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3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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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가 아닙니다! 철조망 밖에 배가 와 있다고요!”
테번을 여기까지 안내한 헌병이 그를 만류하려 했지만 황제가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굳게 믿는 고집 센 젊은이에겐 통하지 않았다. 부하 한 명을 거느린 테번은 등을 보인 채 도망치고 있는 에스더와 시녀에게 칼을 뽑아들고 돌진했다. 상대는 둘 다 비무장이고, 손쉬운 표적처럼 보였다.
“빨리 달아나세요!”
에스더를 먼저 보낸 시녀는 호신용으로 지니는 짧은 검을 옷 속에서 번쩍 빼들며 그들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시녀가 비무장의 만만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던 테번은 움찔하며 시녀의 기습을 피했지만 뒤따라오던 탈옥수는 그렇지 못했다. 시녀가 두 번째로 힘껏 올려친 검에 턱부터 이마까지 깊숙이 베인 탈옥수가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감히 우리 가문 아가씨를!”
시녀의 칼끝이 주춤거리는 탈옥수의 목을 향해 다시 일격을 날렸다. 탈옥수는 그제야 상대의 팔에 새겨진 이쟈크 가 보병 수색대의 문신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비빈이 황궁에 시집올 때 친정에서 함께 오는 최측근 시녀는 가문에서 선발한 정보요원, 혹은 특수부대 장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유사시엔 최종 경호요원이라는 것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시녀와 탈옥수의 싸움이 붙은 사이, 테번은 도망치고 있는 에스더를 쫓아 그 옆을 스쳐갔다. 시녀가 탈옥수를 떼어내고 테번을 저지하려 했지만 악만 남은 탈옥수도 그의 팔을 꽉 붙들고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귀인님! 도망가십시오!”
시녀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허망하게 메아리쳤다. 빠른 발로 뒤를 따라붙은 테번은 만삭의 무거운 몸으로 도망치고 있는 에스더의 뒷덜미를 사정없이 붙들었다.
“새 주인께 기념품으로 네 애기 좀 꺼내가야겠다.”
“이놈이!”
에스더가 단검을 빼들고 돌아서며 테번을 베려 했지만 그의 칼끝은 테번이 입고 있던 갑옷 위를 찌익 스치며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대신 테번이 내지른 칼이 에스더의 불룩한 배 왼쪽을 단번에 푹 찔렀다. 순간 에스더의 저항이 멈추었다.
“아, 악…….”
초점이 사라진 멍한 눈으로 자신의 배, 아니 뱃속 아들을 찌른 칼을 내려다본 에스더는 자리에 굳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좀 아플 거다”
테번이 히죽거리며 손에 힘을 주어 아기가 든 에스더의 배를 가로로 확 가르려 했다. 하지만 배를 찔린 에스더가 맨손으로 칼날 위쪽을 덥석 붙들었다.
“안 돼.”
핏발이 선 에스더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테번이 저항하는 그의 손을 쳐내려 했지만 배를 찔려 이미 쓰러졌어야 할 이 임산부의 돌처럼 굳어진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칼날을 쥔 에스더의 손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고, 상처가 벌어지면서 피와 정체불명의 액체가 그의 배를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년이!”
죽어가는 에스더와 힘싸움을 하려던 테번은 뒤에서 달려드는 다른 인기척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익!”
방금 전 부하 탈옥수를 쓰러뜨린 시녀가 칼을 테번의 목을 향해 내지르고 있었다. 당황한 테번은 에스더의 배에 박혀있는 칼을 내버리고 허리춤에서 재빨리 단검을 뽑아 맞섰다. 테번의 손에서 풀려난 에스더는 여전히 칼을 움켜쥔 채 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
“메네스…….”
만삭의 주인이 바닥에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에 시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짐승만도 못한 새끼!”
시녀는 테번의 뒷목을 정확히 겨누고 찔렀지만 갑옷 때문에 칼끝은 옆으로 빗나가며 그의 옆 목과 턱, 귀를 베어내고 스쳐 날아갔다. 테번이 악 소리를 지르며 다친 시녀에게 달려들어 몸싸움을 시작했다.
동료 탈옥수들이 황실 일행과 싸우는 동안, 절단기를 가진 탈옥수 둘은 철조망에 달라붙어 강 쪽으로 나갈 길을 뚫고 있던 중이었다. 막 작업을 끝낸 그들이 동료들에게 악을 쓰고 소리쳤다.
“철조망 뚫었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앗! 경비병입니다!”
“어, 뭐?”
시녀와 막 몸싸움을 벌이려던 테번이 멈칫하며 남쪽을 내려다보았다. 무언지는 몰라도 어른 머리통보다도 크고 넓적한 것이 공중을 붕 날아 그에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는 무심결에 단검을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 정체불명의 물건은 그의 칼을 후려치고 튕겨 관자놀이를 덮쳤다.
“우악!”
얄팍한 철판으로 된 산책로 이정표에 머리를 얻어맞은 테번이 피를 흩뿌리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뭐야, 어떤 놈이야?”
멍한 정신을 추스르며 고개를 가누고 보니 땀에 흠뻑 젖은 운동복 차림의 거구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비무장이지만 팔뚝에는 황금색 가디언 팔찌가 박혀 있었다. 엘룬을 뒤따라오던 호위 가디언이었다.
“으익!”
파랗게 질린 테번은 쓰러진 에스더와 휘청거리는 시녀를 놓아둔 채 철조망 쪽으로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를 쫓아가려 했던 시녀는 에스더의 신음소리에 뒤로 휙 돌아섰다.
“귀인 마마!”
시녀가 웃옷을 벗어 칼이 박혀 있는 에스더의 배를 꽉 눌렀지만 피인지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발, 제발 정신 잃지 마세요! 제발요!”
이미 기지에는 비상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고, 군 기지가 있는 남쪽과 치안 초소가 있는 서쪽에서 놀라 달려오고 있는 경비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엘룬과 중상을 입은 가디언을 공격하고 있던 탈옥수들도 이미 쓰러진 동료들을 내버려둔 채 테번을 따라 새벽 어스름이 드리운 강변으로 헐레벌떡 도망쳐가고 있었다.
“황상, 황상께선……. 아, 아악!”
고개를 저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에스더가 갑자기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죽어가는 그의 몸에서 갑자기 진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의사 어딨어! 어딨냐고!”
“죄송합니다.”
자다 일어난 모습 그대로 내의원에 달려온 카렐은 흰 천이 덮여 있는 병상 앞에서 넋이 빠진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얼굴이 푸석해진 하심은 표정이 사라져 있는 황제의 모습을 보며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황제의 눈시울이 이미 빨갛게 변해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아랫사람들 앞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보시……겠습니까?”
카렐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심이 작은 몸을 덮고 있던 천을 거둬내자 그 안에선 탯줄과 태반이 그대로 붙어있는 작은 아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순간, 카렐이 휘청하는 모습에 하심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카렐은 그 앞에 다가가 아기를 두 손으로 안아들었다. 아기의 얼굴과 팔다리는 토실토실 살이 올라 있었고, 불그스름한 배냇머리에 큰 손, 또렷한 눈코입은 카렐을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가늘게 열려 있는 눈꺼풀 사이로 엄마 에스더를 닮은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당장 강보에 싸 요람에 눕혀놓아도 다른 신생아들과 전혀 차이가 없을, 건강한 사내아기였다.
“미안하다, 메네스.”
아기를 가슴에 꼭 품어 안은 카렐이 자리에 쿵 소리를 내며 꿇어앉았다. 1년 전 크낙스, 1달 반 전 오렌에 이어 세 번째였다.
“황상.”
소식을 듣고 달려온 황태후 세네피스가 떨고 있는 카렐의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끔찍한 소식을 접한 비빈들도 수술실 구석에서 창백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 손자 테번이라는 사실을 전해들은 네페티는 베아트릭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황비 전하 잘못이 아닙니다. 진정하세요.”
조금 전 딸 엘룬의 상태를 보고 온 베아트릭스가 그를 직접 달래주었다. 엘룬도 등에 볼트를 맞았지만 다행히 탄탄한 근육 덕분에 깊이 관통하지는 않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진단이었다.
“귀인은?”
카렐이 아기를 안은 채 작은 소리로 물었다.
“방금 수술 끝내고 안정중입니다.”
“이걸……알고 있나?”
“따로 수술실에 들어갔으니 아직 모르고 있을 겁니다. 모두 입단속을 시켜놨습니다.”
카렐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아기를 도로 병상에 눕혀놓았다. 잠든 듯 누워있는 아기의 평화로운 얼굴에서 그의 눈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결국 큰 한숨과 함께 뒤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따라들 오지 마시오, 내 혼자 가는 게 나을 테니.”
카렐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하심을 따라 수술실을 나섰다. 내의원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경호대 가디언들과 보안국 요원들이 황제의 모습에 일제히 부동자세를 잡았지만 카렐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그들 사이를 걸었다.
병실 문 앞에 선 카렐은 눈가를 닦고 최대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수술 잘 되었다고요.”
카렐이 병실에 들어서며 활짝 웃어보였다. 칼에 찔린 배와 다친 손에 붕대를 두른 에스더는 갓 마취에서 깨어나서인지 데데한 모습이었다. 사건 이후 처음 황제를 마주한 에스더는 다짜고짜 울음부터 터뜨리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아기는요?”
“칼에 좀 베였지만 괜찮아요. 내 안아주고 오는 길이요.”
카렐이 흐느끼는 에스더의 등을 토닥여주며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냥 초산 진통할 거 이걸로 대신했다고 쳐요.”
카렐이 에스더의 찔린 배 위를 만져주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카렐의 떨리는 입술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에스더가 갑자기 그의 손등을 잡았다.
“오늘은……연기를 참 못하시네요…….”
카렐의 눈웃음이 싹 사라졌다.
“세 번째 아이를 잃고도 아닌 척 하실 수 있었다면 정말 미워했을 겁니다.”
에스더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는 카렐의 얼굴을 끌어당겨 가슴에 꼭 안았다. 그리고는 떨고 있는 그의 어깨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냥 우세요, 제발 억지로 강한 척 마시고요.”
“……미안합니다.”
카렐이 에스더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흐느꼈다. 에스더는 울고 있는 황제의 넓은 가슴을 꼭 품어안았다.
“괜찮아요, 다 잘 될 거에요.”
황제령 수베르에서 탈출한 테번 델루지는 얼굴이 가려진 채 몇 시간을 어딘가로 이동했다. 사실 그도 지금껏 ‘그림자’ 정도만 만났을 뿐 진짜 교단 내부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었다. 어머니 구르베스를 통해 이것저것 간접적으로 주워들은 건 있었지만 아들이 엄마를 따라 사교도가 되어 제국의 ‘엘리트 코스’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하던 아버지 수우 때문에 엄마가 일하고 있는 쿠트라스의 트라카 대신전 부근에도 가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무언지 모를 약까지 먹여 데려온 것이 도통 맘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단 이들 덕분에 황제에게서 벗어났고, 또한 자신을 남부최고제후로 만들어줄 사람들인 이상 일단은 꾹 참기로 했다. 오는 길에 들은 말로는, 자신을 대신관에게 소개해 준다는 것 같았다.
‘또 날 이용해 먹기만 해 봐.’
셔틀에서 내려진 후에도 머리에 자루가 씌워진 채로 이동하며, 테번은 이런 다짐을 몇 번이나 했다. 황제의 비빈을 찌르고 자식까지 죽인 마당에 이제와 생각해 보니 어려서 황실 군사학교에 들어가며 했던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도 다 우습게 보였다. 앞으로 다시는 누군가에게 충성 따위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잘난 놈은 다 빠져나갈 데가 있는 거지.’
그는 으쓱한 기분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비록 상장군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대신 황제의 핏덩이 하나를 죽였고 비빈과 군에게 치명상을 입혔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공훈이 분명했다. 그리고도 그 지옥 같던 토로 기지에서 멀쩡히 살아 탈출해 나온 영웅이고, 대신관에게까지 소개를 받게 되었으니 이제 교단에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교단에 주구장창 충성할 맘도 없었다.
테번은 자신을 구해 준 교단이 혹 나중에 곤경에 처하면 그땐 또 어떤 핑계로 이들을 버리고 말을 갈아탈까 벌써부터 이른 고민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다 왔다.”
테번을 끌고 온 누군가가 그를 자리에 앉혀주며 비로소 얼굴을 자루를 벗겼다.
“잠시 기다려라.”
대충 시력을 적응하고 보니 그는 작고 고급스런 응접실 소파에 앉혀져 있었다. 응접실 주변으로는 ―누군지는 잘 몰라도― 얼굴이 비슷비슷한 사람들의 두상이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성화(聖畵)와 군청색의 벨벳 커튼이 양쪽으로 쳐져 있었다. 창문은 없지만 공기는 상쾌했고 옅은 천연 향 냄새가 고급스런 느낌을 한껏 끌어올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함께 도망친 3명의 탈옥수들도 함께 와 있었다.
“근사한 곳이 분명해. 내 예상이 맞다니까.”
테번이 재회 아닌 재회를 한 동료들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자신이 영웅에 합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다시 기분이 으쓱해졌다.
한껏 콧대가 높아진 그는 그제야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사람을 돌아보았다. 커튼 색깔과 똑같은 군청색 군복에 보통 사람보다 다부지고 조금 큰 남자였지만 가디언처럼 무지막지한 체구는 아니었다. 옷깃 소매와 목 칼라장에 계급이 표시된 듯했지만 아직 그는 저들의 계급은 읽을 줄 몰랐다.
어쨌든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맡은 걸 보아 그리 높은 계급은 아닌 듯 보였다.
“이봐, 여기가 어디지?”
그자는 아무 대답도, 심지어 시선 한 번 주지도 않았다. 확 부아가 났지만 이곳에 처음 온 마당에 일단은 참기로 했다. 하지만 나중에 익숙해지고 자신도 계급을 받고 나면 저놈에게 단단히 맛을 보여줘야겠다며 저자의 얼굴을 기억에 담았다.
그때, 커튼이 열리더니 시녀인 듯 하얀 원피스 차림의 웬 여자가 차 네 잔과 간식거리를 은쟁반에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위대한 현신께선 중요한 손님들을 만나느라 조금 늦어지신다고 하니 다과라도 드시면서 기다리세요.”
테번의 맥이 탁 풀렸다. 거기에 시녀의 얼굴을 본 그 그의 실망감은 곱절로 높아졌다.
‘여긴 인물도 어지간히 없나보네.’
길쭉한 얼굴에 뾰족한 코, 볼륨 없는 움푹한 뺨과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도 않는 입술까지, 나름 피부는 관리한 듯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런 곳에서 누군가를, 그것도 자신처럼 ‘중요한 사람’을 접대할만한 여자는 아니었다.
“뭐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여자가 그 못생긴 얼굴에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은 웃음을 덧대며 다시 물었다.
“원하는 건 뭐든지 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고 다시 보니 여자의 허리띠에 ‘임산부’를 뜻하는 빨간색 심장 모양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제국민이 콜로니에 정착한 이후로 인구 늘리기가 지상과제였던 교단 시대와 제국을 통틀어 임산부는 보호받아야 할 1순위였다. 이 펜던트는 모든 보호에서 1순위라는 엄한 경고문이었다.
‘어떤 눈깔 빠진 놈이 이런 년하고 눈이 맞아 애를 배게 했을까.’
설마 이런 못생긴 여자를 접대로 들여보냈을까 반신반의했던 테번은 상대가 임산부라는 사실에 더 기가 막혔다. 테번은 무뚝뚝하게 그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그런 거 없다. 가 봐.”
“아참, 이번에 큰 공 세우셨다고요?”
이 ‘못생긴 여자’는 눈치가 없는 건지, 멍청한 건지, 볼품없는 작은 눈을 크게 뜨며 테번 옆자리에 바싹 달라붙었다. 테번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으며 이 못생긴 임산부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함께 빠져나온 3명의 탈옥수들이 ‘이런 추녀에 찍힌’ 그의 모습에 자기들끼리 키득거리고 있었다.
‘내가 정말 중요한 사람이긴 한가보네.’
생각해 보니 대신관의 측근 시녀가 노골적으로 달라붙는 것을 꼭 나쁘게 생각할 것도 없어보였다. 어쩌면 자신에게 줄 ‘어마어마한 지위’를 미리 알고 이렇게 꼬리를 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슨 공을 세우셨길래 위대한 현신까지 알현할 수 있게 되셨나 정말 궁금해요.”
‘진짜, 귀찮게.’
여자의 팔을 힘으로 밀어내려 했던 테번은 구석에 서 있는 군인인지 뭔지가 갑자기 긴장하며 눈깔을 부라리는 모습에 지레 놀라 일단 손을 떼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여자의 눈을 보니 어지간해서는 쉽게 떨어질 성 싶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다른 방법도 있었다.
“산만한 임산부 배를 쫙 갈라버렸다.”
테번 부하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이 못생긴 여자의 낯빛이 흙빛이 되었다. 여자는 놀랐는지 무심결에 아랫배를 짚었다.
“무슨 노, 농담도 그런 농담을…….”
“칼을 푸욱 넣는데 안에서 그 조그만 게 꿈틀대는 느낌이 진짜 짜릿하던걸.”
테번이 에스더와 태아의 피로 범벅이 된 손으로 여자의 옆구리에 칼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피 웅덩이에서 꾸물거리던 핏덩이를 기념품으로 꺼내 가져왔어야 하는데.”
“그, 그만하세요, 제 딸아이가 들어요.”
놀라고 당황한 여자는 손찌검 한 번도 필요 없이 쟁반을 들고 황황히 커튼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간단하지?”
테번이 옆에 앉은 부하들에게 휘파람을 불며 넉살을 부렸다. 홀가분해진 테번은 등받이에 두 팔을 편안하게 걸고 여유롭게 시간이 가기만 기다렸다.
십여 분 후, 이번엔 그 못생긴 임산부 대신 진짜 제대로 미모를 갖춘 시녀다운 시녀가 사뿐사뿐 나와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현신께서 잠시 후 들라 하십니다.”
테번과 탈옥수들은 그제야 얼른 옷을 단정히 하고 머리도 흐트러진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따로 갈아입을 옷을 못 받았다보니 달아날 때 입었던 더러워진 헌병대 군복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 급박했던 탈출 현장의 느낌을 그대로 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명의 탈옥수들은 앞장서는 시녀를 따라 작은 응접실을 나서서 조명도 없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났다. 어둠에 막 눈이 적응되기가 무섭게 문이 확 열리더니 환한 빛이 눈을 찔렀다. 일시적으로 눈이 먼 그들은 움찔하며 순식간에 무장해제상태가 되었다.
“이번에 황실군 진영을 탈출한 테번 델루지를 비롯한 3명의 탈옥수들입니다.”
누군가 뒷덜미를 세게 치는 느낌에 테번은 얼떨결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나머지 동료들도 쓰러지듯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려 했던 테번은 무언가 막대기 비슷한 것으로 뒤통수를 확 누르는 느낌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본 건 눈앞에 쳐진 흰 베일과 그 너머에 있는 검은 형상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테번은 영웅인 자신들을 고작 이렇게 대하는 저들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저들이 위대한 현신이라고 부르는 작자가 대체 얼마나 잘났는지 몰라도 어쨌든 그에 대한 존경심 같은 건 ―애당초 있지도 않았지만―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황제의 귀인을 찔렀다고?”
베일 너머에서 들려 온 건 잔뜩 힘을 준 여자 목소리였다. 어딘지 익숙했지만 워낙 화가 나 있는 상태라 그런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년 배를 따고 아이도 끝장을 냈습니다. 그리고 엘룬이라는 녀석도 중상을 입혀 놓았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조용해졌다. 당황한 테번은 엎드린 채 옆에 있는 같은 탈옥수들과 눈짓을 주고받았지만 그들 모두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한참만에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우리 교단을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대신관의 난데없는 물음에 테번은 말이 막혀 머뭇거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들의 본색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에게 이들은 그저 ‘자신을 남부최고제후로 만들어줄 세력’일 뿐이었다. 테번이 고민하던 정답을 대신관이 대신 해결해 주었다.
“내가 이끄는 건 사이코 살인마 집단이 아니고 내게 깃든 공포, 정의의 신과 그 힘을 받드는 신성한 군대다.”
“아, 그, 그렇게 대답할 참이었습니다.”
“자, 말해봐라, 만삭의 임산부 배에 칼을 넣는 느낌은 어떻더냐?”
순간 테번의 말문이 탁 막혔다. 이번 목소리는 상당히, 아니 아주 많이 익숙했다. 테번은 차마 대답을 못 한 채 머뭇거렸다.
“다시 묻겠다. 한때 네가 충성을 맹세했던 주군의 배우자를 찔러 태아를 끄집어내는 그 짜릿함이 어땠냐고 말이다.”
“그……그렇게는 하지 못했사옵고…….”
테번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들어온 세 명의 탈옥수들도 비로소 무언가 잘못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 챈 듯 주춤거리며 테번에게서도 조금씩 거리를 두려 하고 있었다. 또다시 소름끼치는 침묵이 흘렀다.
“쓸모 있는 인간은 딱 두 부류지.”
누군가 흰 베일 너머에서 걸어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스르르 베일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뚜벅뚜벅 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소리는 엎드려 있는 테번의 머리 앞에서 멈췄다. 눈을 슬쩍 치켜 뜬 테번은 자신의 앞에서 신발코까지 덮고 있는 긴 로브자락과 발목까지 길게 늘어진 사파이어빛 스톨라를 보았을 뿐이었다.
“똑똑한 놈이거나, 충성스런 놈이거나.”
대신관의 가죽신이 테번의 뒷덜미를 꾹 눌렀다.
“애석하게도 넌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것 같구나.”
대신관의 가는 웃음소리가 테번의 귓가에 저주처럼 울려 퍼졌다.
“네 다음번엔 내 배를 가르고 내 딸아이를 새 주인에게 선물로 가져갈 놈 아니더냐?”
속내를 읽혀버린 테번은 아찔한 느낌에 대신관의 발목이라도 잡으려 했지만 그를 지키는 헤네티의 할버드 자루가 그의 손등을 사정없이 찍어버렸다. 비명을 지르며 손을 뺀 테번이 결사적으로 빌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그랬던 건 탈출하면서 어쩌다…….”
이디나가 그에게서 발을 떼고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더도 말고 딱 저지른 만큼만 해 줘라. 산 채로 말이다.”
헤네티들이 테번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영웅 대접을 받을 줄로만 알았던 테번은 파랗게 질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제발,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제 모든 걸 다 해…….”
그는 베일 쪽으로 다시 멀어지는 대신관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었다. 검은 로브 차림새의 대신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고 있었다.
“네 그런 짓을 저지르고 현신의 노여움을 살 것도 몰랐느냐? 내 황제에게 친히 사과의 편지를 쓸 것이니 이놈의 창자로 묶어 황제에게 돌려보내라.”
베일 안쪽으로 사라진 이디나는 다시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편지지와 펜을 들었다. 테번과 그 일당들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이디나는 태연히 글을 써 내려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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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병 주고 약 주는 편입니다. ㅎㅎㅎ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글만 읽고 가시는 분들 밉습니다~~ ( ̄∇ ̄)ブ~~★
* 아, 그리고 예스24, 알라딘, 리브로, 영풍, 반디앤루니스에서 전자책 서비스 시작되었습니다. 전자책도 물론 무삭제 출판본 기준이고 표나 삽화, 부록 등이 함께 들어있고, 기간제한없이 영구적으로 소장하고 볼 수 있습니다. 9월 말 현재 4권까지 올라 있고 1달 단위로 2~4권씩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다음달초~중반에 5~8권권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일부 권은 성인용입니다.)
'vein' 혹은 '타사우프'로 검색하시면 될 겁니다. ('혈맥'이라고 넣으면 생소한(?) 책들도 여럿 함께 나와서 찾기 힘드실 겁니다. ㅎㅎㅎ
링크를 넣고 싶어도 조아라가 링크를 지원하지 않는지라;;; 팬카페 공지나 주문게시판에 가시면 링크까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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