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4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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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사과의 편지를 쓰던 이디나는 움찔하며 배를 만졌다. 물론 지금은 이런 자극이 올 때가 아니었다. 배란촉진제와 인공수정 약물 덕분에 임신 초기 발생 기간이 짧아지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고작해야 수정란이 착상 정도나 되었을 때였다. 하지만 그는 황제의 세포를 받아들인 바로 다음날부터 마치 아이가 뱃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이런 얼토당토않은 환각을 종종 느끼곤 했다.
그는 책상 한쪽에 잘 싸서 걸어놓았던 은빛 늑대털을 꺼내어 코에 가져갔다. 바로 이 털에 감싸인 채 그는 황제와 생애 첫 번째로 사랑을 나누었었다. 이 두툼한 털에는 그 어느 물건보다 황제의 체취와 숨결, 그와의 사랑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디나는 늑대털이 걸려 있던 선반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따위 털 말고 당신의 몸을 저기 걸어두고 싶었는데.”
이디나는 여전히 환각이 가시지 않고 있는 아랫배를 더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이가 빨리 자라 정말로 이런 움직임을 느끼게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뱃속에서 황제를 닮은 아이를 본다면 정말 환상적일 것 같았다.
“정신 차려, 이디나.”
이디나는 얼른 고개를 흔들고 잡념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이후 있을 계획들을 머리에 하나하나 정리했다. 제국회의에서의 거사가 시작에서 좀 망가지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틀어진 건 아니었다.
그곳을 무사히 탈출한 바에자의 군대는 아라무트에 도착해 곧 크바르나를 공격할 예정이고, 그가 대신관에 오르기 전, 회심의 수로 적진에 침투시켜 놓은 ‘그림자’는 아직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도 하지 않았고, 제국회의는 이제 시작이었다.
황제는 분명 남부를 쥐어짜내 기근으로 굶어 죽어가는 다른 지역에 곡물을 팔라고 압박할 테고, 남부는 내내 거부하며 저항한 후 이번 제국회의 마지막 날, 불복종을 선언하며 전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 각본으로 짜여 있었다. 기근과 곡물 오염으로 군량까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다른 굶주린 지역들을 쓰러뜨리거나, 혹은 곡물을 미끼로 한 편으로 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한 번에 끝내버리기’가 어려워졌을 뿐 진짜 승부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다 쓴 편지를 곱게 말아 빨간색 예쁜 병에 담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한때 황제의 세포가 담겨 있었던 캡슐 튜브를 함께 넣어 밀랍으로 밀봉했다. 이 편지를 받고 바로 자신의 손으로 이디나를 임신시켰다는 사실을 안 순간 경악할 황제의 표정을 생각하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쿠마르.”
이디나의 부름에 밖에 있던 비서 쿠마르가 재빨리 들어와 바닥에 엎드렸다. 한때 아버지 곁에서 자유분방하다못해 건방지게까지 굴었던 이 비서관도 새 현신에게 익숙해진 지금은 더 이상 방자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디나는 편지와 튜브가 든 빨간 병을 쿠마르에게 불쑥 내밀었다.
“황제에게 꼭 직접, 혼자 있을 때 열어보라 전해라.”
편지를 건네준 이디나는 다시 황제의 늑대털을 돌아보았다. 자꾸 시선이 저쪽으로 가서 도무지 일에 집중이 되지를 않았다.
“이래선 안 되지.”
야무지게 맘을 먹은 그는 황제의 늑대털을 집어 구석의 수납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안쪽에 휙 던져놓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래, 이젠 잊어야지.”
늑대털을 놓아둔 채 몇 걸음을 더 멀어졌던 이디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의자 뒤 텅 빈 옷걸이를 보니 너무 허전했다. 자리에 선 채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도로 수납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늑대털을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걸어놓았다.
“내일은 여기 걸 다른 옷을 대신 가져와야겠어. 그때 넣어야지.”
교단 본부에 꼬박 이틀 넘게 붙잡혀 있었던 케스난은 그 정체불명의 장소에 끌려갔을 때처럼, 올 때도 마찬가지로 얼굴이 가려진 채 창문이 없는 셔틀에 태워져 옮겨졌다. 중간에 먹은 음료수 때문에 정신을 잃어 얼마나 오랫동안 왔는지 정확한 감각은 없었다.
그가 깨었을 때 처음 느낀 건 등을 받치고 있는 허름한 침대와 머리 위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싸구려 전등이었다. 막 정신을 차린 그는 지난 이틀간의 기억이 혹시 지독한 꿈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만 여전히 쿡쿡 쑤시고 있는 갈비뼈의 통증에서 그것도 아님을 직감했다.
그는 옆구리의 아픔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싸구려 벽지, 이가 빠진 블라인드가 드리워진 창문이 보였다. 침대 옆의 협탁에는 지난 며칠간 자신과 떨어져 있었던 황금 갈고리와 할룩스가 놓여 있었다. 할룩스는 정상으로 작동되는 것 같았다. 그때, 할룩스의 메시지에 찍혀 있는 한 문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 네포프 칼리와 그자를 데려간 일당은 그곳에서 추적이 끊겼다. 그자를 못 찾으면 사업 건은 고사하고 우리를 다시는 못 볼 줄 알아라. -
“그곳? 여기 말인가?”
움찔한 케스난이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런 문장을 찍어놓았다는 건 자신을 잡아간 교단 무리가 할룩스에도 손을 댔다는 의미였다. 지레 불안해진 그는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이라고 했지만 정작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슬슬 정신이 맑아지면서 지난 며칠간의 기억이 조금씩 되돌아왔다. 그들이 자신에게 네포프 칼리를 찾아내라고 명령했던 것도, 그 건만 성공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사업 건’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도 슬슬 머리에 떠올랐다.
그곳을 떠나기 직전, 그는 힌트라도 좀 달라며 살름을 닦달해 몇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네포프 놈이 죽기 직전의 아내 오르마즈에서 중요한 보석을 훔쳐 도망쳤던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살름은 그 ‘보석’이 뭔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무지개색’이라고 한 것을 보아 오팔이 박혔다는 [사제의 키]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사후를 치밀하게 준비해 놓았던 오르마즈가 그 하나만은 제대로 남기지 못한 것이 말이 될 것 같았다.
“그게 사실이면 이걸로 찢어죽어 싼 놈이네.”
케스난은 갈고리를 손에 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면 너희한테는 못 넘겨주겠다.”
황제의 잔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사제의 키가 그자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지난 며칠간의 고생은 싹 사라지는 듯했다. 그 수수께끼의 물건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지 감도 못 잡고 있던 판에 이들이 공짜로 힌트를 주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자신이 지난 몇십 년간 이들에게 접근한 가치로 충분했다.
행사장에서 배가 갈려 끔찍하게 죽은 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잔딕 두 개를 이미 구한 이상, 이제 사제의 키가 황제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퍼즐이었다. 그걸 구해 황제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열 배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소식을 듣고 황제가 얼마나 기뻐할지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음 같아선 할룩스로 바로 황제를 찾아 이 희소식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적의 손에 한동안 있었던 기계로 황제와 연락하는 데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아랫사람들, 그리고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을 아들 발렌틴에게 연락하려고 보니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3층 정도에 있는 듯했고 처음 와 본 낯선 곳이었다.
“이게 대체 어디지?”
케스난은 덜크덩거리는 낡은 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머리 위 하늘(?)은 별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고 탁하고 인공적인 공기가 주변을 맴돌았다. 맞은편 허름한 3층 패널조 건물과의 사이에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좁은 골목이 보였다. 골목 곳곳에는 비쩍 마른 꼬마들과 눈가에 증오와 불만이 가득한 여윈 어른들이 할 일 없이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누가 봐도 그리 좋은 분위기의 골목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이 따위 곳에 놔두고 가 버린 살름을 또 한 번 저주했다.
“북부로군,”
그는 쇠와 인공 필터, 흙냄새가 기묘하게 뒤섞인 공기만으로 일단 자신의 ‘고향’을 읽어냈다. 하지만 그 넓은 북부 어딘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분위기를 보니 혼자 몸으로 섣불리 나가는 것도 그리 현명치 못해 보였다. 교단 놈들은 일부러 자신을 이런 곳에 내버려 당황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던 것 같았다.
“내가 누구한테 제일 먼저 연락하는지 보시려고?”
케스난이 할룩스를 구석구석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뜯어서 내부에 손을 댄 흔적이 보였다. 순간, 이것을 켜고 싶은 맘이 싹 달아났다. 이 상황에서 누구에게 연락할지, 무슨 기능을 쓸지를 훤히 보고 있을 것이 뻔했다.
“날 물로 봤군.”
그는 도청장치가 된 할룩스를 꺼버렸다.
그때, 골목 한쪽에서 쭈글쭈글한 얼굴의 한 남자가 큼직한 등짐을 지고 골목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부인인지 동료인지 알 수 없지만 한 여자가 그보다 조금 작은 등짐을 진 채 두리번거리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임달.”
케스난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등짐을 진 두 남녀의 허리춤에는 하임달의 포터 노조를 뜻하는 ♂표시의 고리가 매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이쟈크가(家) 영지인 하임달 5번 행성의 어느 지하 광산 컴플렉스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네포프 그 사내가 숨어있을 만한 곳이긴 하네.”
케스난이 코웃음을 쳤다. 북부의 광산 컴플렉스, 그 중에서도 극심한 일교차로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외부 거주 자체가 불가능한 하임달의 광산 컴플렉스는 제국 내에서도 말 그대로 최악으로 꼽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몇 년을 살고 나간 사람 치고 심각한 병 한두 개쯤 얻지 않는 자들이 드물다보니 정말로 너무나도 궁핍한 사람들, 수배당한 도망자들이나 혹은 악질범죄를 저지르고 노예가 된 죄수들로 채우지 않고서는 운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당연히 이곳에서는 서로의 신분을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고, 네포프가 아내 오르마즈의 죽음 이후 숨어 살 곳을 찾았다면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못 찾을만도 하네.”
케스난이 픽 웃었다. 범죄 집단과 신분 세탁, 폭력이 난무하는 이 무법지대에서 제아무리 교단이라도 그 먼 옛날 사라져버린 사람을 찾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 일에 이들이 북부길드를 맡은 ‘암흑가의 대모’ 케스난을 고른 건 이유만으로는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케스난은 어딘지 험악해 보이는 골목 분위기에 곤혹스러워하는 짐꾼들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어지간히 간이 크지 않은 한 건달들도 포터 노조 사람들은 잘 건드리지 않았지만 기근 2년차 이후로는 사정이 달랐다. 그리고 저 짐꾼이 지고 있는 짐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운이 없네.”
짐꾼들의 등짐 주둥이로 안에 가득 든 넓적한 피타빵과 과일―기근 이후 북부에서는 거의 볼 수 없어진―이 슬쩍 들여다보였다. 아마도 저 밑에 있는 굶주린 아이와 젊은이들의 극도로 예민해진 후각에는 이미 걸리고도 남았을 터였다. 고개를 내밀고 보니 골목 반대편 끝의 큰길가에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식당 하나가 보였다. 저곳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좁고 열악한 지하 광산 컴플렉스에서 큰길을 낸다는 건 사치였다. 그나마 큰길은 광물들을 나르는 광차―혹은 돈 많은 자들이 자가용 대신 타고 다니는 개조 갱차―들이 지나는 협궤를 빼면 사람이 두 발로 다니는 길은 이런 골목뿐이었다. 포터들도 항상 안 보이는 골목으로만 다니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그렇지만 치안군이나 용역들도 광물을 훔쳐가는 도둑을 잡으려 광차가 다니는 큰길에만 신경을 쓸 이런 골목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북부 대부분 지역처럼 하임달도 식량 배급제를 시작한 이후 웬만한 식당들은 문을 닫은 상태지만 돈 많은 사람들이 주로 드나드는 고급 식당들은 경비 용역을 따로 고용해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저 짐꾼은 ―자신은 드나들 엄두도 내지 못할― 식당에 빵을 가져가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할 판이었다.
골목을 지나야할지 말아야할지 잠시 눈짓을 주고받던 짐꾼들은 하는 수 없이 골목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들의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녀가 남자 짐꾼의 앞에 후다닥 뛰어들더니 다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이의 등장에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사이, 그보다 더 어려 보이는 또 다른 꼬마가 머뭇거리는 그의 등짐에 확 매달렸다. 그리고 또 다른 꼬마 셋이 뒤에 있는 여자 짐꾼의 등에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놈들!”
짐꾼이 단검을 빼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는 함부로 흉기를 못 휘두르는 것을 잘 아는 꼬마들은 인정사정없이 매달려 등짐을 흔들고 다리를 붙들며 늘어졌다. 결국 높은 짐을 진 남자 짐꾼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등짐에서 빵이 쏟아져 바닥을 구르자 주변에 있던 다른 아이들까지 벌떼처럼 달려들어 앞 다투어 주워담기 시작했다.
뒤이어 여자 짐꾼까지 쓰러지고 과일들이 길에 데굴데굴 구르자 골목은 순식간에 양옆의 집들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이 점령하면서 아비규환이 되었다.
집 앞에 쭈그려 앉은 비쩍 마른 어른들은 아이들이 넘어진 어른을 무자비하게 약탈하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짐꾼에게서 빵과 과일을 빼앗은 아이들이 각자의 집 안으로 후다닥 사라지자 그들도 아이들을 따라 집 안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골목에 남은 건 뒤통수를 아이들의 벽돌에 얻어맞아 신음하고 있는 두 명의 짐꾼들 뿐이었다.
“운이 없을 뿐이야.”
케스난이 무심하게 돌아섰다. 특별히 놀라거나 분개할 것도 없었다. 이 정도는 기근 이후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부의 컴플렉스 뒷골목에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곳처럼 치안이 나쁜 곳에서 경계를 덜 받고, 잡혀도 처벌이 약한 아이들을 앞세워 도둑질이나 약탈에 나서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래도 식량을 빼앗는 와중에 죽인 건 아니니 저 짐꾼들에게 아주 최악의 상황만도 아니었다.
밑바닥 상황이 이렇다보니 웬만한 규모의 방앗간이나 정미소, 공용 빵집 같은 곳들엔 이미 치안군들이 상주한지 오래였고, 식량 배급소에선 앞줄에 서려 아귀다툼을 하다가 몇 명이 압사했다는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곤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숲 사람들이 사라진 후 자취를 감췄던 식인(食人)이 몇몇 곳에서 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섬뜩한 말도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분노는 이 와중에도 식량을 손에 쥔 채 금수조치를 풀지 않고 있는 남부로 하나 둘 쏠리고 있었다.
망토를 뒤집어쓴 케스난은 일단 방을 나섰다. 짐꾼들이 털린 덕분에 골목이 잠시 조용해진 이 시간이 그가 빠져나갈 기회였다. 짐꾼들의 비명을 들은 용역들이 협궤가 있는 큰길가에서 뒤늦게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달려오는 용역들 옆을 지나 골목을 재빨리 가로질러 큰길가로 달려갔다. 그는 용역들이 지키는 큰길가의 고급 식당에 훌쩍 뛰어들며 망토를 휙 벗었다.
“어서 오십시오.”
누가 봐도 부자의 냄새를 확 풍기는 케스난의 화려한 차림새에 종업원들이 우르르 나와 인사를 하고 자리를 안내했다. 그는 평소처럼 도도한 자태로 종업원들을 따라가며 물었다.
“내 아랫놈들을 좀 불러야 하는데 할룩스가 고장이 나서 말이야, 여기 가게 걸 잠시 써도 되겠는가?”
“아, 물론입죠.”
그들은 전혀 의심 없이 식당의 할룩스를 내주었다.
그곳으로 코드를 넣으려던 케스난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참, 내 잠시 잊어버렸는데, 여기가 몇 번 컴플렉스더라?”
“아, 여기로 부르시면 됩니다. 110번 컴플렉스입니다.”
가게 명함을 받아 할룩스를 든 케스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수베르 시간으로 제국회의 둘째 날, 이곳은 북부 하임달 5번 행성의 110번 지하 컴플렉스였다. 이제 이곳에서 네포프 칼리만 찾아낸다면, 그는 황제를 구하고 정말로 자유의 몸이 될 터였다.
황자의 죽음이라는 비보에도 불구하고, 제국회의는 죽은 황자에 대한 추도의 의미에서 오늘자 회의가 주요 제후들과의 간단한 만찬으로 대치되고 일정이 하루씩 뒤로 늦춰졌을 뿐 예정대로 계속 개최된다고 공포되었다. 황제는 여느 날 아침처럼 가족들을 모아 함께 조찬을 가졌고, 심지어 등을 다친 엘룬도 부축을 받으며 가족 조찬에 함께 참석해 황실의 건재를 과시했다.
카렐 역시 사람들 앞에 나설 만큼의 여유는 없었지만 에스더는 황실의 건재함을 보여야 한다며 그의 등을 억지로 밖으로 떠밀었다.
반쯤 넋을 놓은 얼굴로 별궁의 집무실에 앉아있던 카렐은 오늘자 제국회의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자료를 꺼내들었지만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제국 대형 벌크선(船) 현황 - 극비자료] 라는 파일이 들려 있었다. 케스난이 준비하고 세데스가 마지막으로 손을 보아 준 이 자료는 제국회의에서 남부에 회심의 일격을 날릴 무기였다. 하지만 카렐은 파일을 열지 못한 채 몇 번이나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카렐의 손은 태우기 위해 한쪽에 내놓은 파일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는 서류 꾸러미 속에 있던 사진들을 뒤적거려 꺼냈다. 그곳엔 에스더가 임신했을 때부터 꼬박꼬박 모아 온 진단 자료들, 그리고 손가락만했을 때부터 뱃속 아기를 찍었던 사진들이 소중하게 파일링되어 있었다.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눈물을 삼키고 있던 카렐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얼른 파일을 덮고 눈가를 닦았다.
“장태자가 웬일이냐?”
카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맏이 카이가 한 손에는 큼직한 사과 바구니를, 나머지 한 손에는 뜬금없이 케스난의 아들 발렌틴의 손을 잡고 안에 들어오는 중이었다. 영안실에서 보았던 갓난아이의 모습 때문인지, 두 소년들의 모습에 갑자기 또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 같았다.
제국회의 직전, 길드마스터 케스난과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들은 세네피스가 엄마를 찾으며 종일 집에서 혼자 울고 있던 아이를 급히 데려온 터였다. 그리고 회의기간 동안 세네피스가 아이를 극진히―황자들에게 그리도 쌀쌀맞은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돌봐주고 있었다.
“네가 이 애를 어떻게 아냐?”
“아, 알던 것 아니에요, 이 앞에서 누구 기다리면서 어슬렁거리고 있더라고요. 어느 집 아이인지 정말 예쁜데요? 말하는 거 보니까 정말 똘똘해 보이고요.”
장태자가 자그만 꼬마의 고운 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발렌틴의 손에 들린 큼직한 사과에는 한 입 베어 먹은 자국이 나 있었다. 아이의 먹다 만 사과를 보는 카렐에게 카이가 한쪽이 빈 사과바구니를 가리키며 머쓱하게 웃었다.
“실은 폐하 드리려고 가져왔는데 얘가 너무 먹고 싶어 하는 눈치라 한 개 빼서 줬어요. 죄송해요. 화 내지 않으실 거죠?”
“화내긴. 고맙구나, 역시 맏아들뿐이야.”
지옥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던 카렐은 처음으로 웃음을 보일 수 있었다. 카이는 입맛도 페로를 닮았는지 사과를 어지간히 싫어했지만 딴에는 황제를 위로해 준다며 준비한 모양이었다.
“안 주고 애 울렸다면 정말 화냈을 거다.”
카렐은 카이와 발렌틴의 뺨에 한 번씩 입을 맞춰주었다. 발렌틴은 황제와 장태자에게 뽀얀 얼굴 가득 한 번 해사하게 웃어보이고는 사과를 정말 맛있게 또 한 입 깨물었다.
“정말 누구 닮았구나.”
카이에게서 사과바구니를 받아든 카렐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바구니를 뒤적거려 제일 단맛이 나는 것 몇 개를 골라냈다.
“이게 제일 맛있겠다. 이거 가져다가 먹어라.”
카렐은 직접 골라낸 달콤한 사과 몇 개를 소년 발렌틴의 주머니에 꾹꾹 넣어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맛있는 사과는 절대 양보하는 일이 없던’ 황제가 아이에게 사과를 내주는 모습에 카이가 놀랐는지 눈을 쫑긋거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발렌틴은 크고 까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카렐을 그렇게 무서워하며 벌벌 떨던 소년이었지만 이젠 한결 자연스러워진 모습이었다. 카렐은 괜히 이유도 없이 소년을 한 번 꼭 안아주었다.
“음?”
카렐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무실 출입문 부근에서 세네피스가 이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장태자 카이가 얼른 황태후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카렐이 헛기침을 하며 아이를 놓아주고는 조금은 사무적인 투로 물었다.
“그래, 네가 여기에 갑자기 무슨 일로 왔느냐, 발렌틴 오나시스?”
“아, 그건요 엄마가…….”
발렌틴이 고개를 돌리고 세네피스의 눈치를 보았다. 소년을 대신해 세네피스가 비로소 나섰다.
“조금 전에 마스터 케스난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동안 무척 힘든 처지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황상께 급히 전할 내용이 있다고 하더군요.”
발렌틴이 사과를 먹던 작은 손으로 할룩스를 불쑥 내밀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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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보니 행운의(?) 천사(1004)회입니다. ㅋㅋㅋㅋ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잊지 마시고요,
글만 읽고 가시는 분들 밉습니다~~ ( ̄∇ ̄)ブ~~★
그런데 노블레스 쪽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네요. 평점테러에 악플에 뭐 조회수도 그렇고.....거의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이번달 꼴랑 25000원 찍힌 거 보니 돈이 문제가 아니고 솔직히 자존심이 좀 많이 상하네요.ㅎㅎㅎ 둘을 함께 연재하는 게 애당초 과한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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