로 갈 뻔했던 그의 정신을 되돌려 놓았다. 5시, 헌병이 귀엣말로 알려준 교대시간인 새벽 5시가 분명했다. 밤 시간 동안 이곳을 지킨 헌병대 위병이 임무 교대 직전 마지막으로 영창들을 휘 둘러보고 지나갈 시간이었다. 위병은 자신의 등장을 알리듯, 진압봉으로 감방 문을 탁탁 치거나 긁으며 지나갔다.

테번은 감방 문에 바싹 달라붙어 위병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안에서는 바깥이 안 보이지만 저 밖에서는 이 안이 훤히 보일 터였다. 벌써부터 바보짓을 할 필요는 없었다.

진동이 멀어지고 난 후, 테번은 문에 슬쩍 달라붙어 조심스레 밀어보았다. 헌병이 미리 알려준 대로, 문은 열려 있었고 경보도 울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귀띔을 주고, 방금 전 문을 열어놓고 지나간 위병은 이번에 운 좋게 걸려들지 않은 교단 한패거리가 분명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군.’

문가에 끼워져 있는 감방의 보안카드를 발견한 테번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이 카드는 당일 비밀번호만 안다면 감방의 거의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기특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비밀번호는 방금 전 지나간 위병이 문을 치고 지나가며 이미 알려준 터였다. 그는 조금 전 위병이 지나가며 문을 두드린 패턴을 떠올렸다.

“892140”

테번이 히죽거리며 카드에 입을 맞추었다. 아직 테번 본인은 모르지만 아들 일로 이성을 잃은 아버지 수우의 마지막 은혜였다.

감방 복도로 나온 테번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 개가 넘는 감방들이 양쪽으로 죽 늘어져 있고, 복도 감시를 맡은 위병의 자리는 아니나 다를까 비어 있었다. 카드와 번호까지 안 이상, 다른 감방들도 이제 그의 손 안이었다.

그는 방금 전 헌병이 시킨 대로 같은 층의 감방들을 확인하고 몸이 성한 10명을 카드로 풀어주었다. 보안국 이첩만을 기다리며 절망하고 있던 그들은 소리 없이 문을 열어 준 테번의 모습에 대번 희색이 감돌며 후다닥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10명이 넘게 늘어난 탈옥수들은 감옥 내부의 1차 출입문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약속대로 그곳도 교대를 앞두고 먼저 나간 병사가 문을 살짝 열어놓고 나간 상태였다.

“쉿.”

수색대 사관 출신이 문에 바싹 달라붙어 밖을 내다보았다. 이 층 위병들의 교대가 이루어지는 바깥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밤 근무를 마친 위병들이 무기를 벗어놓고 석궁과 볼트를 반납하는 중이었고, 교대할 4명의 위병들은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리고 탈옥을 도와줄 위병은 비상벨 앞에 여전히 무장한 채 서서 우물쭈물 시계만 보고 있었다.

- 지금이다. -

사관의 손짓과 동시에 11명의 탈옥수가 일제히 뛰어나갔다.

“엇!”

사실상 비무장 상태였던 위병들이 급히 석궁을 재장전하고 그들을 쏘려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이 새끼들 어떻게 도망친 거야!”

악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 테번이 비상벨을 누르러 달려가던 분대장을 몸으로 덮쳤고, 그를 쏘려 석궁을 겨누었던 위병 한 명은 비상벨 앞을 지키고 있던 배신 동료의 볼트에 목을 명중당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막아! 못 나오게 해!”

제일 마지막에 뛰어나오던 탈옥수 비장은 재빠른 위병이 쏜 석궁에 배를 명중당하며 자리에 주저앉았지만 그를 쏜 위병 역시 비상벨 앞을 지키던 배신 동료의 응사에 가슴을 명중당하고 책상 위에 나동그라졌다. 7명의 위병들과 12명의 탈옥수 혹은 배신자의 싸움에 헌병대의 작은 사무실 안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이 황제의 암캐 같으니!”

육박전 끝에 헌병 분대장의 가슴을 힘껏 내리누른 테번은 옆에 떨어진 필통 모서리로 그 젊은 여자 헌병 사관의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그리고는 그가 떨어뜨린 석궁을 재빨리 집어 눈에 대고 갈겨버렸다. 그때, 탈옥수 사관 한 명을 쓰러뜨리고 막 일어서는 헌병을 발견한 테번은 그자의 얼굴에도 또 한 발을 날려 즉사시켰다.

“학, 학.”

테번은 얼굴이 짓뭉개진 헌병 분대장의 시체를 옆으로 차내고는 헐떡대며 일어섰다.

“다 잡았나?”

“예, 그런데 셋은 당했습니다. 둘은 죽었고 중상 하나입니다.”

비상벨 앞을 지킨 헌병이 재빨리 숫자를 세였다. 홀로 무장을 벗지 않고 기다리던 그가 아니었다면 11명의 탈옥수만으로 위병을 제압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수색대 출신 사관이 위병에게서 빼앗은 단검으로 아직 숨이 붙어있던 3명의 헌병들의 목을 그어 확인사살하고 다 됐다며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석궁을 쳐든 테번은 문 앞에서 배에 볼트를 맞은 채 신음하고 있던 탈옥수 비장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탈옥수 중 유일한 부상자였다.

“미안하다, 못 데려가서.”

테번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의 목에 대고 석궁 방아쇠를 당겼다. 그 불운한 비장은 자유를 얻고 채 몇 분도 버티지 못한 채 시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남은 건 테번을 포함한 탈옥수 8명과 그들을 도와준 헌병까지 9명이었다.

테번을 도와준 헌병이 얼른 시계를 확인했다.

“강변으로 가면 됩니다.”

“강? 강으로 가서 어쩌게?”

“어젯밤 상류에 비가 와서 5시 30분에 수위가 제일 높아진다고 합니다. 우리 침투정이 들어와 기다리고 있기로 했습니다. 빨리 따라오십시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죽은 헌병들의 라커에서 옷과 무장을 꺼내 입은 8명의 탈옥수들은 앞장서는 일당을 따라 서둘러 헌병대 사무실을 나섰다.

“어휴, 인석 차라리 빨리 좀 나오기나 하지.”

만삭의 배 때문에 밤새 화장실만 들락거리고 잠을 설친 에스더는 무료함을 참다못해 별궁과 군사구역을 빠져나와 군인 가족들이 사는 관사 구역의 강변 산책로로 바람도 쐴 겸 나와 있었다. 제까지만 해도 ‘제발 황상께서 오신 후에 좀 나와라.’며 빌었었지만, 막상 황제가 돌아오고 나니 이젠 아이가 왜 아직 안 나올까 하는 생각에 마음만 점점 급해지고 있었다.

아이를 넷이나 낳아 본 네페티가 매일 보양식을 갖고 찾아와서는 초산은 다 그렇다며 웃으며 달래주었지만 그도 빨리 아기를 낳아 다른 비빈들처럼 ‘황제의 관심과 사랑을 한동안 독차지하는’ 시간을 누려보고 싶어 몸이 달아 있었다.

시녀와 가디언 경호원을 거느린 그는 선선한 새벽바람을 맞으며 사람도 없는 강변을 천천히 걸었다. 수베르의 푸르른 초원 사이로 강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이 바로 옆에 펼쳐져 옆에 있지만 물가에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기지 내의 민간인 구역이기는 해도 이 바깥의 강변으로 아무나 맘대로 드나들 수는 없도록 강변 모래사장을 따라 높고 투명한 방호벽이 성벽처럼 죽 세워져 있었다. 강바람도 방호벽 중간의 길쭉한 바람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중간에 강 쪽으로 나가는 문을 발견한 에스더는 기뻐하며 후다닥 다가갔지만 역시나였다.

“뭐야, 여기도 잠겼네.”

에스더는 이 놓은 경치를 다 망가뜨리고 있는 눈앞의 야속한 철조망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에 비해 제법 불어난 강물이 동쪽 하늘의 희미한 여명 속에서 넘실대고 있는 풍경은 100점짜리였지만 ―군부대다보니 피치 못하게 설치된― 이놈의 철조망이 점수의 절반은 깎아먹고 있었다. 그래도 철조망 덕분에 선선한 강바람은 제법 쐴 수 있었지만.

“밖으로는 아예 못 나가는 거야?”

에스더가 경호 가디언에게 볼멘소리로 물었다.

“중간중간 있는 철조망도 비상시에 뜯고 나가라고 되어 있는 거지 풍경 감상하라고 있는 건 아닙니다.”

가디언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미리 경비대에 연락하셨으면 바깥의 군인들 순찰로로 나가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아, 됐다고 해.”

철조망 너머로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던 에스더는 문득 산책로 남쪽을 휙 돌아보았다. 운동복 차림으로 헉헉거리며 뛰어오고 있는 가무잡잡한 피부색의 소녀가 보였다. 워낙 사람이 없다보니 바로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기병대 셔츠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기를 하고 있던 엘룬은 새벽부터 뜬금없이 나와 있는 에스더에게 환한 웃음과 함께 인사를 보냈다.

“잠도 안 오고 불편해서 그냥 나와 걷는 중이야. 아직 깜깜한데 벌써 운동 나왔어?”

“날 밝아지면 군인들 나와서 구보하는 통에 복잡하잖아요. 아무도 없을 때 뛰어야죠.”

“혼자 뛰는 거야? 경호원은 어쩌고?”

“몰라요, 저하고 3바퀴 달리기 내기했는데 저어기~ 뒤에 어디쯤 헐떡거리며 오겠죠.”

엘룬은 주머니에서 마른 고기조각을 꺼내 씹으며 여전히 힘이 넘치는지 검은 종마처럼 제자리에서 팔딱팔딱 뛰었다.

에스더는 서글서글하고 성격 좋기로 소문난 이 소녀의 훤칠한 키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는 황제의 피에 거인들이 득시글하기로 유명한 유목민 바툴 가의 피까지 섞인 덕분인지, 아이는 만 11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벌써 에스더 자신과 비슷한 5척 7촌(171cm)은 족히 넘어보였다. 아이의 크고 다부진 몸을 보니 자신이 낳을 뱃속 아들의 근사한 모습도 함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근데 얘는 대체 언제 나와요?”

엘룬이 에스더의 배를 살며시 짚어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글쎄, 오늘내일 하는데, 황상께서 바쁘셔서 이름이나 지어놓으셨나 모르겠다.”

엘룬이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무슨 기밀이라고 누설하는 양 에스더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비밀 지키셔야 돼요.”

“뭘?”

“전에 언뜻 들었는데, 동생 이름을 ‘메네스’로 지어놓으신 것 같아요. 틀릴지도 모르니까 책임은 못 져요.”

“정말? 알았어, 비밀 지킬게.”

에스더의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감돌았다. ‘메네스’는 하임달에서 오르마즈의 곁을 끝까지 지키다가 함께 전사했던 그의 맏아들 이름이었다. 그 정도면 황자들 중 유일하게 북부 피를 받은 자신의 아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황제가 이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대로 느낌이 전해오는 것 같았다.

“전 그럼 좀 더 뛰고 들어갈게요. 아침식사 때 뵈어요.”

엘룬은 두 팔을 위로 크게 흔들며 북쪽으로 이번엔 좀 천천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음?”

엘룬을 배웅해주던 에스더는 그가 가고 있는 북쪽의 훨씬 더 먼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 철조망 부근에 헌병대 복장으로 보이는 사람들 십여 명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저놈들 뭐 하는 거지?”

“헌병들 같습니다. 9명이군요.”

에스더를 따라온 가디언 경호원이 좋은 눈으로 즉시 그들을 확인했다.

“내 눈이 자네보다는 안 좋겠지만 말이야…… 저놈들 무장하고 있는 것 아냐?”

“네, 어떤 놈은 칼을, 어떤 놈은 석궁을 갖고 있습니다. 석궁은 실탄 장전된 것 같고요. ……한 명은 절단기를 들고 있네요.”

“절단기?”

에스더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의 본업은 광산 토목기사지만 한편으로는 가문의 예비역 공병 장교인 만큼 군대를 아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실전용 볼트가 지급되는 건 경계근무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전시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무장은 모두 통일되어야 했다.

그런데 여긴 군사구역도 아니고, 딱히 임무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 헌병들이 초소도 아닌 강변 철조망에서 제멋대로의 무장을 하고 절단기를 든 채 깡패 무리처럼 모여서 오고 있는 모양은 어딘지 어색했다. 게다가 바로 어제 새벽 무장반란이 있었던 것도 그를 불안하게 했다.

에스더의 시선은 아무 생각 없이 그 헌병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리고 있는 엘룬의 등에 멎었다. 그는 가디언이 갖고 있던 스코프를 냉큼 빼앗아 눈에 끼고 멀리 있는 헌병 무리를 살폈다. 그들 중 몇이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엘룬을 막 돌아보는 것 같았다. 그 발 빠른 소녀는 이미 헌병과 에스더의 중간께까지 가 있었다.

그때, 그 헌병들 중 눈에 어딘지 익숙한 얼굴 하나―언젠가 카렐이 네페티의 가족들을 초청했을 때 보았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자가 지금 저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까지도.

“맙소사, 테번이잖아?”

기겁을 하고 놀란 에스더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는 엘룬을 향해 손을 뻗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엘룬!”

다급해진 에스더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채 여명이 돋지 않은 새벽 공기를 울렸다. 놀란 엘룬이 달리다 말고 우뚝 멈춰 서서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런데 엘룬을 보고 있던 그 ‘헌병들’ 중 몇의 시선도 에스더를 향해 움직였다.

“이런!”

에스더를 지키던 경호 가디언이 위험에 처한 황자를 향해 스프링처럼 뛰어나갔다. 반대편의 테번도 위험을 직감하고 석궁을 번쩍 쳐들었다. 6개의 석궁이 일제히 엘룬과 에스더를 향해 볼트를 뿜어냈다.

“엎드리십시오! 옹주 마마!”

엘룬은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바닥에 몸을 기울였지만 아직 그의 ‘전투감각’은 훈련받은 어른만큼은 되지 못했다. 테번 쪽에서 날아온 볼트 하나가 엉거주춤 몸을 낮추며 뒤를 보인 엘룬의 등을 찢고 피를 뿌렸다. 그리고 또 한 발이 넘어지는 엘룬을 향해 달려가던 가디언의 아랫배에 꽂혔다.

“악!”

쓰러진 엘룬이 어깨를 짚으며 바닥을 한 바퀴 데구르르 굴렀고, 배에 중상을 입고 휘청거렸던 가디언은 비틀거리며 다시 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뒤이어 이번엔 에스더를 향해 볼트가 날아들었다. 얼굴 옆을 스치는 볼트에 놀란 에스더는 무거운 몸에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놈들 어디 연락하기 전에 잡아!”

테번의 고함에 탈옥수들이 일제히 쓰러진 엘룬과 에스더를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황제놈 새끼다! 저년 모가지 들고 돌아가면 영웅이 되는 거다!”

아랫배에 볼트를 맞은 채 필사적으로 엘룬을 향해 나아가던 가디언은 다시 어깨에 한 발을 맞았지만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기를 쓰고 계속 나아갔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옹주마마!”

탁 트인 잔디밭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엘룬에게 가까스로 다가간 가디언은 그의 뒷덜미를 붙들고 바닥을 질질 끌어 가까운 벤치 밑에 감추었다.

“곧 원군이 올 겁니다! 참으세요!”

가디언은 허리에 차고 있던 비상용 조명탄을 바닥에 힘껏 내리찍었다. 순간 노란 불꽃이 하늘 높이로 확 치솟아 비상상황을 기지 전역에 알렸다. 하지만 이 새벽시간에 영내에서도 벗어난 민간구역까지 바로 달려와 줄 경비병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또다시 엘룬을 겨누고 있는 탈옥수의 머리를 향해 힘껏 던졌다.

“우압!”

가디언이 던진 칼이 입에 명중한 탈옥수는 엉뚱한 곳으로 방아쇠를 당기며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조금 뒤에서 달려오던 테번이 악을 썼다.

“저놈 다쳤으니까 계속 몰아붙여!”

테번의 손짓에 4명이나 되는 탈옥수들이 무기를 들고 부상을 입은 가디언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가디언은 벤치의 등받이를 힘으로 확 뜯어내 방패처럼 앞을 가리고 그들과 홀로 맞섰다. 하지만 같은 시각, 정작 그가 지켜야 하는 에스더는 뒤쪽에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시녀의 도움으로 만삭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가로등 밑으로 몸을 피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놓칠 테번이 아니었다.

“저기 황제놈 새끼가 또 하나 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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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피소드를 끝까지 실으면 30k가까이 너무 길어져서 본의 아니게 절단신공이 됐습니다. ^^;; (처음엔 이보다 좀 더 올렸는데 뷰어로 보니 자꾸 잘리네요;;;;)

그래도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모두 대환영이고요, 그냥 글만 읽고 가시는 분들 밉습니다~~ ( ̄∇ ̄)ブ~~★

* 2011년 9월부터 전자책 서비스 시작되었습니다. 전자책은 유페이퍼(http://www.upaper.net/kiltie), 예스24, 알라딘,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리브로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vein' 혹은 '타사우프' 로 검색하시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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