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005화 (1,000/1,132)

< -- 1005 회: 파트 13. 과거로의 길을 누가 열 것인가. -- >

.

.

.

수베르의 토로 기지가 테번의 새벽 난동으로 한바탕 들썩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시차로 늦은 밤에 접어든 남부 비엔의 슈발츠발트 남쪽 숲에서는 두 척의 배가 소리 없이 강을 거슬러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앞장서가는 바지선에는 20여명의 무장한 군인들과 망토로 몸을 감싼 사람들이 산처럼 수북이 쌓인 화물과 함께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대여섯 명 탐직한 작은 보트 한 척이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며칠 전, 주페를 감금하고 있던 북쪽 숲의 옛 탄광이 황제와 보안국의 기습을 받으면서 이곳에도 잠시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숲 전체에서 보면 그 일도 그저 ‘북쪽 숲에서의 작은 소동’ 정도였다. 그곳에서 이 남쪽 숲까지는 2,000스타디아(300km)가 넘는 먼 거리고, 황제가 관심을 둘 시설이나 인물이 잡혀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탄 바지선은 얕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 좁은 모래톱에 바싹 접근해갔다. 모래톱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수신호를 보내왔다. 뭍과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지자 20여명의 군인들은 각자 짐 하나씩을 짊어지고 무릎까지 오는 얕은 물에 그대로 뛰어내려 땅을 밟았다.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모래톱에서 기다리던 아프라스 야투 박사가 바지선에서 물로 그냥 내릴까 말까 머뭇거리고 있는 망토 차림의 건장한 사내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내려오라 재촉했다. 남자는 발판도 없이 내려가는 것이 영 불만인지 혼자 몇 마디 욕을 중얼거린 후에야 마지못해 물로 뛰어내려 바지와 망토자락을 물로 적셨다. 망토 후드를 벗고 은발을 드러낸 그 남자는 무심결에 랜턴을 켜려 했다.

“혹시 모르니 강변에서 함부로 불을 켜지는 마십시오. 마누엘 델루지 경.”

야투 박사의 경고에 마누엘은 마지못해 스코프로 바꿔 끼고는 달빛밖에 없는 깜깜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기척도 없는 야심한 숲의 나무들은 하나하나가 괴물처럼 보였다.

신경이 곤두선 마누엘은 물이 들어찬 신발을 벗어 털며 같은 배에 타고 온 또 한 명의 건장한 남자를 돌아보았다.

“빨리 내리십시오, 예르마크 경. 세탁비는 이네들이 준답니다.”

마누엘은 한 배를 타고 온 세닉 가 총사령관이고 부마인 예르마크 경을 재촉하며 괜한 성질을 드러냈다. 종장인 누나 이렌느가 제국회의로 자리를 비운 동안 영지인 루게를 지키고 있던 그는 비엔에 가서 마누엘을 따르라는 누이의 지시에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와 있었다.

“내리라고 하니 내리긴 내리는데.”

예르마크 경이 마지못해 바지선에서 뛰어내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며칠 전 아내 레곤 대공주와 자식들을 습격한 괴한들과 싸우느라 그의 몸도 성치 않았다. 그날 아내를 구하고 가슴과 손을 크게 다쳤던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와 있었다.

“대체 왜 온 건지 말은 해 줘야 하지 않겠소?”

“남부를 위한 큰 일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겁니다. 오직 경밖에 할 수 없는 일이고요.”

마누엘의 뜬구름 잡는 소리에 예르마크 경이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이, 군인들은 바지선에서 내린 짐을 대기하던 노새 등에 실었다.

그때, 바지선을 뒤따라온 작은 보트가 뭍에 가까워지자 군인들 둘이 서둘러 달려가 그곳에 발판을 걸어주었다.

‘어라? 이것들이?’

자존심이 상한 마누엘이 다시 확 끓어올랐다. 지금껏 이 일행에서 자신이 가징 윗사람이라고 믿고 있던 그로서는 이만저만 화가 나는 일이 아니었다. 보트에선 망토로 얼굴까지 푹 가린 큰 키의 사람 하나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내려서는 모습이 보였다. 야투 박사가 그 앞에 달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손까지 잡아주었다. 걸음걸이로 봐선 여자가 분명했다.

‘이것들이 사람 대놓고 놀리네?’

발끈해서 언성을 높이려던 마누엘의 입을 야투 박사의 다음 말이 딱 막아버렸다.

“어서 오십시오, 현신이시여.”

마누엘의 몸이 확 굳어버렸다. 수명개조 당대이고, 한때 코메트의 고위 장교로 마구스와 교단을 받들었던 만큼, 그는 저 말이 무얼 뜻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몸에 익은 움직임이 갑자기 되살아난 그는 하마터면 이 습한 바닥에 반사적으로 이마를 대고 엎드릴 뻔했다.

“오랜만이군, 마누엘,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망토 속에서 빛나는 금색과 파란색 오드아이를 본 마누엘은 허리가 꺾어져라 깊숙이 숙이고는 백금 팔찌를 낀 아트위야의 손등에 이마를 댔다. 그리고는 뒤에 있는 예르마크가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얼마만에 뵈옵는지 모르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아트위야 현신이시여.”

뒤에 우두커니 선 예르마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왜 왔는지, 이들이 누구이고 마누엘이 아는 척을 하는 저 미녀는 대체 누구인지 여전히 아는 바가 없었다. 마누엘에게서 부담 백배의 인사를 받은 아트위야는 뚱한 얼굴로 서 있는 예르마크도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저 친구가 수나와 이오타의 아들? ……호오, 아비를 닮아 정말 잘생겼네?”

아트위야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돌며 금색 눈이 반들거렸지만 예르마크는 저 놀라운 미녀의 기묘한 시선과 간드러진 목소리가 왠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는 아트위야의 노골적인 눈길을 무시하며 고개를 숲 쪽으로 돌려버렸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어떻게 아십니까?”

“아주 옛날부터. 네 아비는 나와 정말 오랫동안 함께 했었지.”

아버지와 함께 했었다는 아트위야의 간드러진 대답에 더 불쾌해진 예르마크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뻣뻣했다. 아트위야가 입가에 살짝 침을 바르며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누나하고 성격은 딴판이군.”

예르마크는 이번에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트위야의 말대로, 요아킴의 후계자이고 지금 종장인 이렌느는 세 남동생들과 외모는 닮았지만 성격은 딴판이었다. 가족과 의리를 중시하고 인간미 넘치는 형제들과는 달리 이렌느는 말 그대로 ‘전형적인 제후’였다.

그는 영지 루게를 남부에서도 가장 치안과 복지가 좋고 행복도가 높은 곳으로 만들어냈고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에도 능한 빼어난 정치가이지만 밝은 면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동생들이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자랄 때 다른 남부의 적장자들처럼 델루지 가에 인질로 머물며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고, 그들의 정치를 배워 돌아왔다.

그런 이렌느는 겉은 요아킴, 속은 테번이라는 다른 제후들의 말처럼 남편들에게 무서울 만큼 권위적인 아내였고, 필요하다면 음모와 배신도 서슴지 않았고 불만세력은 소리 없이 제거해 자신의 이미지에 흠이 되지 않도록 했다. 심지어 맏아들 요아킴이 낳은 ‘가문 구성원으로 가치가 없는’ 병약한 손자들도 아들 모르게 독약을 먹여 살해했을 만큼 잔혹한 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이번에 황제를 배신하려 든다 해도 전혀 이상할 건 없었다.

“마누엘 경, 다시 묻겠습니다. 이게 남부를 위한 게 정말 맞습니까? 가문의 군 사령관으로서 공식적인 질문이니 답변 주십시오.”

“가문의 군 사령관이라면 군인으로서 종장의 명령에 복종해야지 않겠는가?”

예르마크의 턱에 힘이 꽉 들어갔다. 누나가 마누엘을 따르라고 했으니 별 도리가 없었다.

“혹 나나 누님을 속인 것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요.”

예르마크 경은 뚱해진 얼굴을 망토로 가리고 일행의 군인들과 노새의 행렬을 따라 말없이 숲 속으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이 댓발은 튀어나와 있던 마누엘은 그새 아트위야가 오른 노새의 고삐를 직접 잡고 마부 역할까지 자처하고 있었다.

일행이 숲에 들어서고 몇 분 지나지 않아 풀숲 사이에 쓰러져 있는 오래된 이정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장서던 헤네티가 이정표를 뒤집자 [삼각루트 제2통제기지 건설현장]이라는 글씨가 덕지덕지 않은 붉은 녹 밑으로 희미하게 보였다.

“먼저 왔으면 길이라도 좀 닦아 놓지.”

마누엘이 무성한 풀숲을 헤치며 투덜거렸다. 주변은 나무와 풀숲으로 온통 뒤덮인 것 같지만 그 밑으로는 먼 옛날 길이 있었던 듯 평평한 흙바닥이 숲 안쪽을 향해 거의 같은 폭으로 쭉 뻗어있었다.

“옛 공사장 진입로입니다.”

“하긴, 400년이 넘게 지났으니.”

마누엘은 앞장서는 헤네티들을 따라 풀숲을 헤치고 계속 안쪽으로 들어갔다. 진입로 양쪽으로 먼 옛날 버려진 중장비의 잔해와 자재들, 쓰레기들에 군데군데 있어 길을 잃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저깁니다.”

야투 박사가 가리킨 곳에는 2, 3층 정도의 짓다 만 인공석조 건물이 보였다. 건물 한쪽은 덩굴이 온통 휘감고 있고 반대편엔 이끼도 잔뜩 앉아있었다. 건물 주변엔 며칠 전부터 도착해 있던 헤네티들과 엔지니어 몇이 천막을 쳐 놓고 늦은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마누엘 일행은 야투 박사를 따라 건물 안쪽까지 들어갔다. 이끼로 가득한 홀을 지나니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선 엔지니어들 몇이 장비와 씨름 중이었다. 장비들 중 일부는 완전히 새로 교체된 듯 보였지만 일부는 아직 오래된 것들 그대로였다. 무려 4백 년간 별다른 관리를 받지 못한 것 치고는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기가 삼각루트 통제소군.”

마누엘의 물음에 이곳 작업을 지휘하던 엔지니어가 기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 비엔과 하임달, 아켐 세 군데를 잇는 삼각형의 한쪽 꼭지점이죠. 중심엔 황제령 아케메니아가 있고요.”

“그러니까 총……몇 개지?”

“당시에 그 세 군세 사이를 잇고, 그리고 각각을 다시 아케메니아와 연결하는 총 6개의 워프루트를 만드는 초대형 공사였습니다. 그 6개 중 하임달과 연결되는 3개는 모두 정식 개통이 못 되었고, 비엔과 아켐을 연결하는 루트도 정치적인 이유로 폐쇄되었습니다. 결국 황제령과 비엔, 황제령과 아켐을 잇는 두 개만 지금 제국민들이 쓰고 있는 바로 그 루트가 되었고요.”

“그 까마득한 옛날 꺼가 지금 쓸 수 있는 거야?”

“물론 바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한 달 전부터 교체작업을 했습니다. 중요한 장비는 교체가 끝났고 나머지는 당장 필요한 것들이 아니라서 지금부터 손댈 예정입니다. 이젠 가지고 오신 팔찌만 넣으면 재 작동을 시작할 겁니다.”

“언제부터 이용할 수 있지?”

마누엘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그동안 제국민들이 사실상 갈 수 없었던 땅을 다시 밟는다는 묘한 흥분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워낙 오랫동안 안 썼다보니 워프루트의 시동을 걸어도 시간의 곡면이 완전히 왜곡되어 반대편까지 닿기까지 두세 달 이상은 걸립니다. 반대편 하임달의 통제기지 쪽에서 동시에 함께 한다면 절반은 앞당기겠지만 아시다시피 그곳에 접근이 불가능해서 이쪽에서만 다 하려다보니 시간이 좀 더 걸립니다.”

수나의 팔찌를 만지작거리는 마누엘의 입가에 스르르 미소가 번졌다.

“그땐 비엔에서 이 길을 뚫어서 직통되는 데가 어디라고?”

“수베르와 탈라스를 지나 하임달의 결전이 있었던 하임달 9번 행성 머리 위로 바로 도착합니다.”

“수베르로는 황제와 서부를 직통으로 치고, 탈라스로는 동부가 바로 사정권이네?”

기분이 좋아진 마누엘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남부가 난데없이 하임달에 전진기지를 차리고 더도 말고 딱 5만만 주둔시키면 다른 지역들은 완전히 공황상태가 되겠어.”

뒤편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예르마크가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마누엘 경,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마누엘이 뒤를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조용히 있어요, 이미 당신 누나하고 다른 남부제후들이 다 합의 본 내용이니까. 군인이 까라면 까는 거지 뭘 그리 잔말이 많소.”

예르마크가 주먹을 쥔 채 파르르 떨었다. 지난 제위 전쟁 당시에도 어쩔 수 없이 연합군 신분으로 참전해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던 그는 또다시 같은 운명에 내몰려 있었다. 하지만 마누엘의 말대로, 군인 신분으로 제후들의 정치적인 결정에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내내 조용히 있던 아트위야가 전광판에 보이는 하임달의 표지를 보며 쓰게 웃었다.

“하임달 9번 행성이라……. 대체 얼마나 지옥같은 곳이길래 그 많은 목숨들을 삼켰을지.”

아트위야의 오드아이 두 개가 번갈아 빛을 뿜었다.

하임달의 결전이 있었던 9번 행성은 교단 시절엔 교단에 의해, 교단의 멸망 후엔 ‘살인적인 흑색 모래폭풍으로 거주는 고사하고 상륙 자체가 불가능한 행성’으로 판정되어 그 누구도 발을 디딘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곳에 ‘무언가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은 끊임없이 돌았었다.

실제로 하임달의 결전이 있기 바로 몇 년 전에도 그곳에 멋대로 발을 들여놓았던 자칭 탐험가들이 있었지만 무서운 모래폭풍에 휘말려 일행 대부분이 죽고 한 명만이 구조대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렇지만 그나마도 구조 직후 지독한 재로 호흡기가 막혀 병원에도 도착해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런데 정작 하임달의 결전이 있기 전, 오르마즈의 군대가 머물던 동안은 놀랍게도 그 악명 높은 ‘검은 모래폭풍’이 전혀 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하임달의 결전이 벌어졌던 그 이상한 분지에만 폭풍이 불지 않았고 심지어 대기도, 기압이나 기류까지도 사람이 충분히 호흡할 수 있는 상태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당시 근위대들은 ‘오르마즈가 이젠 마법까지 부리는 모양’이라며 그곳의 땅을 디디는 것을 두려워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하임달의 결전이 끝나고 얼마 지난 후, 그곳은 다시 검은 모래폭풍이 휩쓸었고, 지금은 이전처럼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지옥에 주둔하는 소수의 운 없는 분견대가 있긴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하임달의 전장에서 ‘뭐 건질 것이라도 없을까 하는 생각에’ 출입 금지령에도 끝끝내 드나들려 하는 철없는 탐험가들을 붙잡아 돌려보내거나, 혹은 그들의 시체를 찾는 역할 정도일뿐 딱히 다른 임무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설사 환경이 나아졌다고 해도 방문하기에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곳은 현재 쓰이고 있는 하임달 워프루트의 출구와는 어마어마하게 멀리 위치해 있고, 소요 시간 기준으로 그린 일반적인 제국 지도상에는 아예 나올 수도 없는 황당한 위치에 박혀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공식 개척지’인 이쟈크 가의 하임달 5번 행성―사실 이곳도 워프를 나와서 거의 하루의 절반을 가야 하는 지독하게 외진 곳이지만―에서도 보통의 교통수단으로는 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둘 사이는 초고속셔틀로 꼬박 이틀 이상, 어지간한 화물선으로는 거의 4일을 달려가야 하는 끔찍한 거리였고, 재보급 시설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왕복 4일에서 8일을 달릴 수 있는 운송 수단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그렇지만 실제 셔틀이나 화물선은 지금껏 알려진 제국의 최장거리를 돌파하는 데 딱 맞춰 길어야 하루나 이틀 정도로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따로 개조를 하지 않는 한 ‘사실상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교단조차도 아직까지 하임달 9번 행성에 소수의 비밀 답사대 외에는 발도 들여놓아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다.

게다가 그곳에서 검은 재를 퍼 오겠다며 덩치 큰 수송선을 보내기라도 했다가는 스페이스에서 여지없이 황실군의 눈에 걸린다는 뜻이기도 했다.그러니 이곳에서 하임달 9번 행성의 ‘머리 위’로 바로 워프할 수 있다면 사실상 제국에서 그곳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확보하는 셈이었다.

“마누엘, 내 그곳에 자네 군대 주둔은 허락하네만 탑과 철성은 우리 것이라는 사실은 알겠지?”

마누엘은 그 조건이 살짝 불만인 듯 입가를 찡그렸다.

“하지만 군대가 제대로 주둔하려면 철성부터 움직여야 합니다. 게다가 돌아가신 형님 말씀이 그 탑은…….”

“그 친구는 코메트의 고용인에 불과했는데 무슨 소리? 그곳은 우리의 소유이고 철성은 우리가 움직인다. 너흰 어차피 다룰 줄도 몰라.”

“……알겠습니다. 약속한 대로 그곳을 넘겨드릴 테니 대신 우리 군대의 영구 주둔권만 주십시오.”

“그야 물론이지.”

아트위야는 비로소 만족한 얼굴로 메인 제어판에 다가가 죽 둘러보았다.

“이곳이냐?”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그 역시도 엔지니어이고 과학자다보니 그 속성을 바로 읽어낼 수 있었다. 제어판 양쪽 반대편의 끝에는 거울 모양의 센서가 하나씩 붙어있었다.

“여기로군.”

아트위야가 소매를 걷자 그의 가늘고 여린 손목에 채워져 있는 백금 팔찌가 반짝이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도 수나의 팔찌처럼 손등에 늘어진 작은 동전 모양의 칩이 달려있었다.

그때, 팔찌를 든 야투 박사가 느닷없이 예르마크 경의 앞에 바싹 다가갔다. 바로 수우가 트라카 교단에서 훔쳐내 이들에게 전해 준 수나의 팔찌였다.

“왼쪽 손 좀 내밀어 주십시오.”

야투 박사의 말은 공손했지만 어투는 사뭇 위협적이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예르마크 경은 다시 마누엘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돌아온 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매서운 눈길뿐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왼쪽 손목을 박사의 앞에 내밀었다.

“아파도 참으십시오.”

야투 박사는 아트위야의 것과 같은 모양에 혜성 문장이 새겨진 팔찌를 벌려 그의 손목에 찰칵 소리가 나도록 채웠다. 그리고는 손목 안쪽을 고정시키는 길쭉한 나사를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갑자기 푹 찔러 넣었다.

“으익!”

예르마크 경은 살을 찢는 고통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야투 박사를 한 대 후려칠 뻔했다.

“작동 되나?”

아트위야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예르마크의 손등에 늘어진 동전 모양 칩 위에 손바닥을 대고 그늘을 지게 해 유심히 살핀 야투 박사가 입가에 웃음을 품었다.

“예, 빛이 납니다. 수나 현신의 형광인자를 물려받았군요.”

“무슨 소리야?”

예르마크가 저려오는 손목을 꾹 참으며 짜증스레 물었다.

“다행이네, 이렌느 그 여자한테 테스트한다고 했으면 길길이 뛰었을 텐데.”

두 명의 헤네티들이 예르마크의 어깨를 양쪽에서 단단히 붙들고는 제어판의 센서 앞으로 밀고 갔다.

“별 것 아닙니다. 그냥 옆의 저분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하시면 됩니다.”

야투 박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지만 예르마크 경도 지금 무언가 잘못된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팔을 붙든 헤네티를 밀어내려 했지만 나름 제국에서 손꼽히는 무장인 그의 힘으로 X를 밀어내는 건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너무 험악하게 다루지 말게나. 저 아름다운 얼굴에 행여 흠이라도 나면 어쩌라고.”

아트위야가 싱글거리며 자신의 손등을 들어 센서에 가져갔다.

“시동 준비합니다.”

수석 엔지니어가 레버를 차례대로 올리며 양쪽에 선 두 사람, 아트위야와 예르마크를 돌아보았다. 예르마크는 여전히 X들에게 붙들린 채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모든 레버를 다 올린 엔지니어가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십시오.”

엔지니어의 눈짓을 받은 아트위야에 뒤이어 예르마크의 왼쪽 손목을 쥐고 씨름하던 헤네티도 그의 팔을 비틀어 손등을 들이댔다.

“이게 대체 뭐 하는 거냐고!”

예르마크가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었다. 동시에 [인증 완료] 표시가 나타나더니 파란 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잠시 긴장했던 수석 엔지니어의 표정에 미소가 감돌았다. 워프 루트의 재건작업 개시를 알리는 긴 부저음이 이 제어실을 울리며 예르마크의 비명을 덮어버렸다.

“시작합니다.”

정면의 큰 화면에 있는 큰 삼각형에서 오른쪽 변이 파랗게 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그 옆의 숫자가 10,000에서 9,999로 하나가 떨어졌다.

“성공입니다. 워프게이트 재오픈 프로세스 시작됐습니다. 저 숫자가 0에 도달하면 통과 가능해집니다.”

“드디어 과거로의 길을 열었도다.”

아트위야가 혼자 박수를 짝짝 쳤다.

“검은 재와 어마어마한 황금이 하임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군.”

삼각형 옆의 숫자가 제국 시대의 종말을 암시하듯 0을 향해 조금씩 수렴해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

.

.

추천이나 코멘트, 평점 주고 가시는 분들 복받습니다. ㅎㅎㅎㅎ

글만 읽고 가시는 분들 밉습니다~~ ( ̄∇ ̄)ブ~~★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출판본 종이책 주문게시판 http://www.vein.pe.kr

조아라 노블레스 :  http://t.co/ErnaaB0

전자책(eBook) 서비스 : 유페이퍼, 예스24,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리브로

0